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같은 사용자의 중간 판 4개는 보이지 않습니다) | |||
| 66번째 줄: | 66번째 줄: | ||
=== 역대 총독 === | === 역대 총독 === | ||
{{역대 동이총독 (1925)}} | {{역대 동이총독 (1925)}} | ||
{| class="wikitable" style="word-break:keep-all; width:100%; border:2px solid #062861; text-align:center; font-size:10.5pt" | |||
|- | |||
! width=7% rowspan="2" style="background:#062861; color:#ECCD7A" | 대수 | |||
! width=20% rowspan="2" style="background:#062861; color:#ECCD7A" | 이름 | |||
! width=30% colspan="2" style="background:#062861; color:#ECCD7A" | 임기 | |||
! rowspan="2" style="background:#062861; color:#ECCD7A" | 설명 | |||
|- | |||
! width=15% style="background:#062861; color:#ECCD7A" | 임기 시작 | |||
! width=15% style="background:#062861; color:#ECCD7A" | 임기 종료 | |||
|- | |||
| '''임시''' | |||
| rowspan="2" | [[파일:박제순.jpg|x150px]]{{구분선}}[[박제순 (1925)|박제순]]<br>{{글씨 크기|9|朴齊純}} | |||
| rowspan="2" | [[1910년]] [[8월 29일]] | |||
| rowspan="2" | [[1916년]] [[6월 20일]] | |||
| rowspan="2" align=left | 경기도 출신. 일본통감부와 총독부가 공존한 시기에 통감으로서 직무 대리함. 이후 기존의 지위에 이어 총독으로 승격, 초대 동이총독으로서 무단 통치를 실시한다. 임기 중 노환으로 인해 사망. | |||
|- | |||
| '''초대''' | |||
|- | |||
| '''대행''' | |||
| rowspan="2" | [[파일:이병무.jpg|x150px]]{{구분선}}[[이병무 (1925)|이병무]]<br>{{글씨 크기|9|李秉武}} | |||
| rowspan="2" | [[1916년]] [[6월 20일]] | |||
| rowspan="2" | [[1919년]] [[X월 X일]] | |||
| rowspan="2" align=left | 충청남도 출신. 3.1 운동을 무력 탄압하는 등 무단 통치로 비판을 받아, 신사조사사업을 완료시켰음에도 불구하고 불과 3년 만에 교체되었다. | |||
|- | |||
| '''제2대''' | |||
|- | |||
| '''제3대''' | |||
| [[파일:이동휘.jpg|x150px]]{{구분선}}[[이동휘 (1925)|이동휘]]<br>{{글씨 크기|9|李東輝}} | |||
| [[1919년]] [[X월 X일]] | |||
| [[1927년]] [[X월 X일]] | |||
| align=left | 함경남도 출신. 역대 최장기 총독으로 약 8년간 총독으로 재임했으며, 형식상의 문화 통치 정책을 추진하여 기존의 강압적 통치에서 회유적 통치로 방향을 돌렸다. | |||
|- | |||
| '''제4대''' | |||
| [[파일:이용익2.png|x150px]]{{구분선}}[[이용익 (1925)|이용익]]<br>{{글씨 크기|9|李容翊}} | |||
| [[1927년]] [[X월 X일]] | |||
| [[1931년]] [[X월 X일]] | |||
| align=left | 함경북도 출신. 1931년 평안경부에서 ○○○○이 왜군 부대를 시찰하던 대한제국 황족 영친왕 이은을 칼로 찌른 사건에 책임을 물어 사임하였다. | |||
|- | |||
| '''제5대''' | |||
| [[파일:권중현.jpg|x150px]]{{구분선}}[[권중현 (1925)|권중현]]<br>{{글씨 크기|9|權重顯}} | |||
| [[1931년]] [[X월 X일]] | |||
| [[1934년]] [[3월 19일]] | |||
| align=left | 충청북도 출신. 총리 출신이 총독이 된 경우. 3년 동안 총독을 재임하다 임기 중 노환으로 인해 사망하였다. | |||
|- | |||
| '''대행''' | |||
| rowspan="2" | [[파일:김좌진.jpg|x150px]]{{구분선}}[[김좌진 (1925)|김좌진]]<br>{{글씨 크기|9|金佐鎭}} | |||
| rowspan="2" | [[1934년]] [[3월 19일]] | |||
| rowspan="2" | [[1940년]] [[X월 X일]] | |||
| rowspan="2" align=left | 충청남도 출신. 경제 개발 정책을 표방했다. 한왜동조를 주장하고, 지원병 제도를 실시해 강제징용으로 왜 청년들을 중한전쟁에 참전시켰으며, 창성개명, 서원참배, 황국신민서사 암송 등 민족 말살 정책을 강행하였다. | |||
|- | |||
| '''제6대''' | |||
|- | |||
| '''제7대''' | |||
| [[파일:신순성.jpg|x150px]]{{구분선}}[[신순성 (1925)|신순성]]<br>{{글씨 크기|9|愼順晟}} | |||
| [[1940년]] [[X월 X일]] | |||
| [[1944년]] [[X월 X일]] | |||
| align=left | 한성부 출신으로, 역대 총독 중 유일하게 '''해군 출신'''이다. 학도 특별지원병 제도를 실시하였며, 왜의 소년소녀들을 신의도와 위안부로 끌려가게 했다. | |||
|- | |||
| '''제8대''' | |||
| [[파일:홍사익2.jpg|x150px]]{{구분선}}[[홍사익 (1925)|홍사익]]<br>{{글씨 크기|9|洪思翊}} | |||
| [[1944년]] [[X월 X일]] | |||
| [[1945년]] [[9월 28일]] | |||
| align=left | 경기도 출신. 마지막 해의 전쟁 수행을 위한 물자와 인력의 수탈에 총력을 다하였다. 국민의용대를 편성하여 비협조적인 왜인을 대규모로 탄압, 검거했다. 패전 후 항복 문서에 서명했다. | |||
|- | |||
|} | |||
== 건물 == | == 건물 == | ||
=== 동이총독부 청사 === | === 동이총독부 청사 === | ||
{{본문|조선총독부 청사 (1925)}} | |||
=== 총독 관저 === | === 총독 관저 === | ||
2023년 7월 9일 (일) 22:26 기준 최신판
이 문서는 1925의 공식 설정입니다. 세계관 연재자 외 이용을 금지합니다.
문서의 모든 내용은 허구입니다. |
| 1905~1910 | 1910~1945 |
|---|---|
| 동이총독부 관련 틀 |
|---|
[ 펼치기 · 접기 ] |
| 동이총독부 東夷總督府 Government-General of Tongi | |
|---|---|
| 휘장 | 인장 |
| 1910년 10월 1일 ~ 1945년 9월 28일 | |
| 설치 이전 | 해체 이후 |
| 대일본제국 |
소련군정 |
| 미군정 | |
개요
동이총독부(東夷總督府)는 대한제국이 일본한치시기 왜의 강도부에 설치한 통치 기관이다. 한일병합조약이 체결된 1910년에 설치되어, 대한제국이 태평양 전쟁에서 항복하고 연합군이 일본 열도에 진주한 1945년 미군정에 행정권을 이양하면서 해체되었다.
기관
동이총독
역대 총독
동이총독 |
|---|
[ 펼치기 · 접기 ] |
| 대수 | 이름 | 임기 | 설명 | |
|---|---|---|---|---|
| 임기 시작 | 임기 종료 | |||
| 임시 | 朴齊純 |
1910년 8월 29일 | 1916년 6월 20일 | 경기도 출신. 일본통감부와 총독부가 공존한 시기에 통감으로서 직무 대리함. 이후 기존의 지위에 이어 총독으로 승격, 초대 동이총독으로서 무단 통치를 실시한다. 임기 중 노환으로 인해 사망. |
| 초대 | ||||
| 대행 | 李秉武 |
1916년 6월 20일 | 1919년 X월 X일 | 충청남도 출신. 3.1 운동을 무력 탄압하는 등 무단 통치로 비판을 받아, 신사조사사업을 완료시켰음에도 불구하고 불과 3년 만에 교체되었다. |
| 제2대 | ||||
| 제3대 | 李東輝 |
1919년 X월 X일 | 1927년 X월 X일 | 함경남도 출신. 역대 최장기 총독으로 약 8년간 총독으로 재임했으며, 형식상의 문화 통치 정책을 추진하여 기존의 강압적 통치에서 회유적 통치로 방향을 돌렸다. |
| 제4대 | 李容翊 |
1927년 X월 X일 | 1931년 X월 X일 | 함경북도 출신. 1931년 평안경부에서 ○○○○이 왜군 부대를 시찰하던 대한제국 황족 영친왕 이은을 칼로 찌른 사건에 책임을 물어 사임하였다. |
| 제5대 | 權重顯 |
1931년 X월 X일 | 1934년 3월 19일 | 충청북도 출신. 총리 출신이 총독이 된 경우. 3년 동안 총독을 재임하다 임기 중 노환으로 인해 사망하였다. |
| 대행 | 金佐鎭 |
1934년 3월 19일 | 1940년 X월 X일 | 충청남도 출신. 경제 개발 정책을 표방했다. 한왜동조를 주장하고, 지원병 제도를 실시해 강제징용으로 왜 청년들을 중한전쟁에 참전시켰으며, 창성개명, 서원참배, 황국신민서사 암송 등 민족 말살 정책을 강행하였다. |
| 제6대 | ||||
| 제7대 | 愼順晟 |
1940년 X월 X일 | 1944년 X월 X일 | 한성부 출신으로, 역대 총독 중 유일하게 해군 출신이다. 학도 특별지원병 제도를 실시하였며, 왜의 소년소녀들을 신의도와 위안부로 끌려가게 했다. |
| 제8대 | 洪思翊 |
1944년 X월 X일 | 1945년 9월 28일 | 경기도 출신. 마지막 해의 전쟁 수행을 위한 물자와 인력의 수탈에 총력을 다하였다. 국민의용대를 편성하여 비협조적인 왜인을 대규모로 탄압, 검거했다. 패전 후 항복 문서에 서명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