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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요= | =개요= | ||
'''조선독립전쟁''' 또는 '''한국독립전쟁'''으로 불리우는 전쟁은 1987년 7월 2일부터 1990년 8월 15일까지 조선반도<ref>현 한반도</ref> 전역에서 일본과 대한연합전선 사이에서 벌어진 전쟁이다. 전쟁의 결과 조선이 독립하면서 일본 제국주의와 공영권의 최종적인 붕괴를 야기하였으며, 냉전 종식의 상징적인 사건 중 하나로 평가 받는다. | {{인용문1|계엄철폐! 일제타도! 독립쟁취! | ||
(戒厳撤廃!日帝打も!独立争取!)|}} | |||
'''조선독립전쟁''' 또는 '''한국독립전쟁'''으로 불리우는 전쟁은 1987년 7월 2일부터 1990년 8월 15일까지 3년동안 조선반도<ref>현 한반도</ref> 전역에서 일본과 대한연합전선 사이에서 벌어진 전쟁이다. 전쟁의 결과 조선이 독립하면서 일본 제국주의와 공영권의 최종적인 붕괴를 야기하였으며, 냉전 종식의 상징적인 사건 중 하나로 평가 받는다. | |||
=배경= | =배경= | ||
==1980년== | ==1980년== | ||
===대아대전 이후 일본의 상황=== | ===대아대전 이후 일본의 상황=== | ||
대아대전의 패배는 일본에게 있어서 충격 그 자체의 사건이었다. 대아대전의 패배는 중국과 몽골을 비롯한 만주국까지 손실하는 치명적인 결과를 초래했고, 계속되는 동남아 공영권 국가들의 이탈 흐름에서 이러한 중국의 손실은 일본에게는 재앙이었다. 더군다나 중국의 손실이라는 결과와 대아대전에서의 군비 소모는 야스다 위기 이후 간신히 수습선에 들어가고 있던 일본의 경제를 다시금 폴싹 내려앉게 하고야 말았고, 그와 동시에 내지 곳곳에선 시위와 폭동이 일어나며 일본은 최악을 향해 달려가고 있었다. | |||
이 상황에서 쿠데타로 집권한 무토의 내각은 결국 실각할 수 밖에 없었고, 재집권한 다케시타 노보루의 민정 내각은 대아대전의 패배를 수습하는 것에 총력을 가하기 시작했다. | |||
그리고 그러한 정국 수습을 위한 정책의 중심에는 조선이 있었다. 중국까지 손실한 마당에서 이제는 내지의 일부가 된 조선까지 잃는다는 것은 일본에게는 결코 일어나서는 안되는 일이었으며, 그것은 이미 무너져내리고 있는 일본의 패권에 최종적인 사형선고를 내릴 것이었다. | |||
그러한 마지노선을 사수하기 위해서 다케시타의 내각은 치안력을 강화하고 조선군을 증원하는 등 조선의 지배력을 강화 시키기 위해 행동에 나서기 시작했다. | |||
===요동치는 조선의 정세=== | ===요동치는 조선의 정세=== | ||
동방의 고요한 아침의 나라라고 불리우던 조선은 1910년 일본의 병합 이후 오랜 식민통치에 지배 받고 있었다. 활발히 활동하던 독립운동은 30년대에 들어서는 상당수가 소탕되어 더 이상 국내에서의 독립운동은 물론이거니와 만주사변으로 만주까지 일본의 영향권에 들어서며 더욱 어려워졌고, 일본이 2차대전에서 최종적인 승리를 쟁취하면서 그마저 남은 독립세력도 소멸되어 김일성이 지휘하는 동북항일연군의 잔당 밖에 남지 않은 절망적인 상황에 처해있었다. | |||
그러한 조선에게도 60년대 부터 서서히 변화의 바람이 들어서기 시작했다. 대륙 침공의 교두보 역할.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던 조선은 내지와의 해저터널 연결과 중국과의 무역 그 중간에 있다는 이점으로 서서히 발전되기 시작했고, 총독부의 조선통치도 더욱 느슨해지며 조선은 눈부신 발전을 이루기 시작했다. | |||
조선의 중심지 케이조<ref>경성</ref>에는 화려한 네온사인의 불빛이 밤을 활짝 비추며 마치 일본 본토를 방문한 것만 같은 분위기를 풍겼고, 마침내 내지의 일부와 같은 모습을 갖춘 조선과 그 중심지 케이조에는 그것에 걸맞게 제2의 동경이라는 새로운 별명이 붙었다. 일본의 오랜 노력이 빛을 봤는지 내선일체도 제법 성공적으로 이루어져 조선이라는 이름은 일찍이 잊혀진 것 처럼 보이었다. | |||
하지만 그 모든 것은 일본의 착각이었다. 조선이라는 이름은 조선인 상당수에 마음 깊은 곳에 여전히 남아있었고, 조선인들은 일본의 탄압을 피해 조용히 조선이라는 이름을 그들의 아이들에게 전해주었다. 70년대에 들어서서는 동남아 공영권의 붕괴 물결과 다이리 음모라는 새로운 위기, 그리고 대아대전이라는 혼란상에 힘 입어 일본의 2차대전 승리와 함께 소멸한 독립운동 세력이 소규모나마 지하에서 다시금 활동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러한 움직임의 중심에는 젊은 청년들이 있었다. | |||
일본의 치하에서 조선의 황금기는 그리 오래가지 못했다. 대아대전이 발발하며 중국과의 무역으로 빛을 보던 조선의 경제는 공영권에서 가장 큰 직격탄을 맞으며 붕괴해버렸고 그런 상황에서 조선의 경제는 전시경제로 돌입하며 일상은 더욱 통제 당하고 수 많은 조선인이 전선으로 동원되며 불만은 쌓여가기 시작했다. 대아대전을 기점으로 조선에서는 산발적으로 소규모 시위가 전개되었고, 이는 주로 대학가를 중심적으로 진행되었다. | |||
===전국적인 시위의 시작=== | ===전국적인 시위의 시작=== | ||
===경성의 봄=== | ===경성의 봄=== | ||
85번째 줄: | 104번째 줄: | ||
===대항쟁의 시작=== | ===대항쟁의 시작=== | ||
===종철이를 살려내라! 한열이를 살려내라!=== | ===종철이를 살려내라! 한열이를 살려내라!=== | ||
=== | ===경성 사태=== | ||
===제국군 상륙과 계엄령 발효=== | |||
=전개= | =전개= | ||
==헤이조 반란과 봉기의 시작== | |||
==연합전선의 출범== | |||
==작전명 광복== | |||
==압록강을 넘어라== | |||
==세계가 지켜보다== |
2024년 4월 1일 (월) 12:41 기준 최신판
참여자 명단 |
조선독립전쟁 Korean War of Independence 朝鮮反乱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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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짜 | 1987년 7월 2일~1990년 8월 15일 | ||||||||||||||||||||||||
장소 | 한반도 전역 | ||||||||||||||||||||||||
원인 | 조선신탁통치령의 대한 조선인의 대규모 반발 | ||||||||||||||||||||||||
결과 | 조선의 독립 | ||||||||||||||||||||||||
영향 | 대동아공영권과 일본의 아시아 패권의 최종적인 붕괴 아시아 냉전 체제의 종식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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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요
계엄철폐! 일제타도! 독립쟁취!
(戒厳撤廃!日帝打も!独立争取!) |
조선독립전쟁 또는 한국독립전쟁으로 불리우는 전쟁은 1987년 7월 2일부터 1990년 8월 15일까지 3년동안 조선반도[1] 전역에서 일본과 대한연합전선 사이에서 벌어진 전쟁이다. 전쟁의 결과 조선이 독립하면서 일본 제국주의와 공영권의 최종적인 붕괴를 야기하였으며, 냉전 종식의 상징적인 사건 중 하나로 평가 받는다.
배경
1980년
대아대전 이후 일본의 상황
대아대전의 패배는 일본에게 있어서 충격 그 자체의 사건이었다. 대아대전의 패배는 중국과 몽골을 비롯한 만주국까지 손실하는 치명적인 결과를 초래했고, 계속되는 동남아 공영권 국가들의 이탈 흐름에서 이러한 중국의 손실은 일본에게는 재앙이었다. 더군다나 중국의 손실이라는 결과와 대아대전에서의 군비 소모는 야스다 위기 이후 간신히 수습선에 들어가고 있던 일본의 경제를 다시금 폴싹 내려앉게 하고야 말았고, 그와 동시에 내지 곳곳에선 시위와 폭동이 일어나며 일본은 최악을 향해 달려가고 있었다.
이 상황에서 쿠데타로 집권한 무토의 내각은 결국 실각할 수 밖에 없었고, 재집권한 다케시타 노보루의 민정 내각은 대아대전의 패배를 수습하는 것에 총력을 가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러한 정국 수습을 위한 정책의 중심에는 조선이 있었다. 중국까지 손실한 마당에서 이제는 내지의 일부가 된 조선까지 잃는다는 것은 일본에게는 결코 일어나서는 안되는 일이었으며, 그것은 이미 무너져내리고 있는 일본의 패권에 최종적인 사형선고를 내릴 것이었다.
그러한 마지노선을 사수하기 위해서 다케시타의 내각은 치안력을 강화하고 조선군을 증원하는 등 조선의 지배력을 강화 시키기 위해 행동에 나서기 시작했다.
요동치는 조선의 정세
동방의 고요한 아침의 나라라고 불리우던 조선은 1910년 일본의 병합 이후 오랜 식민통치에 지배 받고 있었다. 활발히 활동하던 독립운동은 30년대에 들어서는 상당수가 소탕되어 더 이상 국내에서의 독립운동은 물론이거니와 만주사변으로 만주까지 일본의 영향권에 들어서며 더욱 어려워졌고, 일본이 2차대전에서 최종적인 승리를 쟁취하면서 그마저 남은 독립세력도 소멸되어 김일성이 지휘하는 동북항일연군의 잔당 밖에 남지 않은 절망적인 상황에 처해있었다.
그러한 조선에게도 60년대 부터 서서히 변화의 바람이 들어서기 시작했다. 대륙 침공의 교두보 역할.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던 조선은 내지와의 해저터널 연결과 중국과의 무역 그 중간에 있다는 이점으로 서서히 발전되기 시작했고, 총독부의 조선통치도 더욱 느슨해지며 조선은 눈부신 발전을 이루기 시작했다.
조선의 중심지 케이조[2]에는 화려한 네온사인의 불빛이 밤을 활짝 비추며 마치 일본 본토를 방문한 것만 같은 분위기를 풍겼고, 마침내 내지의 일부와 같은 모습을 갖춘 조선과 그 중심지 케이조에는 그것에 걸맞게 제2의 동경이라는 새로운 별명이 붙었다. 일본의 오랜 노력이 빛을 봤는지 내선일체도 제법 성공적으로 이루어져 조선이라는 이름은 일찍이 잊혀진 것 처럼 보이었다.
하지만 그 모든 것은 일본의 착각이었다. 조선이라는 이름은 조선인 상당수에 마음 깊은 곳에 여전히 남아있었고, 조선인들은 일본의 탄압을 피해 조용히 조선이라는 이름을 그들의 아이들에게 전해주었다. 70년대에 들어서서는 동남아 공영권의 붕괴 물결과 다이리 음모라는 새로운 위기, 그리고 대아대전이라는 혼란상에 힘 입어 일본의 2차대전 승리와 함께 소멸한 독립운동 세력이 소규모나마 지하에서 다시금 활동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러한 움직임의 중심에는 젊은 청년들이 있었다.
일본의 치하에서 조선의 황금기는 그리 오래가지 못했다. 대아대전이 발발하며 중국과의 무역으로 빛을 보던 조선의 경제는 공영권에서 가장 큰 직격탄을 맞으며 붕괴해버렸고 그런 상황에서 조선의 경제는 전시경제로 돌입하며 일상은 더욱 통제 당하고 수 많은 조선인이 전선으로 동원되며 불만은 쌓여가기 시작했다. 대아대전을 기점으로 조선에서는 산발적으로 소규모 시위가 전개되었고, 이는 주로 대학가를 중심적으로 진행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