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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성고등보통학교 15기로 졸업한 그는<ref>3.1운동으로 당시 뒤숭숭했던 사회 분위기로 인해 졸업사진도 못 찍은 채로 졸업했다고 한다. 교장이 학생 개개인을 따로 불러 독립운동 참여를 꾸짖고 졸업장을 수여하는 방식으로 졸업했다고.</ref> 다시 한 번 미국 유학을 꿈꾸게 된다. 낮에는 막노동판, 공장에 다니거나 잡지사에서 근무하며 유학 자금을 벌었으며 밤에는 YMCA에서 영어공부를 하였고, 매주 일요일에는 승동교회에 다니면서 영어성경 공부를 했었다고 한다. 이렇게 열심히였던 그였지만, 다시 한 번 서자라는 꼬리표가 그의 발목을 붙잡아 두 차례의 미국 유학 시도는 좌절되고야 만다. | 경성고등보통학교 15기로 졸업한 그는<ref>3.1운동으로 당시 뒤숭숭했던 사회 분위기로 인해 졸업사진도 못 찍은 채로 졸업했다고 한다. 교장이 학생 개개인을 따로 불러 독립운동 참여를 꾸짖고 졸업장을 수여하는 방식으로 졸업했다고.</ref> 다시 한 번 미국 유학을 꿈꾸게 된다. 낮에는 막노동판, 공장에 다니거나 잡지사에서 근무하며 유학 자금을 벌었으며 밤에는 YMCA에서 영어공부를 하였고, 매주 일요일에는 승동교회에 다니면서 영어성경 공부를 했었다고 한다. 이렇게 열심히였던 그였지만, 다시 한 번 서자라는 꼬리표가 그의 발목을 붙잡아 두 차례의 미국 유학 시도는 좌절되고야 만다. | ||
1920년 9월엔 일본에서 공부하기 위해 일본행 밀항선에 몸을 실었지만, 독립운동으로 인해 경찰에게 쫓기는 처지라 대입시험마저도 치룰 수 없던 몸이었기에 결국 동년 11월에 중국 상하이로 다시 한 번 넘어가게 된다. | 1920년 9월엔 일본에서 공부하기 위해 일본행 밀항선에 몸을 실었지만, 독립운동으로 인해 경찰에게 쫓기는 처지라 대입시험마저도 치룰 수 없던 몸이었기에 결국 동년 11월에 중국 상하이로 다시 한 번 넘어가게 된다. 상하이로 넘어간 그는 그 곳에서 김설야, 임원근과 같은 독립운동가들과 교우를 다져갔다. | ||
=== 광복 이후 === | === 광복 이후 === | ||
2022년 11월 4일 (금) 04:38 판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주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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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헌영 관련 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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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제1-3대 국가주석 박헌영 朴憲永 | Pak Hon-yong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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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출생 | 1900년 5월 28일[1] | ||||||||||||||||||||||||||
| 충청도 대흥군 거변면 신양동 빗돌마을 (現 충청남도 박헌영군 신양읍 이정로 379) | |||||||||||||||||||||||||||
| 사망 | 1995년 7월 8일 (향년 95세) | ||||||||||||||||||||||||||
| 서울시 종로구역 련건동 서울제1인민병원 | |||||||||||||||||||||||||||
| 묘소 | 남산혁명렬사릉 | ||||||||||||||||||||||||||
| 재임기간 | 초대 국가주석 | ||||||||||||||||||||||||||
| 1972년 12월 25일 ~ 1974년 9월 8일 | |||||||||||||||||||||||||||
| 제2대 국가주석 | |||||||||||||||||||||||||||
| 1974년 9월 9일 ~ 1979년 9월 8일 | |||||||||||||||||||||||||||
| 제3대 국가주석 | |||||||||||||||||||||||||||
| 1979년 7월 9일 ~ 1982년 12월 25일 | |||||||||||||||||||||||||||
| 서명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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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요
조선의 독립운동가 출신 정치인, 독재자.
3.1 운동을 계기로 독립운동에 몸을 담기 시작하여 이르쿠츠크파 고려공산당, 조선공산당, 조선콤그룹 등 공산주의 계열 독립운동 단체에서 활동하였으며, 1924년부터 1년간 동아일보에서 기자 활동을 하기도 했다.
독립 이후엔 건국준비위원회에 참여하여 여운형을 비롯한 기타 독립운동가들과 함께 조선인민공화국 수립을 이끌었으며 이후에는 재건 조선공산당에서 활동하였으나, 신탁통치 오보사건, 정판사 위조지폐 사건으로 잠시 그 세력을 잃기도 했다. 9월 총파업으로 인해 결국 체포령이 떨어져 남로당 측근들과 함께 월북하였으며, 조선 정부 수립 이후엔 내각 부수상과 외무상을 역임했다.
김일성이 소련군에게 처형당한 이후인 1956년부터는 허가이와 함께 조선의 실권을 잡아 1956년부터 1972년까지는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장을, 1972년부터 1982년까지는 국가주석을 역임하였다. 1982년엔 정계를 은퇴하여 남은 여생을 보냈으며 1995년 7월 8일, 서울시 련건동에 위치한 서울제1인민병원에서 노환으로 숨을 거두었다.
생애
유년시절
1900년 8월 28일 충청도 대흥군의 몰락한 양반 가문의 서자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인 박현주는 쌀을 팔던 미곡업자였으며, 어머니인 이학규는 작은 주막을 운영했었다.
집이 상당히 부유했으며[4] 그의 어머니는 광산 근처에서 남편이 마련해 준 주막을 운영하여 유년시절의 그는 먹고 사는데에는 지장이 없었지만, 그의 생모인 이학규는 박현주의 첩이었기에 그녀의 자식이었던 박헌영도 서자라는 꼬리표가 붙어 유년시절의 그는 주변에서 무시와 천대, 핍박을 받으면서 자라왔다.
당시 그의 어머니는 박헌영을 지방 서당으로 보내 한학을 배우게 했다. 당시 박헌영은 기억력이 상당히 좋아 3~4세의 나이에도 글을 쓸 줄 알았다고 한다. 이후 교육제도 개편으로 대흥보통학교 2학년으로 편입되었다. 그 곳에서도 그는 반 24명 중에서 7등을 할 정도로 우수한 학생이었으나, 서자라는 이유와 더불어 작고 왜소했던 신체적 이유로 '땅딸보'라고 불리며 놀림과 따돌림을 당했었다고 한다. 이 때문에 박헌영은 친구들과 어울리지 않고 홀로 독서를 하거나, 어머니가 운영하던 주막 생채 안방에서 뒹굴거리거나, 동네 개울가에서 소와 함께 놀았었다고 한다.
1915년 대흥보통학교를 졸업한 그는 우수한 성적을 바탕으로 경성으로 상경해 자신의 동창 넷과 함께 경성고등보통학교에 입학해 상과반으로 들어가 3학년 155명 중 32등으로 졸업한다. 당시의 그는 키도 체격도 평범했으며 희고 수수한 두루마기 한복을 입고 다녔었는데, 그 흰 한복이 당시 까무잡잡한 박헌영의 얼굴과 대조를 이루어 별명이 '기왓장'이었다고 한다.
경성고등보통학교 재학 당시의 그는 미국 유학을 희망하고 있었다. 당시 중위권 정도였던 그의 성적 중에서 거의 유일하게 영어 성적 만큼은 상위권이었었으며 선교사 양성을 목적으로 YMCA에서 진행한 무료 영어 과외에도 꾸준히 참석하여[5] 영문으로 된 소설책을 읽을 정도로 영어능력을 갈고 닦았었다고 한다. 당시 아르바이트까지 병행하며 유학자금을 모으던 그였으나, 결국 자금 문제로 미국 유학은 포기하게 된다.
독립운동가
정치, 시사에 관심이 많았었던 그는 우드로 윌슨의 민족자결주의에 감격하여 1차 세계대전 종전 이후엔 조선은 독립할 것이라고 예상했으나, 파리 강화회의에서 조선 문제를 청원하기 위해 파견된 김규식 일행이 회의에 참석하지도 못하고 문전박대를 당했다는 소식에 크게 분개하였으며 이후 3.1운동에도 참여하지만, 독립운동 혐의로 일본 경찰에게 걸려 헌병대에게 끌려가 퇴학 위기까지 맞이하게 된다. 다행히 퇴학까지는 당하지 않았지만, 3.1운동을 계기로 그는 본격적으로 공산주의와 독립운동 활동에 몸을 담기 시작한다.
경성고등보통학교 15기로 졸업한 그는[6] 다시 한 번 미국 유학을 꿈꾸게 된다. 낮에는 막노동판, 공장에 다니거나 잡지사에서 근무하며 유학 자금을 벌었으며 밤에는 YMCA에서 영어공부를 하였고, 매주 일요일에는 승동교회에 다니면서 영어성경 공부를 했었다고 한다. 이렇게 열심히였던 그였지만, 다시 한 번 서자라는 꼬리표가 그의 발목을 붙잡아 두 차례의 미국 유학 시도는 좌절되고야 만다.
1920년 9월엔 일본에서 공부하기 위해 일본행 밀항선에 몸을 실었지만, 독립운동으로 인해 경찰에게 쫓기는 처지라 대입시험마저도 치룰 수 없던 몸이었기에 결국 동년 11월에 중국 상하이로 다시 한 번 넘어가게 된다. 상하이로 넘어간 그는 그 곳에서 김설야, 임원근과 같은 독립운동가들과 교우를 다져갔다.
광복 이후
월북
조선의 실권자가 되다
평가
성격
박헌영의 최측근 중 한 명이기도 했던 조선의 언론인인 박갑동은 박헌영을 "단단한 표범과 같은 인상을 지닌 사람"이라고 평가했다.
사상
박헌영주의
여담
- 주막을 경영하던 모친에게서 영향을 받아 요리를 굉장히 잘했다고 하며, 뛰어난 미식가이기도 했다고 한다.
어록
소속 정당
| 소속 | 기간 | 비고 |
|---|---|---|
| 1921 | 정계 입문 | |
| 무소속 | 1921 - 1925 | 해산 |
| 조선공산당 | 1925 - 1928 | 입당 |
| 무소속 | 1928 - 1929 | 해산 |
| 소련 공산당 | 1929 - 1934 | 입당 |
| 무소속 | 1934 - 1939 | 체포 후 일시 정계 은퇴 |
| 경성콤그룹 | 1939 - 1941 | 창당 |
| 무소속 | 1941 - 1945 | 해산 |
| 1945 | 창당 | |
| 무소속 | 1945 | 건준 참여를 위한 탈당 |
| 건국준비위원회 | 1945 | 입당 |
| 무소속 | 1945 - 1946 | 해산 |
| 1946 - 1949 | 입당 | |
| 1949 - 1995 | 합당 정계 은퇴 사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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