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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차 세계 대전의 전투 목록 | 유럽/아프리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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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차 벨트크리그 | 주요 사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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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젠 전투 Die Schlacht bei Posen(Schlacht am Posen Bogen) Познань операция «Румянцев» Battle of Pozen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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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차 벨트크리그 중 동부전선의 일부 | ||||||||||||||||||
날짜 | 1943년 7월 5일~1943년 8월 23일 | |||||||||||||||||
장소 | 독일제국 포젠 | |||||||||||||||||
결과 | 독일군의 승리 | |||||||||||||||||
영향 | 독일군의 동부전선 주도권 장악 러시아군에게 뺏긴 브레슬라우를 비롯한 독일 및 오스트리아 영토 탈환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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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ss 사단 토텐코프의 병사들 |
이제 우리 러시아군과 독일군은 완전히 동격이다. 우리만 할 수 있고, 그들이 할 수 없는 일은 한 가지도 없다. 알렉산드르 바실렙스키 |
이제 러시아군은 패배의 쓴 잔을 맛보게 되었고, 강력한 적을 무너뜨리는 독일군의 용맹성을 알게 되었다. 하인츠 구데리안, 내셔널 지오그래픽 "전쟁의 대가들" 중에서 |
개요
독러전쟁 중 1943년 7월 4일~1943년 8월 23일까지 포젠 일대에서 벌어진 러시아 제2 제국과 독일제국 간의 전투. 제3차 브레슬라우 공방전 이후 형성된 포젠 돌출부를 포위하려는 러시아군의 시도에서 발생하였다.
이 전투는 동부전선에서 러시아의 마지막 전략적 공세[7]였으며, 동시에 드레스덴 공방전 이후 서서히 독일군의 우세로 넘어가던 동부전선의 주도권이 독일으로 완전히 넘어간 전투였다.[8] 이 전투에서 패배한 러시아군은 이후 동부전선에서 전략적 공세를 펼칠 역량을 완전히 상실한다.
서론
포젠 전투의 진행 |
드레스덴 전투에서의 처참한 패배 이후 러시아 국방군은 오데르강 서안에서 전면 후퇴를 결정한 이후로 독일군의 공세에 족족 밀리고 있었다. 그러던 중 러시아군은 제3차 브레슬라우 공방전에서 독일군을 저지하는데에 성공했고 이후 전선은 소강 상태에 이르렀으나, 그 과정에서 포젠 지역에 남북으로 250km, 동서로 160km에 달하는 거대한 돌출부가 형성되어 독일 러시아 양측의 크나큰 이목을 끌게 되었다. 러시아군은 동부전선에서의 주도권을 잡기 위해 이 돌출부를 포위하는 루미안체프 작전을 계획하게 된다.
원래 바실렙스키의 계획에 따르면 루미안체프 작전은 5월 3일에 개시되어야 했으나 완고한 독일군의 방어에 맞추기 위해 러시아군은 2달이 넘는 기간 동안이나 공격을 미뤄야 했다. 독일군은 러시아군이 여름 중으로 포젠 돌출부에 공격을 가할 것이라는 상당히 정확한 예측을 했으며 독일군과 라이히스팍트의 동부전선군 총 인력의 40%와 기갑 부대의 75%를 포젠 지역에 투입하였다.
7월 4일 루미안체프 작전이 개시되고 러시아군은 포젠 돌출부의 북쪽과 남쪽 두 군데로 공격을 가했다. 북쪽에서의 공격은 시원찮았으나 남쪽에서는 양측 모두 상황이 급박해 격렬한 전투를 벌이게 되었다. 3제곱킬로미터 불과한 지역에 수백대에 전차가 뒤엉키며 서로에게 포화를 내뱉는 아비규환이 벌어졌으며 양측 도합 약 700대 이상의 전차가 파괴되었다.
러시아군은 진격에 실패하고 주저앉았고 7월 10일 시칠리아에 서방 협상군이 상륙하며 이탈리아로 진입하면서 서부전선에서 여유가 생긴 독일군이 동부전선으로 추가 병력을 증원하자 사빈코프는 공세 중단을 진지하게 고려하기 시작했다. 거기다가 7월 15일에는 오스만이 캅카스로, 16일엔 대한제국군이 만주로의 공세를 개시했다. 스타프카의 반대로 논쟁이 이어지던 와중에 독일군이 러시아군의 공세가 끝나기도 전인 7월 12일부터 슈나이데뮐 방면으로 성채 작전을 시작했으며 이를 막기 위해 7월 13일에 루미안체프 작전은 공식적으로 취소되었다. 상대적으로 사정이 나았던 브레슬라우 방면에서는 17일까지 쿠투조프 작전을 진행했으나 오데르 방면에서 독일군이 공세를 시작하면서 공세가 중단됐다. 이어서 8월 3일부터 레그니츠 방면으로 시작된 독일군의 반격이 8월 23일까지 이어졌고 러시아로부터 레그니츠 시와 브레슬라우 시를 탈환하는데에 성공하며 포젠 전투는 끝을 맺게 된다.
흔히 드레스덴 전투가 인류 역사상 최대의 전투로 알려져 있지만, 이는 사실 최대 규모의 사상자를 낸 전투라고 하는 것이 맞다. 포젠 전투는 드레스덴 전투와는 달리 역사상 최대 수준의 기갑, 항공 전력이 동원된 가장 규모가 거대한 전투였다.[9] 이 전투의 일부인 포젠 남부에서 일어난 리사 전투는 사상 최대의 항공전이자 최대의 전차전이기도 하였으며[10][11] 1달도 되지 않는 기간 동안 단일 전역에서 양 군의 병력 약 200만, 전차 약 6,000대, 항공기 약 4,500대라는 가공할 전력이 충돌하였다.[12]
한편 드레스덴 전투가 제2차 세계 대전의 주도권 전환의 시발점이였다면, 포젠 전투는 전쟁에서 독일군이 완전히 우위를 차지하였음을 확인시켜준 전투였다. 이 전투에서 러시아군은 독일군을 제대로 격파할 수 없었으며 도리어 독일군의 반격에 주요 도시들을 탈환 당하는 등 앞으로 두번 다시는 동부전선에서의 대규모 공세를 이어나갈 수 없게 된다.
1943년 동부전선의 상황
1942년 겨울, 러시아군은 보헤미아 전선군을 드레스덴 전투에서 통째로 잃고 말았고, 후방 부대들은 작센 지역에서 전격적으로 후퇴하게 된다. 독일군은 이를 추격하여 브레슬라우를 일시적으로 탈환하는데 성공했지만, 러시아군은 과감한 반격을 개시하여 독일군 선봉을 섬멸하고 다시 브레슬라우를 재탈환했다.
해당 공방전 결과, 동부전선에는 포젠을 중심으로 거대한 돌출부가 형성돼 양쪽 수뇌부의 이목을 집중시키게 된다.
루미안체프 작전
이 무렵 나치 러시아는 이 거대한 전쟁을 수행하기엔 자신들의 역량이 충분치 않음을 느끼고 있었다. 동부전선의 팍트군은 라이히스팍트 각 지역에서 생산되는 수 많은 군수무기와, 미국으로부터 천문학적인 규모의 무기대여법 지원을 본격적으로 받아가며 점점 거대한 괴물로 성장하고 있었고, 캅카스에선 로디온 말리놉스키 원수의 캅카스 전선군이 수세에 몰려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극동에서 대한제국군이 공세를 시작한다면 러시군은 과거 제1차 세계 대전의 악몽이었던 양면 전선을 강요당할 수밖에 없게 되고, 이는 러시아로서 감당할 수 있는 범위를 넘어선 것이었다.
이런 부담은 러시아군 수뇌부에게 획기적인 전과를 내야 한다는 압박으로 나타나기 시작했다. 직전의 3차 브레슬라우 공방전을 승리로 이끌었던 알렉산드르 바실렙스키는 가능한 빠르게 이 기세를 몰아서 북쪽으로 공세를 취하는 한편, 벨라루스 전선군이 남쪽으로 공세를 취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반면 세르게이 마르코프와 전차 생산 상황을 잘 알고 있는 알렉산드르 보즈네센스키는 '동부전선에서의 공세는 더 이상 불가능하다'며 반대하였다.
하지만 바실렙스키가 보기에 독일군은 이전의 전투로 비틀거리고 있었고 포젠 인근에 아직 정교한 방어선이 구축되지 않은 상태였다. 이에 사빈코프도 선제 공격안을 받아들였고, 구체적인 작전안은 보즈드의 제안에 열렬히 동의한 마르키안 포포프 참모총장이 맡았다. 그리고 마침내 포젠 돌출부에 협격을 가해 전선을 축소하고, 동시에 최대한 독일의 전략 예비대를 섬멸해 동부전선을 안정시키고 주도권을 되찾겠다는 골자의 루미안체프 작전(Познань стратегическая наступательная операция «Румянцев»)을 입안하게 된다.
바실렙스키는 브레슬라우에서 적에게 막대한 피해을 입힌 당시가 적기이며 늦어도 5월 초에는 공격을 시작해야 한다 주장했으나, 독일군과 마찬가지로 큰 손실을 입은 벨라루스 전선군의 증원도 필요했기에 사빈코프는 기갑부대의 보충이 끝나는 6월 12일로 작전 개시일을 결정했다. 그런데 사빈코프는 여기서 또 완벽한 전력 우위를 확보해야 한다며 작전을 추가로 연기시킨다. 물론 맨 위의 개요표를 보면 알 수 있듯이, 전력 우위를 점한답시고 끌어모은 것이 독일군의 두배 밖에 되지 못했으며, 보급은 그 보다도 더 부족했다. 방어도 아니고 공세를 펼치려는 주제에![13][14]
당시 러시아군은 사빈코프의 의견대로 보충이 필요했던 상황이긴 했으나, 문제는 독일군의 보충 속도가 러시아군의 보충 속도를 따라잡은 상태였다는 것이었다. 공세가 연기된 동안 독일군은 국민돌격대와 병력들을 총동원하여 수백 km 길이의 도랑을 팠고, 대전차포와 지뢰로 철벽 방어선을 구축했으며, 사빈코프가 작전을 연기한 동안 서방 인터내셔널군이 전개한 마켓가든 작전이 처참하게 실패하면서 포젠 부근에 서부전선에서 차출된 독일군 사단들이 대거 등장하게 됐다. 거기다 러시아군은 독일을 상대로 한 동부전선 뿐만 아니라, 불가리아가 버티고 있는 발칸 전선, 오스만과의 캅카스 전선, 핀란드-스웨덴과의 핀란드 전선, 한국과의 극동전선을 비롯한 수 많은 전선에서 소모가 누적되고 있었으므로 포젠에 병력과 물자를 집중하기가 어려웠다. 러시아군의 작전계획이 삐걱거리는 동안 독일은 서부전선에서 차출한 병력과 새로 충원한 병력까지 끌어모아 1943년 4월 50만이던 병력이 7월 당시엔 90만으로 늘어났고 기갑은 2배, 포병은 4배 가까이 늘어났다.[15][16]
물론 공세가 언제였든 결과를 뒤집기는 어려웠다. 당시 러시아의 사정상 이런 돌출부 전체를 절단하려는 대규모 공세를 하는 것 자체가 무리에 가까웠다. 연기를 하거나 말거나, 어차피 '아주 낮은 성공확률 vs 낮은 성공확률' 의 비교에 불과하다. 그래서 당시 러시아에게 있어서 최소한 동부전선을 공략할 최고의 전략은 돌출된 지역 제거가 아닌 후방에 안정적으로 구축된 요새로 독일군을 끌여들여 기동방어를 하는 것이 더 나았다는 주장도 있다. 그러나 연합군의 물량이 나날이 러시아를 압도해 가고 있었기에 시간을 끌면 끌수록 불리해지고, 소극적으로 방어만 한다면 갈수록 전쟁의 주도권을 잃게 되는 것 또한 사실이었다. 즉 러시아군 입장에서는 전황을 단번에 바꿀 수 있는 대규모의 회전을 통하여 독일군에게 치명타를 입혀 주력군을 소멸시키는 것 역시 분명히 필요한 상황이었다.
루미안체프 작전은 이런 관점에서 입안되었고, 바실렙스키를 비롯한 즉시 공세파들은 공세를 연기하면 오히려 전력차가 더 벌어질 것으로 보고 즉시 공격을 주장했다.[17][18] 한편 벨라루스 전선군 사령관 이반 코네프 원수는 사빈코프가 주관한 회의에서는 루미안체프 작전에 적극 찬성했으나, 포젠 방면의 두터운 독일군 방어 진지와 슈나이데뮐 돌출부 주위에 수십만 독일군이 집결하는 것을 항공 정찰로 파악한 니콜라이 바투틴은 루미안체프 작전에 회의적이었다. 이후 코네프 또한 이에 동의하여 바투틴이 제안한 사빈코프가 명시적으로 금지했던 슈나이데뮐 돌출부 후방의 방어 진지 구축을 허락한다. 특히 바투틴은 '루미안체프 작전이 성공하더라도 슈나이데뮐 방면에 위치한 독일군의 위협은 그대로이기 때문에 성공 가능성도 낮은 루미안체프 작전은 아예 완전히 포기하고 슈나이데뮐에 집중된 벨라루스 전선군을 동부전선의 전략적 예비대로 가용할 것을 주장하기까지 했다. 그러나 6월 중순, 루미안체프 작전이 중단될 가능성이 제로가 되자 13군을 공세 작전 위주로 훈련하여 재편성하였다.
계획 단계에서도 보이듯 루미안체프 작전을 강하게 주장한 것은 육군최고사령부였으며 바투틴은 처음부터 공세에 회의적이었기 때문에 공세에도 적극적이지 않았다. 반면에 바실렙스키는 늦은 공세에 회의적이기는 했어도 공세가 필요하다고 생각했으며 공세 시작 이후에는 적극적이었다. 이는 양측의 입장이 매우 다르기 때문인데 바투틴의 경우, 공세를 진행하는 13군 자체가 이미 슈나이데뮐 돌출부를 방어하고 있었으며 북쪽의 2전차군을 향한 독일군의 압력이 이미 심각한 상태였다. 따라서 공세 시작 이후에도 공세에 집중할 수가 없었다. 반면 바실렙스키는 1전차군과 6군에서 기갑전력을 차출하면서까지 포젠에 기갑 전력을 집중시켰으며 주공이 남부 방면이었기 때문에 사령부의 지원 역시 벨라루스 전선군에 집중됐다. 그만큼 이 작전이 남부 벨라루스 전선군에게 중요했기 때문이었는데 발트전선군은 1년 넘게 방어전을 치르면서 매우 강력한 방어선을 구축했으나 기껏해야 몇 달전에 탈환한 곳에서 공세를 시작할 남부 벨라루스 전선군의 경우에는 공세가 실패할 경우 독일군을 막는 것이 거의 불가능한 상황이었다.[19]
루미안체프 작전은 러시아 입장에서 앞선 작전과 비교해 볼 때 전역의 크기 대비 유례없는 병력과 무기의 증강이 이루어졌으나, 정작 작전의 목표는 모호했다. 그리고 확실한 목적이 없었던 만큼 사령부의 의지도 자연스럽게 약해졌다. 이반 소장의 회고를 보면 사빈코프조차도 '성공의 가능성이 높지 않지만 할 수 있는 것이 이것밖에 없다'고 말하는 상황이었다. 서방 협상국의 유럽대륙 상륙과, 독일의 기타 동맹국의 역습이 얼마 남지 않은 상황에서 러시아 육군 최고사령부는 동부 전선에 예비가 없었고 스타프카는 핀란드, 발칸, 캅카스, 극동에 투입할 전략 예비가 없었다[20] 러시아군은 전략 예비 확보를 위해 반드시 전선을 단축해야 했다. 포젠 바로 북쪽에는 독일군의 슈나이데뮐 돌출부가 있었기 때문에 슈나이데뮐을 포기하지 않는 이상 포젠 돌출부를 정리해야만 했고 사빈코프는 단 한치의 땅도 내줄 생각이 없었다. 작전은 반드시 성공해야 한다는 러시아군의 강박감 속에 점점 미뤄졌다. 결국 작전 입안자들의 확신은 사라지고 야전 사령관들도 회의감에 빠진 상황에서, 성공해도 얻을 것은 별로 없고 실패할 시 잃을 것은 많은 작전이 결국 실행되기에 이른다.
그리하여 러시아군은 포젠 일대에 병력 190만, 전차 및 자주포 5,100대(전차만 6,000대에 이른다는 설도 있다), 비행기 3,000대, 야포 25,000문 이상이라는 엄청난 전력을 집결시켰다. 사빈코프는 드디어 전력 우위를 갖췄다고 판단했고, 작전 개시일은 7월 5일로 결정되었다.
독일군의 방어
사상 최대의 방어 작전
한편 독일군은 첩보로 러시아군의 공세목표가 포젠이라는 것을 정확히 예측하고 있었다. 따라서 러시아군의 공세를 완벽하게 막아내기 위해 가공할 규모의 방어 진지를 구축하기 시작했다. 사실 포젠 지역이 돌출부라는 것 자체가 적의 선제 공격 목표가 된다는 말이나 마찬가지였다.
한편 빌헬름3세는 베를린 공방전의 승리와 드레스덴 승리 이후에 그랬던 것처럼 러시아군에게 대규모 선제 공격을 할 생각을 또 품었지만, SOK 총장 하인츠 구데리안과 총참모장 알프레드 요들 등이 겨우겨우 설득하여 이전같이 쓸데없는 재앙을 피할 수 있게 됐다.
방어전의 주력인 발터 모델의 중부집단군과 만슈타인의 바익셀 집단군에는 엄청난 전력이 보강되기 시작했다. 포젠 일대에는 국민돌격대 30만명을 동원하여 총 3,000마일이 넘는 참호와, 종심이 175km에 달하는 6중 방어선이 구축되었고 여기에 무려 40만 개가 넘는 지뢰매설, 가짜 공군기지 50개와 비행장 150여 곳 건설, 그리고 말뚝 전차 장애물도 구축되었으며 기갑의 우세를 중시하는 독일군답게 전차가 약 3,500대를 배치했다.
또한 러시아군의 공세를 저지한 후 역습을 가할 주력으로 선정된 E 집단군에도 30만명의 병력과 1개 기갑군단이 배치되었다. 이렇게 동원된 독일군의 총 전력은 병력 약 90만, 야포 10,000문, 전차 및 자주포 3,500대(5,000대로 추산하는 설도 있다) 항공기 2,100대에 이르는 대규모였고 이는 당시 독일과 라이히스팍트 전체 병력의 40%, 기갑부대의 75%를 이곳에 배치한 것이었다.
정보전의 승리
러시아군의 공세
▲ 진격하는 러시아군 t-34와 보병들 |
포젠 북쪽 방면
러시아군의 초기 공세
로가젠 공방전
포젠 남쪽 방면
러시아군의 초기 공세
제2 나츠그바르디아 전차군의 약진
리사 전투
러시아군의 공세 종료
성채작전의 시작과 전투 종료
▲ 포젠 남쪽에서 공세를 진행하는 4호 전차와 하노마크 장갑차 |
포젠 북쪽 방면
포젠 남쪽 방면
결과
편제
협정군의 편제
러시아군
벨라루스 전선군
발트 전선군
세르비아 왕국군
그리스군
루마니아 왕국군
팍트군의 펀제
독일군
중부 집단군
북부 집단군
바익셀 집단군
E 집단군
오스트리아군
오스트리아 제4 야전군
오스트리아 제7 야전군
자유 폴란드군
자유 우크라이나군
벨라루스 국민군
매체에서의 묘사
- 게임 월드 오브 탱크에서 리사가 배경으로 등장한다.
- 미니어처 게임인 DUST에서도 원래 역사처럼 발발하였다. 이전의 드레스덴 전투를 로봇보행 병기를 투입한 러시아군의 승리로 돌아가자 보행병기만으로 독일군들을 모두 발라버릴수있다고 자만한 러시아군이 개활지에 전차를 상대로 투입했다가 독일군의 대전차화기 등등에 대차게 발려 버렸다. 덕분에 러시아군은 자기들의 보행병기까지 노획당하고 독일은 이를 기반으로 한 보행병기인 1호 보행병기 제작에 박차를 가하게 되었다. 당연하지만 보행병기들의 키는 일반적인 전차등에 비해서 크고 속도가 느려서 시가전은 몰라도 개활지로 나왔다간 그냥 움직이는 타겟이 된다.
- SD 세계대전 독일군 캠페인 9번째 임무가 해당 전투이다.
- 스웨덴의 유명한 파워 메탈 밴드인 사바톤의 앨범 'Art of War'에서는 포젠 전투를 주제로 하여 Panzerkampf(전차전)를 불렀다. 사바톤 노래중 가장 유명한 노래중 하나라 봐도 무방하다.
- 우리 어머니, 우리 아버지에서 주인공들이 참전한 전투다.
- 콜 오브 듀티: 유나이티드 오펜시브의 독일 임무의 배경이다. 임무 1은 루미안체프 작전 초반부, 임무 2는 로가젠 공방전, 임무 3은 리사 전투, 임무 4와 5는 위의 성채 작전의 마지막 국면인 4차 브레슬라우 공방전을 묘사하고 있다.
- 워 썬더에서 포젠 맵이 등장한다.
본격 저격맵 - 세계 정복자 4에서 동부전선 독일군 미션으로 등장.
여담
오스만
만주로의 병력 차출
라라 슈테린
- ↑ 1.0 1.1 1.2 1.3 1.4 1.5 1.6 성채작전에 참가
- ↑ 여기 적힌 러시아군의 피해는 러시아군이 남긴 공식 기록이지만 전후 러시아 학계에서조차 과도하게 축소되었다는 논란이 있다. 특히 항공기에 관한 경우 교차검증해보면 괴리가 심각한데 독일공군의 경우 전과추정이 까다롭기로 유명해서 전후 교차 검증 결과 러시아군이 10만기의 항공기를 손실한 것에 비해 독일군이 격추한 러시아기는 45,000기로 절반이 채 안된다. 아무리 러시아공군이 비전투 손실이 높다고 해도 프랑스 코뮌, 브리튼 연방 공군의 손실 40,000대 대해 25,000기의 격추만 기록한 것만 봐도 독일 공군의 기록보다 실제 전과가 높았을 것이라는 것을 쉽게 알 수 있다. 문제는 러시아공군의 피해 기록이 독일 공군의 격추 기록보다도 훨씬 낮다는 것이다.
- ↑ 독일군의 인명 피해는 7월 1일부터 8월 20일까지 중부집단군 소속 2기갑군,9군,2군과 남부집단군 소속 4기갑군,켐프분견군의 인명피해 기록이다.
- ↑ 독일군의 경우 포젠 전투에 포함되는 3개 작전의 전차 손실에 관한 자료가 없다. 대신 같은 기간동안 전체 손실에 관한 추정은 해볼 수 있는데 7~8월간 제국군이 손실한 전차 및 돌격포는 1,331대이고 같은 기간 동안 러시아군이 손실한 전차 및 자주포는 9,294대로 약 1:7 정도의 비율이다. 포젠에서의 전차 피해를 일반적으로 1:7~1:8로 보기 때문에 러시아군 피해인 6000대랑 비교하여 760~870대정도로 추정할 수 있다.
- ↑ 러시아 공군의 전투 손실 기록
- ↑ 독일공군의 격추 기록, 여기에는 비전투손실과 육군의 격추기록이 제외되어 있으므로 실제 러시아군의 피해는 더 컸을 것이다.
- ↑ 작전술적 범위에서 보면 러시아군은 전쟁이 끝나는 날까지 공세를 멈추지 않았다.
- ↑ 다만, 포젠 전투 자체가 독일군의 우위를 확실히 한 전투이기는 하나 포젠 전투 자체가 동부전선의 향방을 결정한 것인지에 관해서는 논란이 있다. 하술하겠지만 루미안체프 작전은 애초에 성공 가능성이 극도로 낮았으며 이는 이미 전쟁의 무게추가 독일쪽으로 넘어간 상태였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 ↑ 드레스덴 전투는 시가전이라는 특성상 보병 위주의 교전, 그리고 청색 작전으로 러시아군을 포위하는 양상으로 전개되었지, 기갑과 항공 전력의 대규모 충돌은 없었다. 물론 두 전투 중 어느 전투가 더 거대했느냐는 외국에서도 논쟁의 대상이다.
- ↑ 과거엔 사상 최대의 전차전으로 알려졌으나 독일 측 사료가 연구결과, 리사 전투의 독일측 전차 수량이 더 적게 추정되었고 참가 전차 숫자면에서는 1939년 벨기에 장블루 전투가 더 컸던 것으로 여겨지고 있다.
- ↑ 다만 1939년에는 중전차를 대규모로 운용하지 않았고, 경전차같은 가벼운 체급의 차량들이 기갑전력의 주축이었다. 반면 포젠에서는 기본이 중형전차 이상에 각 군이 애지중지하는 중전차를 다수 투입한 대규모 교전이 자주 일어났다. 따라서 전차들의 화력을 기준으로는 포젠 전투가 최대의 전차전이라고 볼 수도 있다.
- ↑ 일본 전쟁 3년 동안 투입된 라이히스팍트&협상국 양측 병력 합계가 210만이 조금 넘는다.
- ↑ 통상 공자는 방자의 3배 이상의 전력을 갖추어야 된다고 본다. 심지어 이건 적이 아군의 공세를 알고 요새화까지 진행한 상황이다.
- ↑ 물론 러시아군은 최신형 중전차인 BV-2 보리스 사빈코프 전차 실전 배치를 앞두고 있었기에 러시아군의 증원이 절대 단순히 수량이 적다는 이유로 가볍게 볼 수는 없다. 그러나 배치된 사빈코프 전차의 초도 물량에는 사빈코프가 예상하지 못한 기계적인 결함이 많았고 한체급 아래의 4호 전차에도 격파 당하는 등 포젠 전투에서는 기대한 것에 비해 훨씬 못 미치는 성과를 내게 되었고, 이는 결국 루미안체프 작전 전체가 크게 삐걱이는 결과를 낳게 된다. 사빈코프가 작전을 거듭 연기한 이유는 이러한 중전차들의 충원을 기대한 것도 큰데 저런 결과를 냈으니 러시아군 입장에서 꽤 뼈아픈 실패다.
- ↑ 물론 절대적인 수량으로 볼 때 러시아군의 장비는 독일군 보다 많았지만, 이 당시 독일이 포젠에 대거 충원한 것은 4호 전차 H형, 6호 전차 티거, 5호 전차 판터, 페르디난트 전차 등 바그라티온 작전 당시 러시아군의 전차 성능 우세를 훨씬 상회하는 신형 전차들이었다는 것이다.
- ↑ 애초에 독일군은 쭉 러시아군을 상대로 아무리 피를 많이 본다고 해도 교환비에서 우세를 가지고 있었다. 본토에서 전투를 치루고 있는 독일을 상대로 공격전에서 충원 속도가 따라잡힌 상태에서 이미 끝난 전쟁이다.
- ↑ 다만 증언에 따르면 바실렙스키 역시 루미안체프 작전엔 회의적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바투틴 처럼 선방어 후역습을 주장한 것까진 아니지만 돌출부 전체를 절단하려는 대규모 작전은 어렵고 남부지역 돌출부 일부만을 잘라내는 것은 가능하다고 본 것이고 이 정도 목표라도 달성하려면 독일군이 방어진지를 구축하기 전인 5월에 공세를 했어야 한다는 것이다. 물론 실제로는 E 집단군이라는 러시아군과 바실렙스키가 전혀 모르고 있던 거대한 예비대의 존재를 감안하면 이 남부지역 일부 절단조차도 달성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 ↑ 5월에 공세를 할 경우 독일이 준비가 덜 되어 7월 공세보다 조금이라도 가능성이 있었다는 의견이 있으나 이 때는 러시아군도 준비가 안 되어 있었다는 점도 생각해야 한다. 러시아도 독일과 마찬가지로 몇 달째 쉬지 않고 전투를 벌이고 있었다. 독일군은 공세종말점을 무시한 결과 브레슬라우에서 괴멸당했고 러시아 역시 레그니츠 북쪽으로는 진군하기 어려운 상황이었다. 당장 7월 공세 당시에도 러시아는 장비 부족으로 진격로 측면 보호에 애를 먹었다. 하물며 5월에는...
- ↑ 이는 작전 중단 이후에도 벨라루스 전선군 단독으로 공세를 이어나가는 원인이 된다.
- ↑ 전쟁이 진행되며 육군사령부는 동부전선을 맡았고 스타프카는 발칸, 핀란드, 캅카스, 극동전선을 맡게 된다. 그래서 레오니트 고보로프 대장은 타 지역에 필요한 예비대를 블랙홀처럼 빨아들이는 루미안체프 작전에 명백히 반대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