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동자협회 (카게사가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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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국노동자협회 | 帝國勞動者協會
창당일 1905년 2월 6일
당명변경 1923년 9월 10일 (사회민주당)
후신
주소 한성부 용산부 두텁바위로 160 (후암방)
집행위원장 이동휘 (초대, 4대)
이위종 (제2대)
강기덕 (제3대)
조소앙 (제5대)
민의원 의원 87석 / 440석 (19.77%)
국제조직 국제 사회주의 위원회(ISC)
당가 인터내셔널가

개요

1905년 2월 6일 창당된 대한제국 최초의 혁신, 사회주의 정당이다.

상세

1890년 치뤄진 첫 선거에서 모든 남성들에 한정하여 완전한 보통선거가 실시되었고, 이 덕분에 사상 최초의 전국총선에서 불리할것으로 예상되었던 개화당은 도시와 신공단 지역에서의 노동자들의 몰표덕에 아슬아슬하게 단독 과반을 차지할수있었다. 하지만 개화당이 급진적인 근대화를 추구하는 과정에서 노동자의 권리보다는 산업화와 개발에 몰두하여 노동자의 권리가 점차 소외받자, 일부 노동조합이 자체적으로 무소속의 노동자 후보를 지원하는 방식으로 노동자 대표 민의원을 의회에 진출시키기 시작했다.

허나 개화당의 근대화 중심주의가 극에달했다고 평가받는 이완용 내각이 출범하자 임인총파업을 주도하였던 노동조합들이 독자적인 정치적 세력을 위해 단결해야함에 공감하며 제국노총과 민족노총이 손잡고 1901년 민원노동자위원회를 출범시켰고, 이를 구체적으로 다듬어 최종적으로는 당대 3대 노조였던 제국노총, 민족노총, 대한노총이 참가한 제국노동자협회가 1905년 창당되었다.

제국노동자협회는 창당 후 9개월만에 이완용 내각이 부정선거로 인해 붕괴되면서 열린 총선에서 인천, 동래를 비롯한 대도시와 공단지역에서 승리해 10석이라는 준수한 성과를 내었고, 이완용 내각의 모습에 실망한 도시지역의 시민들 또한 지지자들로 유입되면서 1909년 열린 총선에서는 자유당과 전국적인 득표율에서 4% 이내의 접전을 보이며 당세를 확장해나갔다.

하지만 이동휘가 임기종료로 인해 위원장직에서 내려 온 직후 선출된 신임 위원장 이위종의 사회주의, 공화주의적 성향은 노동자협회를 지지하던 노동자와 시민들은 물론 정부, 심지어 국내정치에 크게 관심이 없던 청류제마저 분노케 할정도였다. 결국 이위종은 정부와 황실에 압박에 의해 위원장직에서 사임하고[1][2], 새로운 위원장으로 강기덕이 취임하였으나 그 또한 직후 발생한 당내불안을 막을 방도는 없었다. 결국 이동휘 초대 위원장이 소방수로 위원장에 재취임하면서 당내불안이 어느정도 진정되고 다시 당세 확장에 나서게된다.

1913년 총선에서 노동자협회는 전체의석 420석 중 64석을 얻으며 직전 선거에 비하여 의석을 크게 늘렸으나, 얼마지나지 않아 1차 세계대전의 발발로 임시적으로 당운영을 중단해야 하였다. 노동자협회는 당에서 대대적으로 반전평화운동에 나서며 중립을 호소하였고, 노령출병 당시에는 내각과 크게 대립하였으나, 이용익 내각의 팽창주의 정책 추구로 인하여 별다른 반항을 얻지는 못하였다.

이용휘 위원장이 1918년 총선에서 노동자협회의 의석 하락에 책임을 지고 사임하면서 조소앙이 새로운 위원장에 취임하였다. 조소앙은 비교적 당내 온건파에 속했고, 그렇기에 이위종, 강기덕 위원장 시절의 흔적들을 지우려고 하였다. 또한 노동정책에 주력하기보다는 전국정책을 연구하여 단독으로 집권가능한 노동자협회를 만들기를 원했다.

이러한 바람이 통했는지 1923년 열린 총선에서 노동자협회는 대도시, 공단권역은 물론이고 일부 영남 향촌지역에서도 승리하며 87석을 얻는 쾌거를 거두었다. 또한 얼마 지나지않아 자유당과 연립내각을 출범시켜 조소앙 위원장이 의정부총리대신 겸 사회대신에 취임하면서 최초로 집권하기도 하였다. 이에 자신감을 얻은 조소앙 위원장은 본격적으로 당개혁에 박차를 가했고, 같은해 9월 당명을 사회민주당으로 변경하면서 노동자협회는 역사속으로 사라졌다.

여담

  • 당내 좌파와 당내 우파의 갈등이 심한편이였다. 당내 좌파는 더욱 급진적인 사회주의와 공화주의적 성향을 추구했고, 우파는 초기 사민주의적 성향의 보였다. 초기에는 당내 좌파가 미세히 우세를 점했으나, 이위종, 강기덕 위원장 시대를 걸쳐 몰락하고 이후에는 대대로 우파가 주도권을 잡았다.

같이보기


  1. 다만 당시 부총리를 지내던 아버지 이범진의 도움으로 법적인 책임을 지지는 않았다.
  2. 이후 이위종은 정계를 은퇴하고 칩거하다가 1938년 한소수교 이후 주소련한국공사를 지냈고, 2차 대전이 발발하면서 귀국한 뒤 정치활동을 재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