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일:개노당.png 개마 노동자당 중앙위원회 서기국 주석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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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 개마 노동자당 서기장 현우봉 鉉優鳳 | Hyeon Uh-bong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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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 1896년 12월 7일 |
대개마국 신흥부 함흥목 성서정 (現 개마공화국 함흥목 중성구) | |
사망 | 1977년 10월 21일 (향년 80세) |
개마공민공화국 청진직할시 중구 관저 | |
국적 | 파일:개마공민공화국 국기.png 개마공민공화국 |
임기 | 개마 노동자당 서기장 |
1945년 10월 7일 - 1977년 9월 15일 | |
개마공민공화국 최고내각장관회의 의장 | |
1946년 1월 1일 - 1977년 9월 15일 | |
종교 | 무종교 (국가 무신론) |
소속 정당 | |
약력 | 신페이공업사 노동조합 조합장 고려공산당 창당 발기인 동북항일연군 복무 개마 공산당 제12대 서기장 개마 노동자당 초대 서기장 개마 최고내각장관회의 의장 |
개요
개마의 정치인, 사회 운동가, 혁명가. 개마공민공화국의 유일 정당인 개마 노동자당의 초대 서기장이자, 22년간 권좌를 지킨 독재자이다.
생애
유년기와 독립 운동
1896년, 조선에서 개마로 이민을 온 빈농의 자식으로 태어났다. 집은 매우 가난했으므로 소학교 수업조차 받을 수 없어 10대때부터 막노동과 농사를 전전해야했다. 그러던중 공장에서 일하던 동료에 의해 우연히 공산주의 이론을 접한 이후 마르크스주의자가 되었다. 또한 공산주의를 이해하기 위해 스스로 문자를 익히고, 돈이 생기면 닥치는대로 마르크스, 앵겔스 등 공산주의 사상가들의 서적을 읽었다고 한다. 그러던 1917년 소련에서 공산주의 혁명이 일어나자, 그 역시 일본에서 개마를 독립시킨 이후 공산주의 혁명을 일으켜야한다는 사명감을 가지고 1918년 6월 자신이 일하던 공장에서 노조를 결성하고 파업을 일으켰다. 일본 당국은 이들을 잔혹하게 진압했지만 현우봉만은 구사일생으로 목숨을 건져 만주 지역으로 도주할 수 있었다.
1920년 그는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대한 소식을 듣고 상해 조계지에 위치한 임시정부를 찾아갔지만 답이 없다고 판단하여 만주에 잔류하였다. 하지만 한인들과 협력하여 공산주의 정당을 건설하려는 시도를 멈추지 않았고 만주에서 소련으로 넘어가 소련 공산당 간부들과 만나기도 하고, 이르쿠츠크와 상해의 고려공산당 창당에 참여하기도 하였다.
1930년대에는 더욱 적극적인 독립 운동을 벌였다. 특히 동북항일연군과 협력하여 김일성 장군과 함께 공산주의 투쟁을 전개했으며, 중국 공산당과의 연계 활동을 통하여 1930년대 중반쯤 그는 이미 국내외적으로 유명한 공산주의자가 되었다. 그는 만주 및 중국 관내에서의 투쟁만으로는 부족하다고 생각하여 1937년 몰래 개마로 입국해, 벽돌공으로 신분을 숨기고 개마의 지하 사회주의 정당 조직의 투쟁을 도왔다. 1944년 개마가 소련군에 의해 해방되자 그는 개마의 해방을 알리는 연설을 통해 개마의 일반 군중들 사이에서도 차지 지도자감으로 주목받았다.
개마 공산당의 서기장
1945년 현우봉은 개마 공산당의 서기장으로 취임하였다. 이는 중국 공산당과 소련 공산당이 둘 다 현우봉과 우호적인 관계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또한 현우봉이 개마 내에서 직접 공산주의 운동을 지휘했던만큼, 국내적으로 노동조합을 비롯한 거의 모든 사회주의 단체들이 현우봉을 공산당 서기장으로 지지했으므로, 그는 다른 정적들을 제치고 공산당 서기장이 될 수 있었다.
1946년 1월 1일 개마공민공화국이 건국되었다. 공민공화국의 여당이었던 공산당의 서기장 현우봉은 막대한 권력을 가지게 되었고 자연스레 독재자의 길을 걸었다. 47년 5월 총선이 치뤄졌으나 부정선거로 의미가 없었고 현우봉은 해방된 새로운 개마의 지도자로 그 입지를 굳혔다.
노동자당 창당과 장기 독재
말년
1977년 8월 급작스레 쓰러진 이후 건강을 회복하지 못했다. 그는 80세로 이미 고령이었지만 건강했기 때문에 급작스러운 건강 악화에 개마 노동자당은 큰 혼란에 빠졌다. 1977년 9월 15일, 현우봉 서기장은 더이상 서기장으로서의 직무를 수행할 수 없음을 인지하고 서기장직을 사퇴하였다. 서기장직은 그의 심복이자 총리였던 박근조가 이어받게 되었다. 1977년 10월 21일 현우봉 서기장은 숨을 거두었으며 공민공화국 정부에 의해 국장이 선포되었다. 이후 1989년 개마 공산 정권이 붕괴될때까지 10월 21일은 "혁명지속절"이라는 이름의 공식 공휴일로 지정되었다.
소련의 암살설
평가
긍정적 평가
부정적 평가
소속 정당
소속 | 기간 | 비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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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공산당 | 1921 - 1922 | 정계 입문 |
무소속 | 1922 - 1929 | 해산 |
1929 - 1930 | 창당 | |
무소속 | 1930 - 1932 | 해산 |
1932 - 1951 | 재창당 | |
1951 - 1977 | 개마사회당과의 합당 사망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