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민당 (플로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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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74대 의회원 2036.10.8. ~ 2040.10.7. 이전
여당
268석
야당
223석
5석
2석
무소속 2석
재적 500석
대한제국의 진보정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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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화당 신민당 신민당
참여연구회
국민신당
신민당 신민당 현재
참여연구회
(개별 합류)
국민신당
(흡수 합당)
신민당
영문명 New Democratic Party
슬로건 5년은 너무 길었다
창당일 1854년 6월 20일 (개화당)
당명 변경 1935년 3월 15일 (신민당)
통합한 정당 국민신당 (2030년 5월 3일 흡수합당)
주소
서울특별시 마포구 마포대로 73 (도화동)
의장 윤차민 / 7선 (69~75대)
사무총장 변백현 / 6선 (70~75대)
원내총무 민의원 / 7선 (69~75대)
정책위의장 남영희 / 8선 (68~75대)
의회원 의원 224석[1] / 500석 (44.80%)
광역단체장 XX석 / 27석 (XX.XX%)
기초단체장 XXX석 / 370석 (XX.XX%)
광역의원 XXX석 / XXX석 (XX.XX%)
기초의원 XXXX석 / XXXX석 (XX.XX%)
당색 빨간색 (#C9151E)[2]
주황색 (#DC352A)[3]
정책연구소 신민연구원
청년조직 플로라_청년신민당_흰색_로고타입.svg
국제조직 진보동맹
후원회 신민당중앙당후원회
정당원 수
권리당원 수 2,886,545명
(제36차 정기당대회 기준)
정당보조금 11,500,046,000원
(2031년 1분기, 천원 단위 반올림)
당비 수입 52,513,642,348원
(2030년 1월 1일~2030년 12월 31일)
당가 신민당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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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요

신민당 제36차 정기당대회

신민당은 대한제국의 진보정당으로 대한제국의 제1야당이다.

1854년 박규수의 주도로 개화당이 창당되었으며, 1935년 김원봉개화당 총재가 되면서 당명을 신민당으로 변경하였다. 21세기 들어 이낙연 등 친노 세력이 참여연구회를, 안철수 등 친안 세력이 국민신당을 창당하며 분열되었으나, 2030년 국민신당이 다시 신민당에 흡수되었다[4]. 한국 진보정당의 계보를 잇는 적통이라고 할 수 있는 대한제국 진보 세력의 대표 정당이다.

신민당은 의원, 당원, 지지자의 구성이 매우 다양한 정당이다. 관료 출신 은명원중용회를 필두로 한 온건보수 계열부터 시작해서 당권파 윤차민선진회 등 중도진보 계열, 이정미, 김재연 등 진보 계열까지 매우 다양하다.

당명

  • 한국어: 신민당

  • 영어: New Democratic Party

  • 중국어
    • 정체자(번체자): 新民黨
    • 정체자(간체자): 新民党
    • 표준중국어 발음
      • 한어병음: Xīnmíndăng
      • 중국어의 외래어 표기법: 신민당

  • 일본어
    • 구자체 한자 사용: 新民黨
    • 신자체 한자 사용: 新民党
    • 발음 표기
      • 가나 표기법: しんみんとう
      • 헵번식 로만자 표기법: Shinminto
      • 일본어의 외래어 표기법: 신민토

1935년 당명 변경 당시 자유인민당, 신정당, 민중당, 민정당, 평민당, 신민당 등의 당명 후보들을 놓고 치열한 토론을 벌였다. 자유인민당은 당내 젊은 의원들의 지지를 받았으나, 창당 당시만 해도 당내 우파를 자처하며 김원봉 집행부에 반기를 들었던 신익희공산당과 다를 게 없다며 격하게 반대해 당명이 신민당으로 결정되었다고 한다.

신민당 홈페이지에는 당명이 새로운 민주주의를 향해 나아간다는 의미로, 끊임없이 혁신하고 진보하는 당의 모습을 나타낸다고 설명돼있다. 새롭다고 하기엔 당이 너무 틀딱이다. 자유당과 더불어 당명이 간략하기에 공식 약칭은 없으나, 여론조사 및 언론 등에서 2음절 약칭을 사용할 때에는 주로 신민이라고 표기된다. 영문 명칭은 New Democratic Party이다.

당색 및 로고

신민당 당색 및 로고 변화
구 로고 (1935~2024) 신 로고 (2024~현재)

개화당 시절부터 당색으로 주황색을 사용해왔던 것으로 전해지며, 당명 변경 이후에도 2024년까지 주황색(#DC352A)[5]를 사용했다. 그러나 2024년, 제69대 의회원 의원 선거를 앞두고 이재명 당시 총재가 당 이미지 쇄신[6]을 목표로 로고를 변경하면서 당색도 로고에 맞춰 빨간색(#C9151E)으로 바꾸었다. 로고를 만든 한선우 홍보본부장은 빨간색이 신민당의 새 동력과 개혁적 성향수박저격, 활력을 나타낸다고 설명했다.

로고 또한 기존에는 워드마크였으나, 2024년 한선우 홍보본부장의 주도로 바뀌었다. 한선우 홍보본부장은 "새 로고는 모양이 다른 두 개의 원이 모아지는 모습으로, 여러 계층이 화합하며 더 나은 대한제국을 만든다는 의미를 담았다"고 설명했다.

당가

당사

중앙당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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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특별시 마포구에 위치한 중앙당사

창당 당시에는 한성부 종로구 안국동에 중앙당사가 위치해있었으나, 1960년대 이후 마포구 도화동에 위치한 경기도당 당사가 실질적인 당사 역할을 하였다. 마포 당사는 서울특별시 출범 이후에는 마포 당사가 중앙당사 역할을 하고 있다.

마포 당사는 1979년 5월 29일 준공되었으며, 지하 1층 지상 5층, 건평 649평 대지 908평 규모이다. 당사가 마포에 지어지자, 안국동 당사를 관할하던 한성경찰청 경찰관들은 "마포경찰서가 이제 좀 괴로울 것"이라고 했다는 가십기사가 났다. 이 말은 김대중이 의장에 당선되며 현실이 됐다.

마포 당사는 YH무역 사건의 무대가 되었던 곳으로, 1979년 8월 9일 직장폐쇄에 항의하는 YH무역 여공 170여 명이 마포 신민당사에 들어와 농성을 벌이다 여공 김경숙 씨가 경찰 진입 과정에서 추락사하며 정국을 파국으로 몰아갔다. 김대중 의장과 당의 관계자들이 농성장을 지켰으며, 여당에서도 비주류[7]김영삼 의원이 강력히 항의하며 큰 논란이 됐었다.

시도당사

역사

창당

한국공산당과의 연대를 통해 정권을 수립한 이동휘 정권에 대한 비토 정서로 1929년 치뤄진 제30대 의회원 의원 선거에서 개화당조만식을 위시한 수구당에 정권을 내줬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동휘와 당권파는 계속해서 극좌적 행보를 이어왔고, 결국 제31대 의회원 의원 선거, 제32대 의회원 의원 선거에서 자당 출신의 이승만[8]에게 줄줄이 참패하며 개화당의 존립 자체가 위태로운 상황에 놓이게 된다.

이러한 상황에서 시민운동을 통해 대중적인 인기를 구가하던 김원봉이동휘의 극좌적 행보를 비판하고 우파 또한 포용할 것을 주장하며 온건한 모습을 보였고[9], 얼마 지나지 않아 개화당 총재 선거에 출마, 세대교체 여론에 힘입어 1934년 37세의 나이로 개화당 총재가 된다.

총재가 된 김원봉개화당당명을 지금의 신민당으로 바꾸었다. 당명 변경 과정에서 당내 원로 세력들이 당의 정체성을 지우는 일이라며 강력히 반발하였으나, 이미지 쇄신에 대한 김원봉의 강한 의지에 의해 속전속결로 진행되었다. 김원봉은 전세계를 뒤덮은 대공황 상황에서 루스벨트의 뉴딜 정책에 발맞춰 이승만에게 공공개발아문 설립을 요구하며 큰 인기를 얻었으며, 1935년 치뤄진 제33대 의회원 의원 선거에서 과반 의석을 얻으며 집권한다.

제2차 세계 대전 이전

김원봉은 경제 위기 극복을 위한 거국내각을 주장하며 자유당과 연정을 맺었으나 1938년 자유당이 연정에서 탈퇴하며 국정 운영 동력이 사실상 상실되었고, 곧바로 이루어진 1938년 제34대 의회원 의원 선거에서 다시 자유당에 과반 의석을 내준다.

총선 참패 이후 사퇴한 김원봉의 뒤를 이어 의장이 된 신익희는 당내 우파를 자처해왔으며, 김원봉을 매우 강하게 견제해오던 사람이었다. 신익희는 좌파적 색채를 띄고 있던 김원봉과 달리 우파 정책들을 상당수 내놓으며 민심 회복을 목표로 하였으나, 자유당의 전쟁 극복 여론과 전쟁영웅 지청천의 개인적 인기에 맥을 못 추리게 된다. 결국 1941년 치뤄진 제35대 의회원 의원 선거에서 본인 역시 자유당 지청천에게 털리며 사퇴한다.

신익희에게 호되게 당하고 난 후 김원봉은 당권을 다시 차지하기 위해 노력했으며, 이를 통해 의장의 자리에 오른 여운형제2차 세계 대전 승전에 즈음하여 높은 지지를 얻고 있던 지청천 전시 내각과 자유당을 향해 경제 문제를 제기하며 패색이 짙었던 제37대 의회원 의원 선거를 승리로 이끌고 총리가 되었으나, 총리가 된 지 2년 만인 1947년에 괴한의 총격으로 사망한다.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김원봉여운형에 대한 추모 여론에 힘입어 여운형 사태로 치뤄진 제38대 의회원 의원 선거에서 초압승하며 다시 총리의 자리에 올랐으나, 거창했던 공약과 달리 전후 재건 정책에 있어 부족한 모습을 보여주며 김구를 필두로 성향이 온건화된 자유당에 1년 3개월 만에 정권을 빼앗긴다.

이후 김구와 그의 뒤를 이어 집권한 정지원에 의해 신민당은 상당한 혼란을 겪었으며, 급격히 좌경화되어 백남운, 김두봉 등 극좌 인사들이 의장을 맡게 되었으며, 내홍을 겪는다. 이 때의 내부 분열로 인해 이승만의 실책으로 인해 어부지리로 총리가 된 조봉암 또한 당내 우파 성향의 서상일, 좌파 성향의 김두봉에게 배신을 당하며 1년 만에 총리직을 내려놓는다.

장기간의 내홍 끝에 신민당은 장면을 의장으로 선출, 이승만의 초장기집권에 대한 피로감에 힘입어 정권을 다시 교체한다. 이때부터 장면윤보선을 중심으로 한 세력구도가 형성되었으며, 이후 약 10년 간 안으로는 장면윤보선의 대립, 밖으로는 이승만, 이승만의 꼭두각시 노릇을 하던 이범석과의 대립 구도를 이어오며 자유당과 정권을 주고받아왔다.

1970년대

1970년대는 박정희의 시대였다. 전후 재건을 강력히 주장하며 집권한 박정희의 8년간의 집권 기간동안 신민당은 무기력한 모습을 보여줘왔다. 꼭두각시 의장 이철승 사이에서 계파 갈등을 이어오던 장면윤보선은 공개적으로 반목하며 분열하였고, 대여투쟁에는 사실상 무관심했다.

이에 1977년 김대중장면윤보선의 동반 퇴진, 혁신을 내세우며 의장에 당선되었고 혁신을 주도한다. 김대중은 비록 1978년에 치뤄진 제50대 의회원 의원 선거에서 정권 교체를 이뤄내진 못하였지만, 유의미한 성과를 보여주며 재신임되었고, YH 무역 사건으로 인기가 떨어진 전두환을 상대로 맹공을 펼치며 신민당의 지지세를 회복시켰다.

1980년대

1980년 3월 20일 황제의 붕어 이후 제50대 의회원이 해산되었는데, 제51대 의회원 의원 선거 선거기간 중 전두환이 황실 모독 발언을 한 사실이 밝혀지며 김대중은 예상을 뛰어넘는 초압승을 거둔다. 정권교체 후 자유당에는 전두환에 의해 축출되었던 김종필이 돌아왔는데, 김대중은 당내 반대 세력에 맞서 정권을 안정적으로 유지하기 위해, 김종필은 민정계 잔존 세력을 완전히 소탕하기 위해 대연정을 맺고 협력한다. 각각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전략적 동맹 관계였던 것이다[10]

김대중은 1986년 김종필에 의해 정권을 빼앗긴 뒤에도 한광옥을 의장으로 만들어 막후 정치를 이어왔으며, 비토 세력의 의견을 철저히 묵살하며 당권을 안정적으로 유지한다.

1990년대

1990년대는 3김[11]의 시대였다. 신민당은 1992년 정권교체를 이뤄내며 집권당이 되었으나, 등의 정풍운동으로 김대중의 독주가 끝날 위기에 처해있었으며, 자유당김영삼과 끊임없이 경쟁해야만 했다.

이 과정에서 자유민주연합의 행보가 매우 안습한데, 1995년 제57대 의회원 의원 선거 이후에는 신민당과 김대중을 도왔으나 2년 만에 팽당했고, 1999년 즈음부터는 김영삼을 도왔으나 2000년 제59대 의회원 의원 선거 이후 오래 지나지 않아 또 팽당한다.

이러한 핑퐁 게임이 이어진 끝에 2000년대를 앞두고 결국 김대중의 1인 독주 체제는 결국 막을 내리게 된다. 1998년 정권을 빼앗기고 난 후 자유당 출신의 이인제, 김대중의 가신 한화갑이 차례로 의장을 맡았으나 그닥 성과를 거두진 못한다.

2000년대

2000년대 들어 동교동계와 그 추종 세력의 독주에 피로감을 가진 당원들의 움직임이 가속화되었고, 2001년에는 노무현이 기적적으로 한화갑을 제치고 의장이 되며 마침내 신민당 계파 구도에 큰 변화가 생기게 된다. 노무현은 이듬해인 2002년에 열린 제60대 의회원 의원 선거에서 승리하여 총리가 된다.

그러나 노무현의 의장 당선과 총리 취임 이후에도 동교동계의 견제는 계속되었으며, 특히 2004년에는 노무현의 여러 과격한 발언을 규탄하며 한화갑자유당이 연합하여 노무현에 대한 불신임안을 통과시키는 '한화갑의 난'이 발생하였다. 이에 노무현은 불신임안 통과에 가담한 인사를 전원 징계[12]함과 동시에 의회원을 해산하였으며, 2004년 연말에 열린 제61대 의회원 의원 선거에서 초압승을 거두며 위태로웠던 당내 입지를 회복한다. 우정해산 원조

하지만 여러가지 논란으로 인해 지지율이 2년 만에 또다시 곤두박질치며 당 안팎으로 해산을 강요받았고, 노무현이 울며 겨자먹기로 의회원을 해산하여 치뤄진 2006년 제62대 의회원 의원 선거에서는 박정희 전 국무총리대신의 딸 박근혜 자유당 총재가 총리가 되며 정권을 빼앗긴다.

정권을 빼앗긴 후로는 정동영, 정세균, 한명숙 등이 차례로 의장직에 올랐으나 큰 성과를 거두지 못하고 박근혜-이명박-박근혜로 이어지는 10년간의 장기 집권에 무기력한 모습을 보인다. 신민당의 최대 암흑기였다.

2010년대

2016년까지는 정동영, 정세균, 한명숙 등이 차례로 의장직을 맡았으나, 대여투쟁에서 큰 성과를 거두지 못하며 위기에 놓였다. 2006년 제62대 의회원 의원 선거부터 2012년 제65대 의회원 의원 선거까지 4연속으로 의회원 의원 선거에서 패배하는 등 위기에 처했던 신민당은 이해찬을 중심으로 전열 재정비에 돌입한다.

이해찬은 친노-친문 세력 중심으로 당 세력구도를 재편하였으며, 이 과정에 정세균 등이 적극 협조하며 2016년 제29차 정기당대회에서 문재인 전 국무조정대신을 의장으로 옹립시킨다.

문재인을 내세우며 전열을 재정비한 신민당은 박근혜 총리의 비선실세 의혹으로 치뤄진 2016년 제66대 의회원 의원 선거에서 초압승을 거두며 10년 만에 재집권한다.

2020년대

문재인은 2019년 당 의장 재선을 포기하며 정계 은퇴 수순에 들어갔고, 그 뒤를 문재인 의정부의 초대 국무부총리대신이었던 이낙연이 잇는다. 그러나 이낙연과 참여연구회[13] 의원들은 안으로는 미진한 개혁 정책으로 인해 비판을 받아왔으며, 밖으로는 이낙연 특유의 '엄중 화법'으로 대표되는 정권의 무기력한 모습을 보여주며 위기를 맞는다. 결국 이낙연은 3년의 의장 임기를 채우지 못하고 2년 만에 의장직을 내려놓았으며, 의장직을 공정사회이재명이 차지한다.

이재명은 로고와 당색을 바꾸고 이낙연 집행부 시기의 주요 정책을 폐기함과 동시에 좌클릭 행보를 이어갔으며, 이에 힘입어 제69대 의회원 의원 선거에서 승리하는 등 당 이미지 쇄신에 성공한다. 그러나 이 과정에서 이낙연과 친노-친문-친낙 의원들이 크게 반발하였으며, 결국 참여연구회라는 별도 정당을 차리며 갈라서게 된다. 그리고 망한다

이재명은 2024년부터 2027년까지, 3년간의 1·2차 집권기동안 기본소득, 동성혼 법제화 등 각종 개혁 정책을 펼쳐왔으나, 2027년 과거 성남시장 재임 시절 벌어진 대장동 공공개발 사업 관련 비리 의혹이 폭로되며 나경원과 자유당에 정권을 빼앗긴다. 그러나 오히려 당은 결집하여 이재명을 옹호하였으며, 유동규 등이 처벌을 받은 가운데 이재명 본인은 최종적으로 무죄가 확정되며 화려하게 재기한다.

2030년대

신민당은 사법 리스크가 해소된 의장 이재명을 중심으로 국민신당과 합당하는 등 반 나경원 전선을 구축, 사사카와 게이트 등 나경원의 비리 의혹을 집중 공격하며 4년 만에 정권 교체에 성공한다. 이재명은 이때부터 자신의 계파인 공정사회 소속의 은명원, 윤차민을 키우며 사실상 은퇴를 준비해왔으며, 집권 초반기에 비해 온건한 모습을 보여주며 안정적으로 국정을 이끌어 간다.

그러던 사이에 자유당은 젊은 총재 정세현을 중심으로 다시 지지율을 끌어올리기 시작하였으며, 결국 2034년 황제의 붕어로 열린 제73대 의회원 의원 선거에서 무난하게 정권 교체에 성공한다[14].

이재명은 이후 의장직을 내려놓으며 사실상 정계 은퇴 수순에 들어갔으며, 자신의 계파인 공정사회를 해체한다. 그 뒤를 이은 30대의 윤차민은 전후 최연소 의장으로, 자신의 계파인 선진회를 내세우며 은명원중용회와 대립 구도를 형성하였다. 윤차민은 관료 출신에다 60대인 은명원과 비교했을 때 젊고 신선한 이미지였고, 이때문에 대중 사이에서의 인기도는 은명원을 압도하는 수준이었다. 이로 인해 원내에서의 지지세는 비교적 열세였음에도 불구하고 당원·국민 여론에서 압도적 우위를 점하며 의장이 된 것이다.

비판 및 논란

소속 의원

틀:제74대 의회원 의원/신민당 (플로라)

계파

의 계파 분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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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민당 계파 상황 요약

현재 신민당 중앙당에 등록된 의원연구모임으로는

역대 당대회

틀:신민당 역대 당대회 (플로라) 신민당은 당헌을 통해 "당대회는 전국의 당원을 대표하는 당의 최고대의기관이다"라고 명시했다. 3년마다 정기적으로 열린다.

역대 지도부

의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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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2대
김원봉
제3·4대
신익희
제5-7대
여운형
제8대
김원봉
제9·10대
백남운
제11대
김두봉
제12·13대
조봉암
제14-16대
장면
제17-19대
윤보선
제20대
이철승
제21대
장면
제22·23대
윤보선
제24-27대
김대중
제28대
한광옥
제29-31대
김대중
제32대
이인제
제33대
한화갑
제34대
김중권
제35·36대
노무현
제37대
정동영
제38·39대
정세균
제40대
한명숙
제41대
이해찬
제42대
문재인
제43·44대
이낙연
제45-48대
이재명
제49·50대
윤차민
개화당 총재 참여연구회 대표
국민신당 대표
사무총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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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
정이형
제2·3대
신익희
제4대
김활란
제5·6대
여운형
제7대
안재홍
제8·9대
양재하
제10대
홍명희
제11-13대
조동호
제14대
최창익
제15대
무정
제16대
이동화
제17대
김달호
제18·19대
윤길중
제20대
현석호
제21대
오휘영
제22대
한근조
제23대
김영선
제24대
유진산
제25·26대
백남훈
제27대
유진산
제28대
허정
제29대
김도연
제30대
김대중
제31대
이철승
제32대
유진산
제33·34대
윤제술
제35대
김대중
제36대
허경만
제37·38대
김원기
제39대
김영배
제40-42대
한화갑
제43대
권노갑
제44대
이해찬
제45대
노무현
제46대
한명숙
제47대
김옥두
제48대
양경숙
제49대
박지원
제50대
김영배
제51대
유종근
제52대
김근태
제53대
정동영
제54대
신기남
제55대
임채정
제56대
정세균
제57대
천정배
제58대
김한길
제59대
원혜영
제60대
박영선
제61대
이해찬
제62대
박지원
제63대
박영선
제64대
박영선
제65대
김진표
제66대
박광온
제67대
오영훈
제68대
이원욱
제69대
신경민
제70대
김진표
제71대
정성호
제72·73대
은명원
제74·75대
조정식
제76대
이파람
제77대
변백현
개화당 간사회장

중앙당 지도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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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고의결기구 (당대회·당무위원회)
당대회 의장 당무위원회 의장
당대회 부의장 당무위원회 부의장
집행기구 (집행위원회)
의장 윤차민
사무총장 변백현 정책위원회 의장 남영희
원내총무 하이원 수석집행위원 한선우
집행위원 이재정 · 유한당 · 연지훈 · 서다윈 · 김틀니 (지명) · 김틀니 (지명)
의장자문보좌기관
의장비서실장 임도완 메시지실장 한서윤
당무집행기구 (중앙당 사무처)
사무총장 변백현
전략기획부총장 조직부총장
홍보본부장 사무총장비서실장
수석대변인 양명주 대변인
부대변인
독립기구 (당기위원회 등)
중앙당기위원장 당무감사위원장
교육연수원장 신민연구원장 박시영
그림자 내각 (부처 각료)
국무총리대신 윤차민
국무부총리대신 이파람 선임대신 겸
재정경제대신
박찬대
선임대신 겸
교육대신
백승아 선임대신 겸
과학기술대신
한여울
국무조정대신 안귀령 외교대신 이재정
법무대신 연지훈 국방대신 원강린
행정안전대신 이지은 문화체육관광대신 한선우
농림축산식품대신 윤서혜 산업통상자원대신 이언주
가족복지대신 강선우 보건의료대신 서휘
기후에너지대신 장혜영 고용노동대신 백삼자
성평등인권대신 박지현 국토교통대신 이소영
해양수산대신 우성빈 정보통신미디어대신 양문석
중소벤처기업대신 주해은 기획예산대신 선요한
그림자 내각 (의정부 특임대신)
외로움·돌봄 담당 이정미 동물권·동물복지 정책 담당 민의원
장애인 정책 담당 장혜영 저출산·고령화 대책 담당 백삼자
외국인·이주민 정책 담당 아이수루 주거복지·도시재생 담당 서혜람
동반성장 담당 임세은 지방소멸 대응 및 균형발전 담당 선요한
먹사니즘 구현 담당 강선우 RE100 대응 담당 이소영
원내기구 (의원총회)
원내총무 하이원 원내수석부총무
원내부총무
원내총무비서실장 원내대변인
정책위원회
의장
남영희 정책위원회
수석부의장
정책조정위원장

◀ 역대 의장

◀ 역대 사무총장

출신 국무총리대신

신민연구원

상임고문단

지지 기반

역대 선거

다른 정당과의 관계

청년신민당

여담

지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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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지역구 194석, 비례대표 30석
  2. 2024년 제69대 의회원 의원 선거를 앞두고 이재명 의장이 로고를 변경하며 빨간색을 당색으로 지정하였다.
  3. 기존의 당색으로, 로고 변경 이후에도 사용하고 있다.
  4. 안철수는 훗날 또다시 탈당하여 자유당으로 이적한다.
  5. 1960년대부터 사용한 것으로 확인되는 색상이다. 1960년대 이전에도 비슷한 톤의 색상을 사용했다.
  6. 이낙연 국무총리대신의 실정으로 당시 지지도가 크게 하락했었다.
  7. 당시 전두환이 자유당 총재를 맡고 있었는데, 김영삼전두환은 엄청난 앙숙 관계였다. 전두환김영삼을 당에서 제명하기도 하였으며, 김영삼 또한 야당 의장인 김대중과 적극 협력내부총질하며 이에 맞섰다.
  8. 이승만은 본래 개화당에서 정치를 시작하였고, 개화당 총재까지 역임하였다. 그러나 첫번째 총리 임기동안 무능한 모습을 보여주어 불신임안이 통과되는 등 당내에서 사실상 축출되었고, 이에 수구당으로 당적을 옮겼다. 결과적으로 이동휘의 극좌적 행보는 이승만이 정치적으로 재기하여 수십 년간 보수 진영의 대표 주자의 자리를 지키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9. 김원봉 본인 또한 좌익의 대표 인사로 유명했으나, 정권 교체를 위해서는 온건한 모습을 보여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10. 물론 1984년 제52대 의회원 의원 선거 이후 당을 완전히 장악한 김대중에 의해 연정이 와해되기는 한다. 김종필은 이때부터 줄줄이 배신당한다.
  11. 3당(신민당, 자유당, 자유민주연합의 영수였던 김대중, 김영삼, 김종필을 의미한다.
  12. 한화갑 등 핵심 인사는 무려 제명됐었다.
  13. 이낙연이 이끄는 계파였다.
  14. 이에 대해선 1980년 황제를 모독한 의혹을 받던 전두환의 사례를 제외하고는 황제 붕어로 인한 해산 시 보수 세력이 결집하여 선거에서 승리하는 양상을 보여온 만큼, 황제에 대한 보수 세력의 충성도가 큰 영향이 줬다는 분석이 지배적이다.
  15. 유일하게 수장이 원외 인사인 계파로, 변재휘 지사는 최고고문으로서 사실상 대표 노릇을 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