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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오쩌둥=
{{역대 중화민국 총통 (프런티어)}}
{| class="wikitable" style="width:100%; max-width:420px; border:2px solid #546285; font-size:10.5pt; float:right"
|-
! colspan="2" style="background-image:linear-gradient(to right, #3D4760, #546285 20%, #546285 80%, #3D4760); color:#fff" | 중화민국 초대 총통<br>{{글씨 크기|14|마오쩌둥}}<br>毛泽东(모택동) | Mao Zedong
|-
| colspan="2" | <div style="margin:-4.5px -9.0px">[[파일:마오쩌둥 (프런티어).jpg|420px]]</div>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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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rowspan="2" style="width:100px; background:#546285; color:#fff" | 출생
| [[1893년]] [[12월 26일]]
|-
| [[중국|청]] 호남성 상담현 소산구<br>(現 [[중국|후난성 샹탄시]] 샤오산시)
|-
! rowspan="2" style="width:100px; background:#546285; color:#fff" | 사망
| [[1976년]] [[9월 9일]] (향년 82세)
|-
| [[중국|베이징시 시청구 중난하이]]
|-
! style="background:#546285; color:#fff" | 묘소
| [[중국|모총통기념당]](毛總統紀念堂)
|-
! rowspan="2" style="background:#546285; color:#fff" | 재임기간
| style="background:#F5F5F5" | 초대 총통
|-
| [[192n년]] [[n월 n일]] ~ [[1976년]] [[9월 9일]]
|-
|-
! style="background:#546285; color:#fff" | 서명
| [[파일:Mao Zedong signature.svg|150px]]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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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colspan="2" | <div class="mw-customtoggle-JFK_Jr" style="text-align:center; color:#000; font-size:10.5pt"><div style="margin:-2px">'''[ 펼치기 · 접기 ]'''</div></div>
<div class="mw-collapsible mw-collapsed" id="mw-customcollapsible-JFK_Jr" style="border:1px solid transparent">
<div class="toccolours mw-collapsible-content" style="margin:0px -15px 0px; background:none; border:1px solid transparent; text-align:left">
{| style="width:calc(100% + 5px); margin-left:-2px; margin-right:-15px; margin-bottom:-13px; text-align:left; font-size:10.5pt"
|-
! style="width:100px; background:#546285; color:#fff" | 본관
| 소산(韶山) 모씨 20세손
|-
! style="background:#546285; color:#fff" | 부모
| 아버지 [[마오이창]](毛貽昌) <sub>(1870 ~ 1920)</sub><br>어머니 원쑤친(文素勤)<sub> (1867 ~ 1919)</sub>
|-
! style="background:#546285; color:#fff" | 형제자매
| 큰 남동생: [[마오쩌민]](毛澤民)<br>작은 남동생: [[마오쩌탄]](毛澤覃)<br>여동생: [[마오쩌젠]](毛澤建) <sub>(양녀)</sub>
|-
! style="background:#546285; color:#fff" | 배우자
| 뤄이슈(羅一秀)<br>[[양카이후이]](楊開慧)<br>[[허쯔전]](賀子珍)<br>[[장칭]](江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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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style="background:#546285; color:#fff" | 자녀
| 장남: [[마오안잉]](毛岸英) <sub>(1922 ~ 1950)</sub><br>차남: [[마오안칭]](毛岸青) <sub>(1923 ~ 2007)</sub><br>삼남: 마오위안쯔(毛遠智) <sub>(1927 ~ 1931)</sub><br>장녀: 양유에화(楊月花) <sub>(1929 ~ )</sub><br>사남: 마오안훙(毛岸红) <sub>(1932 ~ 사망)</sub><br>차녀: 리민(李敏) <sub>(1936 ~ )</sub><br>삼녀: 리너(李訥) <sub>(1940 ~ )</sub>
|-
! style="background:#546285; color:#fff" | 학력
| 후난성 사오산초등학교 <small>(졸업)</small><br>광저우 둥산중학교 <small>(수료)</small><br>창사 샹샹중학교 <small>(수료)</small><br>창사 저우청 중학교 <small>(수료)</small><br>창사 제1중학교 <small>(졸업)</small><br>후난공립고등상업학교 <small>(중퇴)</small><br>후난성공립고등중학교 <small>(중퇴)</small><br>후난성 창사 제1사범학교 <small>(졸업)</small>
|-
! style="background:#546285; color:#fff" | 종교
| [[불교]] → [[무종교]] <small>([[무신론]])</small>
|-
! style="background:#546285; color:#fff" | 신체
| 172cm, 86kg, AB형
|-
! style="background:#546285; color:#fff" | 국적
| {{국기그림|청나라}} [[청나라|대청국]] <sub>(1893~1912)</sub><br>→ {{국기그림|중화민국 북양정부}} [[중화민국 북양정부|중화민국(북양정부)]] <sub>(1912 ~ 1928)</sub><br>→ {{국기그림|중화민국 북양정부}} [[중화민국 북양정부|중화민국]] <sub>(1928 ~ 1976)</sub>
|-
! style="background:#546285; color:#fff" | 최종 당적
| {{신민당 (프런티어)}}
|-
! style="background:#546285; color:#fff" | 자
| '''룬즈(潤之: 윤지)''', 융즈(咏芝: 영지)
|-
! style="background:#546285; color:#fff" | 호
| 쯔런(子任: 자임)
|-
|}
|}
{{목차}}
==개요==
=1940년 미국 대통령 선거=
=1940년 미국 대통령 선거=
{| class="wikitable" style="background:#fff; color:#000; float:right; width:100%; max-width:500px; border: 2px solid #0d164a; text-align:center; font-size:10.5pt; box-sizing:border-box;"
{| class="wikitable" style="background:#fff; color:#000; float:right; width:100%; max-width:500px; border: 2px solid #0d164a; text-align:center; font-size:10.5pt; box-sizing:border-box;"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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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style="background:#f5f5f5; color:#0d164a;" | 후보
! style="background:#f5f5f5; color:#0d164a;" | 후보
| width=37.5% | [[민주당 (미국)|<span style="display: inline; margin: 0px 0px; padding: 1px 4px; border-radius: 3px; color: #fff; background-color:#0044C9; font-size: 0.85em">민주당</span>]]<br><div style="margin: 3px 0 0 0; text-align: left; display: inline-block;">'''<span style="display: inline; padding: 1px 3px; border-radius: 3px; background: #0D164A; color: #FFF; font-size: 0.75em">정</span> [[웬델 윌키|{{글씨 색|#0044C9|웬델 윌키}}]]<br><span style="display: inline; padding: 1px 3px; border-radius: 3px; background: #0D164A; color: #FFF; font-size: 0.75em">부</span> [[앨번 W. 바클리|{{글씨 색|#0044C9|앨번 W. 바클리}}]]'''</div>
| width=37.5% | [[민주당 (미국)|<span style="display: inline; margin: 0px 0px; padding: 1px 4px; border-radius: 3px; color: #fff; background-color:#0044C9; font-size: 0.85em">민주당</span>]]<br><div style="margin: 3px 0 0 0; text-align: left; display: inline-block;">'''<span style="display: inline; padding: 1px 3px; border-radius: 3px; background: #0D164A; color: #FFF; font-size: 0.75em">정</span> [[웬델 윌키|{{글씨 색|#0044C9|웬델 윌키}}]]<br><span style="display: inline; padding: 1px 3px; border-radius: 3px; background: #0D164A; color: #FFF; font-size: 0.75em">부</span> [[앨번 W. 바클리|{{글씨 색|#0044C9|앨번 W. 바클리}}]]'''</div>
| width=37.5% | [[공화당 (미국)|<span style="display: inline; margin: 0px 0px; padding: 1px 4px; border-radius: 3px; color: #fff; background-color:#E81018; font-size: 0.85em">공화당</span>]]<br><div style="margin: 3px 0 0 0; text-align: left; display: inline-block;">'''<span style="display: inline; padding: 1px 3px; border-radius: 3px; background: #0D164A; color: #FFF; font-size: 0.75em">정</span> [[게리 쿠퍼|{{글씨 색|#E81018|게리 쿠퍼}}]]<br><span style="display: inline; padding: 1px 3px; border-radius: 3px; background: #0D164A; color: #FFF; font-size: 0.75em">부</span> [[아서 반덴버그|{{글씨 색|#E81018|아서 반덴버그}}]]'''</div>
| width=37.5% | [[공화당 (미국)|<span style="display: inline; margin: 0px 0px; padding: 1px 4px; border-radius: 3px; color: #fff; background-color:#E81018; font-size: 0.85em">공화당</span>]]<br><div style="margin: 3px 0 0 0; text-align: left; display: inline-block;">'''<span style="display: inline; padding: 1px 3px; border-radius: 3px; background: #0D164A; color: #FFF; font-size: 0.75em">정</span> [[게리 쿠퍼 (프런티어)|{{글씨 색|#E81018|게리 쿠퍼}}]]<br><span style="display: inline; padding: 1px 3px; border-radius: 3px; background: #0D164A; color: #FFF; font-size: 0.75em">부</span> [[아서 반덴버그|{{글씨 색|#E81018|아서 반덴버그}}]]'''</div>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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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style="background:#f5f5f5; color:#0d164a;" | 홈스테이트
! style="background:#f5f5f5; color:#0d164a;" | 홈스테이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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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선==
==경선==
===공화당===
===공화당===
{{인용문|'''Worth Fighting For<br>싸울 가치가 있는 미국'''|2000 퀘일-스톡데일 티켓 슬로건}}
[[1936년 미국 대통령 선거|1936년 대선]]에서 [[공화당]] 후보 [[알프 랜던]]이 [[프랭클린 D. 루스벨트]]에게 압도적인 참패를 당하며 공화당은 4년간 뚜렷한 구심점 없이 분열된 채 차기 대선을 준비했다. 후보 경선은 3월 12일부터 5월 17일까지 진행되었는데, 전당대회 개막 시점까지 1,000명의 대의원 중 300명만이 특정 후보에게 서약한 상태였고, 대다수 대의원이 미결 상태로 전당대회까지 이어져 진짜 공화당 후보를 결정하는 장이 형성되었다.
[[공화당]] 경선은 민주당과 달리 시작 전부터 사실상 승부가 정해져 있었다. 현직 대통령인 [[댄 퀘일 (아메리칸 프린스)|댄 퀘일]]이 낮은 지지율에도 불구하고 당내 뚜렷한 대항마가 없는 상태에서 사실상 단독 후보로 경선에 임했다.


일부 당내 인사들 사이에서 퀘일의 재지명에 대한 회의적 시각이 존재했으나, 현지 대통령에 맞서 당내 경선에 도전하는 것 자체가 정치적으로 큰 부담을 수반하는 선택이었기에, 결국 이렇다 할 도전자 없이 퀘일이 압도적인 대의원 수를 확보하며 재지명되었다.
당시 공화당은 크게 두 가지 노선 갈등을 안고 있었다. 첫째는 '''[[뉴딜]] 정책에 대한 입장 차이'''였다. 뉴딜 전반에 강하게 반대하는 재정 보수파와, 일부 뉴딜 정책의 대중적 인기를 인정하고 유연하게 접근해야 한다는 온건파 사이의 갈등이 심했다. 둘째는 '''대외 정책 노선''' 문제였다. 유럽 전쟁에 대한 [[미국]]의 개입을 반대하는 고립주의 강경파와, [[영국]] 등 [[연합국]] 지원의 필요성을 인정하는 국제주의 세력 사이의 균열이 경선 내내 핵심 쟁점으로 작용했다.
====주요 후보====
* '''토머스 E. 듀이'''
[[미국|맨해튼]] 지방검사 출신의 듀이는 경선 초반 가장 강력한 후보로 거론되었다. 럭키 루치아노, 왁시 고든 등 뉴욕 마피아 거물들을 연이어 기소하고 유죄 판결로 이끌며 갱버스터라는 별명을 얻어 전국적 인지도를 얻은 인물이었다. 1938년 뉴욕주지사 선거에서 현직인 허버트 리먼에게 불과 1%p 차이로 패배하며 1940년 경선의 발판이 되기도 했다. 다만 38세라는 젊은 나이, 외교와 안보 분야에서의 경험 부재가 약점으로 지속적으로 거론되었고 특히 5월 이후 [[프랑스]]가 [[독일]]에 함락되면서 유럽 정세가 급박하게 전개되자, 듀이의 국가안보 이슈에 대한 이해가 피상적이라는 비판이 거세졌다.


퀘일은 [[1996년 미국 대통령 선거 (아메리칸 프린스)|1996년 대선]]에 이어 [[제임스 스톡데일 (아메리칸 프린스)|제임스 스톡데일]] 부통령을 부통령 후보로 지명했다. 다만 그가 매우 고령이라는 점이 지속해서 약점으로 지적되고 있다. 또한 전쟁 영웅이자 명예훈장 수훈자로서 상당한 존경을 받는 인물이지만, 정치에서의 대중 커뮤니케이션 능력에 대해서는 재임 4년 내내 물음표가 따라다녔다. 당 일각에서는 새로운 얼굴로의 교체 필요성이 제기되기도 했으나, 퀘일은 그냥 무시하고 지명을 선택했다.
* '''로버트 A. 태프트'''
[[미국|오하이오주]] 상원의원 태프는 당내 재정 보수파와 고립주의 강경파의 강력한 지지를 받고 있는 후보였다. 제27대 대통령인 [[윌리엄 하워드 태프드]]의 아들이기도 했고, '''Mr. Republica'''라고 불릴 만큼 당내 정통 보수파의 상징적인 인물이었다. [[뉴딜]] 비판과 연방 권한 축소, 강경한 고립주의 노선을 핵심 공약으로 내세우며 당내 주류 조직과 중립적인 정치인 대의원들 사이에서 두터운 지지를 받았다. 다만 대중적 인지도와 카리스마 면에서 쿠퍼는 물론이고 듀이에게도 뒤처진다는 평가를 받았다.
 
* '''게리 쿠퍼'''
[[미국|몬태나주]] 연방 상원의원으로 경선 초반부터 주요 후보군으로 거론된 인물이다. 앞서 언급된 듀이, 태프트와 함께 '''3강'''을 구축했다. 1936년 상원의원 당선 이후 외교위원회에서 유럽 정세에 관한 발언을 지속적으로 이어온 쿠퍼는, 1983년 [[뮌헨|뮌헨 협정]] 전후로 유럽 위기를 구체적으로 경고하는 발언들이 전국적으로 보도되면서 외교 전문가로 각인되어 있었다. 특히 [[아서 네빌 체임벌린|체임벌린]]의 유화 정책을 정면으로 비판하며 "협상이 아니라 시간만 벌어주는 것"이라고 지적한 상원 외교위 발언은 당시 AP통신을 통해 전국에 타전되며 광범위한 주목을 받았다. 외교관과 상원의원 경력을 통해 쌓인 실무 경험, 특정 당내 파벌에 얽히지 않은 중립적 이미지, 그리고 서부를 대표하는 인물이라는 상징성이 경선 초반부터 쿠퍼를 여타 후보들과 차별화시키는 요소로 작용했다.
 
* '''아서 반덴버그'''
[[미국|미시간주]] 상원의원 반덴버그는 경선 초반 후보군에 이름을 올렸으나 본인 스스로 적극적인 경선 운동을 펼치지 않는 소극적 태도를 일관되게 유지했다. 경선 전반에 걸쳐 듀이, 태프트, 쿠퍼와 함께 주요 후보로 거론되었으나, 직접 선거운동보다는 전당대회에서 교착 상태가 발생할 경우 절충 후보로 부상하기를 기다리는 전략을 취했다.
 
* 기타 후보군
[[허버트 후버]] 전 대통령이 재기를 노렸으나 1929년 대공황의 상징으로 각인된 이미지를 극복하지 못했다. [[미국|펜실베이니아]] 주지사 아서 제임스는 자국 주의 72표를 장악하는 지역 후보 역할을 했다. 뉴햄프셔 상원의원 스타일스 브리지스, 신문 발행인 프랭크 가넷 등도 후보군에 이름을 올렸다.
====예비선거 과정====
예비선거는 [[미국|뉴햄프셔]]를 시작으로 각 주에서 순차적으로 진행되었는데, 당시 공화당 대통령 예비선거는 현재와 달리 전당대회 대의원 배분에 미치는 영향이 제한적이었다. 대부분의 주에서 대의원은 예비선거가 아닌 주별 당 조직의 결정에 의해 선출되었으며, 서약한 대의원 비율이 낮았다.
 
초반 예비선거에서 [[토머스 E. 듀이 (프런티어)|듀이]]가 선두를 달렸다. [[미국|위스콘신]], [[미국|일리노이]], [[미국|뉴저지]] 등 주요 주에서 듀이가 우세를 보이며 경선 초반 분위기를 주도했다. [[로버트 A. 태프트|태프트]]는 오하이오 등 중서부 보수 텃밭에서 강세를 보였으나 동부에서는 약세였다. 쿠퍼는 태프트와 함께 중서부, 서부 주들을 중심으로 꾸준히 지지를 쌓아나갔다.
 
그러나 5월에 접어들며 상황이 급변했는데, 1940년 5월 [[독일|독일군]]이 [[프랑스]]와 저지대 국가들을 전격 침공하면서 유럽 전쟁이 돌연 대선의 핵심 이슈로 부상했다. 이 과정에서 듀이와 태프트가 국가안보 이슈에 취약하다는 인식이 급속히 확산되었다. 이런 상황에서 유럽 외교관 경험을 갖춘 쿠퍼에 대한 주목도가 급격히 올라갔다.
=====필라델피아 전당대회=====
1940년 6월 24일부터 28일까지 [[미국|펜실베이니아주 필라델피아]] 컨벤션홀에서 전당대회를 개최했다. 10명의 후보가 경쟁하는 구도였고, 1,000명 이상의 대의원이 집결했다.
 
전당대회는 처음에는 다소 지루하게 시작되었는데, 기조연설을 맡은 [[해럴드 스타센 (프런티어)|해럴드 스타센]] 미네소타 주지사<ref>향후 1984년 미국 대통령이 된다.</ref>의 연설은 언론으로부터 혹평을 받았다. 대의원 표를 끌어모으기 위한 로비 활동이 치열하게 전개되었다.
 
* '''1·2·3차 투표'''
1차 투표에서 [[토머스 E. 듀이 (프런티어)|듀이]]가 360표로 선두를 달렸다. 과반인 501표에는 크게 미치지 못했으나 초반 주도권을 장악했다. [[게리 쿠퍼 (프런티어)|쿠퍼]]가 189표로 2위를 기록했으며, 태프트는 3위권을 유지했다.
 
2차 투표에서 듀이가 소폭 상승했으나 여전히 과반에는 크게 못 미쳤고, 태프트도 지지 대의원을 추가로 끌어모았으나 2위인 쿠퍼와의 격차를 좁히는 데는 실패했다. 가장 주목할 점은 쿠퍼의 상승세였는데, 1차에서 180표에 불과했으나 3차 투표에서는 247표를 확보했다. 반면 듀이는 360표에서 315표까지 떨어진 상태였다.
 
* '''4차 투표'''
4차 투표부터 상황이 급변하기 시작했다. 듀이 지지 대의원들 사이에서 이탈이 시작되었는데, 유럽 전황이 악화되는 가운데 외교, 안보 경험이 부족한 듀이에 대한 회의감이 확산된 것이 주된 원인이었다. 태프트 역시 고립주의 강경 노선이 급박한 국제 정세와 맞지 않는다는 비판을 받으며 확장에 한계를 드러냈다.
 
절충 후보를 찾는 움직임이 서부와 중서부 주 대의원들을 중심으로 시작되었다. 경선 내내 2위를 유지하며 꾸준히 존재감을 드러내온 쿠퍼가 자연스러운 대안으로 떠올랐다. 외교관과 상원의원 경력을 통해 쌓인 실무 경험, 특정 당내 파벌에 얽히지 않은 중립적 이미지, 서부 출신이라는 지역적 상징성이 동시에 작용했다. 4차 투표에서 쿠퍼는 290표를 돌파하며 급격히 부상했고, 듀이를 역전해 1위가 되었다.
 
* '''5차 투표'''
듀이는 여전히 2위를 유지했으나 표가 지속적으로 이탈하면서 역전 가능성이 희박해졌다. 서부와 중서부 대의원들의 쿠퍼 지지 움직임이 눈덩이처럼 불어나는 가운데, [[아서 반덴버그|반덴버그 ]] 지지 대의원들도 대거 쿠퍼 쪽으로 선회했다. 반덴버그 본인도 이 시점에서 공개적으로 쿠퍼 지지를 선언하며 흐름을 가속화했다.
 
* '''6차 투표'''
6차 투표에서 쿠퍼가 과반을 확보하며 후보로 선출되었다. 뒤이어 듀이와 태프트 측 대의원들이 연쇄적으로 쿠퍼 지지로 전환하는 인사이동이 이루어졌고, 전당대회장은 쿠퍼를 지지하는 함성으로 가득찼다. 최종 6차 투표 결과는 쿠퍼 739표, 태프트 128표, 듀이 57표, 기타 76표였다.
 
최종 부통령 후보로는 [[미국|미시간주]] 상원의원 [[아서 반덴버그]]가 지명되었다.
===민주당===
===민주당===
{{인용문|'''Tomorrow Begins Today<br>미래는 오늘 시작된다'''|2000 케네디-브로 티켓 슬로건}}
[[민주당]]은 [[프랭클린 D. 루스벨트]]의 3선 출마 포기로 극도의 혼란 속에서 진행되었다. 민주당 내 권력 공백이 심화된 상태에서 루스벨트는 후계자 지명에 적극적으로 개입하지 않으면서 당내 혼란이 가중되었다.
[[댄 퀘일 행정부 (아메리칸 프린스)|퀘일 행정부]]의 낮은 지지율로 [[민주당]]은 이번 대선을 충분히 승리할 수 있는 선거라고 보았다. 민주당 내에서는 일찍부터 후보군에 대한 하마평이 무성했는데 가장 먼저, 그리고 가장 강력하게 부상한 인물이 [[존 F. 케네디 주니어 (아메리칸 프린스)|존 F. 케네디 주니어]]였다.
 
루스벨트 행정부에서 부통령을 지낸 [[존 낸스 가너]]는 루스벨트의 뉴딜 팽창 정책에 강하게 반발하며 이미 루스벨트와 공개적으로 불화를 드러낸 상태였다. 루스벨트의 불출마 선언은 가너를 비롯한 보수 민주당원들에게 당권 탈환의 기회로 인식되었으나, 동시에 진보파에게는 뉴딜 유산을 계승할 후보를 내세울 수 있는 기회이기도 했다.
====주요 후보====
* '''웬델 윌키'''
윌키는 자유주의 성향의 민주당원으로, 커먼웰스 앤 서던 전력회사 경영진 출신의 기업인이었다. 루스벨트의 [[뉴딜]] 정책, 특히 TVA가 자신의 회사를 압박하는 데 강한 반감을 품고 있었는데 마침 루스벨트가 불출마를 선언하면서 본래 국제주의 성향의 자유주의자였던 윌키는 민주당 내에서 FDR 이후의 대안 후보로 자연스럽게 부상했다.
 
* '''제임스 팔리'''
루스벨트의 전 선거 캠프 책임자이자 우정장관을 지낸 [[제임스 팔리|팔리]]는 당 조직 내에서 광범위한 인맥을 보유한 인물이었다. 그러나 루스벨트와의 관계가 틀어진 이후 독자적인 대선 도전을 준비해왔다. 뉴딜에 대해 루스벨트보다 온건한 입장을 취하는 중도 성향이었으며, 당 조직 전문가로서의 경험을 강점으로 내세웠다. 다만 [[가톨릭]] 신자라는 종교적 배경이 일부 [[개신교]] 주에서 불리하게 작용할 수 있다는 우려가 있었으며, 정책 이슈에 대한 깊이 있는 이해가 부족하다는 비판도 받았다.
 
* '''존 낸스 가너'''
[[미국|텍사스]] 출신의 보수파 가너는 루스벨트의 뉴딜 팽창 정책에 강하게 반발하며 이미 1939년 말부터 대선 도전을 공개적으로 준비해온 인물이었다. 남부 및 서부 보수 민주당원들의 지지를 바탕으로 경선에 임했으며 연방 지출 축소, 의회 독립성 회복, 뉴딜 일부 정책 철회를 핵심 공약으로 내세웠다. 그러나 루스벨트 지지층이 여전히 당내 다수를 차지하는 상황에서 가너의 반뉴딜 노선이 얼마나 광범위한 지지를 받을 수 있을지에 대한 회의적 시각이 많았다.
 
* '''헨리 A. 월리스'''
루스벨트 행정부의 농무장관으로 재직하며 미국 농업 정책의 핵심 설계자로 활약한 월러스는 당내 진보파의 강력한 지지를 받는 인물이었다. 뉴딜 유산의 충실한 계승자로 자처했으며, 농민과 노동자 계층 사이에서 탄탄한 지지 기반을 보유했다. 그러나 친[[소련]] 성향과 급진적 진보 노선이 남부 보수 민주당원들의 강한 반발을 사면서 당내 연합 구축에 어려움을 겪었다.
====시카고 전당대회====
민주당 전당대회는 1940년 7월 15일부터 18일까지 [[미국|일리노이주 시카고]] 스타디움에서 개최되었다. 전체 대의원 수는 1,093명이었고 후보 지명에 필요한 과반은 547표였다.
 
전당대회 개막 전부터 당내 분위기는 극도로 혼란스러웠다. 루스벨트의 불출마로 인한 구심점 상실이 각 계파 간 갈등으로 표면화되었다.
 
대통령 후보 투표는 7월 18일 시작되었는데, 팔리는 당 조직 인사들의 지지를, 가너는 남부 보수파의 지지를, 밀러드 타이딩스 상원의원은 반뉴딜 대안으로 일부 지지를 확보했다.
 
* '''1·2·3차 투표'''
1차 투표에서 [[웬델 윌키|윌키]]가 선두를 달렸으나 과반에는 크게 못 미쳤다. [[헨리 A. 월리스 (프런티어)|월리스]]가 2위, [[제임스 팔리|팔리]]가 3위, [[존 낸스 가너|존 낸스 가너]]가 4위를 기록했다. 어느 후보도 과반 확보가 불가능한 교착 상태가 형성되었다.
 
2·3차 투표에서도 교착 상태가 이어졌다. 윌키와 월러스 사이의 이념적 간극이 너무 커서 지지 대의원들이 상대방 후보 쪽으로 이동하기를 꺼렸다. 가너 지지 남부 대의원들은 윌키도 월러스도 받아들이기 어렵다는 입장을 고수했다.
 
* '''4·5차 투표'''
4차 투표에서 팔리가 사퇴를 선언하며 윌키 지지를 선언했다. 팔리의 지지 대의원들이 윌키에게 이동하면서 윌키가 과반에 근접하기 시작했다. 5차 투표에서 가너 지지 대의원 일부도 결국 윌키로 선회했다. 전당대회장의 분위기가 윌키 쪽으로 급격히 기울었다.
 
* '''6차 투표'''
6차 투표에서 윌키가 과반을 확보하며 민주당 대통령 후보로 지명되었다. 뒤이어 연쇄적인 대의원 이동이 이루어지며 최종적으로 압도적 다수의 지지가 윌키에게 집중되었다.
 
부통령 후보로는 켄터키주 출신 상원 원내대표 [[앨번 W. 바클리]]가 지명되었다. 남부 보수 민주당원들을 달래기 위한 인선으로 평가받았으나, 이미 균열이 시작된 당내 연합을 봉합하기에는 역부족이라는 시각이 지배적이었다.
==최종 후보==
===민주당: 웬델 윌키===
===공화당: 게리쿠퍼===
{| class="wikitable" style="width:100%; max-width:500px; margin:0 auto; background:#E81018; border:2px solid #E81018; color:#fff; text-align:center;"
|-
! colspan="2" style="font-size:1.25em; line-height:1.4; padding:10px 6px; background:#E81018; color:#fff;" |
1940년 미국 대통령 선거<br>공화당 전당대회 지명 후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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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style="width:50%; padding:7px 4px; background:#E81018; color:#fff;" | 대통령 후보 지명자
! style="width:50%; padding:7px 4px; background:#E81018; color:#fff;" | 부통령 후보 지명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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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colspan="2" style="padding:0; background:#fff; border:0; line-height:0;" | [[파일:쿠퍼 반덴버그 (프런티어).png|500px|cent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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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colspan="2" style="padding:0; background:#E81018; border:0;" |
{| style="width:100%; margin:0; background:#E81018; color:#fff; border:0; text-align:center;"
|-
! style="width:50%; padding:8px 4px; background:#E81018; color:#fff; border:0; border-right:1px solid #fff; vertical-align:middle;" | {{+2|게리 쿠퍼}}<br>몬태나주 연방 상원의원
! style="width:50%; padding:8px 4px; background:#E81018; color:#fff; border:0; vertical-align:middle;" | {{+2|아서 반덴버그}}<br>미시간주 연방 상원의원
|}
|}
 
=해럴드 스타센=
{{프런티어}}
{{역대 미국 대통령 (프런티어)}}
{| class="wikitable" style="width:100%; max-width:420px; border:2px solid #0d164a; font-size:10.5pt; float:right"
|-
! colspan="2" style="background-image:linear-gradient(to right, #0D1635, #0d164a 20%, #0d164a 80%, #0D1635); color:#fff" | 미합중국 제41대 대통령<br>{{글씨 크기|14|해럴드 스타센}}<br>Harold Stassen
|-
| colspan="2" | <div style="margin:-4.5px -9.0px">[[파일:해럴드 스타센 (프런티어).png|420px]]</div>
|-
! style="width:100px; background:#0d164a; color:#fff" | 본명
| 해럴드 에드워드 스타센<br>Harold Edward Stassen
|-
! rowspan="2" style="width:100px; background:#0d164a; color:#fff" | 출생
| [[1907년]] [[4월 13일]]
|-
| [[미국|미네소타 주 세인트폴]]
|-
! rowspan="2" style="width:100px; background:#0d164a; color:#fff" | 사망
| [[2001년]] [[3월 4일]] (향년 93세)
|-
| [[미국|미네소타 주]] 블루밍턴
|-
! rowspan="4" style="background:#0d164a; color:#fff" | 재임기간
| style="background:#F5F5F5" | 제N대 부통령
|-
| [[1974년]] [[12월 19일]] ~ [[1977년]] [[1월 20일]]
|-
| style="background:#F5F5F5" | 제33대 대통령
|-
| [[1981년]] [[1월 20일]] ~ [[1985년]] [[1월 20일]]
|-
! style="background:#0d164a; color:#fff" | 서명
| [[파일:해럴드 스타센 친필.svg|150px]]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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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colspan="2" | <div class="mw-customtoggle-JFK_Jr" style="text-align:center; color:#000; font-size:10.5pt"><div style="margin:-2px">'''[ 펼치기 · 접기 ]'''</div></div>
<div class="mw-collapsible mw-collapsed" id="mw-customcollapsible-JFK_Jr" style="border:1px solid transparent">
<div class="toccolours mw-collapsible-content" style="margin:0px -15px 0px; background:none; border:1px solid transparent; text-align:left">
{| style="width:calc(100% + 5px); margin-left:-2px; margin-right:-15px; margin-bottom:-13px; text-align:left; font-size:10.5pt"
|-
! style="width:100px; background:#0d164a; color:#fff" | 부모
| 아버지 윌리엄 앤드류 스타센<br>어머니 엘시 엠마 뮐러
|-
! style="width:100px; background:#0d164a; color:#fff" | 배우자
| 에스더 글루위<sup>(1912년생)</sup>
|-
! style="width:100px; background:#0d164a; color:#fff" | 자녀
| 장남 글렌 스타센<br>장남 [[프레드 트럼프 주니어]]<br>장녀 캐슬린 스타센
|-
! style="width:100px; background:#0d164a; color:#fff" | 학력
| [[미네소타 주립대학교]] 학사
|-
! style="width:100px; background:#0d164a; color:#fff" | 종교
| [[개신교]] <small>([[침례교]])</small>
|-
! style="width:100px; background:#0d164a; color:#fff" | 신체
| 191cm
|-
! style="width:100px; background:#0d164a; color:#fff" | 소속 정당
| {{공화당 (미국)}}
|-
|}
</div>
</div>
|}
{{목차}}
==개요==
[[미국]]의 제41대 [[미국 대통령|대통령]].
==약력==
* 1939. 제25대 [[미국|미네소타]] 주지사
* 1945. 미국 해군 태평양 함대 제3함대 참모
* 1949. 미네소타주 연방 상원의원 (1949.1.3. ~ 1974.8.9.)
* 1957. 미국 상원 외교위원회 위원장
* 1965. 미국 상원 공화당 원내대표
* 1974.12. '''제N대 [[미국|미국 부통령]]'''
* 1981.1. '''제41대 [[미국|미국 대통령]]'''
==생애==
===제N대 미국 부통령===
1974년 8월, [[리처드 닉슨]] 대통령이 [[닉슨게이트 (프런티어)|닉슨게이트]]로 사임하고 [[존 코널리 (프런티어)|존 코널리]] 부통령이 대통령직을 승계하자, 코널리에 의해 제39대 [[미국|미국 부통령]]으로 전격 지명되었다. 이후 12월 상·하원의 승인 청문회를 거쳐 공식적으로 취임했다.


케네디는 1994년 [[아메리칸 프린스|뉴욕주]] 상원의원 당선 직후 부친 [[존 F. 케네디]] 전 대통령으로부터 물려받은 압도적인 이름값과 대중적 인지도, 그리고 젊고 호감형인 이미지로 인해 당선 직후부터 차기 대권주자로 거론되어 왔다. 상원의원으로 활동하며 전국 순회 강연, 지역 당 조직과의 교류 등을 통해 민주당 내에서 가장 유력한 대권주자였다.
닉슨 사임 이후 극도로 혼란스럽던 워싱턴 정가에서 스타센의 부통령 지명은 신의 한 수라는 평가를 받았다. 26년간 상원의원으로 재직하며 쌓은 압도적인 인망과 경력 덕분에, 닉슨게이트 여파로 와해 직전이던 의회와의 관계를 빠르게 회복시켰기 때문. [[존 코널리 행정부 (프런티어)|코널리 행정부]] 내에서는 주로 내정 및 의회 협상, [[1차 석유 파동]]에 따른 경제 위기 수습을 총괄하는 '''실권형 부통령'''으로 활약했다.


케네디에 맞선 주요 경쟁자로는 [[아메리칸 프린스|뉴저지주]] 상원의원 [[빌 브래들리]], [[아메리칸 프린스|코네티컷주]] 상원의원 [[조 리버만 (아메리칸 프린스)|조 리버만]], 그리고 전 [[아메리칸 프린스|매사추세츠]] 주지사이자, [[1996년 미국 대통령 선거 (아메리칸 프린스)|1996년 미국 대통령 선거]] 후보인 [[마이클 듀카키스 (아메리칸 프린스)|마이클 듀카키스]]가 있었다.
그러나 1976년 미국 대통령 선거에서 닉슨 사임의 여파와 스태그플레이션 심화, 그리고 부동산 거물 출신 아웃사이더 포퓰리스트인 [[프레드 트럼프 (프런티어)|프레드 트럼프]]의 거센 바람을 막지 못하고 코널리-스타센 티켓은 패배하며 1977년 1월 부통령직에서 퇴임했다.
===1980년 미국 대통령 선거===
1977년 1월 부통령직에서 퇴임한 후 고향 [[미국|미네소타]]로 돌아가 정계 은퇴 절차를 밟는 듯했으나, 백의종군하며 [[공화당]] 내 중도합리파와 의회 온건파의 원로로 남아 현직 대통령인 [[프레드 트럼프 (프런티어)|프레드 트럼프]]의 독단적인 국정 운영을 강력하게 비판했다.


케네디는 아이오와 코커스, 뉴햄프셔 프라이머리를 포함한 초반 경선 일정에서 압도적인 득표율로 승리하며 사실상 경선을 조기에 종결시켰다. 슈퍼 화요일 이후 브래들리와 리버만은 잇따라 경선 중단을 선언했으며, 듀카키스 역시 뒤이어 완주를 포기했다. 민주당 전당대회에서 케네디는 사실상 만장일치에 가까운 지지로 대통령 후보 지명을 수락했다.
당시 프레드 트럼프 행정부는 무분별한 뉴욕식 부동산 개발주의, 친족 비리 스캔들, 그리고 1979년 [[주이란 미국 대사관 인질 사건]] 당시의 대응 미숙으로 민심을 크게 잃은 상태였다. 이에 정계 기득권과 대중 모두가 아웃사이더 포퓰리즘에 지쳐가자, 당내 중도파와 상원 동료들의 삼고초려 끝에 1980년 1월 대선 출마를 전격 선언한다.


케니디는 부통령 후보로 [[아메리칸 프린스|루이지애나주]] 연방 상원의원인 [[존 브로 (아메리칸 프린스)|존 브로]]를 지명했다. [[아메리칸 프린스|뉴욕]] 상원의원이자 북동부, 도심 지역 기반의 진보적 이미지가 강한 케네디와 달리, 브로는 딥사우스 출신의 중도실용주의 협상가로서 오랜 상원 경력을 통해 초당적 조정 능력을 인정받아온 인물이다. 이 지명은 케네디의 상대적 약점으로 지적되던 남부 지역 기반과 국정 경험 부족을 동시에 보완하려는 전략으로 해석되었다.
당내 경선에서는 26년 상원 외교위원장 및 부통령 시절 구축한 막강한 의회 조직망과 미네소타 농가 지지표를 바탕으로 [[하워드 베이커]], [[존 B. 앤더슨]] 등 우파 신진 후보들을 가볍게 제압하고 공화당 대선 후보로 지명되었다. 러닝메이트로는 당내 보수파를 다독이기 위해 [[미국|테네시]] 출신의 상원 원내대표 하워드 베이커를 지명했다.
 
본선에서는 현직 대통령인 프레드 트럼프와 정면으로 맞붙었다. 트럼프 캠프 측은 스타센을 "워싱턴 늪지대의 늙은 구렁이", "빌딩 한 채 못 지어본 무능한 관료"라며 고령과 기득권 이미지를 집중 공격했다.<ref>정작 프레드 트럼프 본인도 1905년생이라 당시 만 75세로 스타센보다 2살이나 많았다(...) 전형적인 내로남불 공세였던 셈.</ref> 이에 스타센은 "국가는 법과 제도로 운영되는 공공체"라는 논리로 응수하며, 트럼프 행정부의 최대 약점인 불안정성과 품격 부재를 파고들었다.
 
10월 28일 열린 대선 TV 토론회에서 프레드 트럼프가 "평생 의회 의자에 앉아 세금이나 까먹던 사람"이라고 몰아붙이자, 스타센은 상원 26년의 내공으로 자비롭게 허허 웃으며 "당신은 건물을 올려봤을지는 몰라도 이 나라의 법과 제도를 무너뜨리고 있다. 국가는 콘크리트가 아니라 국민의 신뢰로 세워지는 것"이라는 말을 남기며 승기를 완전히 잡아챘다.
 
결국 11월 '''본선에서 51.7%의 득표율과 선거인단 357석을 확보하며, 181석에 그친 프레드 트럼프를 꺾고 제41대 [[미국|미국 대통령]]으로 당선'''되었다.
 
이 승리로 스타센은 당선 당시 기준 역대 최고령 대통령(만 73세) 기록을 세움과 동시에, 30대 최연소 주지사로 시작해 70대에 마침내 대통령 자리에 오르는 역대급 '''대기만성형 정치 서사'''를 완성했다.
===제41대 미국 대통령===
1981년 1월 20일, 당선 당시 기준 '''역대 최고령(만 73세)의 나이<ref>이후 이 기록은 프레드 트럼프에 의해 다시 갱신된다.</ref>로 제41대 미국 대통령에 취임'''했다. 취임 즉시 [[프레드 트럼프 (프런티어)|프레드 트럼프]] 시절 거친 언사와 독단적 행보로 균열이 갔던 NATO 등 전통 우방국과의 관계를 즉각 복원하고 [[미국|이란 인질 사건]]의 여파를 수습했다. 경제적으로는 스태그플레이션을 잡기 위해 [[폴 볼커]] 연준 의장의 고금리 긴축 정책을 전폭 지원했다. 경기 후퇴와 실업률 상승이라는 진통을 겪었으나, [[민주당]]이 다수당이던 하원과의 초당적 협상을 통해 세제 개편안과 긴축 예산안을 통과시키며 의회정치의 마스터다운 면모를 과시했다.
 
1983년 하반기부터 경제가 회복세로 돌아서자 스타센은 "긴축의 결실이 맺히고 있으며, 미국은 다시 법치와 안정을 되찾았다"며 재선 도전에 나섰다. 상대는 4년 전 낙선 후 재정비하여 칼을 갈아온 프레드 트럼프였다. 트럼프 측은 긴축 정책과 고금리로 타격을 입은 [[미국|러스트 벨트]] 노동자층과 중서부 농민층의 분노를 집요하게 파고들었다. 트럼프는 스타센을 "관료주의로 국민의 피를 말린 노인"이라 맹비난하며 과감한 세금 감면과 관세 부과를 약속했다. 스타센은 만 77세의 초고령에 접어들며 유세 과정에서 다소 지친 기색을 보였고, 반면 프레드 트럼프는 2살이 더 많았음에도 특유의 직설적 화법으로 대중의 분노 표심을 단숨에 흡수했다.
 
개표 결과, '''득표율 48.8% 대 49.6%(0.8%p 차), 선거인단 226표 대 312표'''로 프레드 트럼프에게 정권 탈환을 허용하며 패배했다. 긴축 정책으로 타격을 입었던 [[미국|오하이오]], [[미국|펜실베이니아]], [[미국|미시간]] 등 핵심 러스트 벨트 스윙스테이트를 접전으로 빼앗긴 것이 결정적이었다. 이로써 스타센은 단임으로 백악관을 떠나게 되었고, 프레드 트럼프는 미국 역사상 두 번째로 징검다리 재선이라는 기록을 세우게 되었다. 스타센은 결과에 깔끔하게 승복한 뒤, 1985년 1월 20일 정권을 이양하고 8년간의 백악관 생활을 마무리하며 [[미국|미네소타]]로 완전히 귀향했다.
==평가==
===긍정적 평가===
{{인용문|해럴드 스타센은 법치주의와 의회정치라는 미국 헌정사의 위대한 유산을 온몸으로 체화한 인물이었다. 정치적 이념과 정파가 달랐을지라도, 그가 백악관에 앉아 있는 동안 미국인들은 국가의 행정 시스템이 절제되고 정직하게 운영되고 있다는 깊은 신뢰를 가질 수 있었다.|2001년, [[미국|조 바이든]]}}
26년 상원 의정 경험과 부통령 경력을 바탕으로 [[민주당]]이 다수당인 의회와 끊임없이 소통했으며, 건전한 견제와 균형이라는 미국 헌정사의 전통을 되살려냈다. 외교적으로도 상원 외교위원장 출신답게, 전임 행정부 시절 균열이 갔던 [[NATO]] 등 서방 동맹국과의 관계를 즉각 수습했다. 절제된 정통 외교 노선을 채택하여 냉전기 초강대국으로서 [[미국]]의 도덕적 지도력을 다시 올려놓았다. 또한 1970년대를 짓눌렀던 [[스태그플레이션]]을 잡기 위해 [[미국|폴 볼커]] 연준 의장의 고금리 긴축 정책을 전폭 지원하여, 임기 후반 [[인플레이션]]을 잡고 물가를 안정시키는 뼈대를 완성했다.
===부정적 평가===
{{인용문|스타센 대통령은 정치가 숫자와 수식으로만 움직인다고 믿은 오만한 엘리트였다. 인플레이션을 잡았다는 통계표를 들고 자화자찬하는 동안 공장이 문을 닫고 길거리로 쫓겨난 중서부 주민들의 절규를 그는 전혀 듣지 못했다.|1992년, [[미국|팻 뷰캐넌]]}}
{{인용문|스타센은 자신이 '국정의 조타수'라고 생각했지만, 정작 그 배가 어디로 가는지도 모른 채 노만 저었던 사람이다. 결과적으로 그는 미국을 안정시킨 것이 아니라, 정체시키고 퇴보시켰다.|2004년, [[미국|폴 크루구먼]]}}
고금리 긴축 정책의 여파가 노동자층과 농민층에게 집중되며 [[미국|러스트 벨트]]의 외면을 자초했다는 지적이 따른다. 지표상으로는 1983년 이후 경제가 회복세에 들어섰으나, 제조업 몰락으로 타격을 입은 [[미국|오하이오]], [[미국|펜실베이니아]] 등 러스트 벨트 주민들의 삶은 피폐해졌고 이들의 분노를 제대로 보살피지 못했다. 또한 [[프레드 트럼프 (프런티어)|프레드 트럼프]]의 직설적이고 자극적인 선동 정치에 대해 스타센은 지나치게 신사적이고 고전적인 원론으로만 대응했다. 미디어 환경이 급변하던 1980년대에 노련한 의회주의자의 고지식함은 대중에게 변화에 뒤처진 늙은 관료로 비쳐지는 역효과를 낳았다. 결국 스태그플레이션 진화라는 고통스러운 악역을 맡아 국정을 정상화해 놓았으나, 정작 그 결실과 열매는 [[1984년 미국 대통령 선거 (프런티어)|1984년 대선]]에서 프레드 트럼프에게 다시 바치게 되면서 포퓰리즘 정권의 잠시 동안의 쉼표 역할만 하고 정권을 넘겨준 단임 대통령이라는 한계를 남겼다.
==기타==
* 1938년 만 31세의 나이로 [[미국|미네소타]] 주지사에 당선되었는데, 이는 미국 역사상 최연소 주지사 당선 기록이며 현재까지도 깨지지 않고 있다. 젊은 나이에 뛰어난 행정 능력과 카리스마로 당내 기득권을 꺾고 당선되어 30대 초반에 이미 [[공화당]]의 차기 대권주자로 꼽혔다. 물론 그는 최고령 미국 대통령 중 한명이 되었다.
* 주지사 3선을 달성하며 승승장구하던 1943년, [[제2차 세계 대전]]이 한창이자 "청년들이 전선에서 피를 흘리는데 안락하게 관사에 머물 수 없다"며 '''주지사직을 전격 사임하고 해군에 자원입대'''했다. 태평양 전선에서 윌리엄 홀시 제독의 참모로 참전하여 공훈을 세웠고, 태평양 참전 경력은 훗날 상원 외교위원장 시절과 1980년 대선 당시 프레드 트럼프의 "군대 근처에도 안 가본 군필 미필 논란"을 정면으로 격파하는 강력한 무기가 되었다.
* 프로필 사진을 보면 머리카락이 매우 부자연스러운 것을 확인할 수 있는데, 탈모로 인해 가발을 착용했다.
==선거 이력==
=미국 대통령=
{{역대 미국 대통령 (프런티어)}}
{| class="wikitable" style="max-width: 420px; width: 100%; float: right; border: 2px solid #0D164A; text-align: left"
|-
! colspan="2" style="background-image: linear-gradient(90deg, #0D1635, #0D164A 20%, #0D164A 80%, #0D1635); color: #fff" | [[파일:Flag of the President of the United States.svg|60px]]<br>{{large|미합중국 대통령}}<br>President of the United States
|-
| colspan="2" style="padding: 0; width: 100%;" | [[파일:폴 라이언 (프런티어).png|class=fullImage|100%]]
|-
! style="width: 25%; background: #0D164A; color: #fff" | 현직
| [[폴 라이언 (프런티어)|폴 라이언]] <sub>/ 제49대</sub>
|-
! style="background: #0D164A; color: #fff" | 취임일
| [[2020년]] [[1월 20일]]
|-
! style="background: #0D164A; color: #fff" | 소속 정당
| {{공화당 (미국)}}
|-
! style="background: #0D164A; color: #fff" | 소재지
| [[미국|백악관]]
|-
|}
{{목차}}
{{목차}}
==개요==
[[미국]]의 국가원수이자 정부수반으로, 미국 헌법에 따라 미국의 행정권을 총괄하며, [[미국|미군]]의 총사령관이자 통수권자로서 미군을 통솔 및 통수한다. 공식명칭은 President of the United States이다.
==역대 대통령==
=한나라당=
{| class="wikitable" style="max-width: 420px; width: 100%; text-align: left; font-size: 10.5pt; border: 2px solid #009ee3; float: right;"
| colspan="2" style="text-align: center; height: 200px;" | [[파일:한나라 세로.png|250px]]
|-
! colspan="2" style="background-image: linear-gradient(to right, #009ee3, #009ee3 20%, #0b318f 80%, #0b318f); color: #fff;" | 한나라당
|-
! style="width: 125px; background: #F5F5F5; color: #009ee3;" | 영문 명칭
| Hannara Party<br>Grand National Party
|-
! style="width: 125px; background: #F5F5F5; color: #009ee3;" | 한문 명칭
| 한나라黨
|-
! style="background: #F5F5F5; color: #009ee3;" | 슬로건
| '''{{글씨 색|#009ee3|Salus populi suprema lex esto.<br>국민의 안녕이 최고의 법이 되어야 한다.}}'''
|-
! style="background: #F5F5F5; color: #009ee3;" | 등록연월일
| 2025년 3월 1일
|-
! rowspan="2" style="background: #F5F5F5; color: #009ee3;" | 사무소 소재지
| <div style="margin:-4.5px -9.0px">{{#multimaps: 37.530299,126.919577 | height = 150px | zoom = 15}}</div>
|-
| 서울특별시 영등포구 국회대로 786, 5~8층 (여의도동, B&B타워)
|-
! style="background: #F5F5F5; color: #009ee3;" | 당대표
| [[백강혁 ()|백강혁]]
|-
! style="background: #F5F5F5; color: #009ee3;" | 원내대표
|
|-
! style="background: #F5F5F5; color: #009ee3;" | 사무총장
|
|-
! style="background: #F5F5F5; color: #009ee3;" | 정책위의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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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요==
[[대한민국]]의 제3지대 중도정당. 제n대 국회의 제3당이다.
[[2024년 윤석열 내각 의료대란]]으로 서울 oo병원의 권역외상센터장인 [[백강혁]] 주도로 창당되었으며, [[김동연]]의 [[새로운물결]], [[조정훈]]의 [[시대전환]], 그리고 [[네이버]] CEO 출신의 [[한성숙]]과 [[최휘영]]을 영입하면서 선거 직접 급속도로 세를 불렸다.
==창당 배경==
한나라당 창당의 직접적 배경은 [[윤석열 내각]]의 누적된 복합적인 국정 위기였다. 윤석열 내각에서의 의료 시스템 붕괴는 가장 핵심적인 쟁점이었는데, 전공의 이탈과 지방 의료 공백의 장기화, 응급·외상 의료 체계의 사실상 마비 상태가 수년간 지속되었음에도 내각이 실효성 있는 대응을 내놓지 못하였다. 이 과정에서 00병원 권역외상센터장으로 이름을 알린 [[백강혁]]이 의료 현장의 구조적 문제를 지속적으로 공개 비판하며 전국적 주목을 받았다.
여기에 경제 위기와 물가 폭등이 겹쳤다. 글로벌 공급망 불안과 고환율이 맞물리며 서민 가계의 실질 구매력이 급격히 하락했고, 정부의 물가 안정 대책은 실효성 논란에 휩싸였다. 공공요금 인상, 식료품 가격 상승이 연쇄적으로 이어지며 민심 이반이 가속화되었다. [[민주당]]과 [[한국경제당]]은 이 위기 국면에서 근본적 해법을 제시하지 못하였다는 비판을 받고 있었다.
백강혁 교수는 오랜 기간 정치 참여 의사를 공개적으로 부정해왔다. 그러나 2024년 하반기부터 의료 붕괴 문제가 걷잡을 수 없이 악화되는 상황에서 그의 입장이 변하기 시작했는데, 측근들에 따르면 백강혁은 "현장에서 할 수 있는 것은 다 했다. 이제 시스템 자체를 바꾸지 않으면 아무것도 바뀌지 않는다"는 판단에 이르렀다고 전해졌다.
2025년 초 복수의 정치권 인사들이 영입 제안을 해왔으나 백강혁은 기성 정당 합류를 거절하며 "기존 정당의 문법으로는 기존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는 이유로, 독자 창당 결정은 2025년 2월 중순 외부에 처음 알려졌으며 정치권 안팎에 상당한 파장을 일으켰다.
==성향==
[[대한민국]]의 중도개혁보수 정당이다. 전반적으로는 한국 정치 지형 내 보수에서 중도, 그리고 일부 개혁적 중도진보 인사들까지 아우르는 포괄정당적 성격을 일부 지닌다.
양당제 특성상 세간에는 [[한국경제당]]에 비해 '온건한 보수 정당' 내지 '개혁보수 정당'으로 알려져 있으나, 이 당의 정치 성향을 하나로 딱 잘라 규정하기에는 무리가 있다. 창당 배경 자체가 기성 보수<ref>[[한국경제당]]</ref>와 기성 진보<ref>[[민주당]]</ref> 양측 모두에 대한 환멸에서 비롯된 만큼, 특정 이념 계열에 귀속되기보다 '이념보다 문제 해결'을 전면에 내세우는 실용주의 노선을 고수하고 있다. 당 차원에서 스스로를 '보수정당'으로 규정하는 것에도 신중한 입장이며, 지도부 인사들이 일관되게 "좌우 논쟁보다 작동하는 나라가 먼저"라는 메시지를 발신해오고 있다.
그럼에도 정강·정책의 전반적인 결을 살펴보면 한미동맹 강화, 원전 유지, 수능 중심 입시, 재정 건전성 중시 등 전통적 보수 가치에 가까운 정책들이 핵심 축을 이루고 있어, 중도개혁보수로 분류함이 적절하다. 다만 공공의료 국가책임제와 비정규직 보호 강화, 플랫폼 노동자 권리 보장, 국민소환제 도입 등 진보 색채가 있는 정책들도 상당수 포함하고 있어, 단순한 우파 정당으로 규정하기도 어렵다.
타국의 정당들과 비교하면 [[프랑스]]의 [[앙마르슈]](현 르네상스) 창당 초기, [[독일]]의 [[자유민주당]](FDP) 일부 노선, [[일본 유신회]]의 개혁보수 성향 등과 부분적으로 유사하다는 평가가 있다. 국내 정치 지형에서는 한국경제당보다 진보적이고, 민주당보다는 보수적인 위치에 서 있다.

2026년 8월 23일 (일) 14:51 기준 최신판

1940년 미국 대통령 선거

1940년 미국 대통령 선거
2000 United States presidential election
윌키 52인 (14.9%)
(85.1%) 452인 쿠퍼
1936년 11월 3일
1936년 대선
1940년 11월 5일
1940년 대선
1944년 11월 7일
1944년 대선
선거일시 1940년 11월 5일
투표율 62.5% ▲ 5.6%p
선거 결과
후보 민주당
공화당
홈스테이트 윌키 뉴욕
바클리 켄터키
쿠퍼 몬태나
반덴버그 미시간
승리 주 8 42 + D.C.
선거인단
79인 452인
전국 득표
19,329,606
38.7%
30,332,082
60.8%
당선자
공화당
게리 쿠퍼

개요

1940년 11월 5일 치러진 미국의 대통령 선거. 공화당의 대통령 후보 게리 쿠퍼와 부통령 후보 아서 반덴버그민주당의 대통령 후보 웬델 윌키와 부통령 앨번 W. 바클리를 꺾고 미국의 제33대 대통령과 제33대 부통령으로 선출되었다.

1932년 미국 대통령 선거 이후 다시 8년만에 공화당 정권이 들어선 선거이며, 제2차 세계 대전 시기와 맞물려 세계 대전에도 큰 영향을 미쳤다.

배경

경선

공화당

1936년 대선에서 공화당 후보 알프 랜던프랭클린 D. 루스벨트에게 압도적인 참패를 당하며 공화당은 4년간 뚜렷한 구심점 없이 분열된 채 차기 대선을 준비했다. 후보 경선은 3월 12일부터 5월 17일까지 진행되었는데, 전당대회 개막 시점까지 1,000명의 대의원 중 300명만이 특정 후보에게 서약한 상태였고, 대다수 대의원이 미결 상태로 전당대회까지 이어져 진짜 공화당 후보를 결정하는 장이 형성되었다.

당시 공화당은 크게 두 가지 노선 갈등을 안고 있었다. 첫째는 뉴딜 정책에 대한 입장 차이였다. 뉴딜 전반에 강하게 반대하는 재정 보수파와, 일부 뉴딜 정책의 대중적 인기를 인정하고 유연하게 접근해야 한다는 온건파 사이의 갈등이 심했다. 둘째는 대외 정책 노선 문제였다. 유럽 전쟁에 대한 미국의 개입을 반대하는 고립주의 강경파와, 영국연합국 지원의 필요성을 인정하는 국제주의 세력 사이의 균열이 경선 내내 핵심 쟁점으로 작용했다.

주요 후보

  • 토머스 E. 듀이

맨해튼 지방검사 출신의 듀이는 경선 초반 가장 강력한 후보로 거론되었다. 럭키 루치아노, 왁시 고든 등 뉴욕 마피아 거물들을 연이어 기소하고 유죄 판결로 이끌며 갱버스터라는 별명을 얻어 전국적 인지도를 얻은 인물이었다. 1938년 뉴욕주지사 선거에서 현직인 허버트 리먼에게 불과 1%p 차이로 패배하며 1940년 경선의 발판이 되기도 했다. 다만 38세라는 젊은 나이, 외교와 안보 분야에서의 경험 부재가 약점으로 지속적으로 거론되었고 특히 5월 이후 프랑스독일에 함락되면서 유럽 정세가 급박하게 전개되자, 듀이의 국가안보 이슈에 대한 이해가 피상적이라는 비판이 거세졌다.

  • 로버트 A. 태프트

오하이오주 상원의원 태프는 당내 재정 보수파와 고립주의 강경파의 강력한 지지를 받고 있는 후보였다. 제27대 대통령인 윌리엄 하워드 태프드의 아들이기도 했고, Mr. Republica라고 불릴 만큼 당내 정통 보수파의 상징적인 인물이었다. 뉴딜 비판과 연방 권한 축소, 강경한 고립주의 노선을 핵심 공약으로 내세우며 당내 주류 조직과 중립적인 정치인 대의원들 사이에서 두터운 지지를 받았다. 다만 대중적 인지도와 카리스마 면에서 쿠퍼는 물론이고 듀이에게도 뒤처진다는 평가를 받았다.

  • 게리 쿠퍼

몬태나주 연방 상원의원으로 경선 초반부터 주요 후보군으로 거론된 인물이다. 앞서 언급된 듀이, 태프트와 함께 3강을 구축했다. 1936년 상원의원 당선 이후 외교위원회에서 유럽 정세에 관한 발언을 지속적으로 이어온 쿠퍼는, 1983년 뮌헨 협정 전후로 유럽 위기를 구체적으로 경고하는 발언들이 전국적으로 보도되면서 외교 전문가로 각인되어 있었다. 특히 체임벌린의 유화 정책을 정면으로 비판하며 "협상이 아니라 시간만 벌어주는 것"이라고 지적한 상원 외교위 발언은 당시 AP통신을 통해 전국에 타전되며 광범위한 주목을 받았다. 외교관과 상원의원 경력을 통해 쌓인 실무 경험, 특정 당내 파벌에 얽히지 않은 중립적 이미지, 그리고 서부를 대표하는 인물이라는 상징성이 경선 초반부터 쿠퍼를 여타 후보들과 차별화시키는 요소로 작용했다.

  • 아서 반덴버그

미시간주 상원의원 반덴버그는 경선 초반 후보군에 이름을 올렸으나 본인 스스로 적극적인 경선 운동을 펼치지 않는 소극적 태도를 일관되게 유지했다. 경선 전반에 걸쳐 듀이, 태프트, 쿠퍼와 함께 주요 후보로 거론되었으나, 직접 선거운동보다는 전당대회에서 교착 상태가 발생할 경우 절충 후보로 부상하기를 기다리는 전략을 취했다.

  • 기타 후보군

허버트 후버 전 대통령이 재기를 노렸으나 1929년 대공황의 상징으로 각인된 이미지를 극복하지 못했다. 펜실베이니아 주지사 아서 제임스는 자국 주의 72표를 장악하는 지역 후보 역할을 했다. 뉴햄프셔 상원의원 스타일스 브리지스, 신문 발행인 프랭크 가넷 등도 후보군에 이름을 올렸다.

예비선거 과정

예비선거는 뉴햄프셔를 시작으로 각 주에서 순차적으로 진행되었는데, 당시 공화당 대통령 예비선거는 현재와 달리 전당대회 대의원 배분에 미치는 영향이 제한적이었다. 대부분의 주에서 대의원은 예비선거가 아닌 주별 당 조직의 결정에 의해 선출되었으며, 서약한 대의원 비율이 낮았다.

초반 예비선거에서 듀이가 선두를 달렸다. 위스콘신, 일리노이, 뉴저지 등 주요 주에서 듀이가 우세를 보이며 경선 초반 분위기를 주도했다. 태프트는 오하이오 등 중서부 보수 텃밭에서 강세를 보였으나 동부에서는 약세였다. 쿠퍼는 태프트와 함께 중서부, 서부 주들을 중심으로 꾸준히 지지를 쌓아나갔다.

그러나 5월에 접어들며 상황이 급변했는데, 1940년 5월 독일군프랑스와 저지대 국가들을 전격 침공하면서 유럽 전쟁이 돌연 대선의 핵심 이슈로 부상했다. 이 과정에서 듀이와 태프트가 국가안보 이슈에 취약하다는 인식이 급속히 확산되었다. 이런 상황에서 유럽 외교관 경험을 갖춘 쿠퍼에 대한 주목도가 급격히 올라갔다.

필라델피아 전당대회

1940년 6월 24일부터 28일까지 펜실베이니아주 필라델피아 컨벤션홀에서 전당대회를 개최했다. 10명의 후보가 경쟁하는 구도였고, 1,000명 이상의 대의원이 집결했다.

전당대회는 처음에는 다소 지루하게 시작되었는데, 기조연설을 맡은 해럴드 스타센 미네소타 주지사[1]의 연설은 언론으로부터 혹평을 받았다. 대의원 표를 끌어모으기 위한 로비 활동이 치열하게 전개되었다.

  • 1·2·3차 투표

1차 투표에서 듀이가 360표로 선두를 달렸다. 과반인 501표에는 크게 미치지 못했으나 초반 주도권을 장악했다. 쿠퍼가 189표로 2위를 기록했으며, 태프트는 3위권을 유지했다.

2차 투표에서 듀이가 소폭 상승했으나 여전히 과반에는 크게 못 미쳤고, 태프트도 지지 대의원을 추가로 끌어모았으나 2위인 쿠퍼와의 격차를 좁히는 데는 실패했다. 가장 주목할 점은 쿠퍼의 상승세였는데, 1차에서 180표에 불과했으나 3차 투표에서는 247표를 확보했다. 반면 듀이는 360표에서 315표까지 떨어진 상태였다.

  • 4차 투표

4차 투표부터 상황이 급변하기 시작했다. 듀이 지지 대의원들 사이에서 이탈이 시작되었는데, 유럽 전황이 악화되는 가운데 외교, 안보 경험이 부족한 듀이에 대한 회의감이 확산된 것이 주된 원인이었다. 태프트 역시 고립주의 강경 노선이 급박한 국제 정세와 맞지 않는다는 비판을 받으며 확장에 한계를 드러냈다.

절충 후보를 찾는 움직임이 서부와 중서부 주 대의원들을 중심으로 시작되었다. 경선 내내 2위를 유지하며 꾸준히 존재감을 드러내온 쿠퍼가 자연스러운 대안으로 떠올랐다. 외교관과 상원의원 경력을 통해 쌓인 실무 경험, 특정 당내 파벌에 얽히지 않은 중립적 이미지, 서부 출신이라는 지역적 상징성이 동시에 작용했다. 4차 투표에서 쿠퍼는 290표를 돌파하며 급격히 부상했고, 듀이를 역전해 1위가 되었다.

  • 5차 투표

듀이는 여전히 2위를 유지했으나 표가 지속적으로 이탈하면서 역전 가능성이 희박해졌다. 서부와 중서부 대의원들의 쿠퍼 지지 움직임이 눈덩이처럼 불어나는 가운데, 반덴버그 지지 대의원들도 대거 쿠퍼 쪽으로 선회했다. 반덴버그 본인도 이 시점에서 공개적으로 쿠퍼 지지를 선언하며 흐름을 가속화했다.

  • 6차 투표

6차 투표에서 쿠퍼가 과반을 확보하며 후보로 선출되었다. 뒤이어 듀이와 태프트 측 대의원들이 연쇄적으로 쿠퍼 지지로 전환하는 인사이동이 이루어졌고, 전당대회장은 쿠퍼를 지지하는 함성으로 가득찼다. 최종 6차 투표 결과는 쿠퍼 739표, 태프트 128표, 듀이 57표, 기타 76표였다.

최종 부통령 후보로는 미시간주 상원의원 아서 반덴버그가 지명되었다.

민주당

민주당프랭클린 D. 루스벨트의 3선 출마 포기로 극도의 혼란 속에서 진행되었다. 민주당 내 권력 공백이 심화된 상태에서 루스벨트는 후계자 지명에 적극적으로 개입하지 않으면서 당내 혼란이 가중되었다.

루스벨트 행정부에서 부통령을 지낸 존 낸스 가너는 루스벨트의 뉴딜 팽창 정책에 강하게 반발하며 이미 루스벨트와 공개적으로 불화를 드러낸 상태였다. 루스벨트의 불출마 선언은 가너를 비롯한 보수 민주당원들에게 당권 탈환의 기회로 인식되었으나, 동시에 진보파에게는 뉴딜 유산을 계승할 후보를 내세울 수 있는 기회이기도 했다.

주요 후보

  • 웬델 윌키

윌키는 자유주의 성향의 민주당원으로, 커먼웰스 앤 서던 전력회사 경영진 출신의 기업인이었다. 루스벨트의 뉴딜 정책, 특히 TVA가 자신의 회사를 압박하는 데 강한 반감을 품고 있었는데 마침 루스벨트가 불출마를 선언하면서 본래 국제주의 성향의 자유주의자였던 윌키는 민주당 내에서 FDR 이후의 대안 후보로 자연스럽게 부상했다.

  • 제임스 팔리

루스벨트의 전 선거 캠프 책임자이자 우정장관을 지낸 팔리는 당 조직 내에서 광범위한 인맥을 보유한 인물이었다. 그러나 루스벨트와의 관계가 틀어진 이후 독자적인 대선 도전을 준비해왔다. 뉴딜에 대해 루스벨트보다 온건한 입장을 취하는 중도 성향이었으며, 당 조직 전문가로서의 경험을 강점으로 내세웠다. 다만 가톨릭 신자라는 종교적 배경이 일부 개신교 주에서 불리하게 작용할 수 있다는 우려가 있었으며, 정책 이슈에 대한 깊이 있는 이해가 부족하다는 비판도 받았다.

  • 존 낸스 가너

텍사스 출신의 보수파 가너는 루스벨트의 뉴딜 팽창 정책에 강하게 반발하며 이미 1939년 말부터 대선 도전을 공개적으로 준비해온 인물이었다. 남부 및 서부 보수 민주당원들의 지지를 바탕으로 경선에 임했으며 연방 지출 축소, 의회 독립성 회복, 뉴딜 일부 정책 철회를 핵심 공약으로 내세웠다. 그러나 루스벨트 지지층이 여전히 당내 다수를 차지하는 상황에서 가너의 반뉴딜 노선이 얼마나 광범위한 지지를 받을 수 있을지에 대한 회의적 시각이 많았다.

  • 헨리 A. 월리스

루스벨트 행정부의 농무장관으로 재직하며 미국 농업 정책의 핵심 설계자로 활약한 월러스는 당내 진보파의 강력한 지지를 받는 인물이었다. 뉴딜 유산의 충실한 계승자로 자처했으며, 농민과 노동자 계층 사이에서 탄탄한 지지 기반을 보유했다. 그러나 친소련 성향과 급진적 진보 노선이 남부 보수 민주당원들의 강한 반발을 사면서 당내 연합 구축에 어려움을 겪었다.

시카고 전당대회

민주당 전당대회는 1940년 7월 15일부터 18일까지 일리노이주 시카고 스타디움에서 개최되었다. 전체 대의원 수는 1,093명이었고 후보 지명에 필요한 과반은 547표였다.

전당대회 개막 전부터 당내 분위기는 극도로 혼란스러웠다. 루스벨트의 불출마로 인한 구심점 상실이 각 계파 간 갈등으로 표면화되었다.

대통령 후보 투표는 7월 18일 시작되었는데, 팔리는 당 조직 인사들의 지지를, 가너는 남부 보수파의 지지를, 밀러드 타이딩스 상원의원은 반뉴딜 대안으로 일부 지지를 확보했다.

  • 1·2·3차 투표

1차 투표에서 윌키가 선두를 달렸으나 과반에는 크게 못 미쳤다. 월리스가 2위, 팔리가 3위, 존 낸스 가너가 4위를 기록했다. 어느 후보도 과반 확보가 불가능한 교착 상태가 형성되었다.

2·3차 투표에서도 교착 상태가 이어졌다. 윌키와 월러스 사이의 이념적 간극이 너무 커서 지지 대의원들이 상대방 후보 쪽으로 이동하기를 꺼렸다. 가너 지지 남부 대의원들은 윌키도 월러스도 받아들이기 어렵다는 입장을 고수했다.

  • 4·5차 투표

4차 투표에서 팔리가 사퇴를 선언하며 윌키 지지를 선언했다. 팔리의 지지 대의원들이 윌키에게 이동하면서 윌키가 과반에 근접하기 시작했다. 5차 투표에서 가너 지지 대의원 일부도 결국 윌키로 선회했다. 전당대회장의 분위기가 윌키 쪽으로 급격히 기울었다.

  • 6차 투표

6차 투표에서 윌키가 과반을 확보하며 민주당 대통령 후보로 지명되었다. 뒤이어 연쇄적인 대의원 이동이 이루어지며 최종적으로 압도적 다수의 지지가 윌키에게 집중되었다.

부통령 후보로는 켄터키주 출신 상원 원내대표 앨번 W. 바클리가 지명되었다. 남부 보수 민주당원들을 달래기 위한 인선으로 평가받았으나, 이미 균열이 시작된 당내 연합을 봉합하기에는 역부족이라는 시각이 지배적이었다.

최종 후보

민주당: 웬델 윌키

공화당: 게리쿠퍼

1940년 미국 대통령 선거
공화당 전당대회 지명 후보자

대통령 후보 지명자 부통령 후보 지명자
게리 쿠퍼
몬태나주 연방 상원의원
아서 반덴버그
미시간주 연방 상원의원

해럴드 스타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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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합중국 대통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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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연합국 대통령 · 미합중국 부통령
미합중국 제41대 대통령
해럴드 스타센
Harold Stassen
본명 해럴드 에드워드 스타센
Harold Edward Stassen
출생 1907년 4월 13일
미네소타 주 세인트폴
사망 2001년 3월 4일 (향년 93세)
미네소타 주 블루밍턴
재임기간 제N대 부통령
1974년 12월 19일 ~ 1977년 1월 20일
제33대 대통령
1981년 1월 20일 ~ 1985년 1월 20일
서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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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모 아버지 윌리엄 앤드류 스타센
어머니 엘시 엠마 뮐러
배우자 에스더 글루위(1912년생)
자녀 장남 글렌 스타센
장남 프레드 트럼프 주니어
장녀 캐슬린 스타센
학력 미네소타 주립대학교 학사
종교 개신교 (침례교)
신체 191cm
소속 정당 공화당

개요

미국의 제41대 대통령.

약력

  • 1939. 제25대 미네소타 주지사
  • 1945. 미국 해군 태평양 함대 제3함대 참모
  • 1949. 미네소타주 연방 상원의원 (1949.1.3. ~ 1974.8.9.)
  • 1957. 미국 상원 외교위원회 위원장
  • 1965. 미국 상원 공화당 원내대표
  • 1974.12. 제N대 미국 부통령
  • 1981.1. 제41대 미국 대통령

생애

제N대 미국 부통령

1974년 8월, 리처드 닉슨 대통령이 닉슨게이트로 사임하고 존 코널리 부통령이 대통령직을 승계하자, 코널리에 의해 제39대 미국 부통령으로 전격 지명되었다. 이후 12월 상·하원의 승인 청문회를 거쳐 공식적으로 취임했다.

닉슨 사임 이후 극도로 혼란스럽던 워싱턴 정가에서 스타센의 부통령 지명은 신의 한 수라는 평가를 받았다. 26년간 상원의원으로 재직하며 쌓은 압도적인 인망과 경력 덕분에, 닉슨게이트 여파로 와해 직전이던 의회와의 관계를 빠르게 회복시켰기 때문. 코널리 행정부 내에서는 주로 내정 및 의회 협상, 1차 석유 파동에 따른 경제 위기 수습을 총괄하는 실권형 부통령으로 활약했다.

그러나 1976년 미국 대통령 선거에서 닉슨 사임의 여파와 스태그플레이션 심화, 그리고 부동산 거물 출신 아웃사이더 포퓰리스트인 프레드 트럼프의 거센 바람을 막지 못하고 코널리-스타센 티켓은 패배하며 1977년 1월 부통령직에서 퇴임했다.

1980년 미국 대통령 선거

1977년 1월 부통령직에서 퇴임한 후 고향 미네소타로 돌아가 정계 은퇴 절차를 밟는 듯했으나, 백의종군하며 공화당 내 중도합리파와 의회 온건파의 원로로 남아 현직 대통령인 프레드 트럼프의 독단적인 국정 운영을 강력하게 비판했다.

당시 프레드 트럼프 행정부는 무분별한 뉴욕식 부동산 개발주의, 친족 비리 스캔들, 그리고 1979년 주이란 미국 대사관 인질 사건 당시의 대응 미숙으로 민심을 크게 잃은 상태였다. 이에 정계 기득권과 대중 모두가 아웃사이더 포퓰리즘에 지쳐가자, 당내 중도파와 상원 동료들의 삼고초려 끝에 1980년 1월 대선 출마를 전격 선언한다.

당내 경선에서는 26년 상원 외교위원장 및 부통령 시절 구축한 막강한 의회 조직망과 미네소타 농가 지지표를 바탕으로 하워드 베이커, 존 B. 앤더슨 등 우파 신진 후보들을 가볍게 제압하고 공화당 대선 후보로 지명되었다. 러닝메이트로는 당내 보수파를 다독이기 위해 테네시 출신의 상원 원내대표 하워드 베이커를 지명했다.

본선에서는 현직 대통령인 프레드 트럼프와 정면으로 맞붙었다. 트럼프 캠프 측은 스타센을 "워싱턴 늪지대의 늙은 구렁이", "빌딩 한 채 못 지어본 무능한 관료"라며 고령과 기득권 이미지를 집중 공격했다.[2] 이에 스타센은 "국가는 법과 제도로 운영되는 공공체"라는 논리로 응수하며, 트럼프 행정부의 최대 약점인 불안정성과 품격 부재를 파고들었다.

10월 28일 열린 대선 TV 토론회에서 프레드 트럼프가 "평생 의회 의자에 앉아 세금이나 까먹던 사람"이라고 몰아붙이자, 스타센은 상원 26년의 내공으로 자비롭게 허허 웃으며 "당신은 건물을 올려봤을지는 몰라도 이 나라의 법과 제도를 무너뜨리고 있다. 국가는 콘크리트가 아니라 국민의 신뢰로 세워지는 것"이라는 말을 남기며 승기를 완전히 잡아챘다.

결국 11월 본선에서 51.7%의 득표율과 선거인단 357석을 확보하며, 181석에 그친 프레드 트럼프를 꺾고 제41대 미국 대통령으로 당선되었다.

이 승리로 스타센은 당선 당시 기준 역대 최고령 대통령(만 73세) 기록을 세움과 동시에, 30대 최연소 주지사로 시작해 70대에 마침내 대통령 자리에 오르는 역대급 대기만성형 정치 서사를 완성했다.

제41대 미국 대통령

1981년 1월 20일, 당선 당시 기준 역대 최고령(만 73세)의 나이[3]로 제41대 미국 대통령에 취임했다. 취임 즉시 프레드 트럼프 시절 거친 언사와 독단적 행보로 균열이 갔던 NATO 등 전통 우방국과의 관계를 즉각 복원하고 이란 인질 사건의 여파를 수습했다. 경제적으로는 스태그플레이션을 잡기 위해 폴 볼커 연준 의장의 고금리 긴축 정책을 전폭 지원했다. 경기 후퇴와 실업률 상승이라는 진통을 겪었으나, 민주당이 다수당이던 하원과의 초당적 협상을 통해 세제 개편안과 긴축 예산안을 통과시키며 의회정치의 마스터다운 면모를 과시했다.

1983년 하반기부터 경제가 회복세로 돌아서자 스타센은 "긴축의 결실이 맺히고 있으며, 미국은 다시 법치와 안정을 되찾았다"며 재선 도전에 나섰다. 상대는 4년 전 낙선 후 재정비하여 칼을 갈아온 프레드 트럼프였다. 트럼프 측은 긴축 정책과 고금리로 타격을 입은 러스트 벨트 노동자층과 중서부 농민층의 분노를 집요하게 파고들었다. 트럼프는 스타센을 "관료주의로 국민의 피를 말린 노인"이라 맹비난하며 과감한 세금 감면과 관세 부과를 약속했다. 스타센은 만 77세의 초고령에 접어들며 유세 과정에서 다소 지친 기색을 보였고, 반면 프레드 트럼프는 2살이 더 많았음에도 특유의 직설적 화법으로 대중의 분노 표심을 단숨에 흡수했다.

개표 결과, 득표율 48.8% 대 49.6%(0.8%p 차), 선거인단 226표 대 312표로 프레드 트럼프에게 정권 탈환을 허용하며 패배했다. 긴축 정책으로 타격을 입었던 오하이오, 펜실베이니아, 미시간 등 핵심 러스트 벨트 스윙스테이트를 접전으로 빼앗긴 것이 결정적이었다. 이로써 스타센은 단임으로 백악관을 떠나게 되었고, 프레드 트럼프는 미국 역사상 두 번째로 징검다리 재선이라는 기록을 세우게 되었다. 스타센은 결과에 깔끔하게 승복한 뒤, 1985년 1월 20일 정권을 이양하고 8년간의 백악관 생활을 마무리하며 미네소타로 완전히 귀향했다.

평가

긍정적 평가

해럴드 스타센은 법치주의와 의회정치라는 미국 헌정사의 위대한 유산을 온몸으로 체화한 인물이었다. 정치적 이념과 정파가 달랐을지라도, 그가 백악관에 앉아 있는 동안 미국인들은 국가의 행정 시스템이 절제되고 정직하게 운영되고 있다는 깊은 신뢰를 가질 수 있었다.
2001년, 조 바이든

26년 상원 의정 경험과 부통령 경력을 바탕으로 민주당이 다수당인 의회와 끊임없이 소통했으며, 건전한 견제와 균형이라는 미국 헌정사의 전통을 되살려냈다. 외교적으로도 상원 외교위원장 출신답게, 전임 행정부 시절 균열이 갔던 NATO 등 서방 동맹국과의 관계를 즉각 수습했다. 절제된 정통 외교 노선을 채택하여 냉전기 초강대국으로서 미국의 도덕적 지도력을 다시 올려놓았다. 또한 1970년대를 짓눌렀던 스태그플레이션을 잡기 위해 폴 볼커 연준 의장의 고금리 긴축 정책을 전폭 지원하여, 임기 후반 인플레이션을 잡고 물가를 안정시키는 뼈대를 완성했다.

부정적 평가

스타센 대통령은 정치가 숫자와 수식으로만 움직인다고 믿은 오만한 엘리트였다. 인플레이션을 잡았다는 통계표를 들고 자화자찬하는 동안 공장이 문을 닫고 길거리로 쫓겨난 중서부 주민들의 절규를 그는 전혀 듣지 못했다.
1992년, 팻 뷰캐넌
스타센은 자신이 '국정의 조타수'라고 생각했지만, 정작 그 배가 어디로 가는지도 모른 채 노만 저었던 사람이다. 결과적으로 그는 미국을 안정시킨 것이 아니라, 정체시키고 퇴보시켰다.
2004년, 폴 크루구먼

고금리 긴축 정책의 여파가 노동자층과 농민층에게 집중되며 러스트 벨트의 외면을 자초했다는 지적이 따른다. 지표상으로는 1983년 이후 경제가 회복세에 들어섰으나, 제조업 몰락으로 타격을 입은 오하이오, 펜실베이니아 등 러스트 벨트 주민들의 삶은 피폐해졌고 이들의 분노를 제대로 보살피지 못했다. 또한 프레드 트럼프의 직설적이고 자극적인 선동 정치에 대해 스타센은 지나치게 신사적이고 고전적인 원론으로만 대응했다. 미디어 환경이 급변하던 1980년대에 노련한 의회주의자의 고지식함은 대중에게 변화에 뒤처진 늙은 관료로 비쳐지는 역효과를 낳았다. 결국 스태그플레이션 진화라는 고통스러운 악역을 맡아 국정을 정상화해 놓았으나, 정작 그 결실과 열매는 1984년 대선에서 프레드 트럼프에게 다시 바치게 되면서 포퓰리즘 정권의 잠시 동안의 쉼표 역할만 하고 정권을 넘겨준 단임 대통령이라는 한계를 남겼다.

기타

  • 1938년 만 31세의 나이로 미네소타 주지사에 당선되었는데, 이는 미국 역사상 최연소 주지사 당선 기록이며 현재까지도 깨지지 않고 있다. 젊은 나이에 뛰어난 행정 능력과 카리스마로 당내 기득권을 꺾고 당선되어 30대 초반에 이미 공화당의 차기 대권주자로 꼽혔다. 물론 그는 최고령 미국 대통령 중 한명이 되었다.
  • 주지사 3선을 달성하며 승승장구하던 1943년, 제2차 세계 대전이 한창이자 "청년들이 전선에서 피를 흘리는데 안락하게 관사에 머물 수 없다"며 주지사직을 전격 사임하고 해군에 자원입대했다. 태평양 전선에서 윌리엄 홀시 제독의 참모로 참전하여 공훈을 세웠고, 이 태평양 참전 경력은 훗날 상원 외교위원장 시절과 1980년 대선 당시 프레드 트럼프의 "군대 근처에도 안 가본 군필 미필 논란"을 정면으로 격파하는 강력한 무기가 되었다.
  • 프로필 사진을 보면 머리카락이 매우 부자연스러운 것을 확인할 수 있는데, 탈모로 인해 가발을 착용했다.

선거 이력

미국 대통령


미합중국 대통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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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 제2대 제3대 제4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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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9대 제10대 제11대 제12대
윌리엄 헨리 해리슨 존 타일러 제임스 K. 포크 재커리 테일러
제13대 제14대 제15대 제16대
밀러드 필모어 프랭클린 피어스 제임스 뷰캐넌 에이브러햄 링컨
제17대 제18대 제19대 제20대
앤드루 존슨 율리시스 S. 그랜트 러더퍼드 B. 헤이스 제임스 A. 가필드
제21대 제22대 제23대 제24대
체스터 A. 아서 그로버 클리블랜드 벤저민 해리슨 그로버 클리블랜드
제25대 제26대 제27대 제28대
윌리엄 매킨리 시어도어 루스벨트 윌리엄 H. 태프트 우드로 윌슨
제29대 제30대 제31대 제32대
워런 G. 하딩 캘빈 쿨리지 허버트 후버 프랭클린 D. 루스벨트
제33대 제34대 제35대 제36대
게리 쿠퍼 토머스 E. 듀이 애들레이 E. 스티븐슨 배리 골드워터
제37대 제38대 제39대 제40대
유진 매카시 리처드 닉슨 존 코널리 프레드 트럼프
제41대 제42대 제43대 제44대
해럴드 스타센 프레드 트럼프 밥 돌 마리오 쿠오모
제45대 제46대 제47대 제48대
콜린 파월 존 에드워즈 릭 샌토럼 버니 샌더스
제49대
폴 라이언
미연합국 대통령 · 미합중국 부통령

미합중국 대통령
President of the United States
100%
현직 폴 라이언 / 제49대
취임일 2020년 1월 20일
소속 정당 공화당
소재지 백악관

개요

미국의 국가원수이자 정부수반으로, 미국 헌법에 따라 미국의 행정권을 총괄하며, 미군의 총사령관이자 통수권자로서 미군을 통솔 및 통수한다. 공식명칭은 President of the United States이다.

역대 대통령

한나라당

한나라당
영문 명칭 Hannara Party
Grand National Party
한문 명칭 한나라黨
슬로건 Salus populi suprema lex esto.
국민의 안녕이 최고의 법이 되어야 한다.
등록연월일 2025년 3월 1일
사무소 소재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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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특별시 영등포구 국회대로 786, 5~8층 (여의도동, B&B타워)
당대표 백강혁
원내대표
사무총장
정책위의장
국회의원 102석 / 500석 (n.n%)
광역단체장 n석 / n석 (n.n%)
기초단체장 n석 / n석 (n.n%)
광역의원 n석 / n석 (n.n%)
기초의원 n석 / n석 (n.n%)
당색
정책연구소
후원회 중앙당후원회 (대표자: 고동진)
당원 수 223,488명
으뜸당원 수 72,560명
정당보조금
당비 수입
재산 총액
당가 공정과 기회 도약의 꿈 이뤄가며
링크

개요

대한민국의 제3지대 중도정당. 제n대 국회의 제3당이다.

2024년 윤석열 내각 의료대란으로 서울 oo병원의 권역외상센터장인 백강혁 주도로 창당되었으며, 김동연새로운물결, 조정훈시대전환, 그리고 네이버 CEO 출신의 한성숙최휘영을 영입하면서 선거 직접 급속도로 세를 불렸다.

창당 배경

한나라당 창당의 직접적 배경은 윤석열 내각의 누적된 복합적인 국정 위기였다. 윤석열 내각에서의 의료 시스템 붕괴는 가장 핵심적인 쟁점이었는데, 전공의 이탈과 지방 의료 공백의 장기화, 응급·외상 의료 체계의 사실상 마비 상태가 수년간 지속되었음에도 내각이 실효성 있는 대응을 내놓지 못하였다. 이 과정에서 00병원 권역외상센터장으로 이름을 알린 백강혁이 의료 현장의 구조적 문제를 지속적으로 공개 비판하며 전국적 주목을 받았다.

여기에 경제 위기와 물가 폭등이 겹쳤다. 글로벌 공급망 불안과 고환율이 맞물리며 서민 가계의 실질 구매력이 급격히 하락했고, 정부의 물가 안정 대책은 실효성 논란에 휩싸였다. 공공요금 인상, 식료품 가격 상승이 연쇄적으로 이어지며 민심 이반이 가속화되었다. 민주당한국경제당은 이 위기 국면에서 근본적 해법을 제시하지 못하였다는 비판을 받고 있었다.

백강혁 교수는 오랜 기간 정치 참여 의사를 공개적으로 부정해왔다. 그러나 2024년 하반기부터 의료 붕괴 문제가 걷잡을 수 없이 악화되는 상황에서 그의 입장이 변하기 시작했는데, 측근들에 따르면 백강혁은 "현장에서 할 수 있는 것은 다 했다. 이제 시스템 자체를 바꾸지 않으면 아무것도 바뀌지 않는다"는 판단에 이르렀다고 전해졌다.

2025년 초 복수의 정치권 인사들이 영입 제안을 해왔으나 백강혁은 기성 정당 합류를 거절하며 "기존 정당의 문법으로는 기존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는 이유로, 독자 창당 결정은 2025년 2월 중순 외부에 처음 알려졌으며 정치권 안팎에 상당한 파장을 일으켰다.

성향

대한민국의 중도개혁보수 정당이다. 전반적으로는 한국 정치 지형 내 보수에서 중도, 그리고 일부 개혁적 중도진보 인사들까지 아우르는 포괄정당적 성격을 일부 지닌다.

양당제 특성상 세간에는 한국경제당에 비해 '온건한 보수 정당' 내지 '개혁보수 정당'으로 알려져 있으나, 이 당의 정치 성향을 하나로 딱 잘라 규정하기에는 무리가 있다. 창당 배경 자체가 기성 보수[4]와 기성 진보[5] 양측 모두에 대한 환멸에서 비롯된 만큼, 특정 이념 계열에 귀속되기보다 '이념보다 문제 해결'을 전면에 내세우는 실용주의 노선을 고수하고 있다. 당 차원에서 스스로를 '보수정당'으로 규정하는 것에도 신중한 입장이며, 지도부 인사들이 일관되게 "좌우 논쟁보다 작동하는 나라가 먼저"라는 메시지를 발신해오고 있다.

그럼에도 정강·정책의 전반적인 결을 살펴보면 한미동맹 강화, 원전 유지, 수능 중심 입시, 재정 건전성 중시 등 전통적 보수 가치에 가까운 정책들이 핵심 축을 이루고 있어, 중도개혁보수로 분류함이 적절하다. 다만 공공의료 국가책임제와 비정규직 보호 강화, 플랫폼 노동자 권리 보장, 국민소환제 도입 등 진보 색채가 있는 정책들도 상당수 포함하고 있어, 단순한 우파 정당으로 규정하기도 어렵다.

타국의 정당들과 비교하면 프랑스앙마르슈(현 르네상스) 창당 초기, 독일자유민주당(FDP) 일부 노선, 일본 유신회의 개혁보수 성향 등과 부분적으로 유사하다는 평가가 있다. 국내 정치 지형에서는 한국경제당보다 진보적이고, 민주당보다는 보수적인 위치에 서 있다.

  1. 향후 1984년 미국 대통령이 된다.
  2. 정작 프레드 트럼프 본인도 1905년생이라 당시 만 75세로 스타센보다 2살이나 많았다(...) 전형적인 내로남불 공세였던 셈.
  3. 이후 이 기록은 프레드 트럼프에 의해 다시 갱신된다.
  4. 한국경제당
  5. 민주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