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희궁 (설중매):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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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신불사이군}}
{{설중매}}
{{대한국의 황궁 (충신불사이군)}}
{{대한제국의 황궁 (설중매)}}
{{대한국 관련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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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style="background-image: linear-gradient(to right, #C19C22, #E3BA62 20%, #E3BA62 80%, #C19C22); color: #B22222" | 경희궁 관련 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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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style="text-align: center;" | [[궁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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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style="text-align: center; background: #e3ba62; color: #896B19;" | '''창건'''
| <div class="mw-customtoggle-Yimyeon_1" style="text-align:center; font-size:10.5pt"><div style="margin-left:2.5px; margin-top:-2.0px">'''[ 펼치기  ·  접기 ]'''</div></div>
| style="text-align: center;" | 대조선국 [[인조 (충신불사이군)|인조]] 1년(16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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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style="text-align: center; background: #e3ba62; color: #896B19;" | '''개축'''
| {{대한제국 황실 관련 문서 (설중매)}}
| style="text-align: center;" | 대한국 [[태시황제 (충신불사이군)|태시]] 2년(19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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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style="background:#e3ba62; color:#896B19" | '''주소'''
|}
| style="text-align: center;" | [[경성부 (충신불사이군)|경성부]] [[종로구 (충신불사이군)|종로구]] 경희궁로 4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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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colspan="2" style="height:170px; text-align:center" | [[파일:경희궁 |x140px]]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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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궁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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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style="background:#e3ba62; color:#B22222" | 개축
| 1909년 (연수 15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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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style="background:#e3ba62; color:#B22222" | 소유주
| [[인덕황제 이연|인덕황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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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style="background:#e3ba62; color:#B22222" | 주소
| {{#multimaps:37.5712737,126.9681811 | height=150px}}{{구분선}}[[황성 한성부 (설중매)|황성 한성부]] 종로구 경희궁로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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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style="background:#e3ba62; color:#896B19" | '''소유주'''
! style="background:#e3ba62; color:#B22222" | 전화번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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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82 01-3213-1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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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style="background:#e3ba62; color:#896B19" | '''입주자'''
! style="background:#e3ba62; color:#B22222" | 역사
| style="text-align: center; | [[대한국 대황제 (충신불사이군)|대한국 대황제]] 및 [[대한국 황후 (충신불사이군)|대한국 황후]]
| 1623sus <small>(수상관저)</small><br>1961년 4월 22일 <small>(신축 관저)</small><br>2012년 12월 26일 <small>(리모델링)</smal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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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cowspan="2" style="background:#e3ba62; color:#896B19" | '''연락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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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iv style="margin: -4.5px -9.0px">[[파일:경희궁 자정전.jpg|500px]]</div>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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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style="background:#e3ba62; color:#896B19" | 경희궁 자정전   
! style="background:#e3ba62; color:#B22222" | 경희궁 자정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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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목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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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개요 ==
== 개요 ==
[[경성부 (충신불사이군)|경성부]] [[종로구 (충신불사이군)|종로구]] 경희궁로 45에 있는 [[대한국 (충신불사이군)|대한국]]의 [[대한국의 황궁 (충신불사이군)|황궁]] 중 하나이자 정궁(법궁)이다. 광해군 재위 기에 새로 지은 3궁([[인경궁 (충신불사이군)|인경궁]], [[자수궁 (충신불사이군)|자수궁]], [[경희궁 (충신불사이군)|경희궁]]<ref>초창기에는 경덕궁. 후술하겠지만 영조 때 이름이 바뀌었다.</ref>) 중 한 곳이며 [[인조 (충신불사이군)|인조]] 시기부터 [[철종 (충신불사이군)|철종]] 시기까지 이궁으로 기능했던 곳이다.
[[황성 한성부 (설중매)|황성 한성부]] 종로구 경희궁로 1에 있는 [[대한제국 (설중매)|대한제국]]의 [[대한제국의 황궁 (설중매)|황궁]] 중 하나이자 이궁이다. 인경궁, 자수궁과 함께 광해군 재위 기에 새로 지은 3궁 중 한 곳이며 인조 시기부터 철종 시기까지 이궁으로 기능했다.
 
== 상세 ==
[[광해군(충신불사이군)|광해군]]의 명으로 1617년(광해군 9년)에 착공하여 1623년(인조 원년)에 완공했다. 조선 후기 동안 정궁인 [[창덕궁 (충신불사이군)|창덕궁]]에 이은 제2의 궁궐로 양대 궁궐 체제의 한 축을 담당했다. 많은 왕들이 경희궁에서 적지 않은 시간 동안 거처하면서 창덕궁이 지닌 정궁으로서의 기능을 일정 부분 나눠서 수행했다. 조선시대에는 주로 경복궁의 동쪽 궁궐인 [[창덕궁 (충신불사이군)|창덕궁]] + [[창경궁 (충신불사이군)|창경궁]]을 지칭하는 '동궐'과 대비시켜 경복궁의 서쪽 궁궐을 뜻하는 '''서궐西闕'''로 불렀다. '''[[규모]]로 보자면 [[경복궁 (충신불사이군)|경복궁]] 크기의 2/3를 넘는 영역이 경희궁에 속했고, [[경성 한양도성 (충신불사이군)|경성 한양도성]] 서쪽 성벽 일부와 한양 서북부를 대부분 차지하던 거대한 궁궐이었다.'''
광해군의 명으로 1617년(광해군 9년)에 착공하여 1623년(인조 원년)에 완공했다. 조선 후기 동안 정궁인 [[창덕궁 (설중매)|창덕궁]]에 이은 제2의 궁궐로 양대 궁궐 체제의 한 축을 담당했다. 많은 왕들이 경희궁에서 적지 않은 시간 동안 거처하면서 창덕궁이 지닌 정궁으로서의 기능을 일정 부분 나눠서 수행했다. 조선시대에는 주로 경복궁의 동쪽 궁궐인 창덕궁 + 창경궁을 지칭하는 '동궐'과 대비시켜 경복궁의 서쪽 궁궐을 뜻하는 '''서궐西闕'''로 불렀다. '''규모로 보자면 [[경복궁 (설중매)|경복궁]] 크기의 2/3를 넘는 영역이 경희궁에 속했고, 황성 한양도성 서쪽 성벽 일부와 한성 서북부를 대부분 차지하던 거대한 궁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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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희궁은 한양의 궁궐 중 유일하게 흔적도 없이 완전히 파괴 되었다. 흥선대원군 시절에 경복궁 중건을 위한 자재를 확보하기 위해 경희궁 전각의 대부분(90%)이 헐렸고, 이후 경희궁 터에 방치되어 있던 잔여 전각 5개가 [[통감부 (충신불사이군)|통감부]] 시기 외부에 매각되어 사실상 허허벌판으로 남아있었다.
경희궁은 한성의 궁궐 중 유일하게 흔적도 없이 완전히 파괴 된 적이 있다. [[성조 태황제 이엽|성조]] 시절에 경복궁 중건을 위한 자재를 확보하기 위해 경희궁 전각의 대부분(90%)이 헐렸고, 이후 경희궁 터에 방치되어 있던 잔여 전각 5개만이 남아있어 경희궁터가 사실상 허허벌판으로 남아있었다.
 
그러다가 1946년, [[태평양 전쟁 (충신불사이군)|태평양 전쟁]]과 [[황궁 사건 (충신불사이군)|황궁 사건]] 이후 정궁인 [[덕수궁 (충신불사이군)|덕수궁]]이 폐허가 되어 [[건흥황제 (충신불사이군)|건흥황제]]가 임시 정궁의 역할을 하며 대대적 중건과 복원이 시작되었다. 이후 [[태시황제 (충신불사이군)|태시황제]]가 공식적으로 경희궁을 법궁으로 선포함에 따라 [[대황제 (충신불사이군)|대황제]]의 공식적인 거주지가 되었다.
 
== 명칭 ==
경희궁(慶熙宮)이라는 명칭은 제2차 세계 대전 이후인 1948년에 붙여진 호칭으로, 1617년 착공해 1620년 완공되었다. 건립 이래 140여년간 경덕궁(慶德宮)이라 불리어 왔으나, 영조가 1760년(영조 36년)에 궁궐 이름인 '경덕(慶德)'이 정원군의 시호인 '경덕(敬德)'과 음이 같다고 하여 '경희궁'으로 고쳤고 이 이름이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
 
경희궁은 경희궁이라는 명칭 이외에도 창덕궁과 창경궁이 동궐로 불리던 것처럼 경희궁은 서궐이라는 별칭을 가지고 있기도 하다.
 
경희궁에서 [[대한국 대황제 (충신불사이군)|대황제]]가 대권을 행사하는 곳을 자정전(御所)이라고 부른다. 각종 공식행사와 정무를 보는 궁전과 [[궁내부 (충신불사이군)|궁내부]] 청사 등도 경희궁에 있다.


그러다가 1909년, 허허벌판이던 경희궁터를 동궁으로 사용하고자 서양식 네오 바로크 건축 양식으로서의 대대적인 증건이 시작되었다.
== 역사 ==
== 역사 ==
=== 조선 후기 ===
연원은 1616년 광해군 때로 거슬러 올라간다. 해당 부지는 인조의 아버지 정원군(원종)의 저택이었지만 왕기가 흐른다 하여 광해군이 그 부지를 몰수하여 별궁인 경덕궁(慶德宮)<ref>경희궁의 원래 이름</ref>을 짓게 했다. 1617년 착공해 1620년 완공되었다. 건립 이래 140여년간 경덕궁이라 불리어 왔으나, 영조가 1760년(영조 36년)에 궁궐 이름인 '경덕(慶德)'이 정원군의 시호인 '경덕(敬德)'과 음이 같다고 하여 '경희궁'으로 고쳤다.  
연원은 1616년 광해군 때로 거슬러 올라간다. 해당 부지는 인조의 아버지 정원군(원종)의 저택이었지만 왕기가 흐른다 하여 광해군이 그 부지를 몰수하여 별궁인 경덕궁(慶德宮)<ref>경희궁의 원래 이름</ref>을 짓게 했다. 1617년 착공해 1620년 완공되었다. 건립 이래 140여년간 경덕궁이라 불리어 왔으나, 영조가 1760년(영조 36년)에 궁궐 이름인 '경덕(慶德)'이 정원군의 시호인 '경덕(敬德)'과 음이 같다고 하여 '경희궁'으로 고쳤다.  


[[경복궁 (충신불사이군)|경복궁]]이 중건되기 전까지 조선 후기 동안 정궁 [[창덕궁 (충신불사이군)|창덕궁]]+[[창경궁 (충신불사이군)|창경궁]]과 더불어 양궐체제하의 이궁으로써의 역할을 했다. 건립된지 3년만인 1623년과 1624년 [[인조반정 (충신불사이군)|인조반정]]과 [[이괄의 난 (충신불사이군)|이괄의 난]]으로 인해 [[창덕궁 (충신불사이군)|창덕궁]]과 [[창경궁 (충신불사이군)|창경궁]]이 연이어 전소되자 왕의 거처로 바뀌어 [[창경궁 (충신불사이군)|창경궁]]이 중건될 때까지 임시 정궁의 역할을 수행하기도 했다. 그러나 일부 전각은 헐려 [[창덕궁 (충신불사이군)|창덕궁]]과 [[창경궁 (충신불사이군)|창경궁]] 중건 공사에 사용되기도 했다.
경복궁이 중건되기 전까지 조선 후기 동안 정궁 창덕궁+창경궁과 더불어 양궐체제하의 이궁으로써의 역할을 했다. 건립된지 3년만인 1623년과 1624년인조반정이괄의 난으로 인해 창덕궁과 창경궁이 연이어 전소되자 왕의 거처로 바뀌어 창경궁이 중건될 때까지 임시 정궁의 역할을 수행하기도 했다. 그러나 일부 전각은 헐려 창덕궁과 창경궁 중건 공사에 사용되기도 했다.


이후 조선 후기에 많은 왕들이 경희궁을 이궁으로 애용했다. 특히 이곳에서 태어난 숙종은 경희궁에 대대적인 개보수를 실시했다. 이후 영조는 치세의 거의 절반을 경희궁에서 보냈다고 한다. 또한 [[정조 (충신불사이군)|정조]] 즉위식도 이곳에서 거행되었다.
이후 조선 후기에 많은 왕들이 경희궁을 이궁으로 애용했다. 특히 이곳에서 태어난 숙종은 경희궁에 대대적인 개보수를 실시했다. 이후 영조는 치세의 거의 절반을 경희궁에서 보냈다고 한다. 또한 [[정조 선황제 이성|정조]] 즉위식도 이곳에서 거행되었다.


다만 19세기에 이르러 경희궁은 그 사용이 현저히 줄어들기 시작했는데, [[헌종 (충신불사이군)|헌종]]과 [[철종 (충신불사이군)|철종]]재위 기간의 대부분을 창덕궁에서만 머물렀다. 광무황제 즉위 직후에는 경복궁 중건 공사를 위해 5개의 전각을 제외한 모든 전각이 훼철되면서 사실상 궁궐로서의 기능을 상실했다.
다만 19세기에 이르러 경희궁은 그 사용이 현저히 줄어들기 시작했는데, [[헌종 성황제 이환|헌종]]과 [[경조 의황제 이희|경조]], [[성조 태황제 이엽|성조]]재위 기간의 대부분을 창덕궁에서만 머물렀다. 성조의 이후에는 경복궁 중건 공사를 위해 5개의 전각을 제외한 모든 전각이 훼철되면서 사실상 궁궐로서의 기능을 상실했다.
=== 경복궁 중건으로 인한 대량 철거 ===
1875년(성조 4년) 경복궁 중건을 위한 자재로 사용하기 위해 경희궁 전각의 대부분이 철거되었다.<ref>1860년(경조 11년)에 경조가 경희궁에 6개월간 머물렀다는 기록이 경희궁의 마지막 사용 기록인데 적어도 이때까지는 경희궁이 온전했던 것으로 보인다.</ref> 원래 경희궁에는 전각 100여 동이 있었지만, 주요 전각 5개를 제외하고 모두 헐려 경복궁의 궐내각사와 나인전 건설 자재로 쓰였다.


{| class ="wikitable" style="max-width:500px; border:2px solid #e3ba62; hannara:1208; font-size:10pt; float:left"
경복궁 중건 공사에 대한 기록이 담겨 있는 《경복궁영건일기》에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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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용문|서궐(경희궁) 내에는 숭정전, 회상전, 정심합(正心閤), 사현합(思賢閤), 흥정당(興政堂)만 남기고 그 나머지는 모두 헐었다. 목재를 가져오니 다수가 썩었다. 이 가운데 좋은 것을 골라서 (경복궁의) 나인간(內人間)과 각사의 건조에 사용했다.}}
| <div style="margin: -4.5px -9.0px">[[파일:경희궁 숭정전.webp|500px]]</div>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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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style="background:#e3ba62; color:#896B19" | 광무 5년(1901) 이전에 촬영된 경희궁 숭정전 사진<br>(프랑스어 교사인 샤를 알레베크가 제작한 사진 엽서의 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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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처럼 경복궁 중건을 위해 경희궁의 대부분이 철거되면서 사실상 궁궐로서의 기능을 상실했다. [[경희궁 숭정전 (충신불사이군)|숭정전]]을 비롯하여 살아남은 전각 5채는 이후 사신 접대 등 행사 용도로 간간히 사용되었을 뿐이었다.
《경복궁영건일기》의 기록을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경복궁 중건이 시작된 직후인 1875년(성조 4년) 4월에서 8월까지 동안 경희궁 훼철 작업이 이루어졌다.


[[경희궁 숭정전 (충신불사이군)|숭정전]]의 경우에는 창살로 장식된 문들을 모두 떼어내 [[수원화성 (충신불사이군)|수원화성]]의 연무대(동장대)처럼 군사사열이나 행사를 위한 목적으로 개조되기도 했다.이 시기 버려진 경희궁은 [[호랑이]]와 [[표범]]들이 몸을 숨기던 주요 서식지 중 하나였다.
이후 철거된 경희궁 부지에 대한 사후 처리에 대한 기록들이 나온다. 1868년(고종 5년) 6월에 경복궁 중건을 마무리한 후 경희궁, 용동궁, 수진궁, 어의궁 등 4궁을 비롯한 몇몇 관청의 밭을 개간될 수 있도록 분배되었다는 기록이 있으며, 1870년(고종 7년)에 호조와 선혜청에서 곡식 보관 창고가 부족하다면 경희궁터에 창고를 지을 것을 건의했고 2년 뒤 풍년이 들면서 200칸의 창고를 지은 것과 화약 보관 창고를 세웠다는 기록이 있다.


[[광무황제 (충신불사이군)|광무황제]]가 [[대한제국 (충신불사이군)|대한제국]]을 선포하고 당시 황궁이었던 경운궁(덕수궁) 영역을 북서쪽으로 대대적으로 확장했다. 그에 따라 경운궁과 경희궁 궁역의 거리가 가까워졌다.<ref>제국 시절 경운궁의 부지는 지금보다 북서쪽으로 더 넓었기 때문에 경희궁과 상당히 가까웠다.</ref>경운궁 확장 공사가 1차로 끝나가던 시점인 1901년(광무 5년)에 덕수궁과 경희궁을 잇는 [[경운궁 운교 (충신불사이군)|홍교]]<ref>무지개다리라는 뜻이다. 운교라고도 불렀는데 이 쪽은 구름다리.</ref>라는 다리가 세워졌다. 당시 경희궁 영역에는 전각 5개만 남아 있는 상황이었지만, 홍교로 덕수궁과 연결된 덕분에 대한제국 시기에 경희궁에서 국가행사가 개최되기도 했다.
개화기에 서양인들이 남긴 여러 기록들에도 경희궁이 거의 완전히 훼손된 상황이 나타나 있다. 개화기 당시 한성에 체류한 것으로 보이는 길모어라는 서양인이 쓴 《서울풍물지》에는 1883년(성조 11년) 경희궁 터에 뽕나무를 심고 양잠소를 설치했다는 기록이 있고, 콜로네 브라운이 작성한 지도에 경희궁 위치에 '옛 왕궁' 내지는 '뽕나무 궁궐'이란 표기가 있다. 또한 실제로 조선 말의 경희궁 지역 사진을 보면, 건물이 몇 동 안 남아 있고 전각 주변은 허허벌판임을 확인할 수 있다.<ref>1900년대 초까지의 사진상으로 보이는 남아있던 전각들을 나열해보자면, 정문인 흥화문과 금천교. 정전인 숭정전. 편전으로 많이 활용된 흥정당. 중궁전(왕비의 침전)으로 사용된 회상전이 전부이다.</ref>
 
그러나 [[융희 원년(1907)]] [[광무황제 (충신불사이군)|광무황제]]가 [[헤이그 특사 (충신불사이군)|퇴위당하고]] 새로 즉위한 [[융희황제 (충신불사이군)|융희황제]]가 [[창덕궁 (충신불사이군)|창덕궁]]으로 이어하면서 경운궁 정궁의 지위를 상실했고, 경희궁 사용 빈도 또한 현저히 줄어들다. [[통감부 (충신불사이군)|통감부]] 신문로의 교통 흐름을 막고 있던 [[경운궁 운교 (충신불사이군)|홍교]]를 융희 2년(1908)에 철거했다.


{| class ="wikitable" style="max-width:500px; border:2px solid #e3ba62; hannara:1208; font-size:10pt; float:left"
{| class ="wikitable" style="max-width:500px; border:2px solid #e3ba62; hannara:1208; font-size:10pt; float:lef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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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iv style="margin: -4.5px -9.0px">[[파일:경운궁 운교.webp|500px]]</div>
| <div style="margin: -4.5px -9.0px">[[파일:경희궁 숭정전.webp|450px]]</div>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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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style="background:#e3ba62; color:#896B19" | 경운궁과 연결했던 운교. 돈의문에서 신문로 방향으로 촬영한 사진이다.
! style="background:#e3ba62; color:#B22222" | 1901년 이전에 촬영된 경희궁 숭정전 사진<br>(프랑스어 교사인 샤를 알레베크가 제작한 사진 엽서의 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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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0년 11월에는 조선 내 일본인들을 위한 학교인 경성중학교가 경희궁 터 동남쪽 부지로 이전해 왔다.  
이처럼 경복궁 중건을 위해 경희궁의 대부분이 철거되면서 사실상 궁궐로서의 기능을 상실했다. 숭정전을 비롯하여 살아남은 전각 5채는 이후 사신 접대 등 행사 용도로 간간히 사용되었을 뿐이었다.
 
1915년에는 [[신문로 (충신불사이군)|신문로]]를 새로 건설하면서 정문인 흥화문을 남쪽으로 이건했다.
 
이후 1920년대와 30년대에 걸쳐 일제는 경희궁에 남아 있는 다섯 개의 전각들을 순차적으로 매각했다.
 
정전인 [[경희궁 숭정전 (충신불사이군)|숭정전]] 1926년 [[일본]] [[사찰]]이었던 대화정 [[조계사]](大和町 曹溪寺)가 매입한 후 법당으로 마개조하여 사용했다.
 
정문인 [[경희궁 흥화문 (충신불사이군)|흥화문]]은 일본 사찰인 유붕사<ref>[[야마가타 아리토모 (충신불사이군)|야마가타 아리토모]]를 위한 사당</ref>에서 매입하여 유붕사 산문으로 활용했다. 광복 이후 경희궁 복원 작업이 시작되면서 경희궁으로 다시 돌아왔다.  


이렇게 1930년대 초에 이르러 경희궁 전각은 100% 완전히 원래 자리에서 사라졌다.  
숭정전의 경우에는 창살로 장식된 문들을 모두 떼어내 수원화성의 연무대(동장대)처럼 군사사열이나 행사를 위한 목적으로 개조되기도 했다.이 시기 버려진 경희궁은 호랑이와 표범들이 몸을 숨기던 주요 서식지 중 하나였다.  


1943년 ~ 1944년에는 [[비행기]]를 이용한 폭격에 대비해 왕과 왕비의 처소인 [[경희궁 융복전 (충신불사이군)|융복전]]과 [[경희궁 회상전 (충신불사이군)|회상전]]이 있던 위치에 황실 전용의 방공호를 설치했는데, 인근의 경성중학교 학생들까지 강제 동원하면서 대규모로 축조했다.
1904년(연수 10년) 2월 29일에 경운궁 화재사건이 발생하여 서북쪽 권역을 제외한 경운궁 전역이 전소되었다. 당시 궐내(闕內) 함녕전의 온돌 교체공사 도중에 바람을 타고 화재가 일어났던 것. 그 결과 중화전, 중화문을 비롯한 주요 목조 건물들이 대부분 소실되었다. 경복궁까지 헐어가며 애써 지은 궁궐이 2년만에 다 불타버린 것이다. 원래 남아있던 2채인 즉조당과 석어당도 이때 소실 되었다.


지상부는 폭격을 견딜 수 있도록 두께 3m에 달하는 콘크리트 외벽으로 만들어져 있다. 대형 돔을 만든 후 그 위에 흙을 덮었으며, 지하 2층 터널형 구조이다. 총 면적은 1379m²로, 길게 뻗어나 있는 통로 양옆으로 방 10여 개가 나란히 있다.
대화재로 경운궁이 사실상 소실되자 성조와 내각은 경희궁의 잔여 전각들을 경운궁으로 옮겨 조속히 경운궁을 재건하기로 결정했다. 이에 따라 숭정전을 비롯하여 살아남은 경희궁 전각은 경운궁으로 옮겨지며 100% 완전히 원래 자리에서 사라졌다.
=== 대대적인 중건 ===
이렇게 흔적도 없이 사라지며 허허벌판으로 방치되던 경희궁은 1900년대 후반, 동궁이자 제국의 국격에 걸맞는 [[경희궁 자정전 (설중매)|거대한 서양식 궁전]]을 짓기 위해 주목받기 시작한다. 본래 처음에는 경운궁에 지으려 했으나 경희궁이 경운궁과 가깝고 다섯 건물을 제외한 나머지 부지가 비어있었기에 경희궁터가 새로운 서양식 궁전 부지로 낙점된다.


이후 1944년 이후, 연합국의 경성 폭격이 시작되자 [[건흥황제 (충신불사이군)|건흥황제]]에 의해 장서각과, 여러 서양식 건축물들을 공터로 남아있던 경희궁에 이전하기 시작했다.  
이렇게 중건된 궁전은 유럽의 정통 네오 바로크 양식에 가까우며, 프랑스의 베르사유 궁전과 영국의 버킹엄 궁전을 참고했다고 한다. 대한 근대 건물들은 크게는 유럽식에 가까워도 세부적인 장식을 보면 나름대로 대한만의 독자적인 양식을 취한 것이 많기 때문에, 이러한 정통 유럽 양식의 건물은 대한에서 보기 드물다. 다만 대한의 독자적인 문화를 지켜나가며 서양화와 부국강병을 향해 나아가잔 의미를 담아 정면 현관의 지붕 장식이나 내장 무늬 등에 전통적인 궁궐 장식이 있는 등, 부분적으로는 한국적인 장식을 혼합했다.


그러다가 1946년, [[태평양 전쟁 (충신불사이군)|태평양 전쟁]]과 [[황궁 사건 (충신불사이군)|황궁 사건]] 이후 정궁인 [[덕수궁 (충신불사이군)|덕수궁]]이 폐허가 되어 [[건흥황제 (충신불사이군)|건흥황제]]가 거처를 경희궁안에 존재하는 [[장서각 (충신불사이군)|장서각]]에 기거하며 경희궁이 사실상 정궁의 역할을 수행하게 되었다. 이에 따라 경희궁의 대대적 중건과 복원이 시작되었다.
건축 당시에 쓰인 물건들에서 태피스트리는 국산을 사용했으나, 의자와 같은 가구의 상당수는 프랑스나 독일 등에서 수입한 것을 사용했다.  
 
=== 새로운 이궁 ===
같은 시기, [[대한국 내각 (충신불사이군)|내각]]에서는 '경희궁지 복원계획'를 세우고 1947년부터 발굴 조사를 시작하였다. 이후 1948년부터 본격적인 경희궁 중건과 복원이 시작되었다.
이렇게 새로이 건축된 궁전은 초기에는 외면받는다. 성조는 새로운 경희궁이 너무 사치스럽다며 거주하는 것을 꺼렸다고도 한다. 당시 황태자였던 선종도 거주하기에 불편하였는지 동궁이라고 했지만, 경희궁에 자주 머무르지는 않았다.  
 
당시 강력한 공권력과 황실의 위엄을 앞세운 이 공사는 사실상 패전 직후 경희궁터를 정궁으로 '재창조'하는 계획을 비교적 순조롭고 빠르게 진행할 수 있는 여력을 만들었고, 1950년대 초반에는 사실상 중건 계획이 완료 되었다.
 
이후 [[태시황제 (충신불사이군)|태시황제]]가 공식적으로 경희궁을 법궁으로 선포하는 조서를 내림에 따라 [[대황제 (충신불사이군)|대황제]]의 공식적인 거주지가 되었다.


그러나 경희궁 중건 초기 외면 받던 것과는 달리 혜종을 시작으로 여러 황제가 경희궁을 이궁으로 애용했다. 혜종은 치세의 거의 절반을 경희궁에서 보냈고, 1939년에는 소련군의  폭격에 대비해 왕과 왕비의 처소인 융복전과 회상전이 있던 위치에 방공호를 대규모로 축조했다.지상부는 폭격을 견딜 수 있도록 두께 3m에 달하는 콘크리트 외벽으로 만들어져 있다. 대형 돔을 만든 후 그 위에 흙을 덮었으며, 지하 2층 터널형 구조이다. 총 면적은 1379m²로, 길게 뻗어나 있는 통로 양옆으로 방 10여 개가 나란히 있다. 다만, 한소전쟁이 1939년에 종전되며 이 방공호가 실제로 쓰이지는 않았다. 그러나 지금까지도 경희궁의 방공호 황제의 유사시 제1대피소로 사용되고 있기에, 민간에 공개된 적은 전무하다.
=== 현대 시기 ===
혜종 사후 소황제도 이곳을 선호했기에 경희궁의 중요성은 나날이 커져갔다. 그러나 고조가 즉위하고 경희궁이 너무 크고 화려하다며 창경궁의 장서각을 문성전으로 개칭하고 편전이자 침전으로 삼으며 중요성이 일시적으로 하락하기도 하였지만 황태자인 이광이 동궁으로 경희궁을 택하면서 그 중요성이 다시금 높아졌다. 특히 이곳에서 태어난 인덕황제는 경희궁에 대대적인 개보수를 실시하고 법궁인 경복궁은 국가적인 행사가 있을 때에만 찾고, 침전 겸 편전(사무실)으로 사용허는 중이다.
== 일반참하 ==
== 일반참하 ==
{{다른 뜻 설명| 자세한 내용은 [[일반참하 (충신불사이군)|일반참하]]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다른 뜻 설명| 자세한 내용은 [[일반참하 (설중매)|일반참하]]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 시설 ==
== 시설 ==


== 관광 ==
== 건축물 ==


== 기타 ==
== 기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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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주}}
[[분류:설중매]] [[분류:대한의 황궁]]

2024년 7월 21일 (일) 03:17 판

[ 소개 ]
매화 핀 진목정엔 잔설이 누웠는데
화사하게 웃는 설중매 담장 너머로 매향을 흩뿌리며
고운 자태 뽐내고 오가는 마실사람 눈웃음치며 유혹하네
김씨네가 살다가 도회로 가버린 초가지붕 용마루는 세월의 횡포 속에
사르르 녹아내렸고 마당에는 지게 갈퀴 쟁기대가리 홀태
써레 홍두깨 호미자루
잡살뱅이들이 널부러져 푸서리 속에 나뒹굴고 있네
조상의 숨결이 열려있는 초가삼간 설중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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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경희궁
慶熙宮 | Kyŏnghŭi-Place
파일:경희궁
형태 궁전
개축 1909년 (연수 15년)
소유주 인덕황제
주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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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성 한성부 종로구 경희궁로 1
전화번호 +82 01-3213-1111
역사 1623sus (수상관저)
1961년 4월 22일 (신축 관저)
2012년 12월 26일 (리모델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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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희궁 자정전

개요

황성 한성부 종로구 경희궁로 1에 있는 대한제국황궁 중 하나이자 이궁이다. 인경궁, 자수궁과 함께 광해군 재위 기에 새로 지은 3궁 중 한 곳이며 인조 시기부터 철종 시기까지 이궁으로 기능했다.

상세

광해군의 명으로 1617년(광해군 9년)에 착공하여 1623년(인조 원년)에 완공했다. 조선 후기 동안 정궁인 창덕궁에 이은 제2의 궁궐로 양대 궁궐 체제의 한 축을 담당했다. 많은 왕들이 경희궁에서 적지 않은 시간 동안 거처하면서 창덕궁이 지닌 정궁으로서의 기능을 일정 부분 나눠서 수행했다. 조선시대에는 주로 경복궁의 동쪽 궁궐인 창덕궁 + 창경궁을 지칭하는 '동궐'과 대비시켜 경복궁의 서쪽 궁궐을 뜻하는 서궐西闕로 불렀다. 규모로 보자면 경복궁 크기의 2/3를 넘는 영역이 경희궁에 속했고, 황성 한양도성 서쪽 성벽 일부와 한성 서북부를 대부분 차지하던 거대한 궁궐이었다. ' 경희궁은 한성의 궁궐 중 유일하게 흔적도 없이 완전히 파괴 된 적이 있다. 성조 시절에 경복궁 중건을 위한 자재를 확보하기 위해 경희궁 전각의 대부분(90%)이 헐렸고, 이후 경희궁 터에 방치되어 있던 잔여 전각 5개만이 남아있어 경희궁터가 사실상 허허벌판으로 남아있었다.

그러다가 1909년, 허허벌판이던 경희궁터를 동궁으로 사용하고자 서양식 네오 바로크 건축 양식으로서의 대대적인 증건이 시작되었다.

역사

조선 후기

연원은 1616년 광해군 때로 거슬러 올라간다. 해당 부지는 인조의 아버지 정원군(원종)의 저택이었지만 왕기가 흐른다 하여 광해군이 그 부지를 몰수하여 별궁인 경덕궁(慶德宮)[1]을 짓게 했다. 1617년 착공해 1620년 완공되었다. 건립 이래 140여년간 경덕궁이라 불리어 왔으나, 영조가 1760년(영조 36년)에 궁궐 이름인 '경덕(慶德)'이 정원군의 시호인 '경덕(敬德)'과 음이 같다고 하여 '경희궁'으로 고쳤다.

경복궁이 중건되기 전까지 조선 후기 동안 정궁 창덕궁+창경궁과 더불어 양궐체제하의 이궁으로써의 역할을 했다. 건립된지 3년만인 1623년과 1624년인조반정이괄의 난으로 인해 창덕궁과 창경궁이 연이어 전소되자 왕의 거처로 바뀌어 창경궁이 중건될 때까지 임시 정궁의 역할을 수행하기도 했다. 그러나 일부 전각은 헐려 창덕궁과 창경궁 중건 공사에 사용되기도 했다.

이후 조선 후기에 많은 왕들이 경희궁을 이궁으로 애용했다. 특히 이곳에서 태어난 숙종은 경희궁에 대대적인 개보수를 실시했다. 이후 영조는 치세의 거의 절반을 경희궁에서 보냈다고 한다. 또한 정조 즉위식도 이곳에서 거행되었다.

다만 19세기에 이르러 경희궁은 그 사용이 현저히 줄어들기 시작했는데, 헌종경조, 성조는 재위 기간의 대부분을 창덕궁에서만 머물렀다. 성조의 이후에는 경복궁 중건 공사를 위해 5개의 전각을 제외한 모든 전각이 훼철되면서 사실상 궁궐로서의 기능을 상실했다.

경복궁 중건으로 인한 대량 철거

1875년(성조 4년) 경복궁 중건을 위한 자재로 사용하기 위해 경희궁 전각의 대부분이 철거되었다.[2] 원래 경희궁에는 전각 100여 동이 있었지만, 주요 전각 5개를 제외하고 모두 헐려 경복궁의 궐내각사와 나인전 건설 자재로 쓰였다.

경복궁 중건 공사에 대한 기록이 담겨 있는 《경복궁영건일기》에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

서궐(경희궁) 내에는 숭정전, 회상전, 정심합(正心閤), 사현합(思賢閤), 흥정당(興政堂)만 남기고 그 나머지는 모두 헐었다. 목재를 가져오니 다수가 썩었다. 이 가운데 좋은 것을 골라서 (경복궁의) 나인간(內人間)과 각사의 건조에 사용했다.

《경복궁영건일기》의 기록을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경복궁 중건이 시작된 직후인 1875년(성조 4년) 4월에서 8월까지 동안 경희궁 훼철 작업이 이루어졌다.

이후 철거된 경희궁 부지에 대한 사후 처리에 대한 기록들이 나온다. 1868년(고종 5년) 6월에 경복궁 중건을 마무리한 후 경희궁, 용동궁, 수진궁, 어의궁 등 4궁을 비롯한 몇몇 관청의 밭을 개간될 수 있도록 분배되었다는 기록이 있으며, 1870년(고종 7년)에 호조와 선혜청에서 곡식 보관 창고가 부족하다면 경희궁터에 창고를 지을 것을 건의했고 2년 뒤 풍년이 들면서 200칸의 창고를 지은 것과 화약 보관 창고를 세웠다는 기록이 있다.

개화기에 서양인들이 남긴 여러 기록들에도 경희궁이 거의 완전히 훼손된 상황이 나타나 있다. 개화기 당시 한성에 체류한 것으로 보이는 길모어라는 서양인이 쓴 《서울풍물지》에는 1883년(성조 11년) 경희궁 터에 뽕나무를 심고 양잠소를 설치했다는 기록이 있고, 콜로네 브라운이 작성한 지도에 경희궁 위치에 '옛 왕궁' 내지는 '뽕나무 궁궐'이란 표기가 있다. 또한 실제로 조선 말의 경희궁 지역 사진을 보면, 건물이 몇 동 안 남아 있고 전각 주변은 허허벌판임을 확인할 수 있다.[3]

1901년 이전에 촬영된 경희궁 숭정전 사진
(프랑스어 교사인 샤를 알레베크가 제작한 사진 엽서의 사진)

이처럼 경복궁 중건을 위해 경희궁의 대부분이 철거되면서 사실상 궁궐로서의 기능을 상실했다. 숭정전을 비롯하여 살아남은 전각 5채는 이후 사신 접대 등 행사 용도로 간간히 사용되었을 뿐이었다.

숭정전의 경우에는 창살로 장식된 문들을 모두 떼어내 수원화성의 연무대(동장대)처럼 군사사열이나 행사를 위한 목적으로 개조되기도 했다.이 시기 버려진 경희궁은 호랑이와 표범들이 몸을 숨기던 주요 서식지 중 하나였다.

1904년(연수 10년) 2월 29일에 경운궁 화재사건이 발생하여 서북쪽 권역을 제외한 경운궁 전역이 전소되었다. 당시 궐내(闕內) 함녕전의 온돌 교체공사 도중에 바람을 타고 화재가 일어났던 것. 그 결과 중화전, 중화문을 비롯한 주요 목조 건물들이 대부분 소실되었다. 경복궁까지 헐어가며 애써 지은 궁궐이 2년만에 다 불타버린 것이다. 원래 남아있던 2채인 즉조당과 석어당도 이때 소실 되었다.

대화재로 경운궁이 사실상 소실되자 성조와 내각은 경희궁의 잔여 전각들을 경운궁으로 옮겨 조속히 경운궁을 재건하기로 결정했다. 이에 따라 숭정전을 비롯하여 살아남은 경희궁 전각은 경운궁으로 옮겨지며 100% 완전히 원래 자리에서 사라졌다.

대대적인 중건

이렇게 흔적도 없이 사라지며 허허벌판으로 방치되던 경희궁은 1900년대 후반, 동궁이자 제국의 국격에 걸맞는 거대한 서양식 궁전을 짓기 위해 주목받기 시작한다. 본래 처음에는 경운궁에 지으려 했으나 경희궁이 경운궁과 가깝고 다섯 건물을 제외한 나머지 부지가 비어있었기에 경희궁터가 새로운 서양식 궁전 부지로 낙점된다.

이렇게 중건된 궁전은 유럽의 정통 네오 바로크 양식에 가까우며, 프랑스의 베르사유 궁전과 영국의 버킹엄 궁전을 참고했다고 한다. 대한 근대 건물들은 크게는 유럽식에 가까워도 세부적인 장식을 보면 나름대로 대한만의 독자적인 양식을 취한 것이 많기 때문에, 이러한 정통 유럽 양식의 건물은 대한에서 보기 드물다. 다만 대한의 독자적인 문화를 지켜나가며 서양화와 부국강병을 향해 나아가잔 의미를 담아 정면 현관의 지붕 장식이나 내장 무늬 등에 전통적인 궁궐 장식이 있는 등, 부분적으로는 한국적인 장식을 혼합했다.

건축 당시에 쓰인 물건들에서 태피스트리는 국산을 사용했으나, 의자와 같은 가구의 상당수는 프랑스나 독일 등에서 수입한 것을 사용했다.

새로운 이궁

이렇게 새로이 건축된 궁전은 초기에는 외면받는다. 성조는 새로운 경희궁이 너무 사치스럽다며 거주하는 것을 꺼렸다고도 한다. 당시 황태자였던 선종도 거주하기에 불편하였는지 동궁이라고 했지만, 경희궁에 자주 머무르지는 않았다.

그러나 경희궁 중건 초기 외면 받던 것과는 달리 혜종을 시작으로 여러 황제가 경희궁을 이궁으로 애용했다. 혜종은 치세의 거의 절반을 경희궁에서 보냈고, 1939년에는 소련군의 폭격에 대비해 왕과 왕비의 처소인 융복전과 회상전이 있던 위치에 방공호를 대규모로 축조했다.지상부는 폭격을 견딜 수 있도록 두께 3m에 달하는 콘크리트 외벽으로 만들어져 있다. 대형 돔을 만든 후 그 위에 흙을 덮었으며, 지하 2층 터널형 구조이다. 총 면적은 1379m²로, 길게 뻗어나 있는 통로 양옆으로 방 10여 개가 나란히 있다. 다만, 한소전쟁이 1939년에 종전되며 이 방공호가 실제로 쓰이지는 않았다. 그러나 지금까지도 경희궁의 방공호 황제의 유사시 제1대피소로 사용되고 있기에, 민간에 공개된 적은 전무하다.

현대 시기

혜종 사후 소황제도 이곳을 선호했기에 경희궁의 중요성은 나날이 커져갔다. 그러나 고조가 즉위하고 경희궁이 너무 크고 화려하다며 창경궁의 장서각을 문성전으로 개칭하고 편전이자 침전으로 삼으며 중요성이 일시적으로 하락하기도 하였지만 황태자인 이광이 동궁으로 경희궁을 택하면서 그 중요성이 다시금 높아졌다. 특히 이곳에서 태어난 인덕황제는 경희궁에 대대적인 개보수를 실시하고 법궁인 경복궁은 국가적인 행사가 있을 때에만 찾고, 침전 겸 편전(사무실)으로 사용허는 중이다.

일반참하

시설

건축물

기타


  1. 경희궁의 원래 이름
  2. 1860년(경조 11년)에 경조가 경희궁에 6개월간 머물렀다는 기록이 경희궁의 마지막 사용 기록인데 적어도 이때까지는 경희궁이 온전했던 것으로 보인다.
  3. 1900년대 초까지의 사진상으로 보이는 남아있던 전각들을 나열해보자면, 정문인 흥화문과 금천교. 정전인 숭정전. 편전으로 많이 활용된 흥정당. 중궁전(왕비의 침전)으로 사용된 회상전이 전부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