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국 역대 국왕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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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요
대한국 (헤르메스)의 역사를 서술한 문서
대한국의 역사는 조선 후기의 세도정치가 문조(효명세자) 대에 결정적으로 붕괴하고, 이후 의종(철종의 이복형이자 사도세자의 증손자), 철종 대를 거치며 왕실 중심의 개혁 체제가 수립되는 과정으로 요약된다. 이 세계관에서 대한국의 형성은 단순한 국호 변경이나 근대화의 결과가 아니라, 순조 말부터 이어진 왕권 강화, 외척 숙청, 붕당 질서의 소멸, 지방 행정 개혁이 장기적으로 축적된 결과물로 이해된다.
특히 문조의 즉위와 김좌근의 난, 의종의 삼정 개혁, 철종의 개혁 완성과 같은 일련의 사건은 기존 조선 후기 정치 구조를 근본적으로 뒤흔들었으며, 훗날 대한국이 성립할 수 있는 정치적 기반이 되었다.
배경
효명세자의 급사가 없다
| 세자가 환후가 있었다. 여러 신하가 모두 놀라 문안을 청하니, 상이 근심하여 밤낮으로 의원을 들게 하였다.
며칠 지나 세자의 병세가 점차 나아지니, 상이 크게 기뻐하며 이르기를, “세자는 나라의 근본이요 종사의 장래이다. 하늘이 아직 우리 사직을 버리지 아니하였으니, 경들은 마땅히 마음을 합하여 보필하라.” 하였다. 사신은 논한다. 세자가 일찍부터 총명하고 기국이 넓어, 서책을 강론함에 있어 옛일에만 머물지 아니하고 사방의 형세와 백성의 생업에까지 뜻을 두었다. 이때 병환이 깊었다가 다시 나았으니, 조야에서 모두 종사의 다행으로 여겼다.《순조실록》 |
효명세자가 생존했다는 점은 이 세계관 전체의 가장 중요한 분기점이다. 실제 역사에서 효명세자의 급사는 순조 말 정국을 다시 외척 중심으로 기울게 한 결정적 원인이 되었으나, 이 세계관에서는 효명세자가 끝내 살아남아 순조 사후 즉위하였고, 그 결과 조선 후기 정치사는 크게 달라지게 된다. 특히 비록 안동 김씨와 외척 관계에 있으나, 세도가문과 국왕의 병존을 용납하지 않던 그의 정치 성향은 훗날 김좌근의 난과 세도정치 붕괴의 직접적인 원인이 되었다.
아편전쟁의 전말을 일찍이 알게 되다
효명세자는 1834년 순조의 승하 이후 즉위하여 문조가 되었고, 1839년 1차 아편전쟁의 전말을 접한 뒤, 청조차 바다 너머의 세력에게 제압당할 수 있다는 사실에 강한 위기감을 느끼게 되면서 재위 초부터 청과 서양 열강의 동향에 깊은 관심을 보였다. 다만 문조는 이를 곧장 전면적인 개혁으로 연결하지는 못했고, 대신 국방과 군정, 재정과 기물의 정비를 통해 왕권을 강화하고 국가 기강을 추스르는 방향으로 대응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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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이 승정원에 전교하기를, “청국은 대국이라 일컬어 오래도록 천하의 중심을 자처하였으나, 이제 멀리 바다 밖 오랑캐의 군선에 제압당하였다 하니, 이는 비록 남의 일이로되 또한 우리를 위한 경계이다. 나라를 지키는 도는 글만 숭상하고 형식만 지키는 데 있지 아니하며, 백성을 기르고 군정을 바로잡으며 기물을 익히는 데 있다. 비록 갑자기 옛 제도를 바꿀 수는 없으나, 마땅히 시무를 널리 구하여 후환에 대비케 하라.” 하였다. 이에 비변사와 호조·병조에 명하여 청국과 서양 각국의 형세를 상세히 탐문하게 하고, 바닷길과 화포, 군정의 폐단을 아울러 계문하게 하였다. 사신은 논한다. 상이 중국의 패함을 듣고 깊이 경계하여, 마침내 시무를 물어 기강을 정돈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조정의 의논이 오래도록 갈라졌으니, 혹은 예를 지켜 오랑캐를 물리쳐야 한다 하고, 혹은 기예를 배워 변방을 굳게 해야 한다 하였다. 이때 비로소 조정 안에 신구의 논의가 뚜렷해졌다.《문조실록》 |
이 시기 문조는 흔히 개혁군주로 평가되기보다는, 외세의 위협을 감지하고도 먼저 왕권과 군정의 정비를 우선시한 군주로 이해된다. 훗날 의종 대의 적극적 개혁이 가능해진 배경은 이미 문조 대에 외부 위협을 인식하고 내부 질서 정비의 필요성이 제기되었기 때문이다.
김좌근의 난으로 몰락한 신 안동 김씨
김조순은 뛰어난 인품으로 조정의 주목을 받았으나, 동시에 조선 후기 세도정치의 기반을 연 인물이기도 했다. 문조는 순원숙왕후의 장자로서 혈연상 안동 김씨와 밀접하였으며, 즉위 초기에는 이들을 완전히 배척하지도 않았다. 오히려 안동 김씨를 우대하는 모습도 보였고 왕실과 안동 김씨 일가 간 적절한 균형을 도모하며 왕실 중심의 정국을 만들고자 하였다. 다만 문조는 안동 김씨 일가가 주요 권력을 모두 나눠가지려는 모습을 경계했으며 건강이 좋지 않아 무기력했던 순조와 달리 왕권 강화의 욕도 강했기 때문에 외척을 국왕 아래로 확실히 두려 했다.
이 과정에서 김조순의 아들인 김좌근은 점차 조정의 실권을 장악하며 세도정치의 정점에 가까운 인물로 부상했다. 그는 영의정을 여러 차례 역임할 정도로 위세가 대단하였으나, 이 세계관에서는 헌종이 즉위하지 못하고 문조가 재위하고 있었기에 실제 역사처럼 안정적으로 외척 정권을 굳히지는 못했다. 문조는 김좌근의 권세를 경계하여, 영의정에 오르려는 시도를 제어하고 그를 우의정에 머물게 하는 등 노골적으로 견제하였다.
이에 분노한 김좌근은 1849년 마침내 반란을 일으켰다. 그 명분은 순조의 뜻에 따라 문조의 아들인 이환(헌종)이 즉위해야 했으나, 문조가 이를 가로채어 왕위를 찬탈하였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의 명분부터가 몹시 불안정하였다. 부왕인 문조가 엄연히 살아 재위하고 있었고, 이환 또한 아직 나이가 어렸으며 정치적 의지도 뚜렷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결과적으로 이 난은 “적통 회복”이 아니라 외척의 사욕으로 비쳐지게 되었다.
또한 순원숙왕후는 친정인 안동 김씨의 안위를 염려하기는 했으나, 김좌근과 이를 지지하는 세력의 역모를 지지하지 않았다. 대다수가 풍양 조씨와 반남 박씨, 그리고 벽파로 구성된 지방관료들 역시 중앙 정부의 장악을 시도하려는 김좌근의 독주를 견제하는 쪽에 섰다. 결국 반란은 전국적인 호응을 얻지 못한 채 빠르게 진압되었고, 김좌근은 대역죄로 처단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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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의정 김좌근이 스스로 병권과 정권을 믿고 사사로이 무리를 모아 불궤를 도모하였다. 그 무리가 몰래 말하기를, “선왕의 뜻은 본래 동궁을 높이고자 함에 있었는데, 조정이 이를 그르쳐 대통이 어지러워졌다.” 하며 허망한 말을 지어내어 인심을 선동하였다. 상이 듣고 크게 노하여 이르기를, “신하가 군부를 속이고 종사를 핑계하여 사욕을 이루려 하니, 이는 곧 역적이다. 비록 명분을 빌린다 하나, 실상은 나라를 어지럽히려 함일 뿐이다.” 하였다. 이에 훈련도감과 금위영에 명하여 도성의 문을 굳게 지키게 하고, 각도의 감사와 병사에게 유시를 내려 역당을 잡게 하였다. 풍양 조씨와 반남 박씨의 여러 신하가 모두 군령에 응하여 역당을 토벌하니, 김좌근의 무리가 미처 크게 일어나지 못하고 흩어졌다. 김좌근은 마침내 사로잡혔고, 국문 끝에 대역죄로 논하여 스스로 목숨을 보전하지 못하였다. 그 일가 가운데 역모에 가담한 자는 법에 따라 죄를 정하고, 연좌할 만한 자는 귀양보냈다. 다만 왕비의 친가와 갈린 여러 지파 중 죄가 없는 자는 함부로 확대하지 말라 명하였다. 사신은 논한다. 안동 김씨가 여러 대에 걸쳐 권세를 잡아 조정을 전횡하더니, 마침내 한 사람의 사심이 온 문벌의 재앙이 되었다. 김좌근이 명분을 빌렸으나, 천명이 사람에게 있지 아니하고 종사가 사사 집안의 물건이 아님을 알지 못하였다. 이 난이 평정된 뒤로 벌열의 기세가 크게 꺾였다.《문조실록》 |
이 난의 평정 이후 문조는 안동 김씨를 전면 멸문시키지는 않았다. 순원숙왕후의 존재와 왕실의 체면을 고려하여, 핵심 가담 세력은 처벌하되 비연루 지파는 유배, 좌천, 지방관 전출 등으로 정리하였다. 그 결과 안동 김씨는 중앙 정계의 패권을 상실했고, 풍양 조씨 역시 그 공백을 차지하지는 못하였다. 이때부터 조선 후기의 세도정치는 사실상 종언을 맞이하였으며, 기존 붕당 질서 또한 급속히 해체되기 시작했다.
양자로 입적한 회평군
왕세자 이환(문헌세자, 실제 역사에서는 헌종)이 급사하자, 왕실은 다시 후계 문제에 직면하였다. 이미 왕가의 남계가 사실상 씨가 말라버린 상황에서, 사도세자의 서장자 은언군의 손자이자 전계대원군의 적장남인 회평군이 문조의 양자로 입적되어 왕세자가 되었다. 그는 비록 방계 왕손이었으나, 종실 가운데 인망이 두텁고 기존 세도가문과 일정한 거리를 두고 있었기에 새로운 대통의 적임자로 여겨졌다.
훗날 철종이 되는 이원범의 전언에 따르면, 회평군은 온화한 성품과 훈훈한 외모를 지녔으며 강화도에서의 곤궁한 유배 생활 속에서도 가족을 위해 헌신하며 애민의식 또한 남달랐다고 한다. 이에 따라 즉위 후 시호 역시 백성을 옳고 이롭게 한다는 뜻의 ‘의(義)’를 받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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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자 환(奐)이 훙서하였다. 상이 오래도록 슬퍼하여 정사를 돌보지 못하였다. 대신과 예조가 함께 아뢰기를, “저하께서 먼저 서거하여 대통이 비게 되었으니, 종사를 위하여 마땅히 종친 가운데 덕망 있는 이를 택하여 계통을 잇게 하소서.” 하였다. 상이 한참 뒤에 이르기를, “은언군의 손자인 회평군은 비록 방계이나 사람됨이 어질고 삼가며, 일찍이 곤궁한 처지에 있으면서도 원망으로 뜻을 잃지 아니하였다. 종사를 잇게 함은 사사 은혜가 아니라 사직을 위한 일이다.” 하였다. 이에 예관으로 하여금 길일을 택하게 하고, 회평군을 왕자의 예로 입궐시켜 대통을 이을 양자로 삼게 하였다. 조정 신하 가운데 더러 의논이 있었으나, 상이 친히 전교하여 이를 그치게 하고 이르기를, “큰일은 정통을 세우는 데 있지, 사사로운 친소를 가리는 데 있지 아니하다.” 하였다. 사신은 논한다. 회평군은 종실의 먼 갈래에서 나왔으나, 어려서 곤궁함을 겪어 민간의 고달픔을 알았다. 그가 대통을 잇게 되자 사람들은 혹 놀라고 혹 기뻐하였다. 놀란 자는 예전의 관례를 들었고, 기뻐한 자는 새 임금이 백성의 고통을 알리라 여겼다.《문조실록》 |
회평군의 입적과 즉위는 정치적으로도 큰 의미가 있었다. 그는 사도세자의 자손이자 방계 왕손으로서, 기존 시파·벽파의 정통성 논리를 한 번 더 흔드는 존재였다. 이 때문에 이 세계관에서는 의종의 즉위를 계기로 붕당정치가 단순히 약화된 정도를 넘어, 정치 운영 원리로서 사실상 불가해진 것으로 해석한다.
또한 의종은 문조와 달리 보다 강한 개혁 의지를 보인 군주로 설정된다. 다만 그 개혁은 갑작스러운 신분제 해체나 전면적 사회혁명이라기보다, 세도가문이 몰락한 뒤 비교적 정돈된 정국을 배경으로 삼정 문란 시정, 지방 행정 정비, 실무형 관료층 확대를 추진한 방향에 가까웠다. 즉 의종은 기존 조선을 뒤엎은 군주라기보다, 문조가 정리한 정치 질서 위에서 실제 국가 운영을 바로잡으려 한 군주였다.
지방수령의 반발을 잠재우다
의종은 즉위 후 이원범(훗날 철종)과 삼정이정청을 설치하여 전정, 군정, 환곡의 폐단을 조사하고, 지방 장부를 다시 점검하게 하였다. 이 과정에서 일부 수령과 향리들은 장부를 숨기거나 군포 수를 속이는 등 저항하였으나, 문조 대 숙청 이후 지방 세력이 독자적으로 거대한 반대 세력을 이루기는 어려웠다. 또한 안동 김씨 잔존 세력과 풍양 조씨 모두 왕실의 감시 아래 있었기에, 의종의 개혁은 예상보다 큰 저항 없이 추진될 수 있었다.
| 상이 삼정의 폐단을 개혁하고자 하여 삼정이정청을 두고 각도에 영을 내리니, 여러 고을 수령 중에 이를 달가워하지 아니하는 자가 많았다.
혹은 장부를 숨기고, 혹은 군포의 수를 속이고, 혹은 환곡의 실수를 사실대로 보고하지 아니하였다. 상이 비국에 전교하기를, “백성의 고혈을 짜내어 관청의 창고를 채우고, 그 허실을 가려 조정의 명을 거역하니, 이는 법을 업신여기고 백성을 해치는 일이다. 수령이 백성을 다스리지 아니하고 도리어 좀먹는다면, 어찌 나라의 근본이 편안하겠는가.” 하였다. 이에 암행어사를 여러 도에 나누어 보내고, 수령의 치적을 다시 상고하게 하였다. 또 각 고을의 장부를 호조와 선혜청에 거듭 대조하게 하여, 감춘 곡식과 거짓 군액을 적발하였다. 탐학이 심한 자는 파직하고, 죄상이 큰 자는 국문하였으며, 백성에게 폐를 끼친 재물을 추징하여 돌려주게 하였다. 상이 또 이르기를, “법은 백성을 옭아매기 위해 있는 것이 아니라, 간사한 관리가 백성을 해치지 못하게 하기 위해 있는 것이다. 새 정사는 비록 민간을 번거롭게 할지라도, 그 근본은 오래도록 편안케 하려는 데 있다.” 하였다. 사신은 논한다. 의종이 즉위한 뒤 개혁을 서두르자 지방관들이 많이 두려워하고 원망하였다. 그러나 상이 흔들리지 아니하고 법을 분명히 하였으므로, 아전과 수령이 전처럼 방자하지 못하였다. 다만 여러 폐단이 오랜 세월 쌓인 것이므로 하루아침에 다 씻기지는 못하였다.《의종실록》 |
의종의 치세는 길지 않았으나, 이 시기의 개혁은 훗날 철종 대에도 그대로 이어지는 국가 재정비의 기초가 되었다. 따라서 대한국사에서는 문조를 세도정치를 무너뜨린 군주, 의종을 그 위에서 실질 개혁을 실행한 군주로 나누어 평가하는 시각이 강하다.
의종(1853~1859)
생애
의종은 사도세자의 서장자 은언군의 손자이자 전계대원군의 적장남인 회평군으로 태어났다. 본래 왕위 계승과는 거리가 먼 방계 왕손이었으나, 문조의 외아들인 이환(문헌세자)이 급사하고 왕가의 남계가 크게 줄어들면서 후계자로 부상하였다. 이후 문조의 양자로 입적되어 왕세자가 되었고, 1853년 문조가 붕어하자 즉위하였다.
의종의 즉위는 단순한 방계 계승 이상의 의미를 지녔다. 그는 사도세자의 자손이자 기존 세도가문과 직접적으로 얽히지 않은 인물이었기 때문에, 김좌근의 난 이후 붕괴한 세도정치 질서 위에서 왕실 중심 정국을 새롭게 정비할 적임자로 여겨졌다. 또한 강화도에서의 곤궁한 생활을 겪은 경험 때문에 민간의 삶과 지방의 현실을 비교적 잘 이해하는 군주로 인식되었다.
재위 기간은 길지 않았다. 그러나 즉위 직후부터 삼정 문란과 지방 행정의 혼란을 바로잡는 데 큰 관심을 보였으며, 이복동생인 이원범(훗날 철종)과 함께 국정을 정비하는 데 힘썼다. 다만 끝내 후사를 두지 못한 채 1859년 지병으로 붕어하였다. 그의 죽음은 다시 왕실의 계승 문제를 불러왔고, 결과적으로 이복동생 철종의 즉위로 이어지게 된다.
업적
의종의 가장 큰 업적은 세도정치 붕괴 이후의 공백 상태를 단순한 혼란으로 방치하지 않고, 이를 실질적인 국가 재정비의 계기로 삼았다는 데 있다. 문조가 김좌근의 난을 진압하여 왕권을 복구하고 세도가문을 해체하였다면, 의종은 그 위에서 실제 행정과 재정, 지방 질서를 손본 군주였다.
가장 대표적인 것은 삼정이정청의 설치와 운영이다. 의종은 전정, 군정, 환곡의 문란이 조선 후기 국가 기능을 좀먹고 있다고 보고, 이를 바로잡기 위한 조사와 정비를 본격화하였다. 각 도의 장부를 다시 점검하게 하고, 군포와 환곡 운영의 허실을 중앙에서 직접 대조하게 하였으며, 지방 수령과 향리의 탐학을 적발하는 데 힘썼다. 암행어사를 파견하고 감사 및 수령의 치적을 재평가한 것도 이 시기의 중요한 조치였다.
또한 의종은 단순히 부정을 처벌하는 데 그치지 않고, 세도가문이 몰락한 뒤 비어 있는 관료 체제를 왕실 중심으로 재편하였다. 문벌과 외척에 지나치게 기대지 않고, 실무 능력을 갖춘 급제자와 지방 행정 경험이 있는 인물들을 중용하여 국왕에 의존적인 관료층을 확대하고자 했다. 이로써 조정은 붕당과 외척이 이끄는 정치 구조에서 점차 국왕과 관료 기구 중심의 운영 체계로 이동하게 되었다.
대외적으로도 의종은 서양 열강과 외래 문물이 점차 조선에 접근하고 있다는 사실을 인식하고 있었다. 다만 그는 이를 곧장 전면적 개항이나 급격한 개화로 연결하지는 않았으며, 우선은 내부 질서를 정비하고 국가 운영 능력을 회복하는 것이 선행되어야 한다고 보았다. 따라서 의종의 치세는 흔히 근대화를 시작한 시대라기보다, 근대적 대응이 가능하도록 국가의 기초 체력을 회복한 시기로 평가된다.
무엇보다 의종은 사도세자의 자손이자 방계 왕손으로 즉위했다는 점에서, 기존 시파와 벽파 간 경계를 사실상 무력화하였다. 그의 즉위와 통치는 조선 후기 200여년 정치를 규정해온 붕당 질서를 더 이상 유효한 정치 원리로 작동하지 못하게 한 결정적 계기 가운데 하나로 여겨진다.
평가
문조가 무너뜨린 세도정치 이후의 권력 공백을 안정적으로 수습하고, 왕실 중심 정국을 실질적으로 정착시킨 군주로 평가된다. 삼정이정청 설치와 지방 행정 정비를 통해 조선 후기의 대표적 폐단이던 삼정 문란에 정면으로 대응하였다. 또한 세도가문과 붕당의 잔재를 억누르고, 국왕에 의존하는 실무형 관료층을 육성하려 했다는 점에서 행정군주적 면모가 강했다.
무엇보다 방계 왕손 출신이라는 한계를 오히려 장점으로 바꾸어, 민생과 지방 현실에 밝은 군주라는 이미지를 얻었으며, 시파·벽파의 오래된 의리 논쟁을 사실상 무의미하게 만들며, 조선 후기 정치 질서의 전환점을 이룬 왕으로 평가된다.
그러나 재위 기간이 너무 짧아, 그가 추진한 개혁이 완전히 제도화되기 전에 중단되었다는 한계가 있다. 개혁의 방향은 분명했으나, 전면적 군제 개편이나 대외 정책 전환까지 나아가기에는 시간과 기반이 부족했다. 지방수령과 향리의 폐단을 억제하는 데 일정한 성과를 거두었지만, 오랜 세월 누적된 구조적 문제를 근본적으로 해소하지는 못했다. 결정적으로 후사를 남기지 못해 다시금 왕실의 계승 문제를 불러왔고, 왕조의 불안정성을 완전히 해결하지는 못했다.
후대에는 훌륭한 방향을 제시했으나 너무 빨리 죽은 왕으로 기억되는 경우가 많아, 업적의 실질 규모에 비해 다소 이상화되는 경향도 있다.
철종(1859~1864)
생애
철종은 전계대원군의 셋째 아들이자 의종의 이복동생으로 태어났다. 본래 왕위 계승과는 거리가 있었으나, 1859년 의종이 후사 없이 붕어하면서 왕실은 다시 후계 문제에 직면하게 되었다. 당시 둘째는 사도세자의 가문주라는 이유로 보위에 오르는 것이 도리에 맞지 않는다는 반대가 있었고, 훗날 고종이 되는 흥선대원군의 아들 역시 아직 성년에 이르지 못하였으므로, 결국 셋째인 철종이 새로운 군주로 선택되었다.
철종의 즉위는 적통 계승의 이상형이라기보다, 당시 왕실이 취할 수 있었던 가장 현실적이고 무리 없는 방안에 가까웠다. 이미 문조 대의 왕권 강화와 의종 대의 행정 개혁을 거치며 세도가문과 붕당 질서는 상당 부분 붕괴한 상태였고, 순원숙왕대비 역시 특정 외척이나 문벌이 다시 정국을 독점하는 것을 원하지 않았기 때문에 철종의 즉위는 비교적 큰 혼란 없이 이루어졌다.
즉위 후 철종은 앞선 두 임금이 마련한 질서를 유지하는 데 힘썼다. 그는 강력한 개혁군주라기보다는, 이미 추진되던 개혁을 무리 없이 이어가고 다시 세도정치가 부활하지 않도록 왕실 중심의 정국을 붙드는 데 주력한 군주였다. 다만 의종과 마찬가지로 지병이 있었고, 재위 기간도 길지 못하였다. 결국 1864년 후사 없이 붕어하여, 왕조는 다시 한 번 중대한 계승 문제에 직면하게 되었다.
업적
철종의 가장 큰 업적은 의종 대에 추진된 개혁을 무리 없이 유지하는 데 그치지 않고, 이를 바탕으로 왕권 강화와 제도 정비를 계속 시도하였다는 점이다. 그는 세도가문이 몰락한 이후에도 중앙 정국이 다시 권신이나 외척에게 장악되지 않도록 여러 조치를 취하였으며, 그 대표적인 사례로 비변사를 혁파하고 의정부를 복원한 일을 들 수 있다. 이는 조선 후기 내내 비대해진 비변사의 권한을 억제하고, 보다 정규적인 관제 질서를 회복하려는 시도로 평가된다.
또한 철종은 의종 대부터 이어진 지방 행정 정비와 삼정 개혁의 흐름을 크게 뒤집지 않았으며, 삼정이정청을 비롯한 개혁 기구를 유지하여 전정·군정·환곡의 문란이 다시 악화되지 않도록 힘썼다. 지방 수령과 향리의 전횡을 억제하고 보고 체계를 지속적으로 점검함으로써, 세도정치 붕괴 이후 어렵게 회복된 국가 통제력을 보존하고자 하였다. 이와 함께 방계 왕손으로 즉위한 자신의 취약한 정통성을 보완하기 위해 종친 질서와 왕실 예법을 재정비하는 데도 주의를 기울였다.
정치적으로는 순원숙왕대비의 추천 아래 안동 김씨 일가와 혼인함으로써, 이미 몰락한 안동 김씨를 다시 세도정치의 중심으로 복귀시키지는 않되 왕실과의 관계를 완전히 단절하지도 않는 절충을 택하였다. 이는 안동 김씨 잔존 세력을 관리 가능한 범위 안에 묶어 두고, 동시에 새로운 외척 세력이 별도로 급성장하는 것을 방지하려는 계산도 담긴 선택으로 해석된다.
사회정책 측면에서는 철종이 노예 폐지를 공포하였다는 점이 자주 거론된다. 이는 신분제 전반을 단숨에 해체한 것은 아니었으나, 오랜 세월 유지되어 온 인신 예속 질서를 국가 차원에서 정리하려 한 중대한 조치로 평가된다. 또한 과거제를 정비하고 면천된 이들도 과거제에 응시할 수 있도록 길을 열어주었으며 기술자를 우대하였다.
경제정책에서는 중상주의적 성격이 뚜렷하였다. 철종은 국가 재정을 안정시키고 시전과 장시를 비롯한 시장 활동을 활성화하는 방향으로 정책을 폈으며, 상업 유통과 도시 경제를 장려하여 조정의 재정 기반을 넓히고자 하였다. 이는 세도정치의 붕괴 이후 왕실 중심 국가가 지속되기 위해서는 단순한 농업 수취만이 아니라 상업과 유통의 활성화가 필요하다는 인식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인다. 그 결과 철종대에는 시장 기능과 상업 활동이 일정 부분 활기를 띠게 되었으며, 이는 훗날 대한국의 경제 체제 변화에도 일정한 영향을 주었다고 평가된다.
대외적으로는 서양 각국이 동아시아에 대한 압박을 본격적으로 강화하던 시기였기 때문에, 철종 또한 대외 문제를 외면할 수 없었다. 그는 문호를 전면적으로 개방하거나 급진적인 개화 정책을 추진하지는 않았으나, 적어도 서양 각국과의 대화를 완전히 거부하지는 않았으며, 제한적이나마 국서의 전달과 외교적 접촉 가능성을 염두에 두고 정세를 탐문하게 하였던 것으로 해석된다. 이는 이후 고종 및 흥선대원군 대의 대외정책과도 일정 부분 이어지는 선행적 움직임으로 평가된다.
즉 철종의 업적은 화려한 군사적 정복이나 급진적 개혁에 있지 않다. 오히려 그는 짧은 재위 속에서 왕권을 유지하고 제도를 정비하며, 사회·경제 질서를 조금씩 손보는 방식으로 조선을 다시 세도가문 정치로 회귀하지 않게 한 데 의의가 있다.
평가
철종은 흔히 문조나 의종처럼 강한 인상을 남긴 군주는 아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결코 공백의 군주로 보기는 어렵다. 그는 의종 대 개혁의 성과를 급격히 후퇴시키지 않았고, 세도가문이 붕괴한 뒤 왕실 중심으로 재편된 정국을 비교적 안정적으로 유지하였다. 특히 비변사 혁파와 의정부 복원은 조선 후기 비정상적으로 비대해진 권력 구조를 바로잡으려는 뜻을 보여준 조치로 높이 평가된다.
또한 노예 폐지 공포와 중상주의적 시장 활성화 등의 정책은 철종이 단순히 현상 유지에만 머문 왕이 아니었음을 보여준다. 비록 재위는 짧았으나, 그는 사회 질서와 경제 구조를 일부나마 손보며 왕실 중심 국가의 기반을 넓히고자 하였다. 여기에 더해 안동 김씨와의 혼인을 통해 몰락한 외척 세력을 관리 가능한 범위 안으로 묶어 두고, 새로운 외척 독점 체제가 형성되는 것을 억제한 점도 정치적으로는 의미가 있었다.
대외적으로 서양 열강과의 접촉 가능성을 완전히 닫지 않고, 제한적이나마 대화의 여지를 두려 했다는 점 역시 주목할 만하다. 비록 본격적인 개항이나 개화 정책으로 이어지지는 않았으나, 적어도 철종이 국제 정세의 변화를 인식하고 있었다는 점은 후대의 평가에서 긍정적으로 언급된다.
다만 철종의 한계 역시 분명하다. 우선 재위 기간이 지나치게 짧았고, 지병으로 인해 장기적인 국정 운영 구상을 실현할 만한 여건이 부족하였다. 비변사 혁파, 의정부 복원, 노예 폐지, 시장 활성화 같은 조치들은 의미가 컸으나, 이를 충분히 제도화하고 전국적으로 안정시키기에는 시간이 모자랐다. 또한 아들이 어린 나이에 급사하여 무기력함에 빠졌고 후사를 남기지 못한 채 붕어함으로써 왕조의 계승 문제를 또다시 불러왔다는 점 역시 큰 약점으로 지적된다.
결과적으로 철종은 새 시대를 연 군주라기보다, 문조가 복구하고 의종이 정비한 질서를 바탕으로 왕권과 제도, 사회경제 구조를 한층 더 손보려 한 과도기의 군주로 평가된다. 후대에는 짧은 재위와 병약한 이미지 때문에 과소평가되기도 하나, 대한국사에서는 적어도 '왕권을 지키고 제도를 다듬으며 변화의 방향을 유지한 왕'이라는 점에서 일정한 의의를 인정받고 있다.
고종(흥선대원군)(1864~1873)
생애
흥선대원군은 본래 왕위와 거리가 있는 종친이었으나, 철종이 후사 없이 붕어하면서 어린 아들 고종이 즉위하게 되자 섭정의 자격으로 정국 전면에 등장하였다. 그는 문조와 의종의 치세를 대체로 긍정적으로 보았으며, 특히 문조의 왕권 강화와 의종의 행정 개혁을 조선 왕실이 다시 살아난 계기로 평가하였다. 반면 철종에 대해서는 그리 좋은 평가를 내리지 않았는데, 이는 노예 해방이나 상업 진흥, 서양과의 제한적 대화 시도 등이 지나치게 급진적이며 국가 질서를 흔들 수 있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그는 철종 사후의 정국을 세도가문 부활의 위험이 남아 있는 과도기로 파악하였다. 따라서 어린 군주를 대신해 섭정에 나선 뒤, 왕권과 재정을 다시 단단히 틀어쥐고 중앙집권 질서를 확립하는 것을 최우선 과제로 삼았다. 실제 역사와 달리 이 세계관에서는 이미 문조·의종·철종대를 거치며 세도정치가 상당 부분 붕괴해 있었기 때문에, 흥선대원군은 “세도정치 청산자”라기보다 기존 개혁 질서를 보다 강권적이고 보수적인 방향으로 재편한 섭정에 가까웠다.
그의 섭정기는 대체로 왕권 강화, 수도 정비, 지방제도 개혁, 서원 철폐, 유생 통제, 대외 보수화로 요약된다. 다만 동시에 의종 대부터 정권 내 입지를 넓혀 온 온건개혁파의 존재를 완전히 무시할 수는 없었기 때문에, 대외적 보수성에도 불구하고 군제와 군비 현대화는 일정 부분 병행되는 독특한 양상을 띠었다.
업적
흥선대원군의 가장 큰 업적은, 문조·의종·철종 대를 거치며 형성된 왕실 중심 질서를 보다 강한 중앙집권 체제로 재편한 데 있다. 그는 철종 대의 일부 사회·대외 정책을 지나치게 급진적이라고 보았으나, 문조의 왕권 강화와 의종의 행정 정비 자체는 높이 평가하였기 때문에, 앞선 시대의 성과를 부정하기보다는 이를 보다 보수적이고 통제 가능한 방향으로 재구성하려 하였다.
우선 그는 경복궁 중건과 한성 대정비를 강하게 밀어붙였다. 이 조치는 단순한 궁궐 복원의 차원을 넘어, 왕실 권위를 시각적으로 복구하고 수도를 다시 국왕권력의 중심 공간으로 조직하려는 시도였다. 궁궐 주변의 행정 구역과 도로, 치안과 상업 공간을 정비한 이른바 한성 재개발은 왕실의 상징적 권위를 높이는 동시에, 수도 통치의 실효성을 강화하려는 정책으로 평가된다.
지방제도 개혁 역시 중요한 업적이다. 의종 대의 삼정 정비가 지방의 폐단을 적발하고 장부 질서를 바로잡는 데 중점을 두었다면, 흥선대원군은 이를 한층 더 밀어붙여 지방 행정을 중앙의 직접 통솔 아래 두는 방향으로 개편하였다. 각 도의 감사와 수령에 대한 보고 체계를 강화하고, 지방관의 장기 재임과 향리 세력과의 유착을 억제하며, 중앙의 명령이 보다 직접적으로 지방에 미치도록 제도를 정비하였다. 이로써 지방은 단순한 자치적 행정 단위가 아니라, 국왕과 조정의 통솔 아래 놓인 행정 체계로 더욱 강하게 편입되었다.
사상과 교육 질서의 재편도 그의 주요 업적 가운데 하나다. 흥선대원군은 서원을 지방 양반과 유생 세력의 독자적 권위 기반으로 보고, 이를 그대로 둘 경우 왕실 중심 질서가 약화될 수 있다고 판단하였다. 이에 따라 대대적인 서원 철폐를 추진하는 한편, 중앙이 직접 관리하는 지방 국립 교육 기관과 인재 양성 체계를 강화하여 지방에 대한 학문과 인사를 조정이 강력히 관여하고자 하였다. 이른바 지방 국립 대학 설립 정책은 단순한 교육 진흥책이 아니라, 사상과 관료 재생산 구조를 국가가 직접 장악하려는 시도였다.
흥선대원군은 양반과 유생의 반발 또한 무조건 정면충돌로 처리하지 않았다. 이미 문조 대 세도가문 숙청과 의종 대 지방 개혁으로 반대 세력의 조직력이 상당 부분 약화된 상황이었기 때문에, 그는 지방 명망가와 유생층을 부분적으로 회유하면서도 핵심 거점은 철저히 정리하는 방식을 택하였다. 즉, 불필요한 전국적 반발을 부르지 않으면서도 실질적으로는 왕실 중심 권위를 강화하는 현실적 통치술을 구사한 셈이다.
대외정책에서는 철종 대의 제한적 대화 노선을 위험한 것으로 보고, 서양 문물과 천주교를 국가 질서를 해칠 수 있는 요소로 간주하였다. 이 때문에 그의 집권기에는 병인박해가 발생하였고, 이는 곧 병인양요로 이어졌다. 그러나 병인양요는 조선이 무방비 상태에서 일방적으로 당한 사건으로만 그려지지 않는다. 이미 의종 대부터 온건개혁파가 정계에서 일정한 입지를 확보하고 있었고, 흥선대원군 역시 교류에는 부정적이었으나 군사 대비의 필요성은 인정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 결과 조선은 화포 운용 개량, 군제 재편, 별기군 확대 등을 통해 실제 역사보다 더 조직적인 대응을 보였고, 결국 병인양요를 격퇴하는 데 성공하였다. 이 승리는 흥선대원군의 대외 강경 노선을 정당화하는 계기가 되었으며, 동시에 군비 증강의 효용을 조정 전체에 각인시켰다.
다만 그 성공이 폐쇄정책의 정당성을 끝까지 보장한 것은 아니었다. 병인양요 과정에서 발생한 규장각 훼손과 수도 방어의 불안정성은, 외세와의 충돌을 무조건 강경책으로만 해결할 수 없다는 점 역시 보여주었다. 이어 신미양요를 전후한 시기에는 미국 측의 개항 요구가 제기되었고, 조정 내부에서는 박규수 등을 중심으로 한 온건개혁파가 점차 발언권을 높여 갔다. 이들은 고종이 친정을 원하던 상황에서 흥선대원군이 계속 상왕처럼 군림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으며, 병인양요를 통해 확인된 군사적 한계와 규장각 훼손의 경험을 돌아볼 때 제한적 개방과 외교적 완충 장치가 필요하다고 주장하였다.
결국 흥선대원군은 기존의 전면적 배척 기조를 일부 수정하여, 인천에 한한 제한적 개항을 받아들이고 향후 미국과의 수교를 긍정적으로 추진하기로 하였다. 이는 그의 성향만 놓고 보면 상당한 후퇴처럼 보일 수 있으나, 실제로는 병인양요의 승리 이후 조선이 최소한의 자신감을 가진 상태에서, 전면 개방이 아닌 통제된 개항과 선택적 외교를 택한 것으로 해석된다. 이 조치는 훗날 고종 친정기에 본격적인 대외 개방과 근대화 정책으로 이어지는 교두보가 되었다.
종합하면 흥선대원군의 업적은 왕권의 상징적 재건, 지방과 교육 질서의 중앙집권적 재편, 유생 세력의 억제, 병인양요 승리로 대표되는 군사 대비의 성과, 그리고 신미년 이후 인천 제한 개항과 미국 수교 추진을 통한 통제된 외교 전환으로 요약할 수 있다. 그는 근대화의 속도를 늦추고자 했으나, 결과적으로는 조선을 더 강한 왕실 중심 국가로 재조직하는 한편, 완전 쇄국과 무제한 개방 사이의 과도기적 길을 연 인물이 되었다.
평가
흥선대원군은 대한국사에서 가장 논쟁적인 인물 가운데 하나이다. 긍정적으로 보면 그는 철종 붕어 이후 흔들릴 수 있었던 왕조를 다시 강한 중앙집권 체제로 묶어내고, 경복궁 중건과 한성 정비, 지방제도 개혁, 서원 철폐와 중앙 교육기관 육성 등을 통해 왕실 중심 국가를 한층 더 강화한 섭정이었다. 문조와 의종이 마련한 정치적 토대를 보다 정교한 통치 질서로 바꾸어 놓았다는 점에서, 단순한 수성형 인물을 넘어 적극적 국가 재편자로 평가할 수 있다.
특히 병인박해라는 강경책이 결국 병인양요를 불러왔음에도, 조선이 그동안 준비한 군사력과 연해 방어 체계를 바탕으로 이를 격퇴하였다는 점은 흥선대원군의 평가를 복합적으로 만든다. 그는 서양과의 교류에는 부정적이었으나, 군사적 대비 자체는 현실적으로 추진하였고, 그 결과 병인양요는 조선이 완전히 무력하지 않음을 보여준 사건이 되었다. 여기에 더해 신미년 미국의 개항 요구에 대해서는 박규수 등 온건개혁파의 의견과 고종 친정 임박이라는 정세를 감안하여, 인천에 한한 제한 개항과 미국 수교를 허용하였다. 이 때문에 후대에는 그를 무조건적 쇄국주의자라기보다, 강경한 보수주의에서 제한적 통제 개방으로 이동한 과도기의 권력자로 보는 시각도 강하다.
또한 양반과 유생의 반발을 최대한 억제하면서도 핵심적인 서원 철폐와 중앙집권 개혁을 밀어붙였다는 점 역시 높은 평가를 받는다. 이는 문조 이후 누적된 왕권 강화의 성과를 그가 효과적으로 활용하였음을 보여주며, 지방 사족과 유생 사회의 독자성을 꺾고 국가가 인재와 사상을 관리하는 구조를 강화했다는 점에서 장기적 의미가 컸다.
반면 부정적으로 보면, 흥선대원군은 철종 대의 상대적으로 완만한 사회·대외 변화 가능성을 크게 위축시킨 인물이기도 하다. 그는 노예 해방 이후 나타난 사회 변동과 시장 활성화의 흐름을 불안정 요소로 보았고, 서양과의 대화 또한 원칙적으로는 국가 혼란을 부를 수 있는 위험으로 인식하였다. 병인박해는 이러한 성향이 가장 극단적으로 드러난 사건이며, 결과적으로 병인양요라는 외세 충돌을 불러왔다는 점에서 비판을 피할 수 없다.
또한 병인양요 승리 이후에도 그는 처음에는 이를 강경 노선의 정당화로 받아들였고, 보다 체계적인 외교 노선 정립에는 소극적이었다. 신미년의 제한 개항과 미국 수교 역시 그의 자발적 전환이라기보다, 온건개혁파의 성장과 고종 친정 임박, 그리고 병인양요를 통해 드러난 한계가 복합적으로 작용한 결과로 보는 견해가 많다. 이런 점에서 그는 시대의 흐름을 앞서 이끈 인물이라기보다는, 변화를 최대한 늦추되 완전히 거부할 수는 없었던 보수적 중재자에 가까웠다는 평가도 가능하다.
결과적으로 흥선대원군은 문조와 의종의 성과를 계승하면서도 철종 대의 일부 변화에는 제동을 걸고, 왕실 중심 국가를 보다 강하게 재구축한 인물이었다. 그는 병인양요 승리로 대표되는 군사적 성과를 남겼고, 말년에는 인천 제한 개항과 미국 수교를 통해 통제된 대외 전환의 길도 열었다. 대한국사에서 그는 대체로 “왕조를 강하게 만들었으나, 시대 변화와 타협하는 데에는 끝내 신중할 수밖에 없었던 섭정”으로 정리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