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헌영 (당신들의 조선):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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끊임없는 고문과 동료들의 죽음 등으로 인해 이 시기 박헌영의 정신상태는 상당히 좋지 못했다고 한다. 이 시기 박헌영은 벽을 보고 대화를 시도하거나, 식음을 전폐한 채 혼잣말을 중얼거리거나, 사람의 얼굴을 보자 공포의 질린 얼굴을 하다 얼마 안 가 히죽대기 시작하거나, 인분을 벽에 바르거나 먹기도 하고, 수도 없이 자살을 시도하는 등 정신적으로 온전치 못한 모습을 보여 결국 1927년 11월 15일 병보석으로 출소하게 된다.
끊임없는 고문과 동료들의 죽음 등으로 인해 이 시기 박헌영의 정신상태는 상당히 좋지 못했다고 한다. 이 시기 박헌영은 벽을 보고 대화를 시도하거나, 식음을 전폐한 채 혼잣말을 중얼거리거나, 사람의 얼굴을 보자 공포의 질린 얼굴을 하다 얼마 안 가 히죽대기 시작하거나, 인분을 벽에 바르거나 먹기도 하고, 수도 없이 자살을 시도하는 등 정신적으로 온전치 못한 모습을 보여 결국 1927년 11월 15일 병보석으로 출소하게 된다.
병보석으로 출소한 이후에도 그는 주세죽의 얼굴을 알아보지 못하는 등의 정신이상적인 행보를 계속 보였으며 그를 진찰한 정신과 의사 김탁원은 그가 회복하기까진 오랜 기간이 걸릴 것이라고 진단하기도 하였다. 그의 동창이자 친구이기도 했던 시인인 심훈은 그를 이지경으로 만든 일제에게 크게 분노하여 조선일보에 《박군의 얼굴》이라는 시를 기재하였다.


=== 광복 이후 ===
=== 광복 이후 ===

2022년 11월 4일 (금) 05:56 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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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주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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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제1-3대 국가주석
박헌영
朴憲永 | Pak Hon-yong
출생 1900년 5월 28일[1]
충청도 대흥군 거변면 신양동 빗돌마을
(現 충청남도 박헌영군 신양읍 이정로 379)
사망 1995년 7월 8일 (향년 95세)
서울시 종로구역 련건동 서울제1인민병원
묘소 남산혁명렬사릉
재임기간 초대 국가주석
1972년 12월 25일 ~ 1974년 9월 8일
제2대 국가주석
1974년 9월 9일 ~ 1979년 9월 8일
제3대 국가주석
1979년 7월 9일 ~ 1982년 12월 25일
서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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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요

조선의 독립운동가 출신 정치인, 독재자.

3.1 운동을 계기로 독립운동에 몸을 담기 시작하여 이르쿠츠크파 고려공산당, 조선공산당, 조선콤그룹 등 공산주의 계열 독립운동 단체에서 활동하였으며, 1924년부터 1년간 동아일보에서 기자 활동을 하기도 했다.

독립 이후엔 건국준비위원회에 참여하여 여운형을 비롯한 기타 독립운동가들과 함께 조선인민공화국 수립을 이끌었으며 이후에는 재건 조선공산당에서 활동하였으나, 신탁통치 오보사건, 정판사 위조지폐 사건으로 잠시 그 세력을 잃기도 했다. 9월 총파업으로 인해 결국 체포령이 떨어져 남로당 측근들과 함께 월북하였으며, 조선 정부 수립 이후엔 내각 부수상과 외무상을 역임했다.

김일성이 소련군에게 처형당한 이후인 1956년부터는 허가이와 함께 조선의 실권을 잡아 1956년부터 1972년까지는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장을, 1972년부터 1982년까지는 국가주석을 역임하였다. 1982년엔 정계를 은퇴하여 남은 여생을 보냈으며 1995년 7월 8일, 서울시 련건동에 위치한 서울제1인민병원에서 노환으로 숨을 거두었다.

생애

유년시절

1900년 8월 28일 충청도 대흥군의 몰락한 양반 가문의 서자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인 박현주는 쌀을 팔던 미곡업자였으며, 어머니인 이학규는 작은 주막을 운영했었다.

집이 상당히 부유했으며[4] 그의 어머니는 광산 근처에서 남편이 마련해 준 주막을 운영하여 유년시절의 그는 먹고 사는데에는 지장이 없었지만, 그의 생모인 이학규는 박현주의 첩이었기에 그녀의 자식이었던 박헌영도 서자라는 꼬리표가 붙어 유년시절의 그는 주변에서 무시와 천대, 핍박을 받으면서 자라왔다.

당시 그의 어머니는 박헌영을 지방 서당으로 보내 한학을 배우게 했다. 당시 박헌영은 기억력이 상당히 좋아 3~4세의 나이에도 글을 쓸 줄 알았다고 한다. 이후 교육제도 개편으로 대흥보통학교 2학년으로 편입되었다. 그 곳에서도 그는 반 24명 중에서 7등을 할 정도로 우수한 학생이었으나, 서자라는 이유와 더불어 작고 왜소했던 신체적 이유로 '땅딸보'라고 불리며 놀림과 따돌림을 당했었다고 한다. 이 때문에 박헌영은 친구들과 어울리지 않고 홀로 독서를 하거나, 어머니가 운영하던 주막 생채 안방에서 뒹굴거리거나, 동네 개울가에서 소와 함께 놀았었다고 한다.

1915년 대흥보통학교를 졸업한 그는 우수한 성적을 바탕으로 경성으로 상경해 자신의 동창 넷과 함께 경성고등보통학교에 입학해 상과반으로 들어가 3학년 155명 중 32등으로 졸업한다. 당시의 그는 키도 체격도 평범했으며 희고 수수한 두루마기 한복을 입고 다녔었는데, 그 흰 한복이 당시 까무잡잡한 박헌영의 얼굴과 대조를 이루어 별명이 '기왓장'이었다고 한다.

경성고등보통학교 재학 당시의 그는 미국 유학을 희망하고 있었다. 당시 중위권 정도였던 그의 성적 중에서 거의 유일하게 영어 성적 만큼은 상위권이었었으며 선교사 양성을 목적으로 YMCA에서 진행한 무료 영어 과외에도 꾸준히 참석하여[5] 영문으로 된 소설책을 읽을 정도로 영어능력을 갈고 닦았었다고 한다. 당시 아르바이트까지 병행하며 유학자금을 모으던 그였으나, 결국 자금 문제로 미국 유학은 포기하게 된다.

독립운동가

정치, 시사에 관심이 많았었던 그는 우드로 윌슨의 민족자결주의에 감격하여 1차 세계대전 종전 이후엔 조선은 독립할 것이라고 예상했으나, 파리 강화회의에서 조선 문제를 청원하기 위해 파견된 김규식 일행이 회의에 참석하지도 못하고 문전박대를 당했다는 소식에 크게 분개하였으며 이후 3.1운동에도 참여하지만, 독립운동 혐의로 일본 경찰에게 걸려 헌병대에게 끌려가 퇴학 위기까지 맞이하게 된다. 다행히 퇴학까지는 당하지 않았지만, 3.1운동을 계기로 그는 본격적으로 공산주의와 독립운동 활동에 몸을 담기 시작한다.

경성고등보통학교 15기로 졸업한 그는[6] 다시 한 번 미국 유학을 꿈꾸게 된다. 낮에는 막노동판, 공장에 다니거나 잡지사에서 근무하며 유학 자금을 벌었으며 밤에는 YMCA에서 영어공부를 하였고, 매주 일요일에는 승동교회에 다니면서 영어성경 공부를 했었다고 한다. 이렇게 열심히였던 그였지만, 다시 한 번 서자라는 꼬리표가 그의 발목을 붙잡아 두 차례의 미국 유학 시도는 좌절되고야 만다.

1920년 9월엔 일본에서 공부하기 위해 일본행 밀항선에 몸을 실었지만, 독립운동으로 인해 경찰에게 쫓기는 처지라 대입시험마저도 치룰 수 없던 몸이었기에 결국 동년 11월에 중국 상하이로 다시 한 번 넘어가게 된다. 상하이로 넘어간 그는 그 곳에서 김설야, 임원근과 같은 독립운동가들과 교우를 다져갔다.

상하이에서 그는 고려공산청년회 상해지부 비서를 거쳐 이르쿠츠크파 고려공산당에 입당하여 '가장 위대한 영도자'라는 칭호까지 얻을 정도로 열성적으로 활동하였다. 한편 그는 '코민테른의 지원을 받아야만 조선을 해방시킬 수 있으며 이렇게 해방된 조선에 소비에트를 세워 최종적으로는 소련의 가맹국이 되어야 한다'는 주장을 펼쳐 당시 대한민국 임시정부 내무총장을 지내던 김구의 분노를 사기도 했다.

1921년 고려공산당 사회주의연구소의 직원으로 활동하던 그는 상하이로 유학 온 주세죽과 그 곳에서 결혼하였다. 이후 그는 동년 8월 베이징에서 열린 고려공산청년회 중앙총국 결성에 참여하여 중앙집행위원으로 활동하였으며, 이후 1922년 3월엔 고려공산청년회 책임비서로 선출되었다. 동년 1월엔 여운형, 김규식, 이동휘, 김단야 등과 함께 모스크바에서 열린 극동인민대표회의에 참석하기도 한다.

모스크바에서 사상을 더욱이 공고히 한 그는 코민테른의 조선공산당 조직을 지시받고 국내로의 귀국을 시도하였으나, 중국 안동현에서 일본 경찰에게 붙잡혀 조선으로 압송되어 1년 10개월 형을 선고받고 평양형무소에서 복역하게 된다. 1924년 1월 출소 이후엔 동년 2월에 개최된 신흥청년동맹 결성식에 참석하였으며 기존에 상하이에서 만난 주세죽과 정식적으로 결혼식을 올렸다.

이후 1925년 4월 조선공산당이 결성되었을 땐 그 하위조직으로 편입된 고려공산청년회의 책임비서로 재선출되었다.

4월엔 동아일보에 입사하여 기자로서의 활동을 시작한다. 당시 동아일보 사장이었던 허헌의 추천으로 입사한 그는 지방부 기사로 활동하였으나, 1년 후 그는 조선총독부의 압박으로 해고당하게 된다. 이후 그는 조선일보에 입사하였으며 같이 입사한 김단야, 임원근과 어울리며 '화요3인방'이라는 별칭까지 얻게 된다.

당시 사회부 기자로 활동하였지만, 당시 유광렬 조선일보 사회부장은 그를 선정적인 기사도 쓰지 못하고 인간관계에 있어서도 수줍음이 너무 많이 미숙한 모습을 많이 보였었다고 평가했다. 당시 그는 말재주도 좋지 못했고 검은 피부에 면도도 하질 않아 '털보'라고 불리기도 하였으며 옷도 허름하게 입고 다니고 동료 기자들과 잘 어울리지도 않았었다고 한다. 이는 당시 동료였던 김단야, 임원근도 비슷했다고 한다. 이후 박헌영은 '노국(露國, 러시아)과의 정치적 관계'라는 제목의 논설문[7]을 문제 삼은 조선총독부의 탄압에 휘말려 1925년 10월 15일 당시 동료였던 김단야, 임원근을 비롯한 16명의 진보적인 기자들과 함께 조선일보에서 해고당하게 된다.

1925년 11월 제1차 조선공산당검거사건으로 인해 아내인 주세죽과 함께 신의주에서 경찰에 연행된다. 다행히 주세죽은 증거불충분으로 석방되지만, 박헌영은 신의주에서 경성으로 압송되어 서대문형무소에 수감되었는데 이 시기 박헌영은 일제에게 끔찍한 고문들을 당하게 된다.

일제 경찰은 연행된 사람으로부터 증거를 수집하기 위해 냉수나 혹은 고추가루를 탄 뜨거운 물을 입과 코에 들이붓거나, 손가락을 묶어 천장에 매달고 가죽채찍으로 때리거나, 긴 의자에 무릎을 꿇어앉힌 다음 막대기로 관절을 때리거나 한다. 7~8명의 경찰들이 큰 방에서 벌이는 축구공놀이라는 고문도 있다. 이들 중 한 명이 먼저 '희생양'을 주먹으로 후려치면, 다른 경찰이 이를 받아 다시 또 그를 주먹으로 갈겨댄다. 이 고문은 가련한 '희생양'이 피범벅이 되어 의식을 잃고 바닥에 쓰러질 때까지 계속된다.
당시 박헌영의 회고

이후 그는 6.10 만세운동의 배후로 몰려 다시 한 번 고문을 받게 된다.

1927년 9월 13일 박헌영은 신의주 재판소에서 재판을 받게 되었다. 그는 재판에서 '공산주의의 목적은 해방의 정의와 실현'이라고 말하며 자신의 무죄를 주장하였으며, 동료였던 박순병이 고문으로 순국했다는 소식을 듣자 박순병을 살려내라며 재판관에게 달려드는 등의 난동을 부리다 끌려나갔다. 9월 20일 비공개로 진행된 공판에서도 그는 재판관에게 안경을 던지며 박순병을 데리고 오라며 소리쳤으며 이로 인해 공판은 10분도 채 안되어 중단되게 된다. 11시 30분 다시 한 번 진행된 공판에서도 박헌영은 여전히 진정할 기미를 보이지 않았고 결국 간수들이 그를 포박하고 신경안정제를 투여한 이후에서야 공판을 지속할 수 있었다. 결국 9월 22일 진행된 제5회 공판에서 박헌영은 배제되고야 만다.

끊임없는 고문과 동료들의 죽음 등으로 인해 이 시기 박헌영의 정신상태는 상당히 좋지 못했다고 한다. 이 시기 박헌영은 벽을 보고 대화를 시도하거나, 식음을 전폐한 채 혼잣말을 중얼거리거나, 사람의 얼굴을 보자 공포의 질린 얼굴을 하다 얼마 안 가 히죽대기 시작하거나, 인분을 벽에 바르거나 먹기도 하고, 수도 없이 자살을 시도하는 등 정신적으로 온전치 못한 모습을 보여 결국 1927년 11월 15일 병보석으로 출소하게 된다.

병보석으로 출소한 이후에도 그는 주세죽의 얼굴을 알아보지 못하는 등의 정신이상적인 행보를 계속 보였으며 그를 진찰한 정신과 의사 김탁원은 그가 회복하기까진 오랜 기간이 걸릴 것이라고 진단하기도 하였다. 그의 동창이자 친구이기도 했던 시인인 심훈은 그를 이지경으로 만든 일제에게 크게 분노하여 조선일보에 《박군의 얼굴》이라는 시를 기재하였다.

광복 이후

월북

조선의 실권자가 되다

평가

성격

박헌영의 최측근 중 한 명이기도 했던 조선의 언론인인 박갑동은 박헌영을 "단단한 표범과 같은 인상을 지닌 사람"이라고 평가했다.

사상

박헌영주의

여담

  • 주막을 경영하던 모친에게서 영향을 받아 요리를 굉장히 잘했다고 하며, 뛰어난 미식가이기도 했다고 한다.

어록

소속 정당

소속 기간 비고
1921 정계 입문
무소속 1921 - 1925 해산
조선공산당 1925 - 1928 입당
무소속 1928 - 1929 해산
소련 공산당 1929 - 1934 입당
무소속 1934 - 1939 체포 후 일시 정계 은퇴
경성콤그룹 1939 - 1941 창당
무소속 1941 - 1945 해산
1945 창당
무소속 1945 건준 참여를 위한 탈당
건국준비위원회 1945 입당
무소속 1945 - 1946 해산
1946 - 1949 입당
1949 - 1995 합당
정계 은퇴
사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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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헌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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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음력 5월 1일.
  2. 박제상(朴堤上, 363년 ~ 419년)의 55세손으로, 태사공파 예산문중 56세 ◯영(永) 항렬이다.
  3. 3.0 3.1 3.2 이혼
  4. 당시에는 귀한 신문물이었던 자전거를 가지고 있었다고 한다.
  5. 첫 강의 당시엔 50여명이 참여했었으나, 마지막엔 박헌영 혼자 남아 수업을 진행할 수 없었다고 한다.
  6. 3.1운동으로 당시 뒤숭숭했던 사회 분위기로 인해 졸업사진도 못 찍은 채로 졸업했다고 한다. 교장이 학생 개개인을 따로 불러 독립운동 참여를 꾸짖고 졸업장을 수여하는 방식으로 졸업했다고.
  7. 사회주의 계열의 신일용 조선일보 논설위원이 기재했던 논설문으로, 소비에트의 도움을 받아 조선의 독립을 쟁취해야 한다는 내용의 글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