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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unist 1968 (토론 | 기여)
Communist 1968 (토론 | 기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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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0년대'''
'''1950년대'''
* 1956. 시마구루미 투쟁 (島ぐるみ闘争) 발발. 오키나와현민 약 15만명이 모여 대규모 집회 가져. 미국 측은 국무장관이 직접 오키나와를 방문, 오키나와 국민들에게 사죄하고 보상하는 태도를 보여 민심을 잠재움. 그러나 동시에 뒤에서는 복귀 단체들을 탄압함.
* 1956. 시마구루미 투쟁 (島ぐるみ闘争) 발발. 오키나와현민 약 15만명이 모여 대규모 집회 가져. 미국 측은 국무장관이 직접 오키나와를 방문, 오키나와 국민들에게 사죄하고 보상하는 태도를 보여 민심을 잠재움. 그러나 동시에 뒤에서는 복귀 단체들을 탄압함.
* 1958. 진먼 포격적 → 중국의 승리. 진먼 섬을 중국이 점령함. 미국에서 대중(대공) 경계심이 확산, 오키나와를 미국의 항구적 기지로 사용해야한다는 여론이 높아짐
* 1958. 진먼 포격전 → 중국의 승리. 진먼 섬을 중국이 점령함. 미국에서 대중(대공) 경계심이 확산, 오키나와를 미국의 항구적 기지로 사용해야한다는 여론이 높아짐


'''1960년대'''
'''1960년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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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72년 대선에서 험프리 재선
* 1972년 대선에서 험프리 재선
* 1975년, 험프리 행정부에서 친미 어용 독립 정부를 성립시켰음. 일본에게 돌려주는것보다, 어용으로 남기는게 나을 것이라는 판단 하임 (군사적인 목적으로.)
* 1975년, 험프리 행정부에서 친미 어용 독립 정부를 성립시켰음. 일본에게 돌려주는것보다, 어용으로 남기는게 나을 것이라는 판단 하임 (군사적인 목적으로.)
* 일본은 이 조치에 반발, 일본 내에서 반미 정서가 확산. 다나카와 미키 총리가 미국과 트러블을 겪고 오키나와를 상대로 한 자위대의 도발이 있었음.
'''1980년대'''
* 독립 이후 점차 미국의 영향력은 줄어들었으나, 여전히 미국의 영향력을 많이 받음
* 일본 론 - 야스를 통해 오키나와의 독립을 인정하게 됨.
'''1990년대'''
* 대규모 반미 폭동의 발생 (대만 독립운동, 신페인과 비슷한 형태)
* 미군 군부대 철수 시작
* "미국도, 일본도 아닌 오키나와인" 민족 운동의 대규모 발흥
* 1990년대 후반에 우파 정당 소속으로 민족주의 성향의 인물이 집권해, 친미를 고수하면서도 민족주의 운동을 자극하였음 (반일 정서는 심해짐)
'''2000년대'''
* 2000년 대선에서 전후 최초로 좌파 성향 민족주의 정당이 집권. 오키나와 민족 운동의 본격화
'''2010년대'''


== 정치 ==
== 정치 ==

2022년 8월 23일 (화) 13:54 판

세계관 개요

오키나와가 일본으로 복귀하지 못함

오키나와가 독립하여 "류큐 공화국"으로 존속하였음

이브위키를 풍성케 하기 위한 오리지널 세계관

세계관 명칭

디자인

외주에 맡길것이다.

역사

  • 1946.01.29. 이즈 제도 반환
  • 1952.02.10. 도카라 열도 반환
  • 1953.12.25. 아마미 제도 반환
    → 미국 정부의 폭거로 인해 아마미의 경제 사정 악화, 독립 요구 여론 폭증
    미국 정부는 류큐의 경제를 발전시키고 민심을 자국으로 돌리기로 결정하였음.

1950년대

  • 1956. 시마구루미 투쟁 (島ぐるみ闘争) 발발. 오키나와현민 약 15만명이 모여 대규모 집회 가져. 미국 측은 국무장관이 직접 오키나와를 방문, 오키나와 국민들에게 사죄하고 보상하는 태도를 보여 민심을 잠재움. 그러나 동시에 뒤에서는 복귀 단체들을 탄압함.
  • 1958. 진먼 포격전 → 중국의 승리. 진먼 섬을 중국이 점령함. 미국에서 대중(대공) 경계심이 확산, 오키나와를 미국의 항구적 기지로 사용해야한다는 여론이 높아짐

1960년대

  • 1960. 시마구루미 투쟁에서 자신감을 얻은 오키나와현민들에 의해 오키나와 조국복귀협회(복귀협; 후키쿄 沖縄県祖国復帰協議会)가 출범했음.
    본 역사에서는 초당적인 협력을 얻은 단체였으나, 미국 정부의 이간질로 인해 일부 보수 단체만이 지원. 또한 사쿠라들이 폭탄 테러를 일으키는 등 과격 행보로 미군은 잘못됐지만 독립운동은 너무 과격하다는 여론을 조성시키는데 성공함 (민족분열통치)
  • 베트남전쟁 발발(1964~1970). 린든 B. 존슨, JFK는 贊전파로 오키나와 반환에 소극적 태도 보임. 이때까지 오키나와의 역할은 "불침 항모"
  • JFK 행정부에서는 오키나와 독립을 저지하기 위해 정치 공작을 일으킴. 친일 성향의 교원노조(오키나와 반환 여론 형성에 중추적 역할)에는 미국의 사쿠라를 보내서 분쇄시킴
  • 오키나와 내 민심 안정 작전. 오키나와 사대당 등 극좌 성향 반미와 극우 성향 반미를 동시에 탄압, 친미 보수 및 리버럴을 지원했음 (오키나와의 리버럴 운동은 조금 찾아봐야할듯.) 확실한건 사대당과 인민당 등 좌파 정당들은 힘을 잃을 것임
  • 美 국무부는 일본의 잔학 행위를 널리 알리며(1945년 전쟁으로 인구 1/4이 사망), 오키나와 내 반일 성향을 가진 일부 단체들을 지원하였음
  • 1968년 초대 주석 선거에서 선거 공작을 통해 복귀협의 지원을 받았던 야라 조뵤 屋良朝苗 낙선. 반환에 신중론~회의론이었던 니시메 준지 西銘順治 오키나와 민주당 후보가 51.9% 대 48.1%로 당선됨
  • 1968 미국 대선 - 휴버트 험프리 275 : 리처드 닉슨 235 : 조지 월러스 28로 험프리 勝. 베트남 즉각 철수 이행
  • 미국 정부는 베트남 철수를 감행 -> 오키나와의 중요성 감소. 그러나 진먼의 중국 점령으로 인해, 양안 관계가 복잡해졌기 때문에 일본에게 오키나와를 건넬 수도 없겠다고 생각하게 되었음

1970년대

  • 1972년 대선에서 험프리 재선
  • 1975년, 험프리 행정부에서 친미 어용 독립 정부를 성립시켰음. 일본에게 돌려주는것보다, 어용으로 남기는게 나을 것이라는 판단 하임 (군사적인 목적으로.)
  • 일본은 이 조치에 반발, 일본 내에서 반미 정서가 확산. 다나카와 미키 총리가 미국과 트러블을 겪고 오키나와를 상대로 한 자위대의 도발이 있었음.

1980년대

  • 독립 이후 점차 미국의 영향력은 줄어들었으나, 여전히 미국의 영향력을 많이 받음
  • 일본 론 - 야스를 통해 오키나와의 독립을 인정하게 됨.

1990년대

  • 대규모 반미 폭동의 발생 (대만 독립운동, 신페인과 비슷한 형태)
  • 미군 군부대 철수 시작
  • "미국도, 일본도 아닌 오키나와인" 민족 운동의 대규모 발흥
  • 1990년대 후반에 우파 정당 소속으로 민족주의 성향의 인물이 집권해, 친미를 고수하면서도 민족주의 운동을 자극하였음 (반일 정서는 심해짐)

2000년대

  • 2000년 대선에서 전후 최초로 좌파 성향 민족주의 정당이 집권. 오키나와 민족 운동의 본격화

2010년대

정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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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한 매체

한국측 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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