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식

상식
Common Sense
장르 대체역사
참여자 Nebraska Admiral
연재 시작일 2024년 9월 21일
(연재 시작일로부터 +94일, 0주년)
라이선스

개요

제헌의회의 인민 여러분, 대체 누가 우리들더러 잔혹하다고 할 수 있단 말입니까? 우리 혁명재판소는 올해 300명의 반동분자 쓰레기들을 처단했습니다. 동지들, 마음을 약하게 먹어서는 안됩니다!
벤자민 프랭클린 바셰

상식(Common Sense)은 미국 독립혁명이 실패하고, 더 급진적인 제2차 미국 혁명이 발발한 대체역사 세계관이다.

세계관 명은 미국의 혁명가 토머스 페인이 1776년 출판한 팜플렛 <상식(Common Sense)>에서 따왔다.

세계관 설명

아메리카 혁명

우리는 다음과 같은 사실을 자명한 진리로 받아들인다. 즉 모든 인민은 평등하게 창조되었고, 몇 개의 양도할 수 없는 권리를 타고났으며, 그 권리 중에는 생명과 자유와 평등의 추구가 있다. 이 권리를 확보하기 위하여 인류는 정부를 조직했으며, 이 정부의 정당한 권력은 인민의 동의로부터 유래하고 있는 것이다.
제2차 미국 독립선언문

1780년, 미국 독립을 지지하는 대륙군 사령관 조지 워싱턴의 참모, 알렉산더 해밀턴이 영국군에 포로로 붙잡혔다. 해밀턴은 목숨을 부지받는 댓가로 대륙군의 기밀정보를 모두 넘겼고, 이는 요크타운 전투에서 대륙군이 패배하는 결과를 불러왔다. 대륙군은 지지부진한 유격전 끝에 결국 1783년, 항복을 선언했다. 워싱턴을 비롯한 반란의 주동자들은 모두 교수형에 처해졌다. 에런 버, 베네딕트 아놀드[1]같은 대륙군의 잔당들은 세력을 모아 프랑스령 루이지애나나 스페인령 쿠바등으로 흩어졌다. 워싱턴의 반란은 그렇게 실패로 끝났다.

10년이 지난 1793년, 영국은 혁명이 발발한 프랑스와 전쟁을 벌이고 있었고, 전쟁 자금을 충당하기 위해 북아메리카 식민지에 다시금 과도한 세금을 부과하기 시작했다. 워싱턴의 반란 이후 자치권도 뺏긴 채 배척받아온 식민지는 세금 마저 늘어나자 더이상 버틸 수 없다며 들고 일어섰다. 그 중심에는 독립선언문의 작성자, 벤자민 프랭클린의 손자 벤자민 프랭클린 바셰가 있었다. 그는 자신의 신문사 필라델피아 오로라를 이용해 아메리카 식민지 전역에 혁명을 선동했다. 이는 영국의 통치에 불만을 품고있었던 식민지인들을 자극했고, 워싱턴의 반란을 가볍게 뛰어넘는 대규모 반란을 불러오게되었다. 이전의 반란과 차이점이라면, 이번에는 식민지 엘리트들이 아닌 민중들이 직접 이 '혁명'을 주도하고있다는 것이었다.

소위 이 '혁명군'은 이전 반란에서 교훈삼아 민심과 결합하기위해 힘썼다. 바셰와 필라델피아 오로라의 도움을 받아, 혁명군은 왜 식민지인들이 영국의 통치에 맞서고 독립을 쟁취해야하는지 적극적으로 설득했다. 다행히 10년간 통치에 환멸난 지역상인들은 혁명군에게 적극적으로 협력했다. 혁명군은 이들의 지원하에 북아메리카 전역에서 게릴라 전술을 펼쳤고, 마침내 포토맥 언덕에서 영국군 주력부대를 궤멸시키면서 결정적인 승리를 거두게되었다. 이미 프랑스 혁명정부와 싸우는데 벅찼던 영국은 훗날 캐나다라 불리는 루퍼츠랜드를 제외한 모든 북아메리카 식민지를 혁명군측에 넘겨줘가며 전선에서 이탈하고자 했다. 그렇게 식민지인들은 10년이 넘는 세월만에 독립을 되찾았다.

바셰는 프랑스의 자코뱅을 본따 매우 급진적인 형태의 헌법을 제정하고자했고, 이 과정에서 조지 클린턴과 같은 보수파의 반발에 부딪혔다. 이에 바셰는 공포 정치를 시행하며 대대적인 보수파 숙청 작업을 벌였다. 수많은 피가 허드슨 강에 흐른 끝에, 그가 제안한 헌법은 제헌의회에서 만장일치로 통과되었다. 이제 식민지인들에게는 독립뿐만 아니라 헌법도, 나라도 있었다.

그들은 이 새로운 나라를 컬럼비아 공화국이라 이름지었다.

프랑스 혁명

여러분은 어떤 정부가 승리했는지를 알고 있습니까? 국민공회의 정부입니다. 빨간 보닛을 쓰고 거친 모직 옷을 입고 나무신을 신은, 보잘 것 없는 빵과 질 나쁜 맥주를 먹으며, 너무 피곤해서 더이상 깨어서 논의할 수 없을 때는 그들 집회실의 마룻바닥에 깔려 있는 이불 위로 잠을 자러 갔던 열정적인 자코뱅의 정부입니다.
막시밀리앙 드 로베스피에르

프랑스는 북아메리카 식민지의 소위 '분리주의자'들을 대대적으로 지원했다. 하지만 워싱턴의 반란은 실패로 끝났고, 프랑스는 빚더미 위에 앉게되었다. 급진적인 지식인들과 민중들은 이 모든 문제의 책임을 국왕 루이 16세에게 돌렸다. 혁명의 분위기는 점차 고조되기 시작했고 마침내 1789년, 바스티유 감옥 습격으로 절정에 달했다. 현실에서 자제심을 가졌던 민중들은 참지않고 즉각적인 공화정 수립을 부르짖었다. 한때 국왕의 충성스러운 신하였던 시골의 농민들조차 혁명에 적극적으로 가담했다. 1789년 말, 루이 16세와 마리 앙투아네트를 비롯한 왕족들, 그리고 파리의 귀족들은 모두 단두대에서 명을 달리했다. 권력에 공백이 생긴 가운데, 젊은 혁명 지도자 막시밀리앙 로베스피에르는 그의 자코뱅 동지들과 함께 즉시 국민공회를 수립하고 새 헌법을 선포했다.

하지만 혁명이 순조롭게만 흘러간건 아니었다. 프랑스내 잔존한 왕당파는 영국, 프로이센, 오스트리아같은 외국 세력과 결탁해 혁명의 불씨를 짓밟으려 시도했다. 국민공회 지도자들은 즉시 계엄령을 선포하고 물가 안정책과 징집령을 발표했다. 민중들은 징집령에 불만을 품었지만 동시에 외세의 침략에 분노했으며, 수만명의 프랑스 민중들이 새로 만들어진 인민위병(Garde populaire)에 기꺼이 참여해 혁명을 방어하고자 했다. 프랑스는 이러한 기세에 힘입어 초기 열세를 극복했다. 1793년 발발한 북아메리카에서의 2번째 혁명은 영국의 압박에 허덕이던 프랑스에게 숨구멍을 틔워주었다. 나폴레옹 보나파르트같은 젊고 유능한 장교들의 활약으로, 혁명정부는 프랑스의 대부분 지역을 통제에 두는데 성공했다.

네덜란드와 이탈리아, 아일랜드마저 공화혁명의 분위기에 휩쓸린 가운데, 대프랑스 동맹내에서는 전쟁을 이만 끝내야한다는 여론이 우세해졌다. 한편, 프랑스내에서도 지롱드를 중심으로한 온건파가 화평을 주장하기 시작했다. 이러한 이해관계가 맞아떨어지면서 양측은 평화협정을 체결했고, 소위 프랑스 혁명전쟁은 끝이 났다. 흘린 피에 비하면 석연찮은 결과였지만, 어쨌든 프랑스의 아들과 딸들은 집으로 되돌아갈 수 있게되었다.

북미의 컬럼비아에 이어, 프랑스 공화국이 유럽의 공화주의 보루로 우뚝 섰다.

현재

혁명이 일어나는 것은 사회라는 인간의 스프링이 견디지 못할 정도로 구부러지기 때문이다. 인민은 억압에 대항해서 반란을 일으키는 바, 사회의 존재 이유가 최대 다수의 이익을 도모하는 데 있기 때문에 이런 반란은 옳은 일이다. 인민이 아직 허리가 꺾이도록 구부러져 있다면, 통치가 뭐라고 말하든 그건 중요한 게 아니다. 혁명은 아직 끝난 것이 아니다. 만약 혁명이 완수된 것이라면 지금의 통치자들이 죄를 저지른 셈이다.
프랑수아노엘 바뵈프

급진적인 공화주의 헌법을 토대로 세워진 쌍둥이 공화국들은 19세기, 사회주의가 태동하기 시작하면서 더욱 급진적으로 변하기 시작했다. 1848년 혁명이나 파리 코뮌은 그러한 움직임의 일환이었다. 한편 급진 공화주의와 권위주의간 대립은 대전쟁의 발발로 번지기도 했다. 그 일련의 과정 이후, 현재 2024년의 컬럼비아 공화국과 프랑스 공화국은 명실상부한 세계의 양대 강대국으로 서있다.

설정

국가

G8

※ 3개국 미정

인물

주요 사건

18세기

19세기

20세기

21세기

국제기구

  1. 알렉산더 해밀턴이 배신한 나비효과로, 영국군에 항복하지않고 끝까지 대륙군에 남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