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인 (만주일몽):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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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년 10월 6일 (목) 00:39 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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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인
文學人 | wén xiáo rén
본명 교르차 자라풍아 (Қиорыцһа Заыапоңа)
출생 1887년 6월 9일
청나라 랴오닝성 묵던
사망 1940년 4월 1일 (향년 53세)
만주국 헤이룽장성 하얼빈 하얼빈역 역사
국적 청나라중화민국만주국
직업 소설가, 시인
활동 기간 1925년 - 1940년
학력 경사대학당 (졸업)
종교 티베트 불교
장르 민족문학
데뷔 변발1925년
대표작 변발, 편자, 유상법, 한남만녀, 만족수난기

개요

목숨으로 지켜온 머리카락이 내손 위에서 위태롭게 사리며,
내게도 날개가 있으리라는 확신이 들었다. 통탄할 일이였다.

<변발>

만주의 관료 출신 민족문학소설가.

교르차 자라풍아 (중세 만주어:ᡤᡳᡠᡵᡮᠠ ᠵᠠᠯᠠᡶᡠᠩᡤᠠ, 만주어: Қиорыцһа Заыапоң, 협화어: ギョルチャ ジャラプンア)는 30대 중반이라는 적잖은 나이에 데뷔했음에도 불구하고 격동의 시기에서 혼란을 겪고있는 만주인들의 삶과 만주족의 민족수난기를 성공적으로 글로 승화했다는 평을 받는다. 허나 현재 만주 인민 공화국이 지향하는 오족협화를 정면으로 부정함과 동시에 만주국에 적극적으로 협조하는 이중적이고 권력지향적인 행동을 보인 점으로 인하여 여러가지로 평이 갈리는 인물이기도 하다.

말년에는 태생부터 약한몸에 대하여 한탄하다가 하얼빈에서 묵던으로 가는 열차를 기다리던 중 갑작스러운 심장마비로 인하여 사망하였다.

생애

1887년 랴오닝성에서 태어나, 청나라 멸망 당일날 경사대학당을 졸업하였다.

그의 아버지는 청나라에서 악덕관료로 악명이 높았는데, 이와 별개로 문화인의 말은 대부분 들어주었다고 한다. 어렸을때 부터 책을 좋아하고 굉장히 내향적이였던 문화인이 소설류를 사달라 부탁하면 대부분 사주었다고. 그렇기에 그는 경사대학당 입학 이후에도 본인이 좋아하던 소설들을 마음껏 읽고 글을 쓸수있었다고 한다. 하지만 졸업 직후 청나라 멸망과 동시에 이로 인한 충격으로 기존부터 심장병이 있던 아버지가 충격을 받아 세상을 떠나며 책과 펜에서 손을 땔 수 밖에 없었다.

그는 결국 1915년부터 10년간 고향인 랴오닝성의 지방관료로 일했고, 당시 시대상에도 불구하고 능력을 인정받아 조직 내에서 명망이 꽤나 높았다고 한다. 일부에서는 문학인 일기를 자료로 들어 그가 봉천군벌 최고실세인 장쭤린과 여러번 만났다 주장하기도 하나 이는 사실일 가능성이 낮다. 아무튼 그렇게 지속적으로 관료로 일하고 있던 때, 37세 경에 유전병인 심장병이 재발하여 사실상 업무수행이 불가능하게된다. 결국 문학인은 사직하고 휴양차 상당한 돈을 털어 사할린으로 떠난다. 그리고 도착한 사할린에서 최초의 작품을 쓰니, 이것이 바로 그의 작품중 가장 잘 알려져 있는 《변발》이였다.

변발은 청나라의 중화사상을 가진 만주족 청년의 주인공이 급변하는 세상을 보며 최종적으로는 만주족의 재부흥을 위해 변발 같은 악습을 끊어내야 한다 다짐하며 중화사상을 버리고 황제와 함께 만주족을 만주인만을 위한 나라로 만드는 서사를 다루고 있다. 처음 출판되었을 당시에는 반응도 미적지근 했으며, 교르차 자라퐁아 본인 역시 잘 되리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그렇기에 휴양지에서 돌아온 1926년 부터 책이 발간된지 6년이 지난 1931년까지 자라퐁아는 고향인 묵던에서 단순 이불장사를 하며 생계를 유지하고 있었다.

허나 만주사변 이후 상황은 급변한다. 만주사변 이후 푸이를 황제로 하며 수립된 만주국은 문학인의 작품이 선전의 가치가 있다고 판단, 문학인에게 변발의 금서지정과 문학인의 가게를 폐쇠하겠다는 협박을 하며 변발의 내용 수정과 더불어 만주국의 정통성과 일본의 찬향 소설을 쓰라 요구했다. 이에 원래부터 친일적 성향을 가지고 있고 만주국을 지지하던 문학인은 그렇게 말 안해도 할거라고 답하며(...) 제안을 받아들인다. 그렇게 해서 소설 변발의 내용이 수정됨과 더불어 편자가 발표된다.

변발은 만주족 청년과 황제에 대성이 추가되었으며, 편자의 내용은 대대손손으로 말을 관리하던 요동의 청년이 삶에 개탄하며 중화민국 난징으로 여행을 갔다가 중화민국에 현실에 충격받으며 만주국 수립이후 만주로 돌아와 현실에 만족하여 행복하게 산다는 내용을 다루고 있다. 이러한 내용에 크게 만족한 정부는 개조된 변발과 더불어 편자를 교육과정에 포함시킴과 더불어 각 가정에 싼 가격으로 배포하였다. 이후에도 한남만녀를 통해 한족을 부녀자를 겁탈하는 민족으로 다루며 폄하하였고, 유상법과 통해 대성의 메이지 유신을 찬양하고, 만인수난기를 통해 만주사변을 미화하는 등의 행보를 보이며 점점 극단적인 만주족 민족주의, 친대성향으로 기울기 시작한다.

이때쯤부터 필체도 점점 과격해져 결국 1938년 경 신작이던 <환상 소년>이 대성 본토와 만주에서 출판금지 당하며 사실상 팽당하게된다. 이에 크게 분노한 문학인은 1939년 중대전쟁 직전 대성을 비난하는 서적인 <가명치유신>을 발표하였으나, 당연하게도 출판 금지당하였다. 이후 말년에 악화된 건강에 대해 한탄하며 친대성향을 버리고 <오족협화독립만주>[2]라는 책을 쓰며 전향하였다. 허나 위에 언급한것처럼 말년에 건강에 심각히 안좋아져 결국 신작 구상을 위해 하얼빈에서 묵던으로 돌아오던 열차를 기다리던 중 갑작스러운 심장마비로 인하여 사망하였다.

어록

나는 민족작가 문학인, 엘레나의 애인 교르차, 그리고 민족의 배반자 자라퐁아.
<문학인 일기>[3]
만족의 번영이 내 운명이요, 가치라 여겼다만. 안타깝게도 손부터 잘못잡았구나.
<문학인 일기>[4][5]
생각은 번영이고, 생각하는 법은 성공이다.
<유상법>
만주의 깃발이 영원히 내려가지 않도록, 한족의 깃발이 조금도 올라가지 않도록 내 이 붓 하나로 진실을 만리까지 달하게 했네
<만족수난기>
중화에서 황색이 아닌 적청만이 휘날리고 국민은 불안에 떨어 천지가 흔들려 진동을 느끼니 아! 이곳이 지옥과 다름이 없음에 잡생각이 사라졌다.
<편자>

평가

여담

  • 강경 민족주의자였던것과는 별개로 러시아 출신 연인이 있었다. 이름은 엘레나로, 1920년 경 적백내전을 피해 만주로 왔다가 문학인과 눈이 맞은것으로 보인다. 문학인의 지인이 말하길, 정말 그의 필체와 어울리지 않을정도로 닭살 돋았다고. 허나 문학인의 사망 이후에는 소련으로 돌아갔다는 것 이외에는 알려진것이 없다.

  1. 그가 생전에 찍은 유일한 사진으로, 1925년 퇴직기념으로 찍은것이다.
  2. 유일하게 소설이 아닌 본인의 견해를 밝힌 책이다. 당연하게 출판 금지당한것과 더불어 아예 금서로 지정되었다.
  3. 1939년 11월 12일자 일기
  4. 1940년 3월 28일자 일기
  5. 사실상 문학인 일기의 마지막 구절로, 이후에는 병세의 악화와 하얼빈으로의 출장으로 인해 작성하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