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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의 진보주의 정당 | ||||
창당 | → | 진보당 | → | 현재 |
→ | 희망사회당 | |||
희망사회당 | → | → | 신사회통합연대 |
진보당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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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문명 | Progressive Party |
표어 | 자식에게 당당한 사람들의 정당 |
다함께 행복스럽게 잘 살 수 있는 세상 | |
창당일 | 1956년 11월 10일 |
통합한 정당 | 희망사회당 (2012년 3월 14일 흡수합당) |
주소 | 지도를 불러오는 중... |
서울특별시 영등포구 문래동2가 25-1 (종도빌딩) | |
대표 | 심상정 / 5선 (민, 15·16·18-20대) |
민원 원내대표 | 이정미 / 4선 (민, 16·18-20대) |
참원 원내대표 | 박중현 / 3선 (참, 17·19·21대) |
간사장 | 여영국 / 재선 (민, 19·20대) |
정책위의장 | 노윤조 / 5선 (민, 16-20대) |
이념 | 진보주의 생태주의 |
비주류 : 사회민주주의, 사회자유주의, 민주사회주의, 신자유주의, 진보적 자유주의, 진보주의 페미니즘, 자유사회주의 | |
스펙트럼 | 중도좌파[1] |
참의원 | 14석[2] / 143석 (9.79%) |
민의원 | 32석[3] / 567석 (5.64%) |
광역자치단체장 | 2석 / 22석 (9.09%) |
당 색 | 진보정의 핑크 (#FF007F) |
산들정치 그린 (#51B848) | |
민주노동 오렌지 (#EE7700) | |
정책 연구소 | |
국제조직 | 진보동맹 |
일반당원 수 | 413,546명 (2021년 12월 31일 기준) |
진성당원 수 | 64,120명 (제n차 전당대회 기준) |
청년 조직 | |
기관지 | |
당가 | 진보당 당가 |
공식 사이트 | |
SNS | | | | | | |
개요
역대 로고
역대 로고 | ||
1956년 11월 10일 ~ 1985년 3월 1일 | 1985년 3월 1일 ~ 2007년 3월 17일 | 2007년 3월 17일 ~ 2013년 7월 21일 |
2013년 7월 21일 ~ 현재 |
역사
조봉암 시대
조봉암이 3대 대선에서 30%라는 고무적 득표율을 올린 직후 조봉암계와 사회민주주의, 민주사회주의자들이 모여 창당하였다. 본래 2회 지방선거를 앞두고 창당하려 했으나 이승만 정권의 방해로 실패하여 지방선거 직후인 1957년 창당되었다.
1957년 이승만 대통령이 급사하며 자유당 파동이 일자 민주당이 싫지만 자유당도 싫은 지지자들을 흡수하여 당세를 불렸다. 창당 직후 치루어진 총선에서는 민의원 37석, 참의원 10석을 획득하며 선전하였다. 이후 민주당 정권에 협조하면서도 견제하는 태도를 보였으나, 민자쇼부 이후에는 민주당 정권과 거리를 두며 독자노선을 걸었다.
1960년 대통령 선거에서 당대표인 조봉암을 대통령 후보로, 대구시 을 국회의원인 서상일을 부통령 후보로 출마시켰으나 20%의 득표율로 둘 다 낙선하였다. 경북 지역에서는 압승을 거두었으나, 경남과 서울에서 자유당에 아슬아슬하게 뒤쳐지는 등 상당히 부진했다는 평가를 받았다. 1964년 대선에서도 조봉암을 대통령 후보로 하고 박기출을 부통령 후보를 선출했으나 윤보선 당시 부통령에게 밀려 낙선하였다. 당시까지만 해도 진보당의 당세는 자유당에 비견될 정도였으나, 해당 선거를 기점으로 점차 조직력이 약화되면서 하락세를 가게 된다.
1967년 민선을 앞두고 박정희를 영입하려 했으나 박정희는 자유당에 입당하였다. 이후 박정희가 대선 후보로 선출되고 박정희풍이 본격화 되자 조봉암 대표가 매우 분노하며 "기필코 박정희의 발목을 잡으리라!"라고 선언하며 1968년 대선에서 대통령은 민주당을 지지하고 본인은 부통령 선거에 출마하였다. 조직력을 총동원한 선거였음에도 불구하고 민주당이 끝까지 부통령 단일화를 거부하면서 표가 갈렸고, 당연히 낙선할것으로 예상되었던 이재학 후보가 당선되는 참사가 일어났다. 이에 충격받은 조봉암 대표는 정계를 은퇴하고 2년 뒤 사망하였다.
조봉암 사후
당을 하나로 묶어주던 조봉암이라는 거두가 사라지면서 진보당은 15년 간의 암흑기를 맞이한다. 본격적으로 다시 시작된 양당제로 인해 이슈 선점은 사실상 불가능했고, 15년 암흑기 직전 일어난 전태일 열사의 분신이 한국 사회를 뒤집어 놓는 와중에도 조봉암의 사망으로 혼란스러웠던 진보당이 적극적인 제스처를 취하지 않으면서 주 지지층이였던 노동자계층의 의심마저 사게 된다. 박정희 정권에서 김영삼 정권까지 진보당은 거대 야당을 제외하면 가장 거대하고 진보적인 당이였으나 캐스팅 보트를 잡을정도의 의석을 확보하는것에 실패했고, 박정희 정부는 물론 비교적 친근하게 대했던 김영삼 정권에게 마저 종북으로 매도당하면서 아예 김영삼 대통령의 재선 당시에는 안필수 진보당 후보의 지지율이 1%대에 머물어 조봉암 시대와 비교해 20토막이 나면서 몰락하는것으로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