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 제2공화국 (리좀):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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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개요 ==
== 개요 ==
1945년 10월에 [[자유대한 망명정부 (리좀)|자유대한 망명정부]]의 인사들이 귀국하면서 성립된 정부이다. [[대한 제1공화국 (리좀)|대한 제1공화국]]과 마찬가지로 의원내각제를 채택하여 1961년 11월까지 존속했다. [[제3회 국민투표 (리좀)|1961년 10월 국민투표]]로 대한 제3공화국이 성립되면서 해체된다.
1945년 10월에 [[자유대한 망명정부 (리좀)|자유대한 망명정부]]의 인사들이 귀국하면서 성립된 정부이다. [[대한 제1공화국 (리좀)|대한 제1공화국]]과 마찬가지로 의원내각제를 채택하여 1961년 11월까지 존속했다. [[제3회 국민투표 (리좀)|1961년 10월 국민투표]]로 [[대한 제3공화국 (리좀)|대한 제3공화국]]이 성립되면서 해체된다.


== 제1공화국과의 차이 ==
== 제1공화국과의 차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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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만 이렇게 만반의 준비를 갖췄음에도, 초대 총리였던 [[여운형 (리좀)|여운형]]이 의회에게 단순히 총리 선출권 뿐만이 아니라 총리가 조각한 내각에 대한 동의안까지도 제출하는 선례를 만들면서, 이후 총리들은 내각을 구성할 때마다 의회에 동의를 구해야 했고, 군소정당이 난립했던 대한 제2공화국에서 이는 필연적으로 내각의 힘을 약화시킬 수 밖에 없었다.
다만 이렇게 만반의 준비를 갖췄음에도, 초대 총리였던 [[여운형 (리좀)|여운형]]이 의회에게 단순히 총리 선출권 뿐만이 아니라 총리가 조각한 내각에 대한 동의안까지도 제출하는 선례를 만들면서, 이후 총리들은 내각을 구성할 때마다 의회에 동의를 구해야 했고, 군소정당이 난립했던 대한 제2공화국에서 이는 필연적으로 내각의 힘을 약화시킬 수 밖에 없었다.
그나마 초반에는 여운형과 조봉암이라는 두 중도진보 성향 지도자들의 리더십으로 어찌 어찌 굴러가긴 했지만 1957년 [[조봉암 내각 (리좀)|조봉암 내각]]의 붕괴와 함께 대혼란이 시작되었고 1957년~1960년동안 총리가 4번 교체되며 혼란이 가속화되었다. 결국 군부가 정치적 혼란을 진압하겠다는 명목으로 [[1961년 5월 위기 (리좀)|5월 위기]]라 불리는 쿠데타를 일으켜 2공화국은 멸망한다.
== 평가 ==
비록 끝이 훈훈하지는 않았지만 그럼에도 제2공화국에서 추진된 개혁들은 대한공화국이 전쟁의 참화를 딛고 국제적인 선진국으로 나아가는데 크게 기여하였다.
* 여성에게 투표권 허용.
정확히는 1944년 망명정부의 임시 국민원에서 협의된 사항이긴 했지만 입법은 1945년 제헌국회에서 되었다.
* 사회보장제도 창설.
오늘날 대한공화국 복지 제도의 기틀을 마련했다고 평가받는다.
* 여진족에 대한 강제동화 정책 철폐.
* 일본에 우호적인 자세를 보여주면서 동아시아 내 평화를 확보.
과거 협상국이 베르사유 조약과 같이 가혹한 조건을 경제가 파탄난 독일에게 강요하다 나치 독일이 발흥했음을 감안하여 패전국 일본에 과도한 보상과 사과를 요구하지 않았다. 이는 여운형이 확고한 지일파적 성향을 가졌던 점도 한몫을 한다. 물론 그렇다고 일본을 내버려둔 것은 아닌데, [[하토야마 이치로 (리좀)|하토야마 이치로]] 총리가 추진한 일본 재무장 계획은 물고 늘어지며 태클을 걸었고, 요시다 시게루 총리가 처음 일본 총리 자격으로 방한했을 때 정부 요인 중 어느 누구도 마중 나가지 않으며(...) 개무시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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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산1968 리조니 Arrondissments 레스 어틀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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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의 식민 지배 없이 근대화에 성공해 이원집정부 체제를 받아들인 "동방의 불란서", 대한공화국의 여정을 다루는 대체역사·정치 세계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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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요 민족: 예맥, 삼한, 여진족, 한민족

*: 한국사에 포함되는지 아닌지에 대해 학술적인 논쟁이 있음.
E: 외세 침략 등의 이유로 인해 한민족에 의한 정권수립이 되지 않은 경우

대한공화국
大韓共和國 | Republic of Korea
자유대한 망명정부_(리좀) 자유대한 망명정부_(리좀)
국기 국장
弘益人間
홍익인간
1945년 11월 1일 ~ 1961년 11월 30일
성립 이전 신헌법 제정 이후
조선총독부 대한 제3공화국
자유대한정부
대한 소비에트 정부
국가 애국가
수도 경성 (京城)[1]
총 인구 25,393,764명 (1945년)
41,562,923명 (1961년)
정치 체제 공화제, 중앙집권제, 내각제
역대 대통령 김창암 (1945~1952)
여운형 (1952~1959)
윤보선 (1959~1961)
주요 총리 여운형 (1945~1950)
김규식 (1950~1953)
조봉암 (1953~1957)
장면 (1960~1961)
경제 체제 국가주도 계획경제, 일부 시장경제
총 GDP $30,000,000,000 상당 (1961년, 명목)
1인당 GDP $700 상당 (1961년, 명목)
통화 대한공화국 원
국제연합 가입 1945년 (창립국)[2]

개요

1945년 10월에 자유대한 망명정부의 인사들이 귀국하면서 성립된 정부이다. 대한 제1공화국과 마찬가지로 의원내각제를 채택하여 1961년 11월까지 존속했다. 1961년 10월 국민투표대한 제3공화국이 성립되면서 해체된다.

제1공화국과의 차이

대한 제2공화국은 양원제와 의원내각제를 정치적 기반으로 건설됐다. 명목상으로 국가 원수는 여전히 대통령이 수행하였지만 의회에서 선출되는 상징적인 존재로, 실권은 총리[3]에게 주어졌다. 실질적 국가원수였던 총리에게는 내각 임명권과 신임안 제청권이 주어졌으며, 제1공화국 말기의 혼란스러운 정치상에 대한 반성으로 내각 구성원들에 대한 보호 장치가 대폭 강화되고 대통령과 총리의 권한에 대한 교통정리가 이루어졌다.

다만 이렇게 만반의 준비를 갖췄음에도, 초대 총리였던 여운형이 의회에게 단순히 총리 선출권 뿐만이 아니라 총리가 조각한 내각에 대한 동의안까지도 제출하는 선례를 만들면서, 이후 총리들은 내각을 구성할 때마다 의회에 동의를 구해야 했고, 군소정당이 난립했던 대한 제2공화국에서 이는 필연적으로 내각의 힘을 약화시킬 수 밖에 없었다.

그나마 초반에는 여운형과 조봉암이라는 두 중도진보 성향 지도자들의 리더십으로 어찌 어찌 굴러가긴 했지만 1957년 조봉암 내각의 붕괴와 함께 대혼란이 시작되었고 1957년~1960년동안 총리가 4번 교체되며 혼란이 가속화되었다. 결국 군부가 정치적 혼란을 진압하겠다는 명목으로 5월 위기라 불리는 쿠데타를 일으켜 2공화국은 멸망한다.

평가

비록 끝이 훈훈하지는 않았지만 그럼에도 제2공화국에서 추진된 개혁들은 대한공화국이 전쟁의 참화를 딛고 국제적인 선진국으로 나아가는데 크게 기여하였다.

  • 여성에게 투표권 허용.

정확히는 1944년 망명정부의 임시 국민원에서 협의된 사항이긴 했지만 입법은 1945년 제헌국회에서 되었다.

  • 사회보장제도 창설.

오늘날 대한공화국 복지 제도의 기틀을 마련했다고 평가받는다.

  • 여진족에 대한 강제동화 정책 철폐.
  • 일본에 우호적인 자세를 보여주면서 동아시아 내 평화를 확보.

과거 협상국이 베르사유 조약과 같이 가혹한 조건을 경제가 파탄난 독일에게 강요하다 나치 독일이 발흥했음을 감안하여 패전국 일본에 과도한 보상과 사과를 요구하지 않았다. 이는 여운형이 확고한 지일파적 성향을 가졌던 점도 한몫을 한다. 물론 그렇다고 일본을 내버려둔 것은 아닌데, 하토야마 이치로 총리가 추진한 일본 재무장 계획은 물고 늘어지며 태클을 걸었고, 요시다 시게루 총리가 처음 일본 총리 자격으로 방한했을 때 정부 요인 중 어느 누구도 마중 나가지 않으며(...) 개무시를 했다.


  1. 일부 민족주의 진영에서는 경성을 한성(漢成)이나 한양(漢陽)이라 부르자 주장하기도 하였다. 결국 이는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2. 2공화국 헌법이 비준되기 직전에 가입했다.
  3. 공식 명칭은 "각료회의 의장"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