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온 브론스타인: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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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의 지도자중에서 처음으로 미국 외의 지역에서 태어난 인물이며<ref>어린 시절에 미국으로 이민을 왔기 때문에 영어 사용에는 지장이 없는 것을 넘어 미국에서 태어난 모든 사람중 가장 영어의 기교를 잘 살린다는 평가를 받았다. 오히려 모국어인 우크라이나어나 러시아어에는 매우 서툴러 기초적인 의사 표현밖에 못한다.</ref>, 동시에 최초의 비(非)기독교도 겸 무종교인, 사회주의자 국가원수이다. 정치에 투신하기 전에는 언론가 겸 문필가로서 활동하였으며 그는 정치적인 업적 외에도 [[브론스타인주의]]로 대표되는 사상/철학적 업적과 특유의 달변가적인 기질에서 모두 최정상급이라고 평가받았다.
미국의 지도자중에서 처음으로 미국 외의 지역에서 태어난 인물이며<ref>어린 시절에 미국으로 이민을 왔기 때문에 영어 사용에는 지장이 없는 것을 넘어 미국에서 태어난 모든 사람중 가장 영어의 기교를 잘 살린다는 평가를 받았다. 오히려 모국어인 우크라이나어나 러시아어에는 매우 서툴러 기초적인 의사 표현밖에 못한다.</ref>, 동시에 최초의 비(非)기독교도 겸 무종교인, 사회주의자 국가원수이다. 정치에 투신하기 전에는 언론가 겸 문필가로서 활동하였으며 그는 정치적인 업적 외에도 [[브론스타인주의]]로 대표되는 사상/철학적 업적과 특유의 달변가적인 기질에서 모두 최정상급이라고 평가받았다.


그가 창당한 [[미국 사회주의혁명당]] 내에서 그는 공산주의와 연쇄혁명, 중앙집권을 외치는 좌익 계파에 속하였다. [[적청혁명]] 정국 당시에는 [[미국 사회주의혁명당]]과 적군을 이끄는 국방부장관의 역할을 동시에 맡았으며, [[제3인터내셔널]]의 성립을 주도하였다.
그가 창당한 [[미국 사회주의혁명당]] 내에서 그는 공산주의와 연쇄혁명, 중앙집권을 외치는 좌익 계파에 속하였다. [[적청 내전]] 정국 당시에는 [[미국 사회주의혁명당]]과 적군을 이끄는 국방부장관의 역할을 동시에 맡았으며, [[제3인터내셔널]]의 성립을 주도하였다.


== 생애 ==
== 생애 ==

2022년 9월 30일 (금) 11:26 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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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산1968 SP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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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세계관 소개 ]
[ 세계관 소개 ]
세계를 바꾸는 것은 달을 탐험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혁명을 하는 것입니다.
자본주의로 후퇴하지 않고 사회주의를 건설하는 것입니다.
달을 비롯한 나머지 것들은 덤으로 주어질 것입니다.
– 루이 알튀세르 (1918~1990) –


레프 트로츠키의 미국 이민과 미국의 사회주의 대혁명, 그리고 뒤따르는 사회주의와 제국주의 진영의 냉전 구도를 다루는 대체역사 세계관입니다.
독일의 제1차 세계 대전 승리, 러시아 혁명의 실패, 미국의 사회주의 대혁명 등 다양한 역사적 사건들을 통해 1922년부터 2022년까지의 장대한 역사를 그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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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Communist 1968, 2022

미주 사회주의 연방 중앙집행위원회 의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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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
레온 브론스타인
미국 대통령 · 미국 부통령 · 미연합국 대통령 · 임시정부 대통령

연방 정부수반 · 사회주의혁명당 서기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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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주 사회주의 연방 정부 각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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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집행위원회 의장
레온 브론스타인
장관회의 주석 혁명당 중앙위원회 서기장
유진 데브스 레온 브론스타인
재무장관
내무장관
외무장관
노동장관
윌리엄 Z. 포스터 헬렌 켈러 유진 데브스 빌 헤이우드
법무장 관
국방장관
문화장관
경제산업장관
알렉산더 케렌스키 레온 브론스타인 존 리드 새뮤얼 곰퍼스
농업장관
보건후생장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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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스터 마흐노 C. E. 루텐버그 W. E. B. 듀보이스 그레이엄 스톡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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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설장관
치안행정장관
보훈장관
엘리자베스 걸리 플린 헨리 A. 월리스 막스 S. 헤이스 업튼 싱클레어


미국 사회주의혁명당 중앙서기국 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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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주 사회주의 연방 국방부장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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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초대 중앙집행위원회 의장
레온 브론스타인
Leon Bronstein
본명 레온 데이비슨 브론스타인
Leon Davidson Bronstein[1]
출생 1879년 11월 7일 (43세)
러시아 제국 헤르손현 야놉카
국적 러시아 제국 (1879~1892)
미합중국 (1892~1921)
미주 사회주의 연방 (1921~)
현직 미주 사회주의 연방 중앙집행위원회 의장
미국 사회주의혁명당 중앙서기국 국장
미주 사회주의 연방 국방부장관
제3인터내셔널 총회의장
재임 기간 초대 중앙집행위원회 의장[2]
1921년 10월 29일 ~ 현직
서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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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우자 나탈리 브론스타인 (1904~現)
자녀 유진, 니나, 레온, 서지오
학력 뉴욕 대학교 (영미문학 / B.A.)
베를린 훔볼트 대학교 (사학 / M.D.)
신체 174cm
종교 유대교[3]무종교 (국가 무신론)
소속 정당 미국 사회주의혁명당
약력 <월간 노동> 편집국장
미국사회당 뉴욕주 연합회장
미국 연방하원의원[4]
미국 사회주의혁명당 초대 서기국장
미주 사회주의 연방 초대 국방부장관
미주 사회주의 연방 초대 중앙집행위원회 의장

개요

Comrades, the revolution of workers, the importance of which was stressed by the RSPA all the time, has happened!
동지들, 사회주의혁명당이 언제나 그 중요성을 강조해온 노동자의 혁명이, 드디어 일어났습니다!

미국 혁명 직후 워싱턴 D.C. 국회의사당에서의 연설
Insurrection is an art, and like all arts has its own laws.
반란은 하나의 예술[5]과도 같다. 그리고 모든 예술과 마찬가지로 반란에도 고유한 법칙이 있는 법이다.

미주 사회주의 연방의 혁명가, 정치가, 언론인. 인류 역사상 2번째로[6] 일어난 사회주의 혁명인 미국 혁명을 주도하였으며 혁명으로 세워진 미주 사회주의 연방의 첫번째 지도자가 되었다.

미국의 지도자중에서 처음으로 미국 외의 지역에서 태어난 인물이며[7], 동시에 최초의 비(非)기독교도 겸 무종교인, 사회주의자 국가원수이다. 정치에 투신하기 전에는 언론가 겸 문필가로서 활동하였으며 그는 정치적인 업적 외에도 브론스타인주의로 대표되는 사상/철학적 업적과 특유의 달변가적인 기질에서 모두 최정상급이라고 평가받았다.

그가 창당한 미국 사회주의혁명당 내에서 그는 공산주의와 연쇄혁명, 중앙집권을 외치는 좌익 계파에 속하였다. 적청 내전 정국 당시에는 미국 사회주의혁명당과 적군을 이끄는 국방부장관의 역할을 동시에 맡았으며, 제3인터내셔널의 성립을 주도하였다.

생애

초기 생애

레온 브론스타인은 1879년 레프 다비노비치 브론시테인이라는 이름으로 우크라이나 헤르손 지역에서 태어났다. 그의 부모는 매우 부유한 유대계 부르주아였으며 그는 어릴적 어머니와 아버지를 따라 미국으로 이민을 가게 되었다. 13세에 러시아의 국적을 버리고 미국 국적을 얻었으며, 그 이전부터 영어를 공부했기 때문에 우크라이나어보다 영어를 더 잘하게 되었다.

그가 자리를 잡은 뉴욕 지역은 아일랜드계를 비롯한 여러 인종들이 모인 국제도시였다. 이때부터 브론스타인은 국제주의에 눈을 뜨게 되었다. 학교 성적은 일취월장하여 학교를 수석 졸업하였으며 독일어, 이디시어, 프랑스어 등에 능통하였다. 브론스타인은 1897년 뉴욕 대학교의 영문학과에 진학, 영어와 영미권의 문학을 전공하였다. 1903년 뉴욕대학교 졸업 이후 부모의 지원으로 운터덴린덴 대학교로 유학을 가 1905년까지 유럽사학을 공부했다.

독일 유학과 전향

사실 브론스타인은 어린 시절까지만해도 부모님의 영향으로 확고한 보수 성향을 가지고 있었으며 공산주의자들을 철부지 이상주의자로 여겼다. 그러나 독일 유학의 경험은 그의 모든 것을 바꾸어놓았다. 독일은 프리드리히 엥겔스의 지원을 받은 사회민주당이 주요 정당인 나라였으며, 더구나 브론스타인은 독일어를 읽히며 많은 헤겔과 마르크스, 엥겔스, 카우츠키 등의 저서를 원어로 생생히 읽을 수 있었다. 1904년, 그는 공산당 선언을 읽고 그 책이 이 세상에서 가장 위대한 책이라는 내용을 일기에 썼다.

공산당 선언을 읽은 것은 나에게 있어 하나의 일대 혁명이었다. 내 마음속 잔잔한 호수는 단두대의 칼날이 몰아치는 매서운 폭포로 바뀌었고 그 위의 조각배는 풍랑으로 변하였다. 내가 그동안 어렴풋이 품고 있던 이상이 마르크스의 책을 통하여 아름답고도 날카로운 문장으로 돌변하여 내 가슴을 사정 없이 내리 쳤다.
1904년 2월 1일, 브론스타인의 일기 中

따라서 그가 독일 유학에서 돌아왔을 때, 그의 친구들과 가족들은 놀라워했다고 한다. 하지만 브론스타인은 이에 개의치 않고 더욱 가열차게 공산주의를 공부하기 시작했으며 엥겔스와 카우츠키의 책을 손수 영어로 번역해 미국 사회에 전파했다.

혁명가로서

초기에 그는 미국에서 유행하던 생디칼리슴, 즉 노동조합 운동에 호의적인 입장이었다. 그러나 정작 노동조합에 가입되어있던 사람들이 기독교 윤리에 따르면서 혁명에 소극적 태도를 보이거나, 혹은 자신의 직장에만 이기적인 모습을 드러내자 이에 실망해 이를 비판하는 입장으로 돌아섰다. 그는 우연히 러시아의 사회주의자 블라디미르 레닌의 책자 <무엇을 할 것인가?>를 접하였고, 이에 영향을 받아 오직 권위있는 정당이 대중들을 올바른 방향으로 지도해야한다는 정치적 입장을 취하였다. 이러한 것의 일환으로 브론스타인은 1910년 월간 노동이라는 신문을 창간하여, 노동자들을 계몽하고자 하였다.

신랄한 비난와 조리있는 글 솜씨로 인해 그의 글은 이론적 체계성을 갖추고 있으면서도 노동자들이 이해할 수 있게 쉽게 쓰여졌다. 따라서 브론스타인의 인지도는 물론 인기 역시 폭발적으로 상승했고 1912년, 브론스타인은 뉴욕시 제6구의 하원 의원에 출마해 32.6%를 얻으며 당선되었다.

1914년, 제1차 세계 대전이 터지자, 그는 반전 운동을 벌이며 전세계 노동자들이 단결하여 전쟁을 멈출 것을 호소하였다. 같은 해 그는 하원 의원으로 재선되었으나, <월간 노동>에서 기성 정치인들을 신랄히 비난한 것 때문에 동료 의원들에게 연달아 소송을 맞았다. 더구나 그가 속해있던 정당인 미국 사회당 내부에서조차 생디칼리스트들의 비판을 받고 있었다. 하지만 이런 비난을 받을 수록 기성 정치권에 지쳐있던 미국의 노동자, 농민들에게서 브론스타인의 입지는 높아져갔다.

동시에 그는 비열한 정치적 술수를 통해 그의 정적들을 권력에서 밀어냈으며, 자신의 높은 인지도와 의원 경력을 통해 사회당의 당권을 사실상 탈취하기에 이른다. 1919년, 협상국의 1차 대전 패배로 인한 경제 공황이 미국을 덮치자, 사회당과 브론스타인의 지지도는 더더욱이 올라갔다.

전성기의 시작, 미국 혁명

혁명의 시작은 1920년 8월에서 시작되었다. 그는 형식상의 눈요기였던 당수 지명 투표를 통해 사회당의 당수로 선출되었고, 이후 당명을 사회당에서 사회주의혁명당으로 바꾸었다. 그는 미국 체제를 폭력 혁명으로 뒤엎자고 주장하였으며 이런 주장은 1919년 미국 공황으로 굶주림에 허덕이던 노동자들에게 열렬한 환영을 받았다. 그러면서도 유진 데브스, 빌 헤이우드 등 노조 관계자들에게 이익을 약속하며 이들을 자신의 편으로 끌어들이는 것도 잊지 않았다.

물론 브론스타인은 이 발언으로 공직에서 추방되지만, 그의 정치적인 영향력은 여전히 컸다.

1921년, 대공황이 정점에 이르며 좌파 성향의 IWW와 보수 성향의 미국노동연합이 합동으로 노조 총파업을 결의하였고 브론스타인은 이를 사회주의 혁명의 결호의 기회라고 생각해 좌파 성향 청년 장교들과 시민들을 상대로 그의 주특기인 선전 선동을 펼쳐 뉴욕과 필라델피아를 시작으로 집단 궐기를 일으키게 하였다. 시위는 처음에는 우발적으로 시작되었지만 미군이 이에 강경히 대응하며 시민들이 분노했고, 결국 묵혀 쌓여있던 체제에 대한 불만이 터져나와 1921년 10월 미국 정부는 붕괴되기에 이른다.

브론스타인은 워싱턴 D.C.에 무혈 입성, 국회의사당 앞 광장에서 미주 사회주의 연방을 선포하고 자신이 새 공화국의 국가 원수가 되었다. 이는 세계 최초의 사회주의 국가의 탄생이었다.

적청내전에서의 역할

나는 지금 진심으로 우리와 싸우게 될 저 불쌍한 거지새끼들한테 애도를 표하는 바이다. 우리는 단지 저 버러지 놈들의 목을 따기 위해 가는 게 아니다. 산채로 내장을 빼서 우리 탱크가 지나가는 길에 기름칠을 할 것이다.
1922년 6월의 연설 中

물론 미국의 잔당 역시 가만히 있지 않았고 이는 적청내전으로 이어졌다. 이때 적군에는 마땅히 전쟁을 이끌만한 고참 장교가 없던 상황이었고 따라서 브론스타인은 정치국 회의에서 만장 일치로 국방부장관으로 임명되었다. 그는 국가원수직과 국방장관직을 동시에 수행하게 된 것이었다.

레온 브론스타인은 현대식으로 무장하고 있는 미군의 7할 이상이 청군 측으로 넘어간 상황에서 적군이 내전에서 승리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따라서 그는 대중들에게 혁명의 당위성을 설명하여 시민군을 조직하는 동시에 미국 역사상 유례가 없던 초유의 징병제를 실시했다. 그는 고전 로마의 수법을 부활시켜 탈영을 하는 자가 있다면 그 부대의 장교를 처형하도록 하였고 또 청군으로 도주하는 반역자가 나왔다면 10명중 한명을 무작위로 사형시키는 무자비한 철권을 휘둘렀다. 당연히 미국의 자유주의적 문화에 익숙하였던 장병들은 반발하였으나 브론스타인의 확고한 성격과 지도력에 대다수 대중들이 감화되었다.

또한 적군이 점령한 지역에 철도는 물론이요 비행기까지 동원하여 전투 현장을 방문하고 장병들을 독려하는 연설을 하여 장병들의 마음을 움직이는 치밀한 선전 전술을 사용하였다. 브론스타인의 연설에 감화된 시민들은 자발적으로 군에 입대하여 순식간에 적군 장병 수는 50만명에서 220만명으로 늘어났고 시민군 및 민병대도 70만명의 규모로 발전하였다.

그는 독재자에 가까운 지휘 스타일을 가지고 있었고 전투를 피하는 장병들을 직접 때려 패며 겁쟁이라고 몰아 붙였다. 전쟁 공포증은 전부 나약한 병리학자들의 헛소리라고 치부하며 전쟁을 피하는 겁쟁이는 필요 없다며 권총까지 들이 밀었다고 한다. 이러한 흑역사도 있으나 그의 리더십이 적청내전에서 적군에게 막대한 도움이 된 것을 부인할 수는 없다.

사상

전위당 혁명론

당 원칙과 당 규율의 거부 및 조합에 대한 무제한적 예찬은 반혁명주의자들의 주요 정치 테제이다. 그리고 이것은 작업장 내에서의 조합이 조합 단위의 이익만을 실천하는 룸펜적 이익 단체로 발전하여 마르크스주의의 숭고한 혁명 정신을 욕구충만적 소아병으로 일궈낸다. 이것은 바로 내버려두면 필연적으로 어떤 프롤레타리아 혁명 운동도 박살내 버릴, 저 소부르주아적 분열과 동요로 귀결되며, 또한 지속성, 통일 및 조직적 행동에 대한 저 소부르주아적 무능이자 끝없는 개량적 집단 이기로 귀결된다. 프롤레타리아 독재는 투쟁 속에서 단련된 철의 당 없이, 일정 계급의 모든 정직한 사람들의 신뢰를 누리는 당 없이, 대중의 욕구를 전체 프롤레타리아트의 혁명과 인간 해방으로 돌려놓을 당 없이, 그것에 영향력을 발휘할 수 있는 당 없이는 성공적으로 수행될 수 없다.
레온 브론스타인, <공산주의 운동에서의 '생디칼리슴'소아병>, 1919

브론스타인이 1912년 발간한 책자 <우리는 무엇을 해야하는가?>(What Shall We Do?)에서 밝힌 정치적 견해로 브론스타인주의의 방법론의 핵심을 이룬다고 볼 수 있다.

쉽게 설명하자면 전위당 혁명론은 다수 맑시스트들이 주장하는 방법론인 <대중의 계몽을 통해 그들이 자발적으로 혁명을 이루어야한다>가 아니라, 중앙당 (노동자 정당)에서 대중들을 올바른 방향으로 지도하여 혁명을 완수하게 해야한다로 요약할 수 있다. 즉, 위로부터의 인텔리-중앙집권제 혁명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브론스타인이 이러한 주장을 한 배경은 당시 미국의 사회적 상황에 있었다. 미국은 전통적으로 기독교가 초강세를 보이고 있었던 터라 사회주의가 구석 구석 뻗어나가기도 어려웠을 뿐더러 넘치는 풍요로 일부 공장 지역을 제외하면 블루 칼라 노동자들마저 혁명의 필요성을 느끼지 못하고 있었다. 브론스타인은 이를 미국에서는 반혁명이 이데올로기로서 존재하기에 대중 계몽을 통한 혁명은 불가능하다라는 결론을 내리고, 대중들의 방향을 지도하고 강력한 군사적, 정치적 권력을 가질 중앙집권적 노동자 정당을 통한 혁명을 구상하게 된 것이다.

더불어 브론스타인은 당시 미국에서 우위를 잡고 있던 더리온주의 중심의 생디칼리슴, 즉 협동조합주의의 원동력 자체는 인정했으나 권리를 위한 투쟁이 곧 집단 이기로 이어질 수 밖에 없음을 지적하였다. 마르크스주의의 궁극적 목표인 인류 해방을 위해 투쟁하기보다는, 조합이 자신들의 이익만을 위해 부르주아와 타협하는 반동적인 행위가 일어날 수 밖에 없다는 것이었다. 실제로 당시 미국에서는 노동조합들이 부르주아와 투쟁하는 것 대신 타협하는 것으로 점차 자신들의 요구 사항을 관철시키는 양상이 나타났으며 브론스타인은 이러한 경향을 두고 노동조합의 자발적 종속이라고 비난하였다. 그리고 브론스타인은 이러한 미국 노동 운동을 토대로 하여 조합의 원동력을 역사 발전에 올바르게 이용하기 위해서는 개인의 욕구를 체제에 대한 투쟁으로 전환시키도록 지도하는 전위당이 있어야한다라는 결론을 내렸다.

이런 것들은 근본적으로 룸펜 프롤레타리아트화를 촉진시키고 있으며 미국 사회에서는 사회주의 운동의 주체가 되어야할 노동 계급은 물론 사회주의 노동 조합마저 룸펜화되어가고 있는 심각한 상황이었다. 때문에 브론스타인은 이러한 경향이라면 혁명이 성공하더라도 결국 혁명은 변질될 수 밖에 없기에, 마르크스주의를 제대로 배운 엘리트들이 혁명이 이상한 방향으로 흐르지 않도록 대중들을 지도해야한다고 보았다.

브론스타인이 주창한 전위당 혁명론은 한마디로 말하여 미국의 대중들과 노동 운동이 첫번째로 혁명에 소극적이며 두번째로 혁명의 목적을 인류 해방이 아닌 자기 이익 추구로 흐르는 경향이 있기에 이를 대중 단위에서 바로잡는 것은 불가능하며 커다란 경향을 바꿀 권력을 가진 중앙 전위당의 집단 계몽을 주창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전위당론은 주로 아나키스트들과 생디칼리스트들의 비판 거리가 되었다. 이 전위대 체계론으로 여러 마르크스주의자, 브론스타인주의자 외의 공산주의자들은 브론스타인주의를 권위주의나 엘리트주의의 일종일 뿐이라고 비판했다. 사회혁명당 내 아나키스트 파벌의 일원인 네스터 마흐노는 다음과 같이 브론스타인을 공개 비판하기도 하였다. "이 순전한 엘리트주의는 사회주의는 노동계급의 자기 해방이라는 관점을 전면적으로 위배한다. 더욱이 이것은 권력을 지닌 자의 선의에 대한 맹목적인 믿음에 기반을 둔 유토피아적 발상이다."

영구혁명론

불균등 복합 발전론

프롤레타리아 민주주의론

노동계급 및 노동자정당의 주체성

종교관

비판

이 순전한 엘리트주의는 사회주의는 노동계급의 자기 해방이라는 관점을 전면적으로 위배한다. 더욱이 이것은 권력을 지닌 자의 선의에 대한 맹목적인 믿음에 기반을 둔 유토피아적 발상이다.
네스터 마흐노
결국은 불확실한 혁명이라는 모험에 기대는 극좌적 이상론에 불과하지 않습니까?
빌 헤이우드

소속 정당

선거 이력

여담


  1. 출생 시 이름은 레이바 다비도비치 브론시테인 (Ле́йба Дави́дович Бронште́йн).
  2. 초대 국방부장관 재임.
  3. 신앙심은 거의 무종교라고 해도 좋을 정도로 없었다.
  4. 지역구는 뉴욕 제6구.
  5. 술책이나 학문으로도 번역할 수 있다.
  6. 첫번째는 파리 코뮌.
  7. 어린 시절에 미국으로 이민을 왔기 때문에 영어 사용에는 지장이 없는 것을 넘어 미국에서 태어난 모든 사람중 가장 영어의 기교를 잘 살린다는 평가를 받았다. 오히려 모국어인 우크라이나어나 러시아어에는 매우 서툴러 기초적인 의사 표현밖에 못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