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산1968 2023, CC-0 |
1998년 미국 대통령 선거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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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역별 결과 (1차 / 결선)[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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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표율 | 1차 76.73% ▼ 9.96%p 결선 74.60% ▼ 11.29%p | |||||||
선거 결과 | ||||||||
후보 | ||||||||
1차 투표 | ||||||||
19.52% 27,020,879 |
44.73% 61,905,549 | |||||||
결선 투표 | ||||||||
51.00% 63,515,587 |
49.00% 61,024,779 | |||||||
당선자 | ||||||||
우리의 미국 로스 페로 |
개요
1998년 치러진 미국의 대통령 선거이다. 선거 결과 우리의 미국 소속의 로스 페로 현 대통령이 근소한 차이로 재선에 성공했다.
배경
두카키스 과도 정부의 "충격 요법"에 대항하며 출범한 페로 행정부였지만 포퓰리즘적 처방전은 경제 위기 상황에서 적절한 해결책이 될 수 없었으며, 경제 사정은 나날이 악화되었다. 페로 대통령은 유라시아 연방의 예고르 가이다르를 경제 고문으로 임명하여 경제 위기를 해결하고자 했으나 가이다르의 처방전은 실패했고 경제 위기는 가속화되었다. 결국, 1995년 미국 정부는 채권 모라토리엄을 선언하였다. 1991년 USSA 해체 당시 미국의 1인당 GDP는 7,000루블 선이었으나 이 시기에 접어들며 2,000~2,500루블 수준까지 하락하였다.
이와 동시에 페로 행정부에 대한 여론도 급격히 악화되었다. 모라토리엄 선언 직후, 페로 행정부의 지지율은 2%를 기록하였고, 아메리카 사회주의 연방 해체에 후회한다고 답한 사람의 비율은 80%가 넘었다. 결국 조지아 출신의 초강경 마르크스주의자 뉴트 깅리치가 이끄는 미국 재건공산당은 1996년 총선에서 전례가 없는 압승을 거두었다. 이 "깅리치 혁명"으로 페로 대통령은 수세에 몰렸고 공산당과 깅리치의 대권 지지율은 60%에 육박하게 된다.
하지만 깅리치의 추잡한 사생활이 언론을 통해 폭로되고, 그의 과격한 경제적, 외교적 성향이 수면 위로 떠오르며 깅리치의 대권 가도는 타격을 입게 된다. 거대 자본과 언론, 동방 세계 역시 깅리치를 "위험한 선택지"로 간주하고 페로에게 힘을 실어줬다. 그렇게 모든 기득권 세력의 지지를 얻은 페로 대통령은 자신의 언론플레이까지 더해 지지율을 회복시킨다. 군소 자유주의 정당인 정의당 역시 자유지상주의자 론 폴을 내세워 정권 탈환을 기도한다. 그러나 기본적으로 깅리치의 지지율이 3~40%로 다른 후보를 압도하는 상황에서 1차 투표가 치러졌다.
후보
로스 페로 (무소속)
Don't Change the Team in the Middle of the Stream 경기 도중에 팀을 바꾸지 말자 | |
출생 | 1930년 6월 27일 (67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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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닝메이트 | 제임스 스톡데일 前 미국 인민군 해군참조총장 |
기반주 | 텍사스 |
소속당 | 우리의 미국 |
성향 | 중도 ~ 중도우파 대중주의 |
로스 페로는 1993년 대선에서 당선되어 현재까지 재임중인 현직 대통령으로 재선을 노리고 있다. 그는 자유주의와 대중주의를 섞은 중도 보수 성향이며 자본주의자들과 온건 보수파에게서 높은 지지를 얻었다. 특히, 거대 언론과 재벌이 그의 편이라는 점에서 페로는 다른 후보에 비해 헤게모니적 우위를 가졌다. 그러나 그의 경제적 실패로 인해 대중적인 이미지는 좋지 못하며, 다른 후보에 비해 안정적이라는 사실만이 그의 지지율이 여전히 높은 이유였다.
상대 후보인 깅리치와 폴 모두, 대다수 미국인들에게는 인기 없는 주장을 하고 있으며 일부 정책은 페로의 정책보다도 더욱 미국을 위기에 빠트릴 수 있는 것이다. 따라서 선거가 막바지에 이를수록 중도층과 무당층이 페로 대통령에 결집하며 지지율이 오르는 양상을 보였다.
뉴트 깅리치 (미국 재건공산당)
All the Hungry of America, Vote! 전미의 굶주린자여, 투표하라! | |
출생 | 1943년 6월 17일 (55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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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닝메이트 | 딕 체니 現 와이오밍주 하원의원 |
기반주 | 조지아 |
소속당 | 미국 재건공산당 |
성향 | 극좌 공산주의 |
1996년 총선에서 역사적 승리를 거두어 하원 의장으로 선출된 깅리치는 마르크스주의자들과 노동조합, 일반 시민들에게서 높은 지지를 받는 후보였다. 그는 그의 강경한 경제적, 외교적 성향으로 알려져있다. 그는 민영화된 토지의 국영화, IMF 구제금융 조기졸업, 유라시아 연방 및 중국 자본 유입 규제 등 사회주의 좌파적 공약을 내세웠다. 또한, 1991년 USSA 해체로 인해 독립한 쿠바와 푸에르토리코를 전쟁을 통해 되찾자고 주장했다.
이러한 깅리치의 강경한 주장은 공산당 지지층에게는 열광을, 무당층에게는 경악을 불러일으켰다. 더불어 "도덕적 정치"를 내세운 깅리치의 입장과 달리, 좋지 못한 여성 편력으로 깅리치의 이미지는 상당히 실추되었다. 그럼에도 현직 페로 대통령과 대적할 수 있는 유일한 후보라는 점에서 깅리치의 지지율은 여전히 선두를 달렸다.
론 폴 (정의당)
Freedom Goes First 자유를 가장 우선으로 | |
출생 | 1935년 8월 20일 (63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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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닝메이트 | 톰 하킨 現 아이오와주 하원의원 |
기반주 | 텍사스 |
소속당 | 정의당 |
성향 | 우파 자유지상주의 |
텍사스에서 오래 활동한 정치 운동가 론 폴은 경제적으로는 오스트리아 학파의 지지자로, 사회적으로는 진보주의의 지지자로 알려졌다. 론 폴은 그의 소신 있는 행보와 확고한 신념으로 일부 지지층에게서 높은 지지를 받았으나, 경제적으로 신자유주의를 내세우는 것은 당대 미국인들에게 적절한 것으로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또 사회적으로 동성혼 합법화, 마약 자유화 등을 주장하는 그의 정책 역시 보수적 미국 사회에서 받아들여지기 어려운 것이었다.
그럼에도 론 폴은 페로와 깅리치의 진흙탕 싸움에 지친 무당층과 일부 지식인 계층, 고소득층의 지지를 받았다. 토론회에서도 론 폴이 다른 두 후보를 압도하며 정책적 한계를 어느정도 상쇄했다.
군소 후보
여론조사
투표 결과
1998년 미국 대통령 선거 1차 투표 결과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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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통령 후보자 | 부통령 후보자 | 정당 | 득표수 | 득표율 | 순위 | 비고 | |
로스 페로 | 제임스 스톡데일 | 우리의 미국 | 27,020,879 | 19.52% | 2위 | 결선 진출 | |
뉴트 깅리치 | 딕 체니 | 미국 재건공산당 | 61,905,549 | 44.73% | 1위 | ||
론 폴 | 톰 하킨 | 정의당 | 25,368,404 | 18.33% | 3위 | 낙선 | |
마이클 두카키스 | 월터 먼데일 | 무소속 | 13,493,832 | 9.75% | 4위 | ||
앨버트 고어 | 조 리버만 | 신민주당 | 10,609,612 | 7.67% | 5위 | ||
유권자 수 | 186,217,725 | 투표 수 | 142,884,860 | 무효표 수 | 4,486,584 |
1998년 미국 대통령 선거 결선투표 결과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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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통령 후보자 | 부통령 후보자 | 정당 | 득표수 | 득표율 | 순위 | 비고 | |
로스 페로 | 제임스 스톡데일 | 우리의 미국 | 63,515,587 | 51.00% | 1위 | 당선 | |
뉴트 깅리치 | 딕 체니 | 미국 재건공산당 | 61,024,779 | 49.00% | 2위 | 낙선 | |
유권자 수 | 186,217,725 | 투표 수 | 138,918,422 | 무효표 수 | 14,378,056 |
- ↑ 지도를 마우스 클릭하여 1차 투표 결과와 결선 투표 결과를 확인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