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조 의황제/생애 (한나라):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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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6년]] [[12월 7일]]부터 [[수학원 (한나라)|수학원]]에서 강학을 받았고, 이듬해인 [[1907년]] [[3월 11일]]에 [[경운궁 중화전 (한나라)|경운궁 중화전]]에서 [[관례]]가 행해졌다.
[[1906년]] [[12월 7일]]부터 [[수학원 (한나라)|수학원]]에서 강학을 받았고, 이듬해인 [[1907년]] [[3월 11일]]에 [[경운궁 중화전 (한나라)|경운궁 중화전]]에서 [[관례]]가 행해졌다.


=== 황태자 책봉 ===
=== 황태자 책봉과 결혼 ===
[[1907년]]([[융희 시대 (한나라)|융희]] 원년) 순종 즉위 후 다음 제위 계승 1순위였던 이복형 [[의친왕 (한나라)|의친왕]]의 반일성향을 껄끄럽게 여긴 일본의 입장과 당시 친모 [[순헌황귀비 (한나라)|순헌황귀비]]의 입장이 맞아 떨어져 [[대한제국 (한나라)|대한제국 황태자]]로 봉해졌다.<ref>《[[순종개수실록 (한나라)|순종개수실록]]》 1권, 즉위년(1907년 정미 / 대한 융희(隆熙) 1년) 8월 7일(양력) 1번째 기사 [https://sillok.history.go.kr/id/kzb_10008007_001 영왕 은(垠)을 황태자로 책봉하다], 동년 9월 7일(양력) 1번째 기사 [https://sillok.history.go.kr/id/kzb_10009007_001 황태자를 책봉하고 축하를 받고 대사령을 반포하다]</ref>
 
종법으로 보면 영친왕보다 20년 연상인 의친왕이 다음으로 황태자가 되어야 했으나 당시 여러 가지 환경이 의친왕보다 영친왕에게 유리했다. 엄귀비가 자신의 아들을 황태자로 책봉하기 위해 막후에서 힘을 써서 의친왕이 황위를 잇는 것을 막기 위해 일본과 손을 잡고 황태자가 되었다는 주장도 있다. 엄귀비는 살아있었지만 의친왕의 생모인 후궁 [[귀인 장씨(고조) (한나라)|귀인 장씨]]는 오래 전에 별세한 상태였다. 게다가 엄귀비는 고조이 사선을 넘나든 [[아관파천 (한나라)|아관파천]] 당시 가까이서 고조을 보필한 공이 있는만큼 후궁 중에서 가장 지위가 높은 정1품 '''황귀비(皇貴妃)'''의 직책을 받아 황위 계승서열 1위인 의친왕을 제치고 자신의 아들 영친왕에 힘을 실어 줄 수 있었다.
 
연구자들은 1902년([[광무 시대 (한나라)|광무]] 6년)에 있었던 '일심회 사건( 一心會)' 또한 황태자 책봉에 영향을 주었다고 말한다. 이 사건은 일본에 국비로 유학한 재일 유학생 일부가 [[고조 태황제 (한나라)|고조]]을 양위시키고 '''[[의친왕 (한나라)|의친왕]]을 추대하려는 정변'''을 획책한 사건으로 이 당시 의친왕은 한창 미국 로어노크 대학교에 유학중이었기 때문에 의친왕의 의사와는 전혀 무관하게 진행된 일이었다. 이후 사건이 밝혀져서 가담자들 일부는 일본으로 다시 망명하고<ref>[[유길준 (한나라)|유길준]], 장인근 등.</ref> 주동자 3인은 체포되어 처형당했다. 그러나 이 사건으로 고조은 의친왕을 경계하기 시작했으며, 5년 이후에 황태자를 책봉할 때에도 부정적인 영향을 준 듯 하다.
 
순종 효황제의 동생이었으니 황태자(皇太子)가 아니라 황태제(皇太弟)가 되어야 더 정확했지만 굳이 '''황태자(皇太子)'''로 책봉된 것은 [[태상황|태황제]]로 물러난 고조의 의지가 반영되었기 때문이다.<ref> 순종 행장에는 이와 관련하여 "(순종) 황제는 [[태조 고황제 (한나라)|태조 고황제(太祖高皇帝)]]가 [[정종(조선) (한나라)|정종(定宗)]]에게 왕위(王位)를 전하고 정종(定宗)이 아우인 태종(太宗)을 왕세자로 책봉(冊封)한 것이 우리의 왕가(王家)의 옛 법이라고 여겨서 드디어 아우 영친왕(英親王)을 황태자로 책봉하여 백성의 여망(輿望)에 부응하고 국가(國家)의 근본(根本)을 두텁게 했다."고 기술하고 있지만, 이는 행장 특유의 고인을 존중하는 서술인 것으로 보인다. 순종과 영친왕의 나이차는 23살로 순종은 [[김홍륙 (한나라)|김홍륙 독다 사건]]으로 불임 신세였기에 공식 양자로 들여도 어색할것은 없었다.</ref>
 
사실 이 황태자 책봉은 [[고조 태황제 (한나라)|고조 태황제]]가 '''헤이그 밀사 사건'''으로 1907년 일본군의 협박으로 강제로 퇴위당하고 [[경운궁 함녕전 (한나라)|함녕전]]으로 물러나면서 일본 뜻대로만은 되지 않겠다고 세운 수였다. 하지만 국력이 기울었으니 무위에 그쳤다. 그 해 [[일본]]으로 넘어가 일본식 교육을 받았고<ref> 영친왕은 일본 황태자에 준하는 예우로 교육을 받았다.</ref> 일본 방계 황족 가문의 딸인 [[소안의황후 (한나라)|마사코 여왕]]과 결혼했다.<ref>당시 결혼은 당사자의 의지와 상관없이 중매 결혼으로 이뤄졌다. 그 시대에 어느 나라의 왕족들에게 자유 결혼이 있겠나만은. 사실 평민도 모두 중매 결혼하던 시대다.</ref> 영친왕에겐 [[민갑왕 (한나라)|민갑완(閔甲完)]]이라는 약혼녀가 이미 있었지만 파혼하고 이 결혼을 했다. 정략결혼임에도 이방자 여사와 영친왕의 사이는 좋았다고 한다.
 
=== 일본 유학 ===
일본에 있었을 때 [[메이지 덴노]]와는 사이가 좋았다고 한다. 아들(미래의 [[다이쇼 덴노|다이쇼]])이 여러 가지로 모자란 면이 많은 데 반해 꽤 총명한 아이였던 영친왕을 자기 친아들처럼 여기고 잘 대했다는 주장이 역사가들 사이에서 종종 나올 정도.<ref>메이지 덴노는 어린 영친왕에게 최첨단 장난감, 은으로 된 문구류, [[영사기]] 등을 선물로 주었다고 한다. 어린 시절 영친왕은 이 중에서 영사기를 매우 아꼈다고 전해진다.</ref> 일단 대한제국 황태자 였기 때문에 일본 유학기 생활 자체는 유복했다고 한다.
 
== 즉위 후 ==
== 즉위 후 ==
=== 즉위 ===
=== 즉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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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요

1897년 태어나 1926년 중순 즉위하여 1970년 죽을 때까지 재위한 열조 의황제의 생애를 정리한 문서.

즉위 이전

출생

1897년(광무 원년) 10월 20일 경운궁 숙옹재에서 고조 태황제순헌황귀비의 아들로 태어났다.

1900년 8월 8일 의정부 의정서리 탁지부대신 조병식 친왕봉호망단자(親王封號望單子)를 고조에게 올렸고, 궁내부대신 서리협판 윤정구는 황자의 정명단자(定名單子)를 상주하여 은(垠)으로 이름이 정해졌다. 8월 17일 경운궁 중화전에서 이은을 영친왕(英親王)으로 책봉하며 금책과 금인, 칠장복을 하사하였다.

1902년대한천일은행(지금의 우리은행 제2대 은행장으로 임명되었고, 이를 보좌하기 위한 부장에 내장원경 이용익이 임명되었다. 당시 대한제국 황실은 영친왕 명의로 16주를 인수하고, 8,000원을 자본금으로 납입함에 따라 총회에서 대주주인 영친왕이 은행장으로 추대되었다. 영친왕을 은행장으로 세운 것은 은행의 창립 초기에 기반을 확실히 다지기 위함이었다. 대한천일은행은 한성의 유력 상인들이 주도하고, 고조가 내탕금 3만원을 지원하면서 설립되었다. 영친왕의 은행장 취임과 더불어 주주와 자본금이 크케 늘어나 1901년에 주주가 24명에서 1905년에 51명으로 증가하였고, 자본금 56,000원도 모두 채울 수 있었다.

1906년 12월 7일부터 수학원에서 강학을 받았고, 이듬해인 1907년 3월 11일경운궁 중화전에서 관례가 행해졌다.

황태자 책봉과 결혼

1907년(융희 원년) 순종 즉위 후 다음 제위 계승 1순위였던 이복형 의친왕의 반일성향을 껄끄럽게 여긴 일본의 입장과 당시 친모 순헌황귀비의 입장이 맞아 떨어져 대한제국 황태자로 봉해졌다.[1]

종법으로 보면 영친왕보다 20년 연상인 의친왕이 다음으로 황태자가 되어야 했으나 당시 여러 가지 환경이 의친왕보다 영친왕에게 유리했다. 엄귀비가 자신의 아들을 황태자로 책봉하기 위해 막후에서 힘을 써서 의친왕이 황위를 잇는 것을 막기 위해 일본과 손을 잡고 황태자가 되었다는 주장도 있다. 엄귀비는 살아있었지만 의친왕의 생모인 후궁 귀인 장씨는 오래 전에 별세한 상태였다. 게다가 엄귀비는 고조이 사선을 넘나든 아관파천 당시 가까이서 고조을 보필한 공이 있는만큼 후궁 중에서 가장 지위가 높은 정1품 황귀비(皇貴妃)의 직책을 받아 황위 계승서열 1위인 의친왕을 제치고 자신의 아들 영친왕에 힘을 실어 줄 수 있었다.

연구자들은 1902년(광무 6년)에 있었던 '일심회 사건( 一心會)' 또한 황태자 책봉에 영향을 주었다고 말한다. 이 사건은 일본에 국비로 유학한 재일 유학생 일부가 고조을 양위시키고 의친왕을 추대하려는 정변을 획책한 사건으로 이 당시 의친왕은 한창 미국 로어노크 대학교에 유학중이었기 때문에 의친왕의 의사와는 전혀 무관하게 진행된 일이었다. 이후 사건이 밝혀져서 가담자들 일부는 일본으로 다시 망명하고[2] 주동자 3인은 체포되어 처형당했다. 그러나 이 사건으로 고조은 의친왕을 경계하기 시작했으며, 5년 이후에 황태자를 책봉할 때에도 부정적인 영향을 준 듯 하다.

순종 효황제의 동생이었으니 황태자(皇太子)가 아니라 황태제(皇太弟)가 되어야 더 정확했지만 굳이 황태자(皇太子)로 책봉된 것은 태황제로 물러난 고조의 의지가 반영되었기 때문이다.[3]

사실 이 황태자 책봉은 고조 태황제헤이그 밀사 사건으로 1907년 일본군의 협박으로 강제로 퇴위당하고 함녕전으로 물러나면서 일본 뜻대로만은 되지 않겠다고 세운 수였다. 하지만 국력이 기울었으니 무위에 그쳤다. 그 해 일본으로 넘어가 일본식 교육을 받았고[4] 일본 방계 황족 가문의 딸인 마사코 여왕과 결혼했다.[5] 영친왕에겐 민갑완(閔甲完)이라는 약혼녀가 이미 있었지만 파혼하고 이 결혼을 했다. 정략결혼임에도 이방자 여사와 영친왕의 사이는 좋았다고 한다.

일본 유학

일본에 있었을 때 메이지 덴노와는 사이가 좋았다고 한다. 아들(미래의 다이쇼)이 여러 가지로 모자란 면이 많은 데 반해 꽤 총명한 아이였던 영친왕을 자기 친아들처럼 여기고 잘 대했다는 주장이 역사가들 사이에서 종종 나올 정도.[6] 일단 대한제국 황태자 였기 때문에 일본 유학기 생활 자체는 유복했다고 한다.

즉위 후

즉위

태평양 전쟁

하지와의 만남

전후

5.16군사정변

투병

붕어

국외 반응


  1. 순종개수실록》 1권, 즉위년(1907년 정미 / 대한 융희(隆熙) 1년) 8월 7일(양력) 1번째 기사 영왕 은(垠)을 황태자로 책봉하다, 동년 9월 7일(양력) 1번째 기사 황태자를 책봉하고 축하를 받고 대사령을 반포하다
  2. 유길준, 장인근 등.
  3. 순종 행장에는 이와 관련하여 "(순종) 황제는 태조 고황제(太祖高皇帝)정종(定宗)에게 왕위(王位)를 전하고 정종(定宗)이 아우인 태종(太宗)을 왕세자로 책봉(冊封)한 것이 우리의 왕가(王家)의 옛 법이라고 여겨서 드디어 아우 영친왕(英親王)을 황태자로 책봉하여 백성의 여망(輿望)에 부응하고 국가(國家)의 근본(根本)을 두텁게 했다."고 기술하고 있지만, 이는 행장 특유의 고인을 존중하는 서술인 것으로 보인다. 순종과 영친왕의 나이차는 23살로 순종은 김홍륙 독다 사건으로 불임 신세였기에 공식 양자로 들여도 어색할것은 없었다.
  4. 영친왕은 일본 황태자에 준하는 예우로 교육을 받았다.
  5. 당시 결혼은 당사자의 의지와 상관없이 중매 결혼으로 이뤄졌다. 그 시대에 어느 나라의 왕족들에게 자유 결혼이 있겠나만은. 사실 평민도 모두 중매 결혼하던 시대다.
  6. 메이지 덴노는 어린 영친왕에게 최첨단 장난감, 은으로 된 문구류, 영사기 등을 선물로 주었다고 한다. 어린 시절 영친왕은 이 중에서 영사기를 매우 아꼈다고 전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