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 요약 없음 |
편집 요약 없음 |
||
114번째 줄: | 114번째 줄: | ||
'''사회대중당'''은 류큐의 진보정당으로 현재 류큐 입법원의 제1당이자 연립여당이다. | '''사회대중당'''은 류큐의 진보정당으로 현재 류큐 입법원의 제1당이자 연립여당이다. | ||
== 역사 == | == 역사 == | ||
사회대중당의 직접적인 전신은 1950년 미국 통치기에 창당되었던 오키나와 사회대중당이다. 오키나와 사회대중당은 친미와 보수를 표방하는 [[민주당(류큐) (민국 38)|민주당]]에 대항하는 혁신세력의 주축이 되는 정당이었고 때문에 미군의 | 사회대중당의 직접적인 전신은 1950년 미국 통치기에 창당되었던 오키나와 사회대중당이다. 오키나와 사회대중당은 친미와 보수를 표방하는 [[민주당(류큐) (민국 38)|민주당]]에 대항하는 혁신세력의 주축이 되는 정당이었고 때문에 미군의 류큐 주둔에 반대하여 인민당, 사회당등의 기타 혁신정당 및 재야 세력과 함께 조국복귀운동(祖国復帰運動), 즉 일본국으로의 복귀를 주장하는 사회운동을 전개하였으나 [[쇼와 경찰막부 (민국 38)|1960년 제5회 입법원 의원 총선거를 앞둔 시점에서 일본국 전역에 국가비상사태와 계엄령이 선포되며]] 지지율이 크게 추락하는 악재를 겪게되었다. 또한 타 혁신정당과의 단일화까지 불발되면서 입법원 선거에 참패하게 되었고<ref>당시 전체의석 29석 중 혁신세력은 고작 6석 밖에 차지하지 못한 반면 민주당은 '''22석'''을 차지하는 대승을 거두었다.</ref> 이에 류큐의 혁신세력들은 통합의 필요성을 절실히 느끼게 되었다. | ||
그렇게 1962년 5월, 11월의 입법원 의원 총선거를 앞두고 오키나와 사회대중당을 중심으로 오키나와 인민당, 오키나와 사회당의 3당 합당이 성사되며 혁신계 통합신당을 창당하니 그것이 현재의 사회대중당이다. 통합의 결과 사회대중당은 6회 입원선에서 9석을 차지하며 기존보다 의석을 늘리는 데에 성공했고 류큐 국민당 소속 오기미 아사토쿠(大宜味朝徳)<ref>류큐의 온건 반미·보수 정치인이자 사업가로 미군정 시기 오키나와 민주동맹, 제1차 오키나와 사회당, 류큐 국민당 등을 이끌었으며 류큐 독립과 의회민주주의를 주장했다.</ref>를 초대 직선제 행정주석으로 지지하여 민주당 소속 오타 세이사쿠(大田政作)<ref>류큐의 친미·보수 정치인이자 사업가로 미군정기 제3대 류큐 정부 행정 주석을 지냈으나 당내 파벌경쟁으로 인해 사임하였다.</ref> 전임 주석의 당선을 저지하는 쾌거를 이루어내기도 하였다. | 그렇게 1962년 5월, 11월의 입법원 의원 총선거를 앞두고 오키나와 사회대중당을 중심으로 오키나와 인민당, 오키나와 사회당의 3당 합당이 성사되며 혁신계 통합신당을 창당하니 그것이 현재의 사회대중당이다. 통합의 결과 사회대중당은 6회 입원선에서 9석을 차지하며 기존보다 의석을 늘리는 데에 성공했고 류큐 국민당 소속 오기미 아사토쿠(大宜味朝徳)<ref>류큐의 온건 반미·보수 정치인이자 사업가로 미군정 시기 오키나와 민주동맹, 제1차 오키나와 사회당, 류큐 국민당 등을 이끌었으며 류큐 독립과 의회민주주의를 주장했다.</ref>를 초대 직선제 행정주석으로 지지하여 민주당 소속 오타 세이사쿠(大田政作)<ref>류큐의 친미·보수 정치인이자 사업가로 미군정기 제3대 류큐 정부 행정 주석을 지냈으나 당내 파벌경쟁으로 인해 사임하였다.</ref> 전임 주석의 당선을 저지하는 쾌거를 이루어내기도 하였다. | ||
이후 인니전(인도네시아 전쟁)으로 인해 미민정(美民政)에 대한 지지도가 바닥을 치자 1965년 7회 입법원 선거 당시 친미 민주당을 꺾고 입법원 내 1당을 차지하며 승승장구하였으나 이듬해인 1966년 주석 선거에서 민주당 소속 마츠오카 세이호(松岡政保)<ref>류큐의 친미·보수 정치인이자 사업가로 제5대 류큐 정부 행정 주석을 지냈으며 미국 유학파로써 민주당내 미국통으로 이름이 높았다.</ref>가 당선되며 위기를 맞이하게 되었다. 또한 1968년 류큐 사회투쟁 당시 마츠오카 정부가 유연한 대처를 하고 미국과의 협상으로 국민정부의 수립과 5년 이내 독립을 확정시키면서 오히려 의석이 줄어드는 참사가 일어나게 되었다. | |||
그나마 다행으로 인니전의 참상이 류큐로 전해지자 반미 기조가 강해지며 1970년 주석 선거에서 혁신계 단일후보 [[야라 조묘 (민국 38)|야라 조묘]](屋良朝苗)<ref>류큐의 혁신 정치인이자 교육자로 초대이자 마지막 류큐 국민정부 주석과 제1·2대 류큐국 주석을 지냈다.</ref> 후보가 당선되었고 코자 폭동으로 류큐내 반미정서가 폭발하자 미국 닉슨 행정부가 독립을 부채질하며 지지도를 높일 수 있었다. 그 결과 1972년 치뤄진 초대 독립 류큐 입원선과 주석선에서 연이어 승리하며 다시금 전성기를 맞이하게 되었고 야라 조묘는 76년 재선하여 1980년까지 집권하며 사회대중당 역시 여당의 지위를 지켰으나 지지부진한 미군기지 문제와 혁신 10년의 장기집권에 피로감을 느낀 국민여론으로 인하여 한때 자당 소속이던<ref>정확히는 사회대중당의 전신 중 하나인 "오키나와 사회대중당" 소속이었다.</ref><ref>창당 초기의 오키나와 사회대중당은 보수 성향의 인물들도 다수 포함되어 있었으나 1950년대 중반기를 뒤로하여 대부분 탈당하였다.</ref> 민주당 소속 [[니시메 준지 (민국 38)|니시메 준지]](西銘順治)<ref>류큐의 정치가로 제18·19대 나하 시장, 제3·4대 류큐국 주석을 지냈다.</ref>에게 패배하며 암흑기를 겪게되었다. | |||
---- | ---- | ||
{{각주}} | {{각주}} |
2023년 1월 21일 (토) 16:35 판
| ||||||||||||||
[ 펼치기 · 접기 ]
|
류큐의 진보정당 | ||||
오키나와 사회대중당 | → | 사회대중당 | → | 현재 |
오키나와 인민당 | ||||
오키나와 사회당 |
사회대중당[1] 社会大衆党 | Social Mass Party | |
---|---|
약칭 | 社大党(사대당), SMP |
표어 | すべては琉球のために 모든 것은 류큐를 위해 |
未来へ一歩また一歩。 미래로 한걸음 또 한걸음. | |
창당일 | 1950년 10월 31일 (오키나와 사회대중당) |
1962년 5월 1일 (사회대중당) | |
전신 | 오키나와 사회대중당, 오키나와 인민당, 오키나와 사회당 (1962년 5월 1일 신설합당) |
주소 | 지도를 불러오는 중... |
나하시 이즈미자키1-17-19 (사회대중당 중앙위원회) | |
중앙위원장 | 아라가키 구니오 / 3선 (입, 19-21대) |
서기장 | 다카라 데츠미 / 3선 (입, 18·20·21대) |
이념 | 진보주의 사회민주주의 류큐 민족주의 대중주의 민주사회주의 유럽공산주의 |
스펙트럼 | 중도좌파 ~ 좌익 극좌 |
입법원 | n석[2] / n석 (nn.nn%) |
자치단체장 | n석 / n석 (00.00%) |
당 색 | 초록색 (#009140) |
국제조직 | 사회주의 인터내셔널 |
진보동맹 | |
정당원 수 | 49,537명 (2024년 1월 기준) |
학생 조직 | 류큐의 미래 |
청년 조직 | 청년사회대중당 |
여성 조직 | 사회대중당 여성위원회 |
정당 연합 | 올 류큐 |
당보 | 사회대중 |
공식 사이트 | |
SNS | | |
2024년 1월 포스터 - 미래로 한걸음 또 한걸음.[3] |
---|
개요
사회대중당은 류큐의 진보정당으로 현재 류큐 입법원의 제1당이자 연립여당이다.
역사
사회대중당의 직접적인 전신은 1950년 미국 통치기에 창당되었던 오키나와 사회대중당이다. 오키나와 사회대중당은 친미와 보수를 표방하는 민주당에 대항하는 혁신세력의 주축이 되는 정당이었고 때문에 미군의 류큐 주둔에 반대하여 인민당, 사회당등의 기타 혁신정당 및 재야 세력과 함께 조국복귀운동(祖国復帰運動), 즉 일본국으로의 복귀를 주장하는 사회운동을 전개하였으나 1960년 제5회 입법원 의원 총선거를 앞둔 시점에서 일본국 전역에 국가비상사태와 계엄령이 선포되며 지지율이 크게 추락하는 악재를 겪게되었다. 또한 타 혁신정당과의 단일화까지 불발되면서 입법원 선거에 참패하게 되었고[4] 이에 류큐의 혁신세력들은 통합의 필요성을 절실히 느끼게 되었다.
그렇게 1962년 5월, 11월의 입법원 의원 총선거를 앞두고 오키나와 사회대중당을 중심으로 오키나와 인민당, 오키나와 사회당의 3당 합당이 성사되며 혁신계 통합신당을 창당하니 그것이 현재의 사회대중당이다. 통합의 결과 사회대중당은 6회 입원선에서 9석을 차지하며 기존보다 의석을 늘리는 데에 성공했고 류큐 국민당 소속 오기미 아사토쿠(大宜味朝徳)[5]를 초대 직선제 행정주석으로 지지하여 민주당 소속 오타 세이사쿠(大田政作)[6] 전임 주석의 당선을 저지하는 쾌거를 이루어내기도 하였다.
이후 인니전(인도네시아 전쟁)으로 인해 미민정(美民政)에 대한 지지도가 바닥을 치자 1965년 7회 입법원 선거 당시 친미 민주당을 꺾고 입법원 내 1당을 차지하며 승승장구하였으나 이듬해인 1966년 주석 선거에서 민주당 소속 마츠오카 세이호(松岡政保)[7]가 당선되며 위기를 맞이하게 되었다. 또한 1968년 류큐 사회투쟁 당시 마츠오카 정부가 유연한 대처를 하고 미국과의 협상으로 국민정부의 수립과 5년 이내 독립을 확정시키면서 오히려 의석이 줄어드는 참사가 일어나게 되었다.
그나마 다행으로 인니전의 참상이 류큐로 전해지자 반미 기조가 강해지며 1970년 주석 선거에서 혁신계 단일후보 야라 조묘(屋良朝苗)[8] 후보가 당선되었고 코자 폭동으로 류큐내 반미정서가 폭발하자 미국 닉슨 행정부가 독립을 부채질하며 지지도를 높일 수 있었다. 그 결과 1972년 치뤄진 초대 독립 류큐 입원선과 주석선에서 연이어 승리하며 다시금 전성기를 맞이하게 되었고 야라 조묘는 76년 재선하여 1980년까지 집권하며 사회대중당 역시 여당의 지위를 지켰으나 지지부진한 미군기지 문제와 혁신 10년의 장기집권에 피로감을 느낀 국민여론으로 인하여 한때 자당 소속이던[9][10] 민주당 소속 니시메 준지(西銘順治)[11]에게 패배하며 암흑기를 겪게되었다.
- ↑ 로고에는 류큐 사회대중당이라는 당명이 적혀있다.
- ↑ 지역구 n석, 비례대표 n석
- ↑ 포스터 속 인물은 사회대중당 중앙위원장 아라가키 구니오.
- ↑ 당시 전체의석 29석 중 혁신세력은 고작 6석 밖에 차지하지 못한 반면 민주당은 22석을 차지하는 대승을 거두었다.
- ↑ 류큐의 온건 반미·보수 정치인이자 사업가로 미군정 시기 오키나와 민주동맹, 제1차 오키나와 사회당, 류큐 국민당 등을 이끌었으며 류큐 독립과 의회민주주의를 주장했다.
- ↑ 류큐의 친미·보수 정치인이자 사업가로 미군정기 제3대 류큐 정부 행정 주석을 지냈으나 당내 파벌경쟁으로 인해 사임하였다.
- ↑ 류큐의 친미·보수 정치인이자 사업가로 제5대 류큐 정부 행정 주석을 지냈으며 미국 유학파로써 민주당내 미국통으로 이름이 높았다.
- ↑ 류큐의 혁신 정치인이자 교육자로 초대이자 마지막 류큐 국민정부 주석과 제1·2대 류큐국 주석을 지냈다.
- ↑ 정확히는 사회대중당의 전신 중 하나인 "오키나와 사회대중당" 소속이었다.
- ↑ 창당 초기의 오키나와 사회대중당은 보수 성향의 인물들도 다수 포함되어 있었으나 1950년대 중반기를 뒤로하여 대부분 탈당하였다.
- ↑ 류큐의 정치가로 제18·19대 나하 시장, 제3·4대 류큐국 주석을 지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