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종 열황제/생애

고종 열황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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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애

(전략) 대황제께서는 성군이었다. 세도가의 전횡과 계속되는 당쟁으로 환란에 봉착한 제국을 구출하시었고, 제국이 나아갈 방향을 밝히셨다. 대황제께서 이루신 업적은 경조 열황제·성조 태황제께서 어일신을 통해 재조를 이루신 일과 같으시며, 대황제께서 하신 말씀은 공자·맹자·정자·주자가 한 말이었다. 황제의 위에 오르시기 전에는 충용한 신하로써 국체를 호지하셨고, 지존이 되신 뒤에는 앞장서서 제국의 위엄과 번영을 위해 애쓰셨으며, 뒤에서는 사민의 평안을 위해, 일평생을 제국을 위해 바치셨다. 특히 고금을 통틀어 이토록 사민을 염려하시고 아끼신 애민의 군주는 없었다. 이처럼 현명하고 위대하셨던 임금이었던 그의 왕도를 단지 이 정도로 밖에 소개할 수 없어 애석할 따름이다.
고종 묘지명

어린 시절

1940년(광형 21년) 1월 19일, 황실병원에서 선친왕과 선친왕비 유씨의 3남 1녀 중 3남으로 태어났다. 1945년 6월 한산공(韓山公)에 봉해졌다. 아명은 할아버지 열종이 이름을 직접 지어주었는데, 황실의 막내라는 의미에서 막동(莫同, 막내)이었다.

고종은 어릴 때부터 자유롭게 성장하였다. 알려진 바에 따르면, 장래 선친왕이 될 후계자였던 예친왕과 제천공은 고종에 비해 대단히 엄격하게 양육되었다고 한다.

2차 세계대전 이후 미리견의 사상과 생활 방식을 배우게 하려는 아버지 선친왕의 의향에 따라 미국 태생의 엘리자베스 바이닝 부인[1]을 가정교사로 초빙하여 청소년기를 보냈다. 그녀는 대한에서 가장 유명한 퀘이커[2] 교도 중 하나로, 퀘이커 교도와의 친분은 선친왕 때부터 전통이었다.

다만, 고종은 바이닝 부인과도 괄괄한 성격으로 인해 마찰을 빚었는데, 그 일화 중 하나로 바이닝 부인이 광친왕과 고종의 영어 수업 시간에 외국인 친구들을 부르고 그들과 스스럼없이 지내게 하기 위해 한산공이 아닌 '지미(Jimmy)'란 애칭으로 광친왕과 고종을 부르려 했는데, 이때 광친왕은 브래드라는 이름을 썼지만, 황족으로써 자부심이 넘쳤던 고종이 "싫습니다, 저는 한산공입니다.(No, I'm a prince.)"라고 반발한 일이 있다고 한다. 하지만 바이닝 부인이 "이 수업에서는 '지미'라고 불려야 한다."고 설득하자, 고집을 부리며 "그렇다면, 저는 경(澃)[3]입니다."라며 고집을 부렸다.

사실 대한에서 바이닝 부인은 청소년기 고종에게 많은 영향을 준 것으로 평가받는다. 바이닝 부인은 황족으로써 자부심이 넘쳤던 고종에게 황족이 아닌 인간으로써 대하였고, 혼자서 무언가를 할 일이 거의 없는 고종이 수동적인 사람이 될까 우려하여[4] 여러모로 개방적이고[5], 능동적인 사고를 갖추게 하기 위해 노력하였다고 한다. 고종도 그런 그녀를 싫어하지 않았는지 훗날 결혼식과 즉위식을 비롯한 각종 행사에 바이닝 부인을 주요 귀빈으로 초대했으며, 그녀가 미리견에 돌아간 이후에도 주미대한대사관을 통해 생일이면 항상 카드와 꽃다발을 보내줬다고 한다.

어린 시절부터 고종은 매우 괄괄한 성격이었다. 고종의 이런 괄괄한 성격은 증조부인 고조를 빼닮았다는 의견이 강하다. 실제로 아들인 연종과 물론 손자인 인덕황제도 선친왕가를 빼닮아 온후한 성격을 가졌다. 실제로 고종은 성조처럼 깡따구와 배짱이 두둑하고, 말빨이 뛰어나 어릴때부터 어른들과 말 싸움을 하면 한 마디도 지지 않았고, 이러한 성격 탓에 고종은 어릴 때부터 남다른 리더십과 능력를 보였다. 강학원 중등과에서는 무리를 이끌고 패싸움을 벌여 세간의 이슈가 되기도 했고, 강학원 고등과에서는 학생들을 이끌고 고등과의 악습을 뿌리뿝고, 교내의 수구적인 교칙을 고치기 위해 학생운동을 주도하며 경신효황후에게 불려가 질책을 당하였으나, 고종은 오히려 당당하게 뻗대어, 대한에서 가장 독선적인 황후로 평가받던 경신효황후조차 고종의 괄괄한 성격에 혀를 내두를 정도였다.

대학생 시절

장성한 고종은 관례적으로 황족들이 무조건 진학하는 강학원대학 대신, 대한제국 최고의 대학인 한성제국대학의 제1류, 법학부에 당당하게 진학한다.[6] 그렇게 진학한 대학에서는 매일을 술과 공족 신분을 믿고 동급생을 하대하는 공족들을 황족이라는 신분을 이용해 줘패고[7], 황족의 신분을 통해 학교의 권위적 태도를 비난하며 학생운동을 벌였다.

1959년에 고종은 자신의 일생을 바꿀 만남을 하게 된다. 바로 부인인 현인열황후와의 첫 만남을 가진 것이다. 전공수업을 위해 인문학부에 찾아간 고종은 평민인 현인열황후와 우연히 만나 서로 사랑하게 되었다. 고종은 어릴때부터 빼어난 외모를 가졌고, 대학에 진학할 당시 황실의 아이돌로 취급되었기에, 성대 여성들의 무수한 고백을 받았으나, 오직 현인열황후의 고백만을 받아 사귀게 되었다고 한다. 결혼을 결심한 당시 여러 황족들과 공족들의 극렬한 반대를 받았으나, 고종이 "지희[8]가 아니면 결혼하지 않겠습니다!!라고 하자, 황족으로써의 책임감도 없냐는 소리를 들었고, 격분하여 "이럴바엔 폐서인 당하겠습니다."라고 뻗대었다. 이에 황실은 발칵 뒤집어졌고 현인열황후는 주변의 엄청난 직ㆍ간접적 압력에 부담을 느껴 고종에게 이별을 통보했다. 이에 고종은 손을 붙잡고 "내 일생을 널 지키는데 쓰겠다"라며 청혼했다. 마침 한성제국대학을 취재하던 KBS가 이를 촬영하여 그날 저녁 뉴스에 대서특필 되었고, 신종이 그들의 입을 닫는 데에 결정타[9]를 날려줌으로써 1962년 결혼하여 화제가 되었다. 참고로 고종의 형제들은 모두 공족 가문의 자제와 결혼했다.

여담으로 대한에서는 당시로는 고가의 첨단 기계인 텔레비전이 보급되는 계기가 되었다. 흑백 TV로 중계되는 결혼식을 보기 위해, 사람들이 앞다투어 TV를 구입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100만대를 돌파했다고 한다. 또한 두 사람이 결혼 과정에서 겪은 우여곡절은 젊은 미남 황족과 아름다운 평민 여성이 우연히 대학에서 만나 사랑에 빠져 연애 끝에 결혼하게 된 아름답고 낭만적인 로맨스 이야기로 화제가 되었다.

최초의 황족 경찰

법학부를 우등생으로 졸업[10]한 뒤 정부 관료의 길을 걷게 되는데, 졸업 이후에도 고종은 파격적인 길을 걸었다. 보통의 황족들처럼 비서성의 명예직만 맡거나,무관이 되는 대신, 신종에게 고등문관시험에 응시할 자격을 달라 청하여 또 한번 장안의 화제가 되다. 당시 황실에서는 한산공의 행동에 대해 매우 부정적이었으나 신종의 윤허를 받아 한성제국대학 재학 시절인 22살의 나이로 고등문관시험에 합격하여 공직생활을 시작하였다.

고종은 고시 합격자들의 선망인 경찰청 커리어에 지원하여 최우선적으로 선발되었고, 경시청 고등경찰과[11]의 특별고등경찰로 임용되어 정보계통 분야에서 주로 근무했다. 경찰 시절 고종은 철저한 반공주의자이자 근황주의자로써 비 제도권 극우, 극좌 세력에게 공포의 대상이었고, 신종의 총애를 받아 고속승진을 거듭했다. 1965년부터는 고등경찰과의 수장인 고등경찰과장으로 임명되어 정치경찰을 장악했으며, 1968년에는 경찰을 떠나 귀족원의 황족 의원으로 정치에 입문하였다. 정계 입문 이후에는 황실의 개혁과 자유권의 확대를 외치며 귀족원의 보수파와 대립했으며, 귀족원의 리버럴 파벌의 중진이 되었다. 이후 1970년에는 신종에 의하여 대한제국의 정보를 총괄하는 안전기획부의 수장인 안전기획부장이 되었다.

10.18 정변과 황태자 책봉

고종이 안전기획부장으로 재직하던 중 1971년 4월 19일 회종이 독감으로 쓰러지고, 10월 15일 급사한다. 이 당시 많은 황족들과 효황후, 관료들은 서로 결탁하여 신종 말기 쇠약해진 신종의 눈을 가리고 종법상 최근친이지만, 황족들과 껄끄러운 사이였던 선덕친왕 대신, 자신들의 입맛에 맞는 선친왕의 차남 제천공 이답신종의 양자로 입적하려 했다.

그러나 한산공과 선덕친왕을 비롯한 황족들이 이를 격렬하게 반대하고, 당시 태황태후였던 순현인황후가 선친왕을 신종의 양자로 입적하기로 결정하고 한산공이 안기부장의 직권으로 평소 험악한 사이였던 제천공과 황족들, 강씨 척족을 적극적으로 수사함에 따라 결국 점점 자신들을 향해 다가오는 압박에 제천공과 경신효황후를 비롯한 관료들과 장성들은 1971년 10월 18일, 10. 18 정변을 일으킨다.

1971년 10월 18일 친 제천공파 장성들은 원수부의 통제에서 이탈하여 내각과 황궁을 비롯한 주요 기관 및 시설을 장악하기 시작하면서 실체를 드러냈다. 수상관저와 순현인황후가 머물던 창덕궁을 비롯한 한성 대부분의 지역을 점령한 제천공은 친형인 선덕친왕과 친동생 한산공을 주살하려 한다. 그러나 고종은 일가족과 순현인황후만 확보하여 간신히 한성을 탈출하여 간신히 살아남았다.[12] 이후 태후의 지지를 받은 고종은 한성 외곽의 사단들과 특수부대를 이끌고 한성을 탈환한다.

제천공이 숨어있던 을2호 벙커는 육군 특수부대(GDT)의 기습에 의해 점령되었고, 제천공과 여러 수하들이 체포되어 처형된다. 이후 순현인황후는 유일한 선친왕가 중 회종과 같은 향렬인[13]인 한산공을 신종의 양자로 입적하여 대한제국의 제6대 황제로 즉위하였다.

재위 초기

즉위 초의 모습

1971년 11월 12일 고종은 김정렬의 후임으로 박정희을 내각총리대신으로 하는 박정희 내각을 구성하였다. 12월 20일에는 서민 필수품을 중심으로 하는 물가안정을 지시했다. 이 당시 대한은 신종 시대의 경제성장을 계승하여 과거와 같은 고도성장은 아니지만 연평균 4~5%대의 안정적인 성장을 하였다.

1971년 12월 24일 고종은 담화를 통해 귀족원과 내각의 주도하에 새로운 헌법을 만드는 작업을 착수하였다. 이 상황 속에서 고종은 낡디 낡은 대한국 국제를 폐기하고, 바이마르 헌법과 프랑스 헌법을 뼈대로 삼은 입헌군주제 개헌안[14]을 국민투표에 부쳐 91.5% 지지로 통과시키고 1972년 2월 17일 귀족원의 명예직화와 민의원의 권한 확대, 최고재판소 신설과 위헌심사권 도입등을 뼈대로 하는 새 헌법을 공포하고, 내탕금을 하사하여 민주자유당으로 창당하여 정치질서의 개편에 돌입한다. 1972년 민의원 선거에서 민주자유당은 총선에서도 크게 승리하여 의석의 72% 이상을 확보하는데 성공했다.

고종의 즉위 초기를 정치적으로는 개헌과 정치질서의 재편이 주목받는 다면 사회적으로는 범죄와의 전쟁 선포가 널리 알려져 있다. 1972년 10월 13일 옥음방송으로 발표된 이 정책으로 인해 당시 사회적으로 기승을 부리던 각종 강력.조직범죄는 철퇴를 맞았다. 범죄와의 전쟁 선포 이후에 실제적으로 강력범죄 발생율이 눈에 띄게 줄어들었고 무엇보다 대한에서 조직폭력 범죄가 거의 뿌리가 뽑혔다는 점은 고종의 업적이다.

1973년부터 월간경제동향보고와 수출진흥확대회의라는 두 회의가 매월 정기적으로 개최되었다. 이 회의들은 대황제의 주재하에 관료, 기업인과 업계 관련자,학자들이 참여해 물가와 경상수지 등 거시경제와 국내외 시장의 동향과 수출정책을 다루었다. 무려 50여년이 넘개 매월 두 개의 대규모 경제 회의를 개최한 나라는 세계의 다른 어느 나라에서도 없었고, 매번 두 회의를 주관한 고종과 관료들은 거듭된 회의 과정에서 최고 수준의 경제전문가로 훈련되어 갔다.

재위 중반

재위 말기

퇴위와 태상황

호랑이 등에서 내리다

고종은 2017년, 36년만에 퇴위하여 황태손 이연에게 황위를 물려주고 자신은 태상황으로 물러났다. 이는 대한의 황제들 중 유일하게 자의로 퇴위한 황제이다.

생전 퇴위를 결정한 뒤, 태상황과 관련된 해프닝이 있는데, 본래 인덕황제와 대신들은 고종을 퇴위 이후 태상황으로 모시고자 하였으나, 재위 시절부터 번거로운 예식과 권위의식을 껄끄러워 했던 고종은 상황이면 되지 않겠냐며 극구 사양했다. 그러나 고종을 존경하던 이연은 할바마마께서 태상황이 되시질 못할 바엔 차라리 황위를 물려받지 않겠습니다.라며 버텼고, 고종은 이를 극구 사양하며 태상황 할바엔 차라리 한산공으로 돌아가겠다.라며 버텨 손자와 대신들의 골을 썩혔다. 결국 인덕황제와 대신들의 간곡한 설득과 애원에 질린 고종은 마지못해 태상황(太上皇)의 존호를 받기로 약속했고, 그제서야 황태손이 연호를 인덕(人德)으로 하여 즉위하게 된다. 이때 고종은 생전 퇴위 이후 요순태상황제(堯舜太上皇帝)의 존호를 받으며 독한놈, 이 나이든 할애비를 이렇게 고생시켜야겠냐라며 푸념하기도 했다.

고종은 이연이 황제가 된 이후로도 군권은 여전히 자신이 쥐고 있었고 일부 분야에 대해서도 대리청정을 하였다. 또한 고종은 중국과의 영토 분쟁에서 적극적으로 강경 대응을 주문하고, 네아토 구성국과의 결속을 위해 여러번 순방을 다니는 등 주도적으로 활약했다. 이렇게 고종은 태상황이 되어서도 대한제국의 안정과 손자 이연의 황권 안정을 위해 노력했고, 말년에는 계절에 따라 황성과 서경, 남경과 동경을 오가며 당구와 사냥을 즐기는 등 즐겁게 여생을 보내기도 했다. 게다가 자신이 후계자로 삼은 이연의 뛰어난 자질을 자신의 눈으로 확인하고 이에 만족하는 말도 남겼으며, 순방 도중 일본 국왕 덕천항효가 이연을 극찬하자 크게 기뻐하기도 했다.

붕어

고종은 상황으로 물러난 이후 병권과 일부 권한을 섭정하며 인덕황제의 치세를 공고히 다졌으며 중국과의 국경분쟁에서 단호한 모습을 보이며 존재감을 과시하기도 했다. 그러나 황후인 현인열황후가 승하한 이후 급속도로 건강이 악화되었고 결국 2019년 4월 13일 덕수궁 석조전에서 붕어한다.


  1. 자식은 없고 남편과는 사별했다고 한다.
  2. 개신교 종파 중 하나. 평화주의와 전쟁반대가 주요 모토 중 하나인 교파로, 양심적 병역거부도 지지하는 입장이라고 한다.
  3. 본래 고종의 휘는 '경' 이었으나, 즉위 이후 피휘를 위해 한자는 그대로 쓰되, 휘의 발음을 '경' 에서 '산' 으로 고쳤다.
  4. 혼자서 목욕물 받기를 바이닝 부인에 의해 처음 해봤다고 한다.
  5. 고종은 이러한 개방적인 성격 탓에 황족들이나 콧대 높던 공족들과 갈등이 잦았다고 한다.
  6. 당시 황족들이 무조건 진학했던 강학원대학으로 가지 않은 것은 선친왕이 '얘 성격에 거길 보내면 공족들이 뻣대는거 고치겠다고 개내 다 두들겨 패겠다'싶어 그랬다고 한다.
  7. 한번은 친구들이 고종을 빼놓고 술자리를 벌였는데, 이를 알고서는 잠긴 문을 오함마로 부시고 열어 결국 술자리에 참가했다.
  8. 현인열황후의 휘
  9. “황실에도 새로운 피가 필요하다”고 선언했다.
  10. 당시 정부와 법조계의 정설이던 황제주권설이 아닌 황제기관설을 주장하는 졸업 논문을 발표하여 또 한번 황실을 발칵 뒤집었다.
  11. 고종 즉위 이후 개편되어 일부는 법부 공안조사청으로 분리되었고, 다른 부분은 경시청 공안과로 분리되었다.
  12. 이때 고종운 선덕친왕까지 구하려 하였으나, 선덕친왕이 설마 자신에게 별 일이 있겠냐며 고종을 안심시키고 한성에 남았다. 그러나 반 제천공파에게 전방위적인 압박을 받던 제천공은 ‘‘’친형을 사살하는‘‘’ 패륜을 저지른다. 선덕친왕의 사망은 고종에게 큰형을 구하지 못했다는 죄책감과 상처를 심어주게 되었고, 선덕친왕의 유일한 자식인 선친왕 이유를 아들처럼 여기며 엄청난 대우를 해주었다.
  13. 선덕친왕의 유일한 자손인 선친왕 이유는 당시 태아 상태였다. 이때의 선덕친왕비는 임신한지 얼머 안되어 10.18 사건으로 지아비를 잃는 아픔을 겪었기에 임신 사실을 확인할 겨를도 없었다. 선친왕 이유의 존재가 세상에 알려진건 고종이 즉위한 이후 선덕친왕비의 배가 불러오며 알려지게 되었다.
  14. 대한이 입헌군주국이기는 하지만 대황제는 국사 전반에 막강한 권한이 존재한다. 이는 바이마르 공화국의 대통령에 비견되는 황제의 권한과 기존부터 황제가 국정에 적극적으로 관여해왔던 대한의 정치적 특성에서 비롯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