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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세계관의 모든 인물, 사건, 단체, 국가는 가상이며 현실의 어떠한 인물이나 단체도 찬양하거나 비하할 의도가 없음을 알려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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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국 대통령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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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국 제3-7대 대통령 쁠랙 피분송크람 | แปลก พิบูลสงคราม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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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 1897년 7월 14일 | ||||||||||||||||||||||||||||||||||||||||||
시암 논타부리 | |||||||||||||||||||||||||||||||||||||||||||
사망 | 1964년 6월 11일 (66세) | ||||||||||||||||||||||||||||||||||||||||||
스위스 베른 | |||||||||||||||||||||||||||||||||||||||||||
국적 | 태국 | ||||||||||||||||||||||||||||||||||||||||||
재임 기간 | 태국 제3대 대통령 | ||||||||||||||||||||||||||||||||||||||||||
1933년 4월 8일 ~ 1938년 4월 7일 | |||||||||||||||||||||||||||||||||||||||||||
태국 제4대 대통령 | |||||||||||||||||||||||||||||||||||||||||||
1938년 4월 8일 ~ 1943년 4월 7일 | |||||||||||||||||||||||||||||||||||||||||||
태국 제5대 대통령 | |||||||||||||||||||||||||||||||||||||||||||
1943년 4월 8일 ~ 1948년 4월 7일 | |||||||||||||||||||||||||||||||||||||||||||
태국 제6대 대통령 | |||||||||||||||||||||||||||||||||||||||||||
1948년 4월 8일 ~ 1953년 4월 7일 | |||||||||||||||||||||||||||||||||||||||||||
태국 제7대 대통령 | |||||||||||||||||||||||||||||||||||||||||||
1953년 4월 8일 ~ 1957년 9월 16일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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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요
태국의 제3-7대 대통령. 현대 태국의 국부라고 불리는 인물로서, 시암 혁명을 주도한 인물로서 좌익 파시즘적 사상을 추종하며 군사 독재를 행함과 동시에 태국 제2공화국을 출범시킨 등의 행보로 인하여 태국 근현대사를 관통하는 인물이라고 평가받는다.
생애
평가
태국의 봉건주의를 탈피시키고 일제로부터 나라를 지킨데다 각종 위대한 체제 개혁을 이뤄냈다는 긍정적인 평가와 어쨌거나 군사독재와 쿠데타를 자행하며 민주주의를 훼손시킨 독재자일 뿐이라는 부정적인 평가가 태국 내에서 공존한다.
다만 부정적인 평가는 주류가 아닌데, 공화정을 출범시킨 현 체제의 효시인데다 항일 운동 및 여러 사회·체제 개혁을 이뤄낸 공이 워낙 큰지라 위인으로 대우하는 여론이 거의 대부분이다. 특히 2차 대전 종전 이후 인기가 엄청났기에 본인이 마음만 먹으면 새로운 왕조를 열 수 있었는데도 그러지 않고 공화정을 유지시켜 못 다한 개혁을 완수했다는 점에 대해 긍정적인 평가가 많다.
또한 독재를 하긴 했으나 부정선거를 통해 연임한 것이 아닌 국민들의 합법적인 지지를 바탕으로 계속 연임한 것이기에 태국 내에서는 송크람이 독재자라는 비판이 별로 힘을 얻지 못하고 있다.
다른 정치인과의 관계
쁘리디 파놈용
인민당에서 함께 활동했던 쁘리디 파놈용과는 영원한 정치적 동지였으며, 쁠랙 피분송크람 역시 그의 사상에 감명받아 시암 혁명을 통한 급진적 체제 변혁을 이룩하고자 하였다. 제2공화국 설립 이후로도 쁠랙 피분송크람은 쁘리디 파놈용을 총리로 임명하여 함께 개혁을 추진하였다. 쁘리디 파놈용의 사회주의 정책에 경도된 쁠랙 피분송크람은 군사 쿠데타와 군국주의를 통해 이상을 급진적으로 실현시키고자 하였고 그 결과 좌익 파시즘의 대표 주자가 되었다. 또한 일본의 제국주의 정책에 반대하여 자유 타이 운동을 쁘리디 파놈용과 함께 조직하여 활동하기도 하였다.
9.16 쿠데타 이후 두 사람은 함께 스위스로 망명하였고, 쁠랙 피분송크람은 1964년 현지에서 사망하였으나 쁘리디 파놈용은 1975년 당시 태국 대통령이던 타놈 끼띠카쫀의 배려로 태국으로 귀국하여 1983년까지 고국에서 여생을 보낼 수 있었다.
사릿 타나랏
사릿 타나랏은 본래 쁠랙 피분송크람이 기용한 인물이였으며, 우익·왕당파 세력의 여러번의 쿠데타를 막은 것을 바탕으로 타나랏은 송크람의 신임을 받았다. 그리고 그 신임을 바탕으로 그리고 쿠데타를 방지한다는 이유 아래 타나랏의 정치적인 영향력 또한 커져갔다. 그러나 급진적 개혁주의자였던 송크람과 달리 타나랏은 점진적인 개혁을 주장했기에 1950년대 중반 이후 사이가 멀어져 타나랏은 송크람과는 거리를 두기 시작했고, 결국 1957년 9.16 쿠데타로 타나랏이 송크람을 몰아낸 뒤 자신이 대통령이 된다.
다만 타나랏은 쿠데타 이후로도 송크람에 대한 격하를 하지는 않았고, 대신 송크람의 업적은 분명했지만 그것이 더 이상 실정에 맞지 않기에 내가 그것을 개량하겠다는 논리로 집권을 이어나갔다.
선거 이력
연도 | 선거 | 선거구 | 소속 정당 | 득표수 (득표율) | 당선 여부 | 비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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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2 | 제1대 태국 대의원의원 선거 | 논타부리 제1선거구 | 인민당 | 97,398 (68.8%) | 당선 (1위) | 초선[1] |
1933 | 제3대 태국 대통령 선거 | 태국 | 9,138,413 (75.2%) | 초선 | ||
1938 | 제4대 태국 대통령 선거 | 9,915,517 (70.9%) | 재선 | |||
1943 | 제5대 태국 대통령 선거[2] | 8,074,944 (77.8%) | 3선 | |||
1948 | 제6대 태국 대통령 선거 | 14,165,866 (70.0%) | 4선 | |||
1953 | 제7대 태국 대통령 선거 | 14,165,866 (70.0%) | 5선[3] |
소속 정당
소속 | 기간 | 비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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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민당 | 1932 - 1942 | 정계 입문 입당 |
무소속 | 1942 | 일본군에 의한 강제 해산 |
자유 타이 운동 | 1942 - 1945 | 창당 |
무소속 | 1945 - 1947 | 해산 |
인민당 | 1947 - 1957 | 재창당 |
무소속 | 1957 - 1964 | 9.16 쿠데타로 인한 정계 은퇴 사망 |
어록
인민들의 삶을 더 낫게 하기 위해선 때론 무력 역시 필요한 법이다. 제1차 시암 혁명을 성공시키고 나서 한 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