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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년 6월 3일 (토) 15:25 판
대한국 태상황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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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국 태상황 大韓國 太上皇 | Emperor Emerita of Korea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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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직 | 이종 |
재위기간 | 희령 27년 4월 27일 |
경칭 | 폐하 (陛下) |
관저 | 운현궁 |
대한상황폐하몸기[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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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요
大皇帝는 国会의 同意를 받아 退位할 수 있으며、그 制位는 本法 第2条에 따라 継承한다 대황제는 국회의 동의를 받아 퇴위할 수 있으며, 그 제위는 본법 제2조에 따라 계승한다. 제위계승법 (帝位繼承法) 제1장 황위계승 제7조 |
태상황(太上皇)은 대한국의 상황으로, 제위를 물려주고 물러난 대황제를 높여 가리키는 칭호다.
어원
기원은 전국시대 조나라 무령왕이 아들 혜문왕에게 양위하고 자신을 군주의 아버지라는 뜻에서 '주부(主父)'라고 자칭한 것이다. 태상황이라는 표현은 진시황에 의해 추존된 장양왕이 첫 사례이며[2], 살아서 태상황이 된 최초의 인물은 한고제의 아버지로, 보통 유태공이라 불리는 인물이다. 유방이 결국 승리했지만 과거 초한전쟁 당시 아버지에게 미안한 일이 좀 있어서[3] 깍듯하게 대했다.
기록의 표현에 따르면 황제와 그 아버지의 관계가 아니라 일개 평민의 부자 관계처럼 편하게 대하였단다. 이를 본 유태공의 신하가 '아무리 아버지이어도 상대가 황제이신데 위아래란 게 있어야 하지 않습니까?'라고 간언했고, 유태공도 이를 받아들여서 이후부터 유방을 만날 때는 황제에 대한 예를 갖췄다. 그러자 유방은 '그럼 아버지가 황제보다 더 높으면 될 거 아냐'라며 즉석에서 태상황 자리를 만들었다. 그리고 이 간언을 한 신하에게는 따로 상을 내렸다. 이에 대해 안사고는 한서의 주석에 '천자의 아버지이므로 황(皇)이라 불렀다. 정치에 관여하지 않았으므로 제(帝)라고 하지 않았다'고 서술했다. 황제라는 칭호에서 '황'보다는 '제'가 실권을 가졌음을 시사하는 것으로, 후대의 태상황 가운데서 황제를 대신해 실권을 갖고 정사를 돌본 경우 태상황이 아니라 태상황제(太上皇帝)라고 칭했다. 보통 태상황은 원래 황제였던 사람이 자의 혹은 타의에 의하여 황제 자리를 내놓는 게 대부분이지만 유태공의 경우는 유일하게 황제 자리를 거치지 않고 태상황의 자리에 오른 케이스이기도 하다.
대한국에서는 광무황제가 퇴위하며 태상황 칭호를 받으며 표현이 정립되었다.
역사
전근대
고구려의 태조대왕이 동생 혹은 장남인 차대왕에게 양위하고 별궁에서 기거한 것이 최초의 기록이다(태조대왕 문서를 보면 알 수 있지만 다소 논란이 있다). 100세를 훌쩍 넘겨 비정상적으로 길어지는 수명을 비롯한 정황에서 상식적으로 삼국사기보다 중국 후한서의 기록이 더 사실에 가까워 보이는데, 후한서의 경우는 태조왕이 죽고 나서 차대왕이 즉위한 것으로 쓰고 있다.
신라는 진성여왕이 효공왕에게 양위하고 반 년 동안 태상왕으로 있었던 적이 있다.
고려는 헌종 · 명종 · 신종 · 희종 · 원종 · 충렬왕 · 충선왕 · 충숙왕 8명의 사례가 있는데 무신정권과 뒤이은 원 간섭기를 겪으면서 그 수가 대폭 늘었다.
헌종은 작은아버지 계림공에게 옥좌를 반 강제로 양위하고 전왕(前王)으로 불렸다. 명종은 최충헌에 의해 옥좌에서 끌려 내려 왔는데 동문선에 기록된 명종 애책문엔 명종이 태상왕으로 불렸다고 한다. 신종은 태자 희종에게 스스로 선위하였다. 희종은 최충헌을 죽이려 했다가 실패하고 명종처럼 선위라는 명목하에 폐위당했지만 일단 태상왕의 칭호와 대접은 받았다. 원종은 임연에게 협박당해 태상왕으로 밀려나 용암궁에 유폐되었다가 원나라의 압력으로 임연이 한 발 물러서면서 겨우 복위했다.
원 간섭기에 재위한 충렬왕, 충숙왕은 아들에게 양위했다가 복위했고, 충선왕은 두 번째 재위기[4]에 아들에게 양위하고 원나라에 눌러앉은 사례라 국왕 재위 순서가 좀 꼬여있다.(원종→ 충렬왕→ 충선왕→ 다시 충렬왕→ 다시 충선왕→ 충숙왕→ 충혜왕→ 다시 충숙왕→ 다시 충혜왕→ 충목왕)
조선에선 태조 · 정종 · 태종이 살아서 왕위를 물려줬다(세조, 중종도 그랬지만 딱 하루 뒤 사망하여 예외.또 연산군하고 광해군도 예외.그리고 똑 단종의 경우도 예외. 상왕으로 있다가 노산군으로 강등되었다 복권되었기 때문이다.) 태종 재위 기간에 태조와 정종이 공존했고, 세종 치세엔 정종과 태종이 공존했다. 태조는 상왕으로 2년·태상왕으로 8년을, 정종은 상왕으로 18년·태상왕으로 1년을, 태종은 상왕으로 1년·태상왕으로 3년을 보냈다.[5]
정종이 사망할 때까지 신하들은 일상적으로 정종을 '노상왕'으로, 태종을 '상왕'으로 칭했으며, 정종이 사망한 뒤인 1421년 태종을 성덕신공태상왕(聖德神功太上王)으로 높이기도 했다. 태종이 세종에게 양위하여 상왕이 됨에 따라 조정 신료들은 당연히 상왕인 정종 이방과를 태상왕으로 부를 것을 주청하였지만, 왕이 된 세종은 태종보다 나이가 더 많으시니 노상왕(老上王)이라 부르면 충분하다고 하여 그렇게 불렸다. 이듬해 정종이 사망하자, 세종은 아버지 태종을 태상왕으로 격을 올렸다. 원래 상왕과 그 선임자가 함께 공존할 때 태상왕이 되는 것이었지만, 세종은 아버지의 격을 (정종보다) 높여드리기 위해 이같이 특별한 조치를 취했다.
그러나 일단 상왕이 되려면 후임왕에게 선위를 해야 가능한데 조선 전기에는 그래도 어느 정도 이런 경우가 나왔지만 이후 유교적 덕목인 충효가 강화되는 조선 후기에 들어서는 왕이 살아있는데 선위를 받는 것 자체가 불충이고 불효라는 인식이 생겨났다. 그래서 몇몇 임금들은 이른바 '선위 파동'을 일으켜 세자 및 신료들의 충성심을 시험하기도 했다. 이를 통해 본인의 권위에 대한 재신임을 받아 정당성을 확보했다. 대표적인 인물이 선조와 영조. 따라서 세자와 신료들은 선위를 그냥 넙죽 받아들이면 반역이니 석고대죄하고 선위를 거두어 달라고 빌어야 했다. 그렇다고 선위의 뜻이 정말 확고하면 그걸 지나치게 거부하는 것도 불충이라 눈치를 잘 살펴야 했다.
현대
정종 마지막으로 약 400년 동안 상황은 등장하지 않았으나, 1907년 광무황제가 퇴위함에 따라 다시 태상황이 등장했다. 융희시대에서는 태상황으로 양위하지 않으면서, 태상황은 고종을 상징하는 단어로 남는듯 하였다. 그러나 제2차 세계대전 패전 이후 건흥황제가 전쟁에 대한 책임을 지며 퇴위하면서 태상황이 다시 부활하였다.
이후 태시황제 또한 1991년 생전 퇴위를 하는등, 현대에 들어서 평균 수명이 늘어나다보니 선대 군주가 굳이 죽을 때까지 왕위에 남지 않고 생전에 미리 후계자에게 양위하였고, 희령황제 또한 2018년에 퇴위하며, 태상황으로 물러나는것이 사실상 관례가 되었다.
역대 태상황
관련 문서
- ↑ 가운데 문양은 금빛 이화 문양을 띠고 있는 대한국 황실의 인장으로, 관습법상 대한국의 국장이기도 하다.
- ↑ 다만 후세에서는 이런 케이스를 태상황이 아닌 추존황제로 쳐준다.
- ↑ 팽성대전이 벌어지는 와중에 챙기지 못하기도 했고, 광무대치 시기엔 항우가 태공을 인질로 '네 아비가 삶아지는 걸 볼 테냐'라고 협박하자 '우리가 의형제의 연을 맺었으니 우리 아빠가 네 아빠다. 네 아비 국물맛이 참 궁금하니 꼭 한사발 보내다오'(...)로 받아쳤다. 물론 이는 진심이 아니라 아버지가 인질로 잡혔다고 해서 휘둘리지 않을 것이란 의지 표명과 항우의 치졸한 행위를 비판하는 의미였다.
- ↑ 첫 번째 재위기는 양위가 아니라 원나라에 의한 폐위였다. 충선왕이 조비를 총애하는 것에 불같이 투기한 계국대장공주가 원나라 조정에 이걸 일러바쳐 즉위 8개월 만에 원나라로 강제 소환됐었다.
- ↑ 정종의 기록은 한국사에서 가장 긴 기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