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근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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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마 노동자당 중앙위원회 서기국 주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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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대 개마 노동자당 서기장
박근조
朴勤調 | Park Keun-jo
출생 1923년 7월 1일 (97세?)
대일본제국 요성부 장지면
(現 개마공화국 요성도 장지군 신천정)
국적 무국적
임기 개마공민공화국 총리
1975년 12월 8일 - 1977년 9월 16일
개마 노동자당 서기장
1977년 9월 16일 - 1980년 8월 23일
개마공민공화국 최고내각장관회의 의장
1977년 9월 16일 - 1980년 8월 23일
당적 무소속
약력 개마공민공화국 총리
개마 노동자당 서기장
개마공민공화국 최고내각장관회의 의장

개요

개마의 정치인. 개마공민공화국의 유일 여당이었던 개마 노동자당의 서기장 대리로 1977년부터 1980년까지 3년간 재임했다.

생애

1923년 만주인 아버지와 개마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어릴때 운명을 달리했고 어머니는 매춘부였는데 아편 중독에 걸려 미쳐버렸기 때문에 박근조는 어려운 유년기를 보내야했다. 15세때 공장에서 취업해 두 손가락을 잃었다. 이때 자신들을 도와준 동료들로부터 공산주의 사상을 접한 후 공산주의자가 되었다.

16살때 개마의 지하 사회주의 조직에 가입해 일본의 폭정에 대항해 독립운동을 펼쳤으나, 얼마 안가 붙잡히고 잔혹한 고문을 당한 이후 형무소에 수감되었다. 그러나 불과 수개월만에 소련의 개마 진공으로 개마가 해방되면서 그 역시 자유의 몸이 되었고, 개마 공산당에 입당하며 정치 활동을 시작했다.

그는 가장 밑자리부터 차근 차근 올라가 천우봉 서기장의 측근으로 자리잡았다. 천우봉 서기장이 직접 도맡아 하기 힘든 숙청, 증세 등의 업무를 그가 대신 하였고 또 막대한 정치 자금은 천우봉 서기장에게 바쳤기 때문에, 천우봉은 그를 특히 신임하였다. 1975년 그는 천우봉 서기장에 의해 개마의 총리로 취임하였다.

서기장으로서

1977년 9월 15일 천우봉 서기장이 위급한 상태에 빠져 공무를 수행할 수 없자 개마의 총리였던 그가 대리로 서기장 직을 맡게 되었다. 본래 그는 6개월만 임시로 서기장 대리를 맡기로 되어있었으나, 천우봉의 소련 독살설이 퍼지고 개마 노동자당 내의 친소파가 당내 친중파의 거두였던 천우봉 서기장의 사후 그 지분을 넓히자 이를 막기 위해 긴급 계엄령을 전국에 선포하고 친소파 당원들을 숙청하였다. 명목상 불온 사상을 가진 사상가들을 체포하였으나 실질적으로는 개마 노동자당 내의 친소파들과 민주화 운동가들이 가장 크게 탄압당했다. 이 시기 사망한 인원만 무려 3만명이 넘는다고 추정된다. 자세한 것은 개마 노동자당 숙청 사건 참조.

하지만 국민들에게는 별 인기가 없었는데 가장 큰 이유는 숙청을 통해서 공포감을 조장해 국가를 숨막히는 경찰 국가로 만들었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1970년대 말 개마에 불어닥친 불경기를 해결하지 못하면서 물가 상승률이 폭등했고 이로 인해 반정부 시위가 끊이지 않았음에도 박근조 서기장은 이를 우파 폭동으로 여기고 잔혹하게 진압했다. 이는 1980년 7월 반정 당시 일부 시민들이 쿠데타군에 동조하는 원인을 제공하였다.

게다가 박근조는 언제나 소련이 자신을 암살할지도 모른다는 공포심에 휩싸여있었기 때문에 경호에 공을 들였는데, 이게 지나쳐서 1979년 경에는 국가 예산의 1.3% 정도가 박근조의 경호 비용으로 지출되었다고 한다. 전국에 1,600개 이상의 도청 센터를 설립하고 전국민 도청을 시도한 것 역시 이당시의 일이다. 이 때문에 박근조는 민주주의자들은 물론 개마 노동자당의 당원들에게조차 미치광이에 피해망상증 환자라는 비난을 받았다.

8월 반정과 실종

1980년 8월 5일, 친소파 장군들은 박근조 서기장과 친중파들을 제거하기 위해 쿠데타를 시도하였다. 이를 개마 8월 반정이라고 한다. 쿠데타는 명목상으로는 친소파가 많았던 개마 인민방위군의 주도 하에 이뤄졌으나, 사실상 박근조로 인한 친소파 절멸을 우려한 소련이 쿠데타군을 지원하여 이뤄진 것이며 실제로 소련 붕괴 이후 비밀 문건이 드러나며 경제적 지원은 물론이고 일부 소련군이 쿠데타군으로 위장하여 쿠데타에 가담하기도 하였다고 한다.

이로 인해 친중파 대부분이 숙청당했는데, 정작 박근조 서기장은 어디로 갔는지 행방이 묘연했다. 8월 반정으로 집권한 천도현 서기장은 박근조 전 서기장이 중화인민공화국으로 넘어가 개마를 중공의 위성국으로 만드려는 음모를 진행중이라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이는 사실과는 거리가 멀었으며 그 누구도 박근조 서기장의 행방을 알지 못했다. 심지어 반정 도중에 박근조 서기장이 총살당했음에도 불구하고 천도현 서기장이 친중파 대숙청과 국민 공포심 조장을 위하여 이를 감추고 있다는 음모론까지 나돌았다.

그런데 2017년, 현재는 개마의 대통령 관저로 쓰이는 구 서기장 관저를 개보수할때 지하 1층에서 시작되어 청진시 외곽까지 연결되는 기다란 지하 통로가 우연히 발견되었다. 박근조 서기장이 이 비밀 통로를 통해 밖으로 빠져나갔는지 아닌지는 현재까지 확인되지 않고 있으나 사실상 정설로 받아들여진다.

1923년생인 박근조 서기장이 현재까지 살아있다면 97세인만큼 살아있을 가능성은 희박하나 2000년대 초까지 도쿄, 오사카 등 일본의 주요 도시에서 박근조와 비슷한 모습을 한 개마인을 보았다는 사람들이 나왔기 때문에 밀항선을 타고 일본으로 망명한게 아니냐는 추측이 설득력있게 받아들여지기도 한다.

평가

집권 이전에는 권력에 아부한 부패 공무원으로, 집권 도중에는 무자비한 대학살과 국세 낭비, 민주화 운동 탄압 등으로 인해 평이 매우 나쁘다. 그나마 천우봉 서기장은 경제를 회복시켰다며 어느정도 긍정적인 평가를 받기도 하지만 박근조는 그런것도 없이 경제를 오히려 망쳤기 때문에 공산주의 정권을 기억하는 노년층들이 몹시 싫어하는 사람이다.

실제로 2019년 모 여론조사 기관에서 공산 정권 시절 관계자들의 선호도를 조사한 적이 있는데, 현우봉은 긍정 40%, 부정 54%로 나왔고 박근조의 후임이자 그의 정적이었던 천도현은 긍정 27%, 부정 63%였던 반면에 박근조는 긍정평가가 한자릿수를 넘지 못했고 부정평가는 80%대에 이르면서 여전히 국민들에게 매우 부정적으로 인식되고 있음을 보여주었다.

소속 정당

소속 기간 비고
1945 - 1951 정계 입문
1951 - 1980 개마사회당과의 합당
무소속 1980 - ? 제명

여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