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종 열황제 이산: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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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부정적 평가 ===
=== 부정적 평가 ===
== 여담 ==
== 여담 ==
* 외모가 준수하고 유머 감각과 언변이 좋고 사교성이 활발하여 유년기부터 황실의 아이돌로 불렸고 여성에게 인기가 많았다. 특히 재학 시절 고등문관시험에 당당히 합격하여 명실상부한 황실의 스타로 거듭났었다. 강학원대학 재학 시절 수많은 여성들의 구애를 받았으나 오직 훗날의 황후인 최씨의 구애를 받아들였다. 재학 시절부터 숙조와 순의덕황후는 대학을 대표하는 컴퍼스 커플로 유명했고 금슬이 좋았다.
* '''최초로 평민과 자유연애를 통해 결혼한 최초의 황족'''이다. 이에 혜종과 황족들이 이를 윤허하지 않자 "지희<ref>순의덕황후의 휘</ref>가 아니면 결혼하지 않겠습니다!!"라고 선언한다. 이에 황실은 발칵 뒤집어졌고 순의덕황후는 주변의 엄청난 직ㆍ간접적 압력에 부담을 느껴 숙조에게 이별을 통보했다. 이에 한경군은 손을 붙잡고 "내 일생을 널 지키는데 쓰겠다"라며 청혼했다. 마침 강학원대학을 취재하던 KBS가 이를 촬영하여 그날 저녁 뉴스에 대서특필 되었다.<ref>이 당시 황실은 황족의 사생활을 유출했다며 격분했지만, 한경군의 간곡한 설득을 받은 혜종이 선처를 베풀었다.</ref> 결국 당시 한경군의 고집에 혜종이 결혼을 윤허하였다. 이러한 결혼 과정에서의 우여곡절은 젊은 미남 황족과 아름다운 평민 여성이 우연히 대학에서 만나 사랑에 빠져 연애 끝에 결혼하게 된 아름답고 낭만적인 로맨스 이야기로 화제가 되었다.
* 대단한 애처가였다. 본처인 혜승인황후와 금실이 매우 좋았고 여색에 별다른 관심이 없었다. 오로지 남편을 내조하는 역할만을 하길 원하던 황실의 관례를 깨고 외출 할 때도 항상 황후와 대동했고 국정에서도 그녀의 의견을 많이 참고했다. 혜승인황후의 정치적 식견도 훌륭해서 국무회의에서 황후의 의견을 소개하기도 하였다. 심지어는 애처가를 넘어서 후궁 제도에 매우 부정적이라 즉위 이후 친히 후궁 제도를 아에 폐지하기도 했다.
* 현대적이고 자유분방한 사고방식을 가졌던 황후가 가장 보수적인 황실에서 여성의 사회 생활은 엄격히 금지되며 단순히 남편을 내조하는 역할만을 요구받으며 황후가 했던 단순한 행동<ref>외국인이 보기에는 지극히 평범함 그 자체인 인터뷰 등이 오만한 것으로 지적받기까지 할 정도였다.</ref>까지 지적 받고 많은 황실 사람들에게 괴롭힘을 당하며 궁중 생활에 적응하지 못하자 "한번만 더 황후를 욕보이면 대역죄로 단죄하겠다"며 황후를 몸소 보호했다.
* 자식들과 손주들에게도 좋은 아버지이자 할아버지였다. 숙조의 장남인 [[연조 덕황제 이숭|인영태자]]의 성격은 자기 아버지와는 다르게 온화했고 착했다고 하는데 그런 아들의 성격을 질책하기보다는 아들의 성격을 그대로 존중해 주었다. 손자인 이연이 인영태자를 닮아 착하고 똑부러지자 크게 기뻐하기도 했으며, 이연이 강학원대학 대신 돈명대학에 진학하자 이를 존중하며 이연을 감쌌다.
* 9.18 사건을 통해 황위에 올랐지만 아들을 잃는 불행을 당했다. 인영태자가 29세의 나이에 뇌출혈로 요절하자 숙조는 국사도 제치고 황실병원에 무작정 달려가 한참을 오열했고 너무 슬퍼서 끼니를 거르자 대신들과 주치의들이 겨우 뜯어말렸다. 숙조는 태자의 요절을 매우 비통해하며 직접 글을 지어 태자를 애도했다. 또한 며느리가 되는 인영태자의 비인 순의덕황후 한씨를 안타깝게 여겨 남편을 일찍 여읜 한씨에게 궁궐에 머무르게 했고, 며느리가 착하고 효성이 깊다고 자주 칭찬했다. 그리고 훗날 손자 이연이 태자가 되자 본인이 직접 주도하여 인영태자를 연조 덕황제(衍祖 德皇帝)로 추존하고 장명승덕태흠이인돈역(章明勝德太欽彛仁敦易)이라는 시호를 내려 태자를 위로했다.
* 군 시절부터 황실의 고루한 관습에 불만이 많았고, 즉위 이후 황실의 관습을 현대적으로 개량하거나 철폐하였다. 직접 황족들과 대신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황실에 적응하지 못하던 황후를 위해 황실의 악폐습을 과감하게 철폐하여 국민들의 열렬한 지지를 받았다. 이에 형 예친왕이 반대하자 재떨이를 집어 던지기도 했다고 한다.
* 엄청난 애연가였다고 한다. 공식 석상에서 담배를 피워대는 모습은 당시 사진이나 방송영상에서 꽤 많이 보여왔고, 9.18 사건의 그날에는 지프차 안에서 줄담배를 피울 정도였다. 당시 전매청(현 KT&G)에서 숙조가 피는 담배는 최고급 연초만을 엄선해서 납품했다고 한다. 처음 담배를 피울때는 형 에친왕의 화랑 담배를 몰래 가져다 피웠고, 1958년부터는 아리랑을 피웠다. 1982년 이후로는 장미를 피웠지만 2001년 태자가 훙서한 이후 나이도 많고 해서 건강을 위해 담배를 끊었다.
* 유교 국가인 대한제국에서 불교를 믿는다고 공식적으로 선포한 최초의 군주이다. 스스로 '''"나는 호불(好佛) 군주다!"'''라고 선언했고 "석가 여래 또한 공자와 견줄 위인이다"라고 했으며 불경을 대량 간행하기 위해 궁내부에 간경국을 만들었으며 옛 사찰을 중건 하고 대대적으로 신축하기도 하였다. 이후 대신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조계사의 확충을 전폭적으로 지원하였으며 지방 순행 때마다 여러 사찰을 직접 방문하여 시주하고 지원하였고 숙조가 친필로 써서 부처에게 봉안한 문서도 존재한다. 이러한 호불 성향은 손자 이연이 물려 받았고, 이연 또한 호불 군주를 자처하고 있다.
== 가계 ==
== 가계 ==
* 증조부 : [[성조 태황제 이엽|성조 태황제]](聖祖 太皇帝, 1860년 ~ 1910년)
* 증조부 : [[성조 태황제 이엽|성조 태황제]](聖祖 太皇帝, 1860년 ~ 1910년)

2024년 2월 20일 (화) 14:48 판

[ 소개 ]
매화 핀 진목정엔 잔설이 누웠는데
화사하게 웃는 설중매 담장 너머로 매향을 흩뿌리며
고운 자태 뽐내고 오가는 마실사람 눈웃음치며 유혹하네
김씨네가 살다가 도회로 가버린 초가지붕 용마루는 세월의 횡포 속에
사르르 녹아내렸고 마당에는 지게 갈퀴 쟁기대가리 홀태
써레 홍두깨 호미자루
잡살뱅이들이 널부러져 푸서리 속에 나뒹굴고 있네
조상의 숨결이 열려있는 초가삼간 설중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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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제국 제5대 황제
숙조 인황제 | 肅祖 仁皇帝
이름 이면(李矏)
안천(安天)
출생 1935년 1월 19일
황성 한성부 황실병원
붕어 2016년 4월 13일
황성 한성부 덕수궁 석조전 (향년 80세)
즉위 1972년 11월 27일
황성 한성부 경복궁 근정전
재위기간 대한제국 황태형
1972년 9월 19일 ~ 1972년 11월 27일
대한제국 제5대 황제
1972년 11월 27일 ~ 2013년 11월 27일
대한제국 태상황
2013년 11월 27일 ~ 2016년 4월 13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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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관 전주 이씨
부모 친부 승경대원왕, 친모 단온대원비

양부 창순군, 양모 창순군부인
형제자매 2남 1녀 중 차남
황후 혜승인황후
자녀 장녀 강효공주
장남 연조 덕황제
차남 강친왕
학력 강학원 유치원 (수료)
강학원 초등과 (졸업)
강학원 중등과 (졸업)
강학원 고등과 (졸업)
강학원대학 사회과학부 (정치외교학과 / 학사)
종교 유교 (성리학) → 불교
신장 178cm
봉호 한경군(漢景君)
묘호 숙조(肅祖)
존호 선덕수공이민온은장우태고철용어위
(宣德修恭夷敏溫隱莊友太高哲勇御魏)
확렬정례열각도량무공양류예결성막
(確烈掉禮易恪掉良武共襄類譽潔成幕)
흠절신목대녕통청소흥
(欽節神穆戴寧通淸昭興)
시호 성현사덕기상광정인황제
(聖商思德祈商光定仁皇帝)[1]
연호 성녕(成寧, 1973~2013)
계급 대한제국군 육해공군 대원수

개요

숙조 인황제 이면(肅祖 仁皇帝 李矏)은 대한제국의 제5대 황제이며 승경선절대원왕의 차남이다.

생애

유년기

본래 승경군의 차남이었으나, 1936년 창순군 이재형이 후사를 남기지 못하고 사망하는 바람에 창순군이 죽은 이튿날에 양자로 입적하여 한경군(漢景君)에 봉해졌다.

전후 최초의 황족 관료

숙조는 유년기부터 재주가 출중하고 유능하여 황실의 촉망받는 인재였고 숙조는 혜종에 청하여 군인이 아닌 관료가 되어 성상을 보필하겠다며 종친사환금지법의 제약 없이 고등문관시험에 응시할 자격을 달라 청하였고, 혜종의 윤허를 받아 고등문관시험에 합격하여 공직생활을 시작하였다. 이후 경찰청 커리어로써 재직하였다. 이후 경찰을 떠나 황족 의원의 자격으로 정치에 입문하였고, 1970년 헤종에 의하여 대한제국의 정보를 총괄하는 정보대의 수장인 정보사가 되었다.

9.18 사건과 즉위

정보사 재임 시절 숙조는 9.18 총격 사건을 통해 조카 뻘 나이의 6촌 친척인 소황제를 압박하여 국정의 실권을 장악하였다.[2] 이후 숙조는 대신들의 추대를 받는 형식으로 황태형[3]에 봉해졌고, 정통성을 공고히 하기 위해 다시금 승경대원왕의 아들로 입적 되었다.[4][5] 3개월 후 두려움에 떨던 소황제가 자신이 앓고 있던 병을 명분으로 황태형에게 양위 하였고, 황태형이었던 이면이 연호를 성녕(咸寧)으로 하여 대한제국의 제5대 황제로 즉위하였다.

재위 초기

숙조는 즉위 이후 기존의 기득권을 견제하기 위해 황제 중심의 정치를 강화하고 함흥부와 전주부를 각각 상경 함흥부, 남경 전주부로 승격시켰다. 또한 3S정책과 범죄와의 전쟁 선포를 통해 민심을 얻었고, 나토를 모티브로 동북아시아의 친미 국가들의 군사동맹기구인 NEATO[6]를 창설하고, ECSC와 코메콘을 모방한 아세아경제발전공동체(AEDC)를 창설하여 대한제국을 동아시아의 안보와 경제의 중심으로 성장시켰다.

재위 중반

재위 말기

퇴위와 태상황

호랑이 등에서 내리다

숙조는 고령을 이유로 2013년 손자 이연에게 황위를 물려주고 자신은 상황으로 물러났다. 즉위식 당시 태손인 이연이 아직 황제가 되고 싶지 않아 태손의 계급인 원수 계급장이 부착된 제복을 착용했는데, 숙조가 자신이 입은 제복의 대원수 견장을 손수 떼어 태손의 견장 자리에 달아주고 자신이 쓰던 원수봉을 태손의 손에 들려준 후에 절하며 "황상, 이 대한을 잘 부탁드립니다."하고 예를 갖추니 그 자리에 있던 대신들과 장성이 감격하여 엎드려 통곡했지만, 이연은 이미 돌이킬 수 없게 되었음을 알고 위엄을 지키기 위해 울음을 꾹 참아 화제가 되었다.

숙조는 이연이 황제가 된 이후로도 군권은 여전히 자신이 쥐고 있었고 일부 분야에 대해서도 대리청정을 하였다. 또한 숙조는 중국과의 영토 분쟁에서 적극적으로 강경 대응을 주문하고, 네아토 구성국과의 결속을 위해 여러번 순방을 다니는 등 주도적으로 활약했다. 또한 즉위 1개월 뒤 이연은 상황이라는 칭호로는 숙조의 공적을 기릴 수 없다며 태상황으로 격상시켰다. 이렇게 숙조는 태상황이 되어서도 대한제국의 안정과 손자 이연의 황권 안정을 위해 노력했고, 말년에는 계절에 따라 황성과 서경, 남경과 동경을 오가며 당구와 사냥을 즐기는 등 즐겁게 여생을 보내기도 했다. 게다가 자신이 후계자로 삼은 이연의 뛰어난 자질을 자신의 눈으로 확인하고 이에 만족하는 말도 남겼으며, 순방 도중 일본의 내대신 도쿠가와 이에히로가 이연을 극찬하자 크게 기뻐하기도 했다.

붕어

이렇듯 말년을 평안하게 보내다가 퇴위 2년차부터 갑자기 몸이 안좋아지더니 퇴위 3년 만인 2016년 4월 27일 덕수궁 석조전에서 붕어했다. 사후 이연은 혜종 사후 혼란했던 나라를 다시 일으키시고, 대한을 세계 2위의 경제 대국으로 부흥시킨 공적을 기리기 위해 숙조(肅祖)로 묘호를 제안했고 대신들이 이를 받아들여 숙조로 결정되었다.

평가

긍정적 평가

부정적 평가

여담

  • 외모가 준수하고 유머 감각과 언변이 좋고 사교성이 활발하여 유년기부터 황실의 아이돌로 불렸고 여성에게 인기가 많았다. 특히 재학 시절 고등문관시험에 당당히 합격하여 명실상부한 황실의 스타로 거듭났었다. 강학원대학 재학 시절 수많은 여성들의 구애를 받았으나 오직 훗날의 황후인 최씨의 구애를 받아들였다. 재학 시절부터 숙조와 순의덕황후는 대학을 대표하는 컴퍼스 커플로 유명했고 금슬이 좋았다.
  • 최초로 평민과 자유연애를 통해 결혼한 최초의 황족이다. 이에 혜종과 황족들이 이를 윤허하지 않자 "지희[7]가 아니면 결혼하지 않겠습니다!!"라고 선언한다. 이에 황실은 발칵 뒤집어졌고 순의덕황후는 주변의 엄청난 직ㆍ간접적 압력에 부담을 느껴 숙조에게 이별을 통보했다. 이에 한경군은 손을 붙잡고 "내 일생을 널 지키는데 쓰겠다"라며 청혼했다. 마침 강학원대학을 취재하던 KBS가 이를 촬영하여 그날 저녁 뉴스에 대서특필 되었다.[8] 결국 당시 한경군의 고집에 혜종이 결혼을 윤허하였다. 이러한 결혼 과정에서의 우여곡절은 젊은 미남 황족과 아름다운 평민 여성이 우연히 대학에서 만나 사랑에 빠져 연애 끝에 결혼하게 된 아름답고 낭만적인 로맨스 이야기로 화제가 되었다.
  • 대단한 애처가였다. 본처인 혜승인황후와 금실이 매우 좋았고 여색에 별다른 관심이 없었다. 오로지 남편을 내조하는 역할만을 하길 원하던 황실의 관례를 깨고 외출 할 때도 항상 황후와 대동했고 국정에서도 그녀의 의견을 많이 참고했다. 혜승인황후의 정치적 식견도 훌륭해서 국무회의에서 황후의 의견을 소개하기도 하였다. 심지어는 애처가를 넘어서 후궁 제도에 매우 부정적이라 즉위 이후 친히 후궁 제도를 아에 폐지하기도 했다.
  • 현대적이고 자유분방한 사고방식을 가졌던 황후가 가장 보수적인 황실에서 여성의 사회 생활은 엄격히 금지되며 단순히 남편을 내조하는 역할만을 요구받으며 황후가 했던 단순한 행동[9]까지 지적 받고 많은 황실 사람들에게 괴롭힘을 당하며 궁중 생활에 적응하지 못하자 "한번만 더 황후를 욕보이면 대역죄로 단죄하겠다"며 황후를 몸소 보호했다.
  • 자식들과 손주들에게도 좋은 아버지이자 할아버지였다. 숙조의 장남인 인영태자의 성격은 자기 아버지와는 다르게 온화했고 착했다고 하는데 그런 아들의 성격을 질책하기보다는 아들의 성격을 그대로 존중해 주었다. 손자인 이연이 인영태자를 닮아 착하고 똑부러지자 크게 기뻐하기도 했으며, 이연이 강학원대학 대신 돈명대학에 진학하자 이를 존중하며 이연을 감쌌다.
  • 9.18 사건을 통해 황위에 올랐지만 아들을 잃는 불행을 당했다. 인영태자가 29세의 나이에 뇌출혈로 요절하자 숙조는 국사도 제치고 황실병원에 무작정 달려가 한참을 오열했고 너무 슬퍼서 끼니를 거르자 대신들과 주치의들이 겨우 뜯어말렸다. 숙조는 태자의 요절을 매우 비통해하며 직접 글을 지어 태자를 애도했다. 또한 며느리가 되는 인영태자의 비인 순의덕황후 한씨를 안타깝게 여겨 남편을 일찍 여읜 한씨에게 궁궐에 머무르게 했고, 며느리가 착하고 효성이 깊다고 자주 칭찬했다. 그리고 훗날 손자 이연이 태자가 되자 본인이 직접 주도하여 인영태자를 연조 덕황제(衍祖 德皇帝)로 추존하고 장명승덕태흠이인돈역(章明勝德太欽彛仁敦易)이라는 시호를 내려 태자를 위로했다.
  • 군 시절부터 황실의 고루한 관습에 불만이 많았고, 즉위 이후 황실의 관습을 현대적으로 개량하거나 철폐하였다. 직접 황족들과 대신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황실에 적응하지 못하던 황후를 위해 황실의 악폐습을 과감하게 철폐하여 국민들의 열렬한 지지를 받았다. 이에 형 예친왕이 반대하자 재떨이를 집어 던지기도 했다고 한다.
  • 엄청난 애연가였다고 한다. 공식 석상에서 담배를 피워대는 모습은 당시 사진이나 방송영상에서 꽤 많이 보여왔고, 9.18 사건의 그날에는 지프차 안에서 줄담배를 피울 정도였다. 당시 전매청(현 KT&G)에서 숙조가 피는 담배는 최고급 연초만을 엄선해서 납품했다고 한다. 처음 담배를 피울때는 형 에친왕의 화랑 담배를 몰래 가져다 피웠고, 1958년부터는 아리랑을 피웠다. 1982년 이후로는 장미를 피웠지만 2001년 태자가 훙서한 이후 나이도 많고 해서 건강을 위해 담배를 끊었다.
  • 유교 국가인 대한제국에서 불교를 믿는다고 공식적으로 선포한 최초의 군주이다. 스스로 "나는 호불(好佛) 군주다!"라고 선언했고 "석가 여래 또한 공자와 견줄 위인이다"라고 했으며 불경을 대량 간행하기 위해 궁내부에 간경국을 만들었으며 옛 사찰을 중건 하고 대대적으로 신축하기도 하였다. 이후 대신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조계사의 확충을 전폭적으로 지원하였으며 지방 순행 때마다 여러 사찰을 직접 방문하여 시주하고 지원하였고 숙조가 친필로 써서 부처에게 봉안한 문서도 존재한다. 이러한 호불 성향은 손자 이연이 물려 받았고, 이연 또한 호불 군주를 자처하고 있다.

가계

어록

이기면 관군, 지면 역적 아니겠소.
9.18 사건을 계획하며
짐은 이 대한을 고쳐 종사의 만년 대계를 꾀하겠소. 폐습을 고치고 타국의 좋은 제도를 받아들이겠소. 이로써 황제가 황제의 책무를 다하고 대신이 대신의 책무를 다하여 억조창생이 편안한 나라를 만들겠소. 이곳이 바로 짐이 바라는 대한의 모습이오. 그리고 만약, 이 과업을 완성하는 데 방해가 되는 자가 있다면 그게 누구든, 엄히 다스릴 것이오. 이를 가슴에 새기고, 잘 따라주길 바라오.
즉위칙서를 반포한 후 숙조의 선언
황상, 이 대한을 잘 부탁드립니다.
이연의 즉위식에서 자신의 대원수 견장과 원수봉을 태손의 손에 쥐어준 후 절하며
황상이 문왕과 무왕처럼 올바르고 영명한데 내가 뭘 걱정하고 아쉬워 하겠나
이연의 뛰어난 자질을 자신의 눈으로 확인하고 이에 만족하며
잘 해나가거라. 그러면 된다.
이연에게 남긴 유언

대중 매체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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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제국 황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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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완전한 시호는 숙조선덕수공이민온은장우태고철용어위확렬정례열각도량무공양류예결성막흠절신목대녕통청소흥성현사덕기상광정인황제(肅祖宣德修恭夷敏溫隱莊友太高哲勇御魏確烈掉禮易恪掉良武共襄類譽潔成幕欽節神穆戴寧通淸昭興聖商思德祈商光定仁皇帝)이다.
  2. 현재까지도 황실과 대한제국 정부는 9.18 총격 사건이 제경군과 연관된 정치자금 수사를 위해 연행하는 과정에서 발생한 우발적인 충돌사건에 불과하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국내외에서는 당시 황실 여론상 황위 계승에서 지지를 받지 못하던 숙조가 9월 19일에 공포하기로한 (사실상 제경군으로 결정된) 황속(皇續) 책봉 공포를 무산시키고 황위를 차지할 목적으로 군대를 일으켜 제경군과 경신순황후등 자신과 정적 관계에 있었던 반대파들을 제거한 뒤 소황제를 반강제로 퇴위시킨 일종의 친위 쿠데타로 간주한다.
  3. 본래는 숙조는 황위 계승자를 뜻하는 황속(皇續)으로 책봉될 예정이었다. 그러나 세조의 사례처럼 왕위를 찬탈하는 방식보다는 그나마 정당한 혈통의 계승이라는 것을 대내외에 공포하기 위해 숙조가 임의로 만든 칭호로 황위를 물려받기로 정해진 친재종형을 의미하는 칭호이다. 그래서 황태자(子)가 아닌 황태형(兄)이며 유사한 칭호로 당 선종이 사용한 황태숙이 있다.
  4. 본래 숙조는 창순군의 양자로 입적되었으나 황속으로써 황위를 계승할 경우 향렬과 촌수 문제가 숙조의 발목을 잡았다. 사실 숙조는 국가와 군대를 완벽하게 장악했기에 이러한 문제를 무시해도 그만 이었지만 사실상 황위 찬탈의 형식으로 황위를 계승하였기에 정통성에 민감했고, 이러한 재 입적까지 단행한 것 이었다.
  5. 이에 따라 은언궁가의 봉사손으로는 숙부인 (이광과 숙조는 1살 터울로 유년기부터 사실상 형제처럼 지내 친분이 돈독했다.) 이광이 낙점되었고, 창순군의 아들로 이광이 입적되어 이광의 후손들이 은언궁가를 계승하고 있다.
  6. 공식 명칭은 동북아시아 조약 기구, (North-East Asia Treaty Organization)로 영어 발음은 네아토가 된다.
  7. 순의덕황후의 휘
  8. 이 당시 황실은 황족의 사생활을 유출했다며 격분했지만, 한경군의 간곡한 설득을 받은 혜종이 선처를 베풀었다.
  9. 외국인이 보기에는 지극히 평범함 그 자체인 인터뷰 등이 오만한 것으로 지적받기까지 할 정도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