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란 (아름다운 나라)

Curio (토론 | 기여)님의 2022년 8월 22일 (월) 14:41 판 (→모사데크 내각)
쿠리오 긴배 도프 공산1968
벨지엄 공차 DK Dentrix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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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다운 나라 세계관의 국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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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란 제국
كشور شاهنشاهی ایران
Keshvar-e Shâhanshâhi-ye Irân
국기 국장
مرا داد فرمود و خود داور است
그가 나를 심판할 제, 나에게 정의를 행하라 하시리라
상징
국가 황례포
국화
수련[1]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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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25년 건국
  • 1935년 이란으로 개칭
  • 1963년 1차 백색혁명
  • 1979년 SATO 가입
  • 1986년 2차 백색혁명
  • 2006년 OECD 가입
지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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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도
테헤란
최대 도시
테헤란
면적
1,648,195㎢
접경국
아제르바이잔, 아르메니아, 튀르키예, 이라크, 쿠웨이트, 파키스탄, 아프가니스탄, 투르크메니스탄
인문환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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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구
총 인구
7,256만 명
밀도
44명/km2
인종
페르시아인 61%
아제르바이잔인 16%
쿠르드인 10%
기타 13%
공용어
페르시아어
지역어
아제르바이잔어, 쿠르드어
종교
국교
없음 (정교분리)
분포
시아파 이슬람교 56%, 조로아스터교 7%, 수니파 이슬람교 4%, 기독교 2%, 기타 9%, 무종교 22%
군대
이란군
하위 행정구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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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개
429개
정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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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 체제
입헌군주제, 의원내각제, 다당제, 단원제, 단일 국가, 성문법주의(대륙법계), 지방자치제
민주주의 지수
6.65점(결함있는 민주주의)2022년
국가 원수 (황제 (샤한샤))
팔라비 3세
정부
요인
수상
하산 로하니
국회의장
?
대법원장
?
여당
틀:이란 인민당, 틀:국민노동당, 틀:아제르 민족당, 틀:이란 진보동맹, 틀:이란 녹색당, 틀:쿠르드 자치당, 틀:아랍 명단
원내 야당
틀:입헌당, 틀:무슬림동맹, 틀:사회당, 틀:자유운동, 틀:바트당
경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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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체제
자본주의적 시장경제
GDP
(명목)
전체 GDP
$2조 310억
1인당 GDP
$28,000
화폐
공식 화폐
리알 (Rial)
ISO 4217
IRN
단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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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대
UTC +3
도량형
SI 단위
외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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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수교현황
 1962년
UN 가입
1945년
무비자 입국
한국인→이란: 90일
이란인→한국: 90일
주한대사관
서울수도시 노원구
ccTLD
.ir
국가 코드
IRN, IR
전화 코드
'
위치

작업 예정

개요

서아시아에 위치한 입헌군주국으로, 서아시아 최대의 강국이다.

역사

팔라비 1세 치하

페르시아 쿠데타와 건국

페르시아(카자르 왕조)는 1910년대 러시아 적백내전과 소련과 영국의 개입 등으로 인해 큰 타격을 입었다. 이로 인해 페르시아는 정치적 혼란에 빠졌고 카자르 왕조의 권위는 바닥을 뚫고 지하까지 추락했다. 이러한 혼란 상황에서 코자크 여단의 여단장이었던 레자 칸이 1921년 영국의 지원을 받아 쿠데타를 일으켜 왕과 수상을 허수아비로 만들고 스스로는 전쟁상의 자리에 올랐다. 이후 레자 칸은 1923년까지 페르시아 전역을 돌며 반란을 성공적으로 진압하였다.

1923년, 수도로 돌아온 레자 칸은 수상에 임명되었고 국왕은 해외로 망명해야 했다. 레자 칸은 이웃 국가인 터키(튀르키예)에서 무스타파 케말이 했던 것처럼 페르시아를 공화국으로 만드려고 했으나 내부의 반발로 인해 왕국이 되었다. 1925년, 제헌의회가 레자 칸을 샤로 옹립하여 카자르 왕조가 멸망하고 팔라비 왕조가 수립됐다.

개혁 정책

1930년대 테헤란

팔라비 1세로 즉위한 레자 칸에 의해 급진적인 개혁이 시행되었다.

현대적인 교육 시스템이 도입되었고 테헤란에는 이란 최초의 대학인 테헤란 대학교가 설립되었다. 또한 많은 이란 학생이 정부의 지원으로 적절한 수준의 교육을 받을 수 있었다. 팔라비 1세의 16년 치세 동안 공장의 수는 17배, 고속도로의 길이는 7배가 늘어났으며 이란 횡단 철도가 건설되었다. 또한 결혼법을 개정하고 대부분의 공공장소에서 여성 출입을 막는 것이 법으로 금지되는 등 여성의 권리가 제도적으로 보장됐으며 차도르 착용이 금지되었다.

강력한 세속화 정책 역시 시행되었다. 모스크에서 기도할 때 바닥에 앉는 것이 금지되었고[2] 종교적으로 여성들에게 가해지던 억압이 대부분 철폐되었다.[3]

정치 시스템

경제적, 사회적 그리고 과학기술적 발전과는 별개로 정치에서는 큰 혁신이 발생하지 않았다.

1905년 이래로 이란에서는 국회의원 선거가 정착되었으나 그리 민주적이지는 못했다. 내무부가 의원 후보의 명단을 작성하였으며 이 명단은 선거관리위원회에 전달되어 명단에 이름을 올린 이들이 주로 의원에 당선되었다. 고로 의회는 황제의 허수아비 신세를 벗어나지 못했다.

1935년에는 국호가 페르시아에서 이란으로 변경되었다.

2차 세계대전

근위대를 사열하는 팔라비 1세

이란은 2차 세계대전에서 추축국에 가입하지는 않았으나 연합국에도 가입하지 않았다. 이에 연합국은 이란이 은밀히 추축국에 동조하고 있을 것이라는 의심을 품었고, 1941년 8월, 영국군과 소련군이 각각 남쪽과 북쪽에서부터 선전포고도 없이 이란을 침공했다. 이란군은 무능하게 붕괴하였다. 이란군 장교들은 비밀리에 영국군에 협조하였으며 심지어는 이란군 총사령관 아흐마드 나크자반은 영국에 항복하려 하기도 했다.

가망이 없다고 판단한 팔라비 1세는 군에 전투 중지 명령을 내리고 연합국과의 협상에 돌입했다. 당시 이란에는 상당한 수의 독일인들이 있었는데[4], 연합국은 이란 정부에 이들을 영국과 소련에 인계할 것을 요구했다. 그러나 소련에게 인계되는 것은 곳 죽음을 의미한다고 본 독일인들은 이란 정부에 도움을 청했고 샤의 명령으로 이들은 대부분 무사히 이란을 탈출했다. 이에 소련은 반발하였고 영국은 그의 아들 모하마드 레자 팔라비의 황위 계승 지원을 조건으로 팔라비 1세에게 퇴위를 요구하였다. 이 요구를 받아들인 팔라비 1세는 퇴위하였고 영국과 소련이 이란을 점령하였다.

팔라비 2세 치하

연합군 점령하 이란

1941년 팔라비 2세가 이란의 새 샤한샤로 즉위하였으나 영국과 소련이 점령하고 있었기에 실질적으로는 큰 힘을 발휘하지 못했고 연합국은 이란을 보급품 운송의 주요 경로로 활용하였다. 1943년, 연합국은 1946년까지 이란에서 철수하기로 합의하였고 1945년 종전과 함께 영국군은 이란에서 철수하였다. 하지만 소련군은 철수를 거부하였고 이란의 서북부에 2개의 친소 괴뢰 정부를 수립하였다. 그러자 미국, 영국, 프랑스 등이 소련에 철군을 요구하였고 소련은 등 떠밀려 철군을 하게 되었다. 친소 정부는 붕괴했고 이란 서북부는 다시 중앙정부의 통치를 받게 되었다.

모사데크 내각

모사데크 내각(1951~1953). 오른쪽에서 넷째가 모사데크다.

1951년, 중도좌파 세속주의 성향의 모하메드 모사데크가 수상에 취임하였다. 모사데크는 취임 직후부터 급진적인 개혁정책을 펼쳤다.

모사데크는 실업보상법과 토지개혁법 등을 통과시켜 복지를 강화하는 동시에 샤의 권한이었던 전쟁상과 이란군 총사령관의 임명권을 총리에게 옮기려 하는 등 샤의 권력을 약화시켰다. 또한 영국의 소유이던 영국-이란 석유회사의 유전들을 국유화했다. 원래는 영국-이란 석유회사와 이란 정부 간의 석유 양허는 1993년 만료될 예정이었지만 모사데크는 이를 취소하고 영국-이란 석유회사의 모든 자산을 국가에 귀속시켰다. 모사데크는 1951년 6월 21일의 연설에서 이란을 "이란에 있는 모든 석유의 정당한 소유자"라고 주장하며 그의 정책을 정당화했다.

우리의 외국과의 오랜 협상은 (...) 지금까지 아무 성과도 없었다. 석유 세입으로 우리는 예산 전액을 충당할 수 있고 우리 국민의 빈곤, 질병, 낙후와 싸울 수 있다. 또 하나의 중요한 고려사항은 영국 기업의 영향력을 제거함으로써 부패와 음모를 척결하고 (...) 경제적, 정치적 독립을 달성하리라는 것이다.
모하메드 모사데크

하지만 모사데크가 추진한 일련의 정책은 국내외에서 수많은 적을 만들었다. 국내에서는 지주들과 기업가, 공장주들의 복지정책에 반발했고 팔라비 2세는 모사데크가 자신의 권력을 제한하려 한 것을 괘씸히 여겼다. 이슬람 성직자들은 모사데크의 세속화 정책에 분노했고 또한 영국은 이란 정부가 자국의 주요 석유회사를 통으로 국유화한 것에 대해 이란 정부에 크게 항의했다.

영국의 압박이 지속되자 모사데크 내각은, 한 때 이란과 크게 분쟁했었던 소련에 접근했다. 소련의 힘을 빌려 영국을 견제하고자 했던 것이다. 하지만 이런 행위는 소련의 라이벌 미국의 심기를 건드리고 말았다.

1차 백색혁명

외교

민족주의

내부의 적

팔라비 3세 치하

반황정 쿠데타

2차 백색혁명

탈냉전과 신냉전

정치

샤한샤와 황가

의회

경제

사회

종교

문화

교육

외교

군사

여담

  • 쿠리오의 첫 이브위키 오리지널 문서이다.

각주

  1. 출처
  2. 대신 의자를 사용토록 했다.
  3. 다만 일련의 세속화 정책은 이슬람 성직자들의 큰 반발을 불러왔다.
  4. 독일 외교공관 직원들과 그 가족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