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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역사 韓國史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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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국 大韓國 | State of Kore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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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제국의 괴뢰국 | |||
국가 | 대한국 애국가 애국 행진곡 | ||
인구 | 23,249,000명 (1940년) 22,012,532명 (1944년) | ||
수상부 위치[2] | 천안 (天安)[3] (1940~1944) 온양 (溫陽)[4][5] (1944) | ||
정치 체제 | 입헌군주제, 의원내각제, 중앙집권제 (명목상) 일본의 괴뢰국 | ||
대한국 황제[6] | 소화 황제 (1940~1944) | ||
내각총리대신 | 박중양 (1940~1942) 김윤정 (1943~1944) |
개요
제2차 세계 대전 기간인 1940~1944년 한반도 지역에 존속한 일본제국의 괴뢰국이자 협력국. 대한 제1공화국이 개전 6주만에 멸망한 뒤에 일본 정부에 의하여 세워졌다.
대한공화국을 공식적으로 국호로 사용하고 법통도 이어받은 자유대한정부와 달리 국호를 대한국으로 바꾸고 1930년 이전의 체제인 입헌군주제로 헌법을 복구시켰다. 현대 대한공화국 정부는 이 정부를 천안 괴뢰정부 혹은 천안 친일정부라 칭하고 있는데, 이는 수상부가 위치한 지역이 현재의 천안시여서 그렇다. 공식적인 수도를 두지는 않았지만 사실상 경성이 경제와 문화 수도의 기능을 담당하였다. 다만 경성의 강 남북쪽을 잇는 한강인도교와 철교가 파괴되어 교통의 부재로 정치 수도의 기능을 할 수 없어, 수상부를 비교적 일본에 가깝고 교통의 요지이며 반도의 중심 지역인 천안에 설치한 것이다.
국가수반은 전 총리 박중양이었으나 박중양은 1942년 12월 24일 조선공산당 소속 빨치산 부대원에게 암살되어 1943년 정초 김윤정으로 교체된다. 국가원수는 명목상 대한국 황제였으나 일본 천황이 황제를 동군연합했으므로 일본 천황이 한국을 마찬가지로 다스리는 것으로 되어있었다.
역사
정치
대한 소비에트 정부와 그 산하 조직이었던 항일 빨치산의 각종 테러 행위로 인해 정치는 극히 혼란스러웠다. 내각총리대신 박중양이 백주대낮에 공산당원의 총을 맞고 사망하거나, 종로경찰서가 폭탄 테러를 당해 흔적도 없이 사라지는 등, 경성 시내에서 테러가 일어나지 않는 날이 드물었으며 1944년 초엽 이후로 정부는 함경도와 강원도, 경상북도 등 산지 지역의 행정권을 사실상 상실했다. 멸망 직전 괴뢰정부가 행정권을 가진 지역은 천안과 경성, 경기도 일대에 지나지 않았으며 나머지는 빨치산과 자유대한정부, 혹은 일본군 군부에 의해 점령되어 제대로 된 통치 행위가 불가능했다.
1943년 7월 일본 내각부의 대동아성의 여론조사에 따르면 대한 국민의 92%가 괴뢰정부에 반대하는 것으로 나타났으며[7] 공산주의자나 노동조합원들의 거센 반발 외에도 일반 국민들 역시 조세를 거부하거나 철도에 돌을 뿌려 탈선을 일으키는 것 같이 국소적인 저항 행위를 이어나갔다. 격노한 일본 정부는 1944년 대한국 정부를 붕괴시키고 조선총독부를 설치해 억압적으로 한국을 통치하기로 결정한다.
경제
평가
1. 천안 괴뢰정부는 한국의 역사에...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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긍정적 영향을 미쳤음. | 부정적 영향을 미쳤음. | 양면적 영향을 미쳤음. | 잘 모름 / 응답 거부 |
2% | 73% | 18% | 7% |
2. 천안 괴뢰정부의 협력자는... | |||
조국의 배반자였음. | 선의의 오판자였음. | 조국의 수호자였음. | 잘 모름 / 응답 거부 |
56% | 31% | 5% | 8% |
3. 한일전쟁 패배의 원인은... | |||
이승만 총리에게 있음. | 정계와 군부에 있음. | 황실 복벽주의자에 있음. | 잘 모름 / 응답 거부 |
25% | 27% | 29% | 19% |
4. 해방에 가장 큰 공을 세운건... | |||
자유대한정부임. | 한소정임. | 항일 빨치산임. | 잘 모름 / 응답 거부 |
27% | 16% | 51% | 6% |
천안 괴뢰정부는 명목상으로나마 대한제국 황실의 복원을 추구하였으므로, 황국당을 비롯한 황실 복벽주의자들이 기대를 가지고 정부에 협력했다. 그러나 일본이 결국 천안 정부를 팽하면서 복벽주의자들은 낙동강 오리알이 되어버렸고, 전쟁이 끝난 후 공화국 정부에 의해 대거 처벌받는다. 사실상 황실 복벽파는 2차 대전을 이후로 자취를 감추었고 전통적 보수 세력은 친공화국 세력인 박정희주의로 교체된다. 박정희주의 세력은 박정희가 천안 정부에 협력했던 이유에서에나, 전통주의에 보다 긍정적 시각을 보이는 이유에서나 천안정부를 보다 온정적으로 바라보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천안 정부 그 자체를 긍정평가하는 세력은 드물다.
또한, 천안 괴뢰정부 시기 유림 세력이 복벽주의 세력과 항일세력으로 나뉘어 분열된데다, 전쟁으로 전 국토가 파괴되어버린 탓에 대한제국 붕괴 이후에도 형식적이나마 유지되고 있던 신분제가 이 시기를 거치며 완전히 해체되었다.
괴뢰국인가 협력국인가?
여담
- 이시기 태어난 세대는 일본식 이름을 짓지 않았었다. 법적으로는 조선인식 이름을 지어도 무방했지만, 일본식 이름이 유행하면서 태어날때 받은 이름을 아명(兒名)이라 치고 일부는 나이가 차고 개명하기도 했으나, 대부분은 조선인식 이름의 성씨만 고치거나 이름 전체를 일본식으로 부르는 식으로 일본식 이름을 가진 사람이 많았다.
- 이시기에 종묘제례는 열린적이 없었다. 종묘제례 대신 조선신궁에서 제사를 지내는것으로 하려 했으나, 유림이 반발하며 제사의식은 열리지 않았다. 종묘에 천황이 방문한적은 있었으나, 끝내 정전은 들어가지 않았다.
- ↑ 사실 도식화된 국기는 없었다. 해당 깃발은 어전에 걸려있던 깃발을 딴것이다. 국기로 쓰인 태극기는 대한제국때 발행된 태극문양이 소용돌이처럼 되어있는 형태와 사괘를 공통요소로 하고 나머지 비율 등은 알아서 한것으로 보인다.
- ↑ 법적 수도가 없었다. 명목상 정궁은 경운궁(慶運宮)이었다. 따라서 명목상으론 한성(漢城)을 명목상 수도로 인식했음을 알 수 있다. 물론 순종이 덕수궁(德壽宮)이라 개칭하였으나 당시 군주였던 소화 황제는 정궁의 명칭을 경운궁이라 인식하고 있었다. 하지만 1944년 당시 실제로 정궁으로 쓰이던 궁은 온양행궁이다.
- ↑ 현재의 충청남도 천안시 동남구 일봉동이다.
- ↑ 현재의 충청남도 아산시 탕정면 일대로, 패망 직전 양심적 항일 빨치산의 의거로 천안 수상부 건물이 파손되면서 인근의 온양으로 행정 기능을 이전하였다.
- ↑ 당시 국무부장이었던 이지용이 온양이란 이름이 풍수지리적으로 온(溫)자가 습한 기운이고, 양(陽)은 뜨거운 기운이며 지세가 조화롭지 못하다고 하여, 대신 길한 땅이란 뜻의 "길주(吉州)", 아니면 "영길(永吉)"이라 바꾸자 제안하였으나, 일본어 독음인 "きちしゅう"가 발음이 별로라는 이유로 기각되었다.
- ↑ 실질적으로는 대일본제국 천황이 대한국 황제를 동군연합해 재위했다.
- ↑ 그러나 본격적인 수탈 행위가 일어나기 전 과연 전국민적으로 괴뢰정부에 반대하는 여론이 형성되어져있었는가는 역사학계에서의 논쟁거리이다. 공화정의 무능에 지친 소시민 중 상당수가 괴뢰 정부를 지지했고, 이후 수탈 행위가 본격화되자 지지를 철회했다는 것이 현재 사학계의 주류 입장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