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레고리 아나똘로브 (만주일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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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주 민주 공화국의 역대 대총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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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주 민주 공화국의 제7대 대총통
제6대
룡석안
제7대
그레고리 아나똘로브
권한대행
빅또르 오가르꼬브


만주 민주 공화국의 제7대 대총통
그레고리 아나똘로브

Григорий Анатолов | 格里高利 阿纳托洛夫
출생 1952년 8월 13일(1952-08-13) (71세)
USSR 극동관구 블라디보스토크

만주 민주 공화국 제7대 대총통
재임기간
2018 - 2019
전임: 룡석안(제6대)
후임: 빅또르 오가르꼬브(권한대행)
재임기간 제헌의회 서리
1992년 1월 19일 - 1993년 2월 5일
만주 공화당의 4대 당대표
2010년 2월 8일 - 2015년 8월 29일
서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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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족 아버지 야꼬브 드미뜨리예비치 아나똘로브
어머니 예까떼리나 드미트리노브나 아나똘로바
배우자 안나 곤스탄티노브나 아나똘로바
자녀 1남 1녀
학력 레닌그라드 국립 대학교 동양학과 박사 / 1981,
묵던 국립 대학교 철학과 석사 / 45회
종교 만주정교회 (세례명:성 의로운 자 삽빠쓰)
정당
의원선수 1(민의원), 2(민의원), 3(민의원), 6(민의원), 7(민의원), 10(민의원), 11(민의원)
의원대수 제1대 민의원, 제2대 민의원, 제3대 민의원, 제6대 민의원, 제7대 민의원, 제10대 민의원, 제11대 민의원,
없음
송산(松山)
서훈
공식 초상화

개요

그레고리 야꼬블레비찌 아나똘로브 (만주어:Григорий Яковлевич Анатолов, 1952년 8월 13일 ~)는 만주 민주 공화국의 정치인으로, 만주 민주 공화국의 제7대 대총통을 역임한 인물이다. 현재까지 유일한 대총통에 오른 오로첸족이다.

일생

그는 1952년 쏘베트 사회주의 공화국 련맹의 극동관구에서 가장 큰 도시인 울라지보스또크에서 태어났다. 울라지보스또크에서 태어난 그는 당시엔 냉전이 절정에 달아가는 시기였고, 울라지보스또크는 특히나 큰 도시중 하나였기에 물자가 풍족한 환경에서 태어났고 부모 또한 여타 평범한 가정이었다.

아버지는 울라지보스또크 쏘베트에서 상급 서기를 맡고 있었고, 어머니는 교사였다. 그는 공부에 재능이 있었고, 삐오네르에서 지역중앙소년위원회의 위원장을, 꼼소몰에서도 호평을 받은 인재로 평가되었고 쏘련공산당에 아버지의 후광과 높은 기대까지 겹쳐지며 입신양명의 길을 탈 수 있었다. 물론 집안의 탄탄한 지원까지 합쳐져 전형적인 노멘끌라뚜라의 길을 타고 있었다.

레닌그라드

그는 공산당원이 된 후 소련의 제2 수도였던 레닌그라드로 진학을 결정하고 씨비리 횡단철도에 발을 옮겼다. 이때 수필인 "고향 떠나는 길(способ уйти из дома)"을 썼다. 이후 이를 가지고 교내 수필대회에서 은상을 받았었다고 한다. 이후 그는 레닌그라드 기차역에서 며칠을 남기고 도시를 구경했다고 한다. 당시엔 대부분 박물관이었던 겨울궁전에서 길을 잃을뻔 한적이 있었다고 회고할때 밝혔었다.

이후 대학에서 그는 동양학과로 진학하였고 본격적인 학문의 길로 빠져들었다. 동북아시아 뿐만 아니라 씨비리까지 폭넓은 지역을 배우는 학과였고, 특히나 우수한 학생으로 알려졌던 그는 연구를 위한 답사에 여러번 끼어갈 수 있었다. 씨비리의 야꾸쯔크같은곳부터 깜챠뜨까까지 씨비리에 이해를 높히는 것에 특출났다고 한다.

이후 박사학위를 받고 고향인 울라지보스또크로 돌아가 관리의 길을 걸었다. 이후 그는 소련에서 엄격하게 여겨지던 금주령을 쥐잡듯이 잡아 많은 비난을 샀지만 당시 유리 안드로뽀브의 술고래 관료들에 대한 질책과 대비되는 이미지로 당중앙으로 승진할 수 있는 기회를 얻었고, 그는 당중앙에서 꼬민떼른 관련 사무로 편입되었다. 동북아시아에서 중국공산당과 만주공산당이 균형을 이루고 있는 상황에서 그는 특사로 만주에 입국하였고, 이때가 1984년이었다.

만주에서의 삶

그는 만주에 입국하고선 바로 사무에 들어갔다. 더불어 틈틈히 그는 논문으로 고향에서 아주 멀리 떨어져온 고려인들과 고향과 가까워 교류가 쉬운 조선인(조선족)과의 비교를 하는 내용의 논문을 준비했었다.[1] 그리고 쏘련과 만주를 자주 넘나들며 삶을 영위하고 있었다. 1991년까지는 말이다.

갑작스런 국제미아

1991년이 되자 소문으로 들리면 붕괴가 현실이 되었다. 그는 만주에서 급히 쏘련으로 가려고 하였으나 당시 만주엔 계엄이 내려져 쉽게 움직일 수 없었고 그는 무국적자로 잠시 구치소에 있다가 풀려났다. 이후 그는 로씨야에서 일어나는 혼란속에 뉴스에서 노멘끌라뚜라들이 모두 감옥에 잡혀들어가는 것을 보고선 겁에 질렸고, 니어후루 아이싱가의 제안에 따라 만주에 귀화하였다. 이 때가 1992년 1월 새해의 일이다.

건국참여

만주에선 니어후루 아이싱가로 대표되던 개혁파가 독재자를 몰아내고 드디어 정권을 탈취하였다. 이때 인재 하나하나 아까운 상황에서 쏘련에서 온 고급 인력인 그를 가만히 놔둘리가 없었고 그는 내각으로 채용되었다. 건국에 직접 참여하면서 초대헌법의 제도적 측면에 대해 견해를 밝힌 바 있고, 1992년 수도 묵던에서 만주 민주 공화국이 선포될때 그 또한 그 자리에 있었다.

안녕하신데 왜 동지는 계속 서구 자본을 추종합니까?
민주화가 자본주의화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란 말입니다.
1992년 만주 민주 공화국 선포 축하 연회에서 그레고리의 인사에 대한 남춘봉의 대답

하지만 그는 만주 인민민주당으로 재편된 만주 공산당과의 인연을 끊어야 했는데, 당시 젊은 층은 전부 공화당으로 빠지고 있던 상황이었으며 특히 제2대 대총통이 될 남춘봉과의 사상적 차이로 인해 당적을 공화당으로 옮기게 되었다. 이후 그는 공화당의 고위 간부로서 오로첸 자치주의 열렬한 지지를 받게 되었고 오로첸 자치주를 공화당 텃밭으로 만드는데 주역으로 부상하였다.

정치생활과 대총통 선거

오로첸 자치주에선 거의 대총통 저리가라 할정도의 정치적 인지도와 인기를 힘입어 민의원 선거에서 거의 고정적으로 계속 당선되어 왔으며 대의원에서 정무총리 (-대)를 역임하였다. 대총통 선거의 때가 오자 그는 오로첸 자치주의 민심을 기본으로 공화당의 기세에 쏠려 대총통 후보로 출마하였고, 결국 2018년 1월 10일 취임하였다.

선거운동 파문과 사임

하지만 그의 선거운동 과정에서 비밀리에 조달되었던 정치자금 스캔과, 그보다도 더 거대하게 터진 스캔인 무개념 지지자들, 광기운동이라는 오명까지 뒤집어 쓰게 되었다.

엎친데 덥친격으로 친척이 그의 이름을 빌려 차명계좌에 투자자금을 비밀리에 모은 것이 감리원에 의해 밝혀지며 집권 초기부터 논란에 휩싸이게 되었다.

당시 만주 공화당은 스캔들에 대해 공과 사는 다르다.라며 일축하려 하였으나, 사실 만주 인민민주당의 정치적 공세가 더해지며 이슈는 점점 불타올랐다. 당시 의원이었던 인민당 소속의 기야무헛 지오로 푸카는 청문회에서 다음과 같이 발언할 정도였다.

"우리 만주 인민들은 당신보다도 더 도덕적이고, 당신보다도 더 청렴결백한 대총통을 가질 자격이 있습니다!"

이런 정치적 공세에 몰린 상황에서 지지자들이 그의 차를 닦아주고, 그의 사택의 담장의 담쟁이덩굴도 뜯어다주는 등 온갖 지지자의 행동보다도 과하다 여겨지는 기행까지 보이며 그는 오히려 더욱 불리해졌고, 결정적으로 그의 아들 드미뜨리 그레고리예비치 아나똘로브의 하르빈 대학교 부정입학까지 밝혀지며 결국 사임해야만 했다.

사임 이후

현재 오로첸 자치주에서 거주하며 만주 공화당의 고문으로 사실상 정치에서 은퇴하였으며, 정교회 성당에서 성경활동에 더욱 힘을 쏟으며 정치를 하는 몇몇 지인을 제외하고는 사교도 없고, 언론에도 얼굴을 비추지 않으며 그를 지금도 지지하는 지지자 잔당이 정당창설을 제의하였으나 끝내 거절하고 야인으로 살아가고 있다.

공식적 활동은 국가수석원로회의 참석과 대총통 취임식 이외에는 없는 것으로 밝혀졌다. 현재 정치를 할때는 등한시 하였던 SNS를 사용하는 것으로 알려지기도 했다. 주로 화초와 자연경관 사진을 올리는 듯 하다. 일기처럼 글을 쓰는데 내용은 " 오늘은 초밥이 맛있었다." 같은 정말 실없는 내용만 올라오며 정치와 연관이 없는 게시물을 주로 작성한다고 알려진 바 있다.

그레고리 아나똘로브 정부

콘스탄틴 마뜨베예브 내각

여담

각주

  1. 이는 나중에 그가 대총통에 재직하기 전 모교인 싼크뜨-뻬쩨르부르그(구 레닌그라드) 국립 대학교에 제출되어 현재 등재되었다. 《고려인과 조선인과의 본토로부터의 거리에 따른 비교, 20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