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브위키:오늘의 세계관/Test: 두 판 사이의 차이

편집 요약 없음
(문서를 비움)
태그: 비우기
 
(같은 사용자의 중간 판 2개는 보이지 않습니다)
1번째 줄: 1번째 줄:
 그에게는 언제나 비누 냄새가 난다.


 아니, 그렇지는 않다. 언제 나라고는 할 수 없다.
 그가 학교에서 돌아와 욕실로 뛰어가서 물을 뒤집어쓰고 나오는 때면 비누 냄새가 난다. 나는 책상 앞에 돌아앉아서 꼼짝도 하지 않고 있더라도 그가 가까이 오는 것을―그의 표정이나 기분까지라도 넉넉히 미리 알아차릴 수 있다.
 티이샤쓰로 갈아입은 그는 성큼성큼 내 방으로 걸어 들어와 아무렇게나 안락의자에 주저앉든가, 창가에 팔꿈치를 집고 서면서 나에게 빙긋 웃어 보인다.
 「무얼 해?」
 대개 이런 소리를 던진다.
 그런 때에 그에게서 비누 냄새가 난다. 그리고 나는 나에게 가장 슬프고 괴로운 시간이 다가온 것을 깨닫는다. 엷은 비누의 향료와 함께 가슴속으로 저릿한 것이 퍼져 나간다―이런 말을 하고 싶었던 것이다.
 「뭘해?」
 하고, 한 마디를 던져 놓고는 그는 으레 눈을 좀더 커다랗게 뜨면서 내 얼굴을 건너다본다.
 그 눈동자는 내 표정을 살피려는 것 같기도 하고 어쩌면 그보다도, 나에게 쾌활하게 웃고 떠들라고 권하고 있는 것 같기도 하다. 또 어쩌면 단순히 그 자신의 명랑한 기분을 나타내고 있는 것에 불과한지도 모른다.
 어느 편일까?
 나는 나의 슬픔과 괴롬과 있는 대로의 지혜를 일점에 응집시켜 이 순간 그의 눈 속을 응시하지 않을 수 없다.
 나는 알고 싶은 것이다.
 그의 눈 속에 과연 내가 무엇으로 비치는가?
 하루해와, 하룻밤 사이, 바위를 씻는 파도 소리 같이, 가슴에 와 부딪고 또 부딪고 하던 이 한 가지 상념에 나는 일순 전신을 불살라 본다.
 그러나 매일 되풀이하며 애를 쓰지만 나는 역시 알 수가 없다. 그의 눈의 의미를 헤아릴 수가 없다. 그래서 나의 괴롬과 슬픔은 좀더 무거운 것으로 변하면서 가슴속으로 가라앉아 버리는 것이다.
 그리고 다음 찰나에는 나는 그만 나의 자연스러운 위치 ― 그의 누이 동생이라는, 표면으로 보아 아무 시스러움도 불안정함도 없는 나의 위치로 돌아가 있지 않으면 안될 것을 깨닫는다.
 「인제 오우?」
 나는 이렇게 묻는다.
 그가 원한 듯이 아주 쾌활한 어투로, 이 경우에 어색하게 군다는 것이 얼마만한 추태인가를 나는 알고 있다.
 내 목소리를 듣고는 그도 무언지 마음 놓였다는 듯이,
 「응, 고단해 죽겠어. 뭐 먹을 거 좀 안 줄래?」
 두 다리를 쭈욱 뻗고 기지개를 켜면서 대답을 한다.
 「에에, 성화라니깐, 영작 숙제가 막 멋지게 씌어져 나가는 판인데------」
 나는 그렇게 투덜거려 보이면서 책상 앞에서 물러난다.
 「어디 구경 좀 해. 여류 작가가 될 가망이 있는가 없는가 보아줄께.」
 그는 손을 내밀며 몸까지 앞으로 썩하니 기울인다.
 「어머나, 싫어!」
 나는 노우트를 다른 책들 밑에다 잘 감추어 두고 아래층으로 내려가서 냉장고 문을 연다.
 뽀오얗게 얼음이 내뿜은 코카콜라와 크랙카, 치이즈 따위를 쟁반에 집어 얹으면서 내 가슴은 비밀스런 즐거움으로 높다랗게 고동치기 시작한다.
 그는 왜 늘 내 방에 와서 먹을 것을 달라고 할까? 언제나 냉장고 앞을 그냥 지나 버리고는 나에게 와서 달라고 조른다.
 어떤 게으름뱅이라도 냉장고 문을 못 열 까닭은 없고, 또 누구를 시키는 것이 좋겠다면 부엌 사람들께 한마디하는 편이 나을 것이다.
 군소리를 지껄대거나 오래 기다리게 하거나 그렇지 않더라도 줄곧 먹을 것을 엎지르거나 내려뜨리거나 하는 나를 움직이기보다는 쉬울 것이 확실하다.
 (어쩐 셈인지 나는 이런 따위 일이 참말 서툴다. 좀 얌전하고 재빠르게 보이려고 하여도 도무지 그렇게 되질 않는다.)
 쟁반을 들고 돌아와 보면 그는 창 밖의 덩굴장미께로 시선을 던지고 옆얼굴을 보이며 앉아 있다. 무엇을 생각하는지, 내가 곁에 있을 때는 보이지 않는 조용히 가라앉은 눈초리를 하고 있다. 까무레한 피부와 꽤 센 윤곽을 가진 그의 얼굴을 이런 각도에서 볼 때 나는 참 좋아진다. 나에게는 보이려 하지 않는, 혼자만의 표정도 무언지 가슴에 와 부딪는다.
 그의 머리통은 아폴로의 그것처럼 모양이 좋다. 아주 조금 곱슬거리는 머리카락이 몇 올 앞이마에 드리워 있다.
 「고수머리는 사납다던데.」
 언젠가 그렇게 말하였더니,
 「아니, 그렇지 않아. 숙희, 정말 그렇지 않아.」
 하고, 그는 진심으로 변명을 하려 드는 것이었다. 나는 그저 농담을 하였을 뿐이었는데------.
 오늘도 그는 그렇게 내 방에서 쉬고 나더니,
 「정구 칠까?」
 하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응.」
 「아니, 참 내일부터 중간 시험이라구 하쟎았든가?」
 「괜찮아. 그까짓 거------.」
 사실 시험이고 무엇이고 없었다. 나는 옷 서랍을 덜컹거리며 흰 쇼오츠와 곤색 샤쓰를 끄집어내었다.
 「괜히 낙제하려구.」
 하면서도 그는 이내 라킷을 가지러 방을 나갔다.
 햇볕은 따가왔으나 나뭇잎들의 싱싱한 초록 사이로 서늘한 바람이 지나가곤 한다. 우리는 뒷산 밑 담장께로 걸어갔다. 낡은 돌담의 좀 허수룩한 귀퉁이를 타고 넘어서 옆집 코오트로 미끄러져 들어간다.
 옆집이라고 하는 것은 구왕가에 속한다는 토지의 일부인데 기실 집이라고는 까마득히 떨어져서 기와집이 두어 채 늘어서 있고 이쪽은 휘엉하니 비어 있는 공터였다.
 그 낡은 기와집에 사는 사람들은 이 공터를 무슨 뜻에선지 매일 쓸고 닦고 하여서 장판처럼 깨끗이 거두어 오고 있었다.
 「아깝게시리 ------ 테니스코오트나 만들면 좋겠는데, 응 그러면 어떨까?」
 어느 날 돌담에 가 걸터앉아서 내려다보던 끝에 그런 제의를 했다.
 처음에는 그는 움직이려 하지 않았으나 결국 건물께로 걸어가서 이야기를 해 보았다.
 이튿날 우리는 석회를 들고 가 금을 그었다. 또 며칠 후에는 네트를 치고 땅을 깎아 아주 정식으로 코오트를 만들어 버렸다.
 그렇게까지 할 줄은 몰랐을 주인이 야단을 치면 걷어 버리자고 주춤거리며 일을 했는데 호호백발의 할아버지인 그 집주인은 호령을 하지 않을 뿐더러 가끔 지팡이를 끌고 나와 플레이를 구경하는 것이었다.
 이렇게 나이 많은 노인네의 표정은 언제나 나에게는 판정하기 어려운 것이지만 특히 이 할아버지의 경우는 그러하였다. 구태여 말한다면 웃고 있는 것 같기도 하고 신기해하고 있는 것 같기도 했지만 또 동시에 하늘 밖의 일을 생각하는 듯 아득해 보이기도 하였으니 기묘했다.
 한두 번은 담을 넘는 나의 기술을 적이 바라보고 분명히 무슨 말을 할 듯이 하더니 그만 입을 봉하고 말았다. 말을 했자 들을 법하지도 않다고 짐작을 대었는지 알 수 없었다. 어쨌든 그곳은 아주 좋은 우리의 놀이터인 것이다.
 물리학 전공의 그는 상당히 공부에도 몰리고 있는 눈치였으나 운동을 싫어하는 샌님도 아니었다.
 테니스를 나는 여기 오지 전에도 하고 있었지만 기술이 부쩍 는 것은 대부분 그의 덕분이다. 그가 내 시골 학교의 코우치보다도 더 훌륭한 솜씨를 갖고 있음을 알았을 때의 나의 만족이란 이루 말할 수도 없는 것이었다.
 머리가 둔한 사람이 나는 도저히 좋아질 수 없지만 또 운동을 전연 모른다는 사람도 매력적이라고 생각할 수 없다. 스포오츠는 삶의 기쁨을 단적으로 맛보여 준다. 공을 따라 이리저리 뛰면서 들이마시는 공기의 감미함이란 아무것에도 비할 수 없다.
 나는 오늘 도무지 컨디션이 좋지가 못하였다. 이렇게 엉망진창인 때면 엉망진창인 대로, 또 턱없이 좋으면 좋은 그대로 적당히 이끌고 나가 주는 그의 솜씨가 적이 믿음직해질 따름이었다.
 「와아, 참 안된다. 퇴보일로인가봐.」
 「괜찮아. 아주 더워지기 전에 지수랑 불러서 한번 시합을 할까?」
 하늘이 리라빛으로 물들 무렵 우리는 뽈들을 주어 들고 약수터께로 갔다.
 바위틈으로 뿜어 나는 물은 이가 시리도록 차갑고 광물질적으로 쌉쓰름하다.
 두 손으로 표주박을 만들어 떠내 가지고는 코를 틀어막고 마신다. 바위 위로 연두색 버들잎이 적이 우아하게 늘어지고, 빨간 꽃을 다닥다닥 붙인 이름 모를 나무도 한 그루 가지를 펼친 것으로 보아, 이런 마심새를 하라는 샘터는 아닌 모양 같지만 우리는 늘 그렇게 하여 왔다.
 「약수라니 많이 마셔. 약의 효험이나 좀 볼지 아나?」
 「멋 때매?」
 「멋 때매는? 정구 좀 잘 치게 되나 보려구 그러지.」
 이렇게 시끌덤벙 떠들던 샘가였다.
 그런데 오늘 바위 언저리에는 조그만 표주박이 하나 놓여 있었다. 필시 그 할아버지가 갖다 놓아둔 것이 분명하였다.
 「오늘부터 얌전히 마셔야 해.」
 「산신령님이 내려다보신다.」
 정말 한동안 음전하게 앉아서 쉬었다. 그리고 그는 허리를 굽혀 표주박으로 물을 떴다. 그는 그것을 내 입가에 대어 주었다. 조용한, 낯선 표정을 하고 있었다. 나에게는 보이는 일이 없는, 자기 혼자만의 얼굴의 하나인 것 같았다.
 나는 아주 조금만 마셨다. 그리고 얼굴을 들어 그를 바라다보고 있었다. 그는 나머지를 천천히 자기가 마셨다.
 그리고 표주박을 있던 자리에 도로 놓았으나 아주 짧은 사이 어떤 강한 감정의 움직임이 그 얼굴을 휘덮은 것 같았다. 그는 내 쪽을 보지 않았다.
 나는 돌연 형언하기 어려운 혼란 속에 빠져들어 갔으나 한 가지의 뚜렷한 감각을 놓쳐 버리지는 않았다. 그것은 기쁨이었다.
 나는 라킷을 둘러메고 담장께로 걸어갔다.
 <오빠.>
 그는 나에게는 그런 명칭을 가진 사람이었다.
 <오빠.>
 그것은 나에게 있어 무리와 부조리의 상징 같은 어휘이다.
 그 무리와 부조리에 얽힌 존재가 나다.
 나는 키보다 높은 담장 위에서 뛰어내렸다. 그리고 뒤도 안 돌아보고 정원 안을 걸어갔다.
 운동화를 벗어 들고 맨발로 걷는다. 까실까실하면서도 부드러운 잔디의 촉감이 신이나 양말을 신고 디딜 생각을 없이 한다.
 「발바닥에 징을 박아 줄까? 어디든지 구두 안 신고 다니게 말야.」
 그는 옆에 있는 때면 이런 소리를 한다.
 「맨발로 물위를 걸으면 고향에 온 것 같아. 아니 내가 나 자신에게 돌아온 것 같은 그런 말이 드는 걸-----」
 나는 중얼중얼 그런 소리를 지껄이는 것이나 저녁 이맘때가 되면 별안간 거의 수습할 수 없을 만큼 감정이 엉클리곤 하므로 그 뒤로는 할멈처럼 입을 봉하고 아무런 대꾸도 하질 않는다.
 시무룩해 가지고 테러스 앞에 오면 ― 그 안 넓은 방에 깔린 자색 양탄자, 이곳 저곳에 놓인 육중한 가구, 그 안에 깃들인 신비한 정적, 이런 것들을 넘겨다보면 ― 그리고 주위에 만발한 작약, 라일락의 향기, 짙어진 풀내가 한데 엉겨 뭉큿한 이 속에 와서 서면 ― 나는 내 존재의 의미가 별안간 아프도록 뚜렷이 보랏빛 공기 속에 떠 있는 것을 보는 것이다.
 내가 잠시 지녔던 유쾌함과 행복은 끝내 나의 것일 수는 없고, 그것은 그대로 실은 나의 슬픔과 괴로움이었다는 기묘한 도착(倒錯)을, 나는 어떻게도 처리할 길이 없다.
 오누이------
 동생------
 이런 말은 내 맘속에 혐오와 공포를 자아낸다.
 싫다.
 확실히 내가 느껴 온 기쁨과 즐거움은 이런 범주내에서 허용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날마다 경험하는 이 보랏빛 공기 속에서의 도착은 참 서글픈 감촉을 갖고 있었다. 나는 그의 곁에 더 오래 머무를 용기조차 없어진다.
 검은 눈을 끔껌벅이면서 그는 또 농담이라도 할 것이다. 내게 더 웃고 더 쾌활해지라고 무언중에 명령할 것이다.
 그가 내게 해 줄 수 있는 일은 그것뿐이다.
 오늘 나는 가슴속에 강렬한 기쁨을 안았던 까닭에 비참함도 더 한층 큰 것만 같았다.
 나는 그곳에 한동안 서 있었다. 그리고 볼을 불룩하니 해 가지고 마루로 올라갔다.
 번들거리는 마룻바닥에 부연 발자국이 남아난다. 그렇게 마루가 더럽혀지는 것이 어쩐지 약간 기분 좋다. 몸을 씻고는 옷을 갈아입으면서 창으로 힐끗 내다보았더니 그는 등나무 밑 걸상에 앉아 있었다. 무릎 위에 팔꿉을 짚고 월계 숲께로 시선을 던진 모양이 무언지 고독한 자세 같아 보였다. 그도 조금은 괴로운 것일까? 흠, 그러나 무슨 도리가 있담? 까닭 없이 그에 대해 잔인해지면서 나는 그렇게 혼자말을 하였다.
 나는 방에 불도 켜지 않고 밖에서 보이지 않을 구석에 가만히 앉아 내다보고 있었다.
 주위가 훨씬 어두워진 연에 그는 벤치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사라지기 전에 한참 내 창문께를 보며 서 있었다.
 나는 어느때까지나 불을 켜지 않았다.
 저녁을 먹으러 내려가지도 않았다.
 그 대신에 그가 마시다 만 코오크의 잔을 집어들었다. 그리고 가만히 입술을 대었다. 아까 그가 내가 마신 표주박에 입술을 대었듯이------

2023년 7월 4일 (화) 01:37 기준 최신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