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36년 미국 대통령 선거 (위대한 사회)

1936년 미국 대통령 선거
1936 United States presidential election

스미스 240인 (45.2%)
(52.5%) 279인
1936년 11월 3일
1936년 대선
선거일시
11월 3일 5시 ~ 11월 4일 6시 (UTC)
투표율
56.9%
선거 결과
후보
민주당
대통령 앨 스미스
부통령 안톤 세르막
공화당
대통령 알프 랜던
부통령 프랭크 녹스
진보당
대통령 휴이 롱
부통령 윌리엄 보라
홈스테이트
뉴욕 캔자스 루이지애나
승리 주
18개 주 3개 주 29개 주
선거인단
240인 12인 279인
전국 득표
36.2%
18,051,048표
27.2%
13,563,853표
36.6%
18,230,876표
대통령 당선인 부통령 당선인
진보당
휴이 롱 윌리엄 보라

개요

1936년 11월 3일 치러진 미국의 대통령 선거. 진보당 소속의 대통령 후보인 휴이 롱(Hueu Long) 루이지애나 주지사와 부통령 후보인 윌리엄 보라(William Borah) 아이다호 주 상원의원이 현직 대통령 앨 스미스(Al Smith)와 부통령 안톤 세르막(Anton Cermak)의 재선을 저지하고 당선되었다.

1856년 미국 대통령 선거 이후 80여년간 이어져온 공화당 우위의 민주-공화당 양당 구도를 무너트렸으며, 윌리엄 제닝스 브라이언, 시어도어 루스벨트, 로버트 M. 라폴레트 시니어 이후 맥이 끊겼던 미국 혁신주의의 부활을 예고한 선거였다. 선거 당선인 휴이 롱은 "우리의 부를 나누자"(Share Our Wealth)를 추진하여 이후에도 수정자본주의적 경제 정책이 미국에 뿌리를 내릴 수 있도록 하였다.

배경

1932년 대선에서 허버트 후버 현직 대통령을 근소한 차이로 꺾고 대통령으로 당선된 전 뉴욕주지사 앨 스미스는 "승리의 길"(Way to Victory; WTV)이라는 대대적인 경기부양 정책을 펼쳤다. 앨 스미스는 허버트 후버 행정부의 무능에 질린 많은 미국 시민들에게 지지를 받았으나, 대공황의 경제 상황이 개선되기는 커녕 오히려 악화되면서 시민들의 지지를 잃었다. 스미스 행정부는 확장적 재정 정책을 시행해야한다는 일부 민주당원들의 주장에도 불구하고 엄격한 긴축 조치를 추구하면서 정부 지출 삭감, 사회 안전망 축소, 균형예산을 위한 세금 인상 등 후버 행정부의 정책 기조를 유지하였다. 처음에는 정부 부채와 인플레이션이 줄어들었지만 사회안전망의 미비는 심각한 기아 상황을 개선시키지 않았고, 1934년 다시 경기는 악화되기 시작했다.

스미스 행정부는 1934년 공황을 해결하기 위해 긴축 통화 정책을 펼쳤으나 이는 경제 사정을 더욱 악화시킬 뿐이었다. 1934년 이후 다시 상승하기 시작한 물가상승률을 통제하기 위해, 앨 스미스는 통화를 통제하는 여러 정책을 추진했으나, 오히려 투자 수준이 낮아지고 실업률이 높아지는 심각한 디플레이션이 터지면서, 1929년 공황은 1932년의 상황과 비교했을 때 전혀 좋아진 부분이 없었다. 미국의 한 시사잡지 "시카고 트리뷴"의 우편 조사에 의하면, 잡지 구독자의 96%가 경제적 상황이 어렵다고 답했으며 그중 67%가 앨 스미스에게 책임이 있다고 답했다. 오죽하면 당시 유행어가 스미스 행정부의 WTV 정책을 거꾸로 뒤집은 "AIM", 즉 "Al Is Moron(앨 스미스는 멍청이다)"였을 정도이다.

또한, 스무트-홀리 관세법 폐지가 불발되고 앨 스미스의 고질적인 문제점이었던 태머니 홀 유착 사건이 다시 수면 위로 떠오르며, 공화당과 민주당 양당에 대한 불신이 극대화되었다. 이런 상황에서 루이지애나 주지사를 지내며 혁신적인 경제 개혁 정책을 내세우고 이후 상원의원으로 당선되어 민주당의 대권주자로 부각된 휴이 롱이 앨 스미스의 대안으로 여겨지기 시작했다. 휴이 롱은 민주당과 공화당 양당을 비판하며 공화당의 윌리엄 보라 상원의원, 찰스 L. 맥내리 상원의원, 민주당의 윌리엄 매커두 상원의원, 버튼 K. 휠러 상원의원, EPIC 운동을 이끈 업튼 싱클레어, 위스콘신 진보운동의 지도자 필립 라폴레트 - 로버트 M. 라폴레트 주니어 등을 규합해 진보당을 창당하고 대선 출마를 준비한다.

정당 별 상황

민주당


1936년 민주당 대선 후보 티켓
앨 스미스
Al Smith
안톤 서맥
Anton Cermak
대통령 후보 부통령 후보
제32대 미합중국 대통령
(1933–1937)
제32대 미합중국 부통령
(1933–1937)
Don't Change Horses in Midstream
강을 건너는 도중에는 말을 바꿔타지 말라

1936 스미스 - 서맥 티켓 슬로건

민주당 내에서는 앨 스미스의 리더십이 심각하게 위협받고 있었다. 보수적인 남부 민주당원인 존 낸스 가너(John N. Garner) 하원의원, 해리 F. 버드(Harry F. Byrd) 상원의원, 미리엄 "마" 퍼거슨(Mirriam "Ma" Ferguson) 텍사스 주지사 등은 그의 리더십을 공격하며 현직 대통령을 대상으로 한 경선 출마를 시사하였다. 특히 버드 상원의원은 스미스 대통령에게 가장 위협적인 존재였다. 인종차별주의자이자 악명높은 남부 민주당원인 해리 F. 버드 상원의원은 앨 스미스가 자신의 과오를 인정하고 2기 행정부에서 대대적인 정책 수정을 하겠다는 약속을 하지 않으면 남부 민주당원을 이끌고 독자 출마를 하겠다고 앨 스미스를 협박하였으며, 이에 앨 스미스는 자신의 소신이었던 흑인민권 추진, 확장적인 재정 지출 안 등을 포기하고 해리 F. 버드와 타협하였다.

진보 성향의 민주당원들은 이를 1876년의 타협[1]에 빗대어 1936년 대타협이라고 조롱했으며 대거 휴이 롱을 지지 선언했다. 특히 전 뉴욕주지사 프랭클린 루스벨트[2]는 앨 스미스를 이렇게 비판하기도 하였다.

Al Smith is the impersonation of the milky compromise power. In him confederacy lives again. He is the lineal successor of Rutherford B. Hayes and Franklin Pierce; and he gathers about him the same supporters. (...) Democrats are doomed!! In Short, it's a piece of shit. I'll quit this party and support Huey P. Long!!
앨 스미스는 유약한 타협 세력의 인격화이다. 그 안에서 남부맹방은 다시 살아났다. 그는 러더퍼드 B. 헤이스[3]프랭클린 피어스[4]의 직계 후손이며, 똑같은 지지자를 모으고 있다. (중략) 민주당은 끝났다!! 한마디로 말해, X같은 당이다. 나는 민주당을 탈당하고 휴이 롱을 지지한다!!
프랭클린 루스벨트 전 뉴욕주지사, 1935년 12월 7일 하이드파크 사저에서의 선언문 中

프랭클린 루스벨트 주지사의 폭탄 선언에 민주당은 충격에 빠졌으며, 그 즉후 매커두 상원의원, 헨리 A. 월리스(Henry A. Wallace) 농업부장관은 민주당을 탈당하고 휴이 롱의 진보당에 가입한다. 코델 헐(Cordell Hull) 국무장관 등 일부는 민주당을 탈당하지는 않았으나 민주당의 분열은 재선을 노리는 앨 스미스 대통령에게 큰 충격일 수 밖에 없었다.

그럼에도, 앨 스미스의 가장 큰 위협이었던 해리 버드가 타협안을 대가로 스미스 지지를 선언하고, 당내 진보 세력이 알아서 휴이 롱의 지지로 빠진데다, 당의 중진의원이자 선거 지휘관이었던 제임스 팔리(James Farley)가 스미스의 재선을 지지하기로 결정하면서, 앨 스미스의 재선 캠페인은 쉽게 진행되었다. 1936년 6월 27일 필라델피아의 민주당 전국대회(DNC)에서 앨 스미스는 반대 표 없는 만장일치로 대통령 후보로 다시 지명된다.

공화당


1936년 공화당 대선 후보 티켓
알프 랜던
Alf Landon
프랭크 녹스
Frank Knox
대통령 후보 부통령 후보
제32대 캔자스 주지사
(1933–1937)
시카고 데일리 뉴스 편집자
(1931–1940)
Happy Landin' with Landon
랜던과 함께 행복한 착륙을

1936 랜던 - 녹스 티켓 슬로건

공화당의 상황은 절박했다. 1932년 대선에서 허버트 후버가 앨 스미스에게 근소하게 패배하긴 했지만, 이는 벤저민 프랭클린 이후 공화당과 민주당 1대 1 대결에서 공화당 대통령이 패배한 최초의 사례였을 뿐더러 시간이 흐를수록 민주당 뿐 아니라 공화당에 대한 심판 여론도 높아졌기 때문이다. 공화당은 1934년 공황의 불만이 지배하는 상황에서, 하원의원 선거에서 대승을 거두어 하원을 장악하게 되었지만, 앨 스미스의 정책에 딴지를 걸기는 커녕 더욱 시장지향적인 처방전만을 고집하여 "아무것도 하지 않는 의회"라는 별명을 얻게 되었다. 자연스럽게 공화당에 유리할 것으로 보였던 초기 선거 구도는 양당 모두의 비판자인 휴이 롱 루이지애나 주지사의 부상으로 인하여 위기를 맞게 되었다.

이에 공화당 내에서는 공화당의 기득권파와 연관이 없는 후보를 내세우려고 노력했다. 가장 유력한 후보는 진보적인 상원의원 찰스 L. 맥내리(Charles L. McNary)였으나, 그는 앨 스미스보다도 더욱 진보적인 입장을 표명하여 공화당 기득권파의 반감을 샀으며 무엇보다 자신이 출마를 거부했다. "위대한 고립주의자" 윌리엄 보라(William Borah) 상원의원이 출마 의지를 내비쳤으나, 이내 휴이 롱을 지지하며 당을 탈퇴해버렸다. 결국 남은 진지한 후보자는 아서 반덴버그(Arthur Vandenburg) 미시간주 상원의원과 알프 랜던(Alf Landon) 캔자스 주지사 뿐이었다.

랜던 주지사는 상대적으로 무명이었으나 중도적인 입장을 표명하였고 반덴버그가 이내 보수적인 성향으로 여론의 반발에 부딪히자 경선 후보직을 사퇴하며 사실상의 유일한 경선 출마자가 되었다. 알프 랜던은 1936년 6월 12일 클리블랜드에서 열린 공화당 전국대회(RNC)에서 만장일치로 대통령 후보로 선출되었으며 알프 랜던과 마찬가지로 무명이었지만 참신한 인물인 프랭크 녹스(Frank Knox) 시카고 데일리 뉴스 편집자가 부통령 후보로 지명되었다.

진보당


1936년 진보당 대선 후보 티켓
휴이 롱
Huey Long
윌리엄 보라
William Borah
대통령 후보 부통령 후보
루이지애나주 연방 상원의원
(1932–1937)
아이다호주 연방 상원의원
(1907–1937)
Happy Days are Here Again
행복한 날이 여기 다시 왔어요

1936 롱 - 보라 티켓 슬로건

민주당과 공화당에 대한 국민적 불안이 높아지는 가운데 주목을 받은 것은 민주당과 공화당 양당을 비판한 대중주의자 후보 휴이 롱이었다. 루이지애나 주지사를 지내며 유능한 행정력을 입증받은 그는 1931년 루이지애나 주의 상원의원으로 출마해 당선되었다. 그는 우리의 부를 나누자(Share Our Wealth)라는 급진적인 수정자본주의 처방전을 주장하며 전국적인 인지도를 얻었는데, 공화당과 민주당 양당은 그를 스탈린주의자 혹은 사회주의자라고 비판했지만 자유방임주의적 처방전이 실패한 미국의 상황에서 이러한 롱에 대한 공격은 오히려 롱의 인기를 높여줄 뿐이었다.

동시에 민주당의 윌리엄 깁스 매커두(William G. McAdoo) 상원의원, 헨리 A. 월리스(Henry A. Wallace) 농무장관, 공화당의 윌리엄 보라(William Borah) 상원의원, 하이럼 존슨(Hiram Johnson) 상원의원 등은 민주-공화당 양당 지도부의 무능에 대해 공감대를 가지고 있었다. 이들은 1936년 혹은 1940년 대통령 선거에서 로버트 M. 라폴레트 주니어(Robert M. La Follette Jr.) 상원의원을 중심으로 규합해 단일 좌파 후보자를 내보낼 예정이었지만, 휴이 롱이라는 더욱 강력한 후보자가 등장하자 이목이 롱으로 집중되었고, 롱은 이들의 초당적인 지지를 받아 진보 진영의 대중주의 후보자로 등극할 수 있었다. 휴이 롱은 1936년 7월 1일 사우스다코타 주 수폴스에서 열린 진보당 창당식 겸 전당대회에서 진보당의 대통령 후보자로 지명되었으며, 윌리엄 보라 상원의원은 부통령 후보로 지명되었다.

선거 초반 제임스 팔리(James Farley) DNC 의장의 비밀 여론조사에서 롱은 400만표, 전국적으로 10% 정도의 득표를 할 것으로 예상되었다. 그러나 미국 진보의 영원한 아이콘인 라폴레트 가문이 롱을 지지하고, 프랭클린 루스벨트 전 뉴욕주지사가 앨 스미스 지지를 철회하고 롱을 지지하면서, 롱의 지지율이 급등한 것으로 나타났다. 특히 "더스트 볼" 재난으로 파멸 상태에 이른 미국 대평원 지역과 서부, 그리고 중서부 노동자 밀집 지역에서 롱의 지지율은 매우 높게 유지되었다.

선거 결과

Today I have stood, where once William J. Bryan stood, and took an oath to my people. It is very appropriate then that from this Cradle of the Populism, this very Heart of the Great Greenback movement, that today we sound the drum for freedom as have our generations of forebears before us done, time and time again through history. Let us rise to the call of humanitarian blood that is in us and send our answer to the tyranny that clanks its chains upon the people. In the name of the greatest people that have ever trod this earth, I draw the line in the dust and toss the gauntlet before the feet of tyranny . . . and I say . . . progressive today . . . progressive tomorrow . . . progressive forever.

저는 지금 윌리엄 제닝스 브라이언이 섰던 곳에 서서 국민 여러분께 맹세합니다. 이곳은 인민주의의 요람이자 위대한 그린백 운동의 중심입니다. 우리는 우리 선대들처럼 다시 한 번 자유의 북소리를 울려야 합니다. 일어나 우리 몸에 흐르는 인간애의 피에 호소합시다. 인민에 사슬을 채운 폭군에게 우리의 답을 전합시다. 지금까지 이 땅을 거닌 위인들의 이름으로 말합니다. 저는 이 불리한 상황에서 단호하게 반대하며 폭군의 발 앞에 도전장을 던집니다. 제가 말하기를 - 진보는 오늘도, 내일도, 영원히 있을 것입니다.
휴이 롱, 당선 연설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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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응

여담


  1. 1876년 미국 대선에서 민주당과 공화당이 초접전의 양상을 보이자, 공화당의 러더포드 헤이스 대통령이 민주당과 타협하여 남부 재건 정책 및 흑인 민권운동 지지를 포기하는 대신 대선에서 판정 승을 거둔 것에 민주당이 이의를 제기하지 않도록 한 역사상 최악의 선거 야합을 의미한다.
  2. 1928년 대선에서 민주당 후보로 출마했으나, 하단신 마비 장애가 부각되면서 강하지 못한 정치인이라는 이미지가 덧씌워져 후버 후보에게 대참패한 장본인이다.
  3. 상술한 1876년 타협의 주인공이다.
  4. 남북전쟁 직전의 대통령으로, 미주리 대타협의 결과로 발생한 캔자스 노예제 존폐 논쟁 및 유혈 사태에 무능하게 대처하며 남북전쟁의 근본적 원인을 제공했다고 평가받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