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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0년대 내내 폴란드에서는 민족주의 광풍이 불어닥쳤다. 피우수트스키의 정적인 [[로만 드모프스키]]와 [[민족민주당]] 세력은 폴란드인만의 폴란드 건국을 주창하며 리투아니아인, 유대인, 독일인 등 다른 민족에 대한 배타성을 드러냈다. 이들의 선동으로 인하여 폴란드의 단일 민족성은 1920년대 초부터 태동하고 있었다. 허나 피우수트스키는 폴란드의 애국주의를 지지했을 지언정 폴란드의 단일민족성을 바라지 않았다. 그는 리투아니아 출신이었고, 폴란드가 폴리투라는 단일한 정체성 속에 여러 민족이 뭉치는 체제가 되어야함을 강변했다. 이러한 사고의 일환으로, 피우수트스키 총통는 일찍이 1923년 [[유대인 차별금지법]]을 통해 폴란드인의 타민족 차별을 법적으로 제재한 바 있다. 이는 민족주의자들의 큰 반발을 불러왔다.
1920년대 내내 폴란드에서는 민족주의 광풍이 불어닥쳤다. 피우수트스키의 정적인 [[로만 드모프스키]]와 [[민족민주당]] 세력은 폴란드인만의 폴란드 건국을 주창하며 리투아니아인, 유대인, 독일인 등 다른 민족에 대한 배타성을 드러냈다. 이들의 선동으로 인하여 폴란드의 단일 민족성은 1920년대 초부터 태동하고 있었다. 허나 피우수트스키는 폴란드의 애국주의를 지지했을 지언정 폴란드의 단일민족성을 바라지 않았다. 그는 리투아니아 출신이었고, 폴란드가 폴리투라는 단일한 정체성 속에 여러 민족이 뭉치는 체제가 되어야함을 강변했다. 이러한 사고의 일환으로, 피우수트스키 총통는 일찍이 1923년 [[유대인 차별금지법]]을 통해 폴란드인의 타민족 차별을 법적으로 제재한 바 있다. 이는 민족주의자들의 큰 반발을 불러왔다.


1927년 1월 10일, [[민족민주당]]을 지지하는 시민들이 폴란드의 주요 도시에서 피우수트스키의 총통 퇴진을 요구하는 집회를 가졌으며, 경찰이 이를 무자비하게 진압하며 [[1927년 폴란드 소요 사태]]가 벌어진다. 피우수트스키는 다민족 국가로서의 폴란드의 정당성을 주장하며 폭력 세력을 몰아내자고 국민들을 선동했고, 군대와 경찰이 동원된 소요 사태 진압 세력은 민족민주당 당원들을 체포하고 민족주의를 탄압했다. 그해의 10월, [[유제프 피우수트스키]]는 [[사회주의]] 사상과 [[다민족]]이 혼재된 폴리투적 애국주의를 합친 '''다민족 사회주의'''를 가치로 하여, 폴란드를 폴란드 다민족 사회주의 합중국으로 재편시켰다. 이로 인해 [[폴란드 사회주의 공화국]]과 [[리투아니아 사회주의 공화국]], [[벨라루스 사회주의 공화국]]이 가맹국이 되었으며 피우수트스키는 총통직을 스스로 내려놓고 바로 합중국의 초대 대통령 직위에 올랐다. 이러한 친위 쿠데타의 과정을 통틀어 [[27 혁명]]이라고 부른다.
1927년 1월 10일, [[민족민주당]]을 지지하는 시민들이 폴란드의 주요 도시에서 피우수트스키의 총통 퇴진을 요구하는 집회를 가졌으며, 경찰이 이를 무자비하게 진압하며 [[1927년 폴란드 소요 사태]]가 벌어진다. 피우수트스키는 다민족 국가로서의 폴란드의 정당성을 주장하며 폭력 세력을 몰아내자고 국민들을 선동했고, 군대와 경찰이 동원된 소요 사태 진압 세력은 민족민주당 당원들을 체포하고 민족주의를 탄압했다. 그해의 10월, [[유제프 피우수트스키]]는 [[사회주의]] 사상<ref>피우수트스키는 [[폴란드 사회당]] 출신의 인물로, 非마르크스주의 계열 사회주의에 공감하는 입장이었다.</ref>과 [[다민족]]이 혼재된 폴리투적 애국주의를 합친 '''다민족 사회주의'''를 가치로 하여, 폴란드를 폴란드 다민족 사회주의 합중국으로 재편시켰다. 이로 인해 [[폴란드 사회주의 공화국]]과 [[리투아니아 사회주의 공화국]], [[벨라루스 사회주의 공화국]]이 가맹국이 되었으며 피우수트스키는 총통직을 스스로 내려놓고 바로 합중국의 초대 대통령 직위에 올랐다. 이러한 친위 쿠데타의 과정을 통틀어 [[27 혁명]]이라고 부른다.


[[27 혁명]]에 성공한 폴란드는 강력한 군사력을 표방하고, 반소와 반독 감정을 동시에 추구함과 동시에, [[소련-폴란드 전쟁]]으로 확보한 우크라이나 지역을 [[우크라이나 사회주의 공화국]]으로 독립시켜 소련을 견제하고, 북쪽으로는 [[라트비아]]를 침공해 [[리보니아 사회주의 공화국]]을 성립하는 등 대대적인 영토 팽창을 실현했다. 1930년대 들어 폴란드는 중부 유럽의 가장 강력한 강대국으로 부상할 수 있었다.
[[27 혁명]]에 성공한 폴란드는 강력한 군사력을 표방하고, 반소와 반독 감정을 동시에 추구함과 동시에, [[소련-폴란드 전쟁]]으로 확보한 우크라이나 지역을 [[우크라이나 사회주의 공화국]]으로 독립시켜 소련을 견제하고, 북쪽으로는 [[라트비아]]를 침공해 [[리보니아 사회주의 공화국]]을 성립하는 등 대대적인 영토 팽창을 실현했다. 1930년대 들어 폴란드는 중부 유럽의 가장 강력한 강대국으로 부상할 수 있었다.

2022년 10월 25일 (화) 02:45 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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폴란드 다민족 사회주의 합중국
Zjednoczone Wieloetniczne Socjalistyczne Państwa Polskie
United Multi-ethnic Socialist States of Poland
국기 국장
Kraj wszystkich narodów
모든 민족의 나라
(1927~現)
상징
국가 돔브로프스키의 마주레크
(Mazurek Dąbrowskiego)
국화 팬지꽃
국조 흰꼬리수리
역사
폴란드 제2공화국 성립 1918년
현 체제 성립 1927년
개혁 개방 1987년
지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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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도 바르샤바 (Warszawa)
북위 52° 13′ 56″ 동경 21° 00′ 30″
최대 도시
면적 1,043,178km2
내수면 비율 1.8%
접경국 독일
체코
슬로바키아
라트비아
러시아
인문환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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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구 1억 398만 7,400명 (2022년)
밀도 99.68명/km2
출산율 1.85명 (2022년)
민족 비율 폴란드인 47.1%
우크라이나인 26.1%
벨라루스인 11.0%
몰다비아인 3.9%
리투아니아인 3.6%
유대인 3.0%
라트비아인 1.4%
독일인 1.1%
기타 2.8% (2022년)
공용어 폴란드어
지역어 우크라이나어, 러시아어, 벨라루스어, 리투아니아어, 라트비아어, 독일어, 이디시어, 루마니아어
공용 문자 라틴 문자, 키릴 문자
종교 국교 없음 (세속주의)
비율 가톨릭교 71.2%
정교회 5.6%
유대교 2.6%
이슬람교 2.1%
무종교 및 기타 18.5%
행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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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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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 체제 다민족 사회주의 (명목상), 공화제, 사회주의 공화국, 이원집정부제, 일당 우위 정당제, 양원제
민주주의 지수 5.87점[188개국 중 76위] (혼합된 체제)
대통령
(국가 원수)
야로스와프 카친스키
정부
요인
총리
(정부 수반)
율리아 티모셴코
부통령[2] 안제이 두다
하원의장 알렉산데르 두친스키
인민재판소장 파트릭 조비코
입법부 최고 라다 (상원)
세임 (하원)
집권 여당 사회주의민족당
경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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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체제 국가자본주의혼합 경제[3]
GDP
(PPP)
$3조 6,125억 2,227만 | 세계 7위
1인당 $34,740 (2021년)
GDP
(명목)
$2조 2,773억 2,406만 | 세계 8위
1인당 $21,900 (2021년)
신용등급 무디스 A1
S&P A-
Fitch A-
화폐 공식 화폐 즈워티(zł, złoty)
ISO 4217 PLN
단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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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정연호 서력기원
시간대 GMT+01:00
도량형 SI 단위
외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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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수교현황 대한민국: 1988년 11월 1일
북한: 1948년 10월 16일
국제연합 가입 1945년 10월 24일
무비자 입국 양국 모두 45일
ccTLD
.pl
국가 코드
616, PL, POL
국가 전화 코드
+48
여행 경보
여행 자제 전 지역
위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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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요

역사

인테르마리움

1918년, 러시아 혁명베르사유 조약으로 폴란드는 대분할 이후 처음으로 독립을 쟁취하게 된다. 그러나 여전히 옆으로는 강대국 독일과 소련이 버티고 있었으며, 레프 트로츠키가 이끄는 소련군은 소련-폴란드 전쟁을 일으키며 폴란드의 주권을 위협했다. 또 폴란드는 다민족 국가로서 유대인들이 전체 인구의 5% 이상을 차지하는 등 불안한 요소가 다수 포진되어있었다.

폴란드의 독립운동가이자, 폴란드군 총사령관이었고, 독립 직후 폴란드 총통의 자리에 오른 유제프 피우수트스키는 이러한 폴란드의 지정학적 한계성을 극복하기 위해 폴란드의 특수한 외교적 체제인 인테르마리움을 성립하고자 하였다. 폴란드말로 미엔지모제라고도 불리우는 인테르마리움은 "바다와 바다 사이"를 의미하며, 그것은 흑해와 발트해 사이에서 폴란드가 중부 유럽의 지배적인 외교 위치를 가져야한다는 피우수트스키의 외교적 신념이었다. 이를 통해 점진적으로 제2의 폴란드-리투아니아를 건설하려고 하였다. 인테르마리움을 통해 폴란드가 중부 유럽에서 지배적인 무역 국가로서의 지위를 얻게 되며, 또한 강력한 내수 시장을 지니므로, 무역에 의존하기만 할 필요는 없다는 현실적인 계산 역시 반영되었다.

피우수트스키는 리투아니아 제1공화국과의 외교적 협상을 위해, 소련과 독일 양쪽에 대항하는 제2의 폴리투 건국이라는 공통의 이익을 확인하고, 폴란드가 리투아니아의 주권을 보호하는 대가로 하나의 군사 동맹체를 형성하기로 하였다. 한편 소련과는 1921년 민스크 조약을 체결, 벨라루스 인민공화국의 2/3은 폴란드에게, 나머지는 소련에게 귀속시키는 영토 확장을 이루어냈다.

27 혁명

1920년대 내내 폴란드에서는 민족주의 광풍이 불어닥쳤다. 피우수트스키의 정적인 로만 드모프스키민족민주당 세력은 폴란드인만의 폴란드 건국을 주창하며 리투아니아인, 유대인, 독일인 등 다른 민족에 대한 배타성을 드러냈다. 이들의 선동으로 인하여 폴란드의 단일 민족성은 1920년대 초부터 태동하고 있었다. 허나 피우수트스키는 폴란드의 애국주의를 지지했을 지언정 폴란드의 단일민족성을 바라지 않았다. 그는 리투아니아 출신이었고, 폴란드가 폴리투라는 단일한 정체성 속에 여러 민족이 뭉치는 체제가 되어야함을 강변했다. 이러한 사고의 일환으로, 피우수트스키 총통는 일찍이 1923년 유대인 차별금지법을 통해 폴란드인의 타민족 차별을 법적으로 제재한 바 있다. 이는 민족주의자들의 큰 반발을 불러왔다.

1927년 1월 10일, 민족민주당을 지지하는 시민들이 폴란드의 주요 도시에서 피우수트스키의 총통 퇴진을 요구하는 집회를 가졌으며, 경찰이 이를 무자비하게 진압하며 1927년 폴란드 소요 사태가 벌어진다. 피우수트스키는 다민족 국가로서의 폴란드의 정당성을 주장하며 폭력 세력을 몰아내자고 국민들을 선동했고, 군대와 경찰이 동원된 소요 사태 진압 세력은 민족민주당 당원들을 체포하고 민족주의를 탄압했다. 그해의 10월, 유제프 피우수트스키사회주의 사상[4]다민족이 혼재된 폴리투적 애국주의를 합친 다민족 사회주의를 가치로 하여, 폴란드를 폴란드 다민족 사회주의 합중국으로 재편시켰다. 이로 인해 폴란드 사회주의 공화국리투아니아 사회주의 공화국, 벨라루스 사회주의 공화국이 가맹국이 되었으며 피우수트스키는 총통직을 스스로 내려놓고 바로 합중국의 초대 대통령 직위에 올랐다. 이러한 친위 쿠데타의 과정을 통틀어 27 혁명이라고 부른다.

27 혁명에 성공한 폴란드는 강력한 군사력을 표방하고, 반소와 반독 감정을 동시에 추구함과 동시에, 소련-폴란드 전쟁으로 확보한 우크라이나 지역을 우크라이나 사회주의 공화국으로 독립시켜 소련을 견제하고, 북쪽으로는 라트비아를 침공해 리보니아 사회주의 공화국을 성립하는 등 대대적인 영토 팽창을 실현했다. 1930년대 들어 폴란드는 중부 유럽의 가장 강력한 강대국으로 부상할 수 있었다.

민주주의로의 체제 이양

소련-아프가니스탄 전쟁의 여파로 인해 소련의 영향력이 점차 줄어들고, 소련에서 개혁파인 미하일 고르바초프가 서기장이 되자, 기존의 공산권 국가와 이질적 체제를 갖추고 있던 폴란드는 소련으로부터 독자적인 외교 노선과 정치 노선을 취하기로 결정하였다. 소련은 이에 반발했으나, 결과적으로 개입하지 않기로 결정했고 이를 시나트라 독트린이라 부른다. 결과적으로 시나트라 독트린의 수립은 다른 동유럽 국가들의 붕괴로도 이어진다.

1987년 10월 25일, 27 혁명의 60주년을 맞이하여 보이치에흐 야루젤스키 대통령은 레흐 바웬사를 위시로 한 폴란드 자유노조의 제안을 받아들여 사회의 부분적 자유화 조치를 취하였다. 통제 경제는 혼합경제로 재편되었고 다당제도 허용되어 폴란드 인민당 등 여러 야당들이 허가되었다. 그러나 근본적으로 다민족 사회주의라는 체제는 포기하지 않은 채 부분적이고 점진적으로 개혁이 진행되었고, 기존 사회주의 체제의 효율성은 유지한 채 자본주의-부분적 제한 민주주의를 받아들인 체제로 성공적으로 체제를 이양하여 1989년 이후의 동구권 붕괴에도 불구하고 국명에 "사회주의"가 들어가는 유일무이한 중부 유럽의 맹주로 자리잡았다.

1989년 7월 1일, 처음으로 치러진 자유로운 대통령 선거 하에서 폴란드 자유노조, 폴란드 인민당, 폴란드 민주동맹의 지지를 받는 무소속 레흐 바웬사 후보가 50%를 득표해 47%를 얻은 사회주의민족당 소속의 알렉산데르 크바시니에스프키 후보를 꺾고 당선되어, 체제 최초의 평화적 정권 교체가 성사되었다. 이 소식은 다른 동구권 국가로도 퍼져나가 동유럽 혁명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다. 허나 바웬사 대통령은 폴란드 합중국 체제 자체의 붕괴를 막기 위해, 이미 체제와 타협하여 사회주의를 포기하지 않는 선에서 민주화로의 체제를 이양하기로 한 상태였다. 바웬사는 사회주의 체제를 준수하면서 부분적으로 사회, 경제, 정치의 자유화를 약속하며 폴란드의 개혁을 주도했다.

그럼에도 각 소수민족들의 독립을 바라는 목소리는 막을 수 없었고 바웬사는 각 국가들의 독립을 보장하며 주민투표를 제안했다. 1992년 1월 1일, 주민투표를 통하여 각 구성국들의 독립 여부를 결정하게 하였다. 크림 반도 러시아인 자치 공화국이 찬성 52.6%, 체코 사회주의 공화국이 찬성 83.2%, 슬로바키아 사회주의 공화국이 60.6%로 합중국에서 탈퇴하였으며, 그 외 구성국들은 폴란드 합중국 체제에 잔류하기로 결정하였다.

레흐 바웬사 대통령은 사회 개혁 조치로 서방에서 찬사를 받았지만, 경제 문제와 민족 분리 독립 문제에서 잘못 대처하였다는 이유로 큰 비판을 받았고 1994년 재선을 위한 대통령 선거에서 사회주의민족당알렉산데르 크바시니에스프키 후보에 55% 대 45%로 크게 패배했다. 이후 현재까지 정권교체 없이 사회주의민족당의 일당우위 정당제가 이어진다.

행정구역

  1. 188개국 중 76위
  2. 연방 부통령은 상원의장을 겸한다.
  3. 1987년 이전에는 사회주의통제 경제에 가까웠다.
  4. 피우수트스키는 폴란드 사회당 출신의 인물로, 非마르크스주의 계열 사회주의에 공감하는 입장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