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학규 (총리님)



대한민국 대통령
[ 펼치기 · 접기 ]
초대 제2대 제3대 제4대
이승만 장면 윤보선 박정희
제5대 제6대 제7대 제8대
김영삼 김대중 김종필 이회창
제9대 제10대 제11대 제12대
노무현 손학규 정동영 오세훈
고조선 · 부여 · 원삼국 · 고구려 · 백제 · 가야 · 신라 · 탐라
발해 · 후삼국 · 고려 · 조선 · 대한제국 · 대한민국 임시정부

대한민국 제10대 대통령
손학규
孫鶴圭 | Sohn Hak-kyu
출생 1947년 11월 22일 (75세)
경기도 시흥군 동면 시흥리
(現 서울특별시 금천구 시흥동)
재임기간 제10대 대통령
2012년 7월 3일 ~ 2015년 10월 25일
사저 전라남도 강진 다산초당 백련사 인근 토굴
서명
링크 | | | |
[ 펼치기 · 접기 ]
본관 밀양 손씨
부모 아버지 손병화, 어머니 양현자
형제자매 형 손홍규, 손덕규, 손상규
누나 손명규, 손복규, 손정규
배우자 이윤영
자녀 장녀 손원정, 차녀 손원평
학력 서울매동국민학교 (졸업)
경기중학교 (졸업)
경기고등학교 (졸업 / 61회)
서울대학교 사회과학대학 (정치학 / 학사)
옥스퍼드 대학교 대학원 (정치학 / 석사·박사)
병역 대한민국 육군 병장 만기전역
종교 개신교 (기장)
신체 170cm, 67kg, AB형
소속 정당 무소속
의원 선수 5
의원 대수 (민) 12, 13, 14, 15, 17
약칭 孫, HK, 손통
청와대 공식 초상화

대한민국 제10대 대통령 취임 선서

개요

대한민국의 제10대 대통령

정치인 경력

1993년에 당시 인재영입위원장을 지내던 김영삼 전 대통령에게 발탁되어 민주당에 입당하며 정계에 입문하였고, 같은해 상반기 재보궐 선거에서 경기도 광명시 을 선거구에서 당선되어 12대 민의원으로 의회에 발을 들였다.

이후 1994년 13대 민선에서 같은 선거구에서 재선에 성공했다. 이후 1996년에 이회창 대통령의 민주당으로 정권교체에 성공하자 같은해 7월에 보건복지부 장관에 임명되었다. 원래는 12월에 있을 지방선거에서 경기도지사 출마를 권유받았으나 한사코 거절하였다고 한다. 이후 손학규가 거절한 경기도지사직은 같은당의 임상열 산업자원부 장관에게 넘어가게 된다.

이후 강력한 이회창 정부의 지지도와 반북열풍을 등에 엎고 치루어진 14대 민의원 선거에서 60%에 육박하는 58.7%의 득표율로 3선을 달성하였다. 이후 통일전쟁이 발발하자 거국내각에서 이북복지특임장관에 임명되었다. 임명 직후 손학규의 건의로 실시된 이북지역 특별배급제가 큰 효과를 거두면서 본격적으로 자신의 이름을 알렸다. 자연스럽게 15대 민선에서도 당선되어 4선에 성공했다.

이후 이북복지특일장관에서 사퇴한 뒤 조용히 의원직 생활을 하였다. 이후 제14회 지방선거가 다가오자 의원직을 사퇴하고 경기도지사에 출마하여 당선되었다. 참고로 이는 최초로 이북 경기지역에서 표를 얻어 당선된 경기도지사이다. 당시 손학규 대통령은 이북지역에서 56%라는 준수한 득표율을 올렸다.[1]

경기도지사로서 무난한 평가를 받은 뒤 2008년 15회 지방선거에서는 불출마하고 대신 같은해 노무현 정권에서 국무총리에 임명되었다. 2010년에는 17대 민선 출마를 위해 국무총리직을 사임하고 최초로 이북지역이 참여한 17대 민선을 선대위원장으로 이끌었다. 결과적으로는 민선 직전 불던 사회당 열풍을 잠재움과 동시에 자유당의 이북 지역 진출을 막아내며 레임덕과 많은 정권의 논란에도 불구하고 203석 이라는 준수한 결과를 이끌어내면서 차기 대권 주자로 발돋움 하였다. 본인 역시 민주당 공천 기준 논란, 비례순번 논란 등이 있었지만 자유당도 같은 짓을 한 바람에 묻혔고(...) 비례대표 2번으로 출마해 무난히 당선되었다.

결국 2011년 11월 개최된 민주당 제17대 대통령 경선에서 노무현 정권에서 이북안정화특임장관을 지낸 정동영을 꺾고 대통령 후보로 지명되었다. 이때 인지도를 높이기 위한 "100일 민생 대장정"을 진행했는데 이가 엄청난 인기를 얻으것 역시 상당한 역할을 했었다. 허나 친노계와 갈등을 우려한것인지 부통령 후보로 2위인 정동영을 지명하였다.

이후 정세균 대표가 2011년 하반기 재보궐 선거의 참패를 지고 민주당 대표직을 사퇴하자 대통령 후보 겸 비대위원장에 올라 제19대 참선을 지휘했다. 당시 노무현 정권은 대선을 반년도 안남긴 시점에서 지지율이 15%를 달성하는 등 직전 민선보다 레임덕이 극심한 상황이였음에도 불구하고 박근혜 자유당 총재의 여러 논란과 참선 패배시 후보직을 사퇴하겠다는 승부수로 상황을 반전시켜 참선에서 극적으로 승리하며 참선의 진정한 승리자가 되었다. 참선 2개월 뒤 열린 대통령선거에서도 자유당의 정몽준원희룡을 꺾으며 42.12%의 득표율로 당선되었다.

대통령 시절

한명숙 게이트

2015년 1월, 한명숙 불법정치자금 수수 사건이 발발하며 손학규는 본인의 정치인생 최악의 위기를 맞게된다. 한명숙 전 국무총리가 제17대 대통령 선거에서 손학규 캠프에 참여했을 당시 한신건영에서 9억원의 정치자금을 수수한 혐의로 구속되자 손학규 대통령은 대국민 담화까지 열며 연관 사실을 부인했으나 검찰의 수사결과 손학규 대통령이 이를 알았음에도 묵인한 사실이 들어난것이다.

결국 같은해 5월에 있는 참의원 선거에서 민주당이 참패했다. 청와대는 "민심을 겸허히 받아들이겠다"라는 입장문을 발표했으나 위 사안에 대해서는 "당연히 정당히 받은것인줄로 알았다"라고 해명했다. 허나 이후 한명숙 전 국무총리가 박연차 회장에게서 500만 달러 가량의 뇌물을 수수하였고 이를 손학규 캠프측에서 확인하고 사용했다는 사실이 확인되면서 전국민적으로 손학규 대통령에 대한 반대 여론이 폭발해 대규모 촛불집회가 전국에서 산발적으로 일어나기 시작했다.

결국 손학규 대통령은 다시 한번 대국민담화를 열어 특검과 수사를 받아들이겠다 했으나 이미 자유당과 공화당에서 대통령 탄핵소추안 발의를 예고해둔 상황이였고, 결국 3차 대국민담화 직전인 2015년 10월 15일 민의원에서 탄핵소추안이 찬성 373, 반대 80이라는 압도적인 격차로 통과됨과 동시에 민주당에서 출당되며 완전히 정치적으로 사형선고를 받았다.

결국 2015년 10월 16일 제3차 대국민담화에서 달 내 대통령직을 하야할것임을 발표하였고 같은달 25일, 대통령직을 하야하고 청와대에서 퇴거해 마포구 자택으로 이동하였다. 이후 대통령직은 부통령이던 정동영 대통령에게 계승되었다.

사퇴 이후

사퇴 직후 손학규 대통령은 법원에 의해 구속되었다. 이후 2017년 6월에 뇌물수수 및 기타2개의 혐의가 인정되어 징역 15년 및 10년 간의 피선거권 박탈을 확정지었다. 이후 서울구치소에 수감되었다.

이후 조용히 4년간 복역하다 2022년 신년 특별사면 대상에 포함된것이 확인되었다. 이후 2022년 특별사면 및 복권되어 석방되었다. 이후 정치적 행동을 보인 가능성이 높다는 세간의 예측에도 불구하고 본인이 평소 자주 가던 절인 전라남도 강진 다산초당 백련사 인근에 토굴을 만들고 칩거를 시작했다. 이후에는 간간히 SNS가 올라오는것을 제외하면 큰 활동은 없는편.

소속 정당

소속 기간 비고
1993 - 2015 정계입문
무소속 2015 - 한명숙 게이트로 인한 출당

선거 이력

연도 선거 선거구 소속 정당 득표수 (득표율) 당선 여부 비고
1993 1993년 재보궐선거 경기 광명 을 민주당(1991년)_(한나라) 20,583표 (44.94%) 당선 (1위) 초선
1994 제13대 민의원 의원선거 31,544표 (42.65%) 재선
1998 제14대 민의원 의원선거 48,176표 (58.70%) 3선
2002 제15대 민의원 의원선거 34,967표 (54.33%) 4선[2]
2004 제14회 지방선거 경기도지사
표 (%) 초선
2010 제17대 민의원 의원선거 비례대표 표 (%) 당선 (2번) 5선[3]
2012 제17대 대통령 선거 대한민국
표 (%) 당선 (1위) 초선[4]

여담

각주

  1. 하지만 이는 이북 경기, 이북 강원지역에 한정된것으로 당시 이북지역은 투표권은 커녕 계엄령도 해제되기 전이였다.
  2. 2002.9.12 경기도지사 출마를 위한 사퇴
  3. 2011.12.31 대통령 선거 출마를 위한 사퇴
  4. 2015.10.25 불명예 하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