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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대학교 졸업 후 원수부 총참모부로 전속된 선종은 전쟁참모 업무를 시작했다. 본래 선종 또한 [[전쟁참모 (플레이백)|전쟁참모]] 처럼 야전 지휘관은 스처가고 최상위 제대 참모로 주로 복무해야 했다. 그러나 선종은 '''차나 달이려고 무관이 된게 아니라며''' 인사규정에 반기를 들었다. 선종은 무관후보생때부터 수 없이 벌인 사고를 유일무이한 현역 황족이라는 빽으로 무마시키며 잘 알고 있었다. 선종은 이번에도 황족이라는 위상을 이용하여 총참모부에서 깽판을 벌여 서백리 출병에 자신을 중대장으로써 포함시키는데 성공했다. 선종은 창끝부대 지휘관으로써 만주 횡단철도와 연해주 동해안, 심지어 바이칼 호의 이르쿠츠크 내륙 깊숙히까지 점령하며 전쟁영웅으로 등극했다. 그러나 붉은 군대와 교전 과정에서 학살이 포함된 대규모 초토화 작전으로 자유시 학살이라는 흑역사를 남겼다. 서백리 원정 직전까지만 해도 선종은 사회주의에 호의적인 모습을 여럿 보여왔으나, 서백리 출병 당시 붉은 군대에 혐오감을 느끼며 사회주의와 손절하게 된다.
전쟁대학교 졸업 후 원수부 참모본부로 전속된 선종은 전쟁참모 업무를 시작했다. 본래 선종 또한 [[전쟁참모 (플레이백)|전쟁참모]] 처럼 야전 지휘관은 스처가고 최상위 제대 참모로 주로 복무해야 했다. 그러나 선종은 '''차나 달이려고 무관이 된게 아니라며''' 인사규정에 반기를 들었다. 선종은 무관후보생때부터 수 없이 벌인 사고를 유일무이한 현역 황족이라는 빽으로 무마시키며 잘 알고 있었다. 선종은 이번에도 황족이라는 위상을 이용하여 참모본부에서 깽판을 벌여 서백리 출병에 자신을 중대장으로써 포함시키는데 성공했다. 선종은 창끝부대 지휘관으로써 만주 횡단철도와 연해주 동해안, 심지어 바이칼 호의 이르쿠츠크 내륙 깊숙히까지 점령하며 전쟁영웅으로 등극했다. 그러나 붉은 군대와 교전 과정에서 학살이 포함된 대규모 초토화 작전으로 자유시 학살이라는 흑역사를 남겼다. 서백리 원정 직전까지만 해도 선종은 사회주의에 호의적인 모습을 여럿 보여왔으나, 서백리 출병 당시 붉은 군대에 혐오감을 느끼며 사회주의와 손절하게 된다.


서백리 출병 당시 선종과 함께 참전했던 육군무관학교의 선후배들은 붉은 군대와 교전하며 붉은 군대의 전투력에 큰 감명을 받았으며, 백군과의 협력을 통해 1차대전의 전훈과 서백리의 광활한 환경에서 영향을 받아 핵심 전력을 기동화, 장갑화하여 장차 만주와 시베리아에서 작전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을 목표로 했다. 그러나 후진적인 당시의 제국군에서 이러한 제한은 받아들여질 턱이 없었다. 결국 선종은 지휘계통 따위는 생까고 [[목종 헌황제 (플레이백)|목종]]에게 직접 기동부대 창설을 제안했다. 이는 명백한 월권이었으나, 선종의 황족이라는 신분으로 유야무야되었다. 결국 선종은 [[기사혁명 (플레이백)|기사혁명]] 직전까지 수많은 월권과 파천황적 행보를 보였음에도 군문을 떠나지 않았으며, 선종의 이런 막가파식 행보는 역설적으로 대한제국에서 총력전과 기동전에 대한 연구의 방패로 작용하였다. 이리하여 선종의 적극적인 지원으로 장차 대한제국 기갑군의 모체가 될 제1전차대가 창설된다.
서백리 출병 당시 선종과 함께 참전했던 육군무관학교의 선후배들은 붉은 군대와 교전하며 붉은 군대의 전투력에 큰 감명을 받았으며, 백군과의 협력을 통해 1차대전의 전훈과 서백리의 광활한 환경에서 영향을 받아 핵심 전력을 기동화, 장갑화하여 장차 만주와 시베리아에서 작전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을 목표로 했다. 그러나 후진적인 당시의 제국군에서 이러한 제한은 받아들여질 턱이 없었다. 결국 선종은 지휘계통 따위는 생까고 [[목종 헌황제 (플레이백)|목종]]에게 직접 기동부대 창설을 제안했다. 이는 명백한 월권이었으나, 선종의 황족이라는 신분으로 유야무야되었다. 결국 선종은 [[기사혁명 (플레이백)|기사혁명]] 직전까지 수많은 월권과 파천황적 행보를 보였음에도 군문을 떠나지 않았으며, 선종의 이런 막가파식 행보는 역설적으로 대한제국에서 총력전과 기동전에 대한 연구의 방패로 작용하였다. 이리하여 선종의 적극적인 지원으로 장차 대한제국 기갑군의 모체가 될 제1전차대가 창설된다.


이 시기 선종과 함께 서백리 출병에 참전했던 김석원 지청천, 김홍일등의 소장파 무관들은 점차 선종을 우두머리로 하여 사상을 공유하기 시작했다. 이들은 군의 현대화와 기동전, 총력전 체제, 중공업입국을 주장하는 독서회를 창설하였다. 이 독서회는 장차 비밀결사에서 점점 군내의 거대 사조직화 되어 [[민족유일당 (플레이백)|극명회]]로 발전하게 된다.
이 시기 선종과 함께 서백리 출병에 참전했던 김석원 지청천, 김홍일등의 소장파 무관들은 점차 선종을 우두머리로 하여 사상을 공유하기 시작했다. 이들은 서백리 출병으로 대한제국군의 전략적 무지와, 대전쟁의 군사교리도 적응하기 어려워하는 구식 군대의 추태를 온몸으로 느꼈고, 서백리 출병과정에서 일본군과의 마찰을 빚으며 일본과 소련에 대한 공포와 이에 대한 대한제국의 전략적 대응이 부재하다는 것에 위기감을 느꼈다. 선종은 이러한 경험을 바탕으로 제국군의 현대화와 기동전을 주장하였고, 이를 완수하기 위해서는 지금의 주먹구구식 경제로는 안된다는 결론에 도달하였다. 이때부터 선종은 대전쟁의 총력전 체제에 매료되었고, 총력전 체제를 통해 중공업입국과 강력한 군대를 보유하여야만 대한제국이 살아남을 수 있다고 주장하고 소장파 무관들과 함께 총력전 체제를 수립하고 현대화된 미래적 군대를 양성하기 위하여 독서회를 창설하였다. 이 독서회는 장차 비밀결사에서 점점 군내의 거대 사조직화 되어 [[민족유일당 (플레이백)|극명회]]로 발전하게 된다.


이후 선종은 1920년 본국으로 귀환하였다. 귀환 직후 선종이 창설에 기여한 제1전차대장을 맡아 대한제국 전차병과의 초석을 다졌다. 1921년에는 서백리 출병으로 미루었던 우등 전쟁참모에게 주어진 특전인 해외 유학을 떠났다. 선종은 베를린 육군대학에 입교하여 최초의 현대적 총력전을 선보인 독일군의 전술을 공부하였는데, 초인플레이션과 정치적 혼란이 이어지던 독일의 혼란기를 몸소 체감한 선종은 아직까지 가지고 있던 민주주의에 대한 혐오감과 정치적 냉소주의, 정치인에 대한 불신을 얻는다.
이후 선종은 1920년 본국으로 귀환하였다. 귀환 직후 선종이 창설에 기여한 제1전차대장을 맡아 대한제국 전차병과의 초석을 다졌다. 1921년에는 서백리 출병으로 미루었던 우등 전쟁참모에게 주어진 특전인 해외 유학을 떠났다. 선종은 베를린 육군대학에 입교하여 최초의 현대적 총력전을 선보인 독일군의 전술을 공부하였는데, 초인플레이션과 정치적 혼란이 이어지던 독일의 혼란기를 몸소 체감한 선종은 아직까지 가지고 있던 민주주의에 대한 환상이 점차 무너졌으며, 귀국 직전에는 민주주의에 혐오감과 정치적 냉소주의, 정치인에 대한 불신을 표출하기도 했다.


1922년 선종은 독일에서 참령으로, 1924년 귀국 후 부령에 진급해 제1전차대를 증편한 제1전차대대장으로 부임하였다. 이 시기 독서회는 영관급과 위관급에서 세를 넓혔고 이름을 극명회로 바꾸었다. 선종은 김홍일의 국방론을 바탕으로 총력국방국가 건설이라는 목표하에 극명회를 키워가기 시작했으며 극명회의 영수로써 군에 영향력을 떨치기 시작한다. 1925년에는 총참모부 군무부장이라는 요직에 보직된다. 그러나 일본과의 관계 호전에 따른 군축이 대두되자, 민병석 의정이 일본의 야마나시 군축을 본따 사남군축을 발표한다. 이에 열 받은 선종은 극명회와 군부 내의 소장파를 대표하여 군축의 부당함, 민병석 내각에 대한 경질, 문민 출신이 역임하는 육해군 대신을 현역 무관의 자리로 하고, 원수부를 폐지하고 육해군부를 의정부 산하에서 이관하여 프로이센 군사내각처럼 황제 직속으로 두자는 통수권일원화를 담은 상소를 목종에게 상주하며 '''지휘계통과 문민통제를 모조리 무시하는 초대형 사고'''를 친다. 그간 선종은 이러한 월권을 수 없이 자행하였으나, 이런 초대형 사고를 치자 결국 군무부장에서 보직해임되었다. 이에 격분한 선종은 이딴놈들을 위해 복무할 수 없다며 사직을 청하고 헌정당 입당을 타진한다. 그러자 목종은 황족 중 최선임자 겸 전직 좌파이자 황제인 자신도 못말리는 반골 현풍군과 반 정부 야당인 헌정당과 결합 시도에 기겁해 '''호적에서 파여서 평민이 되고 싶냐'''는 협박과 곧 바로 정령 진급을 시켜준다는 조건으로 간신히 선종의 예편과 헌정당 입당을 막았다. 결국 현풍군은 사직을 철회하고 다시 제1전차대대장으로 보직되었다. 이때 선종은 문민관료와 목종의 한심한 추태에 노골적으로 경멸을 표했으며, 제도적으로 총력전 국가를 건설한다는 기존 노선을 철회하고 대전쟁 시기 최상급육군지휘부가 주도하는 총력전 체제를 본받아 자신과 극명회, 군이 주도하는 총력전 체제를 구축하기로 결심한다.
1922년 선종은 독일에서 참령으로, 1924년 귀국 후 부령에 진급했으며 귀국 직후 제1전차대를 증편한 제1전차대대장으로 부임하였다. 이 시기 독서회는 영관급과 위관급에서 세를 넓혔고 이름을 극명회로 바꾸었다. 선종은 김홍일의 국방론을 바탕으로 총력국방국가 건설이라는 목표하에 극명회를 키워가기 시작했으며 극명회의 영수로써 군에 영향력을 떨치기 시작한다. 1925년에는 참모본부 군무부장이라는 요직에 보직된다. 그러나 일본과의 관계 호전에 따른 군축이 대두되자, 민병석 의정이 일본의 야마나시 군축을 본따 사남군축을 발표한다. 이에 열 받은 선종은 극명회와 군부 내의 소장파를 대표하여 군축의 부당함, 민병석 내각에 대한 경질, 문민 출신이 역임하는 육해군 대신을 현역 무관의 자리로 하고, 원수부를 폐지하고 육해군부를 의정부 산하에서 이관하여 프로이센 군사내각처럼 황제 직속으로 두자는 통수권일원화를 담은 상소를 목종에게 상주하며 '''지휘계통과 문민통제를 모조리 무시하는 초대형 사고'''를 친다. 그간 선종은 이러한 월권을 수 없이 자행하였으나, 이런 초대형 사고를 치자 결국 군무부장에서 보직해임되었다. 이에 격분한 선종은 이딴놈들을 위해 복무할 수 없다며 사직을 청하고 헌정당 입당을 타진한다. 그러자 목종은 황족 중 최선임자 겸 전직 좌파이자 황제인 자신도 못말리는 반골 현풍군과 반 정부 야당인 헌정당과 결합 시도에 기겁해 '''호적에서 파여서 평민이 되고 싶냐'''는 협박과 곧 바로 정령 진급을 시켜준다는 조건으로 간신히 선종의 예편과 헌정당 입당을 막았다. 결국 현풍군은 사직을 철회하고 다시 제1전차대대장으로 보직되었다. 이때 선종은 문민관료와 목종의 한심한 추태에 노골적으로 경멸을 표했으며, 제도적으로 문민정부를 설득하여 총력전 국가를 건설한다는 기존 노선을 철회하고 대전쟁 시기 독일군처럼 군이 직접 주도하는 총력전 체제를 본받아 자신과 극명회, 군이 주도하는 총력전 체제를 구축하기로 결심하고, 정변을 계획하며 호시탐탐 기회를 노렸다.


이후 사남군축의 내용대로 제1전차대대가 독립기갑연대로 승격하자 연대장 대리를 지내다가 1926년 정령으로 보직되며 정식 연대장이 되었고, 다시 총참모부 군무부장에 복직하였다. 이후 1929년 참장에 진급해 시위혼성사단장이 되었다.
이후 사남군축의 내용대로 제1전차대대가 독립기갑연대로 승격하자 연대장 대리를 지내다가 1926년 정령으로 보직되며 정식 연대장이 되었고, 다시 참모본부 군무부장에 복직하였다. 이후 1929년 참장에 진급해 시위혼성사단장이 되었다.


=== [[기사혁명 (플레이백)|기사혁명]]과 황태자 책봉 ===
=== [[기사혁명 (플레이백)|기사혁명]]과 황태자 책봉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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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태자는 부황의 지지를 얻어 의정원을 해산하고, 언론 검열을 강화해 강제로 혼란을 수습한다. 이와 더불어 군비 삭감을 비롯한 대규모 긴축정책을 시행하나 군부의 엄청난 반발을 불러왔다.
결국 태자는 부황의 지지를 얻어 의정원을 해산하고, 언론 검열을 강화해 강제로 혼란을 수습한다. 이와 더불어 군비 삭감을 비롯한 대규모 긴축정책을 시행하나 군부의 엄청난 반발을 불러왔다.


이 당시 군부의 불만은 극에 달했는데, 3.1 폭동 당시 목종이 군부를 장악하기 위해 원수부를 상설화하여 군권을 장악하며 육해군의 총참모부와 총제영이 허울로 전락하고, 원수부의 주도하에 시행된 서백리 원정의 부진으로 군부 내의 불만은 가속화 되었으며 군 내부의 진급 적체를 해결하지 못하여 불만이 고조되었다.
이 당시 군부의 불만은 극에 달했는데, 3.1 폭동 당시 목종이 군부를 장악하기 위해 내각의 군에 대한 통제를 강화함으로써 군권을 장악하며 육해군의 참모본부와 총제영이 허울로 전락하고, 원수부의 주도하에 시행된 서백리 원정의 부진으로 군부 내의 불만은 가속화 되었으며 군 내부의 진급 적체를 해결하지 못하여 불만이 고조되었다.


이렇게 군부의 불만이 고조되던 와중, 군비 삭감 및 대규모 군축이 확정되자 군부의 불만은 폭팔하게 되고, 선종과 극명회는 이때를 노려 정변을 기획하였다. 1930년 11월 10일 자정 독립기갑연대 병력 일부를 시작으로 황성 일대 육군의 일부가 선종의 지휘 하에 조정 및 국가중요시설을 장악하기 시작하면서 [[기사혁명 (플레이백)|기사혁명]]이 시작되었다. 황성 동부의 경성위수사령부, 황성 서부의 제30사단, 황성 남부의 제7사단 그리고 서경, 개성, 대구, 광주, 부산에 주둔 중이던 군대들이 궐기하여 황궁과 황성방송국, 원수부, 육군부, 경무청, 파출소, 중앙전화국, 시청, 도청, 발전소 등이 표적이 되었다. 의정 윤덕영이 머물렀던 의정관은 사태 초기 시위혼성사단에게 점거되었으며 황태자였던 [[폐태자 이건 (플레이백)|이건]]은 사살되었다. 이후 선종은 오전 9시 경, 체포당한 윤덕영과 육군대신 박중양을 데리고 해군총제사 신순성 대장과 함께 경복궁에 있던 목종을 운현궁에 유폐시키며 강제로 혁명 지지와 계엄령 선포를 추인받는다.
이렇게 군부의 불만이 고조되던 와중, 군비 삭감 및 대규모 군축이 확정되자 군부의 불만은 폭팔하게 되고, 선종과 극명회는 이때를 노려 정변을 기획하였다. 1930년 11월 10일 자정 독립기갑연대 병력 일부를 시작으로 황성 일대 육군의 일부가 선종의 지휘 하에 조정 및 국가중요시설을 장악하기 시작하면서 [[기사혁명 (플레이백)|기사혁명]]이 시작되었다. 황성 동부의 경성위수사령부, 황성 서부의 제30사단, 황성 남부의 제7사단 그리고 서경, 개성, 대구, 광주, 부산에 주둔 중이던 군대들이 궐기하여 황궁과 황성방송국, 원수부, 육군부, 경무청, 파출소, 중앙전화국, 시청, 도청, 발전소 등이 표적이 되었다. 의정 윤덕영이 머물렀던 의정관은 사태 초기 시위혼성사단에게 점거되었으며 황태자였던 [[폐태자 이건 (플레이백)|이건]]은 사살되었다. 이후 선종은 오전 9시 경, 체포당한 윤덕영과 육군대신 박중양을 데리고 해군총제사 신순성 대장과 함께 경복궁에 있던 목종을 운현궁에 유폐시키며 강제로 혁명 지지와 계엄령 선포를 추인받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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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후 강상죄를 부활시키는 한편, 상무영과 경무청의 인원들로 [[민족보위부 (플레이백)|민족보위부]]를 창설하여 반정부 조직을 철저히 탄압한 것은 물론 전국 각지에 강제 수용소들을 운영하며 수많은 사람들을 감금, 고문하여 반정부세력과 미래의 반란 분자들을 절멸시킨다. 또한 [[극명회 (플레이백)|극명회]]를 중심으로 잔존 정당 세력을 모두 통합하여 [[민족유일당 (플레이백)|민족유일당]]을 창당하고 유일한 합법정당으로 지정하여 일당제를 시작했다. 국정을 장악한 선종은, 어일신 당시부터 내려오던 뿌리깊은 기득권을 청산하기 위해 기술관료와 군부를 적극 등용하였다. 더불어 부패한 문관들을 견제하고 군의 진급 적체를 해소하기 위해 혁명주임관제를 실시했다. 무관학교 출신 정위, 참령급 무관들은 이 제도를 통해 문관으로 전환하였고, 선종의 철저한 지지세력이 되어 총력전 체제 건설의 주역이 되었다.
이후 강상죄를 부활시키는 한편, 상무영과 경무청의 인원들로 [[민족보위부 (플레이백)|민족보위부]]를 창설하여 반정부 조직을 철저히 탄압한 것은 물론 전국 각지에 강제 수용소들을 운영하며 수많은 사람들을 감금, 고문하여 반정부세력과 미래의 반란 분자들을 절멸시킨다. 또한 [[극명회 (플레이백)|극명회]]를 중심으로 잔존 정당 세력을 모두 통합하여 [[민족유일당 (플레이백)|민족유일당]]을 창당하고 유일한 합법정당으로 지정하여 일당제를 시작했다. 국정을 장악한 선종은, 어일신 당시부터 내려오던 뿌리깊은 기득권을 청산하기 위해 기술관료와 군부를 적극 등용하였다. 더불어 부패한 문관들을 견제하고 군의 진급 적체를 해소하기 위해 혁명주임관제를 실시했다. 무관학교 출신 정위, 참령급 무관들은 이 제도를 통해 문관으로 전환하였고, 선종의 철저한 지지세력이 되어 총력전 체제 건설의 주역이 되었다.


선종은 또한 사족 또한 철저하게 배제하였다. 선종은 개국작을 폐지하고, 조선 초 전례를 따라 백작-부원군의 이등작을 복원하고 이들의 수를 30명으로 제한하여 재정적 부담을 줄였다. 또한 황족 작위도 조선 초 작위를 본따 친왕-공-후로 바꾸며 황족들을 대거 정리하여 궐내의 여론을 장악하는 한편, 비변사를 본따 최고권력기구인 [[대한제국 국방위원회 (플레이백)|국방위원회]]를 설립하여 유례없는 황권을 확립한다. 이는 1932년 대한국 국제를 폐지하고 흠정헌법인 [[대한제국 국제 (플레이백)|대한제국 국제]]를 반포하며 절정에 달한다. 그러나 이 시기 확립된 전제군주정은 외견적으로는 조선 후기 정체였으나, 실제로는 고도의 중공업화와 근대화, 대중동원체제를 행하는 전체주의적 사회의 형성을 위한 것이었다. 선종은 천제로부터 천명을 받아 천하를 소유하는 동양적 황제가 아닌, 전체주의 독재자들처럼 자신을 민족의 영도자로 부각했고, 자신을 '''수령'''으로 지칭하였다.  
선종은 사족 또한 철저하게 배제하였다. 선종은 개국작을 폐지하고, 조선 초 전례를 따라 백작-부원군의 이등작을 복원하고 이들의 수를 30명으로 제한하여 재정적 부담을 줄였다. 또한 황족 작위도 조선 초 작위를 본따 친왕-공-후로 바꾸며 황족들을 대거 정리하여 궐내의 여론을 장악하는 한편, 비변사를 본따 최고권력기구인 [[대한제국 국방위원회 (플레이백)|국방위원회]]를 설립하여 유례없는 황권을 확립한다. 이는 1932년 대한국 국제를 폐지하고 흠정헌법인 [[대한제국 국제 (플레이백)|대한제국 국제]]를 반포하며 절정에 달한다. 그러나 이 시기 확립된 전제군주정은 외견적으로는 조선 후기 정체였으나, 실제로는 고도의 중공업화와 근대화, 대중동원체제를 행하는 전체주의적 사회의 형성을 위한 것이었다. 선종은 천제로부터 천명을 받아 천하를 소유하는 동양적 황제가 아닌, 전체주의 독재자들처럼 자신을 민족의 영도자로 부각했고, 자신을 '''수령'''으로 지칭하였다.  


선종은 특히 총력전 국가 건설을 강조한 만큼 국방에 각별했다. 선종에게 국방이란 국가 생존을 넘어 국가를 발전시키는 핵심적인 원동력이었기 때문이다. 즉위 3일차에 출척을 통해 군을 장악한 직후 극명회 인사들은 육군의 요직을 장악하였디. 선종은  독일군의 기동전 이론을 바탕으로 고도의 기계화 전력을 육성하고 1931년 세계에서 10번째로 공군을 창설하며 공지전의 개념을 확립시키며 동아시아를 넘어 세계적으로도 매우 진일보한 군사강국으로 성장하게 되었다.   
선종은 특히 총력전 국가 건설을 강조한 만큼 국방에 각별했다. 선종에게 국방이란 국가 생존을 넘어 국가를 발전시키는 핵심적인 원동력이었기 때문이다. 즉위 3일차에 출척을 통해 군을 장악한 직후 극명회 인사들은 육군의 요직을 장악하였디. 선종은  독일군의 기동전 이론을 바탕으로 고도의 기계화 전력을 육성하고 1931년 세계에서 10번째로 공군을 창설하며 공지전의 개념을 확립시키며 동아시아를 넘어 세계적으로도 매우 진일보한 군사강국으로 성장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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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9년 말, 중국 전선은 장기전으로 접어들었고 동아시아의 세력 균형은 급격히 변화하였다. 대한제국은 1937년 중일전쟁 발발 이후 국민정부를 지원하며 대규모 자원병 군단과 군사고문단을 파견하였다. 한국군은 중국 각지에서 일본군과의 실전을 통해 현대전 교리를 축적했고, 동시에 항공·기갑·포병 운용에 관한 귀중한 데이터를 확보하였다.
1939년 말, 중국 전선은 장기전으로 접어들었고 동아시아의 세력 균형은 급격히 변화하였다. 대한제국은 1937년 중일전쟁 발발 이후 국민정부를 지원하며 대규모 자원병 군단과 군사고문단을 파견하였다. 한국군은 중국 각지에서 일본군과의 실전을 통해 현대전 교리를 축적했고, 동시에 항공·기갑·포병 운용에 관한 귀중한 데이터를 확보하였다.


일본 정부는 초기에는 이를 단순한 제한적 개입으로 보았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한국군의 전투력이 예상보다 훨씬 강하다는 사실을 확인하게 되었다. 특히 한국의 산업력과 병참 능력은 대본영의 예상했던 수준을 크게 웃돌았다. 1939년 당시 일본은 중국 대륙에서 계속되는 소모전, 북방에서 급속히 군비를 확장하는 대한제국, 영미의 제제로 인한 미국과 영국의 경제 제재 가능성이라는 3대 악재에 직면하였고, 만약 한국과 전면전이 벌어진다면 일본은 승패와 관계없이 제국의 국력을 소진시킬 것이라는 결론이 확산되었다.
일본 정부는 초기에는 이를 단순한 제한적 개입으로 보았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한국군의 전투력이 예상보다 훨씬 강하다는 사실을 확인하게 되었다. 특히 한국의 산업력과 병참 능력은 대본영의 예상했던 수준을 크게 웃돌았다. 1939년 당시 일본은 중국 대륙에서 계속되는 소모전, 북방에서 급속히 군비를 확장하는 대한제국, 영미의 제제로 인한 미국과 영국의 경제 제재 가능성이라는 3대 악재에 직면하였고, 만약 한국과 전면전이 벌어진다면 일본은 승패와 관계없이 제국의 국력을 소진시킬 것이라는 결론이 확산되었다.


선종 또한 이 시기 충분한 실전 데이터를 확보함에 따라 중국 전선에서의 추가적 손실을 내켜하지 않았다. 또한 선종은 왕징웨이를 중심으로 한 친한 정부를 안정시키는 것이 중국 내 영향력을 확대하기에는 더 중요한 국가전략이라고 보았고, 일본과 즉시 충돌하기보다는 시간을 벌어 군사력을 더욱 증강하는 것이 유리하다고 결론 내렸다.
선종 또한 이 시기 충분한 실전 데이터를 확보함에 따라 중국 전선에서의 추가적 손실을 내켜하지 않았다. 또한 선종은 왕징웨이를 중심으로 한 친한 정부를 안정시키는 것이 중국 내 영향력을 확대하기에는 더 중요한 국가전략이라고 보았고, 일본과 즉시 충돌하기보다는 시간을 벌어 군사력을 더욱 증강하는 것이 유리하다고 결론 내렸다.

2026년 7월 26일 (일) 02:35 기준 최신판

연습장:솔피/1
연습장:솔피/2
연습장:솔피/3
연습장:솔피/4
연습장:솔피/5

틀:선종 태황제 관련 문서

생애

유년기

1891년 6월 13일 새벽 3시 경 내의원에서 은언군의 후손인 안종[1]과 백정의 딸이자 소실인 유씨 사이에서 서장자로 태어났다.

어린 시절 운현궁의 사손인 이선[2]의 양자로 출계하였으며, 1897년(건원 3년) 열조부인 장헌세자가 장조로 추존되며 양부 이선이 '완화군(完和君)' 군호를 받게 된다. 1899년 완화군이 병으로 훙서하자 본래라면 은언군가의 6세손으로써 황족이 될 수 없던 선종은 운현궁의 사손으로써 현풍군의 작호를 받았으며, 1910년 황족 작위가 개편되자 현풍군으로 불리게 되었다.

선종은 총명하고 뻬어난 외모를 지녔으며, 생부 진양군의 사후에는 경은군과 함께 삼종지맥의 유이한 후손이란 타이틀을 가졌지만, 백정의 손자라는 혈통 탓에 은근히 황족들과 대신들에게 무시를 당했다. 이러한 선종의 외로운 유년기는 선종이 장차 양면적인 사상을 갖게 되는 데 영향을 끼쳤다.

아무도 가지 않는 길

결국 수학원에서 학업을 이어가던 선종은 고심끝에 자진하여 육군유년학교에 입학한다. 이 당시 조선의 무관 무시 풍조가 뿌리깊게 남아있던 한국에서 육군무관학교에 진학한 황족은 선종이 최초였다. 선종은 유년학교에서는 무난하게 생활하였으나 무관학교를 진학한 뒤에는 계속되는 무관후보생 생활에 질려 공부 대신 규정을 자주 위반하고, 패싸움을 주도하고 다녀 황실 어른들에게 빈번하게 질책당하였다. 당시 선종은 진보주의 서적을 탐독하다 점호 때 적발되어 요주의 인물로 분류되기도 했다. 결국 태자였던 목종에게 여러번 갈굼을 당하기도 했다. 그럼에도 선종은 여러 금서를 탐독하고 자유주의자들과 서신으로 교류할 정도로 반항적이었지만, 우여곡절 끝에 공부에 전념하여 우등생으로 졸업해 1912년 육군 보병 참위로 임관하여 제1연대 소대장으로 복무했다. 1913년 부위로 진급하였고, 1914년 전쟁참모 과정인 전쟁대학교에 입학해 1915년 정위로 진급하였고 1917년 황족으로써 명목상 수석 졸업하였다.

참위 시절의 선종

전쟁대학교 졸업 후 원수부 참모본부로 전속된 선종은 전쟁참모 업무를 시작했다. 본래 선종 또한 전쟁참모 처럼 야전 지휘관은 스처가고 최상위 제대 참모로 주로 복무해야 했다. 그러나 선종은 차나 달이려고 무관이 된게 아니라며 인사규정에 반기를 들었다. 선종은 무관후보생때부터 수 없이 벌인 사고를 유일무이한 현역 황족이라는 빽으로 무마시키며 잘 알고 있었다. 선종은 이번에도 황족이라는 위상을 이용하여 참모본부에서 깽판을 벌여 서백리 출병에 자신을 중대장으로써 포함시키는데 성공했다. 선종은 창끝부대 지휘관으로써 만주 횡단철도와 연해주 동해안, 심지어 바이칼 호의 이르쿠츠크 내륙 깊숙히까지 점령하며 전쟁영웅으로 등극했다. 그러나 붉은 군대와 교전 과정에서 학살이 포함된 대규모 초토화 작전으로 자유시 학살이라는 흑역사를 남겼다. 서백리 원정 직전까지만 해도 선종은 사회주의에 호의적인 모습을 여럿 보여왔으나, 서백리 출병 당시 붉은 군대에 혐오감을 느끼며 사회주의와 손절하게 된다.

서백리 출병 당시 선종과 함께 참전했던 육군무관학교의 선후배들은 붉은 군대와 교전하며 붉은 군대의 전투력에 큰 감명을 받았으며, 백군과의 협력을 통해 1차대전의 전훈과 서백리의 광활한 환경에서 영향을 받아 핵심 전력을 기동화, 장갑화하여 장차 만주와 시베리아에서 작전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을 목표로 했다. 그러나 후진적인 당시의 제국군에서 이러한 제한은 받아들여질 턱이 없었다. 결국 선종은 지휘계통 따위는 생까고 목종에게 직접 기동부대 창설을 제안했다. 이는 명백한 월권이었으나, 선종의 황족이라는 신분으로 유야무야되었다. 결국 선종은 기사혁명 직전까지 수많은 월권과 파천황적 행보를 보였음에도 군문을 떠나지 않았으며, 선종의 이런 막가파식 행보는 역설적으로 대한제국에서 총력전과 기동전에 대한 연구의 방패로 작용하였다. 이리하여 선종의 적극적인 지원으로 장차 대한제국 기갑군의 모체가 될 제1전차대가 창설된다.

이 시기 선종과 함께 서백리 출병에 참전했던 김석원 지청천, 김홍일등의 소장파 무관들은 점차 선종을 우두머리로 하여 사상을 공유하기 시작했다. 이들은 서백리 출병으로 대한제국군의 전략적 무지와, 대전쟁의 군사교리도 적응하기 어려워하는 구식 군대의 추태를 온몸으로 느꼈고, 서백리 출병과정에서 일본군과의 마찰을 빚으며 일본과 소련에 대한 공포와 이에 대한 대한제국의 전략적 대응이 부재하다는 것에 위기감을 느꼈다. 선종은 이러한 경험을 바탕으로 제국군의 현대화와 기동전을 주장하였고, 이를 완수하기 위해서는 지금의 주먹구구식 경제로는 안된다는 결론에 도달하였다. 이때부터 선종은 대전쟁의 총력전 체제에 매료되었고, 총력전 체제를 통해 중공업입국과 강력한 군대를 보유하여야만 대한제국이 살아남을 수 있다고 주장하고 소장파 무관들과 함께 총력전 체제를 수립하고 현대화된 미래적 군대를 양성하기 위하여 독서회를 창설하였다. 이 독서회는 장차 비밀결사에서 점점 군내의 거대 사조직화 되어 극명회로 발전하게 된다.

이후 선종은 1920년 본국으로 귀환하였다. 귀환 직후 선종이 창설에 기여한 제1전차대장을 맡아 대한제국 전차병과의 초석을 다졌다. 1921년에는 서백리 출병으로 미루었던 우등 전쟁참모에게 주어진 특전인 해외 유학을 떠났다. 선종은 베를린 육군대학에 입교하여 최초의 현대적 총력전을 선보인 독일군의 전술을 공부하였는데, 초인플레이션과 정치적 혼란이 이어지던 독일의 혼란기를 몸소 체감한 선종은 아직까지 가지고 있던 민주주의에 대한 환상이 점차 무너졌으며, 귀국 직전에는 민주주의에 혐오감과 정치적 냉소주의, 정치인에 대한 불신을 표출하기도 했다.

1922년 선종은 독일에서 참령으로, 1924년 귀국 후 부령에 진급했으며 귀국 직후 제1전차대를 증편한 제1전차대대장으로 부임하였다. 이 시기 독서회는 영관급과 위관급에서 세를 넓혔고 이름을 극명회로 바꾸었다. 선종은 김홍일의 국방론을 바탕으로 총력국방국가 건설이라는 목표하에 극명회를 키워가기 시작했으며 극명회의 영수로써 군에 영향력을 떨치기 시작한다. 1925년에는 참모본부 군무부장이라는 요직에 보직된다. 그러나 일본과의 관계 호전에 따른 군축이 대두되자, 민병석 의정이 일본의 야마나시 군축을 본따 사남군축을 발표한다. 이에 열 받은 선종은 극명회와 군부 내의 소장파를 대표하여 군축의 부당함, 민병석 내각에 대한 경질, 문민 출신이 역임하는 육해군 대신을 현역 무관의 자리로 하고, 원수부를 폐지하고 육해군부를 의정부 산하에서 이관하여 프로이센 군사내각처럼 황제 직속으로 두자는 통수권일원화를 담은 상소를 목종에게 상주하며 지휘계통과 문민통제를 모조리 무시하는 초대형 사고를 친다. 그간 선종은 이러한 월권을 수 없이 자행하였으나, 이런 초대형 사고를 치자 결국 군무부장에서 보직해임되었다. 이에 격분한 선종은 이딴놈들을 위해 복무할 수 없다며 사직을 청하고 헌정당 입당을 타진한다. 그러자 목종은 황족 중 최선임자 겸 전직 좌파이자 황제인 자신도 못말리는 반골 현풍군과 반 정부 야당인 헌정당과 결합 시도에 기겁해 호적에서 파여서 평민이 되고 싶냐는 협박과 곧 바로 정령 진급을 시켜준다는 조건으로 간신히 선종의 예편과 헌정당 입당을 막았다. 결국 현풍군은 사직을 철회하고 다시 제1전차대대장으로 보직되었다. 이때 선종은 문민관료와 목종의 한심한 추태에 노골적으로 경멸을 표했으며, 제도적으로 문민정부를 설득하여 총력전 국가를 건설한다는 기존 노선을 철회하고 대전쟁 시기 독일군처럼 군이 직접 주도하는 총력전 체제를 본받아 자신과 극명회, 군이 주도하는 총력전 체제를 구축하기로 결심하고, 정변을 계획하며 호시탐탐 기회를 노렸다.

이후 사남군축의 내용대로 제1전차대대가 독립기갑연대로 승격하자 연대장 대리를 지내다가 1926년 정령으로 보직되며 정식 연대장이 되었고, 다시 참모본부 군무부장에 복직하였다. 이후 1929년 참장에 진급해 시위혼성사단장이 되었다.

기사혁명과 황태자 책봉

호시탐탐 군의 주도하에 총력전을 구현하고자 한 선종에게 기회는 얼마 지나지 않아 찾아오게 된다. 1930년 원래부터 콩팥과 심장이 좋지 않았던 목종은 대공황과 헌정당의 총선 승리로 인한 충격, 연달은 정치적 혼란으로 원래도 엉망이었던 건강이 크게 악화된다. 이에 황태자 이건이 대리청정을 맡게 되었으나, 태자 또한 목종이 벌여놓은 문제들을 수습하기에는 역량이 부족했다.

결국 태자는 부황의 지지를 얻어 의정원을 해산하고, 언론 검열을 강화해 강제로 혼란을 수습한다. 이와 더불어 군비 삭감을 비롯한 대규모 긴축정책을 시행하나 군부의 엄청난 반발을 불러왔다.

이 당시 군부의 불만은 극에 달했는데, 3.1 폭동 당시 목종이 군부를 장악하기 위해 내각의 군에 대한 통제를 강화함으로써 군권을 장악하며 육해군의 참모본부와 총제영이 허울로 전락하고, 원수부의 주도하에 시행된 서백리 원정의 부진으로 군부 내의 불만은 가속화 되었으며 군 내부의 진급 적체를 해결하지 못하여 불만이 고조되었다.

이렇게 군부의 불만이 고조되던 와중, 군비 삭감 및 대규모 군축이 확정되자 군부의 불만은 폭팔하게 되고, 선종과 극명회는 이때를 노려 정변을 기획하였다. 1930년 11월 10일 자정 독립기갑연대 병력 일부를 시작으로 황성 일대 육군의 일부가 선종의 지휘 하에 조정 및 국가중요시설을 장악하기 시작하면서 기사혁명이 시작되었다. 황성 동부의 경성위수사령부, 황성 서부의 제30사단, 황성 남부의 제7사단 그리고 서경, 개성, 대구, 광주, 부산에 주둔 중이던 군대들이 궐기하여 황궁과 황성방송국, 원수부, 육군부, 경무청, 파출소, 중앙전화국, 시청, 도청, 발전소 등이 표적이 되었다. 의정 윤덕영이 머물렀던 의정관은 사태 초기 시위혼성사단에게 점거되었으며 황태자였던 이건은 사살되었다. 이후 선종은 오전 9시 경, 체포당한 윤덕영과 육군대신 박중양을 데리고 해군총제사 신순성 대장과 함께 경복궁에 있던 목종을 운현궁에 유폐시키며 강제로 혁명 지지와 계엄령 선포를 추인받는다.

이후 선종은 목종의 명의로 여러 포고문을 쏟아내는데, 전국의 모든 정당, 사회단체의 정치활동을 불법으로 하고 조정 대신들을 모조리 체포하며, 오후 8시를 기해 의정원, 중추원, 지방의원 등 의회는 모조리 해산한다는 등의 내용이었다.

이로써 선종은 내각 총사퇴를 결의하며 마침내 목종의 권력을 무너뜨리고 조정, 의정원, 재판소의 역할을 포함한 국가의 전권을 손에 쥐게 된다. 다음날인 11월 10일 육군 부장에 진급하는 한편 경성위수사령관을 겸하여 황성의 모든 군권을 장악했다. 이렇게 하루 아침에 실권을 빼앗긴 목종은 나름대로의 저항을 시도하였으나, 조정의 주요 관직들을 죄다 극명회로 채우고 군대를 동원하여 권력을 완전히 장악했다. 이로서 현풍군은 목종의 친위 세력을 모조리 숙청하고 모든 권력을 찬탈하는 데 성공했다.

이후 극명회의 주도로 선종은 목종의 양자로 입적되었다. 하루라도 대통을 비울 수 없다며 혁명에 공이 큰 현풍군을 입적해야 한다는 주장으로 1930년 11월 29일 현풍군은 정식으로 태자에 책봉되었다. 이렇듯 모든 저항이 무위에 돌아가자 군부는 본격적인 선위 여론을 조성하였다. 이에 목종은 마지못하여 대리청정의 명을 내렸지만, 이후 퇴위 압박은 더욱 심해졌다. 그렇게 1930년 12월 12일, 목종은 군부의 압박과 대신들의 끈질긴 퇴위 강요에 끝내 못이겨 강제로 퇴위하고, 삼종지맥의 후손이자 백정의 외손자인 선종은 황위에 등극한다.

재위 초기

재위 초기 선종

목종을 끌어낸 선종은 연호를 백선(白宣)으로 정하고 황제가 되었다. 선종은 기사혁명을 통해 국가를 장악하였지만 군의 상층부를 차지하던 수구파는 여전히 선종에게 불안 요소였다. 또한 극명회와 이들 수구파는 목종 시기부터 치열한 세력 다툼을 이어가 불구대천의 원수로 굳어진지 오래였다. 결국 선종은 즉위 3일차에 전군회의를 개최, 이 자리에서 육군 부장급 이상의 60%를 경질하며 군을 일거에 장악했다. 이후 전통을 이용하여 미래를 개척한다는 법고창신(法古創新)을 강조하며 헌법을 정지시켜 현재까지 이어지는 전제정치의 서막을 알렸다.

이후 강상죄를 부활시키는 한편, 상무영과 경무청의 인원들로 민족보위부를 창설하여 반정부 조직을 철저히 탄압한 것은 물론 전국 각지에 강제 수용소들을 운영하며 수많은 사람들을 감금, 고문하여 반정부세력과 미래의 반란 분자들을 절멸시킨다. 또한 극명회를 중심으로 잔존 정당 세력을 모두 통합하여 민족유일당을 창당하고 유일한 합법정당으로 지정하여 일당제를 시작했다. 국정을 장악한 선종은, 어일신 당시부터 내려오던 뿌리깊은 기득권을 청산하기 위해 기술관료와 군부를 적극 등용하였다. 더불어 부패한 문관들을 견제하고 군의 진급 적체를 해소하기 위해 혁명주임관제를 실시했다. 무관학교 출신 정위, 참령급 무관들은 이 제도를 통해 문관으로 전환하였고, 선종의 철저한 지지세력이 되어 총력전 체제 건설의 주역이 되었다.

선종은 사족 또한 철저하게 배제하였다. 선종은 개국작을 폐지하고, 조선 초 전례를 따라 백작-부원군의 이등작을 복원하고 이들의 수를 30명으로 제한하여 재정적 부담을 줄였다. 또한 황족 작위도 조선 초 작위를 본따 친왕-공-후로 바꾸며 황족들을 대거 정리하여 궐내의 여론을 장악하는 한편, 비변사를 본따 최고권력기구인 국방위원회를 설립하여 유례없는 황권을 확립한다. 이는 1932년 대한국 국제를 폐지하고 흠정헌법인 대한제국 국제를 반포하며 절정에 달한다. 그러나 이 시기 확립된 전제군주정은 외견적으로는 조선 후기 정체였으나, 실제로는 고도의 중공업화와 근대화, 대중동원체제를 행하는 전체주의적 사회의 형성을 위한 것이었다. 선종은 천제로부터 천명을 받아 천하를 소유하는 동양적 황제가 아닌, 전체주의 독재자들처럼 자신을 민족의 영도자로 부각했고, 자신을 수령으로 지칭하였다.

선종은 특히 총력전 국가 건설을 강조한 만큼 국방에 각별했다. 선종에게 국방이란 국가 생존을 넘어 국가를 발전시키는 핵심적인 원동력이었기 때문이다. 즉위 3일차에 출척을 통해 군을 장악한 직후 극명회 인사들은 육군의 요직을 장악하였디. 선종은 독일군의 기동전 이론을 바탕으로 고도의 기계화 전력을 육성하고 1931년 세계에서 10번째로 공군을 창설하며 공지전의 개념을 확립시키며 동아시아를 넘어 세계적으로도 매우 진일보한 군사강국으로 성장하게 되었다.

대외적으로는 동양평화를 주장하면서도 초강경 팽창주의 외교를 전개했다. 선종은 일본과의 평화적 공존에 대해 회의감을 지녔고, 대마도에 대한 영유권을 주장하는 한편 대만과 유구를 강탈하여 경제블럭 확장하기를 원했다. 동시에 선종은 허울뿐인 독립을 유지하던 청나라를 병합하여 만주를 본격적으로 수탈하기로 결정했다. 1932년 청나라는 푸이가 옥새를 바치며 316년만에 사라지게 된다. 만주 병합 직후 소련의 5개년 계획을 모방해 “일체는 경제 복구발전을 위하여”라는 구호 아래 젊은 시절 마르크스주의자였던 소련식 계획경제 지지자들을 중용해 경제복구발전 3개년계획을 실행하였다.

1937년 7월 중일전쟁이 발발하자 선종은 일본의 대륙 팽창이 결국 대한제국의 안보를 직접적으로 위협할 것이라 판단하였다. 그러나 당시 대한제국은 일본과 즉각적인 전면전을 벌일 준비가 충분하지 않았기에 선종은 '대한민족지원군'이라는 명칭으로 의용군을 파병하기로 결정했다. 선종은 완편 군단 수준의 지상군을 전개하고 750대가 넘는 각종 항공기를 배치히여 대규모 공군 지원 및 전차, 전투기, 대공포 등의 무기 판매 및 군사고문단을 파견하여 국민정부를 지원했다.

대한민족지원군은 상하이 전투, 난징 방면 전투, 우한 회전 등에 참가하면서 현대전 교리와 기갑·포병·항공 협동전술을 축적하였으며 국부군과 합동하여 대규모 공세를 저지하였고, 일본군과의 전투에서 압도적 교환비를 내며 일본군의 초기 패퇴에 지대한 기여를 했다. 대한제국은 전쟁 기간 동안 국민정부에 대규모 차관과 무기를 지원하였으나, 장제스의 상하이 전투에서의 실책과 더불어 각종 실책과 함께 공산당의 확장을 방지하지 못하는 점에서 점차 장제스로는 안된다는 결론에 도달하였다.

결국 선종은 왕징웨이 공작을 통해 장제스를 실각시키고 왕징웨이를 주석으로 하는 새로운 국민정부를 수립하며 항전의 기초를 다졌고, 대한제국은 이후에도 중국에 항공기, 전차, 화포, 군수물자를 지속적으로 수출하여 경제적 이득을 챙김과 동시에 가장 중요한 군사 교리 개발, 정보 수집, 장교단 육성, 신무기 운용 시험을 동시에 수행하였다. 이후 대한민족지원군의 실전 데이터는 이후 대동아전쟁 전투의 기반이 되었다.

대동아전쟁

1939년 말, 중국 전선은 장기전으로 접어들었고 동아시아의 세력 균형은 급격히 변화하였다. 대한제국은 1937년 중일전쟁 발발 이후 국민정부를 지원하며 대규모 자원병 군단과 군사고문단을 파견하였다. 한국군은 중국 각지에서 일본군과의 실전을 통해 현대전 교리를 축적했고, 동시에 항공·기갑·포병 운용에 관한 귀중한 데이터를 확보하였다.

일본 정부는 초기에는 이를 단순한 제한적 개입으로 보았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한국군의 전투력이 예상보다 훨씬 강하다는 사실을 확인하게 되었다. 특히 한국의 산업력과 병참 능력은 대본영의 예상했던 수준을 크게 웃돌았다. 1939년 당시 일본은 중국 대륙에서 계속되는 소모전, 북방에서 급속히 군비를 확장하는 대한제국, 영미의 제제로 인한 미국과 영국의 경제 제재 가능성이라는 3대 악재에 직면하였고, 만약 한국과 전면전이 벌어진다면 일본은 승패와 관계없이 제국의 국력을 소진시킬 것이라는 결론이 확산되었다.

선종 또한 이 시기 충분한 실전 데이터를 확보함에 따라 중국 전선에서의 추가적 손실을 내켜하지 않았다. 또한 선종은 왕징웨이를 중심으로 한 친한 정부를 안정시키는 것이 중국 내 영향력을 확대하기에는 더 중요한 국가전략이라고 보았고, 일본과 즉시 충돌하기보다는 시간을 벌어 군사력을 더욱 증강하는 것이 유리하다고 결론 내렸다.

이러한 이해관계가 맞아떨어지며 1938년 여름부터 양국은 비밀 접촉이 시작되었고, 1939년 한일불가침조약이 반포되었다. 일본은 이를 통해 일본은 북방에서 대한제국의 위협이 일시적으로 제거되었다고 판단하였으며, 남방 진출과 중국 공략에 필요한 시간을 벌었고 남방작전에 모든 전력을 집중하는 전략이 채택되었다. 이 시기 선종은 공식적으로 대한민족지원군을 완전 철수시키며 평화를 유지했지만, 내부적으로는 일본과의 결전을 대비한 국가총동원 체제를 완벽하게 구축하고 중국 내 영향력을 공고히 하면서 군사력 증강과 전쟁 준비를 계속할 시간을 확보했다.

한일 불가침조약은 약 3년간 유지되며 동아시아의 긴장을 일시적으로 완화하는 역할을 했다. 일본은 북방 전선의 부담을 덜고 남방으로 세력을 확장할 수 있었고, 대한제국은 중국 내 영향력을 공고히 하면서 군사력 증강과 전쟁 준비를 계속할 시간을 확보했다. 한일불가침조약과 유럽 전선에서의 연합국의 패배로 고무된 일본은 1941년 미국을 상대로 진주만 공습을 실시하면서 대동아전쟁을 시작하였다. 일본의 남방작전은 예상 이상의 성공을 거두었으며, 남방 대부분은 일본의 지배하에 들어가게 되었다.

선종은 일본의 시선이 남방으로 이동한 이 당시를 절호의 기회로 보았다. 1942년 6월 8일 새벽 대한제국 해군은 진주만 공습과 유사한 방식으로 일본 연합함대의 주요 거점인 구레항을 기습하였다. 대한제국 해군은 항공모함에서 발진한 함재기로 일본 해군에 큰 피해를 입혔고, 공식적으로 연합국에 가입하고 한중동맹을 채결하며 대동아전쟁이 시작되었다. 구레에서의 성공적 기습과는 달리 대한제국 해군은 이후 벌어진 동중국해 해전과 류큐 방면 해전에서 궤멸적 타격을 입으며 사실상 전쟁 수행 능력을 대부분 상실하고 동아시아의 제해권은 일본이 유지하게 된다. 이는 대한제국이 44년까지도 일본에 상륙작전을 전개하지 못하는 결정적 원인이 되었다.

해군의 패배와 달리 육군은 큰 성과를 거두었다. 대한제국은 그동안 갈고 닦은 기동전을 적극 활용하여 중국전선에서 연전 연승을 거듭하였고, 1943년 말, 카보네이드 작전으로 일본군은 중국 전선에서 궤멸적 타격을 입고 중국 대륙에서 대부분의 거점을 상실하였으며 남방에서 연합국의 반격이 시작되었다. 1944년 이후 태평양에서는 미국 해군이 일본 해군을 연속적으로 격파하였고, 레이테만 해전 이후 일본 연합함대는 사실상 전멸하였다.

일본 연합함대의 전멸 이후 연합국과 선종은 일본 본토에 대한 상륙 작전에 대해 협의하기 시작하였고, 작전 개시일은 1944년 11월 1일로 정해졌다. 일본상륙 75일 전부터 일본 본토 전역에 걸친 대규모 전략폭격, 항모 기동부대에 의한 전략 요충지 핀포인트 폭격과 기동함대의 대규모 연안 함포 사격이 개시되었다. 이는 간토 및 혼슈와의 연락선 차단, 잔존한 일본 해군 함정의 격멸, 철도와 도로의 수습점, 중요한 교각이나 터널 등 교통 요충 시설 파괴, 상륙 지점의 일본군의 손실 도모가 목적이었다.또한 10월 31일 항공 폭격 및 주력 전함 최소 20척을 동원한 전함의 대지상 함포 사격을 상륙 지점의 포대와 발화점에 집중하여, 상륙 지역 인근 해상과 육상의 모든 장애물을 배제하고 11월 1일 오전 6시에 지상 주력본대에 의한 대규모 상륙을 개시되며 일본 본토로 전쟁이 확산되었다.

대한제국 육군을 위시한 연합국은 무자비하게 일본 본토를 타격하였고, 일본의 모든 국내외 교통망을 마비시키고 공업 생산력 등 전쟁 수행 능력을 철저히 파괴하며, 도쿄를 향한 죽음의 진격이 시작되었다. 대한제국군 총사령부는 최대 6개월 정도로 낙관하였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본은 '1억 총옥쇄', '본토결전'이라는 광기어린 항전 의지를 꺾지 않았다. 결국 선종은 일본을 '확실하게' 굴복시키기 위해선 이전과는 차원이 다른 수준의 대규모 물량을 투입하는 한편, 점령지에서의 저항을 분쇄하기 위해 일본 정화 계획을 실행하여 일본 본토에 대한 황폐화와 절멸을 자행하였고, 일본인들을 게토에 수용했다. 게토에 갇힌 수많은 일본인들은 극심한 인구 과밀과 그로 인한 영양실조, 위생 악화에 시달려 아사하거나 병사했다. 이듬해인 1945년 2월 무렵부터는 기계화보병, 전차, 항공기를 이용한 대규모 토벌 작전이 벌어졌다. 민간인 학살은 일상적으로 일어났으며 가축, 곡물, 재산을 모조리 약탈하고 나머지는 불태워 버렸다. 노동 적령기의 인구는한국으로 끌려가 강제 노동에 동원됐으며 수많은 민간인들이 의도된 기아로 굶어 죽거나 병에 걸려 죽었다. 무수히 많은 건물들이 타 버렸고 광대한 면적의 지역이 황폐화되었으나, 여전히 일본군의 저항은 지속되었다.

이렇듯 일본의 광기 어린 저항은 니가타와 센다이에 핵폭탄이 투하되면서 종료되었다. 일본은 이 시점부터 일본 제국의 모든 군부는 더 이상 연합군을 상대로 어떠한 형태의 흥정과 저항도 불가능하다는 것과 1억 총옥쇄를 해봐야 저 폭탄 한 방이면 무력화된다는 사실을 드디어 인정했다. 원폭이 니가타의 1회성 단발이 아니라는 것은 확실해 졌으며, 지금까지 폭격이 없었던 도시들은 운이 좋은 것이 아니라 그저 핵폭탄을 떨구기 위한 후보지로 남겨 두었던 것임이 너무나도 명백해졌다.

항복 내용은 1945년 8월 15일 정오, 이른바 옥음방송이라 하는 쇼와 덴노의 녹음된 목소리를 직접 방송하였고, 동아시아를 피로 물들인 대동아전쟁은 이렇게 끝나게 되었다. 대한제국은 류큐(유구 번으로 개칭)와 대마도를 차지했고, 중국은 대만과 센카쿠열도를 차지하며 일본의 패권을 나누어 가졌으며, 일본 전역에서 군정을 시행하였다. 개항 이후 대한제국은 80년만에 동아시아의 진정한 패자로 부상하였고, 이 가슴 벅찬 승리에 전국민과 선종 본인도 대단한 감명을 받았다. 이렇게 전쟁에서 승리하자 전쟁 이전부터 수령으로 칭해지며 우상화가 진행되고 있던 선종은 이제 '위대한 승리자'라는 업적까지 더해지면서 대한제국에서 그야말로 신과 같은 존재가 되었다.

재위 중반기

붕어

노년의 선종

  1. 훗날의 진양공, 안종 당시에는 임금의 4세까지만 왕족으로 인정받았기에 작호가 없었다.
  2. 훗날의 완화군, 당시에는 임금의 4세까지만 왕족으로 인정받았기에 작호가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