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mmunist 1968 (토론 | 기여) (새 문서: {{마르크스를 위하여}} {{냉전 (맑스)}} == 개요 == '''52년 체제'''(52年 體制)는 조선 정치사에서 나타난 특수한 일당우위정당제를 설명하는 용어로, 사회민주당의 장기집권체제와 이에 대항하는 자유당의 대립을 의미한다. 1952년부터 1994년까지 약 42년간 이어진 이 체제는 전후 조선 정치사와 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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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요
52년 체제(52年 體制)는 조선 정치사에서 나타난 특수한 일당우위정당제를 설명하는 용어로, 사회민주당의 장기집권체제와 이에 대항하는 자유당의 대립을 의미한다. 1952년부터 1994년까지 약 42년간 이어진 이 체제는 전후 조선 정치사와 오늘날 조선 사회에 큰 영향을 미쳤다.
상세
1952년부터 1994년까지 조선의 정당 구도는 조봉암, 김일성, 박정희, 김대중 등이 이끈 사민당과 지청천, 김홍일, 이승만, 이기붕 등이 이끈 자유당으로 양분되어있었다. 사회민주당은 사회주의를 바탕으로 생산수단의 공유화, 복지정책 확충, 친-공산권 외교를 강조했고, 자유당은 자유주의를 바탕으로 개인의 소유권리 확대, 기업의 자유 확대, 친-서구권 외교를 강조했다.
1948년 조선인민공화국이 공식적으로 출범한 이후에는 좌우익이 비슷한 세를 유지했지만, 조선인들은 사회주의를 자본주의에 비해 더 긍정적인 체제로 인식하고 있었다. 1940년대 독립운동을 좌익 계열이 지도한데다, 라트 연방과 공산권이 내세운 "만민평등" 이데올로기가 피식민국가였던 조선에게 매력적으로 다가왔기 때문이다. 또한, 우익 계열의 분열로 인해 우익 진영이 효과적인 대여 투쟁 전술이나 선거 전략을 세우지 못하게 되었다. 때문에 1950년대 이후 좌익이 우위를 갖고 우익이 이를 견제하는 구도가 이어졌다. 이 구도가 장기화되면서, 1994년까지 우익 세력이 단 한번도 집권하지 못하는 일이 일어났다. 이런 특이한 일당우위적 체제를 두고 52년 체제라고 부른다.
역사
발단
1945년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독립된 조선의 정치는 혼란스러웠다. 좌로는 공산주의자부터 우로는 보수주의자까지 다양한 정치인들이 활동하고 있었다. 조선을 영세중립국으로 독립시키는데 동의한 미국과 라트 연방 양국은 1948년 제헌의회 선거와 조선인민공화국 체제 독립을 결정하였다. 1948년 제헌의회 선거에서 승리를 거둔 것은 여운형이 이끄는 근로인민당이었다. 그러나 근로인민당 외에도 이재유의 조선공산당, 이승만의 독립촉성국민회, 김구의 한국독립당, 만주 출신이 세운 조선신민당 등 여러 세력이 분립하고 있었다. 또 좌익 내에서도 빨치산파, 라트연방파, 만주파, 국내파, 온건파, 우익 내에서는 상해임정파와 미국파, 광복군파 등 여러 파벌이 존재했다.
여운형은 이러한 모든 세력을 끌어들여 초대 대통령으로 이승만(독촉회)을 선임하고, 외무부장 김구(독립당), 군사부장 김일성(공산당), 노동부장 이재유(공산당), 농무부장 조봉암(근로당), 치안부장 지청천(대동청년단) 등 좌우익의 많은 정치인들을 끌여들이고자 했다.
그러나 여운형은 통합된 좌익 세력의 필요성을 느끼고 있었고, 공산당과 근로인민당, 신민당의 통일전선을 구상하고 있었다. 때마침 코민테른은 1952년 선거를 앞두고 선거 승리를 위하여 공산당에게 좌익 통합 정당을 구성하라는 지령을 받았다. 이에따라 조선신민당, 조선공산당, 근로인민당, 민족혁명당 4당은 여운형을 당수로 하는 사회민주당을 수립했다. 통일된 사회민주당은 1952년 52년 총선에서 압승을 거둔다.
위기감을 느낀 우익 계열은 1952년 총선 직후 합당하여, 지청천을 당수로 하는 자유당을 창당했다. 이를 통해 사민당-자유당 양당 체제로서 52년 체제가 출범했다.
발전
1952년 체제 성립 직후까지만 하더라도 자유당은 사민당과 어느정도는 대등한 세력을 갖추고 있었으나, 점차 사민당에 밀려났다. 그 이유는 몇가지가 있다. 첫번째로, 사민당은 대여섯개의 파벌이 대등한 힘을 갖추고 상호 견제와 협력을 통해 안정적인 권력 구조를 만들어낼 수 있었다. 반면, 자유당은 이승만을 따르는 미국파(이후 우남파)와 상해 임정 요인들이 중심이 되어 이승만파를 견제하기 위해 수립된 임정파(이후 김홍일의 아호를 따 일서파)로 양분되어있었고, 이들은 끊임 없이 대립하며 당을 분열시켰다.
또한, 대다수의 조선 민중들은 무상몰수 무상분배라는 조봉암 총리의 농지개혁 정책에 만족하고 있었다. 미국 CIA의 비밀 보고서에서조차 "사회주의에 대한 조선 민중의 지지는 진심이다"라는 표현이 나올 정도였다. 조선 인민들은 사회주의의 민족해방 및 만민평등 사상에 동조하고 있었으며, 극소수 지식인만이 자유주의에 가슴깊이 지지를 보탰다.
1956년 총선을 앞두고, 일시적인 경기 침체로 인해 사민당의 선거 패배가 점쳐지기도 했다. 하지만 1956년 만주-몽골 위기와 이로 인한 미중결렬로 인해 자유당에서 중국을 지지한 임정파와 미국을 지지한 미국파가 분립되며 각각 민주자유당과 독립자유당으로 선거를 따로 치루었고, 결국 56년 총선거에서 사민당은 대승을 거두게 된다. 이로 인하여 자유당은 정권을 되찾을 절호의 기회를 놓치면서, 사민당의 일당독주가 심화되었다.
자신감을 얻은 사민당은 이재유 수상 하에서 헌법을 개정해 생산수단의 공적 소유를 명시하고, 완전한 사회주의 경제를 추구한다. 자유당은 반발했지만 헌법 개정으로 치러진 1962년의 첫번째 지방선거에서 사민당이 노동자와 농민의 지지 속에서 대승을 거두면서 자유당은 회생 불가의 상황으로 접어들게 된다.
절정
1960년대 들어 자유당은 지방권력과 중앙권력을 모두 빼앗기고 의회 의석 1/3만을 차지하는 정당으로 권력에서 철저하게 배제되었다. 그나마 호남 등 일부 지역에서는 계속 도지사를 배출하기도 했지만, 이마저도 1960년대 말 이후로는 힘겨워졌다. 그 이유로는 우선 자유당이 지방권력과 중앙권력에서 밀려난지 오래되다보니 윤보선, 장면, 김홍일 등 중앙 정치인이 은퇴해 수권능력이 떨어졌다. 더구나, 자유당의 우익 편향을 지적하며 "자유주의적 사회주의"를 내세우며 창당된 강량욱의 조선민주당, 전평의 위성정당으로 창당된 노동자동맹 등 대안적 야당이 등장하며 야권 내에서 자유당이 갖는 우위도 점차 감소했다.[1]
또한 자유당은 생산수단의 재 사유화를 내세웠는데, 이 정책은 조선 인민들에게 극도로 인기가 없었다. 내부적으로 생활정치에 대한 투쟁이 아니라, 외교적인 문제가 주요한 논쟁 대상이 된것도 하나의 이유였다. 상술한 우남파와 일서파의 분쟁은 무려 1980년대 초까지 지속되었는데, 도중 논쟁에서 일서파가 승리해서 1968년 일어난 베이핑의 봄 당시 탱크를 동원해 대학생 시위대를 무력 진압한 중국 정부의 결정을 옹호하는 성명까지 냈다. 때문에 자유당은 이후 좌익에게 있어 땅크쟁이로 불리게 된다.
반면 사민당은 1964년부터 1976년까지 박정희가 12년간 집권하며 관변단체 설립, 새마을 운동으로 대표되는 농촌 현대화 정책(농업집단화), 경제 개발 5개년 계획으로 대표되는 강력한 공산주의 정책 등을 통해 조선의 경제 부흥을 주도한다. 박정희 정권 시기 조선의 1인당 GDP는 700불 대에서 5,000불대로 성장해 거의 영국을 추월했으며, 포항 지역의 중화학공업 사업 육성 등 공업 발달로 선진경제권 진입에도 성공하게 된다. 그리하여 보수진영 내에서도 점차 사민당의 지지세가 올라간 반면, 자유당은 외교 논쟁에 치중해 1970년대 내내 지지 기반을 사민당에 빼앗기게 된다.
해소
1979년 일어난 코레아게이트 사건 등으로 사민당의 부정부패가 점차 부각되며, 사민당의 지지율은 떨어지기 시작한다. 또한 사민당의 장기집권으로 인한 불만도 터져나왔다. 1980년 집권한 김종필 수상은 "음험함의 아이콘"으로 불리며 인기가 없었고, 이후 집권한 총리들도 별다른 지지를 얻지 못했다. 한편, 자유당에서는 50세의 신인 정치인 이회창이 "민생 정당"을 표방하며 "개혁보수" 노선을 천명해 처음으로 지지율 상승을 보였다.그 결과 1986년 치러진 지방선거에서 자유당이 처음으로 1당을 차지하며 자유당이 사민당을 추격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1988년 치러진 총선거에서 자유당은 예상 외의 패배를 겪었다. 우선 동맹을 맺은 정당인 민주당, 노동자동맹의 의석이 하락했다. 또 88올림픽 개최의 효과를 등에 업은 사민당의 지지율이 선거를 앞두고 상승했다.
이후 1989년 서구권 혁명이 일어나며 냉전이 종식되자, 고전적 자유주의와 보수주의를 내세우던 자유당의 노선은 점차 "구식"인 것으로 받아들여지게 되었다. 오히려 1991년 강경대 사망 사건으로 사민당이 분열되며 김정일의 신공산당, 권영길의 민주노동당, 정주영의 통일국민당 등 다른 야당이 우후죽순 생겨났다. 그리하여 자유당과 사회민주당 모두 무너지며 52년 체제는 종말을 고하게 된다.
1994년 치러진 조기 총선거 결과, 총 450석 중 사민당이 211석, 통일당을 중심으로 한 야권연합이 213석을 얻으며 두 세력 모두 과반 의석 달성에 실패했다. 특히, 사민당이 처음으로 과반 의석을 상실하면서 52년 체제의 붕괴는 가시화되었다. 결국 총리 표결에서 야 5당이 참여한 정주영 내각이 수립되면서 52년 체제는 종식된다.
후속: 96년 체제
정주영의 통일국민당은 이후 몇차례의 정계개편을 통해 야권을 통합한 신민당으로 재탄생한다. 신민당은 한때 사민당의 정치 핵심이었던 차지철[2]을 내세워 정권교체를 노렸다. 그러나 예상 외의 패배를 당하면서 신민당은 해체되고, 이후 보다 온건한 성향인 민주당[3]이 양당의 구도를 이루게 된다. 이를 96년 체제라고 부른다.
한편 자유당은 사회주의를 받아들이는 등 좌경화해 1995년부터 1996년까지 사회민주당과 연대하나, 오히려 이로 인해 야권 지지자들이 이탈해 민주당에게 야권의 주도권을 내주고 완전히 몰락하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