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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울특별시 (상록수)|서울특별시]] [[종로구 (상록수)|종로구]] 청계천로 391 숭인상가아파트 ([[숭인동 (상록수)|숭인동]])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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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세종특별시 (상록수)|세종특별시]] 다솜로 261 ([[다솜동 (상록수)|다솜동]])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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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순흥 안씨<ref>1파 양공공파. 29세손 희(熙)○ 병(炳)○ 항렬.</ref> | | 순흥 안씨<ref>1파 양공공파. 29세손 희(熙)○ 병(炳)○ 항렬.</ref>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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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충청남도 논산군 연무읍 마산4리<br>(現 충청남도 논산시 연무읍 연무로 380)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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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style="background:#005BA6; color:#FFC224" | 부모 | ! style="background:#005BA6; color:#FFC224" | 부모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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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style="background:#005BA6; color:#FFC224" | 학력 | ! style="background:#005BA6; color:#FFC224" | 학력 | ||
| 구자곡국민학교 <small>(졸업 / 45회)</small><br>연무중학교 <small>(졸업 / 18회)</small><br>남대전고등학교 <small>(제적)</small><br>성남고등학교 <small>(중퇴)</small><br>고등학교 졸업학력 검정고시 <small>(합격)</small><br>고려대학교 문과대학 <small>(철학 / 학사)</small> | | 구자곡국민학교 <small>(졸업 / 45회)</small><br>연무중학교 <small>(졸업 / 18회)</small><br>남대전고등학교 <small>(제적)</small><ref>명예 졸업장 수여</ref><br>성남고등학교 <small>(중퇴)</small><br>고등학교 졸업학력 검정고시 <small>(합격)</small><br>고려대학교 문과대학 <small>(철학 / 학사)</small>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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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style="background:#005BA6; color:#FFC224" | 병역 | ! style="background:#005BA6; color:#FFC224" | 병역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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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생 == | == 일생 == | ||
=== 유년 시절 === | |||
주민 등록상으로 안희정은 1965년 5월 1일 충청남도 논산군에서 아버지 안동근, 어머니 국중례 사이에서 2남 3녀 중 차남이자 셋째로 태어났다. | |||
철물점과 농사를 겸했던 안희정 일가는 그다지 어렵게 지내지는 않았다. 안희정의 조부는 강경 포구에서 객주점을 하면서 상당한 재산을 모은 부자였는데 가세가 점점 기울어 선친이 땅을 처분하고 마산리로 옮겨오면서 논산에 자리를 잡게 됐다. 아버지인 안동근은 마을에 유일한 만물상을 운영하며 남 부럽지 않게 아들을 키워왔다. 어머니 국중례는 교육에 관심이 많았다. '소년중앙' 어깨동무'와 같은 어린이 대상 월간잡지를 정기 구독시켜주고 세계명작동화전집을 사 주었다. 안희정의 책 읽는 습관은 이때부터 시작됐다. 안 위원은 지금도 '한국사이야기' 시리즈가 12권으로 이루어진 것을 알 정도로 전집에 대한 애착이 강했다. 책 꽂혀 있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뿌듯했다는 것이다. 문제는 안희정이 단순히 명작동화 탐독에 그치지 않고, 사회과학 서적으로 진화한 것이 사단이었다. | |||
이름인 '희정'은 박정희 당시 대통령을 매우 좋아하던 아버지가 '희'자 돌림의 항렬자를 쓰고 박 전 대통령의 이름인 정희(正熙)를 뒤집어 희정(熙正)으로 지었다고 한다. 이러한 배경이 영향을 끼친 듯, 어린 시절의 본인을 박정희 유겐트로 표현하며 꿈도 육군사관학교에 진학하는 것이었다. 아버지 역시 어린 시절의 안희정이 체격도 좋고 어릴 적부터 탁구, 야구 등 운동에 재능이 있는 것을 보며 육군사관학교에 가길 원했다고 한다. '논산훈련소' 각개전투 훈련장이 있던 후문 쪽에서 자란 그는 자연스럽게 '군가를 자장가'로 여기며 성장했다. 초등학교 시절에는 '역사와 전통'을 자랑하는 핸드볼부로 활동하면서 학생회장에 뽑힐 정도로 소문난 우등생이었다. 보이스카우트를 겸하며 절도와 개방적인 생활 태도를 배웠다. | |||
그는 어릴 때부터 명석하다고 동네에서 촉망 받으며, 초등학교 1학년 때부터 고등학교를 잠시 다닐 때까지 늘 반장을 했다. 초등학교, 중학교 때는 학생회장도 맡았다. 안희정의 중학 시절은 '정규교육'의 클라이맥스였다. 여전히 후보였지만, 핸드볼에 이어 중학교 때는 농구부에 입문했다. 초등학교 시절부터 이어온 보이스카우트 활동도 계속됐다. 문무를 겸한 '소년 안희정'은 독서에도 소홀함이 없었다. 단순히 삼국지와 같은 경서를 읽는 수준이 아니었다. 학생회장을 맡아 졸업생 대표로 상을 받았다 | |||
1979년 돼지 파동으로 가산이 부침을 겪자, 그의 가족들은 서울 신림동의 단칸방으로 갔다. 형 안희돈과 누나 안향미, 그리고 그는 대전에 유학해서 자취를 시작했다. 이 시기에 그는 함석헌의 씨알의 소리, 러시아 혁명사를 읽고 감명을 받았으며, 김대중 내란 음모 사건, 5.18 민주화운동을 보고 큰 정신적 충격을 받은 뒤 학생 운동에 뛰어들었다. 비단 충격을 받은게 문제가 아니라, 직접 연루되었다. 대전의 사회과학서점을 중심으로 만난 충남대 운동권 학생들과 교류하면서, 조직 활동을 하던 중 경찰에 체포돼 입학 6개월 만에 제적됐다. 김대중 내란 음모 사건에 연루된 것이다. 학교를 그만두겠다는 결심을 한 것은 장폴 사르트르의 책 구절 중 '지식인은 자본주의 사회의 창녀다'를 읽고 나서였다고 한다. 고등학교 1학년 때에 들어서서는 교과서를 전부 팔아버리고 사상계 등의 잡지와 사회과학 서적만을 읽었다고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운동권과 몰려다니는 그였음에도 항상 1, 2등을 놓치지 않는다고 이야기 했다. 그럼에도 학력 과정은 묘한데, 고등학교 1학년 때 학도호국단 연대장을 맡기도 했다. 하지만, 충남대 재학생들과 같이 학생운동을 하다 잡혀왔다. 그는 직접 대전 지역의 지하 잡지인 '평천하' 발간에 동참하기도 하였으며, 교사가 '고등학교 1학년이 뭘 아느냐'라고 물었을 때, '끝까지 투쟁할 것'이라고 표현하기도 했다. 학교가 문제 학생들을 삼청교육대에 보내도록 하라고 지시를 받았으나 교장에게 "문제학생을 학교가 교화시켜야지, 왜 삼청교육대에 보내는가?"라고 항의하다 위의 불온 서적 문제까지 겹쳐서 합동수사부에 걸리자 사실상 제적<ref>교사와 부모님의 간곡한 애원으로 전학은 갈 수 있는 자퇴</ref> 처분을 받았다. 이 때, 그는 '선생님들이 정의를 위해 싸우라며 가르쳐 놓고 정의를 위해 싸우려는 저를 이렇게 짜르려 하느냐'고 항의했다고 한다. | |||
자퇴 이후에는 농사일이나 돕고 있었는데, 가을 추수가 한창일 때 아버지가 갑자기 '너 고등학교 안 가면 내가 죽겠다.'는 식으로 으름장을 놓았다고 한다. 안희정의 집안 분위기가 상당히 보수적이었고, 이러한 환경에서 성장한 안희정 본인도 전통적인 효(孝)를 중요시하는 사상이 뿌리깊게 자리잡았던 터라 내켜하지 않으면서도 아버지에 뜻에 순순히 따라 서울특별시 동작구 대방동에 위치한 성남고등학교에 다니게 되었다. 하지만 새로운 학교에 입학한 지 채 3개월을 넘기지 못하고 부모님을 집요하게 설득하여 결국 얼마 가지않아 다시 자퇴하고 만다. 고등학교를 자퇴한 뒤 안희정은 본인의 누나가 야학 선생님으로 일하고 있었던 제일교회의 '형제야햑'에서 청계피복 노동자들과 교류를 하기 시작했는데, 혁명을 하겠다는 막연한 생각만 있을 뿐 학생도, 노동자도 아닌, 말 그대로 백수나 다름없는 자신의 모습을 보면서 조바심을 느끼게 되었다. | |||
일단 혁명은 해야겠으니 혁명 서클에 가입을 하려고 했지만, 당시 혁명 서클은 대부분 대학생을 중심으로 돌아가고 있었기 때문에 고등학교 졸업도 못한 17살 청소년을 받아주는 곳은 한 군데도 없었다고 한다. 그나마 81년 서울에서 벌어진 '국풍81'이라는 대학생 축제 때 유인물을 뿌리는 등 운동에 계속해서 참여했지만, 검거되기도 하였다. 이에 안희정은 "집단의 힘이 사회를 변혁시킬 수 있다"는 판단 아래 학생 운동을 하겠다는 목적으로 검정고시를 통해 1983년, 고려대학교 철학과에 입학하게 되었다. 고려대학교에 간 이유도 학생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기 위한 동기였다. | |||
=== 청년 시절 === | |||
어디까지나 학생 운동을 위해 입학한 안희정은 학부 과정에 충실히 임하지 않고, 지하 서클 활동에 전념하는 나날을 보내게 되었다. 이 시기에도 여전히 집안이 어려웠기 때문에 그는 부모님을 모시고 이불 한 채 메고 고향을 떠나왔면서 일곱 식구가 자취방에서 자야 했는데 드러누울 수 없었고, 돈 자체가 없어 차비도 쓸 수 없었다고 표현했다. 이 시기 현 영부인인 민주원을 만나면서 가난한 청춘이었지만 수업을 같이 듣고, 다방에서 300원짜리 커피를 마시고, 학내를 걸으며 데이트했던 추억이 생생하다고 표현했다. | |||
이후 운동권 생활을 이어가다 1986년 10.28 건국대학교 항쟁으로 수감되면서 제적되었고, 출소 이후 정치에 입문하면서 대학은 계속 휴학하게 되었다. 그리고 1988년에 두번째로 수감되어 악명높은 남산 안기부에서 혹독한 고문을 받게 되면서 안희정의 인생에 크나큰 변화가 생기게 된다. 물론 육체적인 고통도 이루 말할 수 없이 괴로웠지만, 청년 안희정을 무엇보다 고통스럽게 만든 것은 고문 경찰의 심문이었다. 취조실에서 안희정에게 "그래, 네가 혁명 해서 권력 잡았다고 치자! 그럼 너 농업정책 어떻게 할 건데? 그리고 외교정책은?" 하는 식으로 국정운영에 대한 전반적인 질문을 낱낱이 던졌는데, 안희정은 저런 기초적인 질문에 변변한 답변도 하지 못했고, 본인이 가지고 있는 사상이라곤 그저 갖고 있던 혁명의 이데올로기에는 구체적 대안이 없다는 사실을 자인해야 했다. 사회주의 혁명도, 미국과 잡았던 손을 끊고 자립경제로 간다는 것도 답이 될 수 없었다. 민중과 사회적 약자의 고통을 공감하고 이를 바로잡겠다는 정의감은 충만했지만 그래서 어떤 사회를 어떻게 만들겠다는 건지에 대한 준비는 없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 |||
육체에 이어 정신까지 철저하게 패배한 안희정은 결국 함께 학생 운동을 하던 동료들의 이름을 자백할 정도로 무너져 내렸지만, 부끄러움에 몸서리치면서도 한 달 간의 수감생활 동안 자신의 이상을 끝없이 돌아보며 ‘능력이 달리고 스스로 준비가 되지 않은 자리는 절대 탐하지 않겠다.’고 다짐하는 계기가 된다. 또 옥바라지를 해준 민주원과의 관계가 진전되는 시간이기도 했다. | |||
이후 잠깐 출판사에서 영업 일을 하다가 그만두고 다시 복학하여 고려대학교를 졸업했다. | |||
=== 정치 입문 === | |||
감옥에서 나온 지 얼마 되지 않은 1988년 12월에 당시 통일민주당 김영삼 총재의 비서였던 김영춘이 아르바이트라도 하라며 김덕룡 의원실을 소개해 주었다. 안희정은 전대협(전국대학생대표자협의회)의 대부(代父) 같은 빛바랜 이름을 버리고 민주화운동의 조력꾼으로 살아야겠다고 마음먹은 상태여서, 야당 의원 비서로서 노동운동과 민주화운동을 하는 분들을 도울 수 있겠다는 생각과 함께 민주원과 결혼하기 위한 준비를 생각하고 있었다. | |||
이 때 그가 국회에서 보고 들은 것들은 실망과 참담함을 안겨주기에 충분했다. 안희정이 입사한 지 10개월이 지난 때 첫 국정감사가 열렸다. 당시에는 노트북이 없어서 대정부 질의서를 모두 손으로 썼는데, 그러다 보니 국정감사 기간에는 밤을 새워 일해도 당최 시간이 부족했다. 무엇보다 안희정에게 참기 힘들었던 점은 ‘이런 것이 국가발전에 무슨 도움이 되는가’란 회의감이었다. 질의를 위한 질의, 비판을 위한 비판을 위해 까만 밤을 불태우고 있다고 생각하니 스스로를 몹시 부끄러워 했다. 지난 신문을 뒤지며 뻔한 주제의 질문을 의원들이 던지고 기자들은 이걸 쭉 받아쓰고 이것이 다음날 신문에 대서특필되는 일이 반복되었다. 같은 당이었다면 이야깃거리조차 안 되는 일을 갖고 여당과 야당 의원이 연일 싸우는 것도 지금이나 그때나 마찬가지였다. 정책과 노선은 없고 패싸움으로 점철된 정당정치, 그들만의 정치에 회의와 환멸이 교차했다고 회고했다. | |||
1990년 3당 합당에 반발하여 꼬마민주당에 참가하며 버티려 하다가 당시 정치 현실에 환멸을 느끼자 견디지 못하고, 1992년에 정계에서 완전히 손을 떼고 2년 정도 출판사에서 일하면서 대학도 복학한 끝에 마침내 졸업했다. | |||
당시 서른을 앞두고 대학을 다시 다니면서 친구들이나 지인들은 이미 다 졸업하고 사회로 진출한 뒤여서 같이 캠퍼스를 누비며 어울릴 사람도 별로 없던 와중에 교정의 벤치에 앉아 쓸쓸한 기분을 느끼면서 사색을 많이 하고는 했다. 3당 합당 때, 노무현도 3당 합당에 크게 반발하면서 김영삼과 결별했다. 즉, 이 시점에서 노무현과 안희정은 같은 길을 걸었던 것이다. 따라서 노무현과 거의 처음부터 행적을 동반한 몇 안 되는 인물이다. | |||
1993년, 같은 의원실의 강원도 출신의 이광재가 지방자치연구회로 안희정을 끌어들였다. 이후로 1994년부터 노무현 캠프로 들어가며 지금의 안희정을 세운 사실상의 첫 커리어가 시작되었다. | |||
이후 2001년 당시 노무현의 보좌관을 맡으면서 다시 정계로 복귀했다. 이광재 전 강원도지사와 함께 좌희정 & 우광재라고 불릴 만큼 노무현을 최측근에서 보좌했었지만, 정작 참여정부 하에서는 별다른 공직을 맡지 못했다. 더군다나 2002년 제16대 대통령 선거 관련 선거법 위반으로 징역형을 선고받아서 공직을 맡을 상황이 아니었다. 이후 노무현은 안희정의 출판기념회 축사 영상을 찍으면서 "내 대신 많은 희생을 감수하고 뭐 이루 말할 수 없는 고생을 다 했죠. 나는 뭐 엄청난 빚을 진 것입니다."라고 언급하면서 눈물을 흘리기도 했다. | |||
노무현의 지시로 대선자금을 총대맸다지만, 어쨌든 1심에서 징역 2년 6월 및 추징금 13억 1천만 원이 선고됐으며, 2심에서 징역 1년 및 추징금 4억 9천만 원으로 감형되었고, 대법원이 이를 확정하면서 실형을 살게 되었다. 이때의 충신 모습이 오늘날 유권자들에게 큰 감명을 준 것이 아주 유명하다. | |||
당시 재판 과정이 인상적인데, 최후 진술의 경우 보통 감형을 위한 변명으로 일관되기 마련이다. 그러나 안희정은 "자신을 엄벌에 처해서 승자도 처벌받는다는 교훈을 남게 해달라."라고 상상을 뛰어넘는 최후 진술을 남겼다. 또한 감형도 없이 형기를 채우고 만기출소했다. | |||
출소 직후인 2005년, 모교인 고려대학교 산하 아세아문제연구소에서 연구위원직을 역임했다. 2006년에 노무현에 의해 복권되었으며, 2007년에 참여정부평가포럼 상입집행위원장직을 맡아, 참여정부 재평가 작업을 수행했다. 2008년에 제18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통합민주당의 충남 논산시·계룡시·금산군 지역구에 공천을 신청했으나, 상술한 선거법 위반 전력이 발목을 잡아 낙천됐다. | |||
2008년 7월, 통합민주당 최고위원으로 선출되었다. | |||
2009년, 노무현을 수사하면서 출소한 직후에도 박연차로부터 백화점 상품권 5천만 원을 받았다는 사실이 드러나기도 했지만, 노무현의 자살로 수사가 전격 종결되면서 유야무야 되기도 했다. | |||
=== 민선 5기 충청남도지사 === | |||
제5회 전국동시지방선거에서 충남지사에 당선되어 고향에 금의환향하였다. 하지만 그와 별개로 선거결과는 상당히 접전이었는데 한나라당, 민주당, 자유선진당의 삼자구도로 진행되었고, 2위를 기록한 자유선진당의 박상돈 후보와 고작 20,023표 차이(2.30%)였다. | |||
안희정 지사의 고향인 논산에서 박상돈 후보를 22,497표 차이로 이겨서 당선될 수 있었다. | |||
임기 동안 노무현 임기 시절을 벤치마킹하여 기록 담당 행정관을 대부분의 일정에 배석시켰다. 회의 주제, 일시, 배석자, 오고 간 대화와 안희정의 지시 사항은 모두 기록, 문서로 정리되어 도청 고위 공직자들과 정무직들이 공유하며 도의 업무에 반영해나갔다. | |||
참여정부의 이지원 시스템을 본따 전자결재 시스템을 도입했다. 뿐만 아니라 도의 재정 수입과 지출 내역을 실시간으로 공개하기 시작하면서 지방재정법, 국가재정법 개정의 초시가 되었다. 복지서비스를 일원화, 단순화하여 정보 주체의 동의 없이 복지와 관련된 개인정보를 지방정부에 제공하여 공공요금을 할인해주거나 지원금을 운영기관이 직권으로 대신 신청하도록 하는 제도를 마련하기도 하였다. 이외에도 농업 보조금의 가짓수를 줄이고 금액을 높이거나, 희망마을 만들기 사업을 통해 충남도청이 중앙정부를 향한 역제안을 먼저 실천하도록 하였다. | |||
임기 동안 민선 5기 안희정 지사가 도민에게 약속한 공약 이행도에 대한 한국매니페스토실천본부 평가결과 민선 5기 4년 내내 전국 최우수 등급인 ‘SA’를 획득했다고 밝혔다. | |||
==== 주요 공약 ==== | |||
* 6대 정책과제<br> | |||
- 3대혁신<br> | |||
·일 잘하는 지방정부로 가는 「행정혁신」<br> | |||
· 주민이 주인 되는 「자치혁신」<br> | |||
· 농어촌에 희망 주는 「3농혁신」<br> | |||
- 3대 행복과제<br> | |||
· 자영업에서 기업까지 「행복한 성장」<br> | |||
· 아이에서 어르신까지 「행복할 권리」<br> | |||
· 도랑에서 서해까지 「행복한 환경」<br> | |||
=== 민선 6기 충청남도지사 === | |||
도지사 재선 의사를 밝히고, 새누리당의 정진석 후보와 경쟁하였다. 선거 전 여론조사에서는 10% 이상의 꽤 큰 차이로 새누리당의 정진석 후보를 앞섰다. 선거 직후 출구조사에서 오차범위 내 접전으로 나와 지지자들을 긴장하게 했으나, 개표가 시작되고 투표함을 연 후 한 번도 1위 자리를 내주지 않고, 정진석 후보를 약 8.26%(73,679표)차로 이기고 재선에 성공하였다.<ref>예산, 부여, 태안을 제외한 모든 충남의 기초자치단체에서 승리했다.</ref> | |||
제5회 전국동시지방선거 선거와 비교해 충남 모든 기초자치단체 지역에서 득표율이 올랐으나, 공교롭게도 고향인 논산 지역에서만 근소하게 득표율이 감소했다. 이는 제5회 지방선거에서 선거가 삼자구도로 진행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논산 사람들이 논산이 고향인 당시 안희정 후보를 압도적으로 지지(삼자구도임에도 득표율 60%이상)했던 결과 나타난 현상이라고 분석할 수 있다. 물론 논산의 인구가 6회 지방선거 때 5회 지방선거 때보다 근소하게 감소한 영향도 있다. | |||
제5회 전국동시지방선거에 비해 제6회 전국동시지방선거에서 약 10만 표 정도 더 득표했고 득표율도 10% 정도 올랐다. 5회 지방선거는 삼자구도로 진행되었고 이번 6회 지방선거는 양자구도로 선거가 진행됐으니 당연한 결과라고 생각할 수도 있으나, 5회 지방선거에서 보수계라고 분류할 수 있는 한나라당, 자유선진당과 진보계로 분류할 수 있는 민주당의 득표비는 약 5 : 4 정도로 보수계 정당의 득표를 단순 합산하면 보수세가 우세하였다. | |||
하지만 제6회 전국동시지방선거에서는 한나라당과 자유선진당이 합당하여 새누리당이라는 거대여당이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6회 지방선거에서 새정치민주연합과의 득표비는 4 : 5 정도로 오히려 새정치민주연합의 안희정 후보가 우세하였다. 지역에서 정당 지지율은 새누리당이 크게 앞서는 걸 생각하면 충남에서 안희정 지사의 개인경쟁력을 알 수 있게 된 선거라는 평가가 있다. 이 때문에 충청권의 대표주자로 일컫어지게 된 면도 있다. 5회 지방선거에서 자유선진당의 박상돈 후보를 선택했던 유권자의 30% 정도가 6회 지방선거에선 안희정을 선택했다는 분석이 있다. | |||
고향인 논산에선 제5회 지방선거에 이어 2회 연속 60%이상의 득표(60.21% - 36,205표)를 했다. | |||
제6회 지방선거 과정에서 정진석 후보와의 TV토론에선 충청 대망론을 언급하며 충청도 출신의 대통령이 나오기를 바라는 지역 사람들의 열망을 자극하기도 하였다. | |||
안철수 의원이 2014년 7.30 재보선 패배의 책임을 지고 새정치민주연합 대표직에서 사퇴하였을 때, '안철수 대표는 정치에 대한 혐오감을 갖던 세력이 다시 정치에 관심을 갖게 큰 공을 세웠다' 변호하기도 하고, 역시 문재인 대표가 2015년 4.29 재보선 이후 사퇴 등 여러 압박에 시달리고 있을 때도 그래도 당의 맏이는 당대표이므로 힘을 실어줘야한다고 발언하기도 하였다. | |||
충청남도에서 의료 사각지대에 있는 향촌 사회에까지 의료 긴급 시스템을 확장하여 시행하였고, 대형 병원을 시골에까지 유치하기 어려운 만큼 닥터헬기 등을 통해 골든 타임을 확보하려는 노력이 성과를 이루었다는 말을 김어준과의 대화에서 밝혔다. 메르스 사태 당시 충남 이내에서의 확산을 방지, 통제하는 데 성과를 거두어 위기 대응 능력에서도 긍정적인 점수를 받았다. | |||
임기 중, 충청남도(공주, 부여 등), 전라북도(익산 등)에 위치한 백제역사유적지구가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었다. 뿐만 아니라 안희정 지사가 민선 5기부터 역점을 두고 추진하는 '3농 혁신'이 가시적 성과를 보이고 있다. | |||
2015년 8월 15일, 광복 70년을 맞은 광복절 축사에서 광복절을 '승리의 날'으로 부르자, 안중근의사의 영향을 받은 '아시아 평화 공동체'라는 구상이 포함되어 있는 등, 자신의 비전을 제시하였다. 연설 도중 마지막으로 발언한 "하늘에 계신 애국열사, 애국선열들이시여. 우리들의 이 길을 굽어 살펴 주소서."가 인상 깊었다는 평이 있다. | |||
자신의 이름을 딴 '안희정 법(지방재정법 개정안)'이 2015년 11월부터 전국에서 시행됐다. | |||
한국갤럽에서 실시한 민선6기 광역단체장 직무 수행평가에서 14년 하반기~16년 하반기까지 단 한 번도 1위를 내려놓지 않았던 김기현 울산시장을 넘어서 직무 수행 긍정평가 1위에 올랐다. 그것도 2012년 조사 실시 이후 역대 최고수치인 79%로. (여당 프리미엄+차기 대권주자) 안희정 지사 + (자유한국당 당적을 유지+울산의 주력 산업 불황) 김기현 시장이라는 요인이 있던 덕분이지만 그야말로 압도적이다. 부정 평가 역시 9%로 매우 적은 편이다. | |||
==== 주요 공약 ==== | |||
* 6대 정책과제<br> | |||
- 3대혁신<br> | |||
·일 잘하는 지방정부로 가는 「행정혁신」<br> | |||
· 주민이 주인 되는 「자치혁신」<br> | |||
· 농어촌에 희망 주는 「3농혁신」<br> | |||
- 3대 행복과제<br> | |||
· 자영업에서 기업까지 「행복한 성장」<br> | |||
· 아이에서 어르신까지 「행복할 권리」<br> | |||
· 도랑에서 서해까지 「행복한 환경」<br> | |||
=== 제19대 대통령 선거 === | |||
2017년 1월 22일 대학로 한 소극장에서 360명의 방청객들 앞에서 공식 출마 선언을 했다. 오전 10시부터 오후 3시까지 5시간 동안 사람들과 즉문즉답 시간을 가지며 본인의 강점인 대중 토론과 연설을 선보였다. 그 결과, 네이버 등 각종 포탈 사이트에서 종합 검색어 1위에 올랐다. [[박수현 (상록수)|박수현]] 전 공주시 국회의원을 비롯한 자원봉사자들의 도움으로 행사를 진행하였고 직업적인 행사 진행자들이 아니라 약간 행사가 매끄럽게 돌아가지 않았다는 이야기도 있지만 자원봉사자들이 진행했기 때문에 그럴 수도 있다는 평을 받았다. 특히 이 자리에서 홍석천과 함께 성 소수자 차별에 대해 적극적으로 반대하고 그들의 인권을 지지하겠다는 발언을 하여 화제를 모았다. 이에 앞선 1월 18일에는 팟캐스트 "이이제이"에 출연하여 받은 동성애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냐는 질문에, "종교적인 교리이든 이념이든 우리가 상식적으로, 현실적으로 그러한 사람들에 대해서 손가락질을 할 권리가 없다", "종교, 이념, 국가 그 어떤 논리로도 한 인간이 가지고 있는 각각의 정체성과 그들의 개성에 대해 재단하거나 뭐라고 할 권리가 없다. 그 문제에 대해 나는 철저히 리버럴"이라는 답변을 한 바 있는데 그에 관하여 홍석천이 표 계산에서 전혀 유리할 것 없으니 입 다물어도 이해하겠다는 말을 하자 다시 확고한 지지 의사를, 그것도 젠더 이분법 같은 이반 커뮤니티에서도 소수자 담론에 그치는 소재까지 끌어와서 강조했다. | |||
출마 선언 이후 [[이재명 (상록수)|이재명]] 성남시장의 기본소득 정책과 [[문재인 (상록수)|문재인]] 전 대표의 군 복무 1년 단축 주장은 현실성이 없다고 비판하는 등 서서히 대선을 위한 움직임을 보였으나, 차근차근 정책을 선보이며 준비해 나가는 문재인 상임고문이나, 공격적이고 전투적인 방식으로 대선에 임하는 박원순 서울시장, 이재명 성남시장 등의 다른 주자들에 비해 비교적 조용한 행보를 보이고 있다. 선언 직후 문재인 고문을 향한 비판적인 태도를 보이기는 했으나 "형제를 때리는 정치는 하지 않는다."라며 타 후보들에 대한 견제보다는 자신의 강점을 내세워 대중에 접근하는 것은 물론 현 정국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가감없이 밝히며 자신을 어필하는 데에 치중하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 때문에 그가 코앞으로 다가온 2017 대선보다는 2022 대선을 겨냥하고 장기적으로 움직이는 게 아니냔 전망이 다수를 차지하고 있지만 정작 본인은 이러한 '차차기 준비 프레임'을 달가워하지 않는 모양. 여권의 남경필 지사와의 합동 인터뷰에서 이러한 프레임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시선이 가장 극복하기 어려운 것 같다고 토로한 바가 있다. 사실 안희정이 정말로 차차기를 겨냥했다고 해도 이를 대놓고 드러내기는 어렵다. 차차기를 위해서라면 19대 대선 때 인지도 및 지지도를 끌어 모으는 게 중요한데 '저는 이번엔 참가하는 것에 의의를 둡니다'라고 대놓고 말하면 당연히 대중들의 지지를 모으는 데 한계가 있다. 따라서 어찌되었든 19대 대선 자체에 열중한다는 모습을 보여줘야 한다는 역설이 성립된다. | |||
경제 정책 관련해서는 역대 제6공화국 대통령들의 경제 정책을 확 바꾸지 않겠다고 했고 국민은 공짜 밥을 원하지 않는다고 발언했다. 비정규직 노동유연화는 시대 흐름상 어쩔 수 없다고 발언했다. | |||
2017년 1월 31일 김종인 전 더불어민주당 비상대책위원회 대표가 안희정을 만나 여야를 넘어서 돌풍을 일으키자며, 사실상 탈당을 권유했다는 보도가 올라왔다. 그러나 김종인 전 위원장은 이는 사실이 아니라고 부인했으며 , 안 지사의 대변인 격인 박수현 전 더불어민주당 의원 또한 사실무근임을 밝혔다. 안희정 지사는 "어째서 이런 말이 나왔는지 모르겠다"는 반응을 보였다. | |||
한때 문재인 후보마저 위협하며 인기몰이를 했던 이재명 후보의 지지율이 잦아들고 안희정 후보와 비슷한 지지율을 유지하고 있던 박원순 후보가 불출마 선언을 하여 유망한 대선주자로 조명받던 중, 2017년 2월 1일 반기문 후보가 돌연 불출마 선언을 하면서 순식간에 지지율 2위권으로 성큼 뛰어 오르게 되었다. | |||
2월 8일 바둑 기사 이세돌과 바둑을 두며, 그를 '국민 후원회장'으로 영입했다. | |||
2월 13일 SBS 프로그램 '대선주자 국민면접'에 출연했다. | |||
2월 16일 상술한 이세돌을 비롯한 선거캠프 후원회장 15명을 발표했다. | |||
노무현 대통령처럼 전시작전통제권 환수를 주장했다. | |||
민주당 [[이철희 (상록수)|이철희]], [[기동민 (상록수)|기동민]], [[어기구 (상록수)|어기구]] 등이 안희정을 지지하면서 캠프에 합류했다.<ref>박영선 의원도 지지를 표명했으나, 박영선 의원이 들어오면서 오히려 안희정 캠프를 지지하던 이들이 철회하기도 했다.</ref> | |||
10년 일했으면 1년은 유급휴가를 하는 '안식년 제도'와 '일자리 나누기' 정책을 주장했다. <ref>요컨대 경제성장이 둔화돼서 일자리가 획기적으로 늘어나기 힘들어진 만큼 사회적 타협을 통해 기존의 일자리들을 재분배하자는 입장이다. 기존 근무자들의 근무시간을 줄이고 줄어든 시간만큼의 업무량을 맡을 신입 사원을 고용한다고 보면 된다.</ref> | |||
경선 패배 이후, 문재인 후보를 적극적으로 돕고 나섰으며, 당선이 확정된 5월 10일 새벽, 광화문에서 문재인의 볼에 기습키스를 해서 화제가 되었다. 이후 자신의 발언 차례가 오자 발음이 꼬이면서도 마이크를 놓지 않고 계속 말을 이어가는 행동이 전형적인 주사를 연상시키면서 충남주사라는 별명도 얻었다. 그리고 10일 낮 트위터에 이불킥을 언급했다. 그런데 하필이면 이 사진이 문재인의 대통령 당선 확정 때 사진이라 한국 언론은 물론 외신들도 이 사진을 싣기 시작해 월스트리트 저널과 뉴욕타임즈가 신문 1면에다 실어버리며 삽시간에 월드스타가 되었다. 결국 안희정도 포기했는지 페이스북에 이런 글을 남겼다. 어쨌든 이 주사는 경선 과정에서 있었던 문재인과 안희정 간의 앙금을 깔끔히 털어냈음과 동시에 노무현 이후 정권 재창출을 갈망해온 친노의 승리를 상징하는 장면이다. 현재는 이런 반응을 즐기고 있는지 페이스북에 팬아트까지 올렸다! 아울러 인터뷰에서도 "국민에게 웃음을 줬으니 그걸로 된 거다."란 말을 남겼다. 사실 정치적으로도 안희정에게 신의 한 수가 됐던 게 경선 과정에서 생겼던 친문과 안희정의 거리감을 뽀뽀 한 방으로 해소해 버린 셈이다. | |||
=== 제20대 국회의원 === | |||
광화문 치맥파티를 마지막으로 언론에 모습을 드러내는 일이 적은 편이다. 2017년 살충제 계란 파동으로 인하여 충남도청에서 도민들에게 긴급재난문자를 발송한 바 있으나 정부의 대응을 우선시 하고 있다. | |||
태안 유류 피해 극복 10주년 기념식에 문재인 대통령이 참석해 오랜만에 언론에 같이 있는 모습을 보였다. 이때 "촛불혁명의 기적, 시민이 주권인 나라, 살아있는 민주주의 상징인 문 대통령님을 모시고 행사를 치러서 더없이 영광"이라며 "꼭 모시고 싶었다"고 인사말을 하며 대통령에 대한 강한 애정을 보였다. 태안 유류 피해 사건이 참여 정부 시절에 발생하기도 했고 국민적 협력을 통해 극복했다는 점에서 작년과 올해의 촛불 정국을 비슷한 상징성이 있어 안 지사가 문재인 대통령 섭외에 굉장히 공을 들였다고 한다. | |||
차기 대권 주자라는 위치에서 충남과 안 지사 본인의 위상이 많이 올랐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문재인 정부의 100대 국정 계획에 충남도에서 제안한 과제가 다수 포함되고 일선 공무원들이 중앙 정부와 만날 때 야당 때와 대접이 다르다고 말할 정도. | |||
사실상 경기지사 출마를 공언한 이재명 성남시장이나 3선 도전이 유력시 되는 박원순 시장과 달리 중앙 진출을 노릴 것이라는 이야기만 돌 뿐 내년 행보에 대한 별다른 소스가 없었는데 돌연 9월 27일 서울 노원구를 찾아 강연을 해 이목을 끌었다. 서울 노원구는 안철수 국민의당 대표의 지역구로 안 대표가 의원직을 사퇴한 지금 재보궐 선거 대상이다. 안 지사는 노원구청장과 인연이 있어 강연했을 뿐 별 다른 의미가 없다며 중앙 진출에 대해서는 선을 긋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그러나 민주당 지지자들은 노원 병 출마를 거의 기정 사실화 하고 노원보다는 자유한국당 박찬우의원의 벌금형으로 재보궐 선거 대상인 천안 갑 출마를 요구 하고 있다. | |||
언론의 별다른 주목 받는 일 없이 도정과 외부 일정에 집중하고 있었는데 11월 28일, 강연에서 문재인 대통령의 지지자들에게 이른바 '쓴소리'를 해 많은 관심을 받기 시작했다. 안희정 지사는 이 강연에서 "이견의 논쟁을 거부하지 마라.", "우리 이니가 그렇게 약한 사람이 아니다." 라고 발언했는데 안 그래도 '선의', '대연정' 발언으로 회색분자 의심을 받고 있는 안 지사가 이런 말을 하자 문재인 대통령의 지지자, 그중에서 강성 지지자들이 적폐청산에 초 치는 소리 하지 말라며 극렬하게 반발했고, 민주당 차기 당대표를 노리고 있다는 소문이 돌고 있는 안 지사가 당 내 대주주라고 할 수 있는 친문 성향 당원들의 행동을 비판하자 언론 역시 이에 주목했다. | |||
12월 18일, 충남지사 3선 불출마를 공식 발표했다. 기자회견을 열고 “이제 새로운 도전자들한테 기회를 주는 것이 도리라고 생각한다”며 “3선에는 출마하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동시에 열리는 내년 재보궐선거 도전도 현재로서는 염두에 두고 있지 않다고 밝혔다. 언론들은 안희정이 도지사 임기를 마친 후 2018년 8월 민주당 전당대회에서 당 대표직에 도전하거나, 정치적 휴식기를 가질 것이라는 전망을 내놓았다. 해외로 유학도 고려 중인 것으로 알려졌다. | |||
이러한 당내의 갈등, 무성한 소문과는 다르게, 안희정은 결국 2018년 재보궐선거에서 천안 갑에 출마를 결정했다. 천안 갑은 안희정 후보의 이름값과 자유한국당의 전략공천 실패, 자유한국당 당선자 과실이라는 결과가 맞물려 안희정이 무려 60%가 넘는 득표율을 내며 압도적인 결과가 나오고 말았다. | |||
==== 당권 장악 ==== | |||
대선 경선 탈락 이후부터, 추미애 대표의 임기가 끝나는 2018년 8월에 있을 전당대회에서 차기 민주당 대표 선거에 출마할 것이라는 이야기가 흘러 나오기 시작했다. 안희정은 직전의 재보궐선거에서 당선되며 원내에 진입했고, 친노와 친문, 중도적 성향의 유권자를 모두 포섭할 수 있는 카드로 평가 받아왔다. | |||
본래 이해찬과 단일화할 것이라 예상되어왔던 최재성, 전해철이 예상을 깨고 안희정과 단일화해오면서 친문 성향의 당원들과 매우 밀접해졌다. | |||
추미애 대표의 뒤를 이을 민주당 신임 당 대표는 임기가 2020년에 있을 21대 총선에 걸쳐져 있어 국회의원 후보 공천에 대한 전권을 휘두를 수 있다. 따라서 후보 공천 과정에서 여러 모로 계파 사이의 갈등으로 인하여 잡음이 나올 가능성이 높기 때문에 당원들 중에는 안희정처럼 유망한 주자가 나와 정권 재창출을 위한 기틀을 닦기를 바라는 공감대가 형성된 사람들이 제법 많은 것 같다. | |||
그리고 민주당 8.25 전당대회 본선에서 대의원 투표, 권리당원 투표, 일반국민 여론조사, 일반당원 여론조사를 합산하여 총 득표율 40.16%를 기록해 더불어민주당의 제3대 당대표의 자리에 올랐다. 다음 날 문재인 대통령은 당선을 축하하며 인연이 많은 만큼 당청 관계가 잘 맞을 것이란 말을 전했다. | |||
8월 27일, 취임 첫 일정으로 국립서울현충원을 찾아 참배했다. 이때 이승만 - 박정희 전 대통령의 묘지를 찾아 눈길을 끌었다. 이 대표가 첫 일정으로 보수의 대표급 대통령으로 뽑히는 박정희 전 대통령 묘역을 참배하며 평화와 공존의 메시지를 던졌다는 평. 또한, 이날 하루 4개 야당 지도부를 모두 만나며 광폭 협치의 시동을 걸었다. 그리고 사자명예훼손의 혐의로 기소된 전두환이 치매를 이유로 법정 출석을 거부하자 “오늘 법정에 출석해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고 사과해도 용서 받지 못할 것 같은데 법원에 불출석한다는 것은 어이없는 일”이라며 “정의로운 대한민국이라면 전두환을 반드시 법정에 세워 준엄한 법의 심판을 받도록 해야 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 |||
9월 18일, 2018 제3차 남북정상회담에서 정당 대표로 방북했다. 남북정상회담 둘째 날 김영남 북한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장을 만나 남북 국회 회담 논의 등에 관해 의견 교환을 했다. | |||
9월 25일, '안희정호' 출범 한 달을 맞이했다. 정기 국회 연설에서 참여 정부에서 추진했던 수도권 공공기관 지방 이전 카드를 다시 한번 꺼내들며 수도권을 제외한 지방에서 큰 파급 효과를 불어왔고, 정국의 뜨거운 이슈로 떠오른 부동산 문제에서도 공급 확대와 초고가주택 종부세 강화 등의 해결 방안을 거침 없이 제시하는 등 존재감을 드러내고 있다. 당대표 당시에 1달 이내로 진행하겠다던 당원 게시판 신설 공약도 막판에 추진해냈다. | |||
2020년 21대 총선을 이해찬 의원과 함께 공동선대위원장으로 진두지휘 하면서 압도적인 대승을 거두었다. 본인은 종로구에 출마하여 당선되면서, 카리스마가 부족하고 경륜이 부족하다는 단점을 잘 메꿨다는 평. | |||
특히 안희정계에게 아쉬워할 법한 결과도 받아들이며 공천 과정의 잡음을 앞장서서 제거함으로써 옆동네 자유한국당과 같이 내부에서 총질하는 상황이 거의 없었다는 점에서 긍정적으로 평가할만하다. | |||
=== 제21대 국회의원 === | |||
안희정이 당대표 직무를 맡는 동안, 정치적 중심지인 종로에 셀프공천을 할 것이라는 여의도발 찌라시가 돌기 시작했다. | |||
2020년 1월 15일, 안희정이 서울 종로구 숭인동의 어느 한 아파트를 전세 계약했다는 것이 밝혀지면서 종로 출마가 기정사실화 되었다. | |||
1월 22일, 종로구로 출마하는 것을 기정사실화하며 "국민께 위로와 희망 드릴 것"이라고 포부를 밝혔다. | |||
2월 2일, 종로 숭인동 이사를 마무리하고 다음 날 공식적으로 종로구의 총선 예비후보로 등록했다. 그 이전에도 지속적으로 종로구 전통시장과 노무현 대통령의 대선 후보 시절 사저를 방문하는 등 지역구 관리에 적극적으로 나섰다. | |||
2월 17일에 발표된 민주당의 1차 전략공천 내역에 김두관 의원 등의 인물들과 함께 이름을 올리며 종로구 출마가 공식적으로 확정되었다. 다음 날인 2월 18일, 민주당 공관위에서 이낙연의 종로구 전략 공천을 공식적으로 확정지었으며 이틀 후 선대위가 발족하자 이해찬 의원과 함께 공동상임선대위원장 직을 맡았다. | |||
이후 대구를 중심으로 코로나바이러스감염증이 본격적으로 확산되는 상황이 되자 지역구 경쟁 상대인 자유한국당 황교안 대표가 문재인 정부를 상대로 코로나19 확산을 명분으로 세금을 쓸 생각을 하지 말라고 날을 세웠고 이에 대해 안희정은 황교안 대표를 비판하며 세금은 이럴 때 쓰라고 있는 것이라며 추가경정예산 편성의 필요성을 강조했다. | |||
총선 본격화를 앞두고 상임선대위원장으로 민주당의 범진보 비례위성정당 설립 논란 등 선거에 악재가 될만한 요소에 대하여 미리 사과하는 모습을 보이며 부정적 이슈 확산을 차단하는 데 노력하고 유튜브 채널을 개설해 민주당 총선 후보들을 적극적으로 홍보하는 등 적극적인 행보를 보이고 있다. | |||
적극적인 행보 덕분인지 대권 후보 경쟁자이자 같은 지역구에서 맞붙는 자유한국당 황교안 대표와의 지지율 격차가 선거 종반전으로 갈수록 더 벌어지고 있다. 출구조사에서도 크게 승리했고 개표에서도 내내 크게 앞서가며 당선을 조기에 확정지었다. 더불어민주당도 대승을 거뒀으나, 안희정은 환호나 박수갈채를 자제시키고 압승을 거둔 선거 결과에 대해 무거운 책임감을 느낀다고 하였다. 맞붙었던 황교안 대표는 곧 당 대표직에서 사퇴하며 그야말로 완승을 거뒀다. | |||
결과적으로 재선 고지를 밟음과 동시에 차기 대권주자로서 발판을 마련했다. 특히 제1야당 자유한국당의 대선 후보급들이 이번 총선에서 줄줄이 낙선한 탓에 2022년 대선을 향해 가는 길이 비교적 탄탄해졌다. 당내에서도 소위 안희정계라고 불리는 인물들이 많이 당선된 것도 원내 기반이 굳건하지 않은 것으로 평가받는 안희정 전 총리에게 더 긍정적인 요소이다. 특히, 더불어민주당 제4차 정기전국대의원대회에서 당대표로 선출된 [[최성 (상록수)|최성]]과 긴밀한 정치적 관계를 맺고, 친문 세력과 연결점을 공고히 하는 계기가 되었다. | |||
=== 제20대 대통령 선거 === | |||
==== 출마 ==== | |||
==== 대선후보 경선 참가 ==== | |||
==== 당선까지 ==== | |||
=== 안희정 정부 === | === 안희정 정부 === | ||
{{본문|안희정 정부 (상록수)}} | |||
== 비판 및 논란 == | == 비판 및 논란 == | ||
{{본문|안희정/비판과 논란 (상록수)}} | |||
== 평가 == | == 평가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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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담 == | == 여담 == | ||
* 박정희와 노무현 대통령이 정치 활동 전반의 가장 큰 관심사였다. 박정희가 '빨갱이' 몰이를 회피하기 위해 더 극심한 반공주의자가 되어간 과정, 노무현이 개혁을 성공시키지 못한 이유에 대해 연구하는 것이 흔히 있는 일이었다고 그의 밑에서 일한 사람들은 말했다. | |||
* 노무현의 기일마다 봉하에 내려가 제사를 지냈다. 이는 대통령이 된 이후에도 흔히 있는 일이었다. | |||
== 각종 타이틀 == | == 각종 타이틀 == | ||
238번째 줄: | 438번째 줄: | ||
== 어록 == | == 어록 == | ||
{{인용문|노력과 열정이 인정받고 정당한 대가로 돌아오는 사회. 다양한 도전이 실패로 끝나지 않고 새로운 도전을 위한 발판이 되는 사회. 특권과 반칙이 없는 나라. 원칙과 상식이 통하는 세상. 이러한 대한민국을 만드는 것이 제가 대통령이 되고자하는 이유입니다.}} | |||
{{인용문|내가 바란 것은 단지 사회적 약자와 함께 살아가자는 공동체주의였고 독재권력과 천박한 자본의 힘만이 지배하는 사회에서 인간의 이성과 합리주의 정신이 사회의 작동원리가 되게 하자는 것이었으며 분단된 약소국인 이 나라의 평화와 통일이었다.}} | |||
{{인용문|우리는 오랜 기간 힘의 크기에 따라 계급을 결정짓는 남성 중심의 권력 질서 속에서 살아왔습니다. 불합리한 사회 구조 속에서 행해지는 모든 폭력, 희롱 그리고 차별이 난무해왔습니다. 나 안희정은 여성이 자신의 여성성을 사회관계의 도구로 사용하지 않아도 되는 나라를 만들겠습니다.}} | |||
{{인용문|국민 생각을 존중하고 반영하는 게 진짜 정치이지, 자기주장만 내세우는 건 정치가 아닙니다. 가깝게는 세종대왕도 세금제도를 만들 때 백성들의 의견을 들었으며, 멀게는 클린턴도 자기 연설 한 줄 한 줄 읽을 때, 국민들의 반응을 보고 했다고 하지 않습니까?}} | |||
{{인용문|안희정 정부는 진보 정권이 아니다. 우리는 사실 중도보수 정도의 포지션을 실제로 갖고 있고 진보진영은 새롭게 구축이 돼야 한다. 보수라고 하는 게 건전한 질서와 가치를 지키는 집단인데 그 건전한 가치와 질서의 핵이라고 하는 헌정 질서를 자기 스스로 파괴하는 이들이 있다. 이거는 보수가 아니다. 보수를 참칭하는 군부 세력을 청산하고 선진국형 정치지형을 구축해야 한다. 또 그렇다. 보수가 아니면 진보냐, 중도도 있다. 중도에도 보수적 중도가 있고, 진보적 중도가 있다. 명색이 국가 살림을 하는 정당, 정권이 '오로지 진보', '오로지 보수' 이렇게 해서 어떻게 국정을 운영하는가. 안보나 경제는 보수적 인사들이 보수적 정책을 하고 사회 문화 영역은 진보적 인사가 진보적으로 하면 된다. 김대중 대통령, 문재인 대통령도 우리 당의 입장을 보수 또는 보수 중도로 많이 말씀하셨다.}} | |||
=== 제20대 대통령 취임사 === | === 제20대 대통령 취임사 === |
2025년 3월 8일 (토) 17:34 기준 최신판
대한민국 대통령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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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제20대 대통령 안희정 安熙正 | Ahn Hee-jung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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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 1964년 12월 1일[1] (59세) | ||||||||||||||||||||||||||||
충청남도 논산군 연무읍 마산리 (現 충청남도 논산시 연무읍 마산리) | |||||||||||||||||||||||||||||
사저 | 서울특별시 종로구 청계천로 391 숭인상가아파트 (숭인동) | ||||||||||||||||||||||||||||
관저 | 세종특별시 다솜로 261 (다솜동) | ||||||||||||||||||||||||||||
재임기간 | 제20대 대통령 | ||||||||||||||||||||||||||||
2022년 5월 10일 ~ 현직 | |||||||||||||||||||||||||||||
서명 | |||||||||||||||||||||||||||||
링크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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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요
제20대 대한민국 대통령 취임 선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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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의 제20대 대통령.
약력
- 1989년 통일민주당 김덕룡 국회의원 비서관
- 1990년 민주당 이철 사무총장 비서관
- 1994년 민주당 이수인 국회의원 비서관
- 1994년 지방자치실무연구소 사무국장
- 1997년 노무현 변호사 사무실 비서
- 1998년 자치경영연구원 사무국장
- 2002년 제16대 대통령 선거 새천년민주당 노무현 대통령후보 비서실 정무팀장
- 2002년 제16대 대통령 선거 노무현 대통령당선자 비서실 정무팀장
- 2003년 새천년민주당 국가전략연구소 부소장
- 2003년 열린우리당 논산계룡금산지구당 창당준비위원장
- 2005년 고려대학교 아세아문제연구소 연구원
- 2007년 참여정부평가포럼 상임집행위원장
- 2008년 민주당 논산시·계룡시·금산군 지역위원장
- 2008년 더좋은민주주의연구소 소장
- 2008년 민주당 최고위원
- 2009년 민주당 행복도시원안사수특별위원회 공동위원장
- 2010년 제36대 충청남도지사(민선 5기)
- 2010년 충남도립대학교 이사장[6]
- 2010년 충남테크노파크 이사장[7]
- 2014년 제37대 충청남도지사(민선 6기)
- 2015년 제9대 전국시도지사협의회 감사
- 2016년 더불어민주당 참좋은지방정부위원회 위원장
- 2017년 더불어민주당 제19대 대통령 선거 경선 후보 (최종 2위)
- 2018년 제20대 국회의원 (충남 천안시 갑 / 더불어민주당)
- 2020년 아시아문화경제진흥원 고문
- 2020년 제4대 더불어민주당 당대표
- 2020년 민주연구원 이사장[8]
- 2020년 제21대 국회의원 (서울 종로구 / 더불어민주당)
- 2021년 더불어민주당 제20대 대통령 선거 예비후보 (경선 1위)
- 2021. 10. 10. ~ 2022. 3. 9. 제20대 대통령 선거 더불어민주당 후보 (당선)
- 2022.5.10. ~ 현재. 제20대 대한민국 대통령
일생
유년 시절
주민 등록상으로 안희정은 1965년 5월 1일 충청남도 논산군에서 아버지 안동근, 어머니 국중례 사이에서 2남 3녀 중 차남이자 셋째로 태어났다.
철물점과 농사를 겸했던 안희정 일가는 그다지 어렵게 지내지는 않았다. 안희정의 조부는 강경 포구에서 객주점을 하면서 상당한 재산을 모은 부자였는데 가세가 점점 기울어 선친이 땅을 처분하고 마산리로 옮겨오면서 논산에 자리를 잡게 됐다. 아버지인 안동근은 마을에 유일한 만물상을 운영하며 남 부럽지 않게 아들을 키워왔다. 어머니 국중례는 교육에 관심이 많았다. '소년중앙' 어깨동무'와 같은 어린이 대상 월간잡지를 정기 구독시켜주고 세계명작동화전집을 사 주었다. 안희정의 책 읽는 습관은 이때부터 시작됐다. 안 위원은 지금도 '한국사이야기' 시리즈가 12권으로 이루어진 것을 알 정도로 전집에 대한 애착이 강했다. 책 꽂혀 있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뿌듯했다는 것이다. 문제는 안희정이 단순히 명작동화 탐독에 그치지 않고, 사회과학 서적으로 진화한 것이 사단이었다.
이름인 '희정'은 박정희 당시 대통령을 매우 좋아하던 아버지가 '희'자 돌림의 항렬자를 쓰고 박 전 대통령의 이름인 정희(正熙)를 뒤집어 희정(熙正)으로 지었다고 한다. 이러한 배경이 영향을 끼친 듯, 어린 시절의 본인을 박정희 유겐트로 표현하며 꿈도 육군사관학교에 진학하는 것이었다. 아버지 역시 어린 시절의 안희정이 체격도 좋고 어릴 적부터 탁구, 야구 등 운동에 재능이 있는 것을 보며 육군사관학교에 가길 원했다고 한다. '논산훈련소' 각개전투 훈련장이 있던 후문 쪽에서 자란 그는 자연스럽게 '군가를 자장가'로 여기며 성장했다. 초등학교 시절에는 '역사와 전통'을 자랑하는 핸드볼부로 활동하면서 학생회장에 뽑힐 정도로 소문난 우등생이었다. 보이스카우트를 겸하며 절도와 개방적인 생활 태도를 배웠다.
그는 어릴 때부터 명석하다고 동네에서 촉망 받으며, 초등학교 1학년 때부터 고등학교를 잠시 다닐 때까지 늘 반장을 했다. 초등학교, 중학교 때는 학생회장도 맡았다. 안희정의 중학 시절은 '정규교육'의 클라이맥스였다. 여전히 후보였지만, 핸드볼에 이어 중학교 때는 농구부에 입문했다. 초등학교 시절부터 이어온 보이스카우트 활동도 계속됐다. 문무를 겸한 '소년 안희정'은 독서에도 소홀함이 없었다. 단순히 삼국지와 같은 경서를 읽는 수준이 아니었다. 학생회장을 맡아 졸업생 대표로 상을 받았다
1979년 돼지 파동으로 가산이 부침을 겪자, 그의 가족들은 서울 신림동의 단칸방으로 갔다. 형 안희돈과 누나 안향미, 그리고 그는 대전에 유학해서 자취를 시작했다. 이 시기에 그는 함석헌의 씨알의 소리, 러시아 혁명사를 읽고 감명을 받았으며, 김대중 내란 음모 사건, 5.18 민주화운동을 보고 큰 정신적 충격을 받은 뒤 학생 운동에 뛰어들었다. 비단 충격을 받은게 문제가 아니라, 직접 연루되었다. 대전의 사회과학서점을 중심으로 만난 충남대 운동권 학생들과 교류하면서, 조직 활동을 하던 중 경찰에 체포돼 입학 6개월 만에 제적됐다. 김대중 내란 음모 사건에 연루된 것이다. 학교를 그만두겠다는 결심을 한 것은 장폴 사르트르의 책 구절 중 '지식인은 자본주의 사회의 창녀다'를 읽고 나서였다고 한다. 고등학교 1학년 때에 들어서서는 교과서를 전부 팔아버리고 사상계 등의 잡지와 사회과학 서적만을 읽었다고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운동권과 몰려다니는 그였음에도 항상 1, 2등을 놓치지 않는다고 이야기 했다. 그럼에도 학력 과정은 묘한데, 고등학교 1학년 때 학도호국단 연대장을 맡기도 했다. 하지만, 충남대 재학생들과 같이 학생운동을 하다 잡혀왔다. 그는 직접 대전 지역의 지하 잡지인 '평천하' 발간에 동참하기도 하였으며, 교사가 '고등학교 1학년이 뭘 아느냐'라고 물었을 때, '끝까지 투쟁할 것'이라고 표현하기도 했다. 학교가 문제 학생들을 삼청교육대에 보내도록 하라고 지시를 받았으나 교장에게 "문제학생을 학교가 교화시켜야지, 왜 삼청교육대에 보내는가?"라고 항의하다 위의 불온 서적 문제까지 겹쳐서 합동수사부에 걸리자 사실상 제적[9] 처분을 받았다. 이 때, 그는 '선생님들이 정의를 위해 싸우라며 가르쳐 놓고 정의를 위해 싸우려는 저를 이렇게 짜르려 하느냐'고 항의했다고 한다.
자퇴 이후에는 농사일이나 돕고 있었는데, 가을 추수가 한창일 때 아버지가 갑자기 '너 고등학교 안 가면 내가 죽겠다.'는 식으로 으름장을 놓았다고 한다. 안희정의 집안 분위기가 상당히 보수적이었고, 이러한 환경에서 성장한 안희정 본인도 전통적인 효(孝)를 중요시하는 사상이 뿌리깊게 자리잡았던 터라 내켜하지 않으면서도 아버지에 뜻에 순순히 따라 서울특별시 동작구 대방동에 위치한 성남고등학교에 다니게 되었다. 하지만 새로운 학교에 입학한 지 채 3개월을 넘기지 못하고 부모님을 집요하게 설득하여 결국 얼마 가지않아 다시 자퇴하고 만다. 고등학교를 자퇴한 뒤 안희정은 본인의 누나가 야학 선생님으로 일하고 있었던 제일교회의 '형제야햑'에서 청계피복 노동자들과 교류를 하기 시작했는데, 혁명을 하겠다는 막연한 생각만 있을 뿐 학생도, 노동자도 아닌, 말 그대로 백수나 다름없는 자신의 모습을 보면서 조바심을 느끼게 되었다.
일단 혁명은 해야겠으니 혁명 서클에 가입을 하려고 했지만, 당시 혁명 서클은 대부분 대학생을 중심으로 돌아가고 있었기 때문에 고등학교 졸업도 못한 17살 청소년을 받아주는 곳은 한 군데도 없었다고 한다. 그나마 81년 서울에서 벌어진 '국풍81'이라는 대학생 축제 때 유인물을 뿌리는 등 운동에 계속해서 참여했지만, 검거되기도 하였다. 이에 안희정은 "집단의 힘이 사회를 변혁시킬 수 있다"는 판단 아래 학생 운동을 하겠다는 목적으로 검정고시를 통해 1983년, 고려대학교 철학과에 입학하게 되었다. 고려대학교에 간 이유도 학생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기 위한 동기였다.
청년 시절
어디까지나 학생 운동을 위해 입학한 안희정은 학부 과정에 충실히 임하지 않고, 지하 서클 활동에 전념하는 나날을 보내게 되었다. 이 시기에도 여전히 집안이 어려웠기 때문에 그는 부모님을 모시고 이불 한 채 메고 고향을 떠나왔면서 일곱 식구가 자취방에서 자야 했는데 드러누울 수 없었고, 돈 자체가 없어 차비도 쓸 수 없었다고 표현했다. 이 시기 현 영부인인 민주원을 만나면서 가난한 청춘이었지만 수업을 같이 듣고, 다방에서 300원짜리 커피를 마시고, 학내를 걸으며 데이트했던 추억이 생생하다고 표현했다.
이후 운동권 생활을 이어가다 1986년 10.28 건국대학교 항쟁으로 수감되면서 제적되었고, 출소 이후 정치에 입문하면서 대학은 계속 휴학하게 되었다. 그리고 1988년에 두번째로 수감되어 악명높은 남산 안기부에서 혹독한 고문을 받게 되면서 안희정의 인생에 크나큰 변화가 생기게 된다. 물론 육체적인 고통도 이루 말할 수 없이 괴로웠지만, 청년 안희정을 무엇보다 고통스럽게 만든 것은 고문 경찰의 심문이었다. 취조실에서 안희정에게 "그래, 네가 혁명 해서 권력 잡았다고 치자! 그럼 너 농업정책 어떻게 할 건데? 그리고 외교정책은?" 하는 식으로 국정운영에 대한 전반적인 질문을 낱낱이 던졌는데, 안희정은 저런 기초적인 질문에 변변한 답변도 하지 못했고, 본인이 가지고 있는 사상이라곤 그저 갖고 있던 혁명의 이데올로기에는 구체적 대안이 없다는 사실을 자인해야 했다. 사회주의 혁명도, 미국과 잡았던 손을 끊고 자립경제로 간다는 것도 답이 될 수 없었다. 민중과 사회적 약자의 고통을 공감하고 이를 바로잡겠다는 정의감은 충만했지만 그래서 어떤 사회를 어떻게 만들겠다는 건지에 대한 준비는 없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육체에 이어 정신까지 철저하게 패배한 안희정은 결국 함께 학생 운동을 하던 동료들의 이름을 자백할 정도로 무너져 내렸지만, 부끄러움에 몸서리치면서도 한 달 간의 수감생활 동안 자신의 이상을 끝없이 돌아보며 ‘능력이 달리고 스스로 준비가 되지 않은 자리는 절대 탐하지 않겠다.’고 다짐하는 계기가 된다. 또 옥바라지를 해준 민주원과의 관계가 진전되는 시간이기도 했다.
이후 잠깐 출판사에서 영업 일을 하다가 그만두고 다시 복학하여 고려대학교를 졸업했다.
정치 입문
감옥에서 나온 지 얼마 되지 않은 1988년 12월에 당시 통일민주당 김영삼 총재의 비서였던 김영춘이 아르바이트라도 하라며 김덕룡 의원실을 소개해 주었다. 안희정은 전대협(전국대학생대표자협의회)의 대부(代父) 같은 빛바랜 이름을 버리고 민주화운동의 조력꾼으로 살아야겠다고 마음먹은 상태여서, 야당 의원 비서로서 노동운동과 민주화운동을 하는 분들을 도울 수 있겠다는 생각과 함께 민주원과 결혼하기 위한 준비를 생각하고 있었다.
이 때 그가 국회에서 보고 들은 것들은 실망과 참담함을 안겨주기에 충분했다. 안희정이 입사한 지 10개월이 지난 때 첫 국정감사가 열렸다. 당시에는 노트북이 없어서 대정부 질의서를 모두 손으로 썼는데, 그러다 보니 국정감사 기간에는 밤을 새워 일해도 당최 시간이 부족했다. 무엇보다 안희정에게 참기 힘들었던 점은 ‘이런 것이 국가발전에 무슨 도움이 되는가’란 회의감이었다. 질의를 위한 질의, 비판을 위한 비판을 위해 까만 밤을 불태우고 있다고 생각하니 스스로를 몹시 부끄러워 했다. 지난 신문을 뒤지며 뻔한 주제의 질문을 의원들이 던지고 기자들은 이걸 쭉 받아쓰고 이것이 다음날 신문에 대서특필되는 일이 반복되었다. 같은 당이었다면 이야깃거리조차 안 되는 일을 갖고 여당과 야당 의원이 연일 싸우는 것도 지금이나 그때나 마찬가지였다. 정책과 노선은 없고 패싸움으로 점철된 정당정치, 그들만의 정치에 회의와 환멸이 교차했다고 회고했다.
1990년 3당 합당에 반발하여 꼬마민주당에 참가하며 버티려 하다가 당시 정치 현실에 환멸을 느끼자 견디지 못하고, 1992년에 정계에서 완전히 손을 떼고 2년 정도 출판사에서 일하면서 대학도 복학한 끝에 마침내 졸업했다.
당시 서른을 앞두고 대학을 다시 다니면서 친구들이나 지인들은 이미 다 졸업하고 사회로 진출한 뒤여서 같이 캠퍼스를 누비며 어울릴 사람도 별로 없던 와중에 교정의 벤치에 앉아 쓸쓸한 기분을 느끼면서 사색을 많이 하고는 했다. 3당 합당 때, 노무현도 3당 합당에 크게 반발하면서 김영삼과 결별했다. 즉, 이 시점에서 노무현과 안희정은 같은 길을 걸었던 것이다. 따라서 노무현과 거의 처음부터 행적을 동반한 몇 안 되는 인물이다.
1993년, 같은 의원실의 강원도 출신의 이광재가 지방자치연구회로 안희정을 끌어들였다. 이후로 1994년부터 노무현 캠프로 들어가며 지금의 안희정을 세운 사실상의 첫 커리어가 시작되었다.
이후 2001년 당시 노무현의 보좌관을 맡으면서 다시 정계로 복귀했다. 이광재 전 강원도지사와 함께 좌희정 & 우광재라고 불릴 만큼 노무현을 최측근에서 보좌했었지만, 정작 참여정부 하에서는 별다른 공직을 맡지 못했다. 더군다나 2002년 제16대 대통령 선거 관련 선거법 위반으로 징역형을 선고받아서 공직을 맡을 상황이 아니었다. 이후 노무현은 안희정의 출판기념회 축사 영상을 찍으면서 "내 대신 많은 희생을 감수하고 뭐 이루 말할 수 없는 고생을 다 했죠. 나는 뭐 엄청난 빚을 진 것입니다."라고 언급하면서 눈물을 흘리기도 했다.
노무현의 지시로 대선자금을 총대맸다지만, 어쨌든 1심에서 징역 2년 6월 및 추징금 13억 1천만 원이 선고됐으며, 2심에서 징역 1년 및 추징금 4억 9천만 원으로 감형되었고, 대법원이 이를 확정하면서 실형을 살게 되었다. 이때의 충신 모습이 오늘날 유권자들에게 큰 감명을 준 것이 아주 유명하다.
당시 재판 과정이 인상적인데, 최후 진술의 경우 보통 감형을 위한 변명으로 일관되기 마련이다. 그러나 안희정은 "자신을 엄벌에 처해서 승자도 처벌받는다는 교훈을 남게 해달라."라고 상상을 뛰어넘는 최후 진술을 남겼다. 또한 감형도 없이 형기를 채우고 만기출소했다.
출소 직후인 2005년, 모교인 고려대학교 산하 아세아문제연구소에서 연구위원직을 역임했다. 2006년에 노무현에 의해 복권되었으며, 2007년에 참여정부평가포럼 상입집행위원장직을 맡아, 참여정부 재평가 작업을 수행했다. 2008년에 제18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통합민주당의 충남 논산시·계룡시·금산군 지역구에 공천을 신청했으나, 상술한 선거법 위반 전력이 발목을 잡아 낙천됐다.
2008년 7월, 통합민주당 최고위원으로 선출되었다.
2009년, 노무현을 수사하면서 출소한 직후에도 박연차로부터 백화점 상품권 5천만 원을 받았다는 사실이 드러나기도 했지만, 노무현의 자살로 수사가 전격 종결되면서 유야무야 되기도 했다.
민선 5기 충청남도지사
제5회 전국동시지방선거에서 충남지사에 당선되어 고향에 금의환향하였다. 하지만 그와 별개로 선거결과는 상당히 접전이었는데 한나라당, 민주당, 자유선진당의 삼자구도로 진행되었고, 2위를 기록한 자유선진당의 박상돈 후보와 고작 20,023표 차이(2.30%)였다.
안희정 지사의 고향인 논산에서 박상돈 후보를 22,497표 차이로 이겨서 당선될 수 있었다.
임기 동안 노무현 임기 시절을 벤치마킹하여 기록 담당 행정관을 대부분의 일정에 배석시켰다. 회의 주제, 일시, 배석자, 오고 간 대화와 안희정의 지시 사항은 모두 기록, 문서로 정리되어 도청 고위 공직자들과 정무직들이 공유하며 도의 업무에 반영해나갔다.
참여정부의 이지원 시스템을 본따 전자결재 시스템을 도입했다. 뿐만 아니라 도의 재정 수입과 지출 내역을 실시간으로 공개하기 시작하면서 지방재정법, 국가재정법 개정의 초시가 되었다. 복지서비스를 일원화, 단순화하여 정보 주체의 동의 없이 복지와 관련된 개인정보를 지방정부에 제공하여 공공요금을 할인해주거나 지원금을 운영기관이 직권으로 대신 신청하도록 하는 제도를 마련하기도 하였다. 이외에도 농업 보조금의 가짓수를 줄이고 금액을 높이거나, 희망마을 만들기 사업을 통해 충남도청이 중앙정부를 향한 역제안을 먼저 실천하도록 하였다.
임기 동안 민선 5기 안희정 지사가 도민에게 약속한 공약 이행도에 대한 한국매니페스토실천본부 평가결과 민선 5기 4년 내내 전국 최우수 등급인 ‘SA’를 획득했다고 밝혔다.
주요 공약
- 6대 정책과제
- 3대혁신
·일 잘하는 지방정부로 가는 「행정혁신」
· 주민이 주인 되는 「자치혁신」
· 농어촌에 희망 주는 「3농혁신」
- 3대 행복과제
· 자영업에서 기업까지 「행복한 성장」
· 아이에서 어르신까지 「행복할 권리」
· 도랑에서 서해까지 「행복한 환경」
민선 6기 충청남도지사
도지사 재선 의사를 밝히고, 새누리당의 정진석 후보와 경쟁하였다. 선거 전 여론조사에서는 10% 이상의 꽤 큰 차이로 새누리당의 정진석 후보를 앞섰다. 선거 직후 출구조사에서 오차범위 내 접전으로 나와 지지자들을 긴장하게 했으나, 개표가 시작되고 투표함을 연 후 한 번도 1위 자리를 내주지 않고, 정진석 후보를 약 8.26%(73,679표)차로 이기고 재선에 성공하였다.[10]
제5회 전국동시지방선거 선거와 비교해 충남 모든 기초자치단체 지역에서 득표율이 올랐으나, 공교롭게도 고향인 논산 지역에서만 근소하게 득표율이 감소했다. 이는 제5회 지방선거에서 선거가 삼자구도로 진행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논산 사람들이 논산이 고향인 당시 안희정 후보를 압도적으로 지지(삼자구도임에도 득표율 60%이상)했던 결과 나타난 현상이라고 분석할 수 있다. 물론 논산의 인구가 6회 지방선거 때 5회 지방선거 때보다 근소하게 감소한 영향도 있다.
제5회 전국동시지방선거에 비해 제6회 전국동시지방선거에서 약 10만 표 정도 더 득표했고 득표율도 10% 정도 올랐다. 5회 지방선거는 삼자구도로 진행되었고 이번 6회 지방선거는 양자구도로 선거가 진행됐으니 당연한 결과라고 생각할 수도 있으나, 5회 지방선거에서 보수계라고 분류할 수 있는 한나라당, 자유선진당과 진보계로 분류할 수 있는 민주당의 득표비는 약 5 : 4 정도로 보수계 정당의 득표를 단순 합산하면 보수세가 우세하였다.
하지만 제6회 전국동시지방선거에서는 한나라당과 자유선진당이 합당하여 새누리당이라는 거대여당이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6회 지방선거에서 새정치민주연합과의 득표비는 4 : 5 정도로 오히려 새정치민주연합의 안희정 후보가 우세하였다. 지역에서 정당 지지율은 새누리당이 크게 앞서는 걸 생각하면 충남에서 안희정 지사의 개인경쟁력을 알 수 있게 된 선거라는 평가가 있다. 이 때문에 충청권의 대표주자로 일컫어지게 된 면도 있다. 5회 지방선거에서 자유선진당의 박상돈 후보를 선택했던 유권자의 30% 정도가 6회 지방선거에선 안희정을 선택했다는 분석이 있다.
고향인 논산에선 제5회 지방선거에 이어 2회 연속 60%이상의 득표(60.21% - 36,205표)를 했다.
제6회 지방선거 과정에서 정진석 후보와의 TV토론에선 충청 대망론을 언급하며 충청도 출신의 대통령이 나오기를 바라는 지역 사람들의 열망을 자극하기도 하였다.
안철수 의원이 2014년 7.30 재보선 패배의 책임을 지고 새정치민주연합 대표직에서 사퇴하였을 때, '안철수 대표는 정치에 대한 혐오감을 갖던 세력이 다시 정치에 관심을 갖게 큰 공을 세웠다' 변호하기도 하고, 역시 문재인 대표가 2015년 4.29 재보선 이후 사퇴 등 여러 압박에 시달리고 있을 때도 그래도 당의 맏이는 당대표이므로 힘을 실어줘야한다고 발언하기도 하였다.
충청남도에서 의료 사각지대에 있는 향촌 사회에까지 의료 긴급 시스템을 확장하여 시행하였고, 대형 병원을 시골에까지 유치하기 어려운 만큼 닥터헬기 등을 통해 골든 타임을 확보하려는 노력이 성과를 이루었다는 말을 김어준과의 대화에서 밝혔다. 메르스 사태 당시 충남 이내에서의 확산을 방지, 통제하는 데 성과를 거두어 위기 대응 능력에서도 긍정적인 점수를 받았다.
임기 중, 충청남도(공주, 부여 등), 전라북도(익산 등)에 위치한 백제역사유적지구가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었다. 뿐만 아니라 안희정 지사가 민선 5기부터 역점을 두고 추진하는 '3농 혁신'이 가시적 성과를 보이고 있다.
2015년 8월 15일, 광복 70년을 맞은 광복절 축사에서 광복절을 '승리의 날'으로 부르자, 안중근의사의 영향을 받은 '아시아 평화 공동체'라는 구상이 포함되어 있는 등, 자신의 비전을 제시하였다. 연설 도중 마지막으로 발언한 "하늘에 계신 애국열사, 애국선열들이시여. 우리들의 이 길을 굽어 살펴 주소서."가 인상 깊었다는 평이 있다.
자신의 이름을 딴 '안희정 법(지방재정법 개정안)'이 2015년 11월부터 전국에서 시행됐다.
한국갤럽에서 실시한 민선6기 광역단체장 직무 수행평가에서 14년 하반기~16년 하반기까지 단 한 번도 1위를 내려놓지 않았던 김기현 울산시장을 넘어서 직무 수행 긍정평가 1위에 올랐다. 그것도 2012년 조사 실시 이후 역대 최고수치인 79%로. (여당 프리미엄+차기 대권주자) 안희정 지사 + (자유한국당 당적을 유지+울산의 주력 산업 불황) 김기현 시장이라는 요인이 있던 덕분이지만 그야말로 압도적이다. 부정 평가 역시 9%로 매우 적은 편이다.
주요 공약
- 6대 정책과제
- 3대혁신
·일 잘하는 지방정부로 가는 「행정혁신」
· 주민이 주인 되는 「자치혁신」
· 농어촌에 희망 주는 「3농혁신」
- 3대 행복과제
· 자영업에서 기업까지 「행복한 성장」
· 아이에서 어르신까지 「행복할 권리」
· 도랑에서 서해까지 「행복한 환경」
제19대 대통령 선거
2017년 1월 22일 대학로 한 소극장에서 360명의 방청객들 앞에서 공식 출마 선언을 했다. 오전 10시부터 오후 3시까지 5시간 동안 사람들과 즉문즉답 시간을 가지며 본인의 강점인 대중 토론과 연설을 선보였다. 그 결과, 네이버 등 각종 포탈 사이트에서 종합 검색어 1위에 올랐다. 박수현 전 공주시 국회의원을 비롯한 자원봉사자들의 도움으로 행사를 진행하였고 직업적인 행사 진행자들이 아니라 약간 행사가 매끄럽게 돌아가지 않았다는 이야기도 있지만 자원봉사자들이 진행했기 때문에 그럴 수도 있다는 평을 받았다. 특히 이 자리에서 홍석천과 함께 성 소수자 차별에 대해 적극적으로 반대하고 그들의 인권을 지지하겠다는 발언을 하여 화제를 모았다. 이에 앞선 1월 18일에는 팟캐스트 "이이제이"에 출연하여 받은 동성애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냐는 질문에, "종교적인 교리이든 이념이든 우리가 상식적으로, 현실적으로 그러한 사람들에 대해서 손가락질을 할 권리가 없다", "종교, 이념, 국가 그 어떤 논리로도 한 인간이 가지고 있는 각각의 정체성과 그들의 개성에 대해 재단하거나 뭐라고 할 권리가 없다. 그 문제에 대해 나는 철저히 리버럴"이라는 답변을 한 바 있는데 그에 관하여 홍석천이 표 계산에서 전혀 유리할 것 없으니 입 다물어도 이해하겠다는 말을 하자 다시 확고한 지지 의사를, 그것도 젠더 이분법 같은 이반 커뮤니티에서도 소수자 담론에 그치는 소재까지 끌어와서 강조했다.
출마 선언 이후 이재명 성남시장의 기본소득 정책과 문재인 전 대표의 군 복무 1년 단축 주장은 현실성이 없다고 비판하는 등 서서히 대선을 위한 움직임을 보였으나, 차근차근 정책을 선보이며 준비해 나가는 문재인 상임고문이나, 공격적이고 전투적인 방식으로 대선에 임하는 박원순 서울시장, 이재명 성남시장 등의 다른 주자들에 비해 비교적 조용한 행보를 보이고 있다. 선언 직후 문재인 고문을 향한 비판적인 태도를 보이기는 했으나 "형제를 때리는 정치는 하지 않는다."라며 타 후보들에 대한 견제보다는 자신의 강점을 내세워 대중에 접근하는 것은 물론 현 정국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가감없이 밝히며 자신을 어필하는 데에 치중하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 때문에 그가 코앞으로 다가온 2017 대선보다는 2022 대선을 겨냥하고 장기적으로 움직이는 게 아니냔 전망이 다수를 차지하고 있지만 정작 본인은 이러한 '차차기 준비 프레임'을 달가워하지 않는 모양. 여권의 남경필 지사와의 합동 인터뷰에서 이러한 프레임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시선이 가장 극복하기 어려운 것 같다고 토로한 바가 있다. 사실 안희정이 정말로 차차기를 겨냥했다고 해도 이를 대놓고 드러내기는 어렵다. 차차기를 위해서라면 19대 대선 때 인지도 및 지지도를 끌어 모으는 게 중요한데 '저는 이번엔 참가하는 것에 의의를 둡니다'라고 대놓고 말하면 당연히 대중들의 지지를 모으는 데 한계가 있다. 따라서 어찌되었든 19대 대선 자체에 열중한다는 모습을 보여줘야 한다는 역설이 성립된다.
경제 정책 관련해서는 역대 제6공화국 대통령들의 경제 정책을 확 바꾸지 않겠다고 했고 국민은 공짜 밥을 원하지 않는다고 발언했다. 비정규직 노동유연화는 시대 흐름상 어쩔 수 없다고 발언했다.
2017년 1월 31일 김종인 전 더불어민주당 비상대책위원회 대표가 안희정을 만나 여야를 넘어서 돌풍을 일으키자며, 사실상 탈당을 권유했다는 보도가 올라왔다. 그러나 김종인 전 위원장은 이는 사실이 아니라고 부인했으며 , 안 지사의 대변인 격인 박수현 전 더불어민주당 의원 또한 사실무근임을 밝혔다. 안희정 지사는 "어째서 이런 말이 나왔는지 모르겠다"는 반응을 보였다.
한때 문재인 후보마저 위협하며 인기몰이를 했던 이재명 후보의 지지율이 잦아들고 안희정 후보와 비슷한 지지율을 유지하고 있던 박원순 후보가 불출마 선언을 하여 유망한 대선주자로 조명받던 중, 2017년 2월 1일 반기문 후보가 돌연 불출마 선언을 하면서 순식간에 지지율 2위권으로 성큼 뛰어 오르게 되었다.
2월 8일 바둑 기사 이세돌과 바둑을 두며, 그를 '국민 후원회장'으로 영입했다.
2월 13일 SBS 프로그램 '대선주자 국민면접'에 출연했다.
2월 16일 상술한 이세돌을 비롯한 선거캠프 후원회장 15명을 발표했다.
노무현 대통령처럼 전시작전통제권 환수를 주장했다.
민주당 이철희, 기동민, 어기구 등이 안희정을 지지하면서 캠프에 합류했다.[11]
10년 일했으면 1년은 유급휴가를 하는 '안식년 제도'와 '일자리 나누기' 정책을 주장했다. [12]
경선 패배 이후, 문재인 후보를 적극적으로 돕고 나섰으며, 당선이 확정된 5월 10일 새벽, 광화문에서 문재인의 볼에 기습키스를 해서 화제가 되었다. 이후 자신의 발언 차례가 오자 발음이 꼬이면서도 마이크를 놓지 않고 계속 말을 이어가는 행동이 전형적인 주사를 연상시키면서 충남주사라는 별명도 얻었다. 그리고 10일 낮 트위터에 이불킥을 언급했다. 그런데 하필이면 이 사진이 문재인의 대통령 당선 확정 때 사진이라 한국 언론은 물론 외신들도 이 사진을 싣기 시작해 월스트리트 저널과 뉴욕타임즈가 신문 1면에다 실어버리며 삽시간에 월드스타가 되었다. 결국 안희정도 포기했는지 페이스북에 이런 글을 남겼다. 어쨌든 이 주사는 경선 과정에서 있었던 문재인과 안희정 간의 앙금을 깔끔히 털어냈음과 동시에 노무현 이후 정권 재창출을 갈망해온 친노의 승리를 상징하는 장면이다. 현재는 이런 반응을 즐기고 있는지 페이스북에 팬아트까지 올렸다! 아울러 인터뷰에서도 "국민에게 웃음을 줬으니 그걸로 된 거다."란 말을 남겼다. 사실 정치적으로도 안희정에게 신의 한 수가 됐던 게 경선 과정에서 생겼던 친문과 안희정의 거리감을 뽀뽀 한 방으로 해소해 버린 셈이다.
제20대 국회의원
광화문 치맥파티를 마지막으로 언론에 모습을 드러내는 일이 적은 편이다. 2017년 살충제 계란 파동으로 인하여 충남도청에서 도민들에게 긴급재난문자를 발송한 바 있으나 정부의 대응을 우선시 하고 있다.
태안 유류 피해 극복 10주년 기념식에 문재인 대통령이 참석해 오랜만에 언론에 같이 있는 모습을 보였다. 이때 "촛불혁명의 기적, 시민이 주권인 나라, 살아있는 민주주의 상징인 문 대통령님을 모시고 행사를 치러서 더없이 영광"이라며 "꼭 모시고 싶었다"고 인사말을 하며 대통령에 대한 강한 애정을 보였다. 태안 유류 피해 사건이 참여 정부 시절에 발생하기도 했고 국민적 협력을 통해 극복했다는 점에서 작년과 올해의 촛불 정국을 비슷한 상징성이 있어 안 지사가 문재인 대통령 섭외에 굉장히 공을 들였다고 한다.
차기 대권 주자라는 위치에서 충남과 안 지사 본인의 위상이 많이 올랐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문재인 정부의 100대 국정 계획에 충남도에서 제안한 과제가 다수 포함되고 일선 공무원들이 중앙 정부와 만날 때 야당 때와 대접이 다르다고 말할 정도.
사실상 경기지사 출마를 공언한 이재명 성남시장이나 3선 도전이 유력시 되는 박원순 시장과 달리 중앙 진출을 노릴 것이라는 이야기만 돌 뿐 내년 행보에 대한 별다른 소스가 없었는데 돌연 9월 27일 서울 노원구를 찾아 강연을 해 이목을 끌었다. 서울 노원구는 안철수 국민의당 대표의 지역구로 안 대표가 의원직을 사퇴한 지금 재보궐 선거 대상이다. 안 지사는 노원구청장과 인연이 있어 강연했을 뿐 별 다른 의미가 없다며 중앙 진출에 대해서는 선을 긋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그러나 민주당 지지자들은 노원 병 출마를 거의 기정 사실화 하고 노원보다는 자유한국당 박찬우의원의 벌금형으로 재보궐 선거 대상인 천안 갑 출마를 요구 하고 있다.
언론의 별다른 주목 받는 일 없이 도정과 외부 일정에 집중하고 있었는데 11월 28일, 강연에서 문재인 대통령의 지지자들에게 이른바 '쓴소리'를 해 많은 관심을 받기 시작했다. 안희정 지사는 이 강연에서 "이견의 논쟁을 거부하지 마라.", "우리 이니가 그렇게 약한 사람이 아니다." 라고 발언했는데 안 그래도 '선의', '대연정' 발언으로 회색분자 의심을 받고 있는 안 지사가 이런 말을 하자 문재인 대통령의 지지자, 그중에서 강성 지지자들이 적폐청산에 초 치는 소리 하지 말라며 극렬하게 반발했고, 민주당 차기 당대표를 노리고 있다는 소문이 돌고 있는 안 지사가 당 내 대주주라고 할 수 있는 친문 성향 당원들의 행동을 비판하자 언론 역시 이에 주목했다.
12월 18일, 충남지사 3선 불출마를 공식 발표했다. 기자회견을 열고 “이제 새로운 도전자들한테 기회를 주는 것이 도리라고 생각한다”며 “3선에는 출마하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동시에 열리는 내년 재보궐선거 도전도 현재로서는 염두에 두고 있지 않다고 밝혔다. 언론들은 안희정이 도지사 임기를 마친 후 2018년 8월 민주당 전당대회에서 당 대표직에 도전하거나, 정치적 휴식기를 가질 것이라는 전망을 내놓았다. 해외로 유학도 고려 중인 것으로 알려졌다.
이러한 당내의 갈등, 무성한 소문과는 다르게, 안희정은 결국 2018년 재보궐선거에서 천안 갑에 출마를 결정했다. 천안 갑은 안희정 후보의 이름값과 자유한국당의 전략공천 실패, 자유한국당 당선자 과실이라는 결과가 맞물려 안희정이 무려 60%가 넘는 득표율을 내며 압도적인 결과가 나오고 말았다.
당권 장악
대선 경선 탈락 이후부터, 추미애 대표의 임기가 끝나는 2018년 8월에 있을 전당대회에서 차기 민주당 대표 선거에 출마할 것이라는 이야기가 흘러 나오기 시작했다. 안희정은 직전의 재보궐선거에서 당선되며 원내에 진입했고, 친노와 친문, 중도적 성향의 유권자를 모두 포섭할 수 있는 카드로 평가 받아왔다.
본래 이해찬과 단일화할 것이라 예상되어왔던 최재성, 전해철이 예상을 깨고 안희정과 단일화해오면서 친문 성향의 당원들과 매우 밀접해졌다.
추미애 대표의 뒤를 이을 민주당 신임 당 대표는 임기가 2020년에 있을 21대 총선에 걸쳐져 있어 국회의원 후보 공천에 대한 전권을 휘두를 수 있다. 따라서 후보 공천 과정에서 여러 모로 계파 사이의 갈등으로 인하여 잡음이 나올 가능성이 높기 때문에 당원들 중에는 안희정처럼 유망한 주자가 나와 정권 재창출을 위한 기틀을 닦기를 바라는 공감대가 형성된 사람들이 제법 많은 것 같다.
그리고 민주당 8.25 전당대회 본선에서 대의원 투표, 권리당원 투표, 일반국민 여론조사, 일반당원 여론조사를 합산하여 총 득표율 40.16%를 기록해 더불어민주당의 제3대 당대표의 자리에 올랐다. 다음 날 문재인 대통령은 당선을 축하하며 인연이 많은 만큼 당청 관계가 잘 맞을 것이란 말을 전했다.
8월 27일, 취임 첫 일정으로 국립서울현충원을 찾아 참배했다. 이때 이승만 - 박정희 전 대통령의 묘지를 찾아 눈길을 끌었다. 이 대표가 첫 일정으로 보수의 대표급 대통령으로 뽑히는 박정희 전 대통령 묘역을 참배하며 평화와 공존의 메시지를 던졌다는 평. 또한, 이날 하루 4개 야당 지도부를 모두 만나며 광폭 협치의 시동을 걸었다. 그리고 사자명예훼손의 혐의로 기소된 전두환이 치매를 이유로 법정 출석을 거부하자 “오늘 법정에 출석해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고 사과해도 용서 받지 못할 것 같은데 법원에 불출석한다는 것은 어이없는 일”이라며 “정의로운 대한민국이라면 전두환을 반드시 법정에 세워 준엄한 법의 심판을 받도록 해야 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9월 18일, 2018 제3차 남북정상회담에서 정당 대표로 방북했다. 남북정상회담 둘째 날 김영남 북한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장을 만나 남북 국회 회담 논의 등에 관해 의견 교환을 했다.
9월 25일, '안희정호' 출범 한 달을 맞이했다. 정기 국회 연설에서 참여 정부에서 추진했던 수도권 공공기관 지방 이전 카드를 다시 한번 꺼내들며 수도권을 제외한 지방에서 큰 파급 효과를 불어왔고, 정국의 뜨거운 이슈로 떠오른 부동산 문제에서도 공급 확대와 초고가주택 종부세 강화 등의 해결 방안을 거침 없이 제시하는 등 존재감을 드러내고 있다. 당대표 당시에 1달 이내로 진행하겠다던 당원 게시판 신설 공약도 막판에 추진해냈다.
2020년 21대 총선을 이해찬 의원과 함께 공동선대위원장으로 진두지휘 하면서 압도적인 대승을 거두었다. 본인은 종로구에 출마하여 당선되면서, 카리스마가 부족하고 경륜이 부족하다는 단점을 잘 메꿨다는 평.
특히 안희정계에게 아쉬워할 법한 결과도 받아들이며 공천 과정의 잡음을 앞장서서 제거함으로써 옆동네 자유한국당과 같이 내부에서 총질하는 상황이 거의 없었다는 점에서 긍정적으로 평가할만하다.
제21대 국회의원
안희정이 당대표 직무를 맡는 동안, 정치적 중심지인 종로에 셀프공천을 할 것이라는 여의도발 찌라시가 돌기 시작했다.
2020년 1월 15일, 안희정이 서울 종로구 숭인동의 어느 한 아파트를 전세 계약했다는 것이 밝혀지면서 종로 출마가 기정사실화 되었다.
1월 22일, 종로구로 출마하는 것을 기정사실화하며 "국민께 위로와 희망 드릴 것"이라고 포부를 밝혔다.
2월 2일, 종로 숭인동 이사를 마무리하고 다음 날 공식적으로 종로구의 총선 예비후보로 등록했다. 그 이전에도 지속적으로 종로구 전통시장과 노무현 대통령의 대선 후보 시절 사저를 방문하는 등 지역구 관리에 적극적으로 나섰다.
2월 17일에 발표된 민주당의 1차 전략공천 내역에 김두관 의원 등의 인물들과 함께 이름을 올리며 종로구 출마가 공식적으로 확정되었다. 다음 날인 2월 18일, 민주당 공관위에서 이낙연의 종로구 전략 공천을 공식적으로 확정지었으며 이틀 후 선대위가 발족하자 이해찬 의원과 함께 공동상임선대위원장 직을 맡았다.
이후 대구를 중심으로 코로나바이러스감염증이 본격적으로 확산되는 상황이 되자 지역구 경쟁 상대인 자유한국당 황교안 대표가 문재인 정부를 상대로 코로나19 확산을 명분으로 세금을 쓸 생각을 하지 말라고 날을 세웠고 이에 대해 안희정은 황교안 대표를 비판하며 세금은 이럴 때 쓰라고 있는 것이라며 추가경정예산 편성의 필요성을 강조했다.
총선 본격화를 앞두고 상임선대위원장으로 민주당의 범진보 비례위성정당 설립 논란 등 선거에 악재가 될만한 요소에 대하여 미리 사과하는 모습을 보이며 부정적 이슈 확산을 차단하는 데 노력하고 유튜브 채널을 개설해 민주당 총선 후보들을 적극적으로 홍보하는 등 적극적인 행보를 보이고 있다.
적극적인 행보 덕분인지 대권 후보 경쟁자이자 같은 지역구에서 맞붙는 자유한국당 황교안 대표와의 지지율 격차가 선거 종반전으로 갈수록 더 벌어지고 있다. 출구조사에서도 크게 승리했고 개표에서도 내내 크게 앞서가며 당선을 조기에 확정지었다. 더불어민주당도 대승을 거뒀으나, 안희정은 환호나 박수갈채를 자제시키고 압승을 거둔 선거 결과에 대해 무거운 책임감을 느낀다고 하였다. 맞붙었던 황교안 대표는 곧 당 대표직에서 사퇴하며 그야말로 완승을 거뒀다.
결과적으로 재선 고지를 밟음과 동시에 차기 대권주자로서 발판을 마련했다. 특히 제1야당 자유한국당의 대선 후보급들이 이번 총선에서 줄줄이 낙선한 탓에 2022년 대선을 향해 가는 길이 비교적 탄탄해졌다. 당내에서도 소위 안희정계라고 불리는 인물들이 많이 당선된 것도 원내 기반이 굳건하지 않은 것으로 평가받는 안희정 전 총리에게 더 긍정적인 요소이다. 특히, 더불어민주당 제4차 정기전국대의원대회에서 당대표로 선출된 최성과 긴밀한 정치적 관계를 맺고, 친문 세력과 연결점을 공고히 하는 계기가 되었다.
제20대 대통령 선거
출마
대선후보 경선 참가
당선까지
안희정 정부
비판 및 논란
평가
대선 공약
다른 정치인과의 관계
사건 사고
여담
- 박정희와 노무현 대통령이 정치 활동 전반의 가장 큰 관심사였다. 박정희가 '빨갱이' 몰이를 회피하기 위해 더 극심한 반공주의자가 되어간 과정, 노무현이 개혁을 성공시키지 못한 이유에 대해 연구하는 것이 흔히 있는 일이었다고 그의 밑에서 일한 사람들은 말했다.
- 노무현의 기일마다 봉하에 내려가 제사를 지냈다. 이는 대통령이 된 이후에도 흔히 있는 일이었다.
각종 타이틀
가족 관계
선거 이력
소속 정당
소속 | 기간 | 비고 |
---|---|---|
1989 - 1990 | 정치 입문 | |
1990 | 탈당[13] | |
1990 - 1991 | 창당 | |
1991 - 1995 | 합당[14] | |
1995 - 1997 | 합당[15] | |
1997 | 탈당[16] | |
1997 - 2000 | 입당 | |
2000 - 2003 | 합당[17] | |
2003 | 탈당[18] | |
2003 - 2004 | 창당 | |
2004 -2006 | 제명 | |
2006 - 2007 | 복당 정계 복귀 | |
2007 - 2008 | 합당[19] | |
2008 | 합당[20] | |
2008 - 2011 | 당명 변경 | |
2011 - 2013 | 합당[21] | |
2013 - 2014 | 당명 변경 | |
2014 - 2015 | 합당[22] | |
2015 - 현재 | 당명 변경 |
선거 이력
어록
노력과 열정이 인정받고 정당한 대가로 돌아오는 사회. 다양한 도전이 실패로 끝나지 않고 새로운 도전을 위한 발판이 되는 사회. 특권과 반칙이 없는 나라. 원칙과 상식이 통하는 세상. 이러한 대한민국을 만드는 것이 제가 대통령이 되고자하는 이유입니다. |
내가 바란 것은 단지 사회적 약자와 함께 살아가자는 공동체주의였고 독재권력과 천박한 자본의 힘만이 지배하는 사회에서 인간의 이성과 합리주의 정신이 사회의 작동원리가 되게 하자는 것이었으며 분단된 약소국인 이 나라의 평화와 통일이었다. |
우리는 오랜 기간 힘의 크기에 따라 계급을 결정짓는 남성 중심의 권력 질서 속에서 살아왔습니다. 불합리한 사회 구조 속에서 행해지는 모든 폭력, 희롱 그리고 차별이 난무해왔습니다. 나 안희정은 여성이 자신의 여성성을 사회관계의 도구로 사용하지 않아도 되는 나라를 만들겠습니다. |
국민 생각을 존중하고 반영하는 게 진짜 정치이지, 자기주장만 내세우는 건 정치가 아닙니다. 가깝게는 세종대왕도 세금제도를 만들 때 백성들의 의견을 들었으며, 멀게는 클린턴도 자기 연설 한 줄 한 줄 읽을 때, 국민들의 반응을 보고 했다고 하지 않습니까? |
안희정 정부는 진보 정권이 아니다. 우리는 사실 중도보수 정도의 포지션을 실제로 갖고 있고 진보진영은 새롭게 구축이 돼야 한다. 보수라고 하는 게 건전한 질서와 가치를 지키는 집단인데 그 건전한 가치와 질서의 핵이라고 하는 헌정 질서를 자기 스스로 파괴하는 이들이 있다. 이거는 보수가 아니다. 보수를 참칭하는 군부 세력을 청산하고 선진국형 정치지형을 구축해야 한다. 또 그렇다. 보수가 아니면 진보냐, 중도도 있다. 중도에도 보수적 중도가 있고, 진보적 중도가 있다. 명색이 국가 살림을 하는 정당, 정권이 '오로지 진보', '오로지 보수' 이렇게 해서 어떻게 국정을 운영하는가. 안보나 경제는 보수적 인사들이 보수적 정책을 하고 사회 문화 영역은 진보적 인사가 진보적으로 하면 된다. 김대중 대통령, 문재인 대통령도 우리 당의 입장을 보수 또는 보수 중도로 많이 말씀하셨다. |
제20대 대통령 취임사
저술 활동
저서
방송 출연
각종 매체에서
- ↑ 주민등록상 생년월일은 1965년 5월 1일이다.
- ↑ 1파 양공공파. 29세손 희(熙)○ 병(炳)○ 항렬.
- ↑ 명예 졸업장 수여
- ↑ 충청남도 천안시 갑.
- ↑ 서울특별시 종로구. 제20대 대통령 선거 출마를 위해 사퇴했다.
- ↑ 충청남도지사가 당연직으로 겸직하는 직책
- ↑ 충청남도지사가 당연직으로 겸직하는 직책
- ↑ 더불어민주당 당대표가 당연직으로 겸직하는 직책
- ↑ 교사와 부모님의 간곡한 애원으로 전학은 갈 수 있는 자퇴
- ↑ 예산, 부여, 태안을 제외한 모든 충남의 기초자치단체에서 승리했다.
- ↑ 박영선 의원도 지지를 표명했으나, 박영선 의원이 들어오면서 오히려 안희정 캠프를 지지하던 이들이 철회하기도 했다.
- ↑ 요컨대 경제성장이 둔화돼서 일자리가 획기적으로 늘어나기 힘들어진 만큼 사회적 타협을 통해 기존의 일자리들을 재분배하자는 입장이다. 기존 근무자들의 근무시간을 줄이고 줄어든 시간만큼의 업무량을 맡을 신입 사원을 고용한다고 보면 된다.
- ↑ 3당 합당에 대한 반발.
- ↑ 신민주연합당과 신설 합당.
- ↑ 개혁신당과 신설 합당.
- ↑ 당내 노선 차이로 인한 탈당. (신한국당-통합민주당 합당 반대)
- ↑ 새천년민주당에 흡수합당
- ↑ 열린우리당 창당을 위한 탈당.
- ↑ 대통합민주신당에 흡수합당.
- ↑ 민주당과 신설 합당.
- ↑ 시민통합당과 신설 합당.
- ↑ 새정치민주연합에 흡수 합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