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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의 테크노크라트, 정치인. 미국의 로널드 레이건, 영국의 마거릿 대처와 함께 1980년대에 새계 정치의 [[신자유주의]] 흐름을 주도한 인물이다. 석준은 고등학생때 개명한 후의 이름이며 본명은 광조고 호는 '''청사 (靑史)'''. | 대한민국의 테크노크라트, 정치인. 미국의 로널드 레이건, 영국의 마거릿 대처와 함께 1980년대에 새계 정치의 [[신자유주의 (아름다운 나라)|신자유주의]] 흐름을 주도한 인물이다. 석준은 고등학생때 개명한 후의 이름이며 본명은 광조고 호는 '''청사 (靑史)'''.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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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8년 경상북도 성주군에서 4남 3녀 중 차남으로 태어났다. 성주에서 초등학교와 중학교를 졸업하고 성주농고에 진학하였으나 가난으로 인해 중퇴한 이후 검정고시에 합격했다. 서울대 정치학과에 입학하였고 1960년 졸업하였다. | 1938년 경상북도 성주군에서 4남 3녀 중 차남으로 태어났다. 성주에서 초등학교와 중학교를 졸업하고 성주농고에 진학하였으나 가난으로 인해 중퇴한 이후 검정고시에 합격했다. 서울대 정치학과에 입학하였고 1960년 졸업하였다. | ||
서울대에서 우수한 성적을 받은 덕에 장학금을 받아 미국으로 유학하게 되었는데, 미국으로 떠나기 전날, 유학을 가는 학생들을 만나 격려하던 [[이승만 (아름다운 나라)|이승만]]과 처음 만났다. 1960년부터 미국 시카고 대학교 대학원에서 경제학을 수학하였는데, 이 시기가 서석준 인생의 큰 전환점이었다. 당시 시카고대학교 대학원에서 경제학을 가르치던 교수가 자그마치 [[신자유주의]]의 대부라고 불리는 '''[[밀턴 프리드먼]]'''이었기 때문이다. 신자유주의에 매료된 서석준은 그 신선한 이념을 열정적으로 탐구했고 1964년 매우 우수한 성적으로 경제학 석사 학위를 취득했다. 이 시기부터 서석준은 신자유주의의 열렬한 지지자가 되었다. | 서울대에서 우수한 성적을 받은 덕에 장학금을 받아 미국으로 유학하게 되었는데, 미국으로 떠나기 전날, 유학을 가는 학생들을 만나 격려하던 [[이승만 (아름다운 나라)|이승만]]과 처음 만났다. 1960년부터 미국 시카고 대학교 대학원에서 경제학을 수학하였는데, 이 시기가 서석준 인생의 큰 전환점이었다. 당시 시카고대학교 대학원에서 경제학을 가르치던 교수가 자그마치 [[신자유주의 (아름다운 나라)|신자유주의]]의 대부라고 불리는 '''[[밀턴 프리드먼]]'''이었기 때문이다. 신자유주의에 매료된 서석준은 그 신선한 이념을 열정적으로 탐구했고 1964년 매우 우수한 성적으로 경제학 석사 학위를 취득했다. 이 시기부터 서석준은 신자유주의의 열렬한 지지자가 되었다. | ||
===경제 관료=== | ===경제 관료===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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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년 정치인=== | ===청년 정치인=== | ||
[[파일:도열.jpg|333px|썸네일|왼쪽|[[김영삼 (아름다운 나라)|김영삼]] 총통을 맞이하기 위해 활주로에 도열한 당정청 고위 인사들. 가장 오른쪽이 서석준.<ref>맨 왼쪽에 [[심상우]] 총리(당시 [[민주국민당]] 원내대표)도 보인다.</ref>]] | [[파일:도열.jpg|333px|썸네일|왼쪽|[[김영삼 (아름다운 나라)|김영삼]] 총통을 맞이하기 위해 활주로에 도열한 당정청 고위 인사들. 가장 오른쪽이 서석준.<ref>맨 왼쪽에 [[심상우]] 총리(당시 [[민주국민당]] 원내대표)와 고 [[이범석 (1925, 아름다운 나라)|이범석]] 부총리(당시 외무부장관 대행)도 보인다.</ref>]] | ||
이승만이 총통직에서 퇴임한 후에는 [[민주국민당]] 사무총장을 맡았다. 1976년 [[제7회 대한민국 국회의원 선거|7회 총선]]에서 고향인 성주에 출마해 59%의 득표율로 국회의원에 처음 당선되었다. [[김영삼 (아름다운 나라)|김영삼]] 정부 시기에는 [[심상우]], [[김재익]]과 함께 [[심김서|SKS 그룹]]<ref>친심김서계를 부르던 말. 세 명의 이니셜을 딴 것이다.</ref>을 이끌며 김영삼을 견제하였고 김영삼의 지지율이 하락하던 2기 김영삼 정부 시절에는 지지율을 반등시키려는 김영삼으로부터 국무원 | 이승만이 총통직에서 퇴임한 후에는 [[민주국민당]] 사무총장을 맡았다. 1976년 [[제7회 대한민국 국회의원 선거|7회 총선]]에서 고향인 성주에 출마해 59%의 득표율로 국회의원에 처음 당선되었다. [[김영삼 (아름다운 나라)|김영삼]] 정부 시기에는 [[심상우]], [[김재익]]과 함께 [[심김서|SKS 그룹]]<ref>친심김서계를 부르던 말. 세 명의 이니셜을 딴 것이다.</ref>을 이끌며 김영삼을 견제하였고 김영삼의 지지율이 하락하던 2기 김영삼 정부 시절에는 지지율을 반등시키려는 김영삼으로부터 [[대한민국 국무총리 (아름다운 나라)|국무원 총리]]직을 제안받아 국무총리가 되었다. 이후 심김서가 분열하면서 새로이 형성된 서석준계는 YS계를 흡수하였고 대선 후보 선출을 위한 당내 경선에서 김재익을 누르고 승리했다. 이후 [[제8회 대한민국 총통 선거|제8회 대선]]에서 52%의 득표율 [[자유당 (아름다운 나라)|자유당]]의 [[박순천]] 후보를 누르고 대한민국 3대 [[대한민국 총통|총통]]에 당선됐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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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석준 정부=== | ===서석준 정부=== | ||
[[파일: | [[파일:서석준 취임.jpg|300px|썸네일|가운데|취임 기념 사진 (1982)]] | ||
서석준 정부는 김영삼 정부 시절 만들어진 각종 경제규제들을 대거 철폐했다. 또한 [[서석준]]은 [[심상우]], [[김재익]]과 함께 민국당의 젊고 활동적인 이미지를 유지했고 소련의 고르바초프와도 수 차례 만나며 경제협력을 논의했다. 그의 첫 번째 임기였던 1980년대 중반은 단군 이래 최대의 호황기로 불렸기에 복지 축소의 피해가 비교적 적었다. 이런 상황에서 경제도 건실하게 성장하고 특별한 재난도 발생하지 않았기에 서석준은 [[제9회 대한민국 총통 선거|1986 대선]]에서 무리 없이 재선에 성공했다. 대선 직전 [[만주 자치령|만주자치령]] 민정장관 [[라정남]]이 만주 지역주의 극좌 테러단체 [[열투단]] 단원에게 살해당한 사건이 터져 공안정국이 조성된 것 또한 서석준의 재선에 도움을 주었다. | 서석준 정부는 김영삼 정부 시절 만들어진 각종 경제규제들을 대거 철폐했다. 또한 [[서석준]]은 [[심상우]], [[김재익]]과 함께 민국당의 젊고 활동적인 이미지를 유지했고 소련의 고르바초프와도 수 차례 만나며 경제협력을 논의했다. 그의 첫 번째 임기였던 1980년대 중반은 단군 이래 최대의 호황기로 불렸기에 복지 축소의 피해가 비교적 적었다. 이런 상황에서 경제도 건실하게 성장하고 특별한 재난도 발생하지 않았기에 서석준은 [[제9회 대한민국 총통 선거|1986 대선]]에서 무리 없이 재선에 성공했다. 대선 직전 [[만주 자치령|만주자치령]] 민정장관 [[라정남]]이 만주 지역주의 극좌 테러단체 [[열투단]] 단원에게 살해당한 사건이 터져 공안정국이 조성된 것 또한 서석준의 재선에 도움을 주었다. | ||
2기 정부가 출범한지 얼마 지나지 않아 당시 민국당 원내대표였던 [[김재익]]이 탈당 후 [[민주당 (아름다운 나라)|민주당]]을 창당했다. 김재익은 서석준 정부 1기 후반부터 서석준과 의견 대립을 해왔었다. 거기에다 1980년 후반부터 경제 호황이 끝나면서 경제 특수를 누릴 수 없게 되었다. 1990년 대선에서 민국당 [[심상우]] 후보가 통합야당인 [[민주자유당|민자당]]의 [[김대중 (아름다운 나라)|김대중]] 후보에게 패배하면서 서석준은 정권 재창출에는 실패했다. | 2기 정부가 출범한지 얼마 지나지 않아 당시 민국당 원내대표였던 [[김재익]]이 탈당 후 [[민주당 (아름다운 나라)|민주당]]을 창당했다. 김재익은 서석준 정부 1기 후반부터 서석준과 의견 대립을 해왔었다. 거기에다 1980년 후반부터 경제 호황이 끝나면서 경제 특수를 누릴 수 없게 되었다. 1990년 대선에서 민국당 [[심상우]] 후보가 통합야당인 [[민주자유당|민자당]]의 [[김대중 (아름다운 나라)|김대중]] 후보에게 패배하면서 서석준은 정권 재창출에는 실패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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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주노믹스==== | |||
[[파일:발언.jpg|450px|썸네일|오른쪽|전경련 행사에 참석해 연설하는 서석준 총통 (1983)]] | |||
'''석주노믹스'''({{llang|en|Seokjunomics}})는 서석준 정부의 경제정책을 의미하는 말로, 미국 대통령 레이건의 레이거노믹스에서 따왔다. 서석준은 취임과 동시에 세금 인하, 규제 철폐, 정부 축소를 그의 정부의 가장 핵심적 정책이라고 선언했다. 이에 따라 서석준 정부는 복지 예산을 삭감하고 공무원 수를 줄였다. 또한 전매공사, 한국철강 등의 공기업들을 민영화했고 기업들에 대한 각종 규제를 철폐하였다. 서석준 정부 시기 경제성장률은 연평균 약 9%에 이르렀으며 김영삼 정부 시기부터 시작된 중산층의 증가가 가속화되었다. | |||
하지만 복지 축소로 인해 사회안전망이 얇아졌으며 모든 사회문제를 경제적인 관점에서만 본다는 비판이 존재했다. 또한 서석준 두 차례의 석유파동으로 인해 '''중화학공업을 포기'''하고 곧바로 3차 산업에 투자하려했지만 참모들이 뜯어말려 의사를 철회하기도 했다.<ref>중화학공업이 여전히 우리나라 경제에서 큰 부분을 차지하고있다는 점을 감안하면 큰일날 뻔한 결정이었다.</ref> | |||
====테러와의 전쟁==== | |||
[[라정남]]의 암살로 인해 입안된 정책으로, 2기 정부 수립 직후 시행되었다. 주 목적은 라정남을 암살한 [[열투단]]을 뿌리뽑는 것이었으나 한 술 더 떠 갱단들도 때려잡았다. 주요 범죄조직들이 큰 타격을 받았으며 덕분에 테러와의 전쟁 이후로 현재까지 양지에서 활동하는 대규모 범죄조직이 없다. | |||
하지만 열투단의 와해는 주로 민심의 이반에 의한 것이었으며 범죄조직들이 지하화되었다는 비판도 존재한다. | |||
====사회자유화 조치==== | |||
서석준은 개인의 권리를 매우 중요시했고, 그에 따라 각종 사회적 제약들을 폐지했다. 대표적인 예시가 통금 폐지다. 야간 통금 정책은 1972년과 1978년 두 차례에 걸쳐 완화되었으나 당시까지 남아있었는데 서석준은 취임하자마자 통금 조치를 폐지했다. 서석준은 또한 학교의 두발 규정은 거의 폐지했다.<ref>이승만 시절 한 차례 완화되어 서석준 정부가 폐지하기 직전에는 여학생은 귀밑 10cm, 남학생은 10cm였다. 정계를 은퇴하는 이승만이 당시 총통이었던 김영삼에게 임기 중에 학교ㆍ직장에서의 두발복장 규정을 폐지ㆍ금지해달라라고 요청했으나 김영삼이 그러기로 해놓고 이승만이 죽은 후에는 모른 척 했다는 미확인 썰이 있다.</ref> | |||
====노조와 싸워라!==== | |||
{{인용문|'''노조가... 말대꾸...??'''|[[서석준]]}} | |||
서석준 정부는 노조에 매우 부정적이었다. 한국노총, 전국직맹 등의 진보 성향 노조들이 정부가 추진하던 [[신자유주의 (아름다운 나라)|신자유주의]] 정책에 강력하게 반대하였기 때문이다. | |||
1985년, 서석준 정부는 채산성이 낮아 적자가 나던 강원도 사북 지역의 탄광에 대한 유지보조금 지급을 중단했는데, 이는 곧 탄광의 폐쇄를 의미했으므로 탄광노조는 전국적인 파업으로 맞섰다. 하지만 정부는 이미 2년치 석탄을 확보해놓은 상황이었고 노조의 파업을 철저히 무시했다. 결국 탄광노조가 7개월 만이 파업을 중단하면서 양측의 정면충돌은 정부의 승리로 끝났다. | |||
1987년, 전국 지하철노조가 임금 인상과 처우 개선을 요구하며 파업하자 파업 개시 9일만에 '구조조정'을 이유로 파업에 참여한 지하철 역무원 9백 명을 해고하는 조치를 단행하기도 하였다. 결국 남은 노조원들은 파업을 풀고 업무에 복귀하였다. | |||
===퇴임 후=== | ===퇴임 후=== |
2023년 2월 8일 (수) 07:38 기준 최신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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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세계관의 모든 인물, 사건, 단체, 국가는 가상이며 현실의 어떠한 인물이나 단체도 찬양하거나 비하할 의도가 없음을 알려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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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총통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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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3대 총통 서석준 徐錫俊 | Seoh Seokjun | |
본명 | 서광조 |
출생 | 1938년 9월 24일 |
경상북도 성주군 | |
국적 | 대한민국 |
거주지 | 서울수도시 구로구 |
직업 | 공무원, 정치인 |
현직 | 우남재단 명예이사장 |
임기 | 대한민국 국회의원 |
1976년 ~ 1988년 | |
제10대 대한민국 국무총리 | |
1977년 ~ 1979년 | |
제3대 대한민국 총통 | |
1982년 ~ 1990년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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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요
2003년 | 2022년 |
대한민국의 테크노크라트, 정치인. 미국의 로널드 레이건, 영국의 마거릿 대처와 함께 1980년대에 새계 정치의 신자유주의 흐름을 주도한 인물이다. 석준은 고등학생때 개명한 후의 이름이며 본명은 광조고 호는 청사 (靑史).
생애
학창 시절
1938년 경상북도 성주군에서 4남 3녀 중 차남으로 태어났다. 성주에서 초등학교와 중학교를 졸업하고 성주농고에 진학하였으나 가난으로 인해 중퇴한 이후 검정고시에 합격했다. 서울대 정치학과에 입학하였고 1960년 졸업하였다.
서울대에서 우수한 성적을 받은 덕에 장학금을 받아 미국으로 유학하게 되었는데, 미국으로 떠나기 전날, 유학을 가는 학생들을 만나 격려하던 이승만과 처음 만났다. 1960년부터 미국 시카고 대학교 대학원에서 경제학을 수학하였는데, 이 시기가 서석준 인생의 큰 전환점이었다. 당시 시카고대학교 대학원에서 경제학을 가르치던 교수가 자그마치 신자유주의의 대부라고 불리는 밀턴 프리드먼이었기 때문이다. 신자유주의에 매료된 서석준은 그 신선한 이념을 열정적으로 탐구했고 1964년 매우 우수한 성적으로 경제학 석사 학위를 취득했다. 이 시기부터 서석준은 신자유주의의 열렬한 지지자가 되었다.
경제 관료
1964년 귀국한 직후 5급 공채에 합격해 재무부 사무관이 되었다. 이후 1966년 재무부 물가국 과장, 1968년 재무부 물가국장, 1969년 재무부 경제기획국장을 역임했다. 이 과정에서 종합적인 물가대책을 도입하여 물가 안정에 기여했고 그 긍로로 근정포장을 수여받았다.. 1971년, 33세의 아주 젊은 나이로 경무대 경제수석비서관에 임명되었고, 이 때부터 정무수석 심상우, 민정수석 김재익과 함께 심김서라고 불리며 이승만의 심복으로 불렸다.
청년 정치인
이승만이 총통직에서 퇴임한 후에는 민주국민당 사무총장을 맡았다. 1976년 7회 총선에서 고향인 성주에 출마해 59%의 득표율로 국회의원에 처음 당선되었다. 김영삼 정부 시기에는 심상우, 김재익과 함께 SKS 그룹[4]을 이끌며 김영삼을 견제하였고 김영삼의 지지율이 하락하던 2기 김영삼 정부 시절에는 지지율을 반등시키려는 김영삼으로부터 국무원 총리직을 제안받아 국무총리가 되었다. 이후 심김서가 분열하면서 새로이 형성된 서석준계는 YS계를 흡수하였고 대선 후보 선출을 위한 당내 경선에서 김재익을 누르고 승리했다. 이후 제8회 대선에서 52%의 득표율 자유당의 박순천 후보를 누르고 대한민국 3대 총통에 당선됐다.
서석준 정부
서석준 정부는 김영삼 정부 시절 만들어진 각종 경제규제들을 대거 철폐했다. 또한 서석준은 심상우, 김재익과 함께 민국당의 젊고 활동적인 이미지를 유지했고 소련의 고르바초프와도 수 차례 만나며 경제협력을 논의했다. 그의 첫 번째 임기였던 1980년대 중반은 단군 이래 최대의 호황기로 불렸기에 복지 축소의 피해가 비교적 적었다. 이런 상황에서 경제도 건실하게 성장하고 특별한 재난도 발생하지 않았기에 서석준은 1986 대선에서 무리 없이 재선에 성공했다. 대선 직전 만주자치령 민정장관 라정남이 만주 지역주의 극좌 테러단체 열투단 단원에게 살해당한 사건이 터져 공안정국이 조성된 것 또한 서석준의 재선에 도움을 주었다.
2기 정부가 출범한지 얼마 지나지 않아 당시 민국당 원내대표였던 김재익이 탈당 후 민주당을 창당했다. 김재익은 서석준 정부 1기 후반부터 서석준과 의견 대립을 해왔었다. 거기에다 1980년 후반부터 경제 호황이 끝나면서 경제 특수를 누릴 수 없게 되었다. 1990년 대선에서 민국당 심상우 후보가 통합야당인 민자당의 김대중 후보에게 패배하면서 서석준은 정권 재창출에는 실패했다.
석주노믹스
석주노믹스(영어: Seokjunomics)는 서석준 정부의 경제정책을 의미하는 말로, 미국 대통령 레이건의 레이거노믹스에서 따왔다. 서석준은 취임과 동시에 세금 인하, 규제 철폐, 정부 축소를 그의 정부의 가장 핵심적 정책이라고 선언했다. 이에 따라 서석준 정부는 복지 예산을 삭감하고 공무원 수를 줄였다. 또한 전매공사, 한국철강 등의 공기업들을 민영화했고 기업들에 대한 각종 규제를 철폐하였다. 서석준 정부 시기 경제성장률은 연평균 약 9%에 이르렀으며 김영삼 정부 시기부터 시작된 중산층의 증가가 가속화되었다.
하지만 복지 축소로 인해 사회안전망이 얇아졌으며 모든 사회문제를 경제적인 관점에서만 본다는 비판이 존재했다. 또한 서석준 두 차례의 석유파동으로 인해 중화학공업을 포기하고 곧바로 3차 산업에 투자하려했지만 참모들이 뜯어말려 의사를 철회하기도 했다.[5]
테러와의 전쟁
라정남의 암살로 인해 입안된 정책으로, 2기 정부 수립 직후 시행되었다. 주 목적은 라정남을 암살한 열투단을 뿌리뽑는 것이었으나 한 술 더 떠 갱단들도 때려잡았다. 주요 범죄조직들이 큰 타격을 받았으며 덕분에 테러와의 전쟁 이후로 현재까지 양지에서 활동하는 대규모 범죄조직이 없다.
하지만 열투단의 와해는 주로 민심의 이반에 의한 것이었으며 범죄조직들이 지하화되었다는 비판도 존재한다.
사회자유화 조치
서석준은 개인의 권리를 매우 중요시했고, 그에 따라 각종 사회적 제약들을 폐지했다. 대표적인 예시가 통금 폐지다. 야간 통금 정책은 1972년과 1978년 두 차례에 걸쳐 완화되었으나 당시까지 남아있었는데 서석준은 취임하자마자 통금 조치를 폐지했다. 서석준은 또한 학교의 두발 규정은 거의 폐지했다.[6]
노조와 싸워라!
노조가... 말대꾸...?? 서석준 |
서석준 정부는 노조에 매우 부정적이었다. 한국노총, 전국직맹 등의 진보 성향 노조들이 정부가 추진하던 신자유주의 정책에 강력하게 반대하였기 때문이다.
1985년, 서석준 정부는 채산성이 낮아 적자가 나던 강원도 사북 지역의 탄광에 대한 유지보조금 지급을 중단했는데, 이는 곧 탄광의 폐쇄를 의미했으므로 탄광노조는 전국적인 파업으로 맞섰다. 하지만 정부는 이미 2년치 석탄을 확보해놓은 상황이었고 노조의 파업을 철저히 무시했다. 결국 탄광노조가 7개월 만이 파업을 중단하면서 양측의 정면충돌은 정부의 승리로 끝났다.
1987년, 전국 지하철노조가 임금 인상과 처우 개선을 요구하며 파업하자 파업 개시 9일만에 '구조조정'을 이유로 파업에 참여한 지하철 역무원 9백 명을 해고하는 조치를 단행하기도 하였다. 결국 남은 노조원들은 파업을 풀고 업무에 복귀하였다.
퇴임 후
퇴임 후에는 학술 활동을 활발히 했다. 각종 경제학 서적을 펴냈고 세계 여러 나라의 자유지상주의 경제학자들과 교류하며 신자유주의를 옹호했다. 다만 2008년 리먼 브라더스 사태 이후로는 정부의 시장개입에 대해 과거보다는 조금더 호의적인 태도를 취하고있다. 정치적으로 민감한 사안에 대해서는 언급을 자제하고있다.
현재 대한민국 학술원의 인문사회과학부회 6분과(경제분야) 회원이다.
여담
- 미국 대통령 로널드 레이건, 영국 총리 마가렛 대처와 같이 1980년대 신자유주의 흐름을 이끈 신자유주의 3인방으로 불린다. 그 셋은 정치적 가족이라는 소리까지 들을 정도로 사상의 많은 부분을 공유했다.
- 트럼펫을 잘 불었다. 대선 유세에서 이따금 트럼펫을 불며 재능을 쏠쏠하게 활용했고 요즘도 그의 페이스북에 종종 그가 트럼펫을 부는 영상이 올라온다.
- 노래도 매우 잘 불렀다. 전 경제부총리 강경식에 따르면 서석준은 팝송부터 대중가요까지 섭렵했다고 하고 최근에도 노래에는 관심이 많다고 한다. 트럼펫의 사례까지 봤을 때 음악적인 재능이 상당히 있는 듯.
- 성주군은 2004년 그의 호를 따 성주군청의 명칭을 '청사관'으로 바꾸었다.
선거 이력
연도 | 선거 종류 | 선거구 | 소속 정당 | 득표수 (득표율) | 당선여부 | 비고 | |
---|---|---|---|---|---|---|---|
1976 | 7회 총선 | 전국구 | - | 당선 | 초선 | ||
1982 | 8회 대선 | 대한민국 | 14,120,895표 (52
3%) |
당선 | 초선 | ||
1986 | 9회 대선 | (50.9%) | 당선 | 재선 |
소속 정당
소속 | 기간 | 비고 |
---|---|---|
무소속 | 1971 - 1973 | 정계 입문 |
1973- | 탈당 |
각주
- ↑ 출처
- ↑ 이준석의 별명이기도 하다.
- ↑ 맨 왼쪽에 심상우 총리(당시 민주국민당 원내대표)와 고 이범석 부총리(당시 외무부장관 대행)도 보인다.
- ↑ 친심김서계를 부르던 말. 세 명의 이니셜을 딴 것이다.
- ↑ 중화학공업이 여전히 우리나라 경제에서 큰 부분을 차지하고있다는 점을 감안하면 큰일날 뻔한 결정이었다.
- ↑ 이승만 시절 한 차례 완화되어 서석준 정부가 폐지하기 직전에는 여학생은 귀밑 10cm, 남학생은 10cm였다. 정계를 은퇴하는 이승만이 당시 총통이었던 김영삼에게 임기 중에 학교ㆍ직장에서의 두발복장 규정을 폐지ㆍ금지해달라라고 요청했으나 김영삼이 그러기로 해놓고 이승만이 죽은 후에는 모른 척 했다는 미확인 썰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