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9년 한국 정치혼란 (동아세계관): 두 판 사이의 차이

MatsudaHarutora (토론 | 기여)
MatsudaHarutora (토론 | 기여)
 
(같은 사용자의 중간 판 하나는 보이지 않습니다)
68번째 줄: 68번째 줄:


대선 국면에는 김철을 추대한다.
대선 국면에는 김철을 추대한다.
== 총선 국면 ==
1980년 최규하 대통령의 신년사로 인하여, 급작스레 총선국면으로 돌입하였다. 이에 제 10대 국회는 선거법을 개정하여 중대선거구제에서 소선거구제로 바꾸기로 하였으나, 문제는 유신정우회의 존재였다.
당시 헌법 규정에 따르면 국회의원의 1/3이 대통령이 임명하고, 이를 통일주체국민회의가 의결하여 승인하는 방식이었기 때문에, 사실상 대통령의 거수기로 불렸다. 이로 인해, 새로 선출될 국회의원에 대한 불신이 존재했다.
이를 위해 최규하 대통령은 김종필 민주공화당 총재와 김영삼 신민당 총재를 만나 3자회담을 통해 담화문을 발표했다.
담화문에서 최규하 대통령과 양당 총재는 1980년에 실행될 총선에서 선출된 국회의원은 헌법 개정 이후에도 활동할 수 있도록 하며 그 임기를 1984년까지로 정하는 데에 합의하였다. 유신정우회의 경우, 종전의 전국구 국회의원과 동일하게 선출하되, 이를 대통령이 임명하고 결원이 발생하였을 때는 충원하지 않기로 합의한다. 동시에 국회의원 정수를 종선의 지역구 234명, 유신정우회 117명에서 대폭 늘려, 지역구 278명, 유신정우회 139명, 총 정수 417명으로 증가시키기로 합의한다. 다만 선출 방식은 종전과 같은 중대선거구제를 채택하였다.
위 합의내용대로 1980년 5월 15일 총선이 실시되었다.


== 대선 국면 ==
== 대선 국면 ==

2026년 6월 13일 (토) 16:21 기준 최신판

1979년 대한민국 정치혼란이란, 1979년 10월 26일 발생한 대통령 암살으로부터 시작된 대한민국의 정치적 혼란기로써 1982년 제5공화국 수립으로 종결된 시기를 일컫는다.

개요

1979년 대한민국 정치혼란은 1979년 10월 26일 발생한 박정희 대통령의 피살사건으로 발발된 혼란기로써, 동년 발생한 12.12 군사반란과 서울의 봄을 거쳐 1982년 제5공화국 수립으로 종결되는 사건을 칭한다.

역사적 흐름

10.26 사건

1979년 10월 26일, 충청남도 당진군의 삽교천 방조제 준공식에 참석한 대통령 박정희는, 당일 저녁 서울로 돌아와 궁정동 안가에서 비밀연회에 참가한다.

당시, 동 비밀연회에 동석한 자는 당시 대통령 경호실장 차지철, 대통령 비서실장 김계원, 중앙정보부장 김재규 등이 있었다. 이 연회에서 중정부장 김재규가 대통령 박정희와 경호실장 차지철을 총으로 살해하였고, 직후 김재규가 육군본부로 이동한 후에 육군 병력에 의해 체포되었다.

대통령의 유고로 국가적 혼란이 올 것으로 파악한 국무총리 최규하는 비상계엄을 선포하였고, 계엄사령관으로 정승화 육군참모총장이 임명된다.

박정희 암살 사건에 대해, 계엄사령부는 산하 합동수사본부를 설치하고, 본부장으로 전두환을 임명하게 된다.

12.12 군사반란

합동수사본부장이던 전두환은 계엄사령관이던 정승화가 10월 26일 궁정동 안가에 있었던 것을 빌미로 계엄사령관인 정승화를 체포하려 했으나, 계엄사령관에 대한 체포는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것으로 판단하고 정승화를 강제연행한 뒤, 당시 대통령인 최규하[1]에게 사후재가를 받으려 한다.

1979년 12월 12일, 전두환은 정승화 체포를 실시하고 대통령에게 재가를 받으러 이동한다. 이 과정에서 정승화에 대한 강제연행은 성공하였으나, 최규하가 이를 재가하지 않았으며, 이후 정승화가 납치되었다는 것이 당시 수도경비사령관 장태완 등 몇몇 군 고위간부에게 알려진다. 이에 전두환은 장세동이 단장으로 있는 30경비단으로 하나회 소속 군 고위간부를 소집한다. 전두환은 이 하나회를 이용하여, 1공수여단, 3공수여단, 5공수여단과, 9사단[2] 1개 연대, 30경비단 및 33경비단의 병력으로 서울을 장악할 것을 획책한다.

상기 병력이 출동을 도모하자, 장태완과 육군특수전사령관 정병주 등이 합작하여, 9공수여단과 몇몇 예하부대를 출동시켜 하나회 인원이 결집된 30경비단 본부로 이동하였고, 이에 전두환 측 반란군과 장태완 측 진압군이 충돌한다.

결국 출동을 막 시작한 진압군 측의 병력 부족으로 전두환, 노태우, 장세동 등 하나회 소속 군 간부들이 진압되어 체포되었고, 결국 12.12사건은 군사반란으로 끝맺음된다.

서울의 봄

1979년 12월 13일, 반란이 진압되자, 풀려난 정승화는 계엄사령관 명의로 작일 발생한 사태에 대해 담화문을 발표하여, 정국의 안정을 도모하였다. 합동수사본부장 전두환 등 반란에 관련된 모든 인물을 반란죄로 체포하였고, 정병주가 보안사령관을 겸임하고, 장태완이 합동수사본부장을 겸임하게 된다.

1980년 1월, 대통령 최규하는 담화문을 발표해 1980년 5월 총선을 실시하여, 새로운 국회가 헌법을 개정하여, 독재정치가 아닌 민주정치의 길을 나아가도록 노력할 것을 발표하였다. 이와 동시에 1981년말까지 국가가 안정화하는 것을 목표로 하여, 이가 완수될 1982년 퇴임할 것을 선언한다. 이에 몇몇 재야 정치가들이 규탄하였으나, 김영삼, 김대중, 김종필 등 기성 정치권은 이에 호응한다.

1980년 5월 15일 실시된 국회의원 선거를 통해 선출된 제 11대 국회는 1981년 9월 18일 현행 헌법안을 제안하고 동년 10월 12일에 이를 의결하였다. 이에 1981년 10월 27일 국민투표가 실시되어 90%가 넘는 찬성율로 통과되었으며, 29일 최규하 대통령이 이를 공포하였다.

한편, 민주화에 대한 열망이 격화되자, 학원과 노동현장에서도 시위가 일어났으며, 특히 대학가에서는 학도호국단 및 교련 교육 폐지 시위가 빈발하고, 노동운동에서는 탄광 밀집지대인 정선군 사북지역[3]과, 삼척군 장성지역[4] 중심으로 노동처우 개선 및 어용노조 폐지 및 민주노조 허가시위가 행해진다.

해소

대통령 최규하는 1981년 신년사에서 올해 개헌 작업을 마치고, 개정된 헌법에 따라 대통령을 선출할 것이라고 선언한다. 이에 덧붙여 익년인 1982년에는 국회의원 총선거[5]와 지방선거를 실시함을 보고하였다.

이로써 1979년 10월 26일부터 이어진 한국의 정치적 혼란기는 수습되었으며, 이 중, 하나회를 위시한 군부의 재등장을 진압하고 군의 숙청이 이루어짐과 동시에 몇몇 민주화조치가 단행되었다.

경제적으로는 호황이 시작되었으며, 이에 맞춰 1988년에 개최되는 서울올림픽을 유치하였고, 국풍81이라는 대형행사 또한 실시되었다. 또한 문화적으로는 컬러방송이 개시되었으며, 동아방송[6]가 개국하였고, 한국프로야구[7] 등 프로스포츠리그가 구성 혹은 준비되어간다.

정치권

민주공화당

민주공화당은 총재인 대통령 박정희가 암살당하자, 차기 총재로 김종필을 세웠다. 그러나, 반박정희, 반김종필 세력이 이를 거부하고 당내 정풍운동을 시도하다 실패하고, 이후 분열하여 한국국민당을 창당한다. 이후 최규하를 위시한 관료층 및 어용지식인층 등 친박정희 세력은 몇몇 유신정우회 인사와 함께 민주정의당을 창당한다.

대선 국면에서는 민주공화당에서는 총재 김종필을 대통령 후보로 추대했다. 한국국민당의 경우, 당시 정풍운동으로 유명세를 탄 박찬종이 대통령후보로 추대되었다. 민주정의당은 신민당 출신이었다가 최규하 정부에서 보건사회부 장관을 맡은 진의종이 후보로 선출되었다.

유신정우회

유신정우회의 경우, 전국구를 대신하여 만들어진 어용, 관선 국회의원이었으므로 사실상 민주공화당으로 흡수된다. 그러나 당적을 보유할 수 없었으므로 유신정우회는 1982년 제 10대 국회가 끝나는 날까지 존재했다.

다만 정우회 내 친김종필파는 민주공화당에 입당하였으나, 반김종필파 및 관료 및 어용지식인층은 민주정의당을 창당하는데 이른다.

신민당

신민당의 경우, 부마항쟁과 김영삼의 국회 제명, 최규하 대통령의 민주화조치로 인해 세력을 불리기 시작한다. 김영삼과 김대중 양김씨는 전국을 순회하며 민주화에 대한 열망에 부응하였고, 동시에 미국, 중화민국, 일본, UN 측과 소통하며 정치적 우위를 점하게 된다.

유신 체제시절 대립했던 민주통일당과 합당 구상이 있었으나, 좌초되었고, 오히려 이철승, 신도환, 유치송, 김의택 등 몇몇 의원들이 김영삼, 김대중, 이기택과 반목하면서 탈당하게 된다. 이 중 이철승, 유치송 등은 민주한국당을 창당하고, 신도환, 김의택 등은 민주통일당과 함동하여 민권당을 창당하게 된다.

이후, 대선 국면에 다다르자, 신민당 대통령 후보에 김영삼, 김대중, 이기택이 맞붙어 김영삼으로 선출되었고, 김대중과 이기택은 이에 승복하고 제11대 국회의원 총선에 출마하기로 한다. 민주한국당의 경우, 유치송을 대통령 후보로 추대한다.

민주통일당

민주통일당은 군소정당으로써 그렇게 눈에 띄는 정당이 아니었으나, 신민당 내의 반 유진산 계열이 주였기에, 유진산이 죽은 후에 신민당과 통합을 시도하였으나 번번히 실패한다. 이 와중에 총재인 양의동이 1980년 4월 사망함에 따라, 당이 사실상 와해되기 시작하였고, 부총재 정상구 등이 개별적으로 신민당으로 입당하는 상황에 다다른다.

이러한 가운데, 신민당 내 반 양김세력이 탈당하자, 이 중 온건세력인 신도환과 김의택의 세력과 합동하여 재창당하기로 하고, 당명을 민권당으로 개칭하게 된다. 이후, 대통령 선거에는 신민당 출신 김의택을 선출하게 된다.

한국사회당

당시 혁신세력의 경우, 수많은 탄압으로 제대로 된 정치적 활동이 불가능하였으나, 민주화 조치로 인해 활동이 해금되기 시작하였고, 이 중 사북, 장성지역 노동운동과 연계하여 노동자와 빈민을 위한 정당으로 발돋움한다. 동시에 한반도의 현상을 사회주의 인터내셔널에서 보고하면서 제대로 된 사회주의 정당으로 성장한다.

대선 국면에는 김철을 추대한다.

총선 국면

1980년 최규하 대통령의 신년사로 인하여, 급작스레 총선국면으로 돌입하였다. 이에 제 10대 국회는 선거법을 개정하여 중대선거구제에서 소선거구제로 바꾸기로 하였으나, 문제는 유신정우회의 존재였다.

당시 헌법 규정에 따르면 국회의원의 1/3이 대통령이 임명하고, 이를 통일주체국민회의가 의결하여 승인하는 방식이었기 때문에, 사실상 대통령의 거수기로 불렸다. 이로 인해, 새로 선출될 국회의원에 대한 불신이 존재했다.

이를 위해 최규하 대통령은 김종필 민주공화당 총재와 김영삼 신민당 총재를 만나 3자회담을 통해 담화문을 발표했다.

담화문에서 최규하 대통령과 양당 총재는 1980년에 실행될 총선에서 선출된 국회의원은 헌법 개정 이후에도 활동할 수 있도록 하며 그 임기를 1984년까지로 정하는 데에 합의하였다. 유신정우회의 경우, 종전의 전국구 국회의원과 동일하게 선출하되, 이를 대통령이 임명하고 결원이 발생하였을 때는 충원하지 않기로 합의한다. 동시에 국회의원 정수를 종선의 지역구 234명, 유신정우회 117명에서 대폭 늘려, 지역구 278명, 유신정우회 139명, 총 정수 417명으로 증가시키기로 합의한다. 다만 선출 방식은 종전과 같은 중대선거구제를 채택하였다.

위 합의내용대로 1980년 5월 15일 총선이 실시되었다.

대선 국면

헌법개정을 통해, 국민의 직접선거로 선출되는 4년 임기[8]의 대통령 선거가 1981년 12월 16일 실시된다.

최종후보 및 결과는 아래와 같다.

제11대 대한민국 대통령 선거
기호 후보 득표수 순위
정당 득표율 당락
1 진의종(陳懿鍾)
민주정의당
2 김종필(金鍾泌)
민주공화당
3 김영삼(金泳三)
신민당
4 김의택(金義澤)
민권당
5 박찬종(朴燦鍾)
한국국민당
6 유치송(柳致松)
민주한국당
7 김철(金哲)
한국사회당
8 진복기(陳福基)
무소속
선거인 수
투표 수
무효표 수

위와 같은 결과로 신민당의 김영삼 후보가 과반에 근접하는 득표로 1위가 되어 대통령으로 선출되었다. 임기는 1982년 2월 25일부터 시작되었으며, 이와 동시에 제5공화국이 시작되었다.

  1. 1979년 12월 6일부로 대통령으로 선출됨
  2. 사단장 노태우
  3. 현. 태백시 사북, 고한, 직전, 백전동
  4. 현. 태백시 황지, 장성, 철암, 화전, 소도동 등
  5. 민의원, 참의원 모두 총선거이다
  6. 현. DBS
  7. 통칭. KBO
  8. 1회 중임 가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