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재호 (개화)


대한민국 해군도총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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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1·4대 해군통제사
이재호
李在頀 | Lee Jae-ho
▲ 이재호 제독의 사진. 언제 찍힌 사진인지는 알 수 없다.
출생 1844년 3월 26일
조선의 기 조선 (정확한 출생지 불명)
사망 1910년 5월 28일 (향년 66세)
대한민국의 기 대한민국 한성
국적 조선의 기 조선
대한제국 (개화)의 기 대한제국
대한민국의 기 대한민국
재임기간 대한민국 초대 해군통제사
1897년 3월 8일 ~ 1900년 6월 20일
대한민국 제4대 해군통제사
1905년 9월 13일 ~ 1907년 8월 26일
[ 군사경력 펼치기 · 접기 ]
복무 조선 수군 (1868년 ~ 1894년)
대한제국 수군 (1894년 ~ 1896년)
대한민국 수군 (1896년 ~ 1897년)
대한민국 해군 (1897년 ~ 1907년)
주요 이력 경상좌도 수군절도사
초대 해군통제사
동해함대 절도사
제주순찰사
제4대 해군통제사
군무성 정책고문
최종 계급 해군 부장 (★★)
참전 이재수의 난 (신축민란)
제2차 극동전쟁
수훈 태극무공훈장 (1905)
훈이등욱일중광장 (1905)

개요

대한민국의 군인. 초대 대한민국 해군통제사[1]로, 초기 해군 창건에 큰 역할을 하였다.

생애

생애 전반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가 별로 없다. 1848년생으로, 정확한 출생지는 알려져있지 않다. 1868년 무과에 급제하였다는 기록이 있으며, 이후 조선 수군에서 주로 복무하였다.

1890년 경상좌도 수군절도사에 부임하여 지역 해안진지를 정비하고 상부에 건의하여 경상좌도 수군을 재조직하였다. 1897년, 수군이 혁파되고 근대적 해군이 창건되면서 해군 참장() 진급과 동시에 초대 해군통제사에 임명되었다. 이후 1900년까지 부임하며 영국으로부터 구축함과 순양함을 도입하고 병참 제도를 정비하는 등 해군의 근대화를 이끌었다. 이후 동해함대 절도사로 자리를 옮겼다.

1901년, 제주에서 이재수의 난이 발생하자 제주 지역의 군사, 행정을 임시 총괄하는 제주순찰사에 임명되어 난을 진압하고 뒷수습을 맡았다. 당시 이재호는 지지부진하던 재판소 설치를 실현시키고 우체서를 설치하는 등 근대적 개혁을 이끌었지만 부자들로부터 함부로 세금을 걷는 월권 행위를 저질렀다. 이로 인해 군검찰의 조사를 받고 불명예 전역을 할 뻔 했으나 그동안의 공이 참작되어 해군본영 연구사로 좌천돼 근신하는 선에서 마무리되었다.

1903년에는 동해함대 절도사에 복귀하였다. 1904년 2차 극동전 당시에는 동해함대를 지휘하여 일본 해군을 지원, 대마 해전에서 러시아 발트함대과 전투를 벌여 승리를 거두었다. 이 공으로 태극무공훈장을 수훈받았고 1905년에는 해군 부장(★★) 진급과 동시에 해군통제사에 재임명되었다. 이후 1907년까지 재임하다가 퇴역하였다.

퇴역 후에는 군무성 정책고문으로 있다가 1910년 한성부에서 폐결핵으로 사망했다.

여담

  • 사후 대장에서 원수로 진급한 초대 공군참모총장 노백린처럼, 대한민국 해군은 해군의 첫 참모총장이었던 이재호의 사후 원수 진급을 추진하였었다. 하지만 그는 최종 계급이 상장도 정장도 아닌 부장이었고, 결정적으로 그의 제주순찰사 시절 월권 행위가 발목을 잡아 원수 진급이 무산되었다. 해군 유일의 원수 자리에 오르는 영광은 후임 지독이자 새 차례에 걸쳐 해군도총관을 역임한 신순성이 가져갔다.

각주

  1. 現 해군도총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