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종 순황제 (풍운):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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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대 대조선국 태왕 (빨간풍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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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style="background-image: linear-gradient(to right, #320000, #4E0000 20%, #4E0000 80%, #320000); color: #E2BB00" | 고조 관련 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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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iv class="mw-customtoggle-Yigyo_1" style="text-align:center; font-size:10.5pt"><div style="margin-left:2.5px; margin-top:-2.0px">'''[ 펼치기  ·  접기 ]'''</div></div>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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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colspan="2" style="background-image: linear-gradient(to right, #320000, #4E0000 20%, #4E0000 80%, #320000); color: #E2BB00" | <big>[[대조선국 태왕 (빨간풍선)|{{color|#E2BB00|대조선국 제2대 태왕}}]]</big><br><big><big>광종 <nowiki>|</nowiki> 光宗</big></bi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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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colspan="2" | <div style="margin: -4.5px -9.0px">[[파일:고조 (빨간풍선).jpeg]]</div>
| colspan="2" | <div style="margin: -4.5px -9.0px">[[파일:익종 (빨간풍선).jpeg]]</div>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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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style="background: #4E0000; color: #E2BB00" | 이름
! style="background: #4E0000; color: #E2BB00" | 이름
| 하전(夏銓) → 교(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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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rowspan="2" style="width: 100px; background: #4E0000; color: #E2BB00" | 출생
| 1842년 3월 26일
| 1878년 11월 22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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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경성 한성부 (빨간풍선)|한성부]] 인달방 도정궁<br>(現 [[경성 한성부 (빨간풍선)|경성 한성부]] 종로구 도정궁)
| [[경성 한성부 (빨간풍선)|한성부]] 창덕궁 대조전 <br>(現 [[경성 한성부 (빨간풍선)|경성 한성부]] 창덕궁 대조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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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rowspan="2" style="width: 100px; background: #4E0000; color: #E2BB00" | 붕어
! rowspan="2" style="width: 100px; background: #4E0000; color: #E2BB00" | 붕어
| 1901년 3월 29일 (향년 59세)
| 1948년 5월 25일 (향년 69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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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경성 한성부 (빨간풍선)|경성 한성부]] 경운궁
| [[경성 한성부 (빨간풍선)|경성 한성부]] 경운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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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rowspan="4" style="background: #4E0000; color: #E2BB00" | 재위기간
! rowspan="6" style="background: #4E0000; color: #E2BB00" | 재위기간
| style="background: #bf1400; color: #ffd400" | '''조선 제25대 국왕'''
| style="background: #bf1400; color: #ffd400" | '''조선 왕세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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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849년 7월 28일 ~ 1895년 1월 12일 <small>(45년)</small>
| 1885년 5월 28일 ~ 1895년 1월 12일 <small>(9년)</smal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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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style="background: #4E0000; color: #E2BB00" | '''대조선국 초대 태왕'''
| style="background: #bf1400; color: #ffd400" | '''대조선국 왕태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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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895년 1월 12일 ~ 1901년 3월 29일 <small>(6년)</small>
| 1895년 1월 12일 ~ 1901년 3월 29일 <small>(6년)</smal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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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colspan="2" | <div class="mw-customtoggle-Yigyo_2" style="text-align:center; font-size:10.5pt"><div style="margin-left:2.5px; margin-top:-2.0px">'''[ 펼치기  ·  접기 ]'''</div></div>
| style="background: #4E0000; color: #E2BB00" | '''대조선국 제2대 태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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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01년 3월 29일 ~ 1948년 5월 25일 <small>(47년)</smal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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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colspan="2" | <div class="mw-customtoggle-Yihun_2" style="text-align:center; font-size:10.5pt"><div style="margin-left:2.5px; margin-top:-2.0px">'''[ 펼치기  ·  접기 ]'''</div></div>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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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style="background: #4E0000; color: #E2BB00" | 부모
! style="background: #4E0000; color: #E2BB00" | 부모
| 생부 완창대원왕<br>생모 경주대원비 김씨{{구분선}}양부 [[헌조 (빨간풍선)|헌조]]<br>양모 효정왕후 홍씨
| 부왕 [[예조 (빨간풍선)|예조]]<br>모후 문성왕후 김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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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style="background: #4E0000; color: #E2BB00" | 형제자매
! style="background: #4E0000; color: #E2BB00" | 형제자매
| 동생 완친왕
| 동생 [[흥친왕 (빨간풍선)|흥친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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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style="background: #4E0000; color: #E2BB00" | 황후
! style="background: #4E0000; color: #E2BB00" | 왕후
| 문성왕후 김씨
| 경인왕후 이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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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style="background: #4E0000; color: #E2BB00" | 자녀  
! style="background: #4E0000; color: #E2BB00" | 자녀  
| 장남 [[익종 (빨간풍선)|익종]]<br>차남 [[흥친왕 (빨간풍선)|흥친왕]]
| 장남 [[신종 (빨간풍선)|신종]]<br>차남 [[강친왕 (빨간풍선)|강친왕]]<br>삼남 [[금친왕 (빨간풍선)|금친왕]]<br>장녀 인선공주<br>차녀 인경공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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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style="background: #4E0000; color: #E2BB00" | 종교
! style="background: #4E0000; color: #E2BB00" | 종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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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style="background: #4E0000; color: #E2BB00" | 아명
! style="background: #4E0000; color: #E2BB00" | 아명
| 인손(仁孫)
| 수성(綏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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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style="background: #4E0000; color: #E2BB00" | 자
! style="background: #4E0000; color: #E2BB00" | 자
| 치홍(致弘)
| 광도(廣道)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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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style="background: #4E0000; color: #E2BB00" | 묘호
! style="background: #4E0000; color: #E2BB00" | 묘호
| '''고조'''(高祖)
| '''광종'''(光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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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style="background: #4E0000; color: #E2BB00" | 봉호
| '''완녕군'''(完寧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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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style="background: #4E0000; color: #E2BB00" | 존호
! style="background: #4E0000; color: #E2BB00" | 존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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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style="background: #4E0000; color: #E2BB00" | 연호
! style="background: #4E0000; color: #E2BB00" | 연호
| 건양(建陽, 1894 ~ 1895)<br>'''[[천통 시대 (빨간풍선)|천통]]'''(天統, 1895~1901)
| '''[[광형 시대 (빨간풍선)|광형]]'''(光亨, 1895~19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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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style="background: #4E0000; color: #E2BB00" | 계급
! style="background: #4E0000; color: #E2BB00" | 계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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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개요 ==
== 개요 ==
고조 이교(高祖 李㚁)는 [[대조선국 (빨간풍선)|대조선국]]의 초대 [[태왕 (빨간풍선)|태왕]]이다. 1849년 헌조 사후 왕족 가운데 유일한 헌조의 아래 향렬로써 보위에 올랐다.
광종 이훈(光宗 李鑫)는 [[대조선국 (빨간풍선)|대조선국]]의 제2대 [[태왕 (빨간풍선)|태왕]]이다.  


고조의 등극은 조선 후기 300년을 통치해온 인조의 혈통의 단절과 덕흥대원군의 직계로의 왕통교체를 상징하며 실질적인 조선 제3왕조의 창건 및 조선 왕조의 중시조로 평가된다.
예조 사후 나선정벌과 양차 대전이라는 비상한 시대를 통치하며 후조선의 기틀을 잡은 명군으로 내치에서 성공을 이끈 부왕과 아들과는 달리 48년이라는 긴 재위 기간 동안 군주로서 내치와 외치 모두 승리를 거듭하여 훗날의 중흥을 위한 초석을 마련하였고 전제군주제였던 조선에서 서구식 양원제를 도입하여 정당정치의 초석을 마련하였으나 말년에는 지나친 인간 불신과 병환으로 인해 스스로가 이룩한 의회정치의 몰락을 가져오기도 하였다.
=== 즉위 이전 ===
1878년 [[예조 (빨간풍선)|예조]]의 장남으로 태어나, 7세의 나이에 왕세자에 봉해졌다. 아버지 예조는 전형적인 사대부 였던 군주였던 것과는 달리, 문무를 모두 겸비하였으나 서구의 학문과 군사학에 모두 능했으며 음악과 예술에 조예가 높았다고 한다.


8살이라는 어린 나이에 보위에 올라 59세의 나이에 붕어하기까지 부국강병과 동시에 제도와 문화의 동도서기화를 이루는등 수많은 업적들을 남겼으며 조선의 고토인 간도를 수복하여 영토를 확장시켰다. 고조가 즉위할 당시 미지의 나라였던 조선은 고조의 치세를 거치면서 강력한 국력과 군사력을 지닌 '''대조선국'''으로 변모했고, 고조의 치세는 천통성세라고 불리며 성군(聖君)으로 평가받는다.
어린 광종은 세자시강원에서 서양 교사들과 경연관들에게 기초 학문을 익혔다. 광종은 프랑스어와 영어에 능통했으며, 수학과 과학, 지리학, 역사, 예술도 빠르게 깨우쳤다.


== 생애 ==
광종은 자라나며 성리학보다는 서구의 사상과 군사학에 관심을 가지며 중신들의 우려를 사기도 하였다. 그러나 부왕이 태자를 전적으로 지지하며 광종은 자유로운 분위기 속에서 제왕학을 익혀갔고, 1893년 15세가 되던 나이부터는 부왕과 함께 국사에 참여하며 후계자 수업을 이어나가기 시작했고, 부왕의 건강이 악화되던 1898년부터는 대리청정을 수행하며 정무의 대부분을 직접 처리했다.  
=== 유년기 ===
1842년(헌조 8년) 2월 15일에 한성부 서부 인달방 도정궁에서 태어났다. 아명은 인손(仁孫), 초휘는 하전(夏銓)으로 생후 1년 만에 아버지 완창군이 세상을 떠나 겨우 만 1세로 도정궁 사손(嗣孫)<ref>제사를 받드는 후손이라는 뜻이다.</ref>이 되었다.


어릴때부터 외모가 아름다우며 영특하고 기개가 있었고, 유교 경전을 보는 것을 좋아하였으나 관직에 나갈 수 없는 왕족으로써 이하전의 재능은 아까운 재능이었다. 그러나 1849년 평범한 왕족이었던 이하전의 인생은 역변하게 되었다.
이렇듯 광종은 태왕에 등극하기 전 3년이라는 시간동안 태왕으로써의 무게와 역할을 배우며 스스로의 치세에 대한 신념을 굳히기 시작하였다.
=== 즉위 ===
1901년 3월 29일, 부왕 예조가 붕어하자 태자는 연호를 주역에 나오는 합홍'''광'''대 품물광'''형'''(含弘'''光'''大 品物咸'''亨'''. 품은 것이 크고 넓으니, 만물은 모두 형통하다.)이라는 구절에서 따온 '광형'으로 정하고 즉위했다.


당시 국왕이었던 헌조가 후사없이 일찍 죽고 삼종의 혈맥이 거의 단절된 상황에서 이하전은 풍양조씨와 효유대왕대비 조씨(신정왕후 조씨)의 후원(뒷받침)으로 헌종과 효정왕후의 양자(장남)으로 정식 입적되어 '완녕군(完寧君)'으로 봉해지고 이하전에서 이교(李㚁)로 개명하였고, 곧바로 조선 제25대 임금으로 정식 즉위하였다.
광종이 보위에 올랐을 때 신생 제국인 조선은 혼란스러웠다. 권비의 난을 제압하는 과정에서 조일 연합군과 러시아군은 만주를 갈라먹으며 대치했고 만주의 의화단은 국경을 넘어 조선을 약탈하려 시도하였고, 헌법 제정 논의가 대두되었다.


{{인용문|대왕 대비가 이하전을 종사의 부탁으로 삼는다고 하교하다|
광종은 차근차근 엉킨 실타래처럼 꼬인 일들을 해결하기 시작했다. 군을 동원하여 남만주를 점령하는 한편 경찰과 헌병을 동원하여 만주평정작전을 개시, 광종실록에 따르면 권비나 청군 패잔병이 잔존하는 것으로 의심되던 부락을 완전 초토화 시키켰다고 하며<ref>이때 초토화된 부락에는 조선의 이민자들이 대규모로 이주하여 만주의 새로운 지배층으로 부상하였다.</ref> 이러한 광종의 신중하지만 과감한 통치는 예조 사후 비통과 불안으로 얼룩진 조선 땅을 안정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대왕 대비(大王大妃)가 하교하기를, "종사(宗社)의 부탁이 시급한데 금상(今上)을 이을 사람은 이하전(李夏銓)뿐이므로, 이를 종사의 부탁으로 삼으니, 곧 시인(時仁)의 첫째 아들이다." 하였다.}}
==== 군신 ====
권비의 난이 끝나고도 조일 양국간의 유착은 더욱 공고해졌다. 1902년 영일동맹 채결과 동시에 조선은 일본과 조일동맹을 채결하여 반러연대를 천명하였고, 1904년 양국이 기습적으로 제물포 앞 바다에서 러시아 순양함에 선제공격을 가하며 광형노국전쟁이 시작되었다.  


=== 즉위 배경 ===
광종은 원수부와 조정을 서경 행궁으로 이전시키며 친정에 나섰다. 조일연합군은 육상과 해상에서 분전을 거듭하였고, 마침내 1904년 5월 28일 조일연합함대가 대마도에서 러시아 발트함대를 격파하며 조선은 일약 일본 다음가는 동아시아의 패자로 부상하였다. 동시에 친정을 하며 군을 이끈 광종은 광개토대왕과 부왕 예조를 이어 군신의 지위에 올랐고, 부왕에게 물려받은 막강한 왕권은 그야말로 하늘을 찔렀다.
고조는 선왕 헌조와 즉위 전까지는 법적(양자제도)으로 '''27촌''', 혈통상으로는 '''25촌''' 차이가 나는 머나먼 친척이었다.고조와 헌조는 혈통상 덕흥대원군의 아들 대에서 갈라졌고 법적으로는 중종의 아들 대에 갈라졌다. 단, 조선 후기 들어 왕실 자손이 거의 씨가 마르기 직전까지 가 1819년(순조 19년) 순조가 일종의 보험 개념으로 10대 사손 진안군 이언식 대부터 대원군가 종손에 한해서 군 작위 수여 및 왕족 대우를 해주었기 때문이다. 13대 사손인 이하전은 종친부에서 관리하는 엄연한 왕족이었으므로 언급할 수 있는 대상이긴 했지만 헌조 즉위 당시만 해도 별로 주목 받지 못하는 왕족이었다.
==== 군민공치의 길 ====
1905년 승전 이후 광종은 열렬한 환영을 받으며 한성으로 환도했다. 환도 직후 입헌정체를 선포, 그동안 미루어왔던 [[대조선국 국제 (빨간풍선)|대조선국 국제]]를 반포하고 중추원을 개회하였다.  


그러나 1844년(헌조 10년) 민진용 역모 사건에 엮여서 1844년(헌종 10년)에 전계군의 세 자식들이 사사당하는 일이 벌어졌다. '''영조 - 사도세자의 직계 후손이 단절된 것이다.''' 이렇듯 삼종의 혈맥이 거의 단절된 상황에서<ref>익평군이 있었지만, 익평군은 숙부 은전군의 사후 양자가 되어 제사를 이어야 했고, 몸이 좋지 않아 일찍이 후보군에서 탈락했다. 물론 장남이 입적하여 즉위하는 경우도 아주 가끔 있었지만 매우 드문일이라 기각되었다. 야사에서는 익평군이 풍계군과 그의 첩 전주 이씨의 아들로 태어난 동성동본이라 즉위 대상에서 제외되었다고 한다.</ref> 혈통보다는 왕위 계승의 법칙에 따른 택군이 대두되는 것은 기정사실이나 마찬가지였다.
중추원 개회 이후 광종은 예조 시절의 전제군주제에서 프로이센식 입헌군주정으로 전환을 도모하였다. 이 시기의 군민공치를 광형민본운동이라고 부른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이하전이 다른 종친들보다 유리한 조건을 하나 가지고 있었다. 바로 항렬. 원래 왕위 계승의 법칙에 따르면, 선왕의 다음 항렬 대에서 새 왕이 나와야 하는데 그럴 왕족이 없기는 했다. 헌조는 덕흥대원군의 13세손(12대손)이고 그 아랫대가 14세손(13대손)인데, 왕과 가까운 친척들 중 14세손은 단 1명도 없었다. 그런데 유일하게 해당했던 왕족이 도정궁 종손 이하전이었던 것. 어찌 보면 당연하다. 비록 왕통을 계승한 건 덕흥대원군의 셋째인 선조 계열이었지만, 덕흥대원군의 장남 계열로만 계속 이어지는 종가가 바로 도정궁이기 때문에 왕실 직계보다 세대 교체가 빨랐기 때문이다.
광형민본운동의 기간은 주로 1차 세계대전 직후부터 대공황 직후를 의미하는데, 이 시기 조선은 [[시베리아 원정 (빨간풍선)|시베리아 원정]]으로 연해주의 일부 지역을 점령하고 [[노령제민족연합정부 (빨간풍선)|노령제민족연합정부]]를 설립하며 연해주에 소련을 막을 방파재를 건설하였다. 또한 1차 대전의 전쟁 특수와 전후 광란의 20년대에 편승한 조선은 유래없는 대호황의 길을 걸었다. 이 시기를 가리켜 광형성대라고 부른다.


이렇듯 왕실의 직계가 단절된 상황에서 왕위 계승의 법칙에 따라 이하전이 차기 왕으로 옹립되는 것은 보다 당연했고, 풍양 조씨와 뜻을 같이 했던 권돈인이 직접 이하전을 후계자로 세우기를 호명하며 공식화 되었다. 풍양 조씨 뿐만 아니라 안동 김씨 또한 어린 이하전이 보다 다루기 수월할 것이라 여기어 옹립에 찬성하였다.
==== 갈대보다는 소나무를 ====
=== 친정(親政) ===
광형성대는 1920년대 말이 되자 서서히 그 끝을 보이기 시작했다. 1929년 미국에서 시작된 대공황은 일본을 거쳐 대한제국으로 번지기 시작했다. 광종은 의정부의 경제 대응 미진을 질타하며 개각을 단행, 교체하는 한편 [[노령제민족연합정부 (빨간풍선)|노령]]에서 성과를 거둔 소련식 중공업화 정책을 도입하고, 이를 주도한 노령관료들을 적극 등용하여 국가주도적 경제개발에 나선다.
안동 김씨의 세력이 큰 견제가 없이 무럭무럭 커가는 시기 고조는 8살의 어린 나이었기에 순원왕후의 수렴청정을 받았다. 1852년 고조가 10살이 되던 해 순조, 헌종과 마찬가지로 안동 김씨의 일문인 김문근의 딸 문성왕후를 왕비로 삼았다. 안동 김씨 세력이자 대왕대비였던 순원왕후 김씨조차도 또 다시 안동 김씨를 왕비로 들이는 일을 반대했지만, 다른 안동 김씨의 압력에 유야무야되었고, 국구(國舅, 왕의 장인어른)가 되어 권력을 휘두른다.


1855년 순원왕후가 수렴청정을 거두자 고조의 친정(親政)이 시작되었다. 친정을 시작한 고조는 정치적 친위 세력이 부족하다는 결론에 도달했고, 남인, 소론은 물론, 북인과 반역향이라고 소외된 영남 유림, 서북인, 함경도인, 고려 왕씨 등 권력에서 소외된 계층, 왕가의 종친 등을 끌어들여 비주류를 등용하여 조정에 근왕파를 형성하기 시작한다. 이때 왕족 가운데는 흥선군, 경평군, 익평군을, 그 외에는 이유원, 이최응, 김병국을 제수(除授)하였다.
1931년 조선은 영국에 이어 금본위제를 정지하고, 원화 약세와 함께 무역을 확대하고 종속지역과의 무역을 급속히 확대함으로써 대공황 이전의 GDP 수준을 회복하는 한편 자력갱생 운동을 전개하여 경제블럭을 공고히 하였지만, 1940년대까지 경제 침체를 피할 수 없었다.


이렇게 자신의 세력을 키우던 고조는 1857년부터 척신들을 견제하기 시작했다. 암행어사도 활발하게 전국으로 파견했고, 안동 김씨의 수장인 김좌근 등을 유배를 보내며, 안동 김씨의 조종을 받던 삼사를 모조리 파직하는등 반(反) 안동 김씨 행보를 걸었다. 또한 오군영의 훈련대장과 병조판서를 독자적으로 임명하고 헌조가 만들었다 해체된 총위영을 복원하며 군권을 장악하고 아주 활발한 왕권 강화 정책을 펼쳤다.
대공황 당시 경제적 혼란은 영토 팽창과 극우, 극좌 정치의 득세를 야기했다. 이 당시 광종은 이러한 극단주의와 팽창주의적 시도를 무지막지하게 진압했다. 혹세무민을 금한다는 명분하에 사회계몽법을 통과시켜 극좌, 극우 언론 세력을 정간시키고, 소요진압법을 제정해 중추원 의관의 면책특권을 박탈하고 의금부가 난동단체로 정한 단체는 모조리 해산하는 [[광형옥사 (빨간풍선)|광형옥사]]로 가까스로 극단주의 세력을 거세하는데 성공했다.
=== 진정한 왕이 되다 ===
그러던 1860년에 일이 터졌다. 고조가 친히 발탁하여 안동 김씨와 사사건건 대립하던 경평군의 친동생 이세익(李世翊)의 한림 임명을 세도가 안동 김씨들이 부당하다고 반대하였다. 이에 경평군이 크게 노여워해 고조에게 상소를 올리며 세도가와 경평군의 대립이 폭팔했다. 안동 김씨들은 경평군에게 벌을 주라 청했고, 화가 난 경평군은 김좌근, 김문근(金汶根) 등 안동 김씨의 세도를 대놓고 비난했는데, 이 때 "이 나라가 김씨의 나라인가! 이씨의 나라인가!" 라는 말을 하였다. 당연히 가만있을 리 없던 세도가들은 이를 오히려 역공의 기회로 삼았다. 아예 신하들에게 경평군을 사형시키라고 까지 권하라고 부추겼다.


이때 고조가 개입하였다. 고조는 “경평군의 말이 옳다. 이 나라가 김씨의 나라가 아니라면 경평군을 사사할 필요가 없다“며 경평군을 공격한 대사헌 서대순을 파직하며 경평군을 보호했고, 사건은 그렇게 마무리되는것 같았으나, 안동 김씨들은 정치적 탄핵이 실패하자 경평군을 제거하기 위해 음모를 꾸미고 있었는데, 이것이 흥선군의 정보망에 걸려들었고 이를 고조에게 고했다. 격노한 고조는 즉시 총위영과 오군영을 동원하여 비변사와 고관대작의 가택을 습격하여 세도가를 체포하였고, 대규모 출척을 가했다. 이것이 바로 임술대출척이다.
이외 함께 조선령 만주를 제외한 남만주 일대에 영향력을 증가시키는 귀환운동을 통해 남만주에서의 영향력을 증대시키며, [[노령제민족연합정부 (설중매)|노령]] 정부를 교체하여 국민투표를 통해 [[솔빈번 (빨간풍선)|솔빈번]]을 세우고, 위성국화 하며 국내의 팽창주의자들의 불만을 달래고 영토 확장론을 일축했다.


이때 비변사를 혁파하고, 의정부와 삼군부를 복원하며 세도정치 60여년은 이렇게 허무하게 끝을 내고 말았다.<ref>다만 신 안동 김씨 자체에 대한 숙청은 최소한으로 끝났다. 이는 안동 김씨와 일종의 정치적 거래를 한 것으로, 안동 김씨의 세력을 어느 정도 살려서 또 다른 세도 가문인 풍양 조씨 가문의 성장을 막고자 했고, 안동 김씨 내의 유능한 인재들을 포섭하기 위해서였다. 때문에 안동 김씨 일파는 실권과 재산은 크게 잃었지만 명예 등은 거의 잃지 않았다. 김병기는 잠시 경기도 광주유수 등의 외직으로 좌천되었다가 곧 복귀하여 좌찬성 등의 요직을 맡았다. 김병학 / 병국 형제는 오히려 더욱 진급, 고조의 치세에 적극적으로 협력하였다.</ref>
=== 사망 ===
 
광종이  어지간하면 내각에서 처리하던 일도 편집증적으로 자신이 전부 처리하였기에 광종의 몸은 엉망이었다. 게다가 1930년대, 대공황으로 인한 경제 위기와 정치 혼란, 사회 문제들을 자신이 일일히 수습하며 광종의 건강은 크게 악화되었으며, 말년엔 [[순현인황후 (설중매)|순현인황후]]와의 다툼으로 육체적으로 한계에 다다랐다. 그러나 이런 상황에서 더더욱 정무에 열을 올렸다.
이때부터 고조는 왕권 강화와 더불어 각종 폐단에도 손을 대었다. 고조는 근왕파들을 통해 지방을 장악한 이후 양전사업을 실시하고, 은결을 색출해 내는 것으로 전정을 개혁했다. 또한 군정을 개혁하여 사람을 기준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집을 기준으로 하는 호포제를 실시, 세수가 확연히 증가했다.
 
또한 서원 철폐도 이어졌다. 고조실록에서는 이때 유생들이 반발하여 몇 날 며칠을 울고 불며 집단으로 시위를 벌였으나, “진정 백성에 해가 된다면 문선왕이라도 내가 용서하지 않겠다.“라는 말과 함께 유생들을 한강 남쪽으로 밀어내 버렸다. 이와 더불어 환곡제(還穀制)를 폐지하고, 사창제(社倉制)를 실시, 검소한 생활을 권장하고 법제도 바로잡았다. 또한 길거리의 부랑배들을 몰아내 국가 분위기를 바로잡았다. 이에 조선의 재정은 크게 확충되었고, 치안도 대단히 진정되어 고조 시절에는 민란이 격감되어 고조의 권위는 점차 증가해갔다.
=== 개항과 동도서기 ===
고조 시기 들어 서구의 통상 강요는 더더욱 심해져가고 있었다. 1866년 병인양요와 1871년 신미양요를 거치며 조선의 쇄국은 정점에 달했으나 1876년 운요호 사건을 거치며 조용한 아침의 나라는 점차 시끄러워지기 시작했다. 당시 이유원, 박규수, 오경석 등 개화파의 주장과 이홍장의 권고를 받은 고조는 개항 의사에 찬성하였고 개국(開國)을 결정하게 됐다.
 
강화도조약 이후 조선은 여러 국가들과 수교를 시작하였고, 고조는 각각 수신사와 영선사, 보빙사를 파견하여 근대와 문명을 관찰하였다. 그 결과 도쿄에 머물면서 메이지 덴노를 비롯해 산조 사네토미, 이토 히로부미 등 일본의 주요 인사를 만나고 일본의 각종 시설을 시찰하였다. 귀국하자 이를 바탕으로 개화파를 형성, 근왕파는 개화파와 위정척사파로 갈라지게 된다.
 
고조는 스스로 척사윤음을 반포하며 공맹과 정주의 나라에서 사악한 그리스도교를 비롯한 서양 사상을 받아들일 수 없다고 천명한다. 이 과정에서 등장한 것이 '동도서기'였다. 청의 양무운동을 모티브로 서양의 기술과 무기만을 수입하려 시작한 이 계획은, 처음에는 순조롭게 작동하여 조선 육해군의 성공적인 근대화로 이어졌으나, 동도서기론은 점차 고조와 조정의 예상과는 다른 역효과를 불러냈다.
 
무기와 기술의 국산화를 위해서는 공학을 배워야했고, 공학은 과학과 사상을 필요로 하기 시작했으며 서양식 무기를 익히기 위해서는 서양의 언어와 군사교범을 들여와야 했다. 결국 이는 1881년부터 전면적인 근대적 학제의 확립과 산업 확충으로 귀결되었다. 게다가 1881년 이와쿠라 사절단을 모방하여 흥선군을 수장으로 하고 정부관료들로 편성한 조사시찰단은 서구를 탐방하며 구미 견문을 쌓으며 열성적인 근대화론자로 진화하였다. 흥선군은 조사시찰단 사이에서의 공통된 의견을 모아 고조에게 상주하는데, 이것이 바로 홍범 14조이다. 고조가 이를 바탕으로 하는 전면적인 근대화를 국시로 정함에 따라 홍범 14조는 조선의 개화 방침이 되었다.
 
홍범 14조의 반포를 기점으로 사회, 군사, 중앙행정기관의 개편과 함께 여러 개혁이 급격하게 추진된다. 이러한 개혁의 주요 내용으로는 행정관제를 개편, 1부(府) 6조(曹)제에서 2부(府) 9아문(衙門)제로 정착시키는 행정개혁과, 독일 군사고문단 초빙, 프로이센식 내각 체제 도입, '사농공상'을 폐지, '사민평등'을 구가하는 한편, 새롭게 성장한 보부상이나 조정 관료 등을 새롭게 사족이라는 특권 계급으로 함과 동시에, 승선부의 지배 하에 두어 전제 왕권을 강화한다. 동시에 학제(学制) 개혁, 지조(地租) 개정, 그레고리력 채용, 사법 제도 정비 등이 있다.
 
결국 이 시기부터 동도서기론은 사실상 조선의 서구화를 뜻하는 의미로 변형되었다. 이러한 적극적인 개화정책의 추진은 조선을 험난한 국제정세속에서도 부국강병의 길로 이끌었다. 이러한 고조의 근대화 정책을 현대 조선에서는 어일신(御一新)이라고 칭한다.
=== 건양북벌 ===
=== 칭제건원 ===
건양북벌의 승리 이후 전국적으로 칭제건원에 대한 열망이 성조되었다. 이에 고조는 왕실의 존칭을 격상시켜 국왕 전하를 태왕 폐하로 바꿨고, 왕비 전하에서 왕후 폐하로, 세자 저하에서 태자 전하로, 세자빈 저하에서 태자비 전하로, 왕대비 전하를 왕태후 폐하로 각각 바꾸고 왕실(王室)을 제실(帝室)로 바꾸고, 원구단을 축조하고 연호를 천통(天統)으로 정하고 원구단에서 황제의 자격으로 고유제를 거행하여 즉위식을 거행하여 새로운 천자국 대조선국의 탄생을 선포하였다.
 
이렇게 조선이 대조선국이라는 제국으로 변하듯이 동아시아의 국제질서 또한 크게 변화하고 있었다. 의화단 반란으로 조선이 간도, 러시아가 북만주를 점령하며 긴장이 고조되었고, 이는 다가오는 두번째 전쟁의 불씨가 되었다.
 
=== 말년 ===
고조의 치세는 태평성대였지만, 그 치세를 유지하기 위해 고조는 자신의 생명을 담보로 격무를 일삼았다. 여타 선왕들 또한 격무로 시름하기는 다반사였지만 수십년간 세도가를 비롯한 여러 열강과 경쟁해온 조선의 수장인 고조의 부담은 여느 군왕들과도 비견할 수 없었으며 이는 고조의 건강이 눈에 띄게 악화되는 계기가 되었다.
 
결국 어극 52주년을 바라보던 1901년 3월 29일, 한 시대의 거인이 서방정토로 떠나게 되었다. 향년 59세였고 8살의 나이에 등극한 이래 한치도 쉬지 않고 서세동점의 난세속 조선이라는 작은 배를 선장의 위치에서 살아남게 한 임금은 조용하게 영면에 들었다. 
 
사후 기강을 만들고 표준을 세운 업적을 인정받아 고조(高祖)의 묘호를 받았으며 성릉(聖陵)의 능호를 받아 서삼릉에 안치되었다.


결국 1943년 10월 11일 인정전에서 집무를 보던 중 쓰러졌고, 10월 14일 다시 정신을 차린다. 그러나 정신을 차리자 마자 다시 밀린 정무를 보며 이미 쇠약해진 몸이 더욱 위독해져 10월 17일 다시 쓰러져 10월 18일 오후 3시경 창덕궁 대조전에서 향년 64세를 일기로 황후와 [[신종 효황제 이훈|황태자]]를 비롯한 황족들이 보는 앞에서 붕어한다.
== 여담 ==
== 여담 ==
== 가계 ==
== 가계 ==
* 증조부 : 진안군 언식(晋安君 彦植, 1752 ~ 1819)
* 증조부 : 완성군 희(完城君 爔, 1771 ~ 1830)  
* 증조모 : 덕수군부인 장씨(德水郡夫人 張氏, 1750 ~ 1770)
* 증조모 : 남양군부인 홍씨(南陽郡夫人 洪氏, 1772 ~ 1808)
** 조부 : 완성군 희(完城君 爔, 1771 ~ 1830)  
** 조부 : 완창대원왕 시인(完昌大院王 時仁, 1805 ~ 1843)
** 조모 : 남양군부인 홍씨(南陽郡夫人 洪氏, 1772 ~ 1808)
** 조모 : 경주대원비 김씨(慶州大院妃 金氏, 1816 ~ 1863)
*** 부친 : 완창대원왕 시인(完昌大院王 時仁, 1805 ~ 1843)
*** 부친 : 예조 교(藝祖 㚁, 1842 ~ 1901)
*** 모친 : 경주대원비 김씨(慶州大院妃 金氏, 1816 ~ 1863)
*** 모친 : 문성왕후 김씨(文成王后 金氏, 1837 ~ 1888)
* 왕후 : 문성왕후 김씨(文成王后 金氏, 1837 ~ 1888)
* 왕후 : 원명왕후 홍씨(元明王后 洪氏, 1883 ~ 1932)
** 아들 : [[익종 (빨간풍선)|익종 ]](高祖 章皇帝, 1881 ~ 1948)
** 장남 : [[신종 (빨간풍선)|신종 숙]](神宗 淑), 1916 ~ 1978)
*** 며느리 : [[원명장황후 (설중매)|원명장황후]](元明章皇后, 1859년 ~ 1888년)
*** 며느리 : 원명왕후 홍씨(元明王后 洪氏, 1913 ~ 1992)
*** 며느리 : [[원명장황후 (설중매)|원명장황후]](元明太皇后, 1863년 ~ 1934년)
** 차남 : [[강친왕 (빨간풍선)|강친왕 만]](康親王 滿), 1919 ~ 1988)
*** 며느리 : 강친왕비 안씨(康親王妃 安氏, 1919 ~ 1990)
** 삼남 : [[금친왕 (빨간풍선)|금친왕 주]](錦親王 瀯), 1921 ~ 1998)
*** 며느리 : 금친왕비 민씨(錦親王妃 閔氏, 1923 ~ 19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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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년 2월 18일 (수) 17:27 기준 최신판

[ 소개 ]
휘파람을 불지마 그건 너무 쓸쓸해
촛불을 끄지마 어두운건 싫어
너와 난 빨간 풍선 하늘높이 날아
가슴깊이 묻어둬 너의 슬픔일랑
휘파람을 불지마 그건 너무 정다워
촛불을 끄지마 어두운건 싫어
"빨간풍선"은 "조선이 살아 남는다면?" 이라는 상상을 바탕으로 만들어진 이브위키의 대체역사 세계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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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조선국 태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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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 제2대 제3대
예조 광종 헌종
제4대 제5대
대종 영강태왕
왕태자 · 추존 태왕 · 태상왕 · 왕후
예조선 · 부여 · 원삼국 · 고구려 · 백제 · 가야
신라 · 탐라 · 발해 · 후삼국 · 고려 · 조선
대조선국 제2대 태왕
광종 | 光宗
이름 훈(鑫)
출생 1878년 11월 22일
한성부 창덕궁 대조전
(現 경성 한성부 창덕궁 대조전)
붕어 1948년 5월 25일 (향년 69세)
경성 한성부 경운궁
재위기간 조선 왕세자
1885년 5월 28일 ~ 1895년 1월 12일 (9년)
대조선국 왕태자
1895년 1월 12일 ~ 1901년 3월 29일 (6년)
대조선국 제2대 태왕
1901년 3월 29일 ~ 1948년 5월 25일 (47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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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관 전주 이씨
부모 부왕 예조
모후 문성왕후 김씨
형제자매 동생 흥친왕
왕후 경인왕후 이씨
자녀 장남 신종
차남 강친왕
삼남 금친왕
장녀 인선공주
차녀 인경공주
종교 유교 (성리학)
아명 수성(綏成)
광도(廣道)
묘호 광종(光宗)
존호
시호
연호 광형(光亨, 1895~1901)
계급 대원수

개요

광종 이훈(光宗 李鑫)는 대조선국의 제2대 태왕이다.

예조 사후 나선정벌과 양차 대전이라는 비상한 시대를 통치하며 후조선의 기틀을 잡은 명군으로 내치에서 성공을 이끈 부왕과 아들과는 달리 48년이라는 긴 재위 기간 동안 군주로서 내치와 외치 모두 승리를 거듭하여 훗날의 중흥을 위한 초석을 마련하였고 전제군주제였던 조선에서 서구식 양원제를 도입하여 정당정치의 초석을 마련하였으나 말년에는 지나친 인간 불신과 병환으로 인해 스스로가 이룩한 의회정치의 몰락을 가져오기도 하였다.

즉위 이전

1878년 예조의 장남으로 태어나, 7세의 나이에 왕세자에 봉해졌다. 아버지 예조는 전형적인 사대부 였던 군주였던 것과는 달리, 문무를 모두 겸비하였으나 서구의 학문과 군사학에 모두 능했으며 음악과 예술에 조예가 높았다고 한다.

어린 광종은 세자시강원에서 서양 교사들과 경연관들에게 기초 학문을 익혔다. 광종은 프랑스어와 영어에 능통했으며, 수학과 과학, 지리학, 역사, 예술도 빠르게 깨우쳤다.

광종은 자라나며 성리학보다는 서구의 사상과 군사학에 관심을 가지며 중신들의 우려를 사기도 하였다. 그러나 부왕이 태자를 전적으로 지지하며 광종은 자유로운 분위기 속에서 제왕학을 익혀갔고, 1893년 15세가 되던 나이부터는 부왕과 함께 국사에 참여하며 후계자 수업을 이어나가기 시작했고, 부왕의 건강이 악화되던 1898년부터는 대리청정을 수행하며 정무의 대부분을 직접 처리했다.

이렇듯 광종은 태왕에 등극하기 전 3년이라는 시간동안 태왕으로써의 무게와 역할을 배우며 스스로의 치세에 대한 신념을 굳히기 시작하였다.

즉위

1901년 3월 29일, 부왕 예조가 붕어하자 태자는 연호를 주역에 나오는 합홍대 품물광(含弘大 品物咸. 품은 것이 크고 넓으니, 만물은 모두 형통하다.)이라는 구절에서 따온 '광형'으로 정하고 즉위했다.

광종이 보위에 올랐을 때 신생 제국인 조선은 혼란스러웠다. 권비의 난을 제압하는 과정에서 조일 연합군과 러시아군은 만주를 갈라먹으며 대치했고 만주의 의화단은 국경을 넘어 조선을 약탈하려 시도하였고, 헌법 제정 논의가 대두되었다.

광종은 차근차근 엉킨 실타래처럼 꼬인 일들을 해결하기 시작했다. 군을 동원하여 남만주를 점령하는 한편 경찰과 헌병을 동원하여 만주평정작전을 개시, 광종실록에 따르면 권비나 청군 패잔병이 잔존하는 것으로 의심되던 부락을 완전 초토화 시키켰다고 하며[1] 이러한 광종의 신중하지만 과감한 통치는 예조 사후 비통과 불안으로 얼룩진 조선 땅을 안정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군신

권비의 난이 끝나고도 조일 양국간의 유착은 더욱 공고해졌다. 1902년 영일동맹 채결과 동시에 조선은 일본과 조일동맹을 채결하여 반러연대를 천명하였고, 1904년 양국이 기습적으로 제물포 앞 바다에서 러시아 순양함에 선제공격을 가하며 광형노국전쟁이 시작되었다.

광종은 원수부와 조정을 서경 행궁으로 이전시키며 친정에 나섰다. 조일연합군은 육상과 해상에서 분전을 거듭하였고, 마침내 1904년 5월 28일 조일연합함대가 대마도에서 러시아 발트함대를 격파하며 조선은 일약 일본 다음가는 동아시아의 패자로 부상하였다. 동시에 친정을 하며 군을 이끈 광종은 광개토대왕과 부왕 예조를 이어 군신의 지위에 올랐고, 부왕에게 물려받은 막강한 왕권은 그야말로 하늘을 찔렀다.

군민공치의 길

1905년 승전 이후 광종은 열렬한 환영을 받으며 한성으로 환도했다. 환도 직후 입헌정체를 선포, 그동안 미루어왔던 대조선국 국제를 반포하고 중추원을 개회하였다.

중추원 개회 이후 광종은 예조 시절의 전제군주제에서 프로이센식 입헌군주정으로 전환을 도모하였다. 이 시기의 군민공치를 광형민본운동이라고 부른다.

광형민본운동의 기간은 주로 1차 세계대전 직후부터 대공황 직후를 의미하는데, 이 시기 조선은 시베리아 원정으로 연해주의 일부 지역을 점령하고 노령제민족연합정부를 설립하며 연해주에 소련을 막을 방파재를 건설하였다. 또한 1차 대전의 전쟁 특수와 전후 광란의 20년대에 편승한 조선은 유래없는 대호황의 길을 걸었다. 이 시기를 가리켜 광형성대라고 부른다.

갈대보다는 소나무를

광형성대는 1920년대 말이 되자 서서히 그 끝을 보이기 시작했다. 1929년 미국에서 시작된 대공황은 일본을 거쳐 대한제국으로 번지기 시작했다. 광종은 의정부의 경제 대응 미진을 질타하며 개각을 단행, 교체하는 한편 노령에서 성과를 거둔 소련식 중공업화 정책을 도입하고, 이를 주도한 노령관료들을 적극 등용하여 국가주도적 경제개발에 나선다.

1931년 조선은 영국에 이어 금본위제를 정지하고, 원화 약세와 함께 무역을 확대하고 종속지역과의 무역을 급속히 확대함으로써 대공황 이전의 GDP 수준을 회복하는 한편 자력갱생 운동을 전개하여 경제블럭을 공고히 하였지만, 1940년대까지 경제 침체를 피할 수 없었다.

대공황 당시 경제적 혼란은 영토 팽창과 극우, 극좌 정치의 득세를 야기했다. 이 당시 광종은 이러한 극단주의와 팽창주의적 시도를 무지막지하게 진압했다. 혹세무민을 금한다는 명분하에 사회계몽법을 통과시켜 극좌, 극우 언론 세력을 정간시키고, 소요진압법을 제정해 중추원 의관의 면책특권을 박탈하고 의금부가 난동단체로 정한 단체는 모조리 해산하는 광형옥사로 가까스로 극단주의 세력을 거세하는데 성공했다.

이외 함께 조선령 만주를 제외한 남만주 일대에 영향력을 증가시키는 귀환운동을 통해 남만주에서의 영향력을 증대시키며, 노령 정부를 교체하여 국민투표를 통해 솔빈번을 세우고, 위성국화 하며 국내의 팽창주의자들의 불만을 달래고 영토 확장론을 일축했다.

사망

광종이 어지간하면 내각에서 처리하던 일도 편집증적으로 자신이 전부 처리하였기에 광종의 몸은 엉망이었다. 게다가 1930년대, 대공황으로 인한 경제 위기와 정치 혼란, 사회 문제들을 자신이 일일히 수습하며 광종의 건강은 크게 악화되었으며, 말년엔 순현인황후와의 다툼으로 육체적으로 한계에 다다랐다. 그러나 이런 상황에서 더더욱 정무에 열을 올렸다.

결국 1943년 10월 11일 인정전에서 집무를 보던 중 쓰러졌고, 10월 14일 다시 정신을 차린다. 그러나 정신을 차리자 마자 다시 밀린 정무를 보며 이미 쇠약해진 몸이 더욱 위독해져 10월 17일 다시 쓰러져 10월 18일 오후 3시경 창덕궁 대조전에서 향년 64세를 일기로 황후와 황태자를 비롯한 황족들이 보는 앞에서 붕어한다.

여담

가계

  • 증조부 : 완성군 희(完城君 爔, 1771 ~ 1830)
  • 증조모 : 남양군부인 홍씨(南陽郡夫人 洪氏, 1772 ~ 1808)
    • 조부 : 완창대원왕 시인(完昌大院王 時仁, 1805 ~ 1843)
    • 조모 : 경주대원비 김씨(慶州大院妃 金氏, 1816 ~ 1863)
      • 부친 : 예조 교(藝祖 㚁, 1842 ~ 1901)
      • 모친 : 문성왕후 김씨(文成王后 金氏, 1837 ~ 1888)
  • 왕후 : 원명왕후 홍씨(元明王后 洪氏, 1883 ~ 1932)
    • 장남 : 신종 숙(神宗 淑), 1916 ~ 1978)
      • 며느리 : 원명왕후 홍씨(元明王后 洪氏, 1913 ~ 1992)
    • 차남 : 강친왕 만(康親王 滿), 1919 ~ 1988)
      • 며느리 : 강친왕비 안씨(康親王妃 安氏, 1919 ~ 1990)
    • 삼남 : 금친왕 주(錦親王 瀯), 1921 ~ 1998)
      • 며느리 : 금친왕비 민씨(錦親王妃 閔氏, 1923 ~ 19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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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이때 초토화된 부락에는 조선의 이민자들이 대규모로 이주하여 만주의 새로운 지배층으로 부상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