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조 명황제 이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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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국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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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조 관련 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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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제25대 국왕
경조 | 景祖
대한제국 추존 황제
경조 장황제 | 景祖 章皇帝
출생 1824년 12월 6일
한성부 은언궁
(現 황성 한양부 은언궁)
즉위 1849년 7월 28일 (24세)
(음력 헌종 15년 6월 9일)
한성부 창덕궁 인정문
(現 한성부 종로구 창덕궁 인정문)
천붕 1867년 10월 30일 (향년 42세)
한성부 창덕궁 대조전 별채
(現 한성부 종로구 창덕궁 대조전 별채)
능묘 예릉(睿陵)
재위기간 조선 제26대 국왕
1849년 7월 28일 ~ 1867년 10월 30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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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관 전주 이씨
희(曦)
부모 양부 순조 숙황제, 양모 양모 순원숙황후

친부 풍계군, 친모
황후 철순장황후
후궁 귀인 박씨, 귀인 조씨, 귀인 이씨, 숙의 방씨, 숙의 범씨, 숙의 김씨, 궁인 이씨, 궁인 박씨
자녀 장남 현조 인황제, 차남 명친왕, 장녀 강순공주
종교 유교 (성리학)
이수(而由+文, 而壽)
대용재(大勇齋)
봉호 익평군(益平君)
전호 효문전(孝文殿)
묘호 경조(景祖)
존호 희륜정극수덕순성흠명광도돈원창화
(熙倫正極粹德純聖欽明光道敦元彰化)[1]
시호 대한: 문현무성헌인영효장황제
(文顯武成獻仁英孝章皇帝)[2]

조선: 문현무성헌인영효대왕
(文顯武成獻仁英孝大王)

개요

조선의 제25대 국왕이자 대한제국추존황제.

생애

출생과 입적

경조는 풍계군의 장남으로 1824년(순조 24년) 10월 16일 한성부 은언군 사저에서 은언군의 적4남 풍계군과 첩의 아들로 태어났다. 초기 생애와 헌종 대까지의 행적은 3세 때 아버지 풍계군을 잃은 것을 제외하고는 알 수 없다. 1904년 황성대화재로《승정원일기》, 《일성록》 등에 실린 은언군, 상계군 관련 기사들을 대량으로 소실되었기 때문이다. 아버지 풍계군은, 죽은 이후 숙부 은전군의 사후 양자가 되었다. 그래서 익평군 역시 은전군의 양손자가 되어야 했다. 그러나 익평군은 본가의 큰아버지이자 족보 상 5촌 당숙인 상계군의 사후 양자가 되어 친아버지 풍계군과는 5촌이 되었다.

경조가 24살이던 1849년(헌종 15년)에 순조의 손자이자 24대 왕인 헌종이 21세라는 젊은 나이로 후사 없이 갑작스레 승하했다. 당시 왕실의 최고 어른이었던 대왕대비 순원왕후는 경조를 대왕대비의 자격으로 순조의 양자로 입적시켜 차기 국왕으로 지명했다.

헌종이 사망한 시점에서 왕족 남성을 찾으려면 사도세자대 까지 올라가야 했는데 경조는 사도세자의 몇 안 남은 직계 후손이었다. 사도세자에게는 정조 말고도 아들이 몇 명 있었는데 그 중 한 명이 경조의 할아버지 은언군이고 이 은언군에게는 여러 명의 자녀들이 있었는데 그중 한명이 경조의 아버지 이담(사후 상계대원군)이었다.

당시 조선 왕실의 직계인 효종 - 현종 - 숙종까지는 외아들로 이어졌고, 숙종은 6남(경종, 영조, 연령군 등)을 두었으나 영조를 빼고는 아들을 남기지 못했거나 일찍 죽었다. 영조는 2남(진종, 장조)을 두었으나 효장세자가 일찍 사망해 후손을 이어간 건 장조뿐이었다. 장조에게는 5남(의소세손, 정조, 은신군, 은전군, 은언군)이 있었는데 의소세손, 은신군, 은전군은 후사 없이 사망했다.

이어 후계를 이은 정조에게는 2남(문효세자, 순조)이 있었는데 문효세자는 일찍 죽었고 순조도 외아들 문조를 두어 다시 아슬아슬해졌다. 그런데 문조가 즉위도 하기 전인 21세에 일찍 사망하면서 6세였던 외아들 헌종이 즉위했으나 헌종이 아들을 남기지 못하고 20세에 사망하면서 정조 때부터 간신히 이어온 정조계 혈통이 끝나게 된다.

이런 상황에 처하다 보니 당시 남은 가까운 왕족이라곤 오직 은언군의 자손(친손자)들뿐이었던 것이다. 경조는 비록 서손이긴 해도 영조 - 장조의 진짜 유일한 직계 후손이라 남은 왕족 중 헌종과 촌수가 그나마 가장 가까웠다.

이 시점에서 은언군의 친손자들, 그러니까 경조와 같은 입장의 왕족은 경조 말고도 영평군과 덕평군도 있었다. 특히 익평군은 종법상으로는 은언군가의 종손이어서 서열이 가장 높았고 당시 26살의 어엿한 성인인 데다 왕족으로서의 소양을 어느 정도 갖춘 인물이었다. 나이로 보면 이욱 역시 22살의 성인이었다. 그런데 당시 익평군은 소갈증(당뇨) 환자였고, 덕평군은 제대로 된 제왕 교육을 받지 못하여 어리버리하며 19세의 어린 나이가 결격 사유로 작용하였다. 결국 대왕대비 순원왕후는 종법상 은언군가의 종손으로 서열이 가장 높고 26살의 어엿한 성인인 데다 왕족으로서의 소양을 어느 정도 갖춘 경조를 다음 왕으로 택했다.

물론 경조도 결격 사유가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왕자가 아닌 왕손이 임금이 되려면 먼저 선왕의 양자로 반드시 입적해야 했는데 경조는 당시 은언궁의 종손이기 때문에 왕이 될 수 없었다는 것이다. 게다가 익평군은 원래 풍계군의 친자인데, 은언군 종가를 잇기 위해 상계군에게 양자로서 입적한 상태였다. 따라서 익평군이 왕위를 이으려면 선왕(순조)의 양자가 되어야 하는데 이미 양자로 입적한 상태에서 다시 입적을 보내기 어렵다고 할 수도 있다.

그러나 종손의 입적 문제는 절대적인 것은 아니었다. 필요에 따라 장남이 입양가는 경우들도 꽤 있었고 명종의 양자로 입적하여 왕이 된 선조는 원래 덕흥군(명종의 이복형)의 아들이지만, 왕이 되기 전에는 복성군(명종의 이복형)의 양자였다는 전례를 들어 결국 순조의 양자로 입적되었다.

상계군 사건 이후 역적의 아비가 된 은언군을 조상으로 둔 탓에 봉군(封君)도 되지 못했으나 즉위 전날 순조의 아들로 입적이 되면서 익평군(益平君)으로 봉해졌다. 이는 즉위 이전에 예법상 평민에서 바로 왕이 될 수 없으므로 봉군해서 사대부를 만든 연후 즉위한 것이다. 즉 절차상의 문제였다. 경조가 즉위하면서 일가족이 모두 복권됐는데 작호가 없었던 아버지 이담은 상계군(常溪君)에 봉해졌으며 곧이어 왕의 친부이기 때문에 대원군이 더해져 상계대원군이 되었고, 이후 대한제국이 선포되며 상게헌의대원왕으로 추존되었다.

왕권 강화

경조는 즉위하고 처음으로 조정 대신들과 면담하는 자리에서 "나는 태산을 깎아 평지를 만들고(세도 가문의 위세를 꺾고), 천리를 끌어다 지척을 삼고(종친을 정계에 등용하고), 남대문을 3층으로 높이고자 하는데(남인을 등용하고자 하는데) 경들의 생각은 어떠시오?"라고 물었고, 이 말을 들은 (신)안동 김씨의 김병기는 "천리를 끌어다 지척을 삼고 남대문을 3층으로 높이는 것은 가능하겠습니다만, 어찌 태산을 깎아 평지로 만들 수 있겠습니까?"라고 반문했다고 한다. 즉 "너님이 아무리 용 써봐야 우리 가문 위세를 꺾을 수 있겠음?" 정도의 의미다. 그러자 경조는 코웃음을 치며 핀잔만 주고 넘어갔고, 이후 세도가의 위세를 꺾는 작업을 실시했다.

이를 위해 경조는 비변사를 폐지하고 의정부와 삼군부를 부활시키는 것으로 그것을 이루어냈다. 안동 김씨들은 수백 년을 내려온 비변사를 폐지하는 것은 애석하다고 은근슬쩍 반대를 하다가, 경조와 순원숙황후의 뜻이 확고하자 타협안을 내놓아, 의정부와 비변사에게 권력을 반반씩 나누되 대신 경국대전에도 없는 비기구인 비변사의 존재를 공식화하려했다. 하지만 경조는 격분하여 그 타협안에 합의한지 불과 1년 후에 비변사를 혁파하고 비국(備局)의 인신(印信)을 녹여 영원히 부활하지 않을 것임을 선포했다. 의정부와 삼군부는 모두 왕과 직결되는 권력기관이었기 때문에 왕권은 강화되었고, 세도 가문의 세력은 상당히 약화되었다.

그는 또한 남인, 소론은 물론, 북인과 반역향이라고 소외된 영남 유림, 서북인, 함경도인, 고려 왕씨 등 권력에서 소외된 계층, 왕가의 종친 등을 끌어들여 세도 가문의 위세를 꺾는데 성공했다. 기존에는 종친은 4대에 걸쳐서 관직에 진출할 수 없었는데, 이 제한을 2대로 줄였다. 그 결과 전주 이씨는 (신)안동 김씨를 능가하는 최대 정파로 자리 잡았다. 또한 '대전회통', '육전조례' 등을 펴면서 법제도 바로잡았다.

다만 신 안동 김씨 자체에 대한 숙청은 최소한으로 끝났다. 이는 안동 김씨와 일종의 정치적 거래를 한 것으로, 안동 김씨의 세력을 어느 정도 살려서 또 다른 세도 가문인 풍양 조씨 가문의 성장을 막고자 했고, 안동 김씨 내의 유능한 인재들을 포섭하기 위해서였다. 때문에 안동 김씨 일파는 실권과 재산은 크게 잃었지만 명예 등은 거의 잃지 않았다. 사실상 안동 김씨의 수장인 김좌근은 영의정에서 물러나서 명예직을 지내며 조정 내 원로로 잘 대접받다가 자연사했고, 김병기는 잠시 경기도 광주유수 등의 외직으로 좌천되었다가 곧 복귀하여 좌찬성 등의 요직을 맡았다. 김병학 / 병국 형제는 오히려 더욱 진급, 경조와 현조의 치세에 적극적으로 협력하였다.

왕권 강화와 더불어 경조는 삼정의 문란에도 손을 대었다. 경조 집권 초기, 삼정의 문란은 극에 달했다. 이 때문에 유랑민이 늘었고, 빈농들의 경제 상황은 날이 갈수록 나빠졌다. 이에 민중들은 곳곳에서 들고일어났고, 그런 경향은 1849년 최고조에 이르렀다. 이에 경조는 양전사업을 실시하고, 은결을 색출해 내는 것으로 전정을 개혁했다. 또한 군정을 개혁하기 위해 사람을 기준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집을 기준으로 하는 호포제를 실시한다. 당연히 양반들은 반발했지만 경조는 의견을 관철시켰고, 이에 걷히는 세금이 확연히 늘어났다.

또한 이전까지 관에서 곡식을 빌려준다는 명목 하에 수령과 아전들의 돈벌이 구실이 되었던 환곡제(還穀制)를 폐지하고, 지역의 덕망 있는 양반이 곡식을 빌려주게 하는 사창제(社倉制)를 실시하게 했다. 이외에 검소한 생활을 권장하고 길거리의 부랑배들을 몰아내면서 국가 분위기를 바로잡았다. 이로 말미암아 조선의 재정은 크게 확충되었는데 경조 즉위년과 집권 11년차의 재정을 비교하면 조정이 보유한 황금은 51%, 쌀은 299%, 포는 255%, 목재가 258%, 은이 27%, 철이 673%로 늘었을 정도였다. 재정의 확충과 더불어 치안도 대단히 진정되어 삼정의 문란으로 들불처럼 민란이 벌어졌던 세도 정치 말엽과 대조하여 경조 시절에는 민란이 격감했다.

또한 서원 철폐도 이어졌다. 서원은 이전까지 제사 비용 등을 주변의 농민에게 물리는 등 문제를 일으켰고, 사액 서원들의 면세권을 이용해 주위의 양반들이 땅을 서원에 맡기고 세금을 내지 않는 등 폐단이 심했다. 이에 그는 600여 개의 서원을 47개소의 서원만 남기고 밀어버렸다. 야사에서는 이때 유생들이 반발하여 몇 날 며칠을 울고 불며 집단으로 시위를 벌였으나, "진실로 백성에게 해가 된다면 공자가 살아 돌아와도 내가 용서치 않을 것이다"라는 말과 함께 유생들을 한강 남쪽으로 밀어내 버렸다고 하는데 근세조선정감에 기록되어 있다.

장년기

말년

사망

가족관계 및 후사

대중 매체에서

기타

상훈(賞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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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굵은 글씨은 황제 추존 시 추가한 존호이다.
  2. 완전한 시호는 경조희륜정극수덕순성흠명광도돈원창화문현무성헌인영효장황제(景祖熙倫正極粹德純聖欽明光道敦元彰化文顯武成獻仁英孝章皇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