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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경성위수사령부 (플레이백)|경성위수사령부]]<br>상무영<br>시위혼성사단<br>제30사단<br>제7보병사단<br>제1독립전차연대 | | [[경성위수사령부 (플레이백)|경성위수사령부]]<br>상무영<br>시위혼성사단<br>제30사단<br>제7보병사단<br>제1독립전차연대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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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요== | ==개요== | ||
1930년 | 1930년 11월 10일에 [[선종 태황제 (플레이백)|현풍공]]을 비롯하여 [[대한제국 육군 (플레이백)|대한제국 육군]] 무관들이 일으킨 군사 혁명. 이 사건으로 인하여 윤덕영 내각이 붕괴되고 [[목종 헌황제 (플레이백)|목종]]의 실정이 종결되었으며, 무관들을 주축으로 하는 혁명 내각이 출범함과 동시에 현풍공이 목종의 양자로 입적이 성사되어 봉공체제가 출범했다. | ||
당시 [[ | 당시 [[대한제국 육군 (플레이백)|육군]]에는 대전쟁 이후부터 군의 심각한 부정부패와 비리, 진급적체와 군 상부의 표리부동에 불만을 품고 일군의 장교 세력들이 있었다. 이들의 불만은 대공황을 기점으로 대규모 군축이 예고되자 폭팔하였고, 육군의 혁신파를 비롯한 극명회 중심으로 한 장교들은 비밀리에 쿠데타를 기획하게 된다. | ||
혁명 세력은 예비 사단 병력과 전차부대 등을 동원하여 1930년 | 혁명 세력은 예비 사단 병력과 전차부대 등을 동원하여 1930년 11월 10일 새벽 황성을 비롯한 대구시, 부산시 등의 방송국 등 주요 시설을 무력으로 점거하였다. 이들은 경운궁을 장악하여 의정대신 윤덕영을 해임하고 봉기 60여 시간 만에 정권을 완벽하게 장악한다. 결국 혁명 세력이 행정, 입법, 사법 삼권을 탈취하였다. | ||
==배경== | ==배경== | ||
=== 정치적 혼란 === | |||
1919년까지 대한제국은 전제정치를 고수하며 제헌운동과 의회개설 요구를 철저하게 짓밟았다. 이러한 불만은 대전쟁을 거치며 점차 고조되다가 서백리 출병으로 인한 미곡 폭등으로 폭팔하여 제헌과 의회 개설을 요구하는 [[3.1 폭동 (플레이백)|3.1 폭동]]으로 확산되었다. [[목종 헌황제 (플레이백)|목종]]은 3.1 폭동을 무력으로 진압하면서까지 전제정을 고수하였으나 폭동이 재발하자 결국 꼬리를 내리고 [[대한국 국제 (플레이백)|대한국 국제]]와 [[의정원 (플레이백)|의정원]]을 설립하며 간신히 무마시키는데 성공하였다. | |||
그러나 선거는 계급별 차등 투표도 아닌, 조세 납부액을 기준으로 투표권이 부여되고 의회 또한 빛 좋은 개살구에 불과했다. 결국 이러한 목종의 생색내기식 입헌정은 오히려 제헌파가 야당으로 돌아서 정치의 혼란화를 야기했으며 1929년 대공황과 이에 따른 4대 총선에서의 야당의 승리로 조정과 의정원의 대립은 극에 달했다. 결국 이런 작태에 추태를 느낀 민중들은 점차 의회정치에 대해 환멸을 느꼈다. | |||
=== 군부의 상황=== | |||
조선 시대에는 문신들이 무신들을 철저하게 통제했던 것과 달리 근대화된 [[대한제국군 (플래이백)|대한제국군]]은 처음에는 러시아제국군 군사고문단의 영향을 받았으나 1880년대 후반에는 독일 군사고문단의 영향을 받으며 프로이센 군제와 문화를 고스란히 수용했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알음알음 조정이 아닌 대원수에게만 충성해야 한다는 [[통수권일원화론 (플레이백)|통수권일원화론]]이 점차 주장되었다. 이는 서백리 출병을 거치며 후진적인 군사교리와 한심한 작태에 불만을 가진 위관급 무관들을 주축으로 점차 확산되었고, 기사혁명 직전 군부의 주류 의견으로 부상하였다. | |||
게다가 목종은 3.1 폭동 이후 군부를 장악하기 위해 전시에만 설치되던 원수부를 상설화하고 서백리 원정을 통해 군부의 팽창욕을 충족시키고자 하였다. 그러나 원수부의 설치로 육해군의 참모본부와 총제영은 무력화되며 군부내의 불만은 고조되었고, 서백리 원정에서의 참패는 외려 군부의 독자성을 강조하는 움직임으로 귀결되며 군에서 점차 조정의 통제에 불만을 품기 시작했다. | |||
이렇게 군부의 불만이 고조되던 와중, 군비 삭감 및 대규모 군축이 확정되자 군부의 불만은 결국 폭팔했다. 이 시기를 기점으로 군부의 강경파에서도 극단론이 대두된 것이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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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년 5월 31일 (일) 03:06 기준 최신판
| 기사혁명 己巳革命 Kisa Revolution | |
중앙청으로 진군하는 혁명군
| |
| 일시 | |
|---|---|
| 1930년 11월 10일 (96주년) | |
| 장소 | |
| 대한제국 황성 한성부 | |
| 원인 | |
| 군 내부의 갈등 대공황으로 인한 경제 악화 및 목종의 실정에 대한 불만 | |
| 교전군 | |
| 진압군 | 혁명군 |
| 윤덕영 내각 대한제국군 |
극명회 |
| 지휘관 | |
| 대원수 목종 헌황제 황태자 부원수 이공 의정대신 윤덕영 육군대신 박중양 해방대신 이진호 참모총장 대장 조성근 경기군관구 사령관 대장 어담 해서군관구 사령관 대장 왕유식 참모본부 참장 김응선 육군헌병사령관 부장 조성근 |
시위혼성사단장 참장 현풍공 제1군단장 부장 홍사익 상무사 부장 지청천 제1독립전차연대장 정령 홍사익 시위혼성사단 참모장 정령 유승렬 제30사단 작전참모 부령 이응준 시위혼성사단 정보과 참령 김석원 경성위수사령부 참령 김홍일 시위혼성사단 제1연대 치중과장 참령 이범석 제1전차대대 중대장 정위 김석원 제1전차대대 중대장 정위 채원개 제30사단 중대장 정위 김관오 |
| 병력 | |
| 원수부 참모본부 총제부 경기군관구 해서군관구 육군헌병사령부 |
경성위수사령부 상무영 시위혼성사단 제30사단 제7보병사단 제1독립전차연대 |
| 피해 | |
| 1명 사망, 10명 부상 | 18명 부상 |
| 결과 | |
| 혁명 성공 중추원, 귀족원, 민의원 해산 혁명군의 행정·입법·사법권 완전 장악 | |
| 영향 | |
| 목종의 몰락과 봉공체제 출범 | |
개요
1930년 11월 10일에 현풍공을 비롯하여 대한제국 육군 무관들이 일으킨 군사 혁명. 이 사건으로 인하여 윤덕영 내각이 붕괴되고 목종의 실정이 종결되었으며, 무관들을 주축으로 하는 혁명 내각이 출범함과 동시에 현풍공이 목종의 양자로 입적이 성사되어 봉공체제가 출범했다.
당시 육군에는 대전쟁 이후부터 군의 심각한 부정부패와 비리, 진급적체와 군 상부의 표리부동에 불만을 품고 일군의 장교 세력들이 있었다. 이들의 불만은 대공황을 기점으로 대규모 군축이 예고되자 폭팔하였고, 육군의 혁신파를 비롯한 극명회 중심으로 한 장교들은 비밀리에 쿠데타를 기획하게 된다.
혁명 세력은 예비 사단 병력과 전차부대 등을 동원하여 1930년 11월 10일 새벽 황성을 비롯한 대구시, 부산시 등의 방송국 등 주요 시설을 무력으로 점거하였다. 이들은 경운궁을 장악하여 의정대신 윤덕영을 해임하고 봉기 60여 시간 만에 정권을 완벽하게 장악한다. 결국 혁명 세력이 행정, 입법, 사법 삼권을 탈취하였다.
배경
정치적 혼란
1919년까지 대한제국은 전제정치를 고수하며 제헌운동과 의회개설 요구를 철저하게 짓밟았다. 이러한 불만은 대전쟁을 거치며 점차 고조되다가 서백리 출병으로 인한 미곡 폭등으로 폭팔하여 제헌과 의회 개설을 요구하는 3.1 폭동으로 확산되었다. 목종은 3.1 폭동을 무력으로 진압하면서까지 전제정을 고수하였으나 폭동이 재발하자 결국 꼬리를 내리고 대한국 국제와 의정원을 설립하며 간신히 무마시키는데 성공하였다.
그러나 선거는 계급별 차등 투표도 아닌, 조세 납부액을 기준으로 투표권이 부여되고 의회 또한 빛 좋은 개살구에 불과했다. 결국 이러한 목종의 생색내기식 입헌정은 오히려 제헌파가 야당으로 돌아서 정치의 혼란화를 야기했으며 1929년 대공황과 이에 따른 4대 총선에서의 야당의 승리로 조정과 의정원의 대립은 극에 달했다. 결국 이런 작태에 추태를 느낀 민중들은 점차 의회정치에 대해 환멸을 느꼈다.
군부의 상황
조선 시대에는 문신들이 무신들을 철저하게 통제했던 것과 달리 근대화된 대한제국군은 처음에는 러시아제국군 군사고문단의 영향을 받았으나 1880년대 후반에는 독일 군사고문단의 영향을 받으며 프로이센 군제와 문화를 고스란히 수용했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알음알음 조정이 아닌 대원수에게만 충성해야 한다는 통수권일원화론이 점차 주장되었다. 이는 서백리 출병을 거치며 후진적인 군사교리와 한심한 작태에 불만을 가진 위관급 무관들을 주축으로 점차 확산되었고, 기사혁명 직전 군부의 주류 의견으로 부상하였다.
게다가 목종은 3.1 폭동 이후 군부를 장악하기 위해 전시에만 설치되던 원수부를 상설화하고 서백리 원정을 통해 군부의 팽창욕을 충족시키고자 하였다. 그러나 원수부의 설치로 육해군의 참모본부와 총제영은 무력화되며 군부내의 불만은 고조되었고, 서백리 원정에서의 참패는 외려 군부의 독자성을 강조하는 움직임으로 귀결되며 군에서 점차 조정의 통제에 불만을 품기 시작했다.
이렇게 군부의 불만이 고조되던 와중, 군비 삭감 및 대규모 군축이 확정되자 군부의 불만은 결국 폭팔했다. 이 시기를 기점으로 군부의 강경파에서도 극단론이 대두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