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2대 참의원 의원 선거 (총리님)


대한민국 제12대 참의원 의원 선거

1988년 5월 10일
11대 참선
(제3공화국 참선)
1994년 5월 2일
13대 참선
(제2차 양원동시총선)
투표율 76.32% ▲ 3.19%p
선거 결과

자유 48석 (48%)
(49%) 49석 민주·진보
정당 지역구 비례대표 총합
(기존의석 포함)
비율
자유당 14석 15석 48석 48%
민주당 15석 12석 38석 38%
진보당 4석 4석 11석 11%
공화당 1석 1석 3석 3%

개요

1991년 5월 30일에 시행한 제12대 참의원 의원선거. 선거의 시행 및 개표는 중앙선거관리위원회가 담당하였다. 투표율은 76.32%을 기록했으며, 90년대에 있던 모든 선거 중 최고의 투표율을 기록하였다.

김종필 대통령의 망언에서 시작된 란마 참선는 표면적으로는 일본 문화의 확산과 당시 정치계에서 바라보던 애니메이션 산업의 퇴폐성, 근본적인 문제로는 한일수교협정이 정당했는가에 대한 문제로까지 번졌다. 허나 결과적으로 여야 모두 큰 소득을 얻지는 못한채 선거도, 논쟁도 끝나버리게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존 민주당계의 노선을 문화적으로 좌경화시킨 선거로 기억되고 있다.

상세

선거 전 상황

김대중 대통령에 의해 시행된 한일문화교류 사업으로 수십년간 문을 닫아놓고 미국을 통한 간접적인 교류만을 이어왔던 양국은 마침내 조금씩 상호문호개방을 시작하게 되었다. 이후 김대중 대통령이 김종필 대통령에게 패하며 재선에 실패했음에도 김종필 대통령의 지일정책으로 1990년엔 마침내 양국이 한일수교협정을 맺으면서 마침내 국가 대 국가로서의 외교를 시작하였다.

허나 이 과정에서 청구권 부분에서의 잡음, 일본의 사과없이 진행된 협상의 과정으로 인해 반대의견과 찬성의견이 접전을 이루고 전국적으로 찬반논쟁이 뜨거워지면서 김종필 정부는 일본 문제로 곤경에 처하게 된다. 이러한 상황에서 김대중 정부 당시 방영을 시작해 젊은층에게서 인기를 얻고 있던 애니메이션 란마 특유의 개방적인 애니메이션의 내용은 전통적인 자유당의 지지층에게 상당부분 부정적으로 보일수있는 내용이였다. 그리고 이러한 부정적 면모는 반일감정을 넘어 아예 한일수교협정에 대한 거부감을 일으키게 할수있는 자유당 차원에선 나름 중대한 문제였다. 안그래도 한일협정 문제로 골머리를 앓던 김종필 대통령은 자신이 추진한것도 아닌 정책으로 수입된 애니메이션 하나로 정통적 자유당 지지층마저 본인에게 등을 돌리는 상황이 연출되게 생기자 결국 참다 못해 망언을 터트린다.

란마 같은 퇴폐문화 수입하라고 욕먹어 가면서 수교한게 아닌데
이딴게 신세대면 신세대는 자폭해야

논란이 된 김종필 대통령의 발언

국무회의 도중 한일문화사업에 대해 이야기되던 중 나온 이러한 김종필 대통령의 이러한 망언은 즉각 야당이던 민주당과 진보당의 반발을 일으켰다. 그런데 이러한 망언이 오히려 정통적 자유당 지지층에서의 공감을 일으키면서 불과 4개월 남은 참선에서의 지지층 결집을 돕고 있다는 여론조사들이 발표되자 자유당은 이것을 망언이 아닌 명언으로 퍼트리며 란마 자체를 선거의 주요 의제로 삼기 시작했다. 이에 야당은 김종필 대통령을 맹렬히 비난하는 한편 기존에 펼치던 한일수교협정 반대정책에 반대되는 일본문화전면개방을 제1공약으로 삼으면서 젊은층을 중요 타켓으로한 선거를 펼쳤다. 진보당은 반김종필의 기치 아래 민주당과 선거연합을 성사시키며 의석확보를 노렸다.

이외에도 1인 2표제라 불리우는 비례대표제가 처음으로 시범 도입되었고 얼마남지 않은 서울올림픽 역시 참선 판세에 영향을 주었으며, 김종필 정부의 경제부분에서의 성과 역시 일부 부각되었으나 모두 란마 논란 하나로 묻히고 말았다(...). 결국 대다수 언론에서는 제13대 참선을 란마 총선이라 명칭을 붙이며 사상 최초로 특정 애니메이션 명칭이 선거의 명칭이 되는 사태가 일어나게 되었다. 하지만 이 사태의 여파인지 오히려 투표율은 90년대 최고치를 달성하는것에 성공하였다.

선거 결과

사실 란마 망언 전까지만 해도 1992년 서울올림픽을 주축으로한 경제호황과 발전으로 우위를 가져가고 있던것은 자유당이었다. 허나 한일수교협정 논란으로 인해 지지층이 와해되는 분위기가 되면서 정통지지층 잡기에만 급급한 나머지 망언을 명언으로 바꾸면서 선거운동을 한것으로 모자라 굳이 선거판으로 끌고오지 않아도 되었을 란마를 비롯한 일본문화 타도를 외치면서 과반을 상실하는 뼈아픈 패배를 당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당시 공화당이 민주당과 진보당의 연합공천을 반대하여 정부를 지원하는 행보를 보였고, 자유당이 직전 참선에서 승리를 거뒀기에 신민당과 합쳐 51석을 얻으며 아슬아슬하게 범여권 과반은 사수하는것에 성공하였다.

민주당 역시 한일수교협정 반대를 보인모습과는 반대로 일본문화전면개방을 제1공약으로 내놓은 바람에 유권자들의 신뢰를 잃으며 의석은 늘리는데 성공했지만, 정작 진보당과의 단일화를 통해 여유롭게 과반을 확보한다는 예상이 빗나가고 범야권 49석에 그치게 되면서 상당히 뼈아픈 손실을 입었다. 특히 충청권에서 단 한석도 얻지 못한것이 상당히 치명적이였다. 이와는 별개로 진보당은 민주당과의 단일화로 상당히 선전하여 조봉암 사망 이후 최초로 수도권에서 참의원 의원을 당선시키는 것에 성공하였다.

한편 공화당마저 누를것으로 기대되었던 신정치개혁당은 의석을 확보할것으로 기대되었던 서울에서 아슬아슬하게 패배하고 비례대표에서 단 0.2% 차이로 원내 진입에 실패하며 사실상 패배하였다. 오히려 양당에 밀려 의석을 얻지 못할것으로 예상되었던 공화당은 장성만 총재[1]가 민의원을 사퇴하고 참의원으로 부산에 출마하는 강수를 두면서 예상외로 의석을 확보하는데 성공하여 명맥을 유지할수 있었다.

여담

  • 란마의 원작자인 타카하시 루미코는 란마가 갑자기 한국의 주요 선거의제로 떠올랐다는 말을 들은뒤 굉장히 당황했다고 한다. 이와 함께 주간 선데이는 문제의 망언을 한 김종필 대통령에 대한 고소를 준비했으나, 정작 타카하시 루미코는 자세한 사정을 듣고 오히려 자신의 만화가 다른 나라 선거에 영향을 줄정도로 커졌다고 말하며의 흐뭇해했다 한다. 초긍정마인드 당황한것과는 별개로 꽤나 나쁘지 않은 반응을 보인듯. 선데이의 소송 역시 선거 직후 신문에서 한두번 나온걸 제외하면 소식이 없는것으로 보아 김종필 대통령의 직위를 보아 고소를 취하했거나, 김대통령과의 개인적인 합의가 있었던것으로 보인다. 여담으로 이후 김종필 대통령은 란마에 대해서는 일체 언급하지 않았다.[2]

각주

  1. 현 다함께자유당 사무총장인 장제원 의원의 친부다.
  2. 당연하지만 공식적으로 사과하지도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