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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슈코더르 공방전 ===
=== 슈코더르 공방전 ===
[[제1차 발칸 전쟁]]의 발발과 함께 [[10월 8일]], [[몬테네그로]]의 군대는 [[슈코더르]]를 공격한다. [[슈코더르 빌라예트]]의 [[발리]]인 [[하산 르자]]는 약 13,000명의 부대로 [[슈코더르]]의 방어를 담당했다. 에사드가 언제 [[슈코더르]]에 합류했는지는 학자들마다 주장이 다르나, 대부분은 10월 초에 1만 여명의 대규모 예비대와 [[엘바산]]에 위치했었고, [[10월 25일]]에 [[슈코더르]]로 합류했다고 봤다. 그러나 최근의 연구에 따르면 [[10월 25일]]보다 일렀으며, 부대의 규모는 1만 명보다 적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9월 중순 쯔음부터 부대를 조직하기 시작해 몇 주만에 [[두러스]],[[티라나]], [[카바여]], [[크루여]], [[시야크]] 등지에서 5,500여 명의 [[알바니아인]] 예비대를 모집했다. [[9월 27일]], 에사드는 부대를 이끌고 [[슈코더르]]로 가고자 했으나 카톨릭 성향이 다수인 [[자드리마]] 지역의 지도자들에 의해 저지되었다. 그들은 에사드가 [[슈코더르]]를 방어하기 위함이 아닌 북부의 기독교인들에 대항하기 위해 이동한다고 의심했다. 에사드는 그들을 패퇴시키면서 이동할 수 있었다. [[자드리마]]에 몇몇 대대를 남겨두고 [[10월 3일]], 에사드와 그의 부대는 [[슈코더르]]에 합류한다.


도시의 상황은 11월 중순부터 악화되기 시작했다. 몬테네그로군은 추가 병력을 투입했으며, 세르비아군 또한 합류했다. 포위는 4개월 가량 지속되었으며, 수비군은 [[콘스탄티니예]]의 지원군을 기대할 수 없었다. [[1913년]] 1월 말, [[알바니아인]]인 [[하산 르자]]는 [[슈코더르]]를 [[알바니아]]의 영토로 선포하고 [[알바니아의 국기]]를 계양하기로 결정한다. 이를 통해 [[슈코더르]] 주교의 기치 아래 싸우고자하는 고지대의 카톨릭 주민들을 도시 방어에 활용하고자 했다. 그러나 얼마 후인 [[1월 30일]], [[하산 르자]]는 의문의 죽음을 맞이한다. [[에디스 더햄]]의 설명에 따르면 에사드와 저녁 식사를 마치고 돌아가던 길에 에사드의 집으로부터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서 여성의 복장을 한 두 명의 암살자의 총을 맞아 사망했다고 한다. 암살으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아 에사드가 지휘권을 인수하고 그의 죽음에 대한 조사를 하지 않았다는 점에서 그가 [[하산 르자]]의 암살의 배후에 있다는 소문이 퍼졌다. 실제로 그의 보좌관 중 한 명은 그로부터 수 년 후 자신과 다른 이가 에사드로부터 암살을 의뢰 받았다고 증언했다. 암살의 이유는 명확하지 않으나, 그가 최소한의 피해로 도시를 방어해 내 유리한 평화 조건을 확보함과 동시에 [[슈코더르]]의 구세주로써 정치적 입지를 얻고자 했다는 생각이 있었다는 것이다. 에사드는 실제로 얼마지나지 않아 [[2월 6일]], 공격군의 공격을 성공적으로 격퇴하였다.
[[1913년]] [[3월 22일]], [[런던]]에서 합석한 열강 대표들은 [[슈코더르]]의 신생 [[알바니아]]의 일부가 되어야 한다고 결정했다. [[3월 28일]], 그들은 [[몬테네그로]]에 포위 공격을 중지할 것을 요구했고, [[몬테네그로]] 정부는 이에 대해 더욱 강력한 공세를 진행한다. 몇 주간 [[몬테네그로]] 정부는 열강의 요구를 무시했다.
에사드는 압도적인 열세와 식량 문제에 직면했기에 싸우는 대신 다른 해결책을 찾았다. 그는 빠르면 2월 말부터 [[슈코더르]]의 [[이탈리아]] 영사를 통해 [[몬테네그로]]와 비밀 협상을 진행한다. [[4월 8일]], [[몬테네그로 왕국]]은 그에게 응답했고, [[4월 21일]], 에사드는 몬테네그로군 사령관인 [[얀코 부코티지]]로부터 24,000여 명의 병력을 자유롭게 철수하는 대가로 [[슈코더르]]와 [[드런강]] 계곡까지의 영토를 [[몬테네그로]]에 넘겨줄 것을 요구했다. [[4월 23일]], 에사드는 이에 동의했고, [[얀코 부코티지]]는 그날 오후 3시에 [[슈코더르]]에 입성한다. 에사드와 그의 부하들은 몬테네그로군에 포대만 넘겨준 체 [[슈코더르]]에서 철수했다.
=== 알바니아 임시 정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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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년 10월 2일 (월) 22:29 판

 
에사드 톱타니
Esad Toptani
출생일 불명
출생지 오스만 제국 티라나
사망일 1914년 5월 18일
사망지 알바니아 공국 두러스
가문 톱타니가
부친 알리 톱타니
모친 바스피예 알리조티
종교 이슬람교

에사드 톱타니(알바니아어: Esad Toptani, 1863년 4월 혹은 1875년 ~ 1914년 5월 18일)는 오스만 제국의 군인이자 알바니아 공국의 정치인이었다. 발칸 전쟁 이후 중부 알바니아두러스를 중심으로 한 중앙알바니아 공화국을 수립했다. 이후 알바니아 공국에 등용되어 쿠데타를 조직하다 실패하고 국제 헌병대가 발포한 포탄에 의해 사망하였다.

알바니아 중부의 대지주 가문에서 태어난 에사드는 이후 1893년, 오스만 제국의 헌병 장교로 경력을 쌓았으며, 1908년에는 청년 튀르크당에 가입하여 콘스탄티니예에서 하원 의원을 지녔다. 1912년 10월, 제1차 발칸 전쟁에서 세르비아몬테네그로에 의해 포위된 슈코더르를 방어하다가 1913년 1월, 슈코더르의 방어를 담당하고 있던 하산 르자를 살해하고 퇴각 시 부대를 공격하지 않는 것과 후일 중부 알바니아의 야망을 지원하는 대가로 비밀 협상을 통해 4월에 도시를 몬테네그로에 양도한다. 이후 자신을 알바니아의 왕으로 선포했지만 1913년 7월, 이스마엘 체말리알바니아 임시 정부에 합류한다. 한 달 후, 알바니아 임시 정부에서 사임하여 중앙알바니아 공화국을 수립했다. 알바니아 임시 정부중앙알바니아 공화국의 갈등은 무력충돌로 발전하였고, 국제 통제 위원회가 중제하며 갈등은 종식된다.

알바니아 공국퍼르메티 정부에서 전쟁부장관내무부장관을 역임했다. 알바니아의 군주가 되고자 보스니아인 난민과 자신의 영지민을 무장시켜 쿠데타를 계획하였으나, 국제 헌병대스칸데르베우 2세의 개입으로 실패하였다. 이후 국제 헌병대두러스에 있는 그의 집을 포위하였고, 항복을 거부하다가 국제 헌병대의 포탄에 맞아 사망한다.

생애

탄생

에사드 톱타니는 알바니아 중부의 티라나에서 무슬림 지주 가문인 톱타니가의 알리 톱타니와 바스피예 알리조티 사이에서 태어났다. 출생일은 아직까지 논란으로 오랫동안 1863년으로 예상했다. 10년간 알바니아 수상의 생애를 연구한 롤랜드 카포쿠는 1863년 6월 13일로, 일리르 이코노미는 그보다 1년 후인 1864년이라 주장했다. 에사드는 알리 톱타니의 차남으로 태어났다. 그의 형인 가니 톱타니는 후일 콘스탄티니예의 궁전 근위대의 장교가 되어 술탄 압뒬하미트 2세의 경호원으로 근무했다. 가니 톱타니는 1898년 12월 21일, 서른아홉살의 나이에 하피즈 파샤란 인물에 의해 암살되었다. 에사드의 다른 형제인 베히드 톱타니는 오스만 제국의 장교가 되었다. 1913년, 에사드가 몬테네그로로부터 슈코더르를 방어할 무렵, 그는 이오아니나에서 그리스군과 맞섰다.

헌병 장교

에사드는 어린 시절 가정교사의 도움을 받아 공부했다. 1890년 대, 그의 부모님은 사망하였고, 그는 알바니아 중부의 10,000ha의 가문 재산을 관리하게 되었고, 연간 약 20만 프랑의 수입을 올렸다. 당시 오스만 제국은 부유한 지주 가문의 가장을 고위 공직이나 장교로 임명했기에 1893년, 에사드는 이오안니나 빌라예트의 헌병연대의 사령관이 되었다. 군 경력이 없었으나 1897년, 그리스-터키 전쟁에서 이오안니나 빌라예트를 성공적으로 방어해 명예훈장을 수여받고 얼마 지나지 않아 소장으로 진급했다. 1899년 새로이 임명된 이오안니나 빌라예트발리는 에사드와 관계가 악화되었고 1902년 9월, 발리가 그의 애인과 시간을 보낼 때 에사드와 그의 부하들은 그들을 체포하고 이슬람 도덕에 위배된다며 문책했다. 사건 이후 에사드는 재판을 받지 않고 알바니아 북부의 슈코더르로 발령되었다. 1902년 9월 15일, 그는 슈코더르 발리예트의 헌병 사령관으로 취임했다. 슈코더르 발리예트의 헌병 사령관이 된 에사드는 그곳의 헌병 조직을 정비하는데 힘을 썼다. 취임한 지 얼마 후인 1903년 2월 무렵, 그는 상부의 명령에 따라 미르디타 지역의 가톨릭 주민과 전투를 벌이고 있었다. 무력과 협상을 통해 반란을 진압하고 200여 명의 반군을 체포했다.

에사드의 근무지는 슈코더르였지만 그는 주로 그의 고향인 티라나에 거주했다. 그는 이전에 살던 집을 철거하고 더 크고 현대적인 코낙을 지었다. 영지에서 나오는 부를 티라나를 개선하는데 사용했다. 판자집을 헐어 새 집을 짓고, 거리를 확장하고 포장하며, 공공 위생을 개선하고, 두러스와의 도로를 현대화했다. 기존의 봉건적인 귀족들의 분노를 샀으나 영지의 농민들에게 농기구와 가축을 제공했으며, 때로는 소규모의 영지를 선물하기도 했다.

오스만 정계 입문

1908년 여름, 에사드는 청년 튀르크당의 승리 소식을 전해들었다. 그들을 지지한 대가로 자유를 얻어 콘스탄티니예로 건너가 청년 튀르크당에 가입했다. 1908년 12월 17일부터 오스만 제국의 하원에서 두러스의 의원으로 활동했다. 1909년 4월 12일에서 13일 새벽, 콘스탄티니예에서 술탄 압뒬하미트 2세의 전제정치를 복원하길 원하는 무장 반혁명이 일어났다. 청년 튀르크당은 2주 만에 반혁명을 격퇴했고, 4월 27일, 압뒬하미트 2세는 폐위되었다. 이때 에사드는 압뒬하미트 2세에게 직접 폐위 사실을 전하는 4명의 대표단 중 한 명을 맡았다. 이전까지 하원에서의 에사드의 발언을 본다면 그는 오스만주의로부터 결별하며 알바니아인의 민족 자결권을 지지했다. 1910년에는 라틴 문자의 도입과 이를 비준한 제2차 마나스티리트 회의를 지지했으며, 동년 12월에는 무력으로 알바니아인의 독립을 억압하던 콘스탄티니예의 정부를 공격했다. 그후 에사드는 청년 튀르크당에서 탈당했으며, 1911년부터는 야당 소속으로 활동했다.

1912년 1월 12일, 알바니아인 하원의원 이스마엘 체말리하산 프리슈티나알바니아 무장 혁명을 위해 콘스탄티니예에서 비밀결사를 조직했다. 에사드 또한 그의 동포와 함께 이 비밀결사에 참가했으며, 알바니아 중부의 자신의 영지 주민을 무장시켜 투쟁에 참여하겠다고 결정했다. 그 후 알바니아로 귀국한 에사드는 1912년 4월, 알바니아 봉기에 휘말린다. 그러나 오스만 제국의 내무부장관인 하즈 아딜 아르다의 대표단이 티라나에 방문하여 에사드와 협상하였다. 그들은 에사드가 봉기에서 손을 떼고 콘스탄티니예로 돌아온다면 전쟁부에 등용하겠다고 회유했고, 에사드는 봉기 참여를 번복하고 콘스탄티니예로 돌아갔다. 1912년 8월, 육군사령부로부터 슈코더르를 방어할 것과 예비 부대를 조직할 것을 명받은 에사드는 알바니아로 돌아간다.

슈코더르 공방전

제1차 발칸 전쟁의 발발과 함께 10월 8일, 몬테네그로의 군대는 슈코더르를 공격한다. 슈코더르 빌라예트발리하산 르자는 약 13,000명의 부대로 슈코더르의 방어를 담당했다. 에사드가 언제 슈코더르에 합류했는지는 학자들마다 주장이 다르나, 대부분은 10월 초에 1만 여명의 대규모 예비대와 엘바산에 위치했었고, 10월 25일슈코더르로 합류했다고 봤다. 그러나 최근의 연구에 따르면 10월 25일보다 일렀으며, 부대의 규모는 1만 명보다 적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9월 중순 쯔음부터 부대를 조직하기 시작해 몇 주만에 두러스,티라나, 카바여, 크루여, 시야크 등지에서 5,500여 명의 알바니아인 예비대를 모집했다. 9월 27일, 에사드는 부대를 이끌고 슈코더르로 가고자 했으나 카톨릭 성향이 다수인 자드리마 지역의 지도자들에 의해 저지되었다. 그들은 에사드가 슈코더르를 방어하기 위함이 아닌 북부의 기독교인들에 대항하기 위해 이동한다고 의심했다. 에사드는 그들을 패퇴시키면서 이동할 수 있었다. 자드리마에 몇몇 대대를 남겨두고 10월 3일, 에사드와 그의 부대는 슈코더르에 합류한다.

도시의 상황은 11월 중순부터 악화되기 시작했다. 몬테네그로군은 추가 병력을 투입했으며, 세르비아군 또한 합류했다. 포위는 4개월 가량 지속되었으며, 수비군은 콘스탄티니예의 지원군을 기대할 수 없었다. 1913년 1월 말, 알바니아인하산 르자슈코더르알바니아의 영토로 선포하고 알바니아의 국기를 계양하기로 결정한다. 이를 통해 슈코더르 주교의 기치 아래 싸우고자하는 고지대의 카톨릭 주민들을 도시 방어에 활용하고자 했다. 그러나 얼마 후인 1월 30일, 하산 르자는 의문의 죽음을 맞이한다. 에디스 더햄의 설명에 따르면 에사드와 저녁 식사를 마치고 돌아가던 길에 에사드의 집으로부터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서 여성의 복장을 한 두 명의 암살자의 총을 맞아 사망했다고 한다. 암살으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아 에사드가 지휘권을 인수하고 그의 죽음에 대한 조사를 하지 않았다는 점에서 그가 하산 르자의 암살의 배후에 있다는 소문이 퍼졌다. 실제로 그의 보좌관 중 한 명은 그로부터 수 년 후 자신과 다른 이가 에사드로부터 암살을 의뢰 받았다고 증언했다. 암살의 이유는 명확하지 않으나, 그가 최소한의 피해로 도시를 방어해 내 유리한 평화 조건을 확보함과 동시에 슈코더르의 구세주로써 정치적 입지를 얻고자 했다는 생각이 있었다는 것이다. 에사드는 실제로 얼마지나지 않아 2월 6일, 공격군의 공격을 성공적으로 격퇴하였다.

1913년 3월 22일, 런던에서 합석한 열강 대표들은 슈코더르의 신생 알바니아의 일부가 되어야 한다고 결정했다. 3월 28일, 그들은 몬테네그로에 포위 공격을 중지할 것을 요구했고, 몬테네그로 정부는 이에 대해 더욱 강력한 공세를 진행한다. 몇 주간 몬테네그로 정부는 열강의 요구를 무시했다.

에사드는 압도적인 열세와 식량 문제에 직면했기에 싸우는 대신 다른 해결책을 찾았다. 그는 빠르면 2월 말부터 슈코더르이탈리아 영사를 통해 몬테네그로와 비밀 협상을 진행한다. 4월 8일, 몬테네그로 왕국은 그에게 응답했고, 4월 21일, 에사드는 몬테네그로군 사령관인 얀코 부코티지로부터 24,000여 명의 병력을 자유롭게 철수하는 대가로 슈코더르드런강 계곡까지의 영토를 몬테네그로에 넘겨줄 것을 요구했다. 4월 23일, 에사드는 이에 동의했고, 얀코 부코티지는 그날 오후 3시에 슈코더르에 입성한다. 에사드와 그의 부하들은 몬테네그로군에 포대만 넘겨준 체 슈코더르에서 철수했다.

알바니아 임시 정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