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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중 1번 항목에 대해서는 영국이 강력히 반발하면서 끝내 묵살되었지만, 나머지 항목에 대해서는 열강들이 동의하면서 대한국은 샨둥 반도의 영향력을 확보하게 되었다. | 이 중 1번 항목에 대해서는 영국이 강력히 반발하면서 끝내 묵살되었지만, 나머지 항목에 대해서는 열강들이 동의하면서 대한국은 샨둥 반도의 영향력을 확보하게 되었다. | ||
===1922년. | ===1922년. 한소조약=== | ||
러시아 제국이 공산화되면서, 소비에트가 들어섰다. 새로 들어선 소비에트 정권은 대한국의 만주에 대한 팽창에 굉장히 회의적이었고, 몽골과 연해주에 대한 간섭을 우려하였다. 특히 연해주에 있는 한국인들에 대한 탄압이 현지에서 빈번히 발생하면서 대한국은 소비에트와의 새로운 관계를 모색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한국 입장에서도 중국과의 전선이 이미 충분히 긴데, 소련과의 전선까지 맞닿게 되면 굉장한 군사적 부담이 있었을 것이었다. 한국은 적백내전이 완전히 종료되는 1922년까지 소련과의 지속적인 대화를 유지하다가 마침내 [[ | 러시아 제국이 공산화되면서, 소비에트가 들어섰다. 새로 들어선 소비에트 정권은 대한국의 만주에 대한 팽창에 굉장히 회의적이었고, 몽골과 연해주에 대한 간섭을 우려하였다. 특히 연해주에 있는 한국인들에 대한 탄압이 현지에서 빈번히 발생하면서 대한국은 소비에트와의 새로운 관계를 모색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한국 입장에서도 중국과의 전선이 이미 충분히 긴데, 소련과의 전선까지 맞닿게 되면 굉장한 군사적 부담이 있었을 것이었다. 한국은 적백내전이 완전히 종료되는 1922년까지 소련과의 지속적인 대화를 유지하다가 마침내 [[한소조약]]을 체결하였다. | ||
하지만, 이 | 하지만, 이 한소조약은 대한국과 일본국 간의 화해 스탠스를 다시 한번 무너뜨리는 계기가 되었다. 한국이 [[일본의 시베리아 개입]]에 대해 동의하지 않는다는 의견을 보인 것이다. 당시 일본은 백군 편을 노골적으로 들면서 사할린 섬과 동시베리아를 장악하려는 시도를 하고 있었다. 그런데 한국은 오히려 소련의 연해주와 극동 지역 영토를 인정하면서 한국, 소련과 일본이 서로 군사적 충돌을 피하는 것을 지지한다고 선언한다. 일본은 이에 대해 한국의 간섭이 도를 넘었다면서 맹렬히 한국을 비난하였다. | ||
더욱이 이 사건은 군부와 강경파의 분노를 샀는데, 연해주를 고토로 인식하고 있었던 와중에 발해의 활동 무대였던 연해주를 통채로 소련의 영토로 인정해버린 것 자체가 국치스러운 일이라며 통탄해했기 때문이다. 또한 소련은 공산주의 정권이었기 때문에 그러한 정권과 합의하는 것이 과연 올바른 일이었나는 질문에 대해서도 회의적이었다. 이러한 외교를 주도한 인물이 심지어 순종과 영친왕이었기 때문에 중추원은 수차례 마비되었고, 의친왕은 이를 아득바득 갈게 된다. | 더욱이 이 사건은 군부와 강경파의 분노를 샀는데, 연해주를 고토로 인식하고 있었던 와중에 발해의 활동 무대였던 연해주를 통채로 소련의 영토로 인정해버린 것 자체가 국치스러운 일이라며 통탄해했기 때문이다. 또한 소련은 공산주의 정권이었기 때문에 그러한 정권과 합의하는 것이 과연 올바른 일이었나는 질문에 대해서도 회의적이었다. 이러한 외교를 주도한 인물이 심지어 순종과 영친왕이었기 때문에 중추원은 수차례 마비되었고, 의친왕은 이를 아득바득 갈게 된다. | ||
== 순종(1924~1926) == | == 순종(1924~1926) == | ||
===생애=== | |||
순종은 고조의 적장자로 태어나 일찍이 황태자로 책봉되었다. 고조가 대한국제를 선포하고 조선의 국호와 국가체제를 개편한 뒤, 순종은 자연스럽게 대한국 황실의 정통 계승자로 여겨졌다. 그러나 그의 위상은 결코 안정적이지 않았다. 고조 말기 대한국은 거문도 조약 이후의 외교적 후유증, 석도 분쟁, 제1차 간도전쟁, 대마도 해전, 중추원 폭탄 테러, 용산대화재 등 연이은 사건으로 크게 흔들리고 있었다. 이 과정에서 군부와 중추원의 발언권은 점차 커졌고, 고조의 권위는 눈에 띄게 약화되었다. | |||
순종은 황태자로서 정통성은 분명하였으나, 대중적 인기는 낮았다. 평생동안 후사가 없었고, 건강 또한 좋지 않았다. 이 때문에 조정 안팎에서는 그가 격변하는 대한국의 정국을 감당할 수 있는지에 대한 의문이 제기되었다. 심지어 일부에서는 순종의 판단력과 국정 수행 능력을 문제 삼으며 장애 의심설까지 퍼뜨렸다. 이러한 소문은 사실 여부와 무관하게 황태자의 권위를 크게 약화시켰다. | |||
고조는 한때 왕실을 보존하기 위해 순종에게 양위하는 방안을 검토하였다. 그러나 명성황후와 조정은 위와 같은 이유로 순종에 대한 양위를 강하게 만류하였다. 순종의 낮은 인기와 건강 문제, 후사 부재가 명백한 상황에서 고조가 곧바로 양위할 경우, 오히려 황실 전체가 더 큰 정치적 위기에 빠질 수 있었기 때문이다. 흥미롭게도 고조에게 비판적이던 군부와 강경파마저 순종의 조기 즉위에는 반대하였다. 이들은 고조의 통치에 불만을 품고 있었지만, 순종이 군부와 중추원, 각 정치 계파를 통제할 수 있는 인물이라고 보지는 않았다. | |||
결국 고조는 양위 대신 대리청정을 선택하였다. 명목상으로는 순종에게 대리청정을 맡기는 형식을 취하였으나, 실제로는 순종의 건강과 정치적 역량에 대한 우려가 컸기 때문에 의친왕과 영친왕 중 한 명에게 군무와 외무를 보좌하게 하는 방안이 논의되었다. [[의친왕]]은 [[신북벌론]]을 주장하며 강경한 반일/반영정책 및 대륙 진출 노선을 보였고, [[영친왕]]은 영국과 미국, 일본과의 관계 악화를 우려하는 [[북벌신중론]]과 [[대일조정론]]을 내세웠다. 고조는 군부의 반발을 고려하여 의친왕을 전면에 내세웠고, 이때부터 의친왕은 대한국 정국에서 본격적인 실권자로 부상하였다. | |||
순종의 입지는 이후에도 계속 약화되었다.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고 대한국이 협상국 측으로 참전하면서, 대륙 정책과 중국 문제는 대한국 정치의 핵심 현안이 되었다. 이 과정에서 의친왕은 군부와 강경파의 지지를 받았고, 영친왕은 상대적으로 신중한 외교 노선을 대표하였다. 순종은 이들 사이에서 명목상 황태자이자 대리청정의 중심 인물로 남아 있었으나, 실제 정국을 주도하지는 못하였다. 1915년 이후 위안스카이의 제정 시도와 호제전쟁, 북양정부와의 충돌, 제2차 간도전쟁이 이어지면서 순종의 존재감은 더욱 흐려졌다. 영친왕이 중국 전선과 외교 협상에서 일정한 성과를 거두자, 명성황후는 순종을 종용하여 영친왕을 차기 계승 구도의 중심에 세우려 하였다. 이는 의친왕과 명성황후, 의친왕과 영친왕 사이의 관계를 결정적으로 악화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 |||
1922년 한소협약은 순종에게도 큰 정치적 부담이 되었다. 대한국은 소련과의 전선 확대를 피하기 위해 협약을 체결하였고, 연해주와 극동 지역에 대한 소련의 영유를 사실상 인정하였다. 그러나 군부와 강경파는 이를 고토를 포기한 굴욕 외교로 보았다. 특히 연해주를 발해의 활동 무대이자 장차 회복해야 할 지역으로 인식하던 세력에게 한소협약은 받아들이기 어려운 타협이었다. 이 협약을 주도한 인물들이 순종과 영친왕으로 인식되면서, 중추원은 여러 차례 파행되었고 의친왕은 명성황후, 순종 및 영친왕 계열에 대한 적개심을 더욱 키우게 되었다. | |||
고조가 붕어한 뒤 순종은 마침내 즉위하였다. 그러나 그의 치세는 오래가지 못했다. 이미 대한국의 실권은 상당 부분 군부와 중추원, 그리고 의친왕에게 넘어가 있었고, 순종은 즉위와 동시에 거대한 정치적 압박에 직면하였다. 그는 황실의 정통성을 회복하고 각 계파를 화해시키려 하였으나, 강경유학파, 자유주의파, 온건개혁파, 황당파, 군부, 영친왕계 보수파 사이의 갈등은 순종 개인이 감당하기에는 지나치게 복잡하였다. 더군다나 순종은 정치적 스트레스와 병약한 체질로 인해 즉위 후 급격히 건강이 악화되었고, 끝내 즉위 2년 만에 그는 병으로 사망하였다. | |||
순종의 죽음은 대한국 황실의 정통 계승 구도를 다시 흔들었다. 순종의 애정을 받았던 영친왕과 일부 보수파는 의친왕의 부상을 막고 왕실 정통성을 회복한다는 명분으로 반란을 일으켰으나, 이미 실권을 장악한 군부에 의해 빠르게 진압되었다. 이 사건 이후 의친왕은 군부와 중추원의 지지를 받아 즉위하였고, 그가 곧 [[신조]]이다. | |||
===업적=== | |||
순종의 업적은 재위 기간이 짧고 실권이 제한적이었기 때문에 크지 않다. 그러나 완전히 무의미한 군주였다고 보기는 어렵다. 첫째, 순종은 고조 말기의 양위 위기를 대리청정 체제로 전환시키는 데 일정한 역할을 하였다. 고조가 곧바로 양위하였다면 황실은 순종의 낮은 인기와 건강 문제로 더 큰 혼란에 빠졌을 가능성이 컸다. 순종은 명목상 대리청정의 중심에 서면서, 고조의 권위와 차세대 권력 구조 사이를 연결하는 완충 역할을 하였다. 둘째, 순종은 영친왕을 통해 대외 신중론을 제도권 안에 유지하였다. 의친왕과 군부가 신북벌론과 대륙 팽창을 강하게 주장하는 상황에서, 순종과 영친왕 계열은 영국·미국·일본과의 관계 악화를 우려하며 북벌신중론을 제기하였다. 이는 대한국 내부에서 군부 강경론만이 유일한 선택지가 아니었음을 보여주는 중요한 흐름이었다. 셋째, 한소협약 체결 과정에서 순종은 전선 확대를 피하는 현실적 외교 노선을 지지하였다. 이 협약은 국내적으로는 큰 반발을 불러왔으나, 대한국이 만주와 중국 전선에 이어 소련과도 즉각 충돌하는 상황을 피하게 만든 조치였다. 군부와 강경파는 이를 굴욕으로 보았지만, 외교적으로는 대한국이 과도한 다면전쟁에 빠지는 것을 지연시킨 선택이었다. | |||
순종은 즉위 후 경제의 안정과 동시에 황실 정통성을 유지하려 노력하였다. 비록 실패로 끝났지만, 그는 의친왕과 영친왕, 중추원과 군부, 우파와 좌파 사이의 균형을 안정적으로 잡으려 하였다. 이는 대한국이 신조 시대의 군국주의로 급격히 넘어가기 전, 황실 중심의 조정 정치가 마지막으로 시도된 사례였다. 그러나 이러한 노력은 대부분 제한적이고 방어적인 성격을 가졌다. 순종은 새로운 국가 비전을 제시하지 못했고, 군부와 중추원의 성장도 막지 못했으며, 영친왕과 의친왕의 경쟁을 수습하지도 못했다. 따라서 후대에는 순종의 업적을 다음과 같이 정리한다. 그는 고조 말기의 붕괴를 잠시 늦추었고, 영친왕을 통해 온건 외교 노선을 유지하려 했으며, 한소협약으로 소련과의 즉각적 충돌을 피했다. 그러나 그는 대한국의 권력 중심이 왕실에서 군부와 중추원으로 이동하는 흐름을 막지 못했고, 결국 그의 죽음과 영친왕 반란의 실패는 신조 시대의 개막을 가능하게 하였다. | |||
===평가=== | |||
순종은 대한국사에서 가장 비극적인 과도기 군주 가운데 하나로 평가된다. 그는 정통성 면에서는 명백한 고조의 후계자였으나, 정치적 능력과 건강, 대중적 지지 면에서는 취약하였다. 고조 말기부터 이미 군부와 중추원이 성장하고 있었고, 대한국은 대외 팽창과 전쟁, 내부 계파 갈등으로 심각하게 흔들리고 있었다. 순종은 이러한 상황을 주도적으로 해결할 만한 정치적 기반을 갖추지 못했다. 당대의 평가는 대체로 부정적이었다. 군부와 강경파는 순종을 유약한 군주로 보았고, 한소협약과 영친왕계 외교 노선을 굴욕적 타협으로 비판하였다. 자유주의파와 강경파는 순종이 의회 권한 확대를 명확히 추진하지 못했다고 비판하였으며, 보수파 마저는 그가 황실의 권위를 충분히 세우지 못했다고 보았다. 반면 온건개화파는 순종을 급격한 군국주의화를 막을 수 있었던 마지막 완충자로 평가하였다. | |||
후대의 평가는 조금 더 복합적이다. 순종은 무능한 군주라기보다는, 이미 군부와 중추원, 왕실 내 계파가 지나치게 강해진 상황에서 즉위한 약한 군주였다고 보는 시각이 많다. 그는 고조의 외교적 실패와 신조의 군국주의 사이에 끼어 있었고, 자신의 독자적 시대를 열기에는 주어진 시간이 너무 짧았다. 특히 즉위 2년 만의 병사와 그 직후 발생한 영친왕 반란은 순종 개인의 실패라기보다, 대한국 황실 계승 질서가 이미 심각하게 균열되어 있었음을 보여주는 사건으로 해석된다. | |||
다만 순종에게도 한계는 분명하였다. 그는 의친왕과 영친왕 사이의 경쟁을 조정하지 못했고, 명성황후와 영친왕을 중심으로 한 보수·외교파와 군부 강경파의 대립을 완화하지 못했다. 또한 한소협약을 통해 소련과의 전면 충돌을 피한 것은 현실적 선택이었으나, 국내 여론과 군부 정서를 설득하는 데 실패하였다. 이 때문에 순종 치세는 대한국이 온건한 외교국가로 남을 마지막 가능성이 사라지고, 신조의 군국주의적 팽창으로 넘어가는 짧은 과도기로 평가된다. 요컨대 순종은 스스로 대한국을 크게 변화시킨 군주라기보다, 고조가 남긴 불안정한 근대국가와 신조가 열어젖힌 팽창적 제국 사이에 놓인 비극적 연결고리였다. 그의 짧은 치세는 대한국 황실의 전통적 정통성이 더 이상 국가를 통합하기에 충분하지 않았음을 보여주었다. | |||
== 신조(1926~1955) == | == 신조(1926~1955) == | ||
2026년 4월 27일 (월) 23:55 기준 최신판
대한국 역대 국왕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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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요
대한국 (헤르메스)의 역사를 서술한 문서
대한국의 역사는 조선 후기의 세도정치가 문조(효명세자) 대에 결정적으로 붕괴하고, 이후 의종(철종의 이복형이자 사도세자의 증손자), 철종 대를 거치며 왕실 중심의 개혁 체제가 수립되는 과정으로 요약된다. 이 세계관에서 대한국의 형성은 단순한 국호 변경이나 근대화의 결과가 아니라, 순조 말부터 이어진 왕권 강화, 외척 숙청, 붕당 질서의 소멸, 지방 행정 개혁이 장기적으로 축적된 결과물로 이해된다.
특히 문조의 즉위와 김좌근의 난, 의종의 삼정 개혁, 철종의 개혁 완성과 같은 일련의 사건은 기존 조선 후기 정치 구조를 근본적으로 뒤흔들었으며, 훗날 대한국이 성립할 수 있는 정치적 기반이 되었다.
배경
효명세자의 급사가 없다
| 세자가 환후가 있었다. 여러 신하가 모두 놀라 문안을 청하니, 상이 근심하여 밤낮으로 의원을 들게 하였다.
며칠 지나 세자의 병세가 점차 나아지니, 상이 크게 기뻐하며 이르기를, “세자는 나라의 근본이요 종사의 장래이다. 하늘이 아직 우리 사직을 버리지 아니하였으니, 경들은 마땅히 마음을 합하여 보필하라.” 하였다. 사신은 논한다. 세자가 일찍부터 총명하고 기국이 넓어, 서책을 강론함에 있어 옛일에만 머물지 아니하고 사방의 형세와 백성의 생업에까지 뜻을 두었다. 이때 병환이 깊었다가 다시 나았으니, 조야에서 모두 종사의 다행으로 여겼다.《순조실록》 |
효명세자가 생존했다는 점은 이 세계관 전체의 가장 중요한 분기점이다. 실제 역사에서 효명세자의 급사는 순조 말 정국을 다시 외척 중심으로 기울게 한 결정적 원인이 되었으나, 이 세계관에서는 효명세자가 끝내 살아남아 순조 사후 즉위하였고, 그 결과 조선 후기 정치사는 크게 달라지게 된다. 특히 비록 안동 김씨와 외척 관계에 있으나, 세도가문과 국왕의 병존을 용납하지 않던 그의 정치 성향은 훗날 김좌근의 난과 세도정치 붕괴의 직접적인 원인이 되었다.
아편전쟁의 전말을 일찍이 알게 되다
효명세자는 1834년 순조의 승하 이후 즉위하여 문조가 되었고, 1839년 1차 아편전쟁의 전말을 접한 뒤, 청조차 바다 너머의 세력에게 제압당할 수 있다는 사실에 강한 위기감을 느끼게 되면서 재위 초부터 청과 서양 열강의 동향에 깊은 관심을 보였다. 다만 문조는 이를 곧장 전면적인 개혁으로 연결하지는 못했고, 대신 국방과 군정, 재정과 기물의 정비를 통해 왕권을 강화하고 국가 기강을 추스르는 방향으로 대응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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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이 승정원에 전교하기를, “청국은 대국이라 일컬어 오래도록 천하의 중심을 자처하였으나, 이제 멀리 바다 밖 오랑캐의 군선에 제압당하였다 하니, 이는 비록 남의 일이로되 또한 우리를 위한 경계이다. 나라를 지키는 도는 글만 숭상하고 형식만 지키는 데 있지 아니하며, 백성을 기르고 군정을 바로잡으며 기물을 익히는 데 있다. 비록 갑자기 옛 제도를 바꿀 수는 없으나, 마땅히 시무를 널리 구하여 후환에 대비케 하라.” 하였다. 이에 비변사와 호조·병조에 명하여 청국과 서양 각국의 형세를 상세히 탐문하게 하고, 바닷길과 화포, 군정의 폐단을 아울러 계문하게 하였다. 사신은 논한다. 상이 중국의 패함을 듣고 깊이 경계하여, 마침내 시무를 물어 기강을 정돈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조정의 의논이 오래도록 갈라졌으니, 혹은 예를 지켜 오랑캐를 물리쳐야 한다 하고, 혹은 기예를 배워 변방을 굳게 해야 한다 하였다. 이때 비로소 조정 안에 신구의 논의가 뚜렷해졌다.《문조실록》 |
이 시기 문조는 흔히 개혁군주로 평가되기보다는, 외세의 위협을 감지하고도 먼저 왕권과 군정의 정비를 우선시한 군주로 이해된다. 훗날 의종 대의 적극적 개혁이 가능해진 배경은 이미 문조 대에 외부 위협을 인식하고 내부 질서 정비의 필요성이 제기되었기 때문이다.
김좌근의 난으로 몰락한 신 안동 김씨
김조순은 뛰어난 인품으로 조정의 주목을 받았으나, 동시에 조선 후기 세도정치의 기반을 연 인물이기도 했다. 문조는 순원숙왕후의 장자로서 혈연상 안동 김씨와 밀접하였으며, 즉위 초기에는 이들을 완전히 배척하지도 않았다. 오히려 안동 김씨를 우대하는 모습도 보였고 왕실과 안동 김씨 일가 간 적절한 균형을 도모하며 왕실 중심의 정국을 만들고자 하였다. 다만 문조는 안동 김씨 일가가 주요 권력을 모두 나눠가지려는 모습을 경계했으며 건강이 좋지 않아 무기력했던 순조와 달리 왕권 강화의 욕도 강했기 때문에 외척을 국왕 아래로 확실히 두려 했다.
이 과정에서 김조순의 아들인 김좌근은 점차 조정의 실권을 장악하며 세도정치의 정점에 가까운 인물로 부상했다. 그는 영의정을 여러 차례 역임할 정도로 위세가 대단하였으나, 이 세계관에서는 헌종이 즉위하지 못하고 문조가 재위하고 있었기에 실제 역사처럼 안정적으로 외척 정권을 굳히지는 못했다. 문조는 김좌근의 권세를 경계하여, 영의정에 오르려는 시도를 제어하고 그를 우의정에 머물게 하는 등 노골적으로 견제하였다.
이에 분노한 김좌근은 1849년 마침내 반란을 일으켰다. 그 명분은 순조의 뜻에 따라 문조의 아들인 이환(헌종)이 즉위해야 했으나, 문조가 이를 가로채어 왕위를 찬탈하였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의 명분부터가 몹시 불안정하였다. 부왕인 문조가 엄연히 살아 재위하고 있었고, 이환 또한 아직 나이가 어렸으며 정치적 의지도 뚜렷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결과적으로 이 난은 “적통 회복”이 아니라 외척의 사욕으로 비쳐지게 되었다.
또한 순원숙왕후는 친정인 안동 김씨의 안위를 염려하기는 했으나, 김좌근과 이를 지지하는 세력의 역모를 지지하지 않았다. 대다수가 풍양 조씨와 반남 박씨, 그리고 벽파로 구성된 지방관료들 역시 중앙 정부의 장악을 시도하려는 김좌근의 독주를 견제하는 쪽에 섰다. 결국 반란은 전국적인 호응을 얻지 못한 채 빠르게 진압되었고, 김좌근은 대역죄로 처단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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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의정 김좌근이 스스로 병권과 정권을 믿고 사사로이 무리를 모아 불궤를 도모하였다. 그 무리가 몰래 말하기를, “선왕의 뜻은 본래 동궁을 높이고자 함에 있었는데, 조정이 이를 그르쳐 대통이 어지러워졌다.” 하며 허망한 말을 지어내어 인심을 선동하였다. 상이 듣고 크게 노하여 이르기를, “신하가 군부를 속이고 종사를 핑계하여 사욕을 이루려 하니, 이는 곧 역적이다. 비록 명분을 빌린다 하나, 실상은 나라를 어지럽히려 함일 뿐이다.” 하였다. 이에 훈련도감과 금위영에 명하여 도성의 문을 굳게 지키게 하고, 각도의 감사와 병사에게 유시를 내려 역당을 잡게 하였다. 풍양 조씨와 반남 박씨의 여러 신하가 모두 군령에 응하여 역당을 토벌하니, 김좌근의 무리가 미처 크게 일어나지 못하고 흩어졌다. 김좌근은 마침내 사로잡혔고, 국문 끝에 대역죄로 논하여 스스로 목숨을 보전하지 못하였다. 그 일가 가운데 역모에 가담한 자는 법에 따라 죄를 정하고, 연좌할 만한 자는 귀양보냈다. 다만 왕비의 친가와 갈린 여러 지파 중 죄가 없는 자는 함부로 확대하지 말라 명하였다. 사신은 논한다. 안동 김씨가 여러 대에 걸쳐 권세를 잡아 조정을 전횡하더니, 마침내 한 사람의 사심이 온 문벌의 재앙이 되었다. 김좌근이 명분을 빌렸으나, 천명이 사람에게 있지 아니하고 종사가 사사 집안의 물건이 아님을 알지 못하였다. 이 난이 평정된 뒤로 벌열의 기세가 크게 꺾였다.《문조실록》 |
이 난의 평정 이후 문조는 안동 김씨를 전면 멸문시키지는 않았다. 순원숙왕후의 존재와 왕실의 체면을 고려하여, 핵심 가담 세력은 처벌하되 비연루 지파는 유배, 좌천, 지방관 전출 등으로 정리하였다. 그 결과 안동 김씨는 중앙 정계의 패권을 상실했고, 풍양 조씨 역시 그 공백을 차지하지는 못하였다. 이때부터 조선 후기의 세도정치는 사실상 종언을 맞이하였으며, 기존 붕당 질서 또한 급속히 해체되기 시작했다.
양자로 입적한 회평군
왕세자 이환(문헌세자, 실제 역사에서는 헌종)이 급사하자, 왕실은 다시 후계 문제에 직면하였다. 이미 왕가의 남계가 사실상 씨가 말라버린 상황에서, 사도세자의 서장자 은언군의 손자이자 전계대원군의 적장남인 회평군이 문조의 양자로 입적되어 왕세자가 되었다. 그는 비록 방계 왕손이었으나, 종실 가운데 인망이 두텁고 기존 세도가문과 일정한 거리를 두고 있었기에 새로운 대통의 적임자로 여겨졌다.
훗날 철종이 되는 이원범의 전언에 따르면, 회평군은 온화한 성품과 훈훈한 외모를 지녔으며 강화도에서의 곤궁한 유배 생활 속에서도 가족을 위해 헌신하며 애민의식 또한 남달랐다고 한다. 이에 따라 즉위 후 시호 역시 백성을 옳고 이롭게 한다는 뜻의 ‘의(義)’를 받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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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자 환(奐)이 훙서하였다. 상이 오래도록 슬퍼하여 정사를 돌보지 못하였다. 대신과 예조가 함께 아뢰기를, “저하께서 먼저 서거하여 대통이 비게 되었으니, 종사를 위하여 마땅히 종친 가운데 덕망 있는 이를 택하여 계통을 잇게 하소서.” 하였다. 상이 한참 뒤에 이르기를, “은언군의 손자인 회평군은 비록 방계이나 사람됨이 어질고 삼가며, 일찍이 곤궁한 처지에 있으면서도 원망으로 뜻을 잃지 아니하였다. 종사를 잇게 함은 사사 은혜가 아니라 사직을 위한 일이다.” 하였다. 이에 예관으로 하여금 길일을 택하게 하고, 회평군을 왕자의 예로 입궐시켜 대통을 이을 양자로 삼게 하였다. 조정 신하 가운데 더러 의논이 있었으나, 상이 친히 전교하여 이를 그치게 하고 이르기를, “큰일은 정통을 세우는 데 있지, 사사로운 친소를 가리는 데 있지 아니하다.” 하였다. 사신은 논한다. 회평군은 종실의 먼 갈래에서 나왔으나, 어려서 곤궁함을 겪어 민간의 고달픔을 알았다. 그가 대통을 잇게 되자 사람들은 혹 놀라고 혹 기뻐하였다. 놀란 자는 예전의 관례를 들었고, 기뻐한 자는 새 임금이 백성의 고통을 알리라 여겼다.《문조실록》 |
회평군의 입적과 즉위는 정치적으로도 큰 의미가 있었다. 그는 사도세자의 자손이자 방계 왕손으로서, 기존 시파·벽파의 정통성 논리를 한 번 더 흔드는 존재였다. 이 때문에 이 세계관에서는 의종의 즉위를 계기로 붕당정치가 단순히 약화된 정도를 넘어, 정치 운영 원리로서 사실상 불가해진 것으로 해석한다.
또한 의종은 문조와 달리 보다 강한 개혁 의지를 보인 군주로 설정된다. 다만 그 개혁은 갑작스러운 신분제 해체나 전면적 사회혁명이라기보다, 세도가문이 몰락한 뒤 비교적 정돈된 정국을 배경으로 삼정 문란 시정, 지방 행정 정비, 실무형 관료층 확대를 추진한 방향에 가까웠다. 즉 의종은 기존 조선을 뒤엎은 군주라기보다, 문조가 정리한 정치 질서 위에서 실제 국가 운영을 바로잡으려 한 군주였다.
지방수령의 반발을 잠재우다
의종은 즉위 후 이원범(훗날 철종)과 삼정이정청을 설치하여 전정, 군정, 환곡의 폐단을 조사하고, 지방 장부를 다시 점검하게 하였다. 이 과정에서 일부 수령과 향리들은 장부를 숨기거나 군포 수를 속이는 등 저항하였으나, 문조 대 숙청 이후 지방 세력이 독자적으로 거대한 반대 세력을 이루기는 어려웠다. 또한 안동 김씨 잔존 세력과 풍양 조씨 모두 왕실의 감시 아래 있었기에, 의종의 개혁은 예상보다 큰 저항 없이 추진될 수 있었다.
| 상이 삼정의 폐단을 개혁하고자 하여 삼정이정청을 두고 각도에 영을 내리니, 여러 고을 수령 중에 이를 달가워하지 아니하는 자가 많았다.
혹은 장부를 숨기고, 혹은 군포의 수를 속이고, 혹은 환곡의 실수를 사실대로 보고하지 아니하였다. 상이 비국에 전교하기를, “백성의 고혈을 짜내어 관청의 창고를 채우고, 그 허실을 가려 조정의 명을 거역하니, 이는 법을 업신여기고 백성을 해치는 일이다. 수령이 백성을 다스리지 아니하고 도리어 좀먹는다면, 어찌 나라의 근본이 편안하겠는가.” 하였다. 이에 암행어사를 여러 도에 나누어 보내고, 수령의 치적을 다시 상고하게 하였다. 또 각 고을의 장부를 호조와 선혜청에 거듭 대조하게 하여, 감춘 곡식과 거짓 군액을 적발하였다. 탐학이 심한 자는 파직하고, 죄상이 큰 자는 국문하였으며, 백성에게 폐를 끼친 재물을 추징하여 돌려주게 하였다. 상이 또 이르기를, “법은 백성을 옭아매기 위해 있는 것이 아니라, 간사한 관리가 백성을 해치지 못하게 하기 위해 있는 것이다. 새 정사는 비록 민간을 번거롭게 할지라도, 그 근본은 오래도록 편안케 하려는 데 있다.” 하였다. 사신은 논한다. 의종이 즉위한 뒤 개혁을 서두르자 지방관들이 많이 두려워하고 원망하였다. 그러나 상이 흔들리지 아니하고 법을 분명히 하였으므로, 아전과 수령이 전처럼 방자하지 못하였다. 다만 여러 폐단이 오랜 세월 쌓인 것이므로 하루아침에 다 씻기지는 못하였다.《의종실록》 |
의종의 치세는 길지 않았으나, 이 시기의 개혁은 훗날 철종 대에도 그대로 이어지는 국가 재정비의 기초가 되었다. 따라서 대한국사에서는 문조를 세도정치를 무너뜨린 군주, 의종을 그 위에서 실질 개혁을 실행한 군주로 나누어 평가하는 시각이 강하다.
의종(1853~1859)
생애
의종은 사도세자의 서장자 은언군의 손자이자 전계대원군의 적장남인 회평군으로 태어났다. 본래 왕위 계승과는 거리가 먼 방계 왕손이었으나, 문조의 외아들인 이환(문헌세자)이 급사하고 왕가의 남계가 크게 줄어들면서 후계자로 부상하였다. 이후 문조의 양자로 입적되어 왕세자가 되었고, 1853년 문조가 붕어하자 즉위하였다.
의종의 즉위는 단순한 방계 계승 이상의 의미를 지녔다. 그는 사도세자의 자손이자 기존 세도가문과 직접적으로 얽히지 않은 인물이었기 때문에, 김좌근의 난 이후 붕괴한 세도정치 질서 위에서 왕실 중심 정국을 새롭게 정비할 적임자로 여겨졌다. 또한 강화도에서의 곤궁한 생활을 겪은 경험 때문에 민간의 삶과 지방의 현실을 비교적 잘 이해하는 군주로 인식되었다.
재위 기간은 길지 않았다. 그러나 즉위 직후부터 삼정 문란과 지방 행정의 혼란을 바로잡는 데 큰 관심을 보였으며, 이복동생인 이원범(훗날 철종)과 함께 국정을 정비하는 데 힘썼다. 다만 끝내 후사를 두지 못한 채 1859년 지병으로 붕어하였다. 그의 죽음은 다시 왕실의 계승 문제를 불러왔고, 결과적으로 이복동생 철종의 즉위로 이어지게 된다.
업적
의종의 가장 큰 업적은 세도정치 붕괴 이후의 공백 상태를 단순한 혼란으로 방치하지 않고, 이를 실질적인 국가 재정비의 계기로 삼았다는 데 있다. 문조가 김좌근의 난을 진압하여 왕권을 복구하고 세도가문을 해체하였다면, 의종은 그 위에서 실제 행정과 재정, 지방 질서를 손본 군주였다.
가장 대표적인 것은 삼정이정청의 설치와 운영이다. 의종은 전정, 군정, 환곡의 문란이 조선 후기 국가 기능을 좀먹고 있다고 보고, 이를 바로잡기 위한 조사와 정비를 본격화하였다. 각 도의 장부를 다시 점검하게 하고, 군포와 환곡 운영의 허실을 중앙에서 직접 대조하게 하였으며, 지방 수령과 향리의 탐학을 적발하는 데 힘썼다. 암행어사를 파견하고 감사 및 수령의 치적을 재평가한 것도 이 시기의 중요한 조치였다.
또한 의종은 단순히 부정을 처벌하는 데 그치지 않고, 세도가문이 몰락한 뒤 비어 있는 관료 체제를 왕실 중심으로 재편하였다. 문벌과 외척에 지나치게 기대지 않고, 실무 능력을 갖춘 급제자와 지방 행정 경험이 있는 인물들을 중용하여 국왕에 의존적인 관료층을 확대하고자 했다. 이로써 조정은 붕당과 외척이 이끄는 정치 구조에서 점차 국왕과 관료 기구 중심의 운영 체계로 이동하게 되었다.
대외적으로도 의종은 서양 열강과 외래 문물이 점차 조선에 접근하고 있다는 사실을 인식하고 있었다. 다만 그는 이를 곧장 전면적 개항이나 급격한 개화로 연결하지는 않았으며, 우선은 내부 질서를 정비하고 국가 운영 능력을 회복하는 것이 선행되어야 한다고 보았다. 따라서 의종의 치세는 흔히 근대화를 시작한 시대라기보다, 근대적 대응이 가능하도록 국가의 기초 체력을 회복한 시기로 평가된다.
무엇보다 의종은 사도세자의 자손이자 방계 왕손으로 즉위했다는 점에서, 기존 시파와 벽파 간 경계를 사실상 무력화하였다. 그의 즉위와 통치는 조선 후기 200여년 정치를 규정해온 붕당 질서를 더 이상 유효한 정치 원리로 작동하지 못하게 한 결정적 계기 가운데 하나로 여겨진다.
평가
문조가 무너뜨린 세도정치 이후의 권력 공백을 안정적으로 수습하고, 왕실 중심 정국을 실질적으로 정착시킨 군주로 평가된다. 삼정이정청 설치와 지방 행정 정비를 통해 조선 후기의 대표적 폐단이던 삼정 문란에 정면으로 대응하였다. 또한 세도가문과 붕당의 잔재를 억누르고, 국왕에 의존하는 실무형 관료층을 육성하려 했다는 점에서 행정군주적 면모가 강했다.
무엇보다 방계 왕손 출신이라는 한계를 오히려 장점으로 바꾸어, 민생과 지방 현실에 밝은 군주라는 이미지를 얻었으며, 시파·벽파의 오래된 의리 논쟁을 사실상 무의미하게 만들며, 조선 후기 정치 질서의 전환점을 이룬 왕으로 평가된다.
그러나 재위 기간이 너무 짧아, 그가 추진한 개혁이 완전히 제도화되기 전에 중단되었다는 한계가 있다. 개혁의 방향은 분명했으나, 전면적 군제 개편이나 대외 정책 전환까지 나아가기에는 시간과 기반이 부족했다. 지방수령과 향리의 폐단을 억제하는 데 일정한 성과를 거두었지만, 오랜 세월 누적된 구조적 문제를 근본적으로 해소하지는 못했다. 결정적으로 후사를 남기지 못해 다시금 왕실의 계승 문제를 불러왔고, 왕조의 불안정성을 완전히 해결하지는 못했다.
후대에는 훌륭한 방향을 제시했으나 너무 빨리 죽은 왕으로 기억되는 경우가 많아, 업적의 실질 규모에 비해 다소 이상화되는 경향도 있다.
철종(1859~1864)
생애
철종은 전계대원군의 셋째 아들이자 의종의 이복동생으로 태어났다. 본래 왕위 계승과는 거리가 있었으나, 1859년 의종이 후사 없이 붕어하면서 왕실은 다시 후계 문제에 직면하게 되었다. 당시 둘째는 사도세자의 가문주라는 이유로 보위에 오르는 것이 도리에 맞지 않는다는 반대가 있었고, 훗날 고조가 되는 흥선대원군의 아들 역시 아직 성년에 이르지 못하였으므로, 결국 셋째인 철종이 새로운 군주로 선택되었다.
철종의 즉위는 적통 계승의 이상형이라기보다, 당시 왕실이 취할 수 있었던 가장 현실적이고 무리 없는 방안에 가까웠다. 이미 문조 대의 왕권 강화와 의종 대의 행정 개혁을 거치며 세도가문과 붕당 질서는 상당 부분 붕괴한 상태였고, 순원숙왕대비 역시 특정 외척이나 문벌이 다시 정국을 독점하는 것을 원하지 않았기 때문에 철종의 즉위는 비교적 큰 혼란 없이 이루어졌다.
즉위 후 철종은 앞선 두 임금이 마련한 질서를 유지하는 데 힘썼다. 그는 강력한 개혁군주라기보다는, 이미 추진되던 개혁을 무리 없이 이어가고 다시 세도정치가 부활하지 않도록 왕실 중심의 정국을 붙드는 데 주력한 군주였다. 다만 의종과 마찬가지로 지병이 있었고, 재위 기간도 길지 못하였다. 결국 1864년 후사 없이 붕어하여, 왕조는 다시 한 번 중대한 계승 문제에 직면하게 되었다.
업적
철종의 가장 큰 업적은 의종 대에 추진된 개혁을 무리 없이 유지하는 데 그치지 않고, 이를 바탕으로 왕권 강화와 제도 정비를 계속 시도하였다는 점이다. 그는 세도가문이 몰락한 이후에도 중앙 정국이 다시 권신이나 외척에게 장악되지 않도록 여러 조치를 취하였으며, 그 대표적인 사례로 비변사를 혁파하고 의정부를 복원한 일을 들 수 있다. 이는 조선 후기 내내 비대해진 비변사의 권한을 억제하고, 보다 정규적인 관제 질서를 회복하려는 시도로 평가된다.
또한 철종은 의종 대부터 이어진 지방 행정 정비와 삼정 개혁의 흐름을 크게 뒤집지 않았으며, 삼정이정청을 비롯한 개혁 기구를 유지하여 전정·군정·환곡의 문란이 다시 악화되지 않도록 힘썼다. 지방 수령과 향리의 전횡을 억제하고 보고 체계를 지속적으로 점검함으로써, 세도정치 붕괴 이후 어렵게 회복된 국가 통제력을 보존하고자 하였다. 이와 함께 방계 왕손으로 즉위한 자신의 취약한 정통성을 보완하기 위해 종친 질서와 왕실 예법을 재정비하는 데도 주의를 기울였다.
정치적으로는 순원숙왕대비의 추천 아래 안동 김씨 일가와 혼인함으로써, 이미 몰락한 안동 김씨를 다시 세도정치의 중심으로 복귀시키지는 않되 왕실과의 관계를 완전히 단절하지도 않는 절충을 택하였다. 이는 안동 김씨 잔존 세력을 관리 가능한 범위 안에 묶어 두고, 동시에 새로운 외척 세력이 별도로 급성장하는 것을 방지하려는 계산도 담긴 선택으로 해석된다.
사회정책 측면에서는 철종이 노예 폐지를 공포하였다는 점이 자주 거론된다. 이는 신분제 전반을 단숨에 해체한 것은 아니었으나, 오랜 세월 유지되어 온 인신 예속 질서를 국가 차원에서 정리하려 한 중대한 조치로 평가된다. 또한 과거제를 정비하고 면천된 이들도 과거제에 응시할 수 있도록 길을 열어주었으며 기술자를 우대하였다.
경제정책에서는 중상주의적 성격이 뚜렷하였다. 철종은 국가 재정을 안정시키고 시전과 장시를 비롯한 시장 활동을 활성화하는 방향으로 정책을 폈으며, 상업 유통과 도시 경제를 장려하여 조정의 재정 기반을 넓히고자 하였다. 이는 세도정치의 붕괴 이후 왕실 중심 국가가 지속되기 위해서는 단순한 농업 수취만이 아니라 상업과 유통의 활성화가 필요하다는 인식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인다. 그 결과 철종대에는 시장 기능과 상업 활동이 일정 부분 활기를 띠게 되었으며, 이는 훗날 대한국의 경제 체제 변화에도 일정한 영향을 주었다고 평가된다.
대외적으로는 서양 각국이 동아시아에 대한 압박을 본격적으로 강화하던 시기였기 때문에, 철종 또한 대외 문제를 외면할 수 없었다. 그는 문호를 전면적으로 개방하거나 급진적인 개화 정책을 추진하지는 않았으나, 적어도 서양 각국과의 대화를 완전히 거부하지는 않았으며, 제한적이나마 국서의 전달과 외교적 접촉 가능성을 염두에 두고 정세를 탐문하게 하였던 것으로 해석된다. 이는 이후 고조 및 흥선대원군 대의 대외정책과도 일정 부분 이어지는 선행적 움직임으로 평가된다.
즉 철종의 업적은 화려한 군사적 정복이나 급진적 개혁에 있지 않다. 오히려 그는 짧은 재위 속에서 왕권을 유지하고 제도를 정비하며, 사회·경제 질서를 조금씩 손보는 방식으로 조선을 다시 세도가문 정치로 회귀하지 않게 한 데 의의가 있다.
평가
철종은 흔히 문조나 의종처럼 강한 인상을 남긴 군주는 아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결코 공백의 군주로 보기는 어렵다. 그는 의종 대 개혁의 성과를 급격히 후퇴시키지 않았고, 세도가문이 붕괴한 뒤 왕실 중심으로 재편된 정국을 비교적 안정적으로 유지하였다. 특히 비변사 혁파와 의정부 복원은 조선 후기 비정상적으로 비대해진 권력 구조를 바로잡으려는 뜻을 보여준 조치로 높이 평가된다.
또한 노예 폐지 공포와 중상주의적 시장 활성화 등의 정책은 철종이 단순히 현상 유지에만 머문 왕이 아니었음을 보여준다. 비록 재위는 짧았으나, 그는 사회 질서와 경제 구조를 일부나마 손보며 왕실 중심 국가의 기반을 넓히고자 하였다. 여기에 더해 안동 김씨와의 혼인을 통해 몰락한 외척 세력을 관리 가능한 범위 안으로 묶어 두고, 새로운 외척 독점 체제가 형성되는 것을 억제한 점도 정치적으로는 의미가 있었다.
대외적으로 서양 열강과의 접촉 가능성을 완전히 닫지 않고, 제한적이나마 대화의 여지를 두려 했다는 점 역시 주목할 만하다. 비록 본격적인 개항이나 개화 정책으로 이어지지는 않았으나, 적어도 철종이 국제 정세의 변화를 인식하고 있었다는 점은 후대의 평가에서 긍정적으로 언급된다.
다만 철종의 한계 역시 분명하다. 우선 재위 기간이 지나치게 짧았고, 지병으로 인해 장기적인 국정 운영 구상을 실현할 만한 여건이 부족하였다. 비변사 혁파, 의정부 복원, 노예 폐지, 시장 활성화 같은 조치들은 의미가 컸으나, 이를 충분히 제도화하고 전국적으로 안정시키기에는 시간이 모자랐다. 또한 아들이 어린 나이에 급사하여 무기력함에 빠졌고 후사를 남기지 못한 채 붕어함으로써 왕조의 계승 문제를 또다시 불러왔다는 점 역시 큰 약점으로 지적된다.
결과적으로 철종은 새 시대를 연 군주라기보다, 문조가 복구하고 의종이 정비한 질서를 바탕으로 왕권과 제도, 사회경제 구조를 한층 더 손보려 한 과도기의 군주로 평가된다. 후대에는 짧은 재위와 병약한 이미지 때문에 과소평가되기도 하나, 대한국사에서는 적어도 '왕권을 지키고 제도를 다듬으며 변화의 방향을 유지한 왕'이라는 점에서 일정한 의의를 인정받고 있다.
고조(흥선대원군)(1864~1873)
생애
흥선대원군은 본래 왕위와 거리가 있는 종친이었으나, 철종이 후사 없이 붕어하면서 어린 아들 고조가 즉위하게 되자 섭정의 자격으로 정국 전면에 등장하였다. 그는 문조와 의종의 치세를 대체로 긍정적으로 보았으며, 특히 문조의 왕권 강화와 의종의 행정 개혁을 조선 왕실이 다시 살아난 계기로 평가하였다. 반면 철종에 대해서는 그리 좋은 평가를 내리지 않았는데, 이는 노예 해방이나 상업 진흥, 서양과의 제한적 대화 시도 등이 지나치게 급진적이며 국가 질서를 흔들 수 있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그는 철종 사후의 정국을 세도가문 부활의 위험이 남아 있는 과도기로 파악하였다. 따라서 어린 군주를 대신해 섭정에 나선 뒤, 왕권과 재정을 다시 단단히 틀어쥐고 중앙집권 질서를 확립하는 것을 최우선 과제로 삼았다. 실제 역사와 달리 이 세계관에서는 이미 문조·의종·철종대를 거치며 세도정치가 상당 부분 붕괴해 있었기 때문에, 흥선대원군은 “세도정치 청산자”라기보다 기존 개혁 질서를 보다 강권적이고 보수적인 방향으로 재편한 섭정에 가까웠다.
그의 섭정기는 대체로 왕권 강화, 수도 정비, 지방제도 개혁, 서원 철폐, 유생 통제, 대외 보수화로 요약된다. 다만 동시에 의종 대부터 정권 내 입지를 넓혀 온 온건개화파의 존재를 완전히 무시할 수는 없었기 때문에, 대외적 보수성에도 불구하고 군제와 군비 현대화는 일정 부분 병행되는 독특한 양상을 띠었다.
업적
흥선대원군의 가장 큰 업적은, 문조·의종·철종 대를 거치며 형성된 왕실 중심 질서를 보다 강한 중앙집권 체제로 재편한 데 있다. 그는 철종 대의 일부 사회·대외 정책을 지나치게 급진적이라고 보았으나, 문조의 왕권 강화와 의종의 행정 정비 자체는 높이 평가하였기 때문에, 앞선 시대의 성과를 부정하기보다는 이를 보다 보수적이고 통제 가능한 방향으로 재구성하려 하였다.
우선 그는 경복궁 중건과 한성 대정비를 강하게 밀어붙였다. 이 조치는 단순한 궁궐 복원의 차원을 넘어, 왕실 권위를 시각적으로 복구하고 수도를 다시 국왕권력의 중심 공간으로 조직하려는 시도였다. 궁궐 주변의 행정 구역과 도로, 치안과 상업 공간을 정비한 이른바 한성 재개발은 왕실의 상징적 권위를 높이는 동시에, 수도 통치의 실효성을 강화하려는 정책으로 평가된다.
지방제도 개혁 역시 중요한 업적이다. 의종 대의 삼정 정비가 지방의 폐단을 적발하고 장부 질서를 바로잡는 데 중점을 두었다면, 흥선대원군은 이를 한층 더 밀어붙여 지방 행정을 중앙의 직접 통솔 아래 두는 방향으로 개편하였다. 각 도의 감사와 수령에 대한 보고 체계를 강화하고, 지방관의 장기 재임과 향리 세력과의 유착을 억제하며, 중앙의 명령이 보다 직접적으로 지방에 미치도록 제도를 정비하였다. 이로써 지방은 단순한 자치적 행정 단위가 아니라, 국왕과 조정의 통솔 아래 놓인 행정 체계로 더욱 강하게 편입되었다.
사상과 교육 질서의 재편도 그의 주요 업적 가운데 하나다. 흥선대원군은 서원을 지방 양반과 유생 세력의 독자적 권위 기반으로 보고, 이를 그대로 둘 경우 왕실 중심 질서가 약화될 수 있다고 판단하였다. 이에 따라 대대적인 서원 철폐를 추진하는 한편, 중앙이 직접 관리하는 지방 국립 교육 기관과 인재 양성 체계를 강화하여 지방에 대한 학문과 인사를 조정이 강력히 관여하고자 하였다. 이른바 지방 국립 대학 설립 정책은 단순한 교육 진흥책이 아니라, 사상과 관료 재생산 구조를 국가가 직접 장악하려는 시도였다.
흥선대원군은 양반과 유생의 반발 또한 무조건 정면충돌로 처리하지 않았다. 이미 문조 대 세도가문 숙청과 의종 대 지방 개혁으로 반대 세력의 조직력이 상당 부분 약화된 상황이었기 때문에, 그는 지방 명망가와 유생층을 부분적으로 회유하면서도 핵심 거점은 철저히 정리하는 방식을 택하였다. 즉, 불필요한 전국적 반발을 부르지 않으면서도 실질적으로는 왕실 중심 권위를 강화하는 현실적 통치술을 구사한 셈이다.
대외정책에서는 철종 대의 제한적 대화 노선을 위험한 것으로 보고, 서양 문물과 천주교를 국가 질서를 해칠 수 있는 요소로 간주하였다. 이 때문에 그의 집권기에는 병인박해가 발생하였고, 이는 곧 병인양요로 이어졌다. 그러나 병인양요는 조선이 무방비 상태에서 일방적으로 당한 사건으로만 그려지지 않는다. 이미 의종 대부터 온건개화파가 정계에서 일정한 입지를 확보하고 있었고, 흥선대원군 역시 교류에는 부정적이었으나 군사 대비의 필요성은 인정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 결과 조선은 화포 운용 개량, 군제 재편, 별기군 확대 등을 통해 실제 역사보다 더 조직적인 대응을 보였고, 결국 병인양요를 격퇴하는 데 성공하였다. 이 승리는 흥선대원군의 대외 강경 노선을 정당화하는 계기가 되었으며, 동시에 군비 증강의 효용을 조정 전체에 각인시켰다.
다만 그 성공이 폐쇄정책의 정당성을 끝까지 보장한 것은 아니었다. 병인양요 과정에서 발생한 규장각 훼손과 수도 방어의 불안정성은, 외세와의 충돌을 무조건 강경책으로만 해결할 수 없다는 점 역시 보여주었다. 이어 신미양요를 전후한 시기에는 미국 측의 개항 요구가 제기되었고, 조정 내부에서는 박규수 등을 중심으로 한 온건개화파가 점차 발언권을 높여 갔다. 이들은 고조가 친정을 원하던 상황에서 흥선대원군이 계속 상왕처럼 군림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으며, 병인양요를 통해 확인된 군사적 한계와 규장각 훼손의 경험을 돌아볼 때 제한적 개방과 외교적 완충 장치가 필요하다고 주장하였다.
결국 흥선대원군은 기존의 전면적 배척 기조를 일부 수정하여, 인천에 한한 제한적 개항을 받아들이고 향후 미국과의 수교를 긍정적으로 추진하기로 하였다. 이는 그의 성향만 놓고 보면 상당한 후퇴처럼 보일 수 있으나, 실제로는 병인양요의 승리 이후 조선이 최소한의 자신감을 가진 상태에서, 전면 개방이 아닌 통제된 개항과 선택적 외교를 택한 것으로 해석된다. 이 조치는 훗날 고조 친정기에 본격적인 대외 개방과 근대화 정책으로 이어지는 교두보가 되었다.
종합하면 흥선대원군의 업적은 왕권의 상징적 재건, 지방과 교육 질서의 중앙집권적 재편, 유생 세력의 억제, 병인양요 승리로 대표되는 군사 대비의 성과, 그리고 신미년 이후 인천 제한 개항과 미국 수교 추진을 통한 통제된 외교 전환으로 요약할 수 있다. 그는 근대화의 속도를 늦추고자 했으나, 결과적으로는 조선을 더 강한 왕실 중심 국가로 재조직하는 한편, 완전 쇄국과 무제한 개방 사이의 과도기적 길을 연 인물이 되었다.
평가
흥선대원군은 대한국사에서 가장 논쟁적인 인물 가운데 하나이다. 긍정적으로 보면 그는 철종 붕어 이후 흔들릴 수 있었던 왕조를 다시 강한 중앙집권 체제로 묶어내고, 경복궁 중건과 한성 정비, 지방제도 개혁, 서원 철폐와 중앙 교육기관 육성 등을 통해 왕실 중심 국가를 한층 더 강화한 섭정이었다. 문조와 의종이 마련한 정치적 토대를 보다 정교한 통치 질서로 바꾸어 놓았다는 점에서, 단순한 수성형 인물을 넘어 적극적 국가 재편자로 평가할 수 있다.
특히 병인박해라는 강경책이 결국 병인양요를 불러왔음에도, 조선이 그동안 준비한 군사력과 연해 방어 체계를 바탕으로 이를 격퇴하였다는 점은 흥선대원군의 평가를 복합적으로 만든다. 그는 서양과의 교류에는 부정적이었으나, 군사적 대비 자체는 현실적으로 추진하였고, 그 결과 병인양요는 조선이 완전히 무력하지 않음을 보여준 사건이 되었다. 여기에 더해 신미년 미국의 개항 요구에 대해서는 박규수 등 온건개화파의 의견과 고조 친정 임박이라는 정세를 감안하여, 인천에 한한 제한 개항과 미국 수교를 허용하였다. 이 때문에 후대에는 그를 무조건적 쇄국주의자라기보다, 강경한 보수주의에서 제한적 통제 개방으로 이동한 과도기의 권력자로 보는 시각도 강하다.
또한 양반과 유생의 반발을 최대한 억제하면서도 핵심적인 서원 철폐와 중앙집권 개혁을 밀어붙였다는 점 역시 높은 평가를 받는다. 이는 문조 이후 누적된 왕권 강화의 성과를 그가 효과적으로 활용하였음을 보여주며, 지방 사족과 유생 사회의 독자성을 꺾고 국가가 인재와 사상을 관리하는 구조를 강화했다는 점에서 장기적 의미가 컸다.
반면 부정적으로 보면, 흥선대원군은 철종 대의 상대적으로 완만한 사회·대외 변화 가능성을 크게 위축시킨 인물이기도 하다. 그는 노예 해방 이후 나타난 사회 변동과 시장 활성화의 흐름을 불안정 요소로 보았고, 서양과의 대화 또한 원칙적으로는 국가 혼란을 부를 수 있는 위험으로 인식하였다. 병인박해는 이러한 성향이 가장 극단적으로 드러난 사건이며, 결과적으로 병인양요라는 외세 충돌을 불러왔다는 점에서 비판을 피할 수 없다.
또한 병인양요 승리 이후에도 그는 처음에는 이를 강경 노선의 정당화로 받아들였고, 보다 체계적인 외교 노선 정립에는 소극적이었다. 신미년의 제한 개항과 미국 수교 역시 그의 자발적 전환이라기보다, 온건개화파의 성장과 고조 친정 임박, 그리고 병인양요를 통해 드러난 한계가 복합적으로 작용한 결과로 보는 견해가 많다. 이런 점에서 그는 시대의 흐름을 앞서 이끈 인물이라기보다는, 변화를 최대한 늦추되 완전히 거부할 수는 없었던 보수적 중재자에 가까웠다는 평가도 가능하다.
결과적으로 흥선대원군은 문조와 의종의 성과를 계승하면서도 철종 대의 일부 변화에는 제동을 걸고, 왕실 중심 국가를 보다 강하게 재구축한 인물이었다. 그는 병인양요 승리로 대표되는 군사적 성과를 남겼고, 말년에는 인천 제한 개항과 미국 수교를 통해 통제된 대외 전환의 길도 열었다. 대한국사에서 그는 대체로 “왕조를 강하게 만들었으나, 시대 변화와 타협하는 데에는 끝내 신중할 수밖에 없었던 섭정”으로 정리된다.
고조(1873~1924)
1873년. 친정의 시작
1873년, 고조는 흥선대원군의 섭정을 거두고 친정을 선포하였다. 흥선대원군은 이미 섭정기 동안 세도정치의 잔재를 억누르고 중앙집권 질서를 회복하였으며, 고조 역시 이러한 성과를 부정하지 않았다. 따라서 고조의 친정은 기존 통치 질서의 단절이라기보다, 대원군이 마련한 왕권 중심의 강력한 중앙집권 체제를 고조와 온건개화파가 이어받아 근대국가 체제로 전환하는 과정에 가까웠다.
이 시기 정국의 주도권은 박규수, 김홍집, 이유원 등을 비롯한 온건개화파가 장악하였다. 이들은 서구식 제도와 기술의 도입을 주장하였으나, 왕권과 유교적 국가질서를 무너뜨리려 하지는 않았다. 오히려 온건개화파는 조선이 외세의 압력 속에서 독립을 보존하기 위해서는 군사, 재정, 교육, 외교 제도를 국가 주도로 정비해야 한다고 보았다. 반대로 흥선대원군과 유생층, 보수 관료층 또한 고조의 개혁을 전면적으로 반대하지 않았다. 이들은 서양 문물의 무분별한 수용과 급진적 정치 개편에는 경계심을 가졌지만, 군비 강화, 조세 정비, 실무 관료 양성, 외교 수립 등은 왕조와 사직을 보존하기 위한 불가피한 조치로 받아들였다. 이 때문에 고조 친정기의 개혁은 개화파, 수구파 간의 격렬한 대립이 아니라, 왕실과 조정 간 일정한 합의를 형성한 상태에서 진행된 점진적 국가개조에 가까웠다.
1873년~. 국가 주도 근대화
조선은 일본보다도 이른 시기에 서구 열강과의 외교 관계를 정비하였다. 특히 철종 대에 삼군부를 대신할 통리기무아문이 설치되면서 흥선대원군 시절에 본격적으로 가동되었고, 추후 의정부의 외부로 기능하였다. 또한 흥선대원군 말기의 제한 개항 논의가 고조 친정기에 본격적으로 제도화되었고, 조선은 외국과의 접촉을 단순한 굴복이나 양보가 아닌 국가가 관리하는 통상, 외교 정책으로 전환하고자 하였다.
조선 정부는 인천과 새롭게 개항지로 부상한 김해(부산포), 두 도시를 중심으로 개항장을 관리하였다. 다만 외국 상인의 거주와 활동 범위는 통제되었고, 개항장에서 발생하는 관세 수입은 국고로 편입되었다. 고조는 쇄국 정책을 추진하던 흥선대원군과 대립하였고, 김홍집 등과 함께 개화정책을 추진하였던 이유원을 영의정으로 새로 임명하고, 그에게 재정관리를 전격으로 맡기면서 군제 개혁, 무기 구입, 관립학교 운영, 인력 양성(유학 파견) 등을 시행하였다.
이때 군제 개혁도 병행되었는데, 기존 군영을 일시에 폐지하기보다 단계적으로 개편하고, 신식 훈련을 받은 소수 정예군을 육성하는 방식을 택하였다. 강화도, 인천 등을 잇는 해안 방어선은 이 시기 국방 정책의 핵심이었다. 이를 위해 군함 도입이 본격화되었고, 海兵隊(해병대)가 새로 신설되었다. 또한 러시아 등에서 신식 소총과 포병 전력이 도입되었고, 프랑스와 독일로부터 장교를 초청하여 무관 양성을 위한 군사 교육기관도 설치되었다.
재정 개혁 역시 중요한 과제였다. 고조는 근대화가 군사력만으로 이루어질 수 없으며, 안정적 세입과 중앙 재정 장악이 필요하다고 보았다. 이에 따라 토지와 호구에 대한 재조사가 이루어졌고, 조세의 금납화가 확대되었다. 관세 수입은 국가 재정의 중요한 축이 되었으며, 화폐 주조와 유통을 관리하기 위한 기관도 정비되었다. 이외에도 이러한 전반적인 개혁은 조선이 전통적 왕조국가에서 근대적 재정국가와 행정국가로 이행하는 기반이 되었다.
1874년. 명성황후의 국정 관여와 여흥 민씨(신 세도가문)의 등장
고조 친정기에서 여흥 민씨의 부상은 조정 내부의 주요 논란 중 하나였다. 김좌근의 난 이후 세도정치가 붕괴되고, 흥선대원군 섭정기를 거치며 외척 정치에 대한 경계가 강해졌지만, 정작 왕비의 친족이 다시 국정에 영향력을 행사하면서 신 세도가문이 등장하였다고 할 정도로 많은 논란이 오고갔다. 아직 정치적 영향력이 있었던 흥선대원군은 섭정기부터 이미 외척의 관직 진출과 재정 개입을 제한하는 관행을 세웠을 정도로, 세도정치의 재현을 막는데 온 힘을 쏟아부었었기 때문에 여흥 민씨 가문의 성장을 강하게 경계하였다. 그러나 고조는 명성황후를 옹호하였다. 명성황후는 단순한 왕비가 아니라, 친정 이후 왕실의 독자적 정치 기반을 보완해주는 동반자이자 대불 및 대러 외교의 지원자였다. 고조는 대원군계 보수 관료와 온건개화파, 군부 사이에서 정치적 균형을 잡아야 했고, 황후를 중심으로 한 궁중 인맥은 왕실의 영향력을 유지하는 데 일정한 역할을 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여흥 민씨는 1874년부터 본격적으로 국정에 관여했지만, 이를 완전히 장악할 만큼 안동 김씨처럼 강력한 외척 세력으로 성장하지 못하였다. 흥선대원군의 외척 견제책이 여전히 작동하고 있었고, 고조 친정기의 정권은 이미 대원군과 고조로부터 직접 임명된 온건개화파가 주도하고 있었다. 재정과 군제 개혁은 의정부와 탁지 계통 관료 등을 통해 정비된 제도로 관리되었으므로, 궁중 세력이 국고나 군비를 사적으로 좌우하기 어려웠다. 명성황후는 고조의 점진적 개혁 노선을 대체로 지지하였다. 그녀는 급진개화파의 체제 전복적 노선에는 비판적이었고, 외교 수립과 군제 개혁, 관립 교육기관 설치 등 국가 주도 근대화에는 우호적이었다. 특히 러시아 및 프랑스와의 외교 관계 강화에 일정한 역할을 하였으며, 영국과 일본을 견제하기 위한 궁중 외교의 후원 세력으로 기능하였다. 그러나 명성황후에 의해 비공식 궁중 인맥이 국가 의사결정에 영향을 미친다는 제도적 우려는 존재했다.
급진개화파의 반란(무인변란시도)이 발생한 이후에 명성황후를 둘러싼 긴장은 더욱 커졌다. 반란 세력 일부는 궁중 세력과 여흥 민씨를 구체제의 잔존이라고 하여 비난하였고, 반대로 보수파 일부는 황후가 프랑스, 러시아 등 외국 세력의 관심을 지나치게 끌어들인다고 우려하였다. 이 과정에서 1894년, 명성황후에 대한 건천궁 무장침입 사건이 발생하였다. 황후는 생존하였으나 이 사건은 왕실 내부에 큰 충격을 주었다. 암살 미수 사건 이후 고조는 명성황후를 더욱 보호하였지만, 정작 조정은 이 사건의 원인을 여흥 민씨로 꼽았다. 명성황후는 여흥 민씨가 조정에서 완전히 배제되는 것을 막기 위해 외무를 제외하고 전반적인 국정에서 물러나 궁중과 왕실 외교의 상징적 조력자로 남게 된다.
순종이 아들을 낳지 못하면서 차기 황태자로 지목된 의친왕은 정작 명성황후를 심히 증오하였다. 그의 생모인 귀인 장씨는 명성황후의 미움을 받아 고생하다가 지병으로 사망했는데, 이는 의친왕이 명성황후를 증오하는 계기가 되었다. 이후 명성황후와 여흥 민씨를 강하게 경계한 것도 명성황후가 국정 일선에서 물러난 주요 이유 중 하나가 되었다. 그는 명성황후가 외무만 맡았을 때에도 고조의 외교적 실패와 1905년의 조일 전쟁 패배를 겪은 원인 중 하나가 명성황후라고 강력히 주장했다. 특히 1905년 말의 거문도 조약 직후 의친왕은 명성황후의 친러 및 친불 외교 전략이 대한국을 영국과 미국으로부터 고립시키는 데 일조했다고 판단하였다. 명성황후가 순종과 영친왕을 보호한 것도 의친왕과의 갈등을 심화시켰다. 명성황후는 병약한 순종의 지위를 지켜 여흥 민씨를 보호하고자 했고, 영친왕을 황태자로 옹립하고자 했다. 반면 의친왕은 자신이 대한국의 위기를 실질적으로 조정하고 있었음에도, 황후와 잔존 여흥 민씨 세력이 혈통과 궁중 질서를 앞세워 자신의 정치적 역할을 견제한다고 여겼다.
1878년. 무인년에 발생한 무인변란시도 및 무인사화
고조 친정기의 개혁 노선은 안정적이었으나, 모든 세력을 만족시키지는 못하였다. 온건개화파가 정권을 장악하고 점진적 개혁을 추진하자, 보다 빠른 서구화와 정치 개편을 요구하던 급진개화파는 불만을 품기 시작하였다. 이들은 왕권과 유교적 질서를 유지한 상태의 개혁은 불완전하며, 일본식 또는 서구식 정치제도를 보다 과감하게 도입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일본의 세이난 전쟁 이후 얼마 지나지 않아, 1878년, 급진개화파의 불만은 반란으로 폭발하였다. 이 반란은 보수 유생의 반개화 운동이 아니라, 오히려 급진적 근대화를 요구한 세력이 온건개화파로 구성된 정권과 왕실에 도전한 사건이었다. 일부 유학생 출신 인사와 청년 장교들이 이에 가담하였고, 이들은 의회 설치, 정당 허용 및 의회 권력 강화 등 강력한 개혁을 요구하였다.
고조는 이러한 급진 개혁을 황권에 대한 중대한 도전으로 규정하였고, 조정과 보수 진영은 고조를 지지하였다. 흥선대원군 또한 급진개화파의 반란을 왕조와 사직을 위협하는 무모한 행동으로 보았고, 온건개혁파 정권의 진압 방침에 동의하였다. 박영효의 형인 박영교와 좌의정 홍순목 등이 주도가 되어 일으킨 반란은 한성 안에서 진행되었으나, 홍순목의 장남인 홍만식이 이의 우려에 대해 최익현과 함께 논하다가 박문일에게까지 전달되었고 나라의 안위를 걱정한 박문일이 이를 흥선대원군에게 알리면서 약 8시간만에 진압(무인변란시도) 당했다. 그러나 이의 여파는 컸는데, 고조는 위정척사파 등 보수파의 의견을 수렴하여 개혁의 속도를 크게 늦추고, 군사와 교육 분야에 대한 국가 통제를 크게 강화하였다. 급진개화파의 반란은 고조 친정기의 개혁이 보수파의 저항으로 좌절된 것이 아니라, 오히려 급진파의 조급한 도전 속에서 유지되었다는 점을 보여주는 사건이었다.
그러나 만약 조선이 늦춰진 개혁 속도를 그대로 유지하였더라면, 일본과 외국으로부터 국력이 밀리면서 동아시아 정세에서 살아남지 못했을 수도 있다. 불행 중 다행으로 정치적 입지를 굳건히 하려는 위정척사파가 대원군과 청의 지지를 얻어 정권을 장악하려고 하자 명성황후는 고조와 직접 논한 후 온건개화파를 지원하며 다시금 실권을 노렸고, 이유원 영의정과 김홍집 의정부대신 그리고 흥선대원군의 형인 흥인군(이최응)이 최익현, 박문일 등이 대역죄 계획을 모두 알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묵인하고 있다가 대원군의 혜안에 따라 겨우 진압할 수 있었다라는 명분을 내세우며 대원군계 보수파를 일거에 숙청하였다. 이를 무인사화라고 하며 1878년 11월에 일어났다. 대원군의 체면을 살려주는 척했으나 정작 대원군을 지지하는 일부 보수 세력과 개혁의 제동을 주도한 위정척사파 대다수를 숙청하면서 대원군의 영향력이 약화되고 이를 명성황후가 장악하기 위한 것이었다.
1884년. 갑신양요(조영전쟁) 및 삼국연합
1880년대부터, 조선은 일본과 비슷한 국력을 지속적으로 형성, 발전 및 유지하면서 영국과 러시아 사이의 지정학적 갈등 속에서 중재자를 자처하였다. 조선은 조정을 장악한 명성황후 및 김홍집, 이최응 등 온건개화파에 따라 러시아 및 프랑스와의 외교 관계를 강화하고 있었고, 동아시아에서 영국의 해상 패권과 일본의 부상을 동시에 경계하고 있었다. 고조는 조선이 더 이상 주변 강대국의 압력에 휘둘리는 약소국이 아니라, 동아시아 질서의 조정자로 기능할 수 있다고 판단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외교적 자신감은 영국과의 충돌로 이어졌다. 영국은 조선의 중재 시도를 러시아 편향적인 행보로 간주하였고, 조선 역시 영국의 자국에 대한 영향력 확대를 경계하였다. 결국 양국 간 긴장은 전쟁으로 발전하였다.
영국이 1884년 4월, 제주도와 거문도 해상 일대에서 조선의 군함을 공격하여 시작된 전쟁은 갑신양요로 불리며 영국의 압도적 화력에 밀리는 듯 했으나, 러시아의 태평양함대가 남하하여 조선을 지원하였고, 프랑스 역시 조선과의 협력을 강화하고 유럽 대륙에서 영국을 최대로 견제하였다. 영국은 결국 조선의 군함 공격에 대해 사과 및 적절한 배상을 통한 강화 후 전쟁에서 물러났고, 이를 계기로 조선·프랑스·러시아 삼국연합이 완성되었다. 이의 삼국연합은 영국의 동아시아 해상 패권과 일본의 대륙 진출을 견제하기 위한 외교·군사적 연합으로 기능하였다. 이에 청나라도 이의 연합을 긍정적으로 화답했으나, 러시아의 대청 견제 및 조선의 대외 정책 불화음에 따라 청은 연합에 참여하지 못했다.
이 시점부터 조선 외교는 친러 및 친불 성향을 강하게 띠게 되었다. 고조는 이를 통해 영국과 일본의 압력에 대응하고자 하였으나, 동시에 영국과 미국으로부터 경계의 대상이 되기 시작하였다. 또한 이는 곧 명성황후의 입지 강화를 의미했고, 여흥 민씨가 조정 장악을 노리면서 정치적 불안이 고조되었다.
1893년. 청일전쟁 참전 및 간도 확보
이후 9년만인 1893년 7월, 급진적인 개혁을 거쳐 조선의 군사력을 넘은 일본은 자신만만하여 류큐를 침략기지로 삼고 조선 남해와 중국 연안 일대에서 청나라와 전쟁을 벌였다. 이를 청일전쟁이라고 하며, 일본의 목적은 청을 굴복시켜 군사력을 과시하고 조선을 경쟁에서 이기기 위한 발판을 마련하려는 것이었다. 일본군은 즉시에 랴오둥과 상해 부근에 상륙하여 서진하였고, 청은 근대화된 일본군의 공세에 밀려 조선에 도움을 요청하였다.
조선은 이를 동아시아 질서에 대한 일본의 침략 행위로 규정하였다. 그리고 조선의 개입은 곧 러시아와 프랑스의 참전으로 이어졌다. 러시아는 태평양함대와 극동군을 파견하였고, 프랑스도 남일본에 함대를 파견하였은데, 조선, 러시아 그리고 프랑스는 일본을 침략자로 공동 규정하고 이의 대응에 나섰다. 일본군은 초기에는 해상 기동력과 근대식 군제를 바탕으로 우세를 보였으나, 조선군의 육상 방어와 러시아 및 프랑스의 해상 봉쇄 등 압박 속에서 점차 전세를 잃었고, 결국 일본의 막대한 국고 지출 및 함대 손실에 따라 항복하면서 대륙 진출은 좌절되었다.
이 사건은 조선 역사에서 중요한 전환점이 되었다. 조선은 청을 지원한 대가와 전후 처리 과정에서 숙종 대부터 백두산정계비로 인한 영토갈등으로 남았던 남간도에 대한 지배권을 확보하였다. 조선 정부는 이를 단순한 영토 획득이 아니라 역사적 강역, 다시 말해 고토의 회복을 위한 첫걸음으로 선전하였고, '고토 회복'이라는 구호는 조선 내부에서 강력한 정치적 명분으로 자리 잡았다. 간도 확보는 조선의 북방 정책을 강화하였고, 훗날 대륙 전쟁과 만주 정복론의 이념적 기반이 되었다. 그러나 이 승리는 동시에 새로운 위험을 낳았는데, 조선이 러시아 및 프랑스와 결속하고 간도를 확보하자, 영국과 미국은 조선을 동아시아 세력 균형을 위협하는 국가로 보았고, 일본 역시 조선을 최대의 전략적 적수로 인식하게 되었다.
1897년 초. 사국전쟁 및 거문도 조약
1897년, 동아시아의 긴장은 청일전쟁 4년만에 결국 영일 대 조러 전쟁인 사국전쟁(또는 정유대전)으로 폭발하였다. 영국과 일본은 조선과 러시아의 남하 시도와 동아시아 영향력 확대를 견제하고자 일찍이 영일동맹을 수립하였고, 조선과 러시아는 이에 맞서 기존의 세력권을 지키려 하였다. 프랑스 역시 전통 라이벌인 영국을 견제하여 조선, 러시아 측과 협력하였다. 그러나 전쟁은 초기부터 조선과 러시아에 불리하게 전개되었다. 조선은 육상전에서 일정한 저항력을 보였으나, 영국 해군의 압도적인 해상력과 일본군의 기동전에 고전하였다. 특히 남해와 서해의 해상 교통로가 위협받으면서 조선의 군수와 재정은 빠르게 악화되었다.
결국 조선은 반년만에 전쟁에서 패배하였고, 강화 조약으로 1897년 10월, 거문도 조약이 체결되었다. 이 조약에 따라 조선은 거문도 및 주변 작은 도서에 대해 영국에 100년간 할양하였고 배상금을 지불했으며, 황허강 이남의 일부 권익과 영향권을 일본에 모두 넘겨주었다. 이는 고조 대에 조선이 경험한 가장 큰 외교적 패배였다. 거문도 조약은 조선 사회에 큰 충격을 주었다. 조선은 이전까지 조기 근대화와 삼국연합, 대일 승리를 통해 국제무대에서 자신감을 키우고 있었으나, 영국과 일본의 결합된 압력 앞에서 한계를 드러냈다. 특히 거문도의 상실은 조선 남해 방어선에 치명적인 손실로 받아들여졌고, 황허강 이남 권익의 상실은 대륙 진출론에 큰 타격을 주었다.
1897년 말. 대한국제 선포
거문도 조약 이후 고조의 정치적 입지는 최대로 흔들렸다. 온건개화파 정권은 전쟁 패배와 영토, 권익 등의 상실에 대한 책임론에 직면하였고, 조정과 의회 내부에서도 전쟁 수행과 외교 판단을 비판하는 목소리가 커졌다. 보수층 역시 고조의 개혁 자체를 부정하지는 않았으나, 외교적 과신과 전쟁 패배에 대해서는 책임을 물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고조는 이러한 위기를 돌파하기 위해 국호와 국가 체제를 근대적으로 재편하는 결단을 내렸다. 그는 조선이 더 이상 전통적 왕조국가의 틀 안에 머물러서는 열강과 대등하게 경쟁할 수 없다고 주장하며 1897년 12월 1일, 대한국제를 선포하였다. 이를 통해 조선은 대한국(대한제국)으로 국호를 바꾸고, 근대적 국가 체제와 군주권을 새롭게 정비하였다.
대한국제 선포는 한편으로는 외교적 패배에 대한 책임을 회피하려는 정치적 조치이기도 하였다. 고조는 패전의 충격을 국가 재건과 체제 개편의 명분으로 전환하고자 하였고, 이를 통해 자신의 권위를 다시 세우려 하였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대한국제는 이미 수십 년간 진행된 군제, 재정, 교육, 외교 개혁의 결과물이기도 하였다. 또한 고조는 의회 설치와 정당 설립도 허용하였는데, 이는 패전 이후 커진 정치적 불만을 잠재우고, 온건개화파와 보수 관료층 뿐만 아니라 자유주의, 공화주의 등 진보 성향의 신진 관료층을 제도권 안에 묶어두기 위한 조치였다. 의회는 즉각적인 입헌군주제를 의미하지는 않았으나, 대한국 초기 정치에서 군주권과 관료제, 제한적 의회정치가 공존하는 체제를 형성하는 계기가 되었다.
이렇듯 대한국제 선포는 고조의 정치적 위기를 일시적으로 수습하였다. 국호의 변경과 국가 체제의 근대화는 패전의 충격을 새로운 국가 건설의 명분으로 전환하는 효과를 가져왔다. 조정과 의회는 대한국의 성립을 승인하였고, 왕실은 이를 통해 다시금 국가 통합의 중심으로 자리 잡고자 하였다. 그러나 대한국제 선포가 모든 문제를 해결한 것은 아니었다. 거문도 조약 이후 대한국은 영국과 일본에 대한 적대감, 러시아와 프랑스에 대한 의존, 미국과의 외교적 거리감이라는 복잡한 대외 구도 속에 놓이게 되었다. 대내적으로도 전쟁 책임론, 재정 악화, 군비 확장, 의회 권한 문제, 왕실 책임 문제를 둘러싼 갈등이 계속되었다.
고조는 대한국제를 통해 국왕권을 새롭게 정비하고자 하였으나, 전쟁 패배의 책임에서 완전히 벗어나지는 못하였다. 오히려 국호 변경 이후에도 여러 사건이 연달아 발생하면서, 고조의 정치적 권위는 점차 약화되기 시작하였다. 또한 대원군이 1898년에 지병으로 사망하면서, 고조의 전통적인 정치 기반인 보수층이 점차 입지를 잃어갔다. 이후 잇따라 발생하는 대외적 사건에 따라 온건개화파 마저 힘을 잃어가면서 고조의 결정을 지지해줄 이들은 계속해서 줄어만 간다.
1900년. 석도 분쟁
대한국제 선포 이후 가장 먼저 부각된 문제 중 하나는 1900년의 일본과의 석도(독도) 분쟁이었다. 일본은 거문도 조약 이후 조선 남해와 동해에서 영향력을 확대하려 하였고, 대한국은 이를 자국 해양권에 대한 도전으로 받아들였다. 석도는 일본의 대한국, 러시아국에 대한 견제 및 북상 전략을 둘러싼 상징적 분쟁지가 되었다. 대한국 정부는 즉시 칙령 제411호를 선포하여 석도와 울릉도 일대를 우산군으로 확립하고 이에 대한 행정적 관리와 해양 순찰을 강화하였다. 군부는 이를 계기로 해군력 증강과 연안 방어선 정비를 주장하였고, 의회에서도 일본 견제론이 힘을 얻었다. 석도 분쟁은 대한국 사회에서 일본을 장기적 적수로 인식하게 만든 사건 중 하나였다.
그러나 이 문제는 동시에 고조의 한계를 드러냈다. 고조는 외교적 협상과 제한적 군사 압박을 병행하려 하였으나, 군부와 강경파는 보다 적극적인 대응을 요구하였다. 석도 분쟁 이후 외교 문제에서 왕실보다 군부와 의회의 발언권이 점차 커지기 시작하였다.
1905년. 제1차 간도전쟁
간도 확보 이후 북방 국경 문제는 대한국 정치의 핵심 현안이 되었다. 대한국 정부는 간도를 역사적 강역 회복의 상징으로 선전하였으나, 실제 지배는 결코 안정적이지 않았다. 청의 견제, 현지 관료의 비협조, 러시아의 이해관계, 일본의 정보 활동 등이 복잡하게 얽히면서 간도는 끊임없는 충돌의 장이 되었다. 이는 대한국의 역량을 시험하는 무대로써 작용하기도 하였다. 제1차 간도전쟁은 이러한 긴장이 폭발한 사건이었다. 대한국은 간도에 대한 행정권을 강화하려 하였고, 이에 반발한 현지 세력과 외부 지원 세력이 충돌을 일으켰다. 대한국 군부는 이에 대해 강경 진압에 나섰는데, 이 과정에서 대한국이 간도의 범위를 확장하여 해석하였고 대한국 군대가 청의 국경을 무단으로 넘으면서 청은 결국 대한국과의 충돌을 피하지 못했다(제1차 간도전쟁, 1905).
이미 군사력의 차가 압도적으로 벌어지면서 간만 보고 있었던 대한국은 전투에서 압도하였으므로, 전쟁은 대한국이 쉽게 승리하였다. 청은 이에 대해 배상뿐만 아니라 서간도 일부까지 할양하여야 했다. 그러나 이 과정에서 군부의 위상이 크게 높아졌다. 간도 전선에서 활약한 장교들은 국민적 영웅으로 떠올랐고, 군부는 북방 방위와 만주 회복론을 자신들의 정치적 명분으로 삼기 시작하였다. 반대로 고조와 문민 관료층은 전쟁 수행 과정에서 군부에 크게 의존할 수밖에 없었다. 또한 제1차 간도전쟁 이후 대한국의 정치 분위기는 더욱 군사화되었다. 간도는 단순한 변경 지역이 아니라, 만주로 나아가기 위한 전진기지로 인식되었다. 이때부터 대한국은 신북벌론이 대두되었으며, 제국주의 및 군국주의로 나아가는 발판이 마련되었다.
1907년. 대마도 해전
석도 분쟁과 간도전쟁에 이어, 대한국과 일본의 긴장은 대마도 해전으로 다시 폭발하였다. 대마도는 대한국과 일본 사이의 해상 교통로를 통제하는 전략적 요충지였으며, 거문도 조약 이후 영국과 일본의 해상 협력이 강화되면서 대한국에게 더욱 민감한 지역이 되었다. 대마도 해전은 대한국 해군과 일본 해군이 충돌한 사건으로, 양국 모두 전면전을 피하려 하였으나 현장 지휘관의 판단과 상호 불신이 겹치면서 교전으로 확대되었다.
대한국 해군은 일본 해군의 북상을 저지하는 데 성공하였으나, 이 사건은 양국 관계를 더욱 악화시켰다. 대마도 해전 이후 대한국 내부에서는 해군 확장론이 급격히 힘을 얻었고, 군부는 영국과 일본을 동시에 견제하기 위해서는 강력한 연안 해군과 기동 함대가 필요하다고 주장하였다. 의회 역시 국민적 여론을 의식하여 군비 증강 예산을 승인하였다. 고조는 군비 증강의 필요성을 인정하면서도, 군부의 정치적 발언권 확대에는 우려를 품었다. 그러나 연이은 대외 위기 속에서 왕실이 군부를 견제하기는 어려웠다.
대마도 해전의 패배로, 일본은 태평양에서 석도로 나가는 지름길을 완전히 잃었다. 대한국은 일본국에 대해 대한해협의 군사 통행을 위해서 사전에 양국이 합의하도록 강제하였고, 일본국은 석도에 대한 영유권 주장의 명분을 완전히 상실해버렸다. 그러나 막상 대한국은 일본국을 견제하는 것에 그치며 일본국의 이해관계에 있어서 엮이지도 않았고 관심도 없었다. 자존심이 상했던 일본국은 당분간 대한국에 적대적으로 행동했지만, 대한국의 이러한 스탠스를 이해하면서 훗날 겉으로는 경쟁하면서도 필요할 때면 적극적으로 대한국과 협조해나갔다.
1909년. 중추원 폭탄 테러
대한국제 선포 이후 설치된 중추원은 초기에는 군주권을 보완하고 정치적 불만을 제도권 안으로 흡수하기 위한 기구였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서 중추원은 단순한 자문기관을 넘어, 각 정치 세력의 이해관계가 충돌하는 핵심 무대, 즉 의회가 되었다. 중추원 내부에는 강경파, 자유주의파, 온건개화파, 황당파, 군국주의파 등이 혼란스럽게 뒤섞여 있었다. 물론 실권은 온건개화파가 아직 장악하고 있었지만, 군부의 팽창과 각종 스캔들로 명성황후의 입지가 흔들리면서 점차 위태로웠졌다. 이들은 모두 대한국의 부국강병과 독립 보존을 주장하였으나, 그 방법에서는 큰 차이를 보였다.
황당파는 왕도정치와 유교적 질서의 회복을 주장하면서도 대외적으로는 강경한 반일·반영 노선을 지지하였다. 자유주의파 및 강경파(유학생들이 대다수로 구성됨)는 의회 권한 확대와 법치주의를 강조하였다. 온건개혁파는 기존의 국가 주도 개혁 노선을 유지하려 하였고, 군부는 왕권과 관료제, 의회를 절충한 독특한 국가개조론과 함께 선군정치의 필요성을 주장하였다.
이러한 갈등은 결국 중추원 폭탄 테러로 폭발하였다. 테러는 특정 계파를 겨냥한 정치적 폭력 사건이었으나, 실제로는 대한국 정치가 더 이상 왕실의 권위만으로 조정되기 어려운 단계에 들어섰음을 보여주었다. 사건 이후 중추원은 한동안 마비되었고, 군부는 치안과 국가 안정을 명분으로 정치 개입을 확대하였다. 고조는 테러의 진위를 면밀히 파악할 것을 지시하는 한편, 왕실 중심의 통합 정치를 회복하려 하였으나, 이미 정치의 중심은 중추원과 군부로 이동하고 있었다. 이 사건은 고조의 권위가 결정적으로 약화되는 계기 중 하나가 되었다.
1910년. 용산대화재
중추원 폭탄 테러의 충격이 채가시지 않아 1년만에, 한성에서는 용산대화재가 발생하였다. 용산은 대한국제 선포 이후 군사·철도·상업 기능이 집중되며 빠르게 성장한 지역이었다. 그러나 급속한 도시화와 부실한 기반 시설, 군수 창고와 민간 주거지의 혼재, 화재 예방 체계의 미비가 겹치면서 대형 참사로 이어졌다. 이 사건은 대한국 근대화의 어두운 면을 드러낸 참사였다. 철도와 군수, 상업 시설은 빠르게 확장되었으나, 도시 행정과 소방 체계, 노동자 주거 정책은 이를 따라가지 못하였다. 화재로 인해 수많은 민간인이 피해를 입었고, 군수 물자와 행정 시설 일부도 손실되었다.
사건 이후 중추원과 언론은 정부의 책임을 강하게 추궁하였다. 군부는 군수 시설 보호 실패를 이유로 별도의 군사 행정권 확대를 요구하였고, 자유주의파는 도시 행정 개혁과 예산 감시권 확대를 주장하였다. 강경파는 근대화의 무리한 추진이 백성의 삶을 해쳤다고 비판하였다. 고조는 급히 피해 복구와 책임자 처벌을 지시하였으나, 여론은 쉽게 가라앉지 않았다. 용산대화재는 대한국의 근대화가 성과만큼이나 큰 사회적 비용을 동반하고 있음을 보여준 사건이었으며, 왕실의 통치 능력에 대한 의문을 증폭시켰다.
1910년~1924년. 대리청정의 시작
석도 분쟁, 제1차 간도전쟁, 대마도 해전, 중추원 폭탄 테러, 용산대화재 등 굵은 사건들은 모두 대한국제 선포 이후 고조의 정치적 입지를 약화시킨 사건들이었다. 이에 따라 명성황후의 지위도 급격히 낮아졌으며, 대외 위기는 군부의 발언권을 강화하였고, 대내 위기는 중추원의 정치적 역할을 확대시켰다. 왕실 내부에서도 고조의 판단력에 대한 의문이 제기되었다. 거문도 조약의 충격과 이어진 대외 분쟁, 정치 테러와 대형 재난은 고조의 치세가 더 이상 안정의 상징으로 받아들여지기 어렵게 만들었다. 고조는 왕실을 보존하기 위해 스스로 권력의 전면에서 물러나는 방안을 검토하게 되었다.
그러나 순종은 황태자로써 전혀 인기가 없었고 만 36세의 나이에 자식도 없었으며, 장애 의심설까지 떠돌 정도로 건강과 국정 운영 면에서 우려스러운 모습을 보였다. 또한 고조의 양위를 명성황후와 조정이 적극적으로 만류하면서 고조의 양위 발언이 이미 전국으로 확산된 가운데 실제로 양위를 선언했는지에 대한 의구심이 일파만파 커져갔다. 심지어는 고조에 노골적으로 비판적 태도를 보였던 군부와 강경파마저 순종이 일찍이 즉위하는 것에 반대하였다. 결국 고조는 양위 발언 2주만에 격렬한 양위 반대 외침 속에서 양위 대신 다른 방법을 선택하였다. 바로 대리청정이었다.
고조는 순종에게 대리청정을 맡기는 듯 했으나, 조정의 권유에 따라 의친왕과 영친왕 중 1인을 황태제(皇太弟)로 책봉한 후 순종을 대신하여 외무와 군무를 맡기고자 했다. 이때 의친왕과 영친왕 모두 군대에 입대하여 군사교육을 받았다는 공통점은 있었다. 그러나 의친왕은 신북벌론을 외치며 반일적인 행보를 보였고, 영친왕은 신흥강국인 미국, 정통강국인 영국 등과의 관계를 우려하여 북벌신중론 및 친일적인 행보를 보였다. 고조는 군부의 반발을 우려하여 의친왕을 황태제로 책봉하였다. 따라서 고조의 지원 아래 장교의 경험도 있어 군부와 친밀한 의친왕이 석상에서 본격적으로 모습을 드러내었다.
1914년~1916년. 1차 세계대전 및 호제전쟁
대한국은 경부선, 경의선 뿐만 아니라 전국 철도화를 통한 국토 근대화 사업을 추진하고 있었다. 또한 조선업과 중공업을 육성하여 기존 농경공업의 한계를 보완하고 지속적인 개항장 확장과 수출입 다변화를 꾀하면서 시장의 규모를 성장하였다. 인구는 어느새 2,500만을 목전에 두었고 한성의 인구는 400만 직전에 달하여 한성부와 용산, 인천, 개성을 잇는 광역도시권이 형성되었다. 이처럼 한국의 산업근대화가 성공적으로 완수되었으나, 정치적 불안은 어느 때보다도 가장 높았다.
그러다가 1914년, 1차 세계대전의 발발 소식이 들렸고, 동맹국이었던 러시아와 프랑스가 영국과 함께 삼국협상의 일환으로 참전하면서, 삼국연합을 따라 대한국이, 영일동맹에 따라 일본국이 함께 같은 편으로 참전을 선언한다. 이때 대한국과 일본국 간 긴밀한 대화가 오고갔는데, 바로 1912년, 북양정부에 의해 멸망해버린 청나라의 잔존을 어떻게 나눠먹는지에 대한 것이었다. 당시 대한국은 신북벌론이, 일본국은 대륙화운동(또는 대륙국가화)이 대내 정치에서 뿌리깊게 작용하고 있었고 군부의 영향력이 날로 강해지고 있었고, 이의 이해관계가 통하게 된 것이다.
대한국과 일본국은 이전에 거문도 조약으로 합의되었던 황허강 경계에 대해 화북은 대한국이, 화남은 일본국이 지배하기로 재합의하였고, 이에 대해 러시아에 사전 통보하였다. 그런데, 러시아는 한국과 일본이 협조하여 중국을 분할 통치하고자 하는 계획에 부정적이었고, 이를 위안스카이에게 알리게 된다. 이에 위안스카이는 중국의 권위를 되찾자는 명분 아래 국민들을 선전하여 겨우 공화정이 된 중국을 제국화하기 위한 홍헌제재를 1915년에 발표한다.
그런데 발표 직후 중국 남부 각지에서 이에 반대하는 호국군이 거병하여 반란을 일으키자, 위안스카이는 오히려 고조에게 서신을 보내 같은 제국으로써 공화주의 세력을 막아달라고 요청한다. 이에 고조는 이를 빌미로 국가 내부에서도 공화파와 자유주의파의 득세를 정리할 수 있으며 중국으로부터 충분한 이권을 챙길 수 있을 것이라고 보고 지원군을 보내기로 하였다. 이에 순종은 지원군 편제를 꾸리는데 이때 신북벌론에 우호적이던 의친왕 대신 영친왕을 함께 보내는 것을 선택한다. 이는 훗날 대한국의 황실에 큰 변혁을 가져오게 된다.
호제전쟁은 위안스카이가 황제가 되도록 하기 위한 전쟁이다. 결국 위안스카이는 대한국과 잇따라 들어온 일본국의 개입에 따라 호국군들을 척결하고 쑨원 등 공화주의 세력을 숙청하는데 성공하였으나, 정작 황제가 되자마자 6개월만인 1916년 6월 6일에 사망한다. 이에 복벽운동이 급속도로 전개되고 돤치루이가 겨우 복고된 중화제국 정부를 싹 갈아엎고 총통직을 승계하면서, 중화민국은 막장으로 치닫는다. 대한국은 위안스카이 대에 합의한 한중 16개조 합의를 이행하라고 압박하였으나, 돤치루이 내각이 이를 거절하자 북양정부에 대한 선전포고를 한다. 또한 중국 남방에서 대한국에 대한 굴욕과 돤치루이 내각의 무력 통일안에 반발하면서 호법전쟁이 발발하는데, 이는 일본국이 개입하면서 북쪽은 대한국이, 남쪽은 일본국이 영향력을 행사하기 시작한다.
1917년. 제2차 간도전쟁
대한국은 제2차 간도전쟁을 통해 만주 전역을 확보하고자 했고, 더 나아가 랴오둥 일대를 실효 지배하여 고토로 인식되는 요서도 장악하고자 했다. 호법전쟁과 리위안훙 등의 세력에 의해 정신이 없던 북양정부의 돤치루이 내각은 반년동안 장쭤린 등을 보내 방어를 지시했지만 결국 1917년 9월, 서간도와 북간도를 기점으로 국경을 새로 정하고 한중 16개조 합의의 이행을 선언한다고 발표했다. 영친왕은 이를 승낙하여 대한국은 독일의 샨둥 반도의 키아우초우 조계지, 요동 확보 등 고토의 확장 뿐만 아니라 만주의 모든 권익과 해당 지역에 대한 한국인 우대권을 보장받았다.
그러나 이러한 승리에도 불구하고 의친왕을 필두로 하는 군부는 요서를 장악하지 못했고, 몽골로 나아가는 진출로도 확보하지 못했으며, 북중국을 완전히 정복하려는 명분 자체를 우리가 포기했다는 등의 비판으로 영친왕의 업적을 깎아내렸다. 이때부터 영친왕과 의친왕 간 사이는 매우 멀어졌으며, 명성황후가 위기의식을 느끼고 순종을 종용하여 영친왕을 차기 황태자로 책봉하도록 하면서 명성황후와 의친왕 간 사이 또한 증오 관계로 남게 된다.
1918년~1919년. 파리 강화 회의
대한국과 일본국은 공동으로 1918년, 승전국의 지위로써 파리 강화 회의에서 다음을 주장하였다.
{{|인용문 1. 대한국과 일본국은 인종 차별 철폐를 지지하며 이에 안건을 공동으로 발의한다. 2. 대한국이 독일 샨둥 반도의 점령지를 소유하는데 일본국은 지지한다. 3. 일본국이 독일 태평양 제도 점령지를 소유하는데 대한국은 지지한다. 4. 대한국과 일본국은 중국에 대한 아편 밀매를 강력히 규탄한다. |}}
이 중 1번 항목에 대해서는 영국이 강력히 반발하면서 끝내 묵살되었지만, 나머지 항목에 대해서는 열강들이 동의하면서 대한국은 샨둥 반도의 영향력을 확보하게 되었다.
1922년. 한소조약
러시아 제국이 공산화되면서, 소비에트가 들어섰다. 새로 들어선 소비에트 정권은 대한국의 만주에 대한 팽창에 굉장히 회의적이었고, 몽골과 연해주에 대한 간섭을 우려하였다. 특히 연해주에 있는 한국인들에 대한 탄압이 현지에서 빈번히 발생하면서 대한국은 소비에트와의 새로운 관계를 모색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한국 입장에서도 중국과의 전선이 이미 충분히 긴데, 소련과의 전선까지 맞닿게 되면 굉장한 군사적 부담이 있었을 것이었다. 한국은 적백내전이 완전히 종료되는 1922년까지 소련과의 지속적인 대화를 유지하다가 마침내 한소조약을 체결하였다.
하지만, 이 한소조약은 대한국과 일본국 간의 화해 스탠스를 다시 한번 무너뜨리는 계기가 되었다. 한국이 일본의 시베리아 개입에 대해 동의하지 않는다는 의견을 보인 것이다. 당시 일본은 백군 편을 노골적으로 들면서 사할린 섬과 동시베리아를 장악하려는 시도를 하고 있었다. 그런데 한국은 오히려 소련의 연해주와 극동 지역 영토를 인정하면서 한국, 소련과 일본이 서로 군사적 충돌을 피하는 것을 지지한다고 선언한다. 일본은 이에 대해 한국의 간섭이 도를 넘었다면서 맹렬히 한국을 비난하였다.
더욱이 이 사건은 군부와 강경파의 분노를 샀는데, 연해주를 고토로 인식하고 있었던 와중에 발해의 활동 무대였던 연해주를 통채로 소련의 영토로 인정해버린 것 자체가 국치스러운 일이라며 통탄해했기 때문이다. 또한 소련은 공산주의 정권이었기 때문에 그러한 정권과 합의하는 것이 과연 올바른 일이었나는 질문에 대해서도 회의적이었다. 이러한 외교를 주도한 인물이 심지어 순종과 영친왕이었기 때문에 중추원은 수차례 마비되었고, 의친왕은 이를 아득바득 갈게 된다.
순종(1924~1926)
생애
순종은 고조의 적장자로 태어나 일찍이 황태자로 책봉되었다. 고조가 대한국제를 선포하고 조선의 국호와 국가체제를 개편한 뒤, 순종은 자연스럽게 대한국 황실의 정통 계승자로 여겨졌다. 그러나 그의 위상은 결코 안정적이지 않았다. 고조 말기 대한국은 거문도 조약 이후의 외교적 후유증, 석도 분쟁, 제1차 간도전쟁, 대마도 해전, 중추원 폭탄 테러, 용산대화재 등 연이은 사건으로 크게 흔들리고 있었다. 이 과정에서 군부와 중추원의 발언권은 점차 커졌고, 고조의 권위는 눈에 띄게 약화되었다.
순종은 황태자로서 정통성은 분명하였으나, 대중적 인기는 낮았다. 평생동안 후사가 없었고, 건강 또한 좋지 않았다. 이 때문에 조정 안팎에서는 그가 격변하는 대한국의 정국을 감당할 수 있는지에 대한 의문이 제기되었다. 심지어 일부에서는 순종의 판단력과 국정 수행 능력을 문제 삼으며 장애 의심설까지 퍼뜨렸다. 이러한 소문은 사실 여부와 무관하게 황태자의 권위를 크게 약화시켰다.
고조는 한때 왕실을 보존하기 위해 순종에게 양위하는 방안을 검토하였다. 그러나 명성황후와 조정은 위와 같은 이유로 순종에 대한 양위를 강하게 만류하였다. 순종의 낮은 인기와 건강 문제, 후사 부재가 명백한 상황에서 고조가 곧바로 양위할 경우, 오히려 황실 전체가 더 큰 정치적 위기에 빠질 수 있었기 때문이다. 흥미롭게도 고조에게 비판적이던 군부와 강경파마저 순종의 조기 즉위에는 반대하였다. 이들은 고조의 통치에 불만을 품고 있었지만, 순종이 군부와 중추원, 각 정치 계파를 통제할 수 있는 인물이라고 보지는 않았다.
결국 고조는 양위 대신 대리청정을 선택하였다. 명목상으로는 순종에게 대리청정을 맡기는 형식을 취하였으나, 실제로는 순종의 건강과 정치적 역량에 대한 우려가 컸기 때문에 의친왕과 영친왕 중 한 명에게 군무와 외무를 보좌하게 하는 방안이 논의되었다. 의친왕은 신북벌론을 주장하며 강경한 반일/반영정책 및 대륙 진출 노선을 보였고, 영친왕은 영국과 미국, 일본과의 관계 악화를 우려하는 북벌신중론과 대일조정론을 내세웠다. 고조는 군부의 반발을 고려하여 의친왕을 전면에 내세웠고, 이때부터 의친왕은 대한국 정국에서 본격적인 실권자로 부상하였다.
순종의 입지는 이후에도 계속 약화되었다.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고 대한국이 협상국 측으로 참전하면서, 대륙 정책과 중국 문제는 대한국 정치의 핵심 현안이 되었다. 이 과정에서 의친왕은 군부와 강경파의 지지를 받았고, 영친왕은 상대적으로 신중한 외교 노선을 대표하였다. 순종은 이들 사이에서 명목상 황태자이자 대리청정의 중심 인물로 남아 있었으나, 실제 정국을 주도하지는 못하였다. 1915년 이후 위안스카이의 제정 시도와 호제전쟁, 북양정부와의 충돌, 제2차 간도전쟁이 이어지면서 순종의 존재감은 더욱 흐려졌다. 영친왕이 중국 전선과 외교 협상에서 일정한 성과를 거두자, 명성황후는 순종을 종용하여 영친왕을 차기 계승 구도의 중심에 세우려 하였다. 이는 의친왕과 명성황후, 의친왕과 영친왕 사이의 관계를 결정적으로 악화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1922년 한소협약은 순종에게도 큰 정치적 부담이 되었다. 대한국은 소련과의 전선 확대를 피하기 위해 협약을 체결하였고, 연해주와 극동 지역에 대한 소련의 영유를 사실상 인정하였다. 그러나 군부와 강경파는 이를 고토를 포기한 굴욕 외교로 보았다. 특히 연해주를 발해의 활동 무대이자 장차 회복해야 할 지역으로 인식하던 세력에게 한소협약은 받아들이기 어려운 타협이었다. 이 협약을 주도한 인물들이 순종과 영친왕으로 인식되면서, 중추원은 여러 차례 파행되었고 의친왕은 명성황후, 순종 및 영친왕 계열에 대한 적개심을 더욱 키우게 되었다.
고조가 붕어한 뒤 순종은 마침내 즉위하였다. 그러나 그의 치세는 오래가지 못했다. 이미 대한국의 실권은 상당 부분 군부와 중추원, 그리고 의친왕에게 넘어가 있었고, 순종은 즉위와 동시에 거대한 정치적 압박에 직면하였다. 그는 황실의 정통성을 회복하고 각 계파를 화해시키려 하였으나, 강경유학파, 자유주의파, 온건개혁파, 황당파, 군부, 영친왕계 보수파 사이의 갈등은 순종 개인이 감당하기에는 지나치게 복잡하였다. 더군다나 순종은 정치적 스트레스와 병약한 체질로 인해 즉위 후 급격히 건강이 악화되었고, 끝내 즉위 2년 만에 그는 병으로 사망하였다.
순종의 죽음은 대한국 황실의 정통 계승 구도를 다시 흔들었다. 순종의 애정을 받았던 영친왕과 일부 보수파는 의친왕의 부상을 막고 왕실 정통성을 회복한다는 명분으로 반란을 일으켰으나, 이미 실권을 장악한 군부에 의해 빠르게 진압되었다. 이 사건 이후 의친왕은 군부와 중추원의 지지를 받아 즉위하였고, 그가 곧 신조이다.
업적
순종의 업적은 재위 기간이 짧고 실권이 제한적이었기 때문에 크지 않다. 그러나 완전히 무의미한 군주였다고 보기는 어렵다. 첫째, 순종은 고조 말기의 양위 위기를 대리청정 체제로 전환시키는 데 일정한 역할을 하였다. 고조가 곧바로 양위하였다면 황실은 순종의 낮은 인기와 건강 문제로 더 큰 혼란에 빠졌을 가능성이 컸다. 순종은 명목상 대리청정의 중심에 서면서, 고조의 권위와 차세대 권력 구조 사이를 연결하는 완충 역할을 하였다. 둘째, 순종은 영친왕을 통해 대외 신중론을 제도권 안에 유지하였다. 의친왕과 군부가 신북벌론과 대륙 팽창을 강하게 주장하는 상황에서, 순종과 영친왕 계열은 영국·미국·일본과의 관계 악화를 우려하며 북벌신중론을 제기하였다. 이는 대한국 내부에서 군부 강경론만이 유일한 선택지가 아니었음을 보여주는 중요한 흐름이었다. 셋째, 한소협약 체결 과정에서 순종은 전선 확대를 피하는 현실적 외교 노선을 지지하였다. 이 협약은 국내적으로는 큰 반발을 불러왔으나, 대한국이 만주와 중국 전선에 이어 소련과도 즉각 충돌하는 상황을 피하게 만든 조치였다. 군부와 강경파는 이를 굴욕으로 보았지만, 외교적으로는 대한국이 과도한 다면전쟁에 빠지는 것을 지연시킨 선택이었다.
순종은 즉위 후 경제의 안정과 동시에 황실 정통성을 유지하려 노력하였다. 비록 실패로 끝났지만, 그는 의친왕과 영친왕, 중추원과 군부, 우파와 좌파 사이의 균형을 안정적으로 잡으려 하였다. 이는 대한국이 신조 시대의 군국주의로 급격히 넘어가기 전, 황실 중심의 조정 정치가 마지막으로 시도된 사례였다. 그러나 이러한 노력은 대부분 제한적이고 방어적인 성격을 가졌다. 순종은 새로운 국가 비전을 제시하지 못했고, 군부와 중추원의 성장도 막지 못했으며, 영친왕과 의친왕의 경쟁을 수습하지도 못했다. 따라서 후대에는 순종의 업적을 다음과 같이 정리한다. 그는 고조 말기의 붕괴를 잠시 늦추었고, 영친왕을 통해 온건 외교 노선을 유지하려 했으며, 한소협약으로 소련과의 즉각적 충돌을 피했다. 그러나 그는 대한국의 권력 중심이 왕실에서 군부와 중추원으로 이동하는 흐름을 막지 못했고, 결국 그의 죽음과 영친왕 반란의 실패는 신조 시대의 개막을 가능하게 하였다.
평가
순종은 대한국사에서 가장 비극적인 과도기 군주 가운데 하나로 평가된다. 그는 정통성 면에서는 명백한 고조의 후계자였으나, 정치적 능력과 건강, 대중적 지지 면에서는 취약하였다. 고조 말기부터 이미 군부와 중추원이 성장하고 있었고, 대한국은 대외 팽창과 전쟁, 내부 계파 갈등으로 심각하게 흔들리고 있었다. 순종은 이러한 상황을 주도적으로 해결할 만한 정치적 기반을 갖추지 못했다. 당대의 평가는 대체로 부정적이었다. 군부와 강경파는 순종을 유약한 군주로 보았고, 한소협약과 영친왕계 외교 노선을 굴욕적 타협으로 비판하였다. 자유주의파와 강경파는 순종이 의회 권한 확대를 명확히 추진하지 못했다고 비판하였으며, 보수파 마저는 그가 황실의 권위를 충분히 세우지 못했다고 보았다. 반면 온건개화파는 순종을 급격한 군국주의화를 막을 수 있었던 마지막 완충자로 평가하였다.
후대의 평가는 조금 더 복합적이다. 순종은 무능한 군주라기보다는, 이미 군부와 중추원, 왕실 내 계파가 지나치게 강해진 상황에서 즉위한 약한 군주였다고 보는 시각이 많다. 그는 고조의 외교적 실패와 신조의 군국주의 사이에 끼어 있었고, 자신의 독자적 시대를 열기에는 주어진 시간이 너무 짧았다. 특히 즉위 2년 만의 병사와 그 직후 발생한 영친왕 반란은 순종 개인의 실패라기보다, 대한국 황실 계승 질서가 이미 심각하게 균열되어 있었음을 보여주는 사건으로 해석된다.
다만 순종에게도 한계는 분명하였다. 그는 의친왕과 영친왕 사이의 경쟁을 조정하지 못했고, 명성황후와 영친왕을 중심으로 한 보수·외교파와 군부 강경파의 대립을 완화하지 못했다. 또한 한소협약을 통해 소련과의 전면 충돌을 피한 것은 현실적 선택이었으나, 국내 여론과 군부 정서를 설득하는 데 실패하였다. 이 때문에 순종 치세는 대한국이 온건한 외교국가로 남을 마지막 가능성이 사라지고, 신조의 군국주의적 팽창으로 넘어가는 짧은 과도기로 평가된다. 요컨대 순종은 스스로 대한국을 크게 변화시킨 군주라기보다, 고조가 남긴 불안정한 근대국가와 신조가 열어젖힌 팽창적 제국 사이에 놓인 비극적 연결고리였다. 그의 짧은 치세는 대한국 황실의 전통적 정통성이 더 이상 국가를 통합하기에 충분하지 않았음을 보여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