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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청국 내각총리대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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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청국 제1·3대 내각총리대신 리훙장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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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 1823년 2월 15일 |
안후이성 허페이현 모단샹(磨店郷) (現 안후이성 허페이시 야오하이구) | |
사망 | 1901년 11월 7일 (향년 78세) |
즈리성 버깅시 현량사(賢良祠) (現 버깅시 시청구 현량사) | |
묘소 | 안후이성 허페이시 다헝지(大興集) |
재임기간 | 초대 내각총리대신 |
1870년 8월 29일 ~ 1885년 4월 21일 | |
제3대 내각총리대신 | |
1885년 9월 5일 ~ 1899년 10월 21일 | |
서명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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휘베르트 보스(Hubert Vos's)가 그린 초상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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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요
청국의 정치인. 제1·3대 내각총리대신을 역임했다.
그의 스승인 징궈판과 함께 유능한 한족 출신 의병장으로 이름을 떨쳤으며 그 명성 덕에 동치제의 부름을 받아 중앙정부로 진출해 그와 함께 동치유신을 주도하였다.
1870년 제도 개편 이후엔 북양통상대신에서 초대 내각총리대신으로 취임해 청 해군의 현대화를 주도하였으며 1889년 흠정헌법대강 제정에 큰 기여를 해 현 청국 입헌군주제의 반석을 마련하기도 했다. 이 때문에 학계에서 그는 현 일본 근대화의 기반을 다진 이토 히로부미와 비교되기도 한다.[1]
생애
유년 시절
의병 시절
집권
자세한 내용은 리훙장 내각 (공금구)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초대 내각총리대신
제3대 내각총리대신
실각 이후
평가
긍정적 평가
부정적 평가
여담
어록
勞勞車馬未離鞍,臨事方知一死難。 지칠 대로 지친 말은 그 안장을 아직 풀지 않았고 큰 일도 성사되지 못했으니 병으로 편히 죽고 싶어도 죽지 못하는구나. 三百年來傷國步,八千里外吊民殘。 나라의 발전이 몇 백 년 동안 뒤쳐졌단 것에 슬퍼하고 몇 백 리 밖의 민생의 어려움을 애도한다. 秋風寶劍孤臣淚,落日旌旗大將壇。 가을바람은 부서져버린 보검(宝剑)처럼 스산하게 불고, 외로운 신하로써 눈물을 흘리고 지는 해는 깃발과 대장단(大將壇)을 비추고 있구나. 海外塵氛猶未息,請君莫作等閒看。 외국의 우리나라 침략 의도는 결코 끝나지 않았으니 모두 이를 등한시하고 방관해서는 아니된다. 그가 죽기 직전에 남긴 절명시 |
각종 매체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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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한편 동치제는 메이지 천황과 주로 비교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