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주공화당 분당 (제5공화국)

개요

1980년 초에 이루어진 민주공화당 분당이다. 이 분당은 보수정당 역사상 최대의 분당으로 꼽힌다.

발단

1979년, 10.26 사건 이후 김종필 전 국무총리가 당의장으로 선출되었으나, 김종필을 비롯한 김종필계(청구동계)가 당을 운영하는 상황을 못마땅하게 여긴 친박정희계를 중심으로 김종필을 서서히 견제하고 있었다. 그리고 12.12 군사반란으로 신군부가 사실상 군권을 장악하자 전두환과 고향이 인접한 TK를 지역구로 둔 국회의원을 필두로 신당 창당설이 퍼지기도 했다.

또한, 박찬종, 오유방, 남재희, 이태섭 등 소장파를 중심으로 유신체제를 지지하고 옹호한 과거를 반성하자는 취지에서 일명 '정풍운동'을 일으켰으나, 정풍운동의 대상으로 지목된 이후락, 김진만 등이 김종필 지도부에 사사건건 발목을 잡고 있었다.

이렇듯 민주공화당이 10.2 항명 파동 이후 최대 분열 위기 속에서 김종필을 비롯한 김종필 지도부가 당을 제대로 운영하기 힘든 상황이었다. 더군다나 이미 민주공화당은 1978년, 제10대 국회의원 선거 이후 야당인 신민당보다 낮은 지지율을 기록하며 국민의 지지와 독자적인 정당 조직력, 의회 정치 능력을 모두 상실한 상태였다.

이를 두고 이만섭과 일부 김종필계 의원들은 김종필 의장에게 신당을 창당해 새출발을 할 것을 조언했지만, 김종필 의장은 그렇게 쉬운 결정이 아니라며 사실상 고사했다.

그러나 1980년 2월, 이효상 전 국회의장과 박준규, 이후락 등 친박정희계 인사들이 유신정우회 소속 국회의원들을 민주공화당에 입당시켜 친박정희계 세력을 크게 확대한 후, 사흘 안에 속전속결로 김종필 지도부를 붕괴시키고 신군부 세력의 지도자인 전두환을 민주공화당 총재 겸 차기 대통령 후보로 추대하는 계획인 이른바 ‘김옥균 작전’에 대한 녹취록이 발견되자[1] 상황이 급변하기 시작했다.

이 사건에 대해 김종필계와 소장파는 친박정희계가 비민주적인 행태로 신군부가 민주공화당을 장악할 수 있게 길을 만들어 준다며 거세게 반발했지만, 친박정희계는 즉각 부인했고 선동과 날조로 당의 내분을 초래하고 있는 김종필계, 소장파를 제명해야 한다고 주장하며 역으로 몰아세웠다. 이후 김종필계와 친박정희계의 관계는 더욱 급속도로 험악해지기 시작했으며, 민주공화당의 분열은 최절정에 달하게 되었다.

끝내 1980년 3월 1일, 김종필 의장은 기자회견을 열고 비민주적인 행태를 보이는 친박정희계에 유감을 표하며 신당 창당을 선언했다.[2]

더불어 박찬종, 오유방 등 김종필, 친박정희계 둘 다 반대하는 일부 소장파도 신당 창당을 선언했다.

전개

세력분화

민주공화당
민주공화당
한나라당
개혁신당

잔류파 중심 민주공화당

친박정희계 세력을 제외한 대부분이 탈당하자, 잔류 친박정희계 국회의원을 중심으로 한 민주공화당은 1980년 4월, 이효상 전 국회의장을 당의장으로 선출했다.

1980년 3월, 의석 확대를 위해 유신정우회 소속 국회의원들을 민주공화당으로 입당시키려고 했으나, 한나라당, 신민당, 민주통일당 주도로 유신정우회 소속 국회의원의 당적 보유를 금지하는 법안이 가결됨에 따라 의석 확대에 실패했다.

이후 5월 항쟁에서 본격적으로 신군부 편에 서며 한나라당, 신민당, 개혁신당, 민주통일당 등 민주화 세력과 극한의 대립을 겪었다. 하지만, 최종적으로 신군부 세력이 몰락하며 민주화가 이루어지자 민주공화당은 신군부와 같이 내란 세력으로 엮이게 되었고, 유력 대권주자인 김종필, 김영삼은 헌법재판소에 의한 정당 해산을 시사하는 등 존립 위기에 처하게 되었다.

김종필 신당 '한나라당'

김종필 전 민주공화당 의장을 비롯해 김종필계와 일부 소장파, 이만섭 등을 중심으로 창당한 신당이다.

1980년 4월, 창당대회에서 당명을 한나라당으로 결정하고 8개의 강령과 55개의 기본정책을 채택한 뒤 김종필 전 민주공화당 의장을 당대표로 선출했다.

박찬종 신당 '개혁신당'

박찬종, 오유방 등 김종필, 친박정희계 둘 다 반대하는 일부 소장파를 중심으로 창당한 신당이다. 당명은 개혁신당으로 결정했다.

1980년 4월, 창당대회에서 박찬종 국회의원이 당대표로 추대되었다.

박찬종 대표는 창당대회에서 차기 대선에서 독자 완주를 선언하며, 정당의 기본 목적 중 하나인 '자체 후보에 의한 집권 가능성'을 보여주겠다고 선언했다.


  1. 다만, 당시 언론 검열로 해당 사건이 언론을 통해 보도하기 어려워 대중들에게는 잘 알려지지 않았다.
  2. 여기서 친박정희계를 제명하면 되지 않겠냐고 할 수 있는데 당시 민주공화당의 당내 구도를 보면 친박정희계 세력이 여전히 건재했고, 앞에서도 언급했듯이, 10월 유신 이후 국민의 지지와 독자적인 정당 조직력, 의회 정치 능력을 모두 상실해 당의 기능이 마비된 상황이었기 때문에 신당 창당을 통해 쇄신감을 불러일으키고 잔류한 친박정희계를 서서히 몰락시키는 것이 제명하는 것보다 실익이 더 높았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