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젠 전투 (빌레펠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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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빌레펠트 연재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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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차 세계 대전의 전투 목록 | 유럽/아프리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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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투 이름 교전국 및 교전 세력
공격측 방어측
1939년
독일 침공 프랑스 코뮌
브리튼 연방
이탈리아 사회 공화국
스페인 사회주의 공화국
독일제국
벨기에
네덜란드
독일 본토 항공전 프랑스 코뮌
브리튼 연방
러시아국
독일제국
도나우 연방
엘자스-로트링겐 전역 프랑스 코뮌 독일제국
티롤 전투 이탈리아 사회 공화국 도나우 연방
딜 계획 프랑스 코뮌
브리튼 연방
이탈리아 사회 공화국
스페인 사회주의 공화국
독일제국
벨기에
네덜란드
론세 전차전 독일제국 프랑스 코뮌
브리튼 연방
브뤼셀 전투 프랑스 코뮌 독일제국
벨기에
1940년
아일랜드 전역 프랑스 코뮌
브리튼 연방
아일랜드
독일제국
켈트 해 해전 독일제국
아일랜드
브리튼 연방
라인 연습 작전 독일제국
아일랜드
브리튼 연방
포르투갈 침공 스페인 사회주의 공화국
프랑스 코뮌
브리튼 연방
포르투갈
캐나다 자치령
프랑스 공화국
북아프리카 전역 이탈리아 사회 공화국
스페인 사회주의 공화국
프랑스 코뮌
브리튼 연방
미합중국
독일제국
오스만 제국
프랑스 공화국
포르투갈
캐나다 자치령
에티오피아 제국
아헨 전투 프랑스 코뮌
브리튼 연방
독일제국
라이히스페르타이티궁 프랑스 코뮌
브리튼 연방
독일제국
1941년
라인 강 대공세 프랑스 코뮌
브리튼 연방
스페인 사회주의 공화국
독일제국
프랑크푸르트 공방전 프랑스 코뮌 독일제국
바그라티온 작전 러시아국
세르비아
루마니아
그리스국
독일제국
도나우 연방
우크라이나
폴란드 왕국
벨로루시아
발트연합공국
리투아니아
핀란드 왕국
오스만 제국
불가리아 차르국
바브뤼스크-민스크 전투 러시아국 독일제국
벨로루시아
겨울전쟁 러시아국 핀란드 왕국
독일제국
캅카스 전투 러시아국 오스만 제국
함부르크 공방전 프랑스 코뮌
브리튼 연방
독일제국
덴마크 왕국
코르순-체르카시 포위전 러시아국 독일제국
우크라이나
도나우 연방
쿠를란트 공방전 러시아국 독일제국
발트연합공국
제1차 부다페스트 전투 러시아국
루마니아
도나우 연방
독일제국
자유 우크라이나군
쾨니히스베르크 공방전 러시아국 독일제국
베를린 공방전 러시아국 독일제국
자유 폴란드군
벨라루스 국민군
한니발 작전 독일제국
발트연합공국
리투아니아
핀란드 왕국
스웨덴 왕국
덴마크 왕국
러시아국
1942년
슈테틴 전투 독일제국 러시아국
천왕성 작전 러시아국
세르비아
루마니아
그리스국
크로아티아 독립국
독일제국
도나우 연방
우크라이나 망명정부
드레스덴 공방전 러시아국
세르비아
루마니아
그리스국
크로아티아 독립국
독일제국
도나우 연방
우크라이나 망명정부
청색 작전 독일제국 러시아국
루마니아
크로아티아 독립국
토성 작전 러시아국 독일제국
1943년
겨울폭풍 작전 독일제국 러시아국
포젠 전투 러시아국
세르비아
루마니아 왕국
그리스국
독일제국
도나우 연방
폴란드 망명정부
우크라이나 망명정부
벨로루시아 망명정부
성채 작전 독일제국
도나우 연방
폴란드 망명정부
우크라이나 망명정부
벨로루시아 망명정부
러시아국
세르비아
루마니아 왕국
그리스국
1944년
1945년
※시기 구분은 전투 및 교전 발생 일자 기준, 전투 기간은 개별 문서 확인
제2차 벨트크리그 | 주요 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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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표 사건
1936년
2월
오스트리아의 이탈리아 공화국 철수 |
7월
스페인 내전 |
12월
미합중국 내전
1937년
5월
제7차 대타협 · 헝가리 반란 |
11월
사막전쟁
1938년
7월
하산 호 전투
1939년
9월
독일 침공(제2차 벨트크리그 발발) · 독일 본토 항공전 |
10월
엘자스-로트링겐 전역 · 브뤼셀 전투 |
11월
헬리펙스 회담
1940년
1월
아일랜드 전역 |
3월
켈트 해 해전 |
4월
비스마르크 추격전|
5월
암스테르담 철수 작전 |
6월
포항 상륙작전 |
7월
아헨 전투
1941년
2월
라인 강 대공세 · 프랑크푸르트 공방전 |
6월
바그라티온 작전(독러전쟁, 겨울전쟁 발발) |
7월
함부르크 공방전 · 대한 해협 돌파 작전 |
9월
쾨니히스베르크 포위전개성 전투 |
10월
베를린 공방전 |
11월
한니발 작전 |
12월
진주만 공습(태평양 전쟁 발발)
1942년
4월
백마고지 전투 |
7월
1차 엘 알라메인 전투 |
8월
드레스덴 공방전 |
10월
2차 엘 알라메인 전투
1943년
1월
트리폴리 회담 |
2월
제3차 브레슬라우 전투 |
7월
포젠 전투 |
12월
낫질 작전(아르덴 대공세)
1944년
5월
제3차 부산 전투 |
6월
마르세유 상륙작전 · 바르바로사 작전 |
7월
사빈코프 암살 미수 사건 |
8월
키이우 봉기 |
9월
샤른호르스트 작전
1945년
1월
아우구스투스의 몰락 작전(드네프르-돈 공세) |
1월
슈비네뮌데 회담 |
2월
브리튼 전투(바다사자 작전 · 귀향 작전 · 리즈 폭격) |
4월
모스크바 공방전 · 러시아국의 항복 |
8월
히로시마·나가사키 원자폭탄 투하 · 일본인민공화국의 항복 |
9월
제2차 벨트크리그 종전
※ 매년 전황·추세 등 상세한 내용은 연표 해당 연도 참고
포젠 전투
Die Schlacht bei Posen(Schlacht am Posen Bogen)
Познань операция «Румянцев»
Battle of Pozen
제2차 벨트크리그동부전선의 일부
날짜 1943년 7월 5일~1943년 8월 23일
장소 독일국 프로이센 왕국 포젠
결과 독일군의 승리
영향 독일군의 동부전선 주도권 장악
러시아군에게 뺏긴 브레슬라우를 비롯한 독일 및 오스트리아 영토 탈환
교전국
라이히스팍트
독일국
도나우 연방[1]
폴란드 망명정부[1]
우크라이나 망명정부[1]
벨로루시아 망명정부[1]
모스크바 협정
러시아국
세르비아[1]
루마니아 왕국[1]
그리스국[1]
병력
루미안체프 작전

- 920,900명
- 전차 3,528대
- 포 10,966문
독일군 반격 기간(성채작전)
- 1,240,900 명
- 전차 4,753대
- 포 21,467문
- 항공기 2,110기

루미안체프 작전

- 1,910,361명
- 전차 5,128대
- 포 25,013문
독일군 반격기간(성채작전)
- 약 250만 명
- 전차 7,360대
- 포 47,416문
- 항공기 약 3000기

피해규모[2]
전사/실종 53,878명[3]
부상 174,677명
전차 약 900대[4]
항공기 524기
전사/실종 254,470명
부상 608,833명
포 5,244문
전차 6,094대
항공기 1,626기[5]/4,618기[6]
지휘관
에리히 폰 만슈타인
귄터 폰 클루게
헤르만 호트
발터 모델
프리드리히 파울루스
베르너 켐프
파울 하우서
알렉산드르 바실렙스키
이반 코네프
니콜라이 바투틴
안드레이 블라소프
바실리 블류헤르
블라디미르 카펠
3ST 사단 토텐코프의 병사들
이제 우리 러시아군과 독일군은 완전히 동격이다. 우리만 할 수 있고, 그들이 할 수 없는 일은 한 가지도 없다.
러시아 육군 제83근위소총사단장 야코프 스테파노비치 보로뵤프(Yakov Stepanovich Vorobyov)
이제 러시아군은 패배의 쓴 잔을 맛보게 되었고, 강력한 적을 무너뜨리는 독일군의 용맹성을 알게 되었다.
하인츠 구데리안, 내셔널 지오그래픽 "전쟁의 대가들" 중에서

개요

독러전쟁 중 1943년 7월 4일~1943년 8월 23일까지 포젠 일대에서 벌어진 러시아 제4 제국과 독일제국 간의 전투. 제3차 브레슬라우 공방전 이후 형성된 포젠 돌출부를 포위하려는 러시아군의 시도에서 발생하였다.

이 전투는 동부전선에서 러시아의 마지막 전략적 공세[7]였으며, 동시에 드레스덴 공방전 이후 서서히 독일군의 우세로 넘어가던 동부전선의 주도권이 독일으로 완전히 넘어간 전투였다.[8] 이 전투에서 패배한 러시아군은 이후 동부전선에서 전략적 공세를 펼칠 역량을 완전히 상실한다.

서론


포젠 전투의 진행

드레스덴 전투에서의 처참한 패배 이후 러시아 국방군은 오데르강 서안에서 전면 후퇴를 결정한 이후로 독일군의 공세에 족족 밀리고 있었다. 그러던 중 러시아군은 제3차 브레슬라우 공방전에서 독일군을 저지하는데에 성공했고 이후 전선은 소강 상태에 이르렀으나, 그 과정에서 포젠 지역에 남북으로 250km, 동서로 160km에 달하는 거대한 돌출부가 형성되어 독일 러시아 양측의 크나큰 이목을 끌게 되었다. 러시아군은 동부전선에서의 주도권을 잡기 위해 이 돌출부를 포위하는 루미안체프 작전을 계획하게 된다.

원래 바실렙스키의 계획에 따르면 루미안체프 작전은 5월 3일에 개시되어야 했으나 완고한 독일군의 방어에 맞추기 위해 러시아군은 2달이 넘는 기간 동안이나 공격을 미뤄야 했다. 독일군은 러시아군이 여름 중으로 포젠 돌출부에 공격을 가할 것이라는 상당히 정확한 예측을 했으며 독일군과 라이히스팍트의 동부전선군 총 인력의 40%와 기갑 부대의 75%를 포젠 지역에 투입하였다.

7월 4일 루미안체프 작전이 개시되고 러시아군은 포젠 돌출부의 북쪽과 남쪽 두 군데로 공격을 가했다. 북쪽에서의 공격은 시원찮았으나 남쪽에서는 양측 모두 상황이 급박해 격렬한 전투를 벌이게 되었다. 3제곱킬로미터 불과한 지역에 수백대에 전차가 뒤엉키며 서로에게 포화를 내뱉는 아비규환이 벌어졌으며 양측 도합 약 700대 이상의 전차가 파괴되었다.

러시아군은 진격에 실패하고 주저앉았고 7월 10일 시칠리아에 서방 협상군이 상륙하며 이탈리아로 진입하면서, 서부전선에서 여유가 생긴 독일군이 동부전선으로 추가 병력을 증원하자 사빈코프는 공세 중단을 진지하게 고려하기 시작했다. 거기다가 7월 15일에는 오스만이 캅카스로, 16일엔 대한제국군이 만주로의 공세를 개시했다. 스타프카의 반대로 논쟁이 이어지던 와중에 독일군이 러시아군의 공세가 끝나기도 전인 7월 12일부터 슈나이데뮐 방면으로 성채 작전을 시작했으며 이를 막기 위해 7월 13일에 루미안체프 작전은 공식적으로 취소되었다. 상대적으로 사정이 나았던 브레슬라우 방면에서는 17일까지 쿠투조프 작전을 진행했으나 오데르 방면에서 독일군이 공세를 시작하면서 공세가 중단됐다. 이어서 8월 3일부터 레그니츠 방면으로 시작된 독일군의 반격이 8월 23일까지 이어졌고 러시아로부터 레그니츠 시와 브레슬라우 시를 탈환하는데에 성공하며 포젠 전투는 끝을 맺게 된다.

흔히 드레스덴 전투가 인류 역사상 최대의 전투로 알려져 있지만, 이는 사실 최대 규모의 사상자를 낸 전투라고 하는 것이 맞다. 포젠 전투는 드레스덴 전투와는 달리 역사상 최대 수준의 기갑, 항공 전력이 동원된 가장 규모가 거대한 전투였다.[9] 이 전투의 일부인 포젠 남부에서 일어난 리사 전투는 사상 최대의 항공전이자 최대의 전차전이기도 하였으며[10][11] 1달도 되지 않는 기간 동안 단일 전역에서 양 군의 병력 약 200만, 전차 약 6,000대, 항공기 약 4,500대라는 가공할 전력이 충돌하였다.[12]

한편 드레스덴 전투가 제2차 세계 대전의 주도권 전환의 시발점이였다면, 포젠 전투는 전쟁에서 독일군이 완전히 우위를 차지하였음을 확인시켜준 전투였다. 이 전투에서 러시아군은 독일군을 제대로 격파할 수 없었으며 도리어 독일군의 반격에 주요 도시들을 탈환 당하는 등 앞으로 두번 다시는 동부전선에서의 대규모 공세를 이어나갈 수 없게 된다.

1943년 동부전선의 상황

1942년 겨울, 러시아군은 갈리치아 전선군을 드레스덴 전투에서 통째로 잃고 말았고, 후방 부대들은 작센 지역에서 전격적으로 후퇴하게 된다. 독일군은 이를 추격하여 브레슬라우를 일시적으로 탈환하는데 성공했지만, 러시아군은 과감한 반격을 개시하여 독일군 선봉을 섬멸하고 다시 브레슬라우를 재탈환했다.

해당 공방전 결과, 동부전선에는 포젠을 중심으로 거대한 돌출부가 형성돼 양쪽 수뇌부의 이목을 집중시키게 된다.

루미안체프 작전

이 무렵 나치 러시아는 이 거대한 전쟁을 수행하기엔 자신들의 역량이 충분치 않음을 느끼고 있었다. 동부전선의 팍트군은 라이히스팍트 각 지역에서 생산되는 수 많은 군수무기와, 미국으로부터 천문학적인 규모의 무기대여법 지원을 본격적으로 받아가며 점점 거대한 괴물로 성장하고 있었고, 캅카스에선 로디온 말리놉스키 원수의 캅카스 전선군이 수세에 몰려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극동에서 대한제국군이 공세를 시작한다면 러시군은 과거 제1차 세계 대전의 악몽이었던 양면 전선을 강요당할 수밖에 없게 되고, 이는 러시아로서 감당할 수 있는 범위를 넘어선 것이었다.

이런 부담은 러시아군 수뇌부에게 획기적인 전과를 내야 한다는 압박으로 나타나기 시작했다. 직전의 3차 브레슬라우 공방전을 승리로 이끌었던 알렉산드르 바실렙스키는 가능한 빠르게 이 기세를 몰아서 북쪽으로 공세를 취하는 한편, 벨라루스 전선군이 남쪽으로 공세를 취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반면 세르게이 마르코프와 전차 생산 상황을 잘 알고 있는 알렉산드르 보즈네센스키는 '동부전선에서의 공세는 더 이상 불가능하다'며 반대하였다.

하지만 바실렙스키가 보기에 독일군은 이전의 전투로 비틀거리고 있었고 포젠 인근에 아직 정교한 방어선이 구축되지 않은 상태였다. 이에 사빈코프도 선제 공격안을 받아들였고, 구체적인 작전안은 보즈드의 제안에 열렬히 동의한 마르키안 포포프 참모총장이 맡았다. 그리고 마침내 포젠 돌출부에 협격을 가해 전선을 축소하고, 동시에 최대한 독일의 전략 예비대를 섬멸해 동부전선을 안정시키고 주도권을 되찾겠다는 골자의 루미안체프 작전(Познань стратегическая наступательная операция «Румянцев»)을 입안하게 된다.

바실렙스키는 브레슬라우에서 적에게 막대한 피해을 입힌 당시가 적기이며 늦어도 5월 초에는 공격을 시작해야 한다 주장했으나, 독일군과 마찬가지로 큰 손실을 입은 벨라루스 전선군의 증원도 필요했기에 사빈코프는 기갑부대의 보충이 끝나는 6월 12일로 작전 개시일을 결정했다. 그런데 사빈코프는 여기서 또 완벽한 전력 우위를 확보해야 한다며 작전을 추가로 연기시킨다. 물론 맨 위의 개요표를 보면 알 수 있듯이, 전력 우위를 점한답시고 끌어모은 것이 독일군의 두배 밖에 되지 못했으며, 보급은 그 보다도 더 부족했다. 방어도 아니고 공세를 펼치려는 주제에![13][14]

당시 러시아군은 사빈코프의 의견대로 보충이 필요했던 상황이긴 했으나, 문제는 독일군의 보충 속도가 러시아군의 보충 속도를 따라잡은 상태였다는 것이었다. 공세가 연기된 동안 독일군은 국민돌격대와 병력들을 총동원하여 수백 km 길이의 도랑을 팠고, 대전차포와 지뢰로 철벽 방어선을 구축했으며, 사빈코프가 작전을 연기한 동안 서방 인터내셔널군이 전개한 마켓가든 작전이 처참하게 실패하면서 포젠 부근에 서부전선에서 차출된 독일군 사단들이 대거 등장하게 됐다. 거기다 러시아군은 독일을 상대로 한 동부전선 뿐만 아니라, 불가리아가 버티고 있는 발칸 전선, 오스만과의 캅카스 전선, 핀란드-스웨덴과의 핀란드 전선, 한국과의 극동전선을 비롯한 수 많은 전선에서 소모가 누적되고 있었으므로 포젠에 병력과 물자를 집중하기가 어려웠다. 러시아군의 작전계획이 삐걱거리는 동안 독일은 서부전선에서 차출한 병력과 새로 충원한 병력까지 끌어모아 1943년 4월 50만이던 병력이 7월 당시엔 90만으로 늘어났고 기갑은 2배, 포병은 4배 가까이 늘어났다.[15][16]

물론 공세가 언제였든 결과를 뒤집기는 어려웠다. 당시 러시아의 사정상 이런 돌출부 전체를 절단하려는 대규모 공세를 하는 것 자체가 무리에 가까웠다. 연기를 하거나 말거나, 어차피 '아주 낮은 성공확률 vs 낮은 성공확률' 의 비교에 불과하다. 그래서 당시 러시아에게 있어서 최소한 동부전선을 공략할 최고의 전략은 돌출된 지역 제거가 아닌 후방에 안정적으로 구축된 요새로 독일군을 끌여들여 기동방어를 하는 것이 더 나았다는 주장도 있다. 그러나 연합군의 물량이 나날이 러시아를 압도해 가고 있었기에 시간을 끌면 끌수록 불리해지고, 소극적으로 방어만 한다면 갈수록 전쟁의 주도권을 잃게 되는 것 또한 사실이었다. 즉 러시아군 입장에서는 전황을 단번에 바꿀 수 있는 대규모의 회전을 통하여 독일군에게 치명타를 입혀 주력군을 소멸시키는 것 역시 분명히 필요한 상황이었다.

루미안체프 작전은 이런 관점에서 입안되었고, 바실렙스키를 비롯한 즉시 공세파들은 공세를 연기하면 오히려 전력차가 더 벌어질 것으로 보고 즉시 공격을 주장했다.[17][18] 한편 발트 전선군 사령관 이반 코네프 원수는 사빈코프가 주관한 회의에서는 루미안체프 작전에 적극 찬성했으나, 포젠 방면의 두터운 독일군 방어 진지와 슈나이데뮐 돌출부 주위에 수십만 독일군이 집결하는 것을 항공 정찰로 파악한 안드레 블라소프는 루미안체프 작전에 회의적이었다. 이후 코네프 또한 이에 동의하여 블라소프가 제안한 사빈코프가 명시적으로 금지했던 슈나이데뮐 돌출부 후방의 방어 진지 구축을 허락한다. 특히 블라소프는 '루미안체프 작전이 성공하더라도 슈나이데뮐 방면에 위치한 독일군의 위협은 그대로이기 때문에 성공 가능성도 낮은 루미안체프 작전은 아예 완전히 포기하고 슈나이데뮐에 집중된 벨라루스 전선군을 동부전선의 전략적 예비대로 가용할 것을 주장하기까지 했다. 그러나 6월 중순, 루미안체프 작전이 중단될 가능성이 제로가 되자 13군을 공세 작전 위주로 훈련하여 재편성하였다.

계획 단계에서도 보이듯 루미안체프 작전을 강하게 주장한 것은 육군최고사령부였으며 블라소프는 처음부터 공세에 회의적이었기 때문에 공세에도 적극적이지 않았다. 반면에 바실렙스키는 늦은 공세에 회의적이기는 했어도 공세가 필요하다고 생각했으며 공세 시작 이후에는 적극적이었다. 이는 양측의 입장이 매우 다르기 때문인데 블라소프의 경우, 공세를 진행하는 13군 자체가 이미 슈나이데뮐 돌출부를 방어하고 있었으며 북쪽의 2전차군을 향한 독일군의 압력이 이미 심각한 상태였다. 따라서 공세 시작 이후에도 공세에 집중할 수가 없었다. 반면 바실렙스키는 1전차군과 6군에서 기갑전력을 차출하면서까지 포젠에 기갑 전력을 집중시켰으며 주공이 남부 방면이었기 때문에 사령부의 지원 역시 벨라루스 전선군에 집중됐다. 그만큼 이 작전이 남부 벨라루스 전선군에게 중요했기 때문이었는데 발트전선군은 1년 넘게 방어전을 치르면서 매우 강력한 방어선을 구축했으나 기껏해야 몇 달전에 탈환한 곳에서 공세를 시작할 남부 벨라루스 전선군의 경우에는 공세가 실패할 경우 독일군을 막는 것이 거의 불가능한 상황이었다.[19]

루미안체프 작전은 러시아 입장에서 앞선 작전과 비교해 볼 때 전역의 크기 대비 유례없는 병력과 무기의 증강이 이루어졌으나, 정작 작전의 목표는 모호했다. 그리고 확실한 목적이 없었던 만큼 사령부의 의지도 자연스럽게 약해졌다. 이반 소장의 회고를 보면 사빈코프조차도 '성공의 가능성이 높지 않지만 할 수 있는 것이 이것밖에 없다'고 말하는 상황이었다. 서방 협상국의 유럽대륙 상륙과, 독일의 기타 동맹국의 역습이 얼마 남지 않은 상황에서 러시아 육군 최고사령부는 동부 전선에 예비가 없었고 스타프카는 핀란드, 발칸, 캅카스, 극동에 투입할 전략 예비가 없었다[20] 러시아군은 전략 예비 확보를 위해 반드시 전선을 단축해야 했다. 포젠 바로 북쪽에는 독일군의 슈나이데뮐 돌출부가 있었기 때문에 슈나이데뮐을 포기하지 않는 이상 포젠 돌출부를 정리해야만 했고 사빈코프는 단 한치의 땅도 내줄 생각이 없었다. 작전은 반드시 성공해야 한다는 러시아군의 강박감 속에 점점 미뤄졌다. 결국 작전 입안자들의 확신은 사라지고 야전 사령관들도 회의감에 빠진 상황에서, 성공해도 얻을 것은 별로 없고 실패할 시 잃을 것은 많은 작전이 결국 실행되기에 이른다.

그리하여 러시아군은 포젠 일대에 병력 190만, 전차 및 자주포 5,100대(전차만 6,000대에 이른다는 설도 있다), 비행기 3,000대, 야포 25,000문 이상이라는 엄청난 전력을 집결시켰다. 사빈코프는 드디어 전력 우위를 갖췄다고 판단했고, 작전 개시일은 7월 5일로 결정되었다.

독일군의 방어

사상 최대의 방어 작전

한편 독일군은 첩보로 러시아군의 공세목표가 포젠이라는 것을 정확히 예측하고 있었다. 따라서 러시아군의 공세를 완벽하게 막아내기 위해 가공할 규모의 방어 진지를 구축하기 시작했다. 사실 포젠 지역이 돌출부라는 것 자체가 적의 선제 공격 목표가 된다는 말이나 마찬가지였다.

한편 빌헬름3세는 베를린 공방전의 승리와 드레스덴 승리 이후에 그랬던 것처럼 러시아군에게 대규모 선제 공격을 할 생각을 또 품었지만, SOK 총장 하인츠 구데리안과 총참모장 알프레드 요들 등이 겨우겨우 설득하여 이전같이 쓸데없는 재앙을 피할 수 있게 됐다.

방어전의 주력인 발터 모델의 중부집단군과 만슈타인의 바익셀 집단군에는 엄청난 전력이 보강되기 시작했다. 포젠 일대에는 국민돌격대 30만명을 동원하여 총 3,000마일이 넘는 참호와, 종심이 175km에 달하는 6중 방어선이 구축되었고 여기에 무려 40만 개가 넘는 지뢰매설, 가짜 공군기지 50개와 비행장 150여 곳 건설, 그리고 말뚝 전차 장애물도 구축되었으며 기갑의 우세를 중시하는 독일군답게 전차가 약 3,500대를 배치했다.

또한 러시아군의 공세를 저지한 후 역습을 가할 주력으로 선정된 E 집단군에도 30만명의 병력과 1개 기갑군단이 배치되었다. 이렇게 동원된 독일군의 총 전력은 병력 약 90만, 야포 10,000문, 전차 및 자주포 3,500대(5,000대로 추산하는 설도 있다) 항공기 2,100대에 이르는 대규모였고 이는 당시 독일과 라이히스팍트 전체 병력의 40%, 기갑부대의 75%를 이곳에 배치한 것이었다.

정보전의 승리

독일군의 예상으로도 러시아군이 공세에 나선다는 것은 자명했으나, 문제는 그 시기가 언제냐는 것이었다. 독일군은 5월 초에 러시아군이 공세에 나설 것이라고 파악했지만, 루미안체프 작전이 연기되면서 독일군은 큰 혼란에 빠질 수밖에 없었다. 특히 일선 장군들에게 비상이 걸렸는데 상술했듯이 빌헬름 3세는 대규모 공세를 주장한 적이 있었고, 뮐러와 그의 내각은 서둘러 본토에서 러시아군을 축출할 것을 닦달하고 있었다. 이를 모델과 만슈타인이 설득하면서 겨우 포기하게 만들었었다. 하지만 아무리 전쟁영웅인 모델이라 할지라도 국내 여론을 무시하고서 계속 방어전을 주장하기가 어려웠다. 이는 결과적으로 빌헬름 3세의 주장도 일리가 있었기 때문이다.[21]

그 후 5월 중순이 되자 러시아군의 공격이 6월 12일로 연기됐다는 정확한 정보를 입수했으나, 사빈코프가 공격을 또다시 7월로 연기하자 독일군 내부에서도 서서히 사기 저하나 병사들의 경계 태세 약화 등의 문제들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빌헬름 3세도 불만을 토로하긴 했지만, 다행히 42년과는 달리 끈기를 보이며 방어 준비는 계속 진행시켰다. 일본에 있던 독일군의 첩보망은 연기 사실을 즉각 전달했지만, 점차 러시아에서 흘린 '공격이 취소됐다'는 역정보가 돌았다.

여기서 브리튼에 있던 '다섯 번째 사나이'가 활약했다.[22] 브리튼 케임브리지 대학에는 독일 정부가 포섭한 대학생 5명(케임브리지 5인조)이 있었는데, 이 중 브리튼 정보부에 들어간 '다섯 번째 사나이'를 통해서 정확한 정보를 얻어내었다. 하지만 그는 긴장감을 이기지 못하고 포젠 전투 개시 전에 자신의 임무를 포기한다. 어쨌거나 브리튼 정보부의 정보 수집 능력은 타의 추종을 불허했고, 독일군은 정확한 정보들을 받을 수 있게 된다. 7월 4일에는 투항한 러시아 병사가 7월 5일 새벽 3시에 공세가 시작된다는 사실을 자백했다. 이어 7월 5일 오전 2시에 독일군 진지에 침투해 지뢰밭을 개척하던 러시아군 공병대원을 생포하여 한 시간 후에 공세가 시작된다는 자백을 받아냈다.

독일군은 공세가 시작되기 직전 선제 포격으로 막대한 피해를 입히겠다는 계획을 세워놓고 있었고, 이제 더 이상 망설일 것이 없었다. 모델 원수는 항공 폭격과 일제 포격을 명령했다. 그러나 이 기습적인 포격에 의한 러시아군의 피해는 크지 않았는데, 아직 러시아군 대부분이 공격 출발선에 도착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로 인해 초기에는 러시아군이 오히려 독일군의 대규모 공세를 의심했으나, 더 이상 포격이 이어지지 않자 러시아 벨라루스 전선군 사령관 코네프 원수는 안드레이 블라소프가 지휘하는 러시아 9군에 공격을 명령했다. 드디어 두 달의 기나긴 대치 기간이 끝나고 포젠 전투가 시작된 것이다.

러시아군의 공세

▲ 진격하는 러시아군 t-34와 보병들

포젠 북쪽 방면

러시아군의 초기 공세

7월 5일 오전 5시 30분, 포병의 화력지원을 받으며 러시아 13군이 독일 9군에 공세를 시작했다. 13군 사령관 안드레이 블라소프 대장은 러시아의 전통인 충격군 돌파 대신 보병에 돌격포를 지원하여 방어선을 돌파한 후 기갑전력을 예비로 투입했다. 블라소프는 두터운 독일군의 방어진지를 돌파하기 위해 16항공군에 폭격을 요청했고, 러시아 공군이 제공권을 완벽하게 장악하면 기갑부대를 선두로 손쉽게 방어선을 돌파할 수 있으리라 예상했다.

그러나 1943년의 독일 루프트바페는 이제 러시아군이 상대할 수 있는 상대가 아니었다. 러시아 공군 IL-2의 맹폭이 채 끝나기도 전에 독일 전투기 400여 대가 접근했고 곧바로 항공전이 시작되었다. 비록 러시아 공군이 여전히 수량에서 우위를 점하고 있었지만, 독일 공군은 이에 맞서 전투기의 성능, 조종사의 숙련도로 상대했다. 덕분에 러시아군은 예전처럼 일방적으로 제공권을 장악할 수 없었다. 결국 방어선 전면에 공세를 펼치던 러시아군 18 근위소총군단과 3 전차군단은 엄청난 숫자의 대전차호, 강철 피아노 줄[23]지뢰, 기관총 진지가 끝없이 배치된 방어선을 돌파하는 동안 눈에 띄게 소모되기 시작한다.

러시아 18 근위소총군단, 3 전차군단이 고전하는 한편, 16 전차군단과 9 전차군단이 각각 독일군 방어선의 양익을 압박하며 진격을 시작했다. 16 전차군단은 우익을 방어하던 독일 255보병사단을 격파했으나, 독일군의 신속한 증원에 진격을 중지했다. 9 전차군단은 독일 332보병사단, 167보병사단을 섬멸하고 로가젠을 향해 맹렬하게 진격하기 시작하였다. 9 전차군단에게 방어선이 뚫린 독일군은 2개 보병사단을 추가로 투입했으나 이 또한 엄청난 사상자를 내고 돌파당했다.

이렇게 러시아군은 힘겨운 사투 끝에 독일군 제1방어선을 돌파하고 로가젠 북쪽에 교두보를 마련하는 데 성공했지만, 그 성과는 도저히 승리라 부를 수 있는 게 아니었다. 발트 전선군 대부분의 기갑 전력을 일거에 투입했음에도 하루 내내 겨우 6.5km를 전진했을 뿐이었고, 러시아군은 투입된 전력의 거의 20%를 상실하고 있었다.

로가젠 공방전

7월 6일, 새벽에 러시아군을 향해 가해진 독일군의 반격을 완벽하게 저지했음에도 불구하고, 러시아군은 독일의 2차 방어선을 돌파하지 못한 채 진격이 돈좌된다. 독일군은 전차 100여 대를 잃고 수많은 사상자가 발생했지만 방어선을 유지하는 데 성공했다.

7월 7일, 다급해진 안드레이 블라소프 대장은 가용 가능한 모든 기갑 전력을 끌어모아 전차 800여 대와 20개 보병사단을 동원해 로가젠과 오베르니크를 잇는 철도선에 공세를 개시했다. 당시 로가젠과 오베르니크는 슈나이데뮐과 포젠을 잇는 철도선의 중심으로 러시아군과 독일군 모두에게 가장 중요한 지역이었다. 불과 10km 정도에 불과한 전선에서 양군 합계 40만에 가까운 대병력이 충돌하는, 역사상 유례 없는 전투가 벌어졌다. 러시아군은 폭격기와 전차로 맹공을 펼쳤지만 독일군은 방어에 성공한다. 러시아군의 공세는 날이 바뀐 7월 8일에도 이어졌으나, 독일군의 방어 진지는 도저히 무너질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24] 러시아군은 병력을 계속 증원하고 있었지만 독일군이 압도적인 교환비로 선전하고 있었기 때문에 전력 차이는 오히려 점점 더 벌어지고 있었다. 불과 사흘 만에 포젠 북방면 러시아군의 공세는 한계에 다다르기 시작했다.

7월 8일 저녁, 블라소프 대장은 야전작전회의에서 제공권도 확실하지 않은 현 상황에서는 방어선을 돌파하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결론을 내렸다. 하지만 발트 전선군 사령관 이반 코네프 원수는 블라소프 대장에게 공격을 계속할 것을 명령했다. 블라소프 대장은 소모된 병력을 다닥다닥 긁어 모아 다음날 공세를 재개했으나 결국 방어선을 파훼하는 데는 실패했다.

7월 10일, 블라소프 대장은 강력한 독일군의 방어선을 향해 공격하는 것은 무의미한 소모전만을 강요당할 뿐이며, 획기적인 전술적 보완이 있거나 공세를 유지할 만한 전력이 보충되지 않는 이상 돌파는 불가능하다고 에 건의했다. 사빈코프는 공세를 계속할 것을 명령했지만 블라소프는 휘하 부대에게 휴식을 명령하고 공세를 중단했다.

7월 11일, 아직까지도 코네프 원수는 아직 독일군의 방어선을 돌파할 수 있다는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있었다. 6개 사단을 보충하여 오베르니크에 야습을 가하기로 결정한다. 11일 밤, 러시아군은 독일 제35군단을 향해 공세를 가했으나 저지당하고 말았다. 이것으로 러시아 13군은 완벽히 공세종말점에 도달하였고, 루미안체프 작전이 시작된 지 불과 5일 만에 포젠 북부 전선의 공세는 실패로 돌아가고 만 것이다.

포젠 남쪽 방면

러시아군의 초기 공세

제2 나츠그바르디아 전차군의 약진

리사 전투

이어 두 부대가 만났을 때, 양 편의 병사들은 좁은 차창을 통해 적군의 규모를 확인하고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사방이 구릉지였기 때문에 돌아갈 곳도 없었다. 거대한 두 부대가 서로를 향해 달려들었고, 이로써 희대의 대전차전이 시작되었다. 이전에도, 그리고 이후에도 1,500대가 넘는 전차가 뒤엉킨 전투는 없었다. 게다가 이 전투에는 그 어떤 계획된 전술도, 일관된 지시도 없었다. 양측의 전차는 서로의 위에 올라타기도 하고, 파괴하고 파괴당하는 악전고투를 겪었다. 한 목격자는 전장이 너무 비좁아보였다고 증언하기도 했다. 8시간에 걸친 맹렬한 전투 끝에 두 부대는 서서히 뒤로 물러나 전열을 가다듬기 시작했다. 러시아는 300여대의 전차를 남겨둔 채 퇴각했고, 독일 역시 비슷한 손실을 입었다. 하지만 독일은 신속하게 전차를 보강한 반면, 러시아에게는 그럴 여력이 없었다.[25]
- 영국 크롬웰 프로덕션, '2차대전사' - <독일 육군의 선봉, 기갑부대> 편

결국 바투틴은 주력 공세를 북동쪽의 작은 철도 교차점인 리사로 돌렸다. 이 7월 9일부터 14일까지가 포젠 공세의 운명을 결정지었다. 나츠그바르티아의 기갑사단들[26]의 800대의 전차들은 진격하며 독일군 기갑전력을 돌파하였다. 이에 7월 6일에 만슈타인은 제24기갑군단 사령관 발터 벵크 장군에게 손수 전화를 하면서, 그에게 예비 병력의 일부를 주고 리사 방어를 지시한다. 7월 7일 오전 1시 30분, 독일 제24기갑군은 사흘간 370km(230마일)이 넘는 거리를 러시아의 lI-2 공격기의 공격을 받으며, 밤낮으로 이동하여 7월 10일에 전선에 도착하였다. 사실 이 정도 거리는 원래 기차로 이동을 해야 정상인데 전차가 직접 주행한 탓에 승무원이나 기계에 많은 무리를 줬으나 사기는 왕성했다.

만슈타인은 벵크에게 4호 전차가 T-34 전차에게 장갑에서는 열세지만[27][28] 관통력이 앞서니 '기계화 부대의 백병전'을 하라고 지시하였다. 7월 12일 아침, 제2나츠그바르디아 군단 소속 러시아군 전차 790와 독일군 전차 294대 남짓의 전차가 대치했다.

12일 아침 7시, 대규모의 러시아 폭격기 부대가 독일군 진영을 맹렬히 폭격하였고 이에 맞서 독일 전투기들이 출격하였다. 폭격기들이 돌아간 후, 독일군은 대지공격기와 네벨베르퍼 로켓을 동원하여 인근을 쑥대밭을 만들었다. 오전 8시 30분, 벵크는 강철이란 뜻의 '스탈'이라는 암호로 공격 명령을 하달했고, 곧이어 러시아측에서도 사빈코프 사단의 전차들이 몰려나왔다. 문제는 독일 기갑사단이[29] 수비적으로 유리한 위치에 있었는데, 러시아군보다 먼저 전장에 도착하여 해당 지역에 구축되어 있던 대전차호와 회랑을 선점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이 날, 겨우 3제곱 킬로미터에 불과한 지역에 수백대의 전차들이 뒤엉켰다.[30]

러시아군의 공세 종료

성채작전의 시작과 전투 종료

▲ 포젠 남쪽에서 공세를 진행하는 4호 전차와 하노마크 장갑차

포젠 북쪽 방면

포젠 남쪽 방면

결과

러시아는 동부전선에서 벌어진 이 한번의 작전에 거의 모든 기갑부대를 동원했다. 하지만 작전은 실패했고, 얼마 남지 않은 기갑부대마저 독일군에 쫓기는 신세가 됐다. 독일도 손실이 적은 것은 아니었지만 엄청난 공업력을 보유한 독일이었기 때문에 군수품을 찍어내어 금세 복구했다. 러시아는 점점 궁지로 몰려갔다. 루미안체프 작전 준비에 모든 힘을 쏟아부은 육군과 공군, 그리고 군수공장은 이제 여력이 없었고, 큰 손실을 복구하기란 불가능했다. 포젠 돌출부는 러시아군 병사들과 전차부대의 무덤이 된 셈이었다. 결국 사빈코프에게는 엘베 강이 동부전선의 한계였고, 이후 러시아의 진격로는 동쪽으로의 일방통행로가 되고 말았다. 하지만 그후 2년동안 러시아는 독일에 대해 완강한 방어전을 펼쳐보였고, 양측의 전차부대가 맞붙는 일도 심심치않게 일어났다.
크롬웰 프로덕션 <2차대전사>, 독일 육군의 선봉, 기갑부대

포젠 전투의 결과는 러시아가 더이상 양면전선이라는 이점을 독일에게 활용할 수 없음을 의미했다. 러시아군의 기갑 부대는 이 전투 이후로 전략적 공세 가능성을 완전히 상실했다. 기갑부대의 전술적 역량 자체는 사빈코프 전차를 비롯한 신형 기갑장비의 보충으로 오히려 증강되었으며 포병 전력의 증강과 제병협동을 통해 전쟁 후반기까지 최고 수준이었다. 러시아의 전차 생산량도 43-44년에 최대치였다. 그러나 포젠 전투를 기점으로 독일의 전차 성능이 러시아의 전차 성능을 완전히 압도해버렸다. 더 이상 기갑부대만으로는 전선의 돌파가 어려워졌으며 동부전선의 제공권 상실이 러시아에게는 굉장히 뼈아픈 상황이었다. 이는 러시아 기갑부대가 전술적 수준에서는 여전히 매우 강력할지라도 더 이상 작전제대로서는 큰 의미를 갖기 힘들게 되는 원인이 된다. 수적 열세 역시 큰 문제로 포젠에서는 양측이 엄청난 기갑전력을 집중시켰기에 상대가 되었을지 몰라도 러시아는 공세가 실패하자마자 타 전선에서 압도적인 열세가 되었다. 독일 기갑전력의 주공이 된 벨라루스 전선군은 드넓은 전선을 담당할 병력 자체가 모자랐으며 집단군 규모의 예비대를 갖고 있던 SOK와 달리 스타프카는 예비대는커녕 병력을 캅카스와 극동으로 차출해야 하는 상황이었다. 이렇게 하여 전후 대중매체나 역사서에서 흔히 언급되는 '같은 제대의 독일 기갑척탄병보다 전차 숫자가 적은 러시아 기갑부대'가 등장하기 시작한 것도 이 전투 이후의 일이었다. 러시아 기갑부대는 사단단위의 전술적 능력을 상실하고 이후 모든 작전은 전차군 단위로 진행되었다. 물론 독일도 엄청난 손실을 입었는데, (독일이 양면전선을 진행 중임을 감안하더라도) 인명 피해는 러시아의 1/4배, 전차는 거의 1/7배 수준의 손실 밖에 입지 않았다. 러시아군은 포젠 돌출부의 독일군 포위섬멸이라는 작전 목표와 예비대 소모로 전략적 격차를 줄이겠다는 전략 목표를 달성하는 데에 실패했다. 또한 동부전선에 배치했었던 기갑부대 상당수를 잃었다. 따라서 포젠 전투는 독일의 승리고 이 점에 대해서 모든 전쟁사가들의 견해가 일치한다. 바실렙스키 역시 자신의 회고록《잃어버린 승리》에서 '작전이 잘 안 풀렸던 상황'이란 것은 인정했다.

그리고 러시아는 그동안 유의미한 전력이 되지 못했던 불가리아, 오스만, 핀란드, 대한국이 4개 전선에서 역습을 시작하면서[31] 더 이상 독일군만 상대할 수 없었고, 전력의 상당부분을 다른 전선에도 할애해야 했다. 물론 1944년 중반까지 동유럽 전체의 공업지대[32]와 자원을 보유한 나치 러시아는 이론상 독일보다 훨씬 높은 전쟁 역량을 가질 수도 있었지만, 정작 이런 공업력을 완전히 활용하지 못하고 있었기에 이는 러시아에게 대단히 나쁜 소식이었다.[33]

러시아는 그동안 하계에 실행했던 전략적인 공세 대신 돌출부를 정리하려는 제한적 공세를 벌였고 이를 위해 동부전선의 기갑전력과 항공전력을 끌어모았으나 막상 전투가 시작되니 독일군의 방어선을 돌파하는 것조차 러시아군의 능력 밖이라는것이 드러났다. 190만명이라는 역대 최대규모의 병력을 동원했지만, 방자에 비해 100만명이나 병력이 더 많다는 것이 의문스러울 정도로 한심한 성적을 기록했다. 오히려 러시아가 그동안 우위에 위치했던 부분에서도 더이상 그렇지 못하다는 것을 증명해보인 꼴 밖에 되지 않았다. 포젠 전투는 그동안 누적된 다중전선이라는 스노우볼이 러시아를 덮치기 직전 불확실한 목표와 의지로 벌인 러시아의 마지막 공세였으며 이후 독러전쟁은 독일의 무한공세 속에 선봉부대가 공세종말점에 도달하면 러시아가 전술적 반격을 가해 공세를 멈추고 소강상태가 되는 양상으로 흘러갔다.

이 전투에서 독일은 기록적인 교환비를 이루며 초기의 패배에서 극복하고 러시아의 역량을 완전히 뛰어넘었음을 증명했다. 방어보다 공격이 나았을 것이라는 의견에도 불구 이는 충분히 고무적인 성과였다. 그럼에도 독일군은 본인들의 의도였던 러시아군의 기갑전력을 소모시킨다는 목표 달성에 실패했다. 벨라루스 전선군은 공세 역량이 고갈되어 공세를 중단했으나 애초에 독일군의 공세에 대비해 기갑 예비대를 남겨두었으며 결과적으로 독일군은 슈나이데뮐 탈환 과정에서 엄청난 피해를 입고 차후 공세에서도 바르바로사 작전 이전까지 벨라루스 전선군을 상대로 유의미한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우크라이나 전선군의 공세가 멈춘 것은 측면에서 시작된 독일군의 공세 때문이었으며 극단적으로 보면 오히려 독일군의 기갑전력이 포젠에서 소모된 수준이었다. 이후 비스와 전역에서 독일군이 큰 성과를 거두긴 하지만 이는 독일군의 역량이 러시아군 보다 훨씬 뛰어난 덕분이었지 러시아군이 약해져서가 아니었다. 오히려 러시아 기갑 전력은 더 증강됐으며 비스와 전투 기간 내내 적어도 독일군의 두배 이상의 기갑 전력을 유지했다.

독일군은 포젠 전투 이후 비스와강과 도나우강을 확보하기까지 50만 명 가량의 사상자를 내는 막대한 인명손실을 입지만, 1941년 동부전선 개막 직전에도 상주인구가 수천만 명은 족히 넘던 비스와, 도나우 강 서안, 본토와 동맹국 영토를 탈환하여 인구 밀집지대에서 징병을 할 수 있었기 때문에 인력 손실을 어느 정도 보충할 수 있었을 것이다.[34]

이 전투의 패배를 계기로 러시아군 장병들 사이에서 회의주의, 비관적인 인식이 퍼지기 시작했다. 사실 드레스덴 전투의 재앙에도 불구하고 제3차 브레슬라우 공방전의 대승리로 러시아군 장병들의 사기는 여전히 높았었고, 루미안체프 작전을 준비하던 기간에는 전례없는 엄청난 병력과 장비들이 배치되는 것을 보며 마침내 결정적 전투로 독일군을 완파할 것이라는 기대가 있었다. 그러나 이 전투에서 방어선을 뚫기는 커녕 고작 1~2주 만에 처참히 후퇴하는 상황은 러시아군 장병들의 사기를 추락시키기에 충분했다.

물론 후퇴하는 도중 반격해오는 독일군에게 막대한 손실을 강요하긴 했지만, 어쨌거나 열심히 준비한 회심의 공세는 시작하자마자 금방 실패했고 전선은 뒤로 밀려나버린 게 현실이었다. 이는 러시아군 나츠그바르디아 보안부대의 보고서에서도 드러나는 부분으로, 보고서에서는 휴가 등으로 귀가한 동부전선 출신 병사들에게서 서서히 더 많은 비관적 견해가 관찰된다는 우려를 표했다. 여러가지 자료와 회고록으로 볼 때 병사들뿐만 아니라 고급 장교와 러시아 국내의 관료들 사이에서도 이 전투의 실패 이후 대놓고 내색만 안 할 뿐이지 전황이 암울하다는 현실을 본격적으로 인식하기 시작한 것으로 보인다.[35]

편제

모스크바 협정군의 편제

러시아군

벨라루스 전선군

발트 전선군

세르비아 왕국군

그리스군

루마니아 왕국군

팍트군의 펀제

독일군

중부 집단군

북부 집단군

바익셀 집단군

E 집단군

오스트리아군

오스트리아 제4 야전군

오스트리아 제7 야전군

자유 폴란드군

자유 우크라이나군

벨라루스 국민군

매체에서의 묘사

  • 게임 월드 오브 탱크에서 리사가 배경으로 등장한다.
  • 미니어처 게임인 DUST에서도 원래 역사처럼 발발하였다. 이전의 드레스덴 전투를 로봇보행 병기를 투입한 러시아군의 승리로 돌아가자 보행병기만으로 독일군들을 모두 발라버릴수있다고 자만한 러시아군이 개활지에 전차를 상대로 투입했다가 독일군의 대전차화기 등등에 대차게 발려 버렸다. 덕분에 러시아군은 자기들의 보행병기까지 노획당하고 독일은 이를 기반으로 한 보행병기인 1호 보행병기 제작에 박차를 가하게 되었다. 당연하지만 보행병기들의 키는 일반적인 전차등에 비해서 크고 속도가 느려서 시가전은 몰라도 개활지로 나왔다간 그냥 움직이는 타겟이 된다.
  • SD 세계대전 독일군 캠페인 9번째 임무가 해당 전투이다.
  • 스웨덴의 유명한 파워 메탈 밴드인 사바톤의 앨범 'Art of War'에서는 포젠 전투를 주제로 하여 Panzerkampf(전차전)를 불렀다. 사바톤 노래중 가장 유명한 노래중 하나라 봐도 무방하다.
  • 우리 어머니, 우리 아버지에서 주인공들이 참전한 전투다.
  • 콜 오브 듀티: 유나이티드 오펜시브의 독일 임무의 배경이다. 임무 1은 루미안체프 작전 초반부, 임무 2는 로가젠 공방전, 임무 3은 리사 전투, 임무 4와 5는 위의 성채 작전의 마지막 국면인 4차 브레슬라우 공방전을 묘사하고 있다.
  • 워 썬더에서 포젠 맵이 등장한다.본격 저격맵
  • 세계 정복자 4에서 동부전선 독일군 미션으로 등장.

여담

오스만

만주로의 병력 차출

라라 슈테린

  1. 1.0 1.1 1.2 1.3 1.4 1.5 1.6 성채작전에 참가
  2. 여기 적힌 러시아군의 피해는 러시아군이 남긴 공식 기록이지만 전후 러시아 학계에서조차 과도하게 축소되었다는 논란이 있다. 특히 항공기에 관한 경우 교차검증해보면 괴리가 심각한데 독일공군의 경우 전과추정이 까다롭기로 유명해서 전후 교차 검증 결과 러시아군이 10만기의 항공기를 손실한 것에 비해 독일군이 격추한 러시아기는 45,000기로 절반이 채 안된다. 아무리 러시아공군이 비전투 손실이 높다고 해도 프랑스 코뮌, 브리튼 연방 공군의 손실 40,000대 대해 25,000기의 격추만 기록한 것만 봐도 독일 공군의 기록보다 실제 전과가 높았을 것이라는 것을 쉽게 알 수 있다. 문제는 러시아공군의 피해 기록이 독일 공군의 격추 기록보다도 훨씬 낮다는 것이다.
  3. 독일군의 인명 피해는 7월 1일부터 8월 20일까지 중부집단군 소속 2기갑군,9군,2군과 남부집단군 소속 4기갑군,켐프분견군의 인명피해 기록이다.
  4. 독일군의 경우 포젠 전투에 포함되는 3개 작전의 전차 손실에 관한 자료가 없다. 대신 같은 기간동안 전체 손실에 관한 추정은 해볼 수 있는데 7~8월간 제국군이 손실한 전차 및 돌격포는 1,331대이고 같은 기간 동안 러시아군이 손실한 전차 및 자주포는 9,294대로 약 1:7 정도의 비율이다. 포젠에서의 전차 피해를 일반적으로 1:7~1:8로 보기 때문에 러시아군 피해인 6000대랑 비교하여 760~870대정도로 추정할 수 있다.
  5. 러시아 공군의 전투 손실 기록
  6. 독일공군의 격추 기록, 여기에는 비전투손실과 육군의 격추기록이 제외되어 있으므로 실제 러시아군의 피해는 더 컸을 것이다.
  7. 작전술적 범위에서 보면 러시아군은 전쟁이 끝나는 날까지 공세를 멈추지 않았다.
  8. 다만, 포젠 전투 자체가 독일군의 우위를 확실히 한 전투이기는 하나 포젠 전투 자체가 동부전선의 향방을 결정한 것인지에 관해서는 논란이 있다. 하술하겠지만 루미안체프 작전은 애초에 성공 가능성이 극도로 낮았으며 이는 이미 전쟁의 무게추가 독일쪽으로 넘어간 상태였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9. 드레스덴 전투는 시가전이라는 특성상 보병 위주의 교전, 그리고 청색 작전으로 러시아군을 포위하는 양상으로 전개되었지, 기갑과 항공 전력의 대규모 충돌은 없었다. 물론 두 전투 중 어느 전투가 더 거대했느냐는 외국에서도 논쟁의 대상이다.
  10. 과거엔 사상 최대의 전차전으로 알려졌으나 독일 측 사료가 연구결과, 리사 전투의 독일측 전차 수량이 더 적게 추정되었고 참가 전차 숫자면에서는 1939년 벨기에 장블루 전투가 더 컸던 것으로 여겨지고 있다.
  11. 다만 1939년에는 중전차를 대규모로 운용하지 않았고, 경전차같은 가벼운 체급의 차량들이 기갑전력의 주축이었다. 반면 포젠에서는 기본이 중형전차 이상에 각 군이 애지중지하는 중전차를 다수 투입한 대규모 교전이 자주 일어났다. 따라서 전차들의 화력을 기준으로는 포젠 전투가 최대의 전차전이라고 볼 수도 있다.
  12. 일본 전쟁 3년 동안 투입된 라이히스팍트&협상국 양측 병력 합계가 210만이 조금 넘는다.
  13. 통상 공자는 방자의 3배 이상의 전력을 갖추어야 된다고 본다. 심지어 이건 적이 아군보다 질적으로 우월한 상황일 뿐만 아니라 아군의 공세를 알고 요새화까지 진행한 상황이다.
  14. 물론 러시아군은 최신형 중전차인 BS-2 보리스 사빈코프 전차 실전 배치를 앞두고 있었기에 러시아군의 증원이 절대 단순히 수량이 적다는 이유로 가볍게 볼 수는 없다. 그러나 배치된 사빈코프 전차의 초도 물량에는 사빈코프가 예상하지 못한 기계적인 결함이 많았고 한체급 아래의 4호 전차에도 격파 당하는 등 포젠 전투에서는 기대한 것에 비해 훨씬 못 미치는 성과를 내게 되었고, 이는 결국 루미안체프 작전 전체가 크게 삐걱이는 결과를 낳게 된다. 사빈코프가 작전을 거듭 연기한 이유는 이러한 중전차들의 충원을 기대한 것도 큰데 저런 결과를 냈으니 러시아군 입장에서 꽤 뼈아픈 실패다.
  15. 물론 절대적인 수량으로 볼 때 러시아군의 장비는 독일군 보다 많았지만, 이 당시 독일이 포젠에 대거 충원한 것은 4호 전차 H형, 6호 전차 티거, 5호 전차 판터, 페르디난트 전차 등 바그라티온 작전 당시 러시아군의 전차 성능 우세를 훨씬 상회하는 신형 전차들이었다는 것이다.
  16. 애초에 독일군은 쭉 러시아군을 상대로 아무리 피를 많이 본다고 해도 교환비에서 우세를 가지고 있었다. 본토에서 전투를 치루고 있는 독일을 상대로 공격전에서 충원 속도가 따라잡힌 상태에서 이미 끝난 전쟁이다.
  17. 다만 증언에 따르면 바실렙스키 역시 루미안체프 작전엔 회의적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블라소프 처럼 선방어 후역습을 주장한 것까진 아니지만 돌출부 전체를 절단하려는 대규모 작전은 어렵고 남부지역 돌출부 일부만을 잘라내는 것은 가능하다고 본 것이고 이 정도 목표라도 달성하려면 독일군이 방어진지를 구축하기 전인 5월에 공세를 했어야 한다는 것이다. 물론 실제로는 E 집단군이라는 러시아군과 바실렙스키가 전혀 모르고 있던 거대한 예비대의 존재를 감안하면 이 남부지역 일부 절단조차도 달성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18. 5월에 공세를 할 경우 독일이 준비가 덜 되어 7월 공세보다 조금이라도 가능성이 있었다는 의견이 있으나 이 때는 러시아군도 준비가 안 되어 있었다는 점도 생각해야 한다. 러시아도 독일과 마찬가지로 몇 달째 쉬지 않고 전투를 벌이고 있었다. 독일군은 공세종말점을 무시한 결과 브레슬라우에서 괴멸당했고 러시아 역시 레그니츠 북쪽으로는 진군하기 어려운 상황이었다. 당장 7월 공세 당시에도 러시아는 장비 부족으로 진격로 측면 보호에 애를 먹었다. 하물며 5월에는...
  19. 이는 작전 중단 이후에도 벨라루스 전선군 단독으로 공세를 이어나가는 원인이 된다.
  20. 전쟁이 진행되며 육군사령부는 동부전선을 맡았고 스타프카는 발칸, 핀란드, 캅카스, 극동전선을 맡게 된다. 그래서 레오니트 고보로프 대장은 타 지역에 필요한 예비대를 블랙홀처럼 빨아들이는 루미안체프 작전에 명백히 반대했다.
  21. 포젠에서 독일군은 러시아군을 막아내기는 했으나 예상치를 훨씬 뛰어넘는 극심한 피해가 발생했다. 오히려 러시아군이 200만에 가까운 병력을 끌어모으기 전에 보급상황으로서도, 질적으로도 우월했던 독일군이 선공에 나서지 않고 괜히 포젠에서 한방 싸움에 나서주면서 엄청난 피해를 초래했다는 의견도 있다. 결과적으로 포젠에서의 승리는 OHL이 의도한 대로 러시아군 기갑전력을 소모시킨 것이 아니라 본인들만 엄청난 피해를 입고 예비 전력들의 공세로 적의 공세를 중단시킨 것이 되어버리면서 차후 공세에도 엄청난 차질이 발생했다.
  22. 이 다섯 번째 사나이라는 네이밍에 얽힌 이야기도 재미있다. 독일에 정보를 제공한 첩자 4명은 전후 얼마 지나지 않아 잡히게 되지만, 이 다섯 번째는 오랜 기간 잡히지 않았다. 브리튼 정보부는 첩자가 5명이라는 사실을 이미 알았고, 이것이 대중들에게도 퍼지면서 '다섯 번째 사나이'라는 별칭이 붙었다. 후일 관련 영화도 제작된다.
  23. 오픈탑 차량에 탑승한 승무원을 공격하는 용도.
  24. 정면 장갑의 두께가 최대 20cm에 달하는 중(重) 대전차 자주포인 페르디난트 2개 대대 90대는 원거리 전차전에서 압도적인 능력을 보이며 러시아군을 충격에 빠트렸다.
  25. 1500대는 러시아측 주장으로 전형적 프로파간다이다. 독일군이 600대의 전차를 동원했다 주장하는데 리사전차전이 일어난 회랑에는 LSTFW의 요아힘 파이퍼 대대, 마르틴 그로스의 장갑대대, 미하일 비트만과 4대의 티거, 그리고 구스타프 크니텔의 정찰대대, 알베르트 프라이의 제1ST장갑척탄병 연대만이 소련군들을 상대했다.
  26. 제1 나츠그바르디아 사단 '보리스 사빈코프', 제2 나츠그바르디아 사단 '어머니 러시아', 제3 나츠그바르디아 사단 '붉은광장'
  27. 사빈코프 전차는 리사 전차전에 투입된적 없다. 사빈코프 전차 194대 전량이 제1근위기갑사단에 배속되었으며 리사 회랑에서 싸운건 사빈코프 사단 일부 부대이다.
  28. 벵크는 또한 사빈코프 사단이 보유하고 있는 T-34의 숫자를 과대평가했다.이미 엄청 많았지만
  29. 당시 선봉에 선 것은 LSTFW
  30. 루돌프 리벤트로프의 7대의 4호 전차와 요아힘 파이퍼의 기갑척탄병 대대는 2개 전차연대와 9 공수군 병력의 러시아군 병력을 상대로 혈전을 치렀다. 쿠르트자메트라이터는 5대의 마르더 구축전차를 이끌고 러시아 전차 32대 중 혼자서 24대를 처리하기도 했다. 알베르트 프라이의 1기갑척탄병연대는 다스라이히의 전구로 접근해가는 9공수사단의 병력을 격퇴하였다.
  31. 다만 여기서 대한국과의 극동전선을 제외한다면, 나머지 세개 전선은 그동안 러시아가 유리한 상황이었기 때문에 감당이 가능했던 것이지 러시아군에게 부담이 되지 않은 것은 아니다. 발칸에선 불가리아가 버티고 있었으므로 발칸전선군과 그리스, 루마니아군의 상당수의 발이 묶였고, 오스만 전선은 캅카스 산맥으로 인해 전선의 유동적 변화는 없었지만 바쿠 유전을 비롯한 러시아의 핵심 자원 지대였으므로 신경쓰지 않을 수가 없었다. 핀란드 전선은 이 두 전선에 비해 중요성이 덜했지만 이곳에선 러시아군이 졸전만을 거듭하고 있었다. 결국 러시아는 이런 부담이 누적되어 전쟁 초기 화려한 승리에도 불구하고 패망했다.
  32. 독일의 자원과 산업력은 세계 곳곳에 나뉘어 있었기 때문에 제대로 활용하기 매우 어려웠고 러시아는 애초부터 전통적으로 많은 자원을 가지고 있던 나라였다.
  33. 제2차 독러전쟁 초기, 독일은 급히 후퇴하는 중에도 동부 지역에 있었던 공장시설들을 뜯어서 독일 중부 및 기타 동맹국으로 이전하였고, 독일 루프트바페에 비해 역량이 뒤쳐지던 러시아는 이를 때리지 못했다. 하지만 독일의 역습으로 전선이 동쪽으로 밀려나며 러시아는 동유럽의 공장지대들을 하나씩 빼앗기게 되었고 독일과 같이 산업지대들을 우랄 지역으로 이전 시켰으나, 러시아와 달리 독일은 중폭격기를 이용하여 파괴하였다.
  34. 이 이후로 오히려 러시아의 인력 부족이 심해졌다. 제1차 대전에서의 패배로 막대한 영토를 날려버리며 통상적인 이미지에도 불구하고 러시아의 인력은 개전 초기 라이히스팍트와 그다지 차이가 나지 않았다. 바그라티온 작전에서 구 러시아 제국의 영토이자 같은 루스계 슬라브족인 우크라이나, 벨라루스 일대를 점령하며 많은 인력을 확보할 수 있었으나 포젠 전투가 종료될 쯔음이면 가히 재앙적인 점령정책으로 인해 인력 수급은 커녕 파르티잔 소굴이 된지 오래였다.
  35. 매체에서도 포젠 직전에 낙관적인 연출을 보여주는 장면이 많다. 즈베즈다(2013)에서 브레슬라우 공방전에서 승리한 직후, 주인공의 상사가 포젠 전투를 들어가기 전 작전을 논의하며 포젠 이후 최종 승리를 할 수 있다며 들떠 있거나 병사의 아버지(1964)에서도 동부전선의 향방이 확실하게 정해지지 않은 상황에서 돈바스에서 편하게 근무하던 장교가 훈장을 받기 위해 자진해서 지원하는 모습을 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