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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1월 20일 (토) 08:34 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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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제국 | 대한제국/정치 | 대한제국/역사 |
상뎨(上帝)는 우리 황뎨(皇帝)를 도으소셔
셩슈무강(聖壽無疆)ᄒᆞ샤 ᄒᆡ옥듀(海屋籌)를 산(山)갓치 ᄊᆞ으소셔 위권(威權)이 환영(環瀛)에 떨치샤 오 쳔만셰(於千萬歲)에 무궁(無窮)케 ᄒᆞ소셔 상뎨(上帝)는 우리 황뎨(皇帝)를 도으소셔 "이화에서"는 "현대까지 대한제국이 존속한다면?" 이라는 상상을 바탕으로 만들어진 이브위키의 대체역사 세계관입니다. |
대한제국 황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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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조 태황제 관련 틀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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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제국 초대 황제 성조 태황제 | 聖祖 太皇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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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 1860년 12월 21일 | ||||||||||||||||||||||||||||||||
한성부 창덕궁 관물헌 (現 황성 한성부 창덕궁 관물헌 | |||||||||||||||||||||||||||||||||
즉위 | 1867년 11월 3일 | ||||||||||||||||||||||||||||||||
한성부 경복궁 근정전 | |||||||||||||||||||||||||||||||||
천붕 | 1910년 3월 23일 (향년 59세) | ||||||||||||||||||||||||||||||||
황성 한성부 경복궁 태극전 | |||||||||||||||||||||||||||||||||
능묘 | 홍릉(洪陵) | ||||||||||||||||||||||||||||||||
재위기간 | 조선 왕세자 | ||||||||||||||||||||||||||||||||
1862년 1월 9일 ~ 1867년 11월 3일 | |||||||||||||||||||||||||||||||||
조선 국왕 | |||||||||||||||||||||||||||||||||
1867년 11월 3일 ~ 1895년 10월 12일 | |||||||||||||||||||||||||||||||||
대한제국 초대 황제 | |||||||||||||||||||||||||||||||||
1895년 10월 12일 ~ 1910년 3월 23일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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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요
대한제국의 초대 황제. 휘는 엽(㒯)이며, 연호는 연수(淵雖), 묘호는 성조(聖祖), 시호는 태황제(太皇帝)이다.
14세(만 12세)에 보위에 올라 60세(만 59세)의 나이에 붕어하기까지 수많은 업적들을 남겼으며 특히 전쟁에 대해서는 활발한 정복 전쟁을 벌여 한국의 강토를 크게 확장시켰다. 성조가 즉위할 당시 만국의 변방에 불과했던 조선은 성조의 치세를 거치면서 강력한 국력과 군사력을 지닌 동아를 대표하는 열강인 대한제국으로 변모했다.
성조의 치세는 부국강병과 동시의 제도와 문화의 서구화가 빠르게 이루어지던 시기였다. 성조는 조선의 전제군주로써 대한제국을 통치했지만 전제군주제의 한계를 명확히 인식하여 황제를 보조하며 견제할 기관으로 내각과 제국의회[2], 헌법, 서구식 정당 정치를 도입했으며, 경조의 치세부터 서서히 진행되던 궁중의 서구화는 성조때에 이르러 그 정점을 이루었다.
'연수'(然淑)라는 연호는 성조가 황제로 재위했을 때 사용한 연호이다. 한국 근대사에서 가장 뛰어난 성군(聖君)으로 꼽힌다. 한국사에서 광개토대왕과 더불어 그 유례를 찾아보기 힘든 정복자이자, 한국사에서 아들인 현조와 함께 유일하게 대제라는 칭호를 붙여 부르는 군주이며, 아예 성조대제(大帝), 연수대제, 연수성제(聖帝)라고도 부른다.
생애
출생과 유년기
1860년(경조 11년) 12월 21일, 경조와 귀인 이씨 사이에서 태어났다. 14세(만 12세) 때인 1873년(경조 24년) 9월에 아버지 경조를 잃었다. 아명은 '재성(載星)'였다. 국왕으로 즉위한 뒤에는 항렬에 맞춰 '재황(載晃)'으로 개명했다가 피휘를 위해 '형(㷗)'으로 다시 개명했다.
성조는 어릴 적부터 이미 될성부른 떡잎을 보였다. 한번 잡은 책은 책이 닳아 없어질 때까지 읽었다고 한다. 이는 성조는 암송할 때까지 책을 지독하게 파고드는 습관이 있었기 때문인데, 이러한 습관 덕에 성조는 단군 이래 최고의 독서광으로 널리 알려져, 10살의 나이에 경조의 앞에서 경서를 비롯하여 경조 시대부터 유입된 서양 서적과 군사서적까지 방대한 분야의 책을 달달 외워 경조가 신하들에게 성조를 자랑했다는 일화는 유명하다.
특히 성조는 서양의 역사책 탐독을 좋아했는데 특히 러시아의 표토르 대제와 프로이센의 프리드리히 대왕에 깊이 매료되었고, 전쟁사의 탐독에 굉장한 흥미를 보이며 군사교리에 관심을 가졌다고 한다.
이렇게만 보면 성조 또한 전형적인 선비처럼 보이지만, 문무를 겸비한 제왕을 지향했기에 무예를 익히는데 열중하였다. 단순히 익히는데 그치지 않고 실력 또한 매우 유능하였다고 하며 정조와 더불어 지덕체를 모두 갖춘 황제라고 한다.
즉위와 어일신
아버지 경조의 이른 사망으로 12세의 어린 나이에 즉위하였다. 당시 조선은 15세가 되면 성년으로 보았는데 당시 모후인 철순장황후와 조모인 조대비가 살아 있었기 때문에 수렴청정이 가능했지만 성조는 즉위하자마자 대비전의 수렴청정을 건너뛰고 곧바로 친정(親政)을 했다. 이러한 사례는 조선 왕조에서 숙종의 친정과 함께 매우 특이한 경우에 해당한다. 이는 정통성을 떠나, 성조의 총명함과 결단력이 왕가의 어른들과 조정의 대신들에게도 모두 인정받았다는 뜻이기도 하다.
성조는 즉위 교서에서부터 변함없는 경장을 선포하였고, 실제로도 그렇게 했다. 1873년, 성조는 성년 남자의 상투를 자르고 서양식 머리를 하라는 내용의 단발령(斷髮令)을 반포하고 관복을 서양식 제복으로 교체한다. 당일부로 성조는 솔선수범하여 머리를 깎고 프로이센식 대원수 제복을 입기 시작했으며, 내무대신 박규수는 고시를 내려, 관리들로 하여금 칼과 가위를 가지고 도성 거리나 성문에서 백성들의 머리를 깎게 하여 이를 직접 지도감독했으며, 전국으로 확산시켰다. 그러나 신체발부는 수지부모라는 당대의 성리학자들의 격렬한 반발이 이어지고 지방에서는 단발에 호응하지 않자, 성조는 격분하여 군수삭발령이라는 새로운 규정을 공포하고 반발하는 선비들을 보부상을 동원하여 진압하는등 우악스럽게 단발령을 관철시키고 만다.
또한 1871년 보불전쟁으로 프랑스가 처참하게 패배하고 이에 감명을 받은 성조는 즉위 이후 서서히 프랑스식 군제를 버리고 프로이센식 군제를 도입한다. 1873년 전국을 6개 관구로 나눈 뒤 각 관구에 진대를 설치했으며 같은해 징병령을 선포하여 조선군의 전력을 강화시켰다. 또한 1885년에는 독일 육군 소령 야콥 맥켈을 위시한 독일 군사고문단을 초빙하여 독일군을 표본으로 삼아 조선 육군을 전면적으로 재조직했다. 조선 육군을 위해 강령과 조례를 만들고, 한성에 군사 학술원을 설립하였다. 성조의 애정어린 지원과 관심 하에 조선 육군 지휘부에 독일식 작전술을 적극적으로 도입했다.
1874년에는 왕실 사무와 국무를 분리하여 각각 궁내부와 군국기무처로 분리한다. 군국기무처는 어일신을 총괄하고, 서구식 제도를 수용하기 위해 설치되었다고 하지만, 실질적으로 의정부를 대신하는 새로운 권력의 중추였다. 이때 설치된 군국기무처의 수장은 총재이고, 총재의 산하에는 내부, 외부, 탁지부, 학부, 군부, 법부, 농상공부의 7개 부서가 설치되었고, 각 부서의 장을 대신이라고 하였다. 이는 훗날 대조선흠정헌법대강에 따라 대조선국 내각으로 개편되고, 오늘날 대한제국 내각의 전신이 된다.
성조 즉위 초기 이러한 사회, 군사, 중앙행정기관의 개편과 함께 여러 개혁이 급격하게 추진된다. 이러한 개혁의 주요 내용으로는 전통적인 '사농공상'의 구별을 폐지, 구 양반중 일부를 공족, 그 이외를 평민으로 하여, '사민평등'을 구가하는 한편, 새롭게 성장한 보부상이나 조정 관료 등을 새롭게 공족으로서 특권 계급으로 함과 동시에, 궁내부의 지배 아래로 두어 전제 왕권을 강화한다. 동시에 학제(学制) 개혁, 지조(地租) 개정, 그레고리력 채용, 사법 제도 정비 등이 있다. 다만, 이런 개혁은 급격하게 진행되었기 때문에 모순도 적지 않았고, 양반들과 농민의 불만을 사기도 하였다. 때문에 성조는 이를 막기 위해 기존의 포도청을 영국의 런던경시청을 모티브로 경시청으로 개편하여 이들 경시청의 경찰관과 보부상을 통해 철저하게 탄압한다.
또한, 같은 시기에 민간에서 이루어진 문명 개화의 움직임, 육식 보급과 철도 개통 등과 함께, 신시대 '연수'의 분위기가 양성되었다.
경제 산업분야에선, 부국강병, 식산흥업의 슬로건 아래, 도미오카 제사장을 비롯한 관영공장이 만들어지는 등, 정부 주도의 산업 육성이 시작되어, 서양식 공업 기술이 도입되었다. 금융제도에서도 통화단위로 '원'을 도입(1874년), 국립은행 조례에 의한 국립은행(내셔널 뱅크)을 거쳐, 통화 발행권을 독점하는 중앙은행으로써 조선 은행을 설립(1882년) 하는 등, 자본주의적 금융제도의 정비도 이루어졌다. 유통 분야에서는, 우편제도, 전신망의 정비, 철도 및 선박 운수(민간 우편 기선 경부 회사와 국책 회사인 대조선 물류 회사의 경합을 거쳐 대조선 운수 회사가 되었다.) 등의 정비가 이루어졌다. 이러한 자본 활동에는, 실직한 대신 녹봉을 얻은 공족의 자산에 의한 투자 활동도 배경에 있었다.
성조와 조정의 최대 목표는 구미 열강을 따라 잡는 것이기 때문에, 경조 시대에 체결된 불평등 조약 개정이 급선무로 여겨졌다. 영선사 사절단은 서구 여러 제도 조사도 목적이었지만, 조약 개정을 위한 사전 준비라는 면도 있었다. 실제로 교섭도 준비되었지만, 조선을 근대국가라고 보지 않는 구미제국은 상대가 되지 않았고, 아직 시기 상조였다. 그 때문에, 우선 국내정책의 측면에서 국민들이 가진 외국인에 대한 반감을 제거하기 위해 외국인에 대한 공격을 법령으로 금지시키고, 만국공법을 수용하였으며 외국인이 국내여행을 자유롭게 할 수 있도록 조치, 유럽화 정책 등여러 정책을 시도했지만, 조약 개정 자체는 반세기에 미치는 부단한 노력을 필요로 했다.
청과의 갈등
1884년 청불전쟁에서 청나라가 패배하며 다시 한 번 청나라의 취약함이 드러나자 영국, 러시아, 프랑스, 미국 등이 중국과 그 주변의 나라에 대하여 야심을 품기 시작하였다. 이 가운데 조선도 호시탐탐 청나라를 노리게 된다.
1888년 1월 1일을 기해 성조는 기존의 제후국 예법을 버리고 국왕이 아닌 대군주를 칭했고[3], 7월에는 동아시아 최초의 헌법인 대조선흠정헌법대강을 반포한다. [4] 이 헌법에서는 청나라의 연호인 광서가 아닌 대조선개국기원 연호를 사용했고, 국왕이 아닌 대군주라는 칭호를 사용하여 청나라를 자극했다. 청나라는 격분하여 조선 내각에 정식으로 항의하고, 조선도 이에 항의하며 양국의 관계과 악화되었다. 이후 청나라는 상무위원(사실상 공사)으로 위안스카이를 파견하여 사사건건 내정간섭을 시도하나, 조선에서의 간첩행위로 적발되어 페르소나 논 그라타로 추방되고 양국간의 관계는 병자호란 이래 최악을 맞이한다.
이렇듯 악화일로를 걷던 양국에 한 가지 폭탄이 떨어지게 된다. 1892년부터 청나라가 간도에 거주하던 조선인들에 대한 강경책을 펼치자 이에 저항하던 조선인들을 무참히 탄압하는 간도참변이 발생한다. 간도참변이 진행되던 1894년 조선 육군 1사단 2여단이 독단적으로 국경을 월경하여 길림장군 휘하의 청군을 궤멸시키고 간도의 정착촌을 해방시켰다.[5] 이른바 간도출병이었다. 성조는 간도출병으로 청나라의 군사력이 강하지 않고, 보불전쟁처럼 단기 결전으로는 할만하다는 자신의 생각을 굳혔고, 강경 노선을 천명한다. 이에 청나라는 격분하여 책임자의 주살과 사죄사의 파견, 조청상민수륙무역장정의 개정을 요구했으나, 조선은 만국공법에 따른 정당한 주권 행사라고 일언지하에 거절했다. 결국 청나라는 조선과 국왕인 성조의 죄상이 자명하다며 국경에 군대를 배치하기 시작했고, 조선은 이에 맞서 국교를 단절하고 청과 맺은 모든 조약을 파기하는 한편 자주국을 선포했다. 이로써 조선군과 청군과 사이에는 전운이 감돌았다. 그러던 중에 조선군이 풍도 앞바다의 청나라 함대를 기습 공격하며 본격적인 전쟁으로 이어졌다.
한편 1894년 조선의 외무 대신 김옥균과 주청 전권 공사 유길준 등은 청과의 개전을 위해 강경한 태도로 일관했으며 동시에 병력을 증원하였다. 이에 청나라도 위여귀가 이끄는 성군 6,000명과 마옥곤의 의군 2,000명을 국경에 각각 진출시켰다. 영국은 청나라의 부탁을 받기는 했으나 비밀 조약을 맺고 전쟁이 양쯔강 유역까지 확대되지 않는 것을 약속받았다.
한청전쟁
7월 25일 황해 아산만 부근 풍도(현재 행정구역 상 경기도 단원구 풍도동)에서 조선 해군이 청 해군을 기습 선제공격한다. 당시 청의 군함 2척(제원, 광을)은 텐진항을 출발하여 아산만으로 이동 중이었고 이 경로를 파악한 조선 군함 3척은 풍도에서 매복해 청군을 기다리고 있었다. 조선 해군의 포격을 받은 광을호는 도망가다 화약고가 폭발하여 좌초되고 제원호만 빠져나간다. 뒤이어 또 다른 군함 1척(조강)과 수송선(영국상선 고승)이 나타나 고승호는 격침되었고 조강호는 나포된다.
이 풍도 해전을 시작으로 7월 28일에는 국경에서 대기 중인 청군 3,500명을 명친왕이 이끄는 조선 육군 4,000명이 공격하여 청군은 500명이 전사하고 묵던으로 퇴각하였다. 8월 1일에야 양국은 동시에 선전포고했으며 곧이어 묵던에서 격돌했다.
묵던에서의 격돌 이후 양국 해군은 황해에서 맞붙었고, 조선군은 황해 전투를 당당히 승리했다. 이후 북양함대가 위해위에 틀어박히면서 조선은 전략적으로 승리를 거두었으며 이어지는 위해위 전투에서 북양함대를 궤멸시키는 데에 성공하면서 황해 해전은 조선군은 대승이 되었다.
이렇게 청군은 조선군에게 패전을 거듭했다. 명친왕의 제1군은 의주, 신의주를 거쳐 압록강을 넘어 단둥으로 진격해 요동 반도에 교두보를 구축했고, 한규설의 제2군은 화위안커우에 상륙하여 진저우, 다롄을 공격했고, 다시 여순(뤼순)을 점령했다. 뒤이어 개평과 잉커우까지 조선군이 점령하면서 요동 반도는 완전히 제압당했고, 조선군은 선양의 선양고궁을 점령하였다. 당시 성조와 군 수뇌부는 선양을 방문해 인묘와 효묘께 제사를 지내며 260여년만에 북벌을 완수함을 고했다.
다롄과 뤼순에서 청군의 활동은 졸전에 가까웠다. 청은 보하이만 통제의 핵심이라 할 수 있는 두 항구를 오랜 시간에 걸쳐 근대적으로 요새화했지만, 청군 지휘관들은 북양함대가 웨이하이웨이에 틀어박혀 해상 보급을 해주지 않는 상황에서 쉽게 두 요새를 내주고 퇴각했다. 그나마 뤼순에선 후퇴하지 못한 병력 1만이 항전했으나 하루만에 함락되었다. 이때 조선군은 청군에게 포로로 잡힌 조선군들이 처형되고 시신까지 처참하게 훼손된 것을 발견하고 이에 격양된 조선군은 뤼순에서 대규모 학살을 자행했고, 이때 조선군이 벌인 학살로 뤼순에선 군인과 시민 20,000여 명이 죽고 단지 40명만이 살아남았다고 영국의 타임즈지가 보도했다.
1895년 1월 19일 조선군은 위해 공격에 나선다. 청국의 북양함대는 청 육군과 호응하여 해상에서 육지의 조선군을 포격하였으나 조선 육군은 열흘에 걸쳐 청 육군을 쉽게 몰아내고 해안 포대를 점령했다. 조선 해군이 만의 입구를 봉쇄하자 청 해군은 항구 안에 갇혔다. 청 해군의 대응은 포위 상황임을 감안하면 졸전은 아니었으나, 그다지 인상적인 모습을 보여주지도 못했고, 결국 조선군에게 궤멸당했다. 정여창은 휘하 외국인 장병들이 항복을 촉구하며 반란을 일으키자 이를 해산시키고 음독 자살했다. 정여창 휘하의 장교인 유보섬, 황응양도 이때 자결했다. 조선군은 청국 함대 12척을 나포했는데, 이 중 1척은 정여창의 군인 정신에 대한 예를 표하며 그의 유체를 수송하는 데 사용하도록 돌려주었다.
청나라는 상군을 투입하였으나 전세는 기울어 상군도 패했고 결국 주화파 공친왕 혁흔이 총리가 되면서 화친 쪽으로 기울게 되었다. 결국 미국의 중재로 조선과 화친을 맺기 위해 호부 시랑 장음환과 호남 순무 소우렴을 히로시마에 파견한다. 그러나 장음환은 청나라의 전권 대사가 아니었기 때문에 성조는 이를 거부하였고 혁흔이나 이홍장이 직접 와야 한다고 요구하였다. 이 동안에 조선은 대만과 팽호 열도까지 점령하며 청나라의 목을 더욱 조여들었고 더 나아가 수도 베이징을 위협했다.
이후 강화 협상을 진행하여 4월 17일 전문(全文) 11개 조항의 강화 조약, 각 3조항의 의정서(議政書) 및 별약(別約), 2조항의 추가 휴전 협정을 체결하였다. 이 협정이 바로 제물포 조약이었다.
이 조약으로 청나라는 조선을 속방으로 규정하던 입장을 포기하고 조선을 자주국으로 인정했다. 또한 요동 반도, 간도, 대만과 그 부속 도서, 펑후 제도를 할양하였고 고평은 2억 냥을 7년 이내에 배상하기로 했다. 이를 당시 조선 화폐로 환산하면 3억 6천만 원으로 조선 정부 4년치 세입이다. 또한 조선 서구 열강과 같은 최혜국 대우를 받게 되었다.
그러자 러시아의 재무 장관 비테는 조선이 요동 반도를 점령하는 것은 러시아의 이익에 해를 끼치며 극동 평화를 위협하는 일이라고 주장하며 프랑스, 독일 제국과 연합하여 조선에 삼국간섭을 벌이며 압력을 가했다. 당황한 조선은 영국이나 미국에게 도움을 요청하였으나 반응이 없자 결국 압력에 굴복하고 만다. 그래도 요동 반도를 돌려주는 대가로 청나라로부터 하이난도 할양을 요구하려다 너무 멀어서 대신 은 3천만 냥을 추가로 뜯어냈다. 그리고 러시아, 프랑스, 독일은 요동 반도 반환에 대한 대가로 각종 이권을 차지하였다.
당시 실록에 따르면 성조는 러시아의 간섭에 격노하였고, 차마 들을 수 없는 말을 연발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성조가 다혈질이었지만, 그러한 상황에서도 이성적인 판단을 매우 중시하였던 것처럼 삼국의 간섭을 수용하고, 한청전쟁이 끝난지 채 반년도 되지 않아 러시아와의 일전에 대하여 준비하였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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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완전한 시호는 성조통천융운조극돈륜정성광의명공대덕요준순휘우모탕경응명입기지화신열외훈홍업계기선력건행곤정영의홍휴수강문헌무장인익정효태황제(聖祖統天隆運肇極敦倫正聖光義明功大德堯峻舜徽禹謨湯敬應命立紀至化神烈巍勳洪業啓基宣曆乾行坤定英毅弘休壽康文憲武章仁翼貞孝太皇帝이다.
- ↑ 다만 성조 시기 도입된 의회제는 귀족과두제와 유사한 모습을 보였으며 민주주의라고 보기엔 그 한계가 존재한다는 의견도 있다.
- ↑ 이때 '주상 전하'는 '대군주 폐하'로, '왕대비 전하'는 '왕태후 폐하'로, '왕비 전하'는 '왕후 폐하'로, '왕세자 저하'는 '왕태자 전하'로, '왕세자빈 저하'는 '왕태자비 전하'로, '전문(箋文)'은 '표문(表文)'으로 바뀌었다. 또 국왕의 자칭인 '과인(寡人)'은 '짐(朕)'으로 바꾸고, 대군주의 명령은 제후의 '교(敎/教)'가 아니라 황제와 마찬가지로 '칙(勅/敕)'이라고 부르게 하였다. 단 대군주라는 칭호에는 '왕'이라는 글자가 포함돼 있지 않지만 '왕' 자는 왕후, 왕태자 같은 표현에서 대군주와 관계되어 있음을 의미하는 글자로 계속 사용되었다.
- ↑ 정확하게 말하자면 대조선흠정헌법대강은 예비헌법으로, 입헌방침을 채택한 상황에서 완전한 입헌주의로 나가기 전에 우선 헌법상 기본적인 내용들을 미리 선언한 것이었기에 법문 끝에 대강이라는 말이 붙었다. 그러나 실질적으로 대한제국 헌법이 시행되기 까지 과도기적인 헌법으로써 기능했기 때문에 현대 한국에서는 이를 동아시아에서 최초일 뿐만 아니라 한국사를 통틀어서도 최초의 헌법으로 본다.이러한 주장에 동의하지 않는 사람들은 1895년에 반포된 대한제국 헌법을 동아시아 최초의 헌법이라고 본다. 다만 헌법의 내용이 본질적으로 크게 다르지 않아 해당 주장에 동의하는 사람은 많지 않은 편.
- ↑ 일설에 따르면 2여단의 출병은 이미 원수부에 통지되었고, 성조는 이를 청군의 전투력과 조선군의 성장을 확인할 기회로 여기고 적극적으로 지원했다고 하며, 전투에서 패배할 경우 책임을 질 준비를 하였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