탕사오이 정권 (민국 38): 두 판 사이의 차이

편집 요약 없음
편집 요약 없음
51번째 줄: 51번째 줄:
|-
|-
! width=30% style="background:#b0313f; color:#fff" | 이칭
! width=30% style="background:#b0313f; color:#fff" | 이칭
| '''탕사오이 민국정부'''<ref>탕사오이 정권이라고도 하지만 이건 한국에서의 주 사용명칭이고, 중국에서는 탕사오이 국민정부라고 지칭하는 경우가 많다.</ref><br>唐紹儀民國政府
| '''탕사오이 민국정부'''<ref>탕사오이 정권이라고도 하지만 이건 한국에서의 주 사용명칭이고, 중국에서는 탕사오이 민국정부라고 지칭하는 경우가 많다.</ref><br>唐紹儀民國政府
|-
|-
! style="background:#b0313f; color:#fff" | 국가
! style="background:#b0313f; color:#fff" | 국가
69번째 줄: 69번째 줄:
|-
|-
! style="background:#b0313f; color:#fff" | 주석<br><small>(국가원수)</small>
! style="background:#b0313f; color:#fff" | 주석<br><small>(국가원수)</small>
| [[탕사오이 (민국 38)|탕사오이]](1940-1944)<br>[[천롄보 (민국 38)|천롄보]](대리, 1944-1945)
| [[탕사오이 (민국 38)|탕사오이]](1940-1944)<br>[[량훙즈 (민국 38)|량훙즈]](대리, 1944-1945)
|-
|-
! style="background:#b0313f; color:#fff" | 국무총리<br><small>(정부수반)</small>
! style="background:#b0313f; color:#fff" | 국무총리<br><small>(정부수반)</small>
| [[스여우싼 (민국 38)|스여우싼]](1940-1944)<br>[[량훙즈 (민국 38)|량훙즈]](1944-1945)<br>[[런위안다오 (민국 38)|런위안다오]](1945)
| [[량훙즈 (민국 38)|량훙즈]](1940-1944)<br>[[천롄보 (민국 38)|천롄보]](1944-1945)
|-
|-
! style="background:#b0313f; color:#fff" | 여당
! style="background:#b0313f; color:#fff" | 여당
90번째 줄: 90번째 줄:
|-
|-
! style="background:#b0313f; color:#fff" | 화폐
! style="background:#b0313f; color:#fff" | 화폐
| 중앙저비은행권<small>(中央儲備銀行券)</small><ref>정부 직할 영역.</ref><br>중국연합준비은행태환권<small>(中國聯合準備銀行兌換券)</small><ref>화북정무위원회 영역.</ref><br>몽강은행권<small>(蒙疆銀行券)</small><ref>몽골 자치구 영역</ref>
| 중앙저비은행권<small>(中央儲備銀行券)</small><ref>정부 직할 영역.</ref><br>중국연합준비은행태환권<small>(中國聯合準備銀行兌換券)</small><ref>화북정무위원회 영역.</ref><br>몽강은행권<small>(蒙疆銀行券)</small><ref>몽골 자치방 영역</ref>
|-
|-
! style="background:#b0313f; color:#fff" | 연호
! style="background:#b0313f; color:#fff" | 연호
110번째 줄: 110번째 줄:
탕사오이 정권은 훈정을 표방하며 당국 체제하에 일당 독재가 시행되던 충칭 국민정부와 대비되는 다당제 민주정부를 표방하였다. 이는 충칭 국민정부의 독재정과 대조되는 민주정을 채택하여 정권의 정통성을 세우려는 의도도 있었으나 탕사오이 그 자신이 호법운동과 국민당 반장파에 참여한 전적이 있는 친 민주 인사이기 때문이기도 하였다. 탕사오이 정권은 자신들이 국민정부와 달리 진정으로 민주주의를 실현하는, 신해혁명으로 성립된 중화민국의 적통이라고 선전하며 [[쑹칭링 (민국 38)|쑹칭링]], [[황옌페이 (민국 38)|황옌페이]], [[장란 (민국 38)|장란]], [[선쥔루 (민국 38)|선쥔루]], [[후스 (민국 38)|후스]] 등의 명망높은 민주파 인사들을 포섭하려고 시도하였으나 모두 실패로 돌아갔다.
탕사오이 정권은 훈정을 표방하며 당국 체제하에 일당 독재가 시행되던 충칭 국민정부와 대비되는 다당제 민주정부를 표방하였다. 이는 충칭 국민정부의 독재정과 대조되는 민주정을 채택하여 정권의 정통성을 세우려는 의도도 있었으나 탕사오이 그 자신이 호법운동과 국민당 반장파에 참여한 전적이 있는 친 민주 인사이기 때문이기도 하였다. 탕사오이 정권은 자신들이 국민정부와 달리 진정으로 민주주의를 실현하는, 신해혁명으로 성립된 중화민국의 적통이라고 선전하며 [[쑹칭링 (민국 38)|쑹칭링]], [[황옌페이 (민국 38)|황옌페이]], [[장란 (민국 38)|장란]], [[선쥔루 (민국 38)|선쥔루]], [[후스 (민국 38)|후스]] 등의 명망높은 민주파 인사들을 포섭하려고 시도하였으나 모두 실패로 돌아갔다.


그러나 민주정을 표방했음에도 불구하고 탕사오이 정권은
그러나 민주정을 표방했음에도 불구하고 탕사오이 정권은 실질적으로는 과두정의 형태로 운영되었다. 정권의 수장인 탕사오이 본인은 일관되게 민주정을 주장하였으나 실상은 정권의 실권을 쥔 지나 파견군과 일본인 고문들 그리고 군정부장으로서 군권을 장악한 국민군<ref>펑위샹계 서북군벌.</ref> 출신 스여우싼과 화북정무위원회 및 남방계 금융인들이 끊임없이 알력 다툼을 이어가며 아슬아슬하게 이어지는 위태로운 모습을 보였다.
 
이는 근본적으로 탕사오이가 군벌시대 실권자의 필수요소인 군권과 금권, 파벌 이 셋 중 그 무엇도 가지지 못한 채 일본군에 의해 옹립된 허수아비였기 때문이었다. 전신인 유신정부 성립년도인 1938년 기준 2년 전인 1926년부터 탕사오이는 정계에 실질적인 영향력을 행사하지 못하는 사회 원로의 위치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닌 존재였기에 그는 필연적으로 여러 세력에 의해 휘둘리며 정부를 구성할 수 밖에 없었다.
 
일례로 난징 민국정부 설립 당시 탕사오이는 전국 총선거까지는 아니더라도 행정권이 미친다고 판단되는 화북과 화동 지역에 대해 국회의원 선거를 실시하여 의회를 구성하고 그 의회를 통해 정당성을 부여받을 예정이었다. 그러나 몽강을 통제하는 북지나방면군과 화북 정권은 이 구상을 극렬히 반대하였으며 결국 그는 화북의 중화민국 임시정부, 자신의 기반인 유신정부, 그리고 몽강의 왕공족들이 각각 3/1씩 지분을 가진 회의를 통해 정부를 구성하였으며 이마저도 화북 임정은 화북정무위원회로, 몽강국은 몽골 자치방(蒙古自治邦)으로 따로노는 되다만 국가가 되어버리고 말았다.
== 군사 ==
== 군사 ==



2024년 11월 1일 (금) 22:08 판

[ 문서 보기 ]
[ 세계관 설명 ]
[ 세계관 설명 ]
중국이 제국주의에 의해서 망한다면
중국인은 망국의 인간으로 살아가게 될 것이다.
그러나 중국이 공산주의에 의해서 망한다면
중국인은 노예로도 살아갈 수 없을 것이다.
민국 38(民國三十八)은 가장 대표적인 대체역사 소재 중 하나인 중화민국국공내전 승리를 가정한 세계관 입니다.
민국 38년(1949년) 중화민국의 국공내전 승리 이후 중국과 동아시아 국가들을 중심으로 변화한 여러 정치, 사회, 문화, 역사를 중점적으로 다루고 있습니다.


일본 제국괴뢰국
[ 펼치기 · 접기 ]
탕사오이 정권 관련 틀
[ 펼치기 · 접기 ]
중국의 역사
[ 펼치기 · 접기 ]
선진시대 황하 문명(黃河文明)
하(夏)
상(商)
주(周) 서주(西周)
동주(東周)
춘추전국시대 ( 춘추 | 전국 )
춘추오패 | 전국칠웅
진한시대 진(秦)
초한쟁패기
후초(後楚) | 서초(西楚) | 십팔제후국
한(漢) 전한(前漢)
신(新)
현한(玄漢)
후한(後漢)
위진남북조시대 삼국 위(魏) 촉(蜀) 오(吳)
진(晉) 서진(西晉)
동진(東晉)
환초(桓楚)
오호십육국
전진(前秦)
남북조 송(宋) 북위(北魏)
제(齊)
양(梁)
후량(後梁)
서위(西魏)
동위(東魏)
진(陳)
북주(北周)
북제(北齊)
수당시대 수(隋)
당(唐)
무주(武周) | 위연(僞燕) | 황제(黃齊)
오대십국시대 오대십국 십국 후량(後梁) 여러 민족들
후당(後唐)
후진(後晉)
요(遼)
서요(西遼)
후한(後漢)
후주(後周)
송원시대 송(宋) 북송(北宋)
서하
(西夏)
남송
(南宋)
금(金)
몽골 제국
원(元)
북원(北元)
명청시대 명(明)
순(順) | 남명(南明) | 후금(後金)
오주(吳周) | 동녕(東寧)
청(淸)
태평천국(太平天國)
근현대 청나라 소조정 | 임시정부(臨時政府)
북양정부(北洋政府)
중화제국(中華帝國) | 호법정부(護法政府) | 군벌세력
우한정부
국민정부
(國民政府)
탕사오이 정권
일치시기
소비에트 지구
중화소비에트공화국
중화민국(中華民國)
제1공화국(第一共和國) | 제2공화국(第二共和國)

틀:제2차 세계 대전 참전국 (민국 38)


틀:추축국 (민국 38)

중화민국
中華民國 | Republic of China
일본 제국괴뢰국
국기 국새
新民主義
신민주의[1]
1940년 ~ 1945년
성립 이전 멸망 이후
중화민국 임시정부 중화민국 국민정부
중화민국 유신정부
국가 정보
이칭 탕사오이 민국정부[2]
唐紹儀民國政府
국가 경운가
위치 중국 동부 해안 일대
면적 1940년 기준
수도 난징특별시
정치 체제 일본 제국의 괴뢰정부

공화제, 다당제, 군사독재, 신민주의[1]
주석
(국가원수)
탕사오이(1940-1944)
량훙즈(대리, 1944-1945)
국무총리
(정부수반)
량훙즈(1940-1944)
천롄보(1944-1945)
여당 중화민국신민회(中華民國新民會)
언어 중국어, 일본어
문자 한자, 가나 문자
종교 유교, 불교, 도교, 기독교
민족 중국인, 일본인
화폐 중앙저비은행권(中央儲備銀行券)[3]
중국연합준비은행태환권(中國聯合準備銀行兌換券)[4]
몽강은행권(蒙疆銀行券)[5]
연호 중화민국(中華民國)
현재 국가 중국 (민국 38)의 기 중국

개요

중화민국 난징 민국정부(中華民國南京民國政府) 또는 탕사오이 정권(唐紹儀政權)은 북양정부의 초대 국무총리를 지낸 탕사오이가 일본측의 공작에 따라 포섭된 이후, 1940년 3월 30일 기존 자신이 수반으로 있던 중화민국 유신정부와 화북의 중화민국 임시정부 그리고 몽강연합자치정부를 병합하여 건국한 괴뢰국이다. 그 후 탕사오이는 스스로 주석이 되어 일본 제국과의 화친과 민주, 반공을 내세웠다. 전쟁에서 일본 제국이 불리해지자 자연스럽게 탕사오이 정부 역시 쇠퇴하였고, 탕사오이의 사망 이후에도 간신히 유지되었으나 1945년 1n월 nn일 해군부장 런위안다오 장군이 쿠데타를 일으켜 충칭 국민정부에 복종을 선언하며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역사

정치

탕사오이 정권은 훈정을 표방하며 당국 체제하에 일당 독재가 시행되던 충칭 국민정부와 대비되는 다당제 민주정부를 표방하였다. 이는 충칭 국민정부의 독재정과 대조되는 민주정을 채택하여 정권의 정통성을 세우려는 의도도 있었으나 탕사오이 그 자신이 호법운동과 국민당 반장파에 참여한 전적이 있는 친 민주 인사이기 때문이기도 하였다. 탕사오이 정권은 자신들이 국민정부와 달리 진정으로 민주주의를 실현하는, 신해혁명으로 성립된 중화민국의 적통이라고 선전하며 쑹칭링, 황옌페이, 장란, 선쥔루, 후스 등의 명망높은 민주파 인사들을 포섭하려고 시도하였으나 모두 실패로 돌아갔다.

그러나 민주정을 표방했음에도 불구하고 탕사오이 정권은 실질적으로는 과두정의 형태로 운영되었다. 정권의 수장인 탕사오이 본인은 일관되게 민주정을 주장하였으나 실상은 정권의 실권을 쥔 지나 파견군과 일본인 고문들 그리고 군정부장으로서 군권을 장악한 국민군[6] 출신 스여우싼과 화북정무위원회 및 남방계 금융인들이 끊임없이 알력 다툼을 이어가며 아슬아슬하게 이어지는 위태로운 모습을 보였다.

이는 근본적으로 탕사오이가 군벌시대 실권자의 필수요소인 군권과 금권, 파벌 이 셋 중 그 무엇도 가지지 못한 채 일본군에 의해 옹립된 허수아비였기 때문이었다. 전신인 유신정부 성립년도인 1938년 기준 2년 전인 1926년부터 탕사오이는 정계에 실질적인 영향력을 행사하지 못하는 사회 원로의 위치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닌 존재였기에 그는 필연적으로 여러 세력에 의해 휘둘리며 정부를 구성할 수 밖에 없었다.

일례로 난징 민국정부 설립 당시 탕사오이는 전국 총선거까지는 아니더라도 행정권이 미친다고 판단되는 화북과 화동 지역에 대해 국회의원 선거를 실시하여 의회를 구성하고 그 의회를 통해 정당성을 부여받을 예정이었다. 그러나 몽강을 통제하는 북지나방면군과 화북 정권은 이 구상을 극렬히 반대하였으며 결국 그는 화북의 중화민국 임시정부, 자신의 기반인 유신정부, 그리고 몽강의 왕공족들이 각각 3/1씩 지분을 가진 회의를 통해 정부를 구성하였으며 이마저도 화북 임정은 화북정무위원회로, 몽강국은 몽골 자치방(蒙古自治邦)으로 따로노는 되다만 국가가 되어버리고 말았다.

군사

경찰

76호실

외교 및 이념

주요 인사

참고문헌

매체에서

여담


  1. 1.0 1.1 중국국민당삼민주의를 반박하기 위해 일본 제국에서 중국의 유교사상을 바탕으로 만든 새로운 이념.
  2. 탕사오이 정권이라고도 하지만 이건 한국에서의 주 사용명칭이고, 중국에서는 탕사오이 민국정부라고 지칭하는 경우가 많다.
  3. 정부 직할 영역.
  4. 화북정무위원회 영역.
  5. 몽골 자치방 영역
  6. 펑위샹계 서북군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