제49대 민의원 의원 선거 (카게사가시)

Ginbae (토론 | 기여)님의 2023년 10월 18일 (수) 21:36 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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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제국 제49대 민의원 의원 선거

출구조사 발표 영상
2009년 10월 21일
제49대 총선
(노무현 총선)
2012년 5월 1일
제50대 총선
(여당 분열 총선)
투표율 80.28% ▲14.45%
선거 결과

사민 503석 (60.90%)
(28.45%) 235석 민정
정당 지역구 권역비례 총합 비율
357석 146석 503석 60.90%
154석 81석 235석 28.45%
26석 12석 38석 4.60%
14석 20석 34석 4.12%
2석 4석 6석 0.73%
3석 2석 5석 0.61%
2석 1석 3석 0.36%
1석 1석 2석 0.24%

개요

2009년 10원 21일 치루어진 민의원 의원 선거. 이명은 노무현 총선으로 불리며 여러의미로 역대급 선거로 불린다. 투표율은 80.28%를 기록하여 2000년대 이후 최대 투표율을 기록하였다. 그 정도로 전국민적 관심이 뜨거웠으며, 양당에 쏠린 관심으로 인해 아래 설명할 자유당 정도를 제외하면 모든 군소정당이 최저의 성적을 올린 선거이다.

배경

노무현 전 총리가 검찰의 수사를 버티지 못하고 5월 23일 본인의 고향인 진영 봉하마을에서 부엉이 바위에서 투신하여 서거하고 만다. 이후 노 전 총리는 병원으로 이송되었으나 끝내 숨졌다. 자살 직후 정다인 법무대신과 검찰은 공소권 없음으로 수사를 종결하겠다 발표했고, 법무대신 정다인 검찰총장이 사의를 표명하였다. 하지만 이명박 대통령은 상황이 급하니 사임은 이르다라며 사표를 반려하였다. 하지만 이는 최악의 수가 되고말았다.

자살 직후부터 법무부와 검찰에게 향한 화살은 점차 이명박 총리를 향해가고 있었다. 노무현 총리 사후 불타오르는 여론의 의식한 검찰이 박연차 게이트에 대해 비공개 진행으로 전환할것을 발표했고, 이것은 법무대신과 검찰총장의 사표가 반려된것에 이어 그저 여론을 덮기 위한 검찰과 내각의 전국민적인 기만으로 여겨졌다.

리얼미터의 조사에 따르면 안그래도 30%대의 낮은 지지율을 기록하던 이명박 총리에 대한 지지율은 13%로 반토막났으며, 10%대에 불과했던 사민당의 지지율은 30%대로 급상승했다. 여론조사 결과에서는 80% 가까운 국민들이 노무현 전 총리의 자살 원인이 이명박 총리의 정치보복 떄문이라고 생각한다 대답하였으며, 이명박 대통령이 사과해야 한다는 의견은 70%, 지금 당장 의회를 해산하거나 이명박 총리가 사퇴해야 한다는 의견은 60%에 달했다.

결국 이명박 총리가 같은달 27일 열린 대정부 질의에서 사민당에게 맹공을 당하고, 결국 대정부 질의 자리에서 국민의 의견에 승복한다고 하며 총리직에서 사임할것을 발표하였다. 이명박 총리가 사임하면서 신임총리에는 민정당 총재권한대행이던 박희태가 지명되었다. 하지만 박희태 총리에겐 더이상 이 난국을 해칠방법이 없었다. 특히 박희태 총리는 국민적인 지지가 굉장히 부족한 상황에서 소방수 느낌으로 총리가 되었기때문에 정통성에서도 부족한점이 많았다. 그렇기에 박희태는 총리 취임 직후인 6월 2일 사민당 의장이던 유시민과 영수회담을 열어 야당과 합의하에 7월 이내에 의회해산을 약속하였다.

하지만 7월을 넘어 8월 가까이가 되어서도 박희태 총리는 의회를 해산하지 않았다. 8월 1일 박희태 총리는 도어스테핑에서 기자들의 질문에 답하며 "정국이 안정될때까지 의회해산은 없다"라며 야당과의 합의안을 뒤집었고, 당연히 사민당을 비롯한 야당들은 강력히 반발했다. 이에 대해서는 여러가지 설이 있는데 가장 유력한것은 당장 의회해산을 하면 낙선이 유력시되는 의원들의 강력한 반대 때문이라는것이 정설이다.

당연히 야당은 물론이고 여당 내 소장파에서도 "이건 아니다"라는 목소리가 터져나왔고 결국 2달 가까이 질질 끈 정쟁 끝에서야 박희태 총리가 끝내 의회를 해산했다. 사민당은 6월 이후부터 꾸준히 의회해산을 요구하며 동시에 총선준비를 착실히 하였지만, 민정당은 당 내 갈등과 내분으로 전혀 총선에 대한 준비를 하지 못한 상태였다. 특히 노무현 총리와 관련된 이슈뿐만이 아니라 전세계를 덮친 대침체로 인하여 민정당과 내각의 지지율은 바닥을 달렸고, 사민당의 단독과반 확보가 확실해진 상황에서 가장 중요한것은 몇석을 확보하느냐가 되었다.

민정당은 박정희 전 총리의 딸인 박근혜 의원을 비대위원장으로 내세웠고, 동시에 선대위원장에 목단남도를 지역구로 두고있는 마경국을 지명하여 역전을 노렸지만 효과는 없었다. 오히려 사민당의 유시민 의장을 필두로한 친노세력의 공세에 맥없이 당하면서 지지율은 오히려 떨어졌다. 사회민주당은 노무현 전 총리의 명예회복과 경제회복이라는 양회복론을 필두로 하면서 높은 지지율을 유지했고, 반면 민정당은 박근혜 비대위원장이 각종 논란에 대처하는데 실패하면서 개헌저지선 확보조차 의문스러운 상황이되었다.

한편 군소정당들의 발에도 불이 떨어졌다. 민정당보다 강력하게 노무현 전 총리를 참여내각 시기부터 사망 직전까지 공격하였던 공산당, 안민당은 지지율이 폭락하였고 본래부터 지지층이 통일교 신자가 전부였던 가정당 정도가 폭락만은 막았다. 반면 자유당은 참여정부의 정책들 대부분에 찬성하고 노무현 총리가 구속될 위기에 몰리자 사민당 못지않게 이를 막아냈었던것이 발굴되면서 지지율이 상승하였다. 일각에서는 자유당이 약 40년만에 한화국민당을 제치고 제3당의 자리에 안착할수도 있을것이라는 주장도 나왔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