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mmunist 1968 (토론 | 기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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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치니 스캔들로 정치적 위기에 처한 데 갈로 총리는 [[1957년 남이탈리아 총선|1957년 조기 총선]]을 단행했다. 1957년 3월 24일 제4대 총선에서 기민당은 85석으로 의석을 잃었지만 여전히 제1당을 유지했다. 선거 후 기민당 내에서는 새로운 지도부를 요구하는 목소리가 높아졌고, 결국 [[마르코 산타마리아]]가 새로운 당수이자 총리로 선출되었다. 산타마리아는 데 갈로와 달리 "경험과 안정의 정치"를 내세우며 더욱 보수적인 노선을 추구했다. 그는 [[시칠리아 인민당]]과 연정을 구성하여 92석의 안정적 과반을 확보했다. | 마치니 스캔들로 정치적 위기에 처한 데 갈로 총리는 [[1957년 남이탈리아 총선|1957년 조기 총선]]을 단행했다. 1957년 3월 24일 제4대 총선에서 기민당은 85석으로 의석을 잃었지만 여전히 제1당을 유지했다. 선거 후 기민당 내에서는 새로운 지도부를 요구하는 목소리가 높아졌고, 결국 [[마르코 산타마리아]]가 새로운 당수이자 총리로 선출되었다. 산타마리아는 데 갈로와 달리 "경험과 안정의 정치"를 내세우며 더욱 보수적인 노선을 추구했다. 그는 [[시칠리아 인민당]]과 연정을 구성하여 92석의 안정적 과반을 확보했다. | ||
=== 과도기(1957~1964) === | === 과도기 (1957~1964) === | ||
==== 산타마리아 체제 ==== | ==== 산타마리아 체제 ==== | ||
1957년 3월 조기 총선 이후 집권한 마르코 산타마리아 총리는 전임자 데 갈로와는 확연히 다른 정치 스타일을 보였다. 데 갈로가 카리스마적 지도력과 적극적 개혁을 추구했다면, 산타마리아는 "검증된 경험과 점진적 안정"을 강조하는 온건 보수주의를 택했다. 그는 취임사에서 "변화를 위한 변화는 혼란을 낳을 뿐"이라며 급진적 정책 변화를 지양할 것임을 분명히 했다. 산타마리아는 시칠리아 인민당과의 연정을 통해 92석의 안정적 과반을 확보했지만, 이는 지역주의 세력과의 타협을 의미하기도 했다. 로렌초 루소 시칠리아 인민당 당수는 연정 참여의 대가로 '남부개발부 장관'직과 시칠리아 지역에 대한 대규모 SOC 투자를 약속받았다. 이러한 지역 밀착형 정치는 향후 남이탈리아 정치의 중요한 특징이 되었다. | 1957년 3월 조기 총선 이후 집권한 마르코 산타마리아 총리는 전임자 데 갈로와는 확연히 다른 정치 스타일을 보였다. 데 갈로가 카리스마적 지도력과 적극적 개혁을 추구했다면, 산타마리아는 "검증된 경험과 점진적 안정"을 강조하는 온건 보수주의를 택했다. 그는 취임사에서 "변화를 위한 변화는 혼란을 낳을 뿐"이라며 급진적 정책 변화를 지양할 것임을 분명히 했다. 산타마리아는 시칠리아 인민당과의 연정을 통해 92석의 안정적 과반을 확보했지만, 이는 지역주의 세력과의 타협을 의미하기도 했다. 로렌초 루소 시칠리아 인민당 당수는 연정 참여의 대가로 '남부개발부 장관'직과 시칠리아 지역에 대한 대규모 SOC 투자를 약속받았다. 이러한 지역 밀착형 정치는 향후 남이탈리아 정치의 중요한 특징이 되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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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정책에서는 사민당이 주도하는 복지 확대 정책이 추진되었다. 실업급여가 확대되고 공공의료 시스템이 강화되었으며, 대학 장학금 제도가 크게 늘어났다. 외교 정책에서는 공화당의 영향으로 평화 지향적 외교가 강화되어, 미국과의 관계에서도 더욱 자주적인 목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내정에서는 기민당이 주도하는 안정 중심 행정이 유지되었지만, 3당 합의로 점진적 정치개혁도 추진되었다. 특히 지방자치제가 확대되어 더 많은 지역에서 민선 단체장 선거가 실시되었고, 언론 자유도 이전보다 확대되었다. | 경제 정책에서는 사민당이 주도하는 복지 확대 정책이 추진되었다. 실업급여가 확대되고 공공의료 시스템이 강화되었으며, 대학 장학금 제도가 크게 늘어났다. 외교 정책에서는 공화당의 영향으로 평화 지향적 외교가 강화되어, 미국과의 관계에서도 더욱 자주적인 목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내정에서는 기민당이 주도하는 안정 중심 행정이 유지되었지만, 3당 합의로 점진적 정치개혁도 추진되었다. 특히 지방자치제가 확대되어 더 많은 지역에서 민선 단체장 선거가 실시되었고, 언론 자유도 이전보다 확대되었다. | ||
=== 해빙기 (1964~1970) === | === 해빙기 (1964~1970) === | ||
2025년 8월 26일 (화) 00:19 판
| 이탈리아 왕국 Regno d'Italia (1946~1986) | ||||||||||||
| 남이탈리아 사회주의 공화국 Repubblica Socialista dell'Italia Meridionale (1986~1987)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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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F.E.R.T. 사보이 왕가의 표어 (1946~1986) | ||||||||||||
| Pace, Lavoro, Socialismo, Democrazia 평화, 노동, 사회주의, 민주주의 (1986~1987)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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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역사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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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탈리아 통일 1861년 3월 17일 • 생제르맹 조약 1920년 7월 16일 • 남이탈리아 왕국 성립 1946년 6월 12일 • 초봄의 혁명 1986년 3월 15일 • 북이탈리아와의 통일, 멸망 1987년 9월 2일 | ||||||||||||
| 지리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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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국제 전화 코드 | ||||||||||||
| +39 | ||||||||||||
| 국가 코드 | ||||||||||||
| IT, SIT, RIT, 380 | ||||||||||||
개요
남이탈리아(이탈리아어: Italia Meridionale)는 1946년부터 1987년까지 41년 간 존재했던 이탈리아 반도 남부의 국가이다. 정식 국명은 이탈리아 왕국(이탈리아어: Regno d'Italia)이었으며, 1986년 남이탈리아 국체전환 국민투표를 통해 남이탈리아 사회주의 공화국(이탈리아어: Repubblica Socialista dell'Italia Meridionale)으로 체제를 전환한 후 1987년 북이탈리아와 통일되어 현재의 이탈리아 사회주의 연방공화국에 흡수되었다.
제2차 세계대전 종료 후 이탈리아 반도가 남북으로 분단되면서 탄생한 국가로, 수도는 로마였다. 북 이탈리아의 경우 반빨치산 파르티잔, 특히 이탈리아 공산당의 중심으로 수립된 공화국인 반면 남 이탈리아는 파시즘 정권인 이탈리아 왕정을 계승하는 부르주아 민주주의 국가였다. 북쪽으로는 북위 37도선을 경계로 북이탈리아 사회주의 공화국과 마주했으며, 영토는 라치오, 아브루초, 캄파니아, 풀리아, 바실리카타, 칼라브리아, 시칠리아, 사르데냐 등 8개 주로 구성되었다.
남이탈리아는 41년간의 역사 동안 입헌군주제와 형식적 의회민주주의를 표방했으나, 실제로는 왕권과 군부의 강력한 영향력 하에 있었으며, 특히 1970년대 후반부터 1983년까지는 사실상의 군사독재 체제를 경험했다. 이후 1985년 사회주의 정권이 수립되면서 1986년 국체 전환하며 왕정을 폐지했고, 1987년 연방 헌법 개정을 통하여 북이탈리아에 흡수통일되어 멸망하였다.
역사
초기 (1946~1957)
개국
제2차 세계대전이 종료된 후 이탈리아 반도는 연합국의 점령 하에 놓였다. 1946년 초, 미국과 소련 간의 냉전이 본격화되면서 이탈리아 반도 역시 분할 점령의 대상이 되었다. 3월에 체결된 얄타 협정에 따라 이탈리아는 로마 북쪽 37도선을 경계로 남북으로 분할되었다. 북부는 소련과 반파시스트 파르티잔의 영향 하에 공산주의 정권이 들어섰고, 남부는 미국과 영국의 지원을 받는 왕정 체제가 수립되었다.
1946년 6월 12일, 공식적으로 이탈리아 왕국을 계승하는 남이탈리아 왕국이 선포되었다. 초대 국왕에는 사보이아 왕가의 움베르토 2세가 즉위했으며, 수도는 로마로 정해졌다. 초대 총리에는 전쟁 중 반파시스트 활동을 벌였던 가톨릭 정치인 프란체스코 데 갈로가 임명되어 기독교민주인민연합 정부를 이끌었다. 건국과 동시에 실시된 1946년 제헌의회 선거는 남이탈리아의 정치 체제를 결정하는 중요한 선거였다. 총 5개 정당이 경쟁한 이 선거에서 데 갈로가 이끄는 기독교민주인민연합이 77석(44.8%)을 획득하여 제1당이 되었다. 그러나 단독 과반에는 실패하여 이탈리아 사회민주당(23석, 13.4%)과 연립정부를 구성했다.
주목할 만한 점은 공산주의자 인터내셔널 남이탈리아 지부가 55석(32.0%)을 획득하여 강력한 제1야당으로 부상한 것이었다. 이는 전후 경제적 혼란과 사회적 불안 속에서 좌파 이념에 대한 상당한 지지가 존재했음을 보여주었다. 이탈리아 공화당(11석)과 시칠리아 인민당(6석)은 각각 반왕정 세력과 지역주의 세력을 대변했다. 이에 따라 데 갈로 총리는 취임과 동시에 경제-정치적 안정을 요구하는 '반공 친서방 노선'을 명확히 했다. 1947년 체결된 이탈리아-미국 상호방위조약을 통해 미군의 나폴리, 타란토 기지 주둔을 허용하고, 경제적으로는 마셜 플랜의 수혜국이 되어 전후 복구에 박차를 가했다. 정치적으로는 공산주의자 인터내셔널 남이탈리아 지부를 견제하기 위해 '국가안보법'을 제정했고, 교육 정책에서는 가톨릭 교육을 강화하여 종교적 보수주의를 국가 이념으로 삼았다. 경제 정책에서는 자유시장경제 체제를 도입하되, 주요 기간산업은 국가가 관리하는 혼합경제 모델을 채택했다.
반공 정권의 강화
남이탈리아 건국 초기의 가장 심각한 위기는 1948년 3월의 페루자 위기였다. 북부 공산 정권이 로마 라인 경계 지역인 페루자에 대해 기습적인 군사 공격을 감행한 것이다. 북부군은 소련제 주피터 미사일로 4일간 페루자를 포격했고, 이에 남이탈리아 왕국군과 미군이 연합하여 대응했다. 이 사건으로 양측 합계 262명의 군인이 사망하고 민간인 43명이 희생되는 참사가 벌어졌다. 비록 남이탈리아가 영토 방어에 성공했지만, 분단 체제의 군사적 대립이 현실화되었음을 보여주는 사건이었다. 이후 양측은 '페루자 협정'을 체결하여 군사분계선을 공식화하고 우발적 충돌 방지를 위한 핫라인을 설치했다.
뒤이은 1949년 9월에 발생한 로마 노동자 항쟁은 남이탈리아 초기 사회의 계급 갈등을 적나라하게 드러낸 사건이었다. 국영철강공사 노동자 마르코 로시의 산업재해 사망을 계기로 시작된 이 폭동은 5일간 계속되었고, 15만 명의 노동자와 시민이 참여하는 대규모 반정부 시위로 발전했다. 항쟁 과정에서 정부군과 시위대 간의 무력 충돌로 47명이 사망하고 234명이 부상했다. 데 갈로 정부는 이 사건을 '공산주의자들의 선동'으로 규정하고 강경 진압했지만, 실제로는 전후 경제적 불평등과 노동자들의 생존권 요구가 폭발한 것이었다. 이 사건은 남이탈리아 사회의 깊은 계급 갈등을 보여주었고, 이후 정부의 노동 정책 전환에 영향을 미쳤다.
1950년 한국전쟁 발발을 계기로 남이탈리아 재무장 논란이 불거졌다. 미국의 압박으로 데 갈로 정부는 '왕국 방위력 강화법'을 제정하여 국방비 3배 증액, 의무복무 기간 연장, 3개 기갑사단 신설 등을 추진했다. 그러나 이에 대해 코민테른을 비롯한 좌파 세력과 평화주의자들이 격렬히 반발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2대 총선과 3대 총선에서 공산당이 참패하고 기민당이 압도적으로 승리한 것은 반공 정권의 공고화를 위한 토대로 비추어졌다.
1955년 4월 17일 제3대 총선은 데 갈로 내각 9년의 성과에 대한 국민적 평가였다. 선거 결과는 모든 예상을 뒤엎고 기독교민주인민연합의 압도적 승리로 끝났다. 기민당은 106석(61.6%)을 획득하여 남이탈리아 건국 이래 최초로 단독 과반을 확보했다. 반면 사민당은 43석에서 32석으로, 공산당은 31석에서 19석으로 크게 후퇴했다. 이는 '안정과 번영을 통한 공산주의 위협 극복'이라는 데 갈로의 메시지가 국민들에게 받아들여진 결과였다. 특히 페루자 포격전에서의 성공적 방어와 마셜 플랜을 통한 경제 회복이 기민당에 대한 신뢰를 높였다.
정권의 위기와 산타마리아 체제(1957)
1955년 압승의 여세를 몰던 데 갈로 정부는 1956년 마치니 내무장관 부패 스캔들로 큰 타격을 입었다. 알베르토 마치니 내무장관이 나폴리 항만 운송업체들과 결탁하여 정부 계약을 특혜 배정하고 거액의 뇌물을 받은 사실이 발각된 것이다. 더욱 충격적인 것은 야당 지도자인 조반니 에스포지토 사민당 당수도 같은 업체들로부터 돈을 받았다는 사실이 드러난 것이었다. 에스포지토는 구속되었고, 사민당은 루치아 비안코를 새 당수로 선출하여 과거와의 단절을 선언했다. 이 사건은 '깨끗한 정치'에 대한 국민적 요구를 높였고, 기성 정치에 대한 불신을 확산시켰다.
마치니 스캔들로 정치적 위기에 처한 데 갈로 총리는 1957년 조기 총선을 단행했다. 1957년 3월 24일 제4대 총선에서 기민당은 85석으로 의석을 잃었지만 여전히 제1당을 유지했다. 선거 후 기민당 내에서는 새로운 지도부를 요구하는 목소리가 높아졌고, 결국 마르코 산타마리아가 새로운 당수이자 총리로 선출되었다. 산타마리아는 데 갈로와 달리 "경험과 안정의 정치"를 내세우며 더욱 보수적인 노선을 추구했다. 그는 시칠리아 인민당과 연정을 구성하여 92석의 안정적 과반을 확보했다.
과도기 (1957~1964)
산타마리아 체제
1957년 3월 조기 총선 이후 집권한 마르코 산타마리아 총리는 전임자 데 갈로와는 확연히 다른 정치 스타일을 보였다. 데 갈로가 카리스마적 지도력과 적극적 개혁을 추구했다면, 산타마리아는 "검증된 경험과 점진적 안정"을 강조하는 온건 보수주의를 택했다. 그는 취임사에서 "변화를 위한 변화는 혼란을 낳을 뿐"이라며 급진적 정책 변화를 지양할 것임을 분명히 했다. 산타마리아는 시칠리아 인민당과의 연정을 통해 92석의 안정적 과반을 확보했지만, 이는 지역주의 세력과의 타협을 의미하기도 했다. 로렌초 루소 시칠리아 인민당 당수는 연정 참여의 대가로 '남부개발부 장관'직과 시칠리아 지역에 대한 대규모 SOC 투자를 약속받았다. 이러한 지역 밀착형 정치는 향후 남이탈리아 정치의 중요한 특징이 되었다.
뒤이은 1959년 5월 14일 로마 제2대 민선 시장 선거는 1957년 총선 이후 변화된 정치 지형을 지방 차원에서 확인하는 계기였다. 이번 선거는 1954년과 달리 4개 정당이 모두 20% 이상의 득표율을 기록하는 초박빙의 경쟁을 보였다. 기민당의 발렌티나 마르첼로(28.4%), 사민당의 라파엘레 콘티(26.9%), 공산당의 클라우디아 페라리(24.2%), 공화당의 마르코 산티니(20.5%)가 치열하게 경쟁했다.
결선투표에서 라파엘레 콘티가 51.7%로 승리하여 사민당 출신 최초의 로마 시장이 되었다. 이는 기민당의 전국적 우세에도 불구하고 수도 로마에서는 여전히 중도좌파 세력이 경쟁력을 갖고 있음을 보여주었다. 특히 주목할 점은 1949년 노동자 항쟁의 무대였던 트라스테베레에서 공산당이 여전히 강세를 보인 것으로, 로마 노동계층의 좌파 정서가 지속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로마 시장 선거에서의 패배 이후, 산타마리아 내각이 직면한 두 번째 중대한 시련은 1961년 앙코나 미군 핵미사일 기지 설치 반대 투쟁이었다. 미국이 소련과 동유럽을 겨냥한 주피터 중거리 탄도미사일 15기를 앙코나 외곽에 배치하려 하자, 남이탈리아 전역에서 반핵 평화 운동이 폭발했다. 1961년 1월 12일 계획이 처음 보도된 후, 앙코나 시의회는 22표 대 8표로 '핵미사일 기지 설치 반대 결의안'을 통과시켰다. 프란체스코 벤투라 앙코나 시장(사민당)은 "앙코나는 평화의 도시이지 전쟁의 도시가 아니다"라고 선언했다. 공산당의 안드레아 모레티 당수는 '앙코나 핵기지 저지를 위한 전국민 투쟁'을 선포했고, 2월 4일 앙코나에서 8만 명이 참가한 대규모 평화 집회가 열렸다.
특별히 주목할 점은 교황 요한 23세가 "핵무기 확산에 대한 깊은 우려"를 표명하며 간접적으로 반대 입장을 밝힌 것이었다. 가톨릭 교회의 우려 표명은 보수 가톨릭 유권자들에게도 영향을 미쳐 정부의 입지를 더욱 어렵게 만들었다. 결국 4개월간의 격렬한 반대 투쟁 끝에 3월 25일 최종 타협안이 도출되었다. 핵미사일 배치는 완전히 취소되고 대신 재래식 레이더 기지로 대체되었으며, 5년마다 기지 존속 여부를 재검토하기로 했다.
산타마리아 2기 체제와 체제의 위기
앙코나 투쟁의 여파는 1963년 4월 28일 제5대 총선에서 고스란히 나타났다. 이번 선거는 '평화와 자주성'이 핵심 쟁점으로 부상한 최초의 선거였다. 각 정당들은 앙코나 사건에 대한 자신들의 입장을 명확히 제시해야 했다. 산타마리아 총리와 기민당은 "서방 동맹 내에서의 자주적 외교"를 내세우며 미국과의 동맹은 유지하되 종속은 거부한다는 입장을 밝혔다. 공산당의 신임 당수 알키 세파르디 당수는"완전한 비핵화 선언"과 "남북 평화 통일 추진"을 공약했다. 사민당의 레오나르도 페라리 당수는 "점진적 복지국가 건설"을 내세우며 중도좌파 노선을 강화했다. 가장 주목받은 것은 이탈리아 공화당의 알레시아 비안키 당수였다. 그녀는 "새로운 정치, 깨끗한 미래"를 표방하며 정치 혁신을 강조했다. 특히 젊은 전문직층과 도시 중산층을 겨냥한 현대적 캠페인을 펼쳐 주목을 받았다.
선거 결과는 예상보다 박빙이었다. 기민당이 57석으로 1당을 유지했지만 의석을 크게 잃었고, 사민당이 50석으로 2당을 차지했다. 그 외에는 공산당 30석, 공화당 31석으로, 4당이 비슷한 의석을 차지하는 완전한 다당제 시대가 개막되었다. 흥미롭게도 선거에서 아슬아슬한 1위, 진영 구도에서는 열세에 쳐친 산타마리아가 움베르토 2세 국왕의 중재를 통해 다시 총리로 선임되는 역설적 상황이 벌어졌다. 범-반기민당 전선이 과반을 차지했지만 공화당은 까다로운 조건을 제시했고, 공산당은 연정 참여보다는 '외부 지원'만을 검토한다고 밝혔다.
이러한 교착 상태에서 산타마리아가 "국민통합정부" 구성을 제안하며 전격적으로 나섰다. 그는 '퀴리날레 합의'를 통해 사민당, 공화당과 3당 연립 통합정부를 구성하는데 성공했다. 이는 "선거에서 패배한 세력이 뒷거래를 통해 정권을 되찾는" 초유의 사건으로 많은 논란을 일으켰지만, 동시에 남이탈리아 정치의 협상과 타협 문화를 보여주는 사례이기도 했다. 3당 연립정부는 남이탈리아 정치사상 가장 복잡한 권력 구조를 만들어냈다. 총리는 기민당의 산타마리아, 부총리는 사민당의 페라리, 외무장관은 공화당의 알레시아 비안키가 맡았다. 각 당의 정책적 지향이 달랐기 때문에 정부 운영은 끊임없는 조정과 타협의 연속이었다.
경제 정책에서는 사민당이 주도하는 복지 확대 정책이 추진되었다. 실업급여가 확대되고 공공의료 시스템이 강화되었으며, 대학 장학금 제도가 크게 늘어났다. 외교 정책에서는 공화당의 영향으로 평화 지향적 외교가 강화되어, 미국과의 관계에서도 더욱 자주적인 목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내정에서는 기민당이 주도하는 안정 중심 행정이 유지되었지만, 3당 합의로 점진적 정치개혁도 추진되었다. 특히 지방자치제가 확대되어 더 많은 지역에서 민선 단체장 선거가 실시되었고, 언론 자유도 이전보다 확대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